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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어색해서 계속 손이 갔다. 까슬까슬한 감촉에 도웅은 헛웃음을 지었다가 주변을 돌아봤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카페는 테이블이 군데군데 비어있었다. 빠른 비트의 노래는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인지 귀국하고 나서 길거리에서 자주 들은 탓에 완전히 귀에 익어버렸다.
미국에서 2년 동안 짧게 짧게 일을 하거나 어머니와 여행을 다닌 도웅은 아예 그곳에서 살까,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다. 결국 이렇게 돌아오긴 했지만.
“이제 뭐 해 먹고 산담.”
아버지 일을 도와주시던 대리인을 통해 카페와 집을 정리한 도웅은 제 명의의 본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가끔 아버지의 서재에 앉아 그리운 마음을 곱씹기도 했다. 그다지 돈 걱정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따뜻한 차를 마셨다.
“오빠아.”
뒤에서 덥석 어깨를 끌어안는 손길에 도웅은 놀라지 않고 덤덤하게 손을 떼어냈다.
이전에 아버지가 입이 닳도록 말했던 사촌의 팔촌이자 초등학생 시절 자주 뛰놀았던 지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석 달은 지난 후에야 눈물범벅으로 찾아온 지수는 미국에서 제법 오래 머물렀다. 진즉 소식은 들었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 이제야 오게 되었다는 지수의 이야기에 어머니는 며칠간 집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애교 있는 지수 성격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머니는 툭하면 저에게 지수를 떠넘겼다.
덕분에 2주 동안 질리도록 붙어 다닌 둘은 도웅이 귀국하고 나서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렇게 만나곤 했다.
어머니의 기대와 다르게 둘은 친한 동생, 오빠 사이가 되었지만 그게 적당한 관계였다.
지수는 이미 짝사랑 중인 상대가 있었고 도웅은 첫 연애를 끝내고 사랑이라는 감정 기관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무뎌졌다. 아니. 정확히는 어희가 특별했던 걸지도 몰랐다. 어희를 만나기 전에도 무덤덤했으니.
“나 이제 뭐 해 먹고 살지?”
도웅의 우는 소리에 맞은편에 앉은 지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알사탕을 꺼내 입에 쏙 집어넣었다.
“엥. 오빠 카페하는 거 아냐?”
“예전에 다 정리했지. 여기는 직원 안 뽑아? 나 좀 꽂아 줘.”
회사를 그만두고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지수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보자 대답 대신 아그작, 사탕을 씹어 먹는 소리만 길게 들렸다.
“디저트 웅 그대로 장사하고 있던데? 누가 인수했나?”
“그래?”
카페도 집도 모두 정리했기에 근처에 갈 일이 없었던 도웅은 의외의 소식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철거 비용을 내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누군가 통째로 인수했을 법했다. 호시탐탐 목 좋은 자리를 노리던 나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건 말 할 것도 없다.
“사장만 바뀐 거면 직원은 그대로 있으려나?”
도웅의 혼잣말에 지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난 김에 한번 가봐야겠다.”
신세를 졌던 건물주님께 인사도 할 겸 놀러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라도 테이크아웃해 줄까?”
“일이나 해, 인마.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너 엄청 째려보고 있어.”
도웅의 말에 지수는 수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저 사람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
지수의 고백에 도웅은 매니저를 다시 한번 돌아봤다.
얼핏 볼 때는 지수를 노려보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지수가 아닌 저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어쩐지 지수가 들러붙는다 싶었는데, 질투 작전이었나보다.
“무섭다, 무서워. 잘해봐. 난 갈게.”
“잘 가, 오빠.”
손을 흔들고 카페를 나온 도웅은 디저트 웅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버스를 타고 여섯 정류장 정도는 되는 거리였으나 남아도는 게 시간인 백수 도웅은 운동 겸 걷기로 했다.
이십여 분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도웅은 마침 보이는 커다란 과일 가게에 들어가 햇볕에 데워진 몸과 땀을 식히고 과일 바구니 하나를 구매했다.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오 분을 더 걷자 정말로 ‘디저트 ㅇㅜㅇ’ 간판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잠시 서서 카페를 바라보다, 계단을 밟아 건물 4층으로 올라갔다.
인터넷 쇼핑몰 사무실에 들어가 사장님을 찾자 구석 파티션으로 가려진 검정 소파로 안내를 받았다. 테이블에 과일 바구니를 올려두고 앉아 기다렸다.
“어머, 어머. 이게 누구야. 사장님!”
도웅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셨죠? 근처 왔다가 인사차 들렸어요.”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요. 웬 눈이 부리부리한 양반이 대리인이라고 찾아왔을 때는 어찌나 무섭던지.”
“아.”
입에 걸린 반가운 미소가 민망한 미소로 바꼈다.
“급하게 출국할 일이 생겨서…. 그래도 인사 왔으니까 봐주세요. 쇼핑몰은 어떻게, 잘 되나요?”
“어휴. 보통 일이 아니야. 이렇게 정신없이 바쁠 줄은 몰랐어. 마실 거라도 줄까요?”
“괜찮아요. 금방 가야 해서.”
음료를 거절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아. 직원은 만나봤어요?”
건물주의 물음에 도웅은 놀라 되물었다.
“네? 아뇨? 그대로 있어요?”
“그럼요~ 젊은 사장이 그대로 운영 중이야. 예전에 사장님이 살던 집도 고스란히 전세 들어왔고.”
도웅의 머리통이 옆으로 슬쩍 기울어졌다.
“어후. 사장님은 다시 카페 열 생각은 없는 거예요? 있으면 1층으로 들어와요. 계약 기간 끝나자마자 내보내면 되니까.”
