소설리스트

80화 (80/90)

* * *

방울토마토 화분에 물을 주고서 도웅은 영호와 나란히 구석 테이블에 박혔다. 자몽을 다듬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작은 칼을 하나씩 들고 자몽 껍질을 분리해 볼에 담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때, 누군가 오더 테이블에서 사장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웅은 나서지 않고 상체만 옆으로 기울어 누군지 확인했다.

까만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익숙한 남자였다. 도웅은 손을 들고 남자를 불렀다.

“어이, 나 씨. 나 여기 있어.”

고개를 돌려 도웅을 확인한 나윤은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테이블로 걸어왔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래?”

어희와 비슷하게 나윤도 늘 밤 시간대에 찾아왔었다. 다만 나윤의 경우에는 바빠서였으나 도웅은 괜히 본인에게 낮 시간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건 아닌지 짧게 의심했다.

“자몽? 나는 자몽 별로던데.”

친근하게 영호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은 나윤은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렸다.

“응, 안 물어봤어. 웬일이냐니까.”

테이블 한쪽에 놓인 라텍스 장갑을 꺼내 낀 나윤은 묵묵히 자몽 손질을 도왔다.

“지난번 유리창 깬 또라이는 잡았어?”

“아직. 슬슬 연락 올 때 됐는데.”

“일 처리가 늦네. 너 그때 장난 전화? 오는 건 이제 안 오고?”

나윤의 물음에 도웅은 무심하게 “응.”하고 대답했다.

“언제부터 안 오는데?”

“유리창 깨진 날부터?”

“…….”

“그냥 잘못 건 전화였나 봐.”

무덤덤하게 말을 이으며 자몽 속껍질을 까는 도웅을 힐끔 바라본 나윤은 뜬금없이 옆에서 겉껍질을 까는 영호를 팔꿈치로 가볍게 찔렀다.

“저기요. 삼사일 간 같은 번호로 전화가 오고 타이밍이라도 잰 듯 사건 후에 뚝 끊겼는데 이게 장난 전화나 잘못 걸린 전화 같나요?”

영호는 사장 도웅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절대요.”

짧은 답변을 내놓았다. 나윤은 손등으로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추켜 올렸다.

“봐. 너만 태평해, 인마.”

“경찰에 신고도 했고 더 할 게 남았나? 밤마다 카페 불침번 서는 것도 웃기고.”

“그건 또 그래.”

순순히 인정한 나윤은 자몽 껍질을 한곳으로 모았다.

“키위나 멜론은 없어? 난 그런 상큼하고 단 과일이 좋더라.”

“과일 먹고 싶으면 과일 가게 가서 사 먹지, 왜 카페에 와서 과일을 찾아?”

“그것도 그래.”

싱겁게 긍정을 한 나윤은 다시금 자몽 속 껍질을 깠다.

햇볕이 한 줌도 닿지 않는 구석진 테이블에서 나윤과 함께 자몽을 까고 있는 상황이 신기했다. 이 멤버에 어희까지 합류한다면 도웅은 사진을 찍었을지도 몰랐다.

자몽 세 개를 까는 잠깐의 시간 동안 테이블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른 테이블의 대화 소리가 낮게 흘러들어왔다. 회사 미팅 이야기 같았는데, 의견 차이가 생긴듯했다.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도웅을 나윤이 불렀다.

“웅아.”

“소름 돋아.”

성을 빼고 외자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도웅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부탁할 게 있어서 친한 척 불러봤다.”

“한 번 더 그렇게 부르면 아예 듣지도 않을 거야.”

마지막 자몽 껍질을 벗겨낸 도웅은 장갑을 벗었다.

“부탁이 뭔데?”

“여기서는 좀 그렇고.”

“그럼 네가 좋아하는 키위 줄 테니까 이쪽으로 와.”

자몽 알맹이가 담긴 양은 볼을 챙긴 도웅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설탕과 꿀을 섞은 뒤 양은 볼을 랩으로 밀봉해서 냉장고에 넣은 도웅은 키위 두 개와 바나나를 꺼냈다.

