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90)

결국 어희는 경찰서 밖에서 기다리기로 결정하고서 둘은 함께 집을 나와 경찰서로 향했다.

입구에서 신분 확인을 끝내고 혼자 안으로 들어간 도웅은 수사관보다 제리의 얼굴을 먼저 알아채고 가까이 다가갔다.

“야, 제리야. 이게 뭐야.”

반소매 셔츠를 입어도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에 무슨 중범죄자처럼 검은색 두툼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인 제리의 어깨에 손을 올려놨다.

“네가 왜…….”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인물이다.

“아. 건들지 마요.”

어깨를 짚은 도웅의 손을 거칠게 떨쳐낸 제리를 무시하고 수사관은 책상에 종이를 올려놨다.

“여기 블랙박스 사진이랑 공중전화 기록, CCTV 사진이요. 본인 말로는 사장님이 자꾸 일 시키니까 짜증 나서 그런 짓을 했다고 하는데…. 뭐, 합의 보고 끝내시겠어요?”

영 못 미더운 눈빛으로 제리를 쳐다본 수사관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하는 도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일을 많이 시켜서라고?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개도 안 믿을 변명을 한단 말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으나 장소가 좋지 못했다.

“네, 네…. 아는 사이인데 그래야죠. 합의 볼게요. 얘 데리고 가도 되나요?”

사건 종결에 동의하냐는 사무적인 질문에 도웅은 전화를 받았을 때처럼 네, 네만 반복했다. 아직 20대 초반이 전과가 남으면 곤란했기에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일단 제리를 데리고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 도웅의 손을 쳐낸 건 다름 아닌 제리였다.

“합의 안 봐요. 그냥 벌금이든 징역이든 알아서 할 테니까 이거 놔요.”

의자에서 일으키는 손을 뿌리치려 한 것인지 제리는 팔을 허공에 힘껏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웅은 손에 힘을 주고 제리를 일으켜 세워 끌고 나왔다.

“아, 합의 필요 없다니까!”

기어이 생떼 같은 고함을 치는 제리다. 도웅은 기가 찬 숨을 내뱉었다.

“야. 누가 보면 네가 피해자인 줄 알겠어. 좀 나가서 이야기하자.”

죄를 지은 건 제리, 이 녀석인데 왜 자신이 이렇게 전전긍긍하는지 모를 일이다. 속 썩이는 사춘기 동생이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한 대 때리고 싶었다.

힘으로 질질 끌고 경찰서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희가 도웅의 손을 떼어냈다. 빈말로도 상냥한 손길이라고 보기 어려운 만큼 제리의 후드 집업의 지퍼가 절반이 내려갔다. 여름 날씨에 음침하게 덮어쓴 후드를 뒤로 젖힌 제리는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어희 씨, 잠깐만요. 나 얘랑 할 말 있어요.”

단호한 어조에 도웅의 팔을 꽉 붙잡고 있던 어희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손목을 잡았다.

이것도 양보를 한 건가…? 긴가민가하다. 옆으로 새는 생각을 붙든 건 자리를 피하려는 제리였다. 도웅은 급히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너 뭐야? 어딜 그냥 가? 제대로 설명해야지.”

수사관에게 얘기 한 동기가 거짓말이란 건 당연했다. 세상 어느 직원이 일을 많이 시킨다고 가게에 돌을 던지고 사람을 스토킹하듯 전화까지 걸면서 괴롭히겠는가. 아니 꼭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도웅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을 거라 믿었다.

“태도는 그게 또 뭐야. 전과 안 생기게 도와준 사람한테.”

이제는 제 직원도 아닌 제리를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었으나 벌금이든, 기소유예든 최대한 검찰까지는 넘어가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누가 도와달라고 했어요? 억지로 끌고 와서는. 됐어요. 저 진짜 사장님하고 말 섞고 싶지도 않거든요.”

“어…, 너 다시 일하고 싶었다며.”

“당연히 거짓말이죠.”

답답하다. 이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태도란 말인가. 도웅은 한숨을 삼켰다.

“가요, 어희 씨.”

도웅은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어희를 데리고 돌아섰다.

정신이 없어서 미처 몰랐는데 손목을 잡은 어희의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놀라 어희를 올려다보려는 그때였다.

“진짜 더러운 짓 해놓고 당당한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조소가 담긴 제리의 비아냥이 뒤통수에 박혔다.

“더러운 짓? 그건 또 무슨 소리래. 너한테 그런 소리 들을 만큼 못 살진 않았어.”

눈살을 찌푸린 도웅이 툭, 말을 내뱉기 무섭게 제리가 위에 걸친 진갈색 후드 집업을 벗어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어희가 민첩하게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얼굴에 맞을 뻔했다. 몰상식한 행동에 도웅의 언성은 보다 높아졌다.

“너 뭐 하는 거야? 아까부터, 아니 전부터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건데?”

경찰서 앞에서 장성한 남자 셋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상황은 지나가는 시민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도웅 씨, 가죠. 무시하고 가요.”

