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Taxiing (1/10)

1. Taxiing

아직 새벽안개가 다 걷히지 않았다. 인천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가 안내 시각보다 5분쯤 늦게 정류소에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타는 나를 보고 운전기사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라는 말은 아직 이른가.

“안녕하세요.”

나도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

꽤 이른 시간이었지만 연휴 시즌이라 공항으로 향하는 손님들로 좌석이 꽉 차 있었다. 정류소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객실 승무원에게 먼저 타라고 순서를 양보한 탓에 나는 단 하나 남아 있던 그녀의 옆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회사 유니폼을 입은 그녀는 종이에 프린트된 비행 스케줄과 편조를 꺼내 확인 중이었다. 나는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지만 직업병이 있는 탓에 본의 아니게 그녀가 타는 비행 편을 읽어 버렸다.

[CR721-A350 (ICN - SIN)]

그녀는 오늘 나와 함께 싱가포르로 비행을 나가는 크루 중 한 명이었다. 회사 내 운항 크루만 해도 수백 명이다. 같은 회사라고 해도 낯이 익은 동료와 함께 비행을 나갈 기회는 매우 드물다. 더군다나 나는 오늘 첫 출근이었기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내가 힐끔거린 것을 보았는지 그녀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내 캐빈백에 달린 이름을 확인했다. 그러나 내 낯선 외국 이름이 그녀로 하여금 선뜻 인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느새 공항 고속도로에 진입한 리무진 버스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인천 국제공항과 나는 인연이 있었다. 이곳이 준공되던 해 내가 태어났고 곧바로 버려졌다. 여덟 살 때 독일로 입양을 가던 날 양부모의 손을 잡고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탔던 곳도 여기였다.

그날 잔뜩 얼어 있던 내 볼을 꼬집으며 콕핏(Cockpit. 비행기 조종석) 내부를 구경시켜 주던 조종사의 유니폼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알 수 없는 언어로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 주었는데 그때 내가 한 결심은 두 가지였다.

빨리 독일어를 배워야겠다. 그리고 나는 파일럿이 되어야겠다.

벌써 22년 전 이야기였다.

내가 이런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버스는 고속도로를 쉼 없이 달렸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떠올라 아침이 되었다.

“보통은 B737로 가죠?”

나는 옆에 앉아 부지런히 아나운싱을 연습 중인 객실 승무원에게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네?”

그녀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여 나를 쳐다보았다.

“싱가포르는 지금까지 B737로 운항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저도 에어버스로는 처음 가 보네요.”

뭔가 더 친밀한 말을 하고 싶었는데 화젯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깔끔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난데없이 말을 걸어 놓고 다음 말을 이어 주지 않는 내게 난처해하는 표정이 보였다. 하긴, 나는 말주변이 좀 없는 편이긴 했다.

“제가 첫 출근이라서요.”

“아…….”

그녀는 다시 한번 내 태그를 확인하는 듯했다.

[Maximilian Schmitz]

막시밀리안 슈미츠. 따로 한국 이름이 있었지만 차별받지 말라고 양부모는 독일 이름을 새로 지어 주었다. 첫째 아들은 크리스티안이었는데 다행히 그들은 친아들과 양아들 사이에 별다른 차별 점을 두지 않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한국으로 오면서 나 자신을 소개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었다. 한국 이름을 얘기하면 여러모로 편했겠지만 이미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혼혈도 아닌데 이런 이름을 가졌다는 점이 내 출생의 복잡함을 나타내 주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그런데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사생활이라 선뜻 물어보지도 못하고 속으로 궁금해하는 그 반응들이 나는 좀 뭐랄까, 재미있었다.

그사이 리무진 버스가 인천공항 제2 터미널에 도착했다.

“쇼업 때 봅시다, 그럼.”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터미널로 들어가려는데 버스 화물칸에서 짐을 꺼내는 사람들 사이로 여성 승객 한 명이 고생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대신해 몸을 숙이고 안쪽까지 밀려나 있던 커다란 트렁크 짐을 꺼내 주었다. 생각보다 무거웠으므로 보도블록 위에 올려 주었다.

“어머, 감사합니다! 어, 아…… 땡큐 쏘 머치!”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인사말을 바꾸는 모습이 귀여웠다. 고개를 끄덕여 주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외워 두었던 동선 덕에 회사 운항 관계자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서른여 명의 조종사들과 기술 크루들이 섞여 일을 보고 있었다. 어수선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마침 앞을 지나가던 직원 한 사람을 붙잡고 무작정 물었다.

“A350, 싱가포르 가는 일정 PIC(Pilot in command. 항공기를 책임지고 조종하는 조종사)입니다. 오늘 저와 운항하실 분을 찾고 있습니다.”

