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벽면에 힘없이 머리를 기댄 그를 넌지시 부르자 마른세수를 한 어희는 굉장히 느릿하고 무기력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도웅은 제집처럼 빠르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어희를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초코 우유와 딸기 우유에 나란히 빨대를 꽂아 어희 앞으로 내밀었으나 정말로 마시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저었다. 도웅은 초코 우유를 다 마실 때까지 어희를 살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볼게요. 쉬어요.”
힘들어 보이는 사람 집에서 계속 뭉그적거리는 것도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희 씨, 괜찮은 거 맞죠?”
울 거 같은 분위기다. 신발을 신은 도웅이 확인차 묻자 어희의 무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지는 않습니다. 안 괜찮아요.”
“같이 있어 줄까요? 아니면 맛있는 거 해줄까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이전에 함께 장을 본 마트의 경로를 떠올리고 있는데 어희의 머리통이 또 절레절레 흔들리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도웅 씨도 놀라셨을 텐데… 쉬어야죠.”
돌려 돌려서 혼자 있게 해달라는 말인 걸까? 짧은 망설임 끝에 도웅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락할게요.”
그렇게 어희를 두고 집을 나온 도웅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제리 탓인데 괜히 자신 때문에 어희까지 함께 욕을 먹은 것 같아 미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간 도웅은 씻고 나와서 핸드폰을 확인했으나 어희한테 온 연락은 없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가슴에 핸드폰을 얹어 놨다.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본 도웅은 제리를 떠올리고는 미간을 좁혔다.
인연이 없어서 이쪽 세계를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심한 말이었다. 누구라도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날로 내뱉어진 혐오스러운 발언에 상처를 입기보다는 짜증이 솟구쳤다. 지가 뭔데 남의 사생활을 큰 소리로 떠벌리는 걸로도 모자라 물질적인 피해를 입히고 사람을 괴롭힌단 말인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합의 없이 그냥 외면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지나버린 일이었다.
합의해서 취하해 버리면 재고소가 어렵다는 수사관의 말을 되뇐 도웅은 물기 젖은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화가 나긴 해도, 도웅은 괜찮았다.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앞으로 볼 사람이 아니었던지라 괜찮았다. 그저 재수 없는 인간 하나가 걸러졌다고 여기면 된다. 그러나 어희의 말랑한 마음이 크게 다친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울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울적한 분위기의 어희를 생각하자 다시금 제리에 대한 화가 솟구쳐, 소파 팔걸이를 발로 찼다.
소파에 누운 채로 깜박 잠이 들어버린 도웅을 깨운 건 전화벨 소리였다. 뒤척이며 일어나자 가슴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아래로 떨어졌다.
주변을 둘러본 도웅은 깜깜한 걸 보고서 거실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올려봤다. 저녁 아홉 시 반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운 도웅은 부재중이 찍힌 번호를 보고서 눈을 끔벅였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같은 번호로 부재중 통화가 네 번이나 찍혀 있었다. 기다랗게 나열된 번호 앞에 붙어있는 국가 번호를 보고서 어디였더라…, 생각하는 사이에 또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시끄러운 주변 소음에 말소리가 묻혔다. 손가락으로 볼륨키를 꾹, 꾹 눌러 소리를 최대치로 키웠다.
-……웅이니?
“엄마? 웬일이세요? 이 번호는 또 뭐고요.”
집 전화도 핸드폰도 아닌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엄마?”
대답이 없는 엄마를 재차 부르며 거실 불을 켜고 냉장고를 열었다.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우고 컵을 꺼냈다.
-웅아. 최대한… 빨리 이쪽으로 건너와야겠다. 네 애인이랑 함께.
“네? 그쪽이면 뉴욕이요? 왜요?”
외국을 무슨 옆집 건너오듯 말하는 어머니가 이상했다. 상황을 설명해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흘러나왔다. 도웅은 못 박힌 듯 주방에 서서 가만히 귀담아들었다.
명확하게 전해진 말은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이었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좋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인 어머니의 목소리에 도웅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니…, 아니…. 그걸 왜 이제야…….”
손에 든 머그잔을 도로 올려놓기 위해 팔을 들었다. 대리석 싱크대에 부딪혀 머그잔이 깨져버렸다.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는지 무슨 일이냐는 어머니의 말을 도웅이 숭덩 잘랐다.
“아빠 좀 바꿔봐요.”
-…….
“지금 당장 바꿔봐요. 어제도 통화했잖아요.”
-수술 중이라서 힘들어.
끝내 어머니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나왔다. 정작 울고 싶은 건 도웅 자신이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에게는 언질도 주지 않고 이상한 결혼 압박이나 해대며 부모님이 밉지 않을 수 없다.
도웅은 드레스 룸에서 보스턴 가방을 꺼내 속옷과 옷을 대강 쑤셔 넣으며 물었다.
“방금 들어가셨어요?”
-…….
어머니의 침묵에 도웅은 따지듯 언성을 높였다.
“수술, 언제 들어갔냐고요.”