“무슨 부탁인데~”

“너 칼 내려놓으면 그때 말할래.”

오늘따라 가리는 게 많다. 보기 좋게 껍질을 까서 조각 내주려던 도웅은 무성의하게 키위를 반으로 뚝 갈라 스푼을 건넸다.

“됐지?”

“응. 지금 내가 일하는 호텔에 디저트 파트가 비는데 혹시 나흘만 도와주면 안 돼?”

예상보다 별거 아닌 부탁에 김이 샜다. 방울토마토 하나를 똑 따먹은 도웅은 머리통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응. 안 돼.”

“너무 단칼이다.”

나윤은 시무룩한 분위기로 열심히 키위 반쪽을 스푼으로 긁어먹었다.

“그럼 이제 두 번째 부탁.”

“부탁이 또 있어?”

“레스토랑 하나 열건데, 디저트는 너희 카페에서 주문해도 되냐?”

“…되겠냐.”

가끔 받는 커스텀 케이크 주문도 슬슬 귀찮게 느껴지는 요즘 디저트 납품까지 덥썩 물기에는 건이 너무 컸다.

“옛날 같았으면 받았을 텐데, 나도 요새 바빠.”

바쁘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디저트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희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도웅은 진지하게 어희를 만나는 중이었고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괜히 일을 크게 벌이고 싶은 욕심은 없었다.

“그럼 세 번째 부탁도 거절이겠네.”

부탁을 세 개나 들고 온 나윤의 뻔뻔함에 도웅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궁금하니까 들어는 볼게.”

“으으으음.”

바나나를 우물우물 먹으며 길게 고민스러운 신음을 흘린 나윤은 꿀꺽, 목울대를 한 번 넘기더니 턱에 걸고 있는 마스크를 도로 썼다.

“별 건 아니고 보스턴에 베이커리 가게 하나 오픈하려는데 너한테 부탁할까 했지.”

마치 요 앞에서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다는 듯 평이한 어조였다. 하마터면 방울토마토가 목에 걸릴 뻔했다. 도웅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기침을 터트렸다.

“콜록, 콜록! 아니, 보스턴? 미국 보스턴?”

“보스턴 테리어는 아니겠지.”

재미없는 말장난을 한 나윤은 손을 개수대에 손을 씻었다.

“너 대체 가게를 몇 개나 여는 거야?! 다 감당할 수는 있고?”

“일단 초반에 자리만 탄탄하게 잡으면 되니까. 파인다이닝은 그냥 홍보용이고 나머지가 진짜 돈벌이 수단이지 뭐.”

웬만한 셰프의 로망인 파인다이닝을 단순히 홍보용이라고 말한 나윤은 키친타올을 뽑아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외국에 가게를 턱 턱 낼 정도로 네가 부자였던가.”

나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마스크 밖으로 새어 나왔다.

“돈 벌려고 투자금 좀 받았지. 엄청난 팬이 있거든. 여하간 보스턴에 봐 둔 터는 기존 가게가 빠지려면 반년은 더 걸릴 테니까 나중에라도 생각 있으면 말해줘. 네 빵 맛있더만. 처음 먹은 날에 홀랑 납치해갈 뻔.”

“투자금 회수 못 하면 너 막…, 장기 하나 없어지고 그런 건 아니지?”

장기 하나로 해결되지 않을 거 같다. 걱정스러운 시선에 나윤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당연히 아니지. 아무튼, 당분간 다시 바빠져서 시간 내기 어려우니까 연락해. 과일 잘 먹었어.”

“어, 어어. 잘 가.”

대학 동기가 커다란 호텔의 헤드 셰프를 맡을 만큼 성공한 건 알았다. 가끔 보는 요리 프로그램에서 드문드문 얼굴을 내비칠 때마다 소개 멘트에 항상 처음으로 붙는 수식어였으니까. 그러나 벌써 다른 가게를 여러 개 낼 계획을 꾸리고 있다는 건 의외였다.