“아, 저기 계세요. 부기장님! 전성욱 부기장님! 여기 캡틴 오셨네요.”

그는 서로 안면이 있는 듯한 남자의 이름을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에 구석에서 운항 체크 서류를 읽고 있던 삼십 대 남자가 나를 보고 다가왔다. 그의 유니폼에 달린 석 줄의 견장을 확인했다.

“어?! 오늘 PIC 외국분이신 줄 알았는데?”

“안녕하세요. 슈미츠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이름이 그래서…… 독일에 계셨으면 LH에서 이직하신 건가요?”

“네. 오늘 첫 플라이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가설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했지만 일단 나와 악수를 했다. 그가 읽고 있던 서류들이 내게도 건네졌다. 미리 와서 준비하는 그의 태도에 첫 비행이었지만 안심이 되었다.

10분쯤 더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동시에 일어섰다.

“전체 브리핑 가시죠.”

“네.”

익숙한 그의 발걸음을 따라 운항 관계자실을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걷다 커다란 브리핑 룸으로 들어왔다. 그룹으로 모여 있던 객실 승무원 중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크루를 발견했다. 그녀 역시 나를 알아보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체를 했다. 나는 눈인사를 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오전 싱가포르 일정을 맡은 슈미츠라고 합니다. 부기장님, 운항 브리핑 먼저 해 주시겠습니까?”

“넵. 안녕하십니까. ICN 디파쳐 09. 15 예정입니다. 10분 전 마감 부탁드리고…….”

한국어로 진행되는 브리핑까지 듣고 있자니 갑자기 현실 공간이 형이상학적으로 비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산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진짜 왔구나, 우서진. 일생일대의 가장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현실이라고 자각하고 나니 살짝 긴장되기 시작했다.

햇수로 따지면 아우스빌둥(직업 교육) 기간까지 합쳐 10년간 비행기를 몰았다. 원래 무언가에 심하게 동요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순발력과 판단력이 요구되는 이 직업이 내게는 천직처럼 여겨졌다.

감정을 소모하는 일 역시 그러했다. 누군가를 크게 좋아한다거나 싫어하는 일은 없었다. 출생이 그러했기에 어릴 때부터 누군가 나를 두고 뒷이야기를 한다거나 면박을 준다거나 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그런 것조차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편이었다. 입양이 결정되었을 때도 기뻤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는 사이, 부기장의 브리핑이 끝났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객실 팀 사무장님 탑승객 보고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총탑승객 173명, 캐빈 크루 10명. 총인원 183명입니다. 풀이고요. 비즈니스석에…….”

언제였더라. 그런 나도 처음으로 감정 소모를 심하게 겪었던 적이 있었다. 그룬트슐레(독일의 초등학교)에서 냄새나는 동양인이라고 놀림 받았을 때였나.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울했던 것은 양부모의 전화 통화를 엿듣고 나서였다.

‘그래…… 알지. 그래도 냄새가 그렇게 심하진 않을 텐데 말이야.’

위선이라는 단어를 그때 느꼈다. 교양 있는 그들에게 한국에서 데려온 고아 남자아이는 자기만족을 위한 동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유기견을 키우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도 나는 양부모에게 고마웠다. 친아들과 똑같이 좋은 공립학교를 보내 준 것도 고마웠고, 거기서 부모를 따라 독일로 이민 온 한재이를 만나게 해 준 것도 고마웠다. 대학 교수로 부임한 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외동아들이었던 그는 독일 친구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피지컬과 외모로 모두가 그를 좋아하게 만들었다. ‘그 모두’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새 객실 사무장의 브리핑까지 끝이 났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감사합니다. 오늘 바람이 거의 없어서 테이크 오프는 무난할 것 같습니다. 도착지에 스콜이 올지도 모르니 대비 부탁드립니다. 제가 PF(Pilot Flying. 항공기 조종 업무)를 보고 부기장님이 PM(Pilot Monitoring. 조종 이외의 모니터링 업무) 맡아 주실 겁니다. 다른 특이 사항은 없으니 바로 스탠바이 하러 가시죠.”

한국어로는 처음 하는 브리핑이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대충 끝내 버렸다. 날씨가 맑아 주의사항도 없었고 첫 비행이긴 했지만 인천공항 자체가 처음은 아니었으니 특별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우르르 브리핑 룸을 나와 다 함께 게이트로 이동했다. 내 뒤를 따르는 8명의 구두 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쭉 에어버스 기종만 타셨어요?”

보폭을 맞춰 걷던 부기장이 말을 걸었다.

“네. 첫 이니셜은 A380이었는데, 아시다시피.”

“그렇죠. 그래도 기종 변경 빨리 하셨네요.”

