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과식을 하고만 도웅은 눈에 얼음 찜질팩을 올려놓고서 휴식을 취했다.
“아. 미국으로 돌아갈까.”
애초에 특별한 계획이나 뜻이 있어서 귀국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향수병인지 그리움이 커져 충동적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는 일도 큰 고민을 거치지 않았다.
팩을 들어 올려 피자 두 박스를 물끄러미 쳐다본 도웅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갈까….”
대답해 줄 사람이 없음에도 도웅은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듯 혼잣말을 했다.
다음날 안방에서 눈을 뜬 도웅은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도로 침대에 누워 남은 잠을 마저 잤다가 눈을 뜨면 핸드폰을 했다.
제 모습이 영락없는 무기력한 백수 같다는 생각이 든 건 누워서 핸드폰을 네 시간이나 붙들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난 직후다.
벌떡 몸을 일으켜 종종걸음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빠르게 샤워를 하고 식은 피자 두 조각을 겹쳐 먹고는 외출을 준비했다.
약속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손목에 가죽 시계를 걸치고 김빠진 콜라를 마시며 집안을 돌아다닌 도웅은 핸드폰을 챙겨 집을 나왔다.
택시를 타기 위해 대로변까지 걷던 중 도웅은 문득 차를 한 대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독주택과 빌라가 드문드문 늘어져 있는 주택가에서 대로변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에 계속 걸어서 오가기에는 불편했다. 이참에 한 대 사서 끌고 다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자연스럽게 한국에 머무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차보다는 직장을 먼저 구해야겠다는 결론을 낸 도웅은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열었다. 보스턴에서 일자리를 소개해준 나윤을 찾아서 전화를 걸었으나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 버렸다.
“바쁜가?”
하긴 사업을 이리저리 뻗고 있으니 바쁘지 않은 게 이상하다.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 도웅은 쾌청한 날씨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차가운 음료를 손에 들고서 자동차 대리점과 백화점을 돌아다닌 도웅은 저녁이 되어서야 빈손으로 귀가했다. 덜컥 차를 계약하기에는 언제 어디에 직장을 잡을지 아직 알 수 없어 포기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는 싫어서 백화점에서 예쁜 옷들만 잔뜩 구경하고 왔다.
대강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웅은 푹 젖은 짧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탈탈 털어내며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어제 시킨 피자를 뜯어 먹었다.
딱딱해진 도우와 굳은 치즈를 먹으며 티브이를 켰다. 홈쇼핑 채널을 지나서 예능, 드라마, 영화 등 순서대로 돌렸다.
“볼 게 없네.”
결국 배를 채울 때까지 채널 정착에 실패한 도웅은 그대로 티브이를 껐다가, 다시 켰다. 집안이 너무 조용한 것 같았다.
관심 없는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을 들으며 손에 묻은 피자 기름을 닦아냈다. 어제 정리하다 만 짐을 마저 깨끗하게 치운 도웅은 다시금 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어?”
없었다.
가구를 제외하고 모든 짐을 이사 센터에 부탁해, 본가로 옮겼는데 딱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어희가 선물해준 디저트 웅 미니어처와 사진이 없었다.
결국 사진을 찾아 세 시간이 넘게 집안을 구석구석 뒤진 도웅은 지쳐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어제부터 꾸준하게 신경 쓰인 둘만의 사이트에 접속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등록된 글을 시간순으로 정주행했다.
* * *
자정이 되어가는 야심한 시간에 택시에서 내린 도웅은 로얄 골드 펠리스 정문에 섰다. 정신을 차리니까 어느새 택시를 잡아타 어희의 집 앞까지 와버렸다.
돌려주지 않고 지갑에 고이 넣어놓은 공동현관 키를 찍고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초조함에 발을 딱, 딱 굴렀다. 뒤늦게 전화를 먼저 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32층에 도착했다.
-띵동, 띵동, 띵동.
초인종을 세 번 누르고서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조급함이 드는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어…!”
먼저 입을 뗀 도웅은 런닝셔츠 차림의 아저씨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어…, 여기 어희 씨 집 아닌가요?”
뚱한 표정의 남성은 도웅을 불청객 보듯 보며 아니라고 대꾸했다. 불청객이 맞긴 맞았다.
“주소를 잘못 알았나 봐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도웅의 사과에 쾅, 소리 나게 문이 닫혔다. 현관문에 달린 3201호 호수를 마지막까지 확인한 도웅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밖으로 나온 도웅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제 가게 번호는 잊어도 어희 핸드폰 번호는 기억하는 도웅이다. 핸드폰 화면에 나열된 열한 자리 숫자가 어색해, 뜸을 들이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번호가 바뀌었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무색하게 핸드폰 너머로 어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집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수십 가지의 말들을 입에 담았는데 오는 도중에 죄다 흘린 거처럼 남아있는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계속 침묵하다가는 어희가 전화를 끊을 것 같아서 도웅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어희 씨. 저 도웅인데요. 지금 로얄 골드 펠리스 앞이거든요. 잠깐… 아니 길게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무언가 우당탕탕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반박자 늦게 어희의 대답이 들렸다.