“이야. 대단하네.”

파인다이닝부터 해외에 가게 오픈까지 투자금을 끌어오는 것도 능력이었기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윤의 예상대로 세 번째 부탁도 거절이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올 즈음 카페로 들어온 어희 주문에 맞춰서 메뉴를 준비했다. 디저트 먼저 담으려던 도웅은 뒤늦게 블루베리 푸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해이해졌나.”

그간 카페에 관심을 많이 못 쏟았다 하더라도 메뉴 체크도 하지 않은 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사랑과 일을 모두 잡으려는 욕심은 없었기에 카페 일은 현상 유지만 하려 했다. 그러나 비어버린 푸딩을 보자 유지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푸딩을 대신할 다른 디저트를 챙긴 도웅은 전동 킥보드를 타고 로얄 골드 펠리스로 향했다.

적당한 바람에 단정한 이마가 드러났다. 도웅은 간만에 울적함을 느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새 메뉴 개발을 하지 않은지 몇 개월이 흘렀다.

-띵동.

벨을 누르자 현관문 앞에서 기다린 것처럼 어희가 냉큼 문을 열었다. 종이가방을 받아든 어희는 시무룩하게 축 처진 도웅을 보고는 눈동자를 또르륵 굴렸다.

“음…. 무슨 일 있습니까?”

“푸딩이 없어서….”

“…….”

“무화과 요거트 가져왔어요.”

“예. 잘 먹겠습니다.”

그다지 상관없어 보이는 어희의 반응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모이는 도웅의 미간을 어희가 손끝으로 살살 문질러 펴주었다.

“무슨 일 있군요.”

확신에 찬 어조에 고집이 들 법했으나 도웅은 얕은 한숨과 함께 그렇다고 대답했다.

“들어와요.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럴까요?”

선뜻 집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도웅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이해졌다면서 또 자연스럽게 어희의 집에 들어가려 했다는 사실을 자각한 탓이다.

“아녜요. 그냥, 혼자 생각해볼까 해요.”

어차피 오래 가지 않을 고민이란 걸 알고 있었다. 금방 해결될 만한 고민을 굳이 어희에게 털어놔서 그의 마음마저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선 도웅은 덜컥, 팔이 붙잡혔다.

“같이 생각하면 안 됩니까? 궁금해서 그럽니다.”

“안 될 건… 없죠.”

결국 어희의 집에 발을 들여놓은 도웅은 소파가 아닌 식탁 의자에 앉았다. 

종이 가방 안에서 커피와 디저트들을 꺼내 식탁에 옹기종기 모아놓은 어희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는 내려놨다.

“이제 말해도 될까요?”

포토타임이 끝나기를 기다린 도웅이 허락을 구했다.

“예. 얼마든지요.”

“사람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다 잘할 수는 없잖아요. 있기야 하겠지만, 일단 저는 아니거든요. 몸은 하나니까. 그래서 카페 일은 지금 이대로 유지만 하고 연애에 힘 써보려 했어요.”

말문을 열고 술술 털어놓기 시작하는 도웅을 물끄러미 바라본 어희는 텀블러에 빨대를 꽂고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블루베리 푸딩이 없는 거예요. 블루베리 푸딩이.”

푸딩과 원수사이라도 된 듯 몇 번이나 블루베리 푸딩을 강조한 도웅은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울적함을 토로하는 지금 미용실에서 한 번 머리카락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도 제대로 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울적해졌어요. 어희 씨 때문에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희의 생각을 사전에 차단한 도웅은 핸드폰을 꺼내 미용실을 예약했다.

“저 머리 자르러 갈 건데 어희 씨도 갈래요? 예약하는 김에 같이 하게요.”

“저는 괜찮습니다.”

쪽, 빨대를 빨아들여 커피를 마신 어희는 텀블러를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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