나는 운이 좋게도 첫 기종을 에어버스사의 점보급 호화 비행기로 배정받았다. 다만 운항 비용이 너무 비싸 수익성이 떨어진 탓에 항공사들이 더는 주문을 하지 않게 되어 단종될 예정이었다. 단종될 기체의 라이센스를 가진 파일럿의 운명은 뻔하다. 나는 서둘러 좀 더 낮은 체급의 A350 라이센스를 새로 취득했다.

그때 당시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집에서 독립한 뒤 회사 보증으로 빌린 돈도 다 갚았고, 연봉도 안정적으로 고정되어 조금씩 돈도 모이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한재이에 대한 내 감정을 나 자신이 크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동경과 우정의 중간쯤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편안하고 즐거운 인생이었다.

우리는 ‘좋은 친구’, ‘평생 볼 친구’, 그런 수식어로 대변될 수 있었다. 비행이 없을 때는 늘 한재이를 만났다. 친구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욕심이 없던 시절의 나는 꽤나 도덕적으로 완벽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어떠한가. 범죄를 저지르고 망명해 온 사람처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재이 탓을 하기에는 내게 죄가 많았다. 그럴싸한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죄목이다.

친구를 사랑한 죄.

이것이 내가 한국으로 도망쳐 온 이유였다.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십니다.”

지상 근무 크루들과 인사를 나누고 기체에 올랐다. 곧바로 콕핏에 들어가 부기장과 함께 체크리스트를 작성했다. 그러는 동안 정비사들의 점검이 끝났다. 사무장에게 탑승 사인을 주고 승객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부기장님, A350 랜딩(Landing. 착륙)은 많이 해 보셨습니까?”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같은 기종의 총 비행시간은 이제 겨우 8백 시간 정도라고 했다.

“인천 들어올 때 PF 해 보시겠습니까?”

“오, 진짜요?”

기장 승급에 필요한 비행시간이 모자랄 그를 위해 조정간을 내어 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나는 한국의 이 회사로 이직하며 커리어 욕심을 모두 버렸다. 기장 자격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행시간만 채우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내가 누리고 싶었던 인생은 그날 이후 산산조각이 났다.

‘나 결혼해.’

한재이가 대형 로펌에 들어간 뒤 자주 만날 시간이 없게 된 탓에 그에게 최근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랬는데 대뜸 결혼 소식부터 전하다니.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실로 충격이 컸다. 어째서였을까.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한재이가 나 아닌 다른 사람 옆에서 평생을 보낼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허울만 좋은 베스트 프렌드라는 이름에 내가 너무 안이하게 기대고 있었던가.

그날은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덕분에 다음날 비행을 최악의 컨디션으로 들어가야 했었고.

엔진을 켜고 택싱(Taxiing. 활주로 진입을 위해 유도로를 이동하는 것)에 들어갔다. 다행히 인천공항 지리가 완벽하게 자리 잡힌 부기장이 있었기에 그의 리딩을 잠시 따랐다.

- Coreana 721 heavy, wind 320 at 15 knots. Runway 33 cleared for take-off. (코리아나 에어웨이 721편. 바람 320도 15노트. 33번 활주로 이륙 허가합니다.)

그래. 그러고 보면 우리는 결혼이라는 걸 하는 종족이었지. 내가 흥미 없다고 해서 남들도 관심이 없을 거라는 착각을 하고 살았다. 인간은 나이가 차면 누군가를 만나고 결혼이라는 걸 하곤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 역시 그런 것을 원하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해 보지 못했었다.

‘애인이 무슨 소용이야, 친구가 평생 가는 거지.’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으며 이런 종류의 감정도 세상에 분명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더라.

‘맥시, 너 혹시 게이야?’

그런 건 주변인들에게 게이라고 불리거나,

‘아, 여기는 내 친구 우서진.’

그냥 친구.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와 나 사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고 믿었던 몇 년간을, 결혼한다는 그 말 한마디가 산산조각을 내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한재이를 15년간 짝사랑하고 있었고 그는 나를 15년간 우정으로 대했다. 파국이었다.

- Cleared for take-off runway 33, Coreana 721 heavy. (코리아나 에어웨이 721편, 33번 활주로 이륙합니다.)

플랩을 내렸다. 비행기 바퀴가 미끄러진다. 130노트까지 속도를 올렸다. 익숙한 바람 부딪히는 소리와 동체 엔진 소리가 끊임없이 떠오르던 한재이에 관한 상념을 잊게 해 주었다.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 * *

기체가 3만 피트 상공에 떴을 때 오토파일럿을 작동시켰다. 부기장과 눈짓을 주고받고 좌석 벨트 점등을 오프로 두었다. 곧바로 누군가 콕핏 밖으로 설치된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객실 사무장이다. 신원을 확인했으니 문을 열어 주었다.