카페를 인수했다던 사장이 들었으면 피눈물을 흘렸을 말이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러지 말라고 답한 도웅은 삼십 분 동안 대화를 이어가다가 슬슬 일어날 타이밍을 쟀다. 때마침 전화 한 통을 받은 건물주는 바쁜 일이 생겼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 그럴래요? 나중에 밥 한 끼 해요, 사장님.”
“좋죠.”
전 건물주이자 전 집주인에게 인사하고서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온 도웅은 건물 옆 골목에 줄지어 서 있는 화분을 구경했다. 간만에 카페를 들릴까, 말까 망설여졌다.
월급과 퇴직금을 모두 지불하긴 했으나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진 게 마음에 걸렸다. 직원이 그대로 있다고 했으니 영호도 있을 게 분명했다.
“영호… 화나면 진짜 무서운데.”
영영 보지 않을 사이도 아니고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결심을 하고 카페로 들어갔다. 출입문 종이 딸랑딸랑 울렸다.
“어서 오…… 아? 사장님?”
트레이에 빈 잔을 옮기던 영호와 딱 마주쳐버렸다. 두꺼운 영호의 눈썹이 와락 찌푸려졌다. 보는 사람 불안하게 기울어진 트레이를 대신 받쳐준 도웅은 입꼬리를 올리고 반듯한 눈썹도 함께 올렸다.
“안녀엉….”
“안녕? 안녕이요? 안녕이란 말이 나와요? 아니, 미친.”
“아이, 미안해.”
“거기서 딱 기다려요.”
영호는 트레이를 들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빈손으로 나와 도웅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 어….”
“‘어, 어’는 무슨 ‘어, 어’예요? 일단 나와요.”
“아직 다른 애들하고 인사도 못했는데 나 내쫓는 거야?”
서운한 목소리를 내자 영호는 아예 등을 떠밀었다. 못 이긴 척 카페 밖으로 나온 도웅은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해.”
누가 볼세라 주변을 둘러본 영호는 이내 도웅을 비좁은 골목으로 밀어 넣었다.
“나 때리게?”
“아닌 거 알면서 쓸데없는 말 좀 그만해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혼자서 카페로 홀랑 들어가 버린 영호를 보고서 도웅은 쭈그려 앉아 앞에 있는 화분을 멍하게 쳐다봤다. 이렇게 화분하고 남겨질 줄 알았으면 아까 구경을 덜 할 걸 그랬다. 이미 꼼꼼하게 구경한 덕분에 지루함이 컸다.
그때 카페 출입문 종이 딸그락,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영호의 손에는 컵 표면에 이슬이 맺힌 식혜가 두 잔 들려있었다.
“마침 더웠는데 고마워.”
도웅은 얌전히 식혜를 받아 마셨다.
“달다, 달아.”
“…….”
“애들 화 많이 났어?”
이렇게 밖에서 음료를 마셔야 할 정도로?
물 마시듯 식혜를 벌컥벌컥 마신 영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일회용 수저를 꺼내 뜯어 밥알을 삭삭 긁어먹었다.
“사장님.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난 이제 사장도 아닌데 계속 사장님이라고 불러주는 거야?”
“형. 여기 지금 엄청 답답한 상황이거든요.”
곧장 형으로 호칭을 정정한 영호는 손가락으로 제 턱을 쓸었다.
“형 친구인 사장님도 답답하고 기존에 있던 애들도 이상해졌어요. 형 카페 오픈 안 해요? 하면 저도 데려가요.”
“내 친구? 정말 나윤이 인수했어?”
“그 셰프님은 잊을만 하면 나타나서 카페 팔아달라고 조르기만 해요.”
나윤이 아닌가? 그럼 누가……?
달콤한 식혜를 꼴깍 삼킨 도웅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 보아도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사실 딱 한 명이 있긴 하다.
어희. 어희 밖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희가 그럴 이유는 없었기에 도웅은 아니겠지, 하고 넘겼다.
“그런데 전에 있던 애들도 이상하다는 건 무슨 뜻이야?”
“아니이! 진짜 걔들…! 어휴.”
답답한지 연신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두들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킹콩 같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말했다가는 가슴이 아닌 저를 두들길까 싶어 꿀꺽, 삼켰다.
“손님도 줄고 일 대충 해도 월급 잘 나오니까 전부 나사 빠져버렸다고요. 그나마 수빈이는 괜찮은데 낌새 보니까 곧 그만둘 거 같고….”
“그걸 왜 가만히 내버려 둬?”
“자르라고 계속 얘기해도 안 자르는데 저라고 알겠어요?”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영호는 열변을 토했다.
길고 긴 불만은 제발 본인 좀 빼내달라는 애원으로 끝났다.
“그러면 너도 대충 퍼져있으면 되지.”
“제 성격이 그런 성격은 못되잖아요.”
“그건 그렇지….”
밥풀을 먹기 위해 컵 아래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아. 이제 곧 사장님 오실 때 됐는데 형이 말 좀 해줘요.”
영호의 말에 밥풀이 목에 턱 걸려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아, 아니야. 나 친구 없어. 가봐야겠다, 가봐야겠어.”
도웅은 간질거리는 목을 손으로 감싸고 헛기침을 했다.
이성적으로는 어희가 아닐 거 같긴 한데 또 한 편으로는 어희 같기도 했다.
“아, 형. 한 번만 해줘요. 딱 한 번만.”
호칭을 아예 형으로 굳힌 영호는 더욱 친근하게 굴었다.
“나중에. 다음에는 밥이라도 한 끼 하든가. 비싼 거 사줄게.”
“아니, 언제요. 날짜를 명확하게….”
못 본 사이에 많이 집요해진 영호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조만간? 나 백수라서 당장 내일도… 아!”
영호를 보고 걷던 도웅은 골목길을 벗어나자마자 다른 사람과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