-새벽 세 시에….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한 도웅은 뉴욕과 시차를 계산하고서 가방을 발로 걷어찼다. 애써 구겨 넣었던 옷가지가 튀어나왔다. 부재중 통화가 쌓이기 시작한 건 불과 이십 분 전이었고 도웅은 네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연락을 받았다는 사실에 벌컥 화를 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그리고 수술을 할 거면 한국에서 하지 왜 거기서…!”
침실로 뛰어 들어가 서랍에서 여권을 꺼냈다. 지갑, 보조 배터리를 겉옷 주머니에 넣은 도웅은 긴박하게 침실을 오가다, 실수로 디저트 웅 미니어처를 떨어트렸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토끼끼와 각종 디저트를 대강 쓸어모아 미니어처 안에 넣은 뒤 집을 나왔다.
“저 이제 집 나왔어요. 공항 가서 다시 연락할게요.”
-웅아. 만약 함께 올 수 있으면 같이 와라. 네 아버지가 수술 끝나면 보고 싶다고 하더구나.
눈물 젖은 어머니의 부름에 도웅은 마구잡이로 올라오려는 눈물을 꿀꺽 참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쁜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금방 갈게요.”
때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뛰어서 잡아탄 도웅은 공항으로 빨리 가달라는 말과 함께 안전벨트를 맸다. 한숨과 함께 눈가를 문지르고는 항공권을 검색했다. 다행히 한 시간 십 분 후에 출발하는 뉴욕행 비행기가 있었다. 창문 너머로 스치는 로얄 골드 펠리스 단지에 도웅은 택시를 세웠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핸드폰 두고 내릴게요.”
불만을 표출하는 기사님을 두고 단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32층으로 올라가는 짧은 시간 동안 도웅은 작게 심호흡을 했다. 제 핸드폰 번호인 비밀번호를 누르고 불이 모두 꺼져있는 깜깜한 집으로 들어갔다.
“도웅 씨?”
어희는 불도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낮에 그의 집에서 나왔을 때 마지막으로 본 자세 그대로였다.
“나 지금 부모님께 갈 거예요. 공항 가는 길에 물어볼 거 있어서 들렸어요.”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 앞에 서서 도웅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우리 둘이 만나는 거 밝히고 싶어요. 놀라시긴 하겠지만, 이런 일로 자식하고 연 끊을 분들 아니고 저도 쉽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막상 가면 입이 안 떨어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일단 용기는 내보려고요. 나하고 같이 가줄 수 있어요? 나 진지하게 만날 거면 이번 한 번만 제발 같이 가줘요.”
도웅은 지금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관계를 인질 삼아 어떻게든 그를 데리고 가고 싶을 정도로 절박했고 마음이 급했다.
“그게 무슨……. 도웅 씨 일단 진정하고….”
“이기적이란 건 아는데, 너무 급해요. 미안해요. 수락인지 거절인지만 대답해줘요.”
현관 센서 등이 꺼지자 어두워서 어희가 어떤 표정인지 보이지 않았다. 도웅은 초조하게 신발 안의 발가락을 안으로 움츠렸다. 심호흡을 하며 열 번 정도 눈을 깜박이자 침묵을 가르고 어희의 대답이 돌아왔다.
“도웅 씨 부모님께는 못 갈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 거길….”
“알겠어요. 대답 고마워요. 그럼.”
도웅의 입매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소파에서 일어난 어희의 형체를 무시하고 집을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을 누르고 문 닫힘 버튼을 누른 도웅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문질렀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아파트를 빠져나와 정차해있는 택시 문을 열었다. 어희 목소리가 들린 거 같아서 뒤를 돌아봤더니 정말로 어희가 달려오고 있었다.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온 듯했다.
택시에 타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더니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어희가 대뜸 물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 저도 하나만 묻겠습니다. 우리 헤어지는 겁니까?”
올라간 미간과 찌푸려진 눈살에 도웅은 시선을 피했다. 그를 데려가고 싶어서 관계를 걸긴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기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 가면 오래 있어야 할 거 같기도 하고요.”
수술이 끝나고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가능한 걸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다.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도저히 부모님은 뵙지 못할 거 같습니다. 저는 당신이 부모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안 틀어진다고 하면 같이 가줄 거예요?”
결국 도웅의 눈이 발갛게 충혈되었다.
“내일이나 모레라도 괜찮으니까….”
무사히 수술을 끝낸 아버지에게 소개해주고 싶었기에 도웅은 더듬더듬 입을 뗐다.
“아무런 준비 없이 지금 바로 출국하는 건 어려울 테니까, 나중에라도 꼭 와줘요.”
함께 가주지 않는 어희를 탓할 수는 없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와줬으면 했다. 아버지의 수술 결과를 한국이 아닌 비행기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건 불안했고 무서웠다. 복합적인 감정이 울컥 차올랐다.
이마를 덮은 도웅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올려준 어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갈 테니 먼저 가 있어요.”
어희의 다정다감한 어조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된 도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택시에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