“식사 어떤 거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 저는 한식…… 기장님, 뭐로 하시겠어요?”

부기장이 한식을 선택해 버리면 나는 당연히 다른 것을 먹어야 한다. 조종사는 항공법상 같은 기내식을 먹을 수 없다.

“뭐가 있습니까?”

“아, 카레 있고요. 별로시면 이코노미 걸로 드릴까요? 흰 살 생선 아니면 소고기 조림 있습니다.”

“생선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네. 음료는 뭐로 가져다드릴까요?”

“탄산수로 부탁합니다.”

“네, 부기장님은요?”

“저는 그냥 물이랑 커피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먼저 한식 메뉴를 선택해 버린 게 미안했던지 부기장이 한국을 떠난 지는 얼마나 되었냐고 슬쩍 물어왔다. 22년이라는 내 대답에 그가 안심하는 듯했다. 사실 그랬다. 나는 한식에 별로 애착이 없는 사람이다.

독일에서 비행할 때도 같은 항공 동맹사의 운항 스케줄로 인해 한국 사람들과 몇 번 조종간을 나눈 경험이 있었다.

한 번은 기장급만 3명이 타는 바람에 은근히 신경전이 오가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경력이 짧았던 나와 다른 기장이 20년간 에어버스만 몰았다는 오십 대 기장에게 백기를 들어 주었다. 그날 터뷸런스가 심하게 오는 바람에 왼쪽 조종간에 앉은 그가 진땀을 좀 뺐던 기억이 난다.

객실 승무원이 음료를 먼저 가지고 왔다. 사무장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아침에 함께 리무진 버스를 타고 왔던 크루였다.

“식사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머리카락 한 올 내려오지 않은 단정한 올림머리의 그녀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트레이에 올려 다 준 탄산수를 마시며 계기판을 확인했다. 안정적으로 운항 중이다.

“기장님, 결혼하셨어요?”

부기장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니요, 싱글입니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책임 기장급으로 따지면 회사에서 제일 젊으신 축에 속하실 거 같은데…… ATPL(Airline transport pilot licence. 여객기 조종사 라이센스)은 언제 따셨어요?”

“7년 전입니다.”

“와, 역시 한국이랑은 완전히 다르네요.”

군대라는 타임라인을 뛰어넘을 수 있어서 빠르기도 하지만, 그걸 빼고도 한국은 여러모로 승급 제도가 복잡하다고 들었다. 대형기와 소형기로 기종 구분을 해야 하고 공군 출신인지 민간 항공대 출신인지도 중요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나이 어린 부기장이 마음껏 비행시간을 채우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고. 지금 옆에 있는 부기장도 나와 동갑 내지는 한두 살 많아 보였다.

“아까 캐터링 해 준 친구요. 기장님한테 관심 있는 거 같던데.”

그가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아닙니다. 아침에 리무진을 같이 타고 와서 제가 먼저 아는 척을 했습니다.”

다시 후방 카메라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상단에 위치한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 주었다.

“기장님 먼저 드릴게요. 그리고…… 여기, 부기장님 한식이요.”

앞치마를 두른 그녀가 트레이 위에 음식을 세팅해 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니 답례로 다시 미소를 받았다. 그녀가 나가자 부기장이 제 앞에 마련된 비즈니스 클래스 기내식을 뜯으며 ‘거봐요’ 한다.

“눈빛이 딱, 기장님 손에 가 있던데 뭘.”

나도 따라 기내식을 열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 페어링을 체크한 건가 싶었다.

“저도 사내 결혼했거든요. 콕핏에 들어올 때부터 눈이 딱 맞아 가지고 제가 번호 물어봤어요.”

그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보여 주며 그 후 어떻게 데이트를 하고 결혼에 골인했는지 등을 들려주었다.

사실 독일에서도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여기 오기 바로 직전, 내게 관심을 보이던 여자 객실 승무원과 데이트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나의 성적 취향을 명확히 알지 못했고 한재이의 반응도 궁금했었다.

‘잘했어. 연애 좀 해.’

딱 그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연애를 하라고 권했었다. 사람들은 채워지지 않는 감정을 위해 연인을 찾는 듯했지만 나는 이미 한재이에게서 그런 류의 감정을 끌어다 썼기에 연애에 목마르지 않았다.

물론 그는 평범하게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듯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소개해 준 적이 없었다. 대부분은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 부정했었고 몇 명에 대해서는 절친을 소개해 줄 만큼 진지한 사이는 아니라고 했었다. 그런 것에 길들여져 15년을 보냈다.

젠장, 또 한재이 생각을 하고 있다.