만류하는 어희의 목소리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아까부터 잡지 말라니까, 왜 자꾸 쳐 잡냐고요, 존나 더럽게. 같은 남자끼리 붙어서 뭐 하는 거예요? 당신들처럼 징그러운 짓하는 사람들 정신병원에 가둬놔야 하는데, 부모님은 알고 있어요? 네? 거기 그쪽이 말해봐요.”

“이야….”

우수수 쏟아지는 욕설과 짜증에 도웅의 입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솔직히 충격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앞에 대고 혐오스러운 말을 쏘아대는데 멀쩡하면 그게 이상하다. 다만 충격이 발끝부터 서서히 올라오려는 찰나 손목을 잡고 있는 어희의 손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거기서 멈췄다. 딱 발끝만 움찔할 정도에서.

“어희 씨. 쟤 내가 아까 터치해서 더럽다고 집업 벗은 거 맞죠?”

“…….”

“지금 입고 있는 반팔이나 바지까지 골고루 만지면 길거리에서 다 벗으려나.”

“…….”

감정을 보는 어희가 받았을 충격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도웅은 괜히 너스레를 떠느라 올린 입매를 내렸다.

“그만하고 갈까요?”

제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또 누가 알고 있는지, 하다못해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대거리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어희를 옆에 두고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죄인이라도 된 듯, 한 손으로 눈가를 덮고서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어희만 걱정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구역질 난다느니 좆같다느니 물꼬가 트인 제리의 발광은 계속되었다.

“아휴, 가요. 내가 이끌어 줄 테니까 잘 걸어요.”

얼마나 꽉 잡고 있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서 하얗게 질린 손으로 어희의 길잡이 노릇을 해주었다. 불쾌한 상황에서도 도웅은 제 손이 꼭 목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걸어서 오가도 충분한 거리를 택시를 잡아타고 어희의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공동 현관을 통과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상황에서도 어희는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을 숨기려던 도웅은 어차피 어희가 손을 내리고 자신을 본다면 감정을 볼 게 뻔했기에 굳이 숨기지 않았다. 24층부터 내려오는 숫자를 멀거니 올려보고 있을 때 옆에서 도어락 해제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빼꼼히 열렸다. 도웅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옆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아저씨, 아저씨.”

1층에 사는 꼬마였다. 도웅은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손에 잡히는 간식은 없었다. 힘없는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아저씨 기다려요.”

기다려? 왜?

이유를 묻기도 전에 꼬마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눈을 끔벅이며 닫힌 현관문을 보고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버렸다.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만히 서서 고민하던 도웅은 혼자도 아니고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람과 함께였기에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했다.

네모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32층을 누르자 도어락 해제와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도웅이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빼꼼히 머리를 내밀었다.

250ml짜리 작은 우유를 한 아름 안고 있는 꼬마는 바닥에 떨어진 바나나 우유를 줍고 있었다. 바나나 우유를 주우면 안고 있는 다른 우유를 떨어트렸다.

“어희 씨. 손 좀 놔봐요.”

여태껏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어희의 손을 가볍게 탁탁 쳤다. 어희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온 도웅은 하나를 주우면 다른 하나를 떨어트리는 행동을 반복하는 꼬마에게 다가가 대신 우유 한 팩을 주워 맨 위에 올려놨다.

“아저씨, 우유 마셔요.”

“나 마시라고? 집에 있는 거 함부로 빼돌리면 엄마한테 혼나, 너.”

“예전에 엄마가 아저씨 주라고 했어요.”

“우유를?”

“실은… 과자가 있었는데 없어요.”

꼬마는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이어붙였다.

“아저씨 기다리면서 내가 다 먹었거든요.”

“아. 나도 과자 먹고 싶었는데.”

도웅이 아쉬워하자 꼬마는 발꿈치를 들어 안고 있는 우유를 들이댔다. 과자 대신 우유를 마시라는 거 같아서 도웅은 딸기 우유와 초코 우유를 골랐다.

“흰 우유는 없어? 아저씨는 흰 우유가 좋은데.”

도웅의 우유 투정에 꼬마는 목구멍이 훤히 보일 만큼 크게 웃었다.

“저는 흰 우유 싫어해요. 다 마셔도 돼요.”

“두 개면 돼. 고마워, 잘 마실게.”

어희는 어떤 맛을 더 좋아하려나….

도웅은 고민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어…?”

1층에 있어야 할 엘리베이터는 30층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새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올라가다니. 정 없다, 정 없어.

꼬마와 작별 인사를 하고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 커플이 나왔고 구석에서 찌그러져 있는 어희를 발견한 도웅은 상황도 잊고 실소를 터트렸다.

“뭐야, 올라갔다 왔어요?”

얼굴을 덮은 손을 내린 어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냉큼 올라타 32층을 누른 도웅은 곁눈질로 어희를 힐끔 살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물기는 없었다.

“우유 받았어요. 딸기랑 초코 있어요. 무슨 맛 먹을래요?”

“…별로, 생각 없습니다. 도웅 씨 마셔요.”

아래로 축 처져 있는 어희의 손에서 제일 기다란 손가락 세 개를 슬쩍 잡은 도웅은 층수를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신경 쓰지 말아요.”

“예….”

“괜찮아요? 안색 엄청 안 좋은데.”

아. 32층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도웅은 텅 빈 제 손을 죔죔 쥐며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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