“제가 거기로 가겠습니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은 도웅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멀뚱히 어희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바로 어제 건물주이자 집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예전에 사장님이 살던 집도 고스란히 전세 들어왔고.”
설마, 하는 예감이 들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도웅은 이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기다린다고 말했지만,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가게까지 걸어오자 도웅은 옆을 뛰어가는 남자를 돌아봤다.
“어희 씨?!”
도웅의 외침에 남자는 우뚝 멈춰 섰다. 어희가 뛰어나온 방향을 보자 설마 하는 마음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도웅 씨, 왜 여기에….”
막 샤워를 했는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에서는 꽃 향이 물씬 풍겼다. 오랜만이었다.
“어희 씨 지금 어디 살아요?”
“…예전에 도웅 씨가 살았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머뭇거리는 어희를 빤히 쳐다봤다.
“왜요?”
“그건… 말씀드리기가 좀 힘듭니다.”
“어희 씨랑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어디서 이야기할래요? 카페? 아니면 집?”
“집으로 가시죠.”
직접 제 발로 찾아왔으나 또 도망이라도 갈 줄 아는지 어희는 도웅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가는 동안 둘 다 입을 꾹 다문 채 걸었고 빌라 계단을 올라갈 즘에는 도웅이 참지 못하고 툭, 말을 꺼냈다.
“집 팔았어요?”
“…….”
“사실은 방금 어희 씨가 살았던 집에 다녀왔거든요. 밤에 미안해요. 이사 간 줄 몰랐어요.”
“…예. 팔았습니다.”
도어락 비밀번호는 여전히 도웅의 핸드폰 번호였다.
가구는 본가에 둘 곳도 없고 해서 그대로 처리해달라고 일렀는데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어희 씨 가구는 어쨌어요?”
“팔았습니다. 마실 거 드릴 테니 앉아 계세요.”
이전에 누수 피해를 입었을 적 집주인이 사주었던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도웅은 거실 벽면을 쳐다봤다. 어희가 직접 꾸며준 사진들은 온데간데없고 둘이서 맞춘 직소 퍼즐 액자가 걸려있었다.
어희가 인스턴트 레몬차를 내오자마자 도웅은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고서 말을 걸었다.
“내가 여기 살겠다고 하면 어쩔 거예요?”
“이사 준비하겠죠.”
어희는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듯 도웅을 바라봤다.
“어희 씨. 실례인 거 알면서 물어볼게요. 돈 없죠.”
“…….”
“집 팔아서 카페 유지 중이죠.”
“…예.”
고분고분 돌아온 대답에 도웅은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식사는 했습니까?”
말리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본 어희는 이내 손에 쿠키와 빵을 들고 왔다. 디저트 웅에서 파는 것들이었다.
“이걸로 요기하고 계시면 금방 포장해오겠습니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습니까?”
도웅은 지갑을 들고 나가려는 어희를 붙잡았다.
“앉아요. 밥 먹었어요.”
“예….”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도웅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레몬차에 시선을 두었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희 씨.”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으나 그대로 말을 이었다.
“왜, 왜 뉴욕 온 거 말 안 했어요.”
옛날에 영호에게 부탁해서 찍은 사진 이후에 올라온 첫 글은 제법 길었다. 도웅이 떠나고 나서 하루가 지난 뒤 작성된 글이었다. 연락이 닿지 않아 사이트라도 볼까 싶어 이곳에 남긴다는 첫 말을 시작으로 여권이 만료되어 재발급받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설명이 길게 적혀있었다. 또 거절했던 이유도 상세하게 쓰여있었다. 온통 도웅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간절하게 쓰여 있어, 도웅을 한숨짓게 했다.
그리고 닷새 후 어희는 약속대로 뉴욕에 찾아왔다. 기억력이 좋은 건지 어찌어찌 도웅의 집까지 잘 찾아온 사진을 봤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와 추억 여행을 떠났던 도웅은 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
빈집 앞에서 하염없이 이틀을 기다린 후 앞집 할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귀국했다는 글에서 도웅은 얼굴을 문질렀다.
일흔 개가 넘는 글의 대부분은 출국할 때마다 어희가 남긴 글이었다. 도웅을 마냥 기다리다가 아버지 묘에 꽃을 올려두고 귀국하는 일상이 적어도 마흔 번이 넘었다. 한 번이라도 만날법하건만 반년은 어머니와 여행을, 돌아와서는 유산 정리 후에 이사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어희를 보고 도웅은 질문을 바꿨다.
“어제 사과한 건 뭐였어요? 왜 사과했어요?”
“가긴 갔지만… 도웅 씨 옆에 있어 주지 못했으니 못 간 거나 다름없잖습니까. 후회도 많이 했고요.”
“나는 어희 씨가 안 온 줄 알고… 헤어진 걸로 알고 있었어요.”
정확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도웅 혼자서 짐작하고 인연을 끊어냈다. 오해할 법한 상황임에도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은 도웅에게 어희는 크게 화를 내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저도 그런 줄 알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