* * *

다행히 스콜은 내리지 않았지만, 싱가포르 국제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는 도중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레이 오버(layover. 현지 체류) 기간이 하루밖에 되지 않아 관광을 하기도 뭐 했으니 잘 되었다 싶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올라가려는데 객실 승무원 그룹에서 우리에게 저녁을 제안했다. 보통은 이렇게 어울려서 먹지 않는다. 모두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한 터라 개인 시간을 즐기는 것을 선호할 텐데 의외였다. 부기장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락하라는 의미인 듯했다.

“그러시죠, 그럼.”

내가 오케이 하자 다들 신나 했다. 한국은 분위기가 좀 다른가, 그런 생각도 좀 했다. 아…… 혹시 내가 저녁을 사 줘야 하나. 이 부분은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도중 부기장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설마요, 저랑 나눠서 어느 정도만 내시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죠.”

현명한 방법이었다. 전성욱이라고 했었나. 그와 친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룸으로 올라가니 쓸데없이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회사에서 이그제큐티브 룸을 잡아 주었다. 한 층 아래에서 내린 부기장은 그냥 스탠더드인 것 같은데 직급 차별이 좀 있는 듯했다. 독일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짐을 풀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한재이에게서 부재중 통화가 또 들어와 있었다. 문자 메시지도 도착해 있었다. 내용을 확인하며 유니폼 단추를 풀었다.

[우서진, 전화 받아]

[너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얘기 좀 해]

결혼 준비나 잘할 것이지. 셔츠를 벗어 던지고 침대 위에 엎어져 잠시 눈을 감았다. 한재이와 나누었던 그날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결혼……한다고? 누구……랑?’

그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내가 물은 말은 고작 저런 거였다. 그래, 누구랑 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나는 그가 누구를 사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1절을 모두 건너뛰고 2절부터 내뱉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기도 했다.

‘기젤라. 너도 알잖아. 동창이잖아, 우리 다.’

기젤라 베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양부모는 나를 차별 없이 키우기 위해 백인들만 다니는 학교에 넣어 주었다. 그것은 내 입장에서 매우 고마운 일이었지만, 스스로 그들과 비교하며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주변은 온통 빛나는 아이들뿐이었고 나는 그 사회에서 때때로 버티기 힘들었다. 양가적 감정이 교차하는 학교 친구들에 대한 기억 속에서 나는 비교적 그녀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 교수였던 한재이의 아버지와 같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부모를 둔, 또 다른 잘 나가는 집 자녀. 기젤라는 베버 교수 부부의 외동딸이었고 집안끼리 꽤 친한 사이였기에 한재이와의 교류도 자연스러웠다.

그렇다고 해도,

‘언제 그런 사이까지 된 건데.’

‘얼마 안 되었어. 어쩌다 보니 결혼 얘기가 나왔는데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나쁘지 않겠다’ 정도로 결혼을 결심하는 한재이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기젤라는 좋은 여자다. 그녀 역시 한재이를 나쁘지 않은 정도의 배우자로만 생각했으면 했다.

날짜까지 대충 잡혔다고 했다. 나는 그 꼴을 보고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비겁했지만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재이 모르게 한국행을 준비했다. 떠나고 나서야 내 소식을 들은 그가 계속해서 전화를 해 왔고 나는 아직도 피하고 있는 중이다. 일이 이렇게 된 건 그런 맥락이었다.

집어 던진 유니폼을 세탁 봉투에 넣어 문에 걸어 두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지갑과 시계, 선글라스만 챙기고 룸을 나왔다. 로비에는 벌써 부지런한 일행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늦었습니다.”

“아니에요. 저희도 금방 왔어요.”

“기장님 오늘 첫날이시라는데 저녁 혼자 드시는 건 좀 그럴 것 같아서요.”

사무장이 얼추 핑계를 대었다. 어쨌든 고마웠다. 나도 혼자 호텔에서 먹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행이 다 모이자 택시를 나누어 탔다. 오늘 크루 중에 싱가포르 맛집을 잘 아는 사람이 끼어 있었나 보다.

도착한 레스토랑은 일단 에어컨이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후덥지근한 날씨를 잊어버리는 데는 실내가 최고였다. 나는 오랜만에 치킨라이스를 시켰다. 너무 서민적인 메뉴 아니냐며 일행들이 타박했지만 정말 먹고 싶었다. 독일에서 동남아시아 루트는 내가 모는 기종으로 가지 않는다. 개인적인 일정이 아닌 비행으로 방문한 건 사실 처음이었다.

앞서 내가 ‘개인적인 일정’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한재이와 함께했던 스물네 살쯤의 여행을 말하는 것이었다.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 한재이가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그와 함께하는 것에 토를 단 적이 없던 나는 심드렁하게 오케이를 했고, 그는 혼자 여행 루트와 맛집 정보를 찾아 리스트로 정리한 뒤 내게 보여 주었다.

한재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작은 항상 충동적이었고 기왕 시작한 일에는 집착이 심했다. 그때 길거리 식당에서 당시 3유로 정도의 가격을 주고 먹었던 치킨라이스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만족한 내 표정을 보며 한재이가 뿌듯해했던 기억이 났다.

제길…… 또 그를 생각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기장님, 맛없으세요?”

나와 함께 리무진을 타고 왔던 그녀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나도 모르게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고 있었나 보다.

“아니요, 맛있습니다. 제가 뭘 좀 생각하느라.”

“근데 기장님 키가 몇이세요? 몰랐는데 엄청 크시네요.”

부기장이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한국 사람을 만나면 단골로 나오는 질문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건강 검진했을 때 185쯤으로 나왔습니다.”

“와, 진짜 크다. 국적은 한국이 아니신 거죠?”

“네, 독일입니다.”

“아, 이민 2세 뭐 그런 거예요?”

“아니요. 보육원에서 어릴 때 입양되었습니다.”

잘 흐르던 대화가 뚝 끊겨 버렸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괜한 걸 물어봤다 싶은 표정들이다. 나는 이런 반응에 무척 익숙하기 때문에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웃을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운이 좋아서 잘 컸거든요. 흑역사? 뭐 그런 건 아닙니다.”

최근에 배운 한국어 단어를 써서 가볍게 넘겼다. 그제야 표정들이 좀 풀어졌다. 리무진을 함께 타고 온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나는 사실 이 이야기를 일부러 꺼냈다. 그녀가 나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살다 보니 그런 것을 따지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것을 알았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저녁 식사 자리는 호텔로 돌아가 간단히 한잔하는 술자리로 이어졌다. 덕분에 부기장의 연애 이야기를 하루에 두 번 들어야 했다. 술이 조금 들어간 탓인지 7시간 전 이야기보다 조금 더 드라마틱 하게 전개가 부풀려졌다. 그래도 반응을 보니 다들 재밌어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칵테일 잔을 드는데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한재이다. 3초쯤 망설였지만 더는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간 곁을 지켜 준 우정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응, 말해.”

-우서진.

그는 항상 나를 버려진 한국 이름으로 불렀다. 목소리 참, 오랜만에 듣는다.

“왜.”

-너…… 대체 어디야?

“싱가포르. 페어몬드 호텔 2층. 샹그리에라는 바에 있어. 지금은 로비로 나왔고.”

-내가 지금 그걸 물어본 거야? 너 진짜 아예 한국 들어간 거야?

“응. 크리스한테 다 들었잖아. 왜 또 물어.”

크리스는 나의 형, 그러니까 슈미츠 부부의 친아들이다.

-왜 갑자기.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왜 그러는 건데.

“대우가 좋아서. A350 기장 구한다는데 딱 나잖아.”

한재이가 한숨을 쉬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한국은 보잉 기종이 인기가 많은 탓에 에어버스 기종을 몰 수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다. 새로 나온 A350 기종을 도입한 코리아나 에어웨이에서 좋은 조건에 기장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기회를 잡은 것뿐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그래도 나랑 상의를 했어야지. 아니, 나한테 말은 해 줬어야지. 나 완전 바보 됐잖아, 지금.

“그게 중요해?”

-뭐?

“너 바보 된 게 중요하냐고.”

-…….

“나도 너 결혼하는 거 몰랐어. 그래도 너한테 뭐라고 안 했잖아.”

나는 좀, 뭐랄까. 유치해졌다.

전화기 너머로 한재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겠다고 했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 가냐고 묻자 그는 ‘그럭저럭’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아는 한재이는 일단 뭔가를 시작했으면 집착이라고 생각될 만큼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그럭저럭’이라는 말은 한재이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단어다.

-일단 네 뜻은 알았어.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기약 없는 만남을 얘기하는 걸 보니 더 자세한 설명을 듣는 건 포기한 듯싶었다. 통화를 마칠 때까지 기젤라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말은 끝끝내 하지 못했다. 질투가 나서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이것으로 대충 이 도피 생활의 첫 단추가 끼워진 듯했다. 통화도 했고 알아들었다고도 했으니 내가 한국에 온 것이 이제 한재이에게도 기정사실화되었다. 이대로 나는 여기서 살고 그는 결혼해서 계속 독일에 머물겠지.

한 번쯤, 1년에 한두 번쯤 전화 통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몇 년에 한 번쯤은 얼굴을 볼 수도 있겠지. 그러면 그에 대한 내 감정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될 것 같았다. 나름 성숙하게 대처한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어, 기장님. 저희 이제 올라가려고 하는데.”

로비에서 통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가려니 이미 술자리는 마무리가 된 모양이다.

“네. 그럼 다들 올라가서 쉬시죠.”

나는 선 채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옆에 있던 카운터에서 계산을 했다. 아까 저녁은 더치페이를 해야 한다고 사무장이 우기는 바람에 술값은 내가 내야겠다고 이미 생각하던 참이었다. 너무 재빠른 내 행동에 차마 제지를 못한 일행들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내일 오후 비행이라 체크아웃은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았다. 마침 시설이 좋은 수영장이 딸려 있다고 하니 아침 일찍 피트니스 센터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룸으로 들어왔다. 술기운이 조금 돌다 사라지는 게 아쉬워져 미니바에 비치된 와인 한 병을 가져와 코르크 마개를 땄다.

나는 레드 와인을, 한재이는 화이트 와인을 고집했다. 화이트 와인 중에서도 리슬링을 좋아했던 그는 드라이한 맛을 좋아하는 내 취향을 이해하지 못했다. 식당에 가면 그는 항상 달콤하고 부드러운 와인을 찾았고 나는 가능한 한 오크 향이 진하게 밴 무거운 맛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항상 서로의 입맛을 타박하느라 바빴다. 나는 그를 유치원생 입맛이라 규정했고 그는 나를 노인네 입맛이라고 놀렸다. 우리에게 그런 때가 있긴 있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와인을 입에 털어 넣었다.

* * *

인천 공항에 착륙한 뒤 전성욱 부기장과 연락처를 교환했다. 회사에 아는 사람이 빨리 생겨야 적응하기가 편할 것 같은 내 욕심도 있었지만, 그는 붙임성이 좋고 성격이 좋았다. 기왕 동료를 만들어야 한다면 이런 사람이 내게 맞을 듯했다.

밤이 깊었고 회사 리무진은 30분 후에나 출발한다고 했다.

“댁이 어디세요? 김포나 방화 근처시면 그냥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아…….”

그 사람 좋은 전성욱 부기장이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목적지를 말하고 가능하냐고 되물었다.

“호텔이요? 아직도 호텔에서 지내세요?!”

그랬다. 나는 아직 한국에 살 집조차 구하지 못했다. 그만큼 갑작스레 도망쳐 온 것이었다. 한재이가 난리 치는 것에도 사실 다 이유가 있었다.

전성욱 부기장은 내가 말한 호텔 이름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뒤 차를 출발시켰다. 가는 내내 우리는 얼마 전 있었던 러시아발 항공기 사고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나를 호텔에 내려주고 방향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로비에서 도어맨이 문을 열어 주며 아는 척을 했다. 일주일 넘게 항상 인사를 하다 보니 그도 내 얼굴을 기억하는 듯했다. 물론 유니폼의 영향이 가장 컸겠지만.

“어제는 안 보이시더니.”

“네. 현지 체류 중이었습니다.”

그가 완전히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담배 한 대 같이 피우겠냐고 물었더니 잠시 눈치를 살핀다. 밤이라 지배인도 안 보이는데 뭐 어떠냐며 내가 다시 한번 권유했다. 싫지 않은 눈치인지 내가 주는 담배를 받았다.

“혼자 피우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하하. 저야 좋죠, 뭐. 파일럿이신가 봐요?”

“네. 한국 온 지 얼마 안 돼서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다.”

내가 담배를 피울 때면 한재이가 항상 상대해 주었다. 다른 친구들과 금방 피우고 온 게 뻔히 보일 때도 그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꼭 따라 나와 다시 한 대를 물었다.

그게 버릇이 돼서 그런지 나는 혼자 피우는 담배를 싫어한다. 그래서 원래 많지 않았던 흡연량이 한국에 온 뒤로 꽤 늘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된다고 나 자신을 설득 중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나는 지금 한재이를 대신할 사람을 찾은 것이다. 그를 향한 감정에 성적 욕망이 섞여 있다 보니 지금 마치 원나잇 파트너를 찾은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짙은 회색의 호텔 유니폼을 입은 도어맨은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체격이 좋았다. 한국이 아니었다면 홧김에 한번 자자고 해 봤을지도 모르겠는데. 여기서 그러면 경찰에 신고당할 것 같았다.

문득 한재이를 상대로 성욕이 든 적이 있는지 몇 번이나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그 감정이 뭔지 몰랐기에 많지는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정확히 딱 두 번 있었다.

한창 그런 쪽으로 호기심이 많았던 열다섯 살 때 우리는 처음 만나 늘 붙어 다녔다. 집에서 영화를 본다거나 이상한 잡지 같은 걸 같이 볼 때면 둘 다 한 번씩 킥킥거렸다.

아마 그는 나 역시 영화에서 나오는 야한 장면 때문에 흥분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순서가 좀 달랐다. 내 아랫도리는 아까부터 먼저 혼자 불룩 튀어나와 있던 한재이의 것을 보고 열이 오른 것이었다. 그때는 뭐, 하루에 한 번씩 자위를 했었으니까 별일이 다 있다 싶어서 그냥 넘어갔었다.

두 번째 경험은 더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김나지움(독일의 중등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였다. 한재이가 끌고 다니던 고물 폭스바겐이 시골길 한가운데서 퍼져 버렸다. 비가 심하게 왔었고 우리에겐 딱 한 대의 담배만이 남아 있었다.

질척이는 비 웅덩이와 물비린내. 나는 차에서 내린 한재이를 타박했었다. 그도 나도 차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일단 TV에서 본 대로 보닛을 열어 보았다. 딱히 뭘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던 탓에 한참 들여다보다 보닛을 닫고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비는 오고 차는 퍼졌고 해서 일단 ADAC에 연락을 하고 견인을 기다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한 대 남은 담배를 한재이가 멋대로 가져가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머리가 젖은 채 운전석에서 말보로를 문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섹시했다. 열아홉 살의 한재이는 짧은 소매의 흰색 네크라인 셔츠를 즐겨 입었었는데 아직 근육이 덜 잡힌 상체가 젖은 셔츠에 달라붙어 야하게 윤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민망해진 내가 차 안에서 왜 연기를 피우냐며 괜히 뭐라 했던 기억이 난다. 창문을 조금 열어 환기를 시키는데 비가 조금씩 안으로 들어왔었다. 그런 나를 보며 한재이는 피우던 담배를 내 입술에 물려 주었다. 자, 이렇게 너도 피우면 될 거 아니냐며 웃는 얼굴로 놀렸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유는 한재이 때문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내게 다가온 그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던 자신이 우스워서였다. 혹시 내가 게이일까, 하고 처음 생각해 본 날이었다.

“감사합니다. 들어가 볼게요.”

갑자기 상념들이 사라졌다. 내가 너무 말이 없어진 탓에 혼자 심심했던지 담배 상대가 도망쳐 버렸다. 같이 피우자고 해 놓고 나 혼자 내내 한재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가 도망가도 할 말이 없었다. 나도 그만 자리를 정리하고 룸으로 올라갔다.

선박으로 부친 짐이 한국으로 도착하기 전까지 한 달 정도가 남았다. 그전에 먼저 집을 구해야 한다. 담배 냄새가 밴 유니폼을 세탁 서비스에 맡기고 샤워를 한 뒤 잠이 들었다.

오늘부터 4일간은 비행이 없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부동산을 찾아갔다. 집이란 걸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몰라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인 전성욱 부기장에게 전화를 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나는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그랬는데 그가 마침 자기도 오늘 비행이 없다며 같이 가 주겠다고 했다. 이게 바로 정이라는 것인가. 나는 한국이 조금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타세요.”

“감사합니다. 오프라서 쉬고 싶으실 텐데.”

“아직 애가 없어서요. 이제 내년이면 이런 자유도 없습니다. 하하.”

와이프가 임신 5개월째라고 했다. 그는 익숙하게 차를 몰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차도 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집부터 해결하자 싶었다.

아는 부동산이 있다고 하더니 진짜였다. 전성욱 부기장은 부동산 직원에게 나를 가리키며 이 분이 한국을 너무 오랜만에 방문해서 잘 모르니 좋은 집 좀 소개해 달라며 말을 꺼냈다.

어디 가서 사기나 안 당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뜻밖의 조력자들을 만나서 반나절 만에 집을 구했다. 일 처리가 믿을 수 없이 빨랐다. 독일이었다면 집을 방문하는 약속을 잡는 데만도 일주일이 걸렸을 것이다. 이렇게 금방 구할 수 있었다면 호텔로 들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독일 사회 통념에 맞춰 생각하다 보니 쓸데없는 데 돈을 쓴 셈이 되어 버렸다.

나는 감사의 표시로 전성욱 부기장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가 내 손을 잡아끌고 어느 식당에 데려왔다.

“이런 거 안 드셔 보셨죠?”

선지라는 음식의 의미를 찾기 위해 검색과 번역 기능까지 동원한 나는 충격에 빠졌다. 그냥 고기가 든 국밥도 있으니 정 내키지 않으면 그걸 시키면 된다고 했다.

“뭐,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한국은 여덟 살 때 이후로 단절되어 있었다. 6년 전 비행으로 다시 방문하기 전까지 절대 찾고 싶지 않은 나라이기도 했다. 한 번씩 한재이가 한국을 들어갈 때마다 같이 가자고 권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양을 했었는데 내 뜻을 존중해 준 그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그래 놓고서 내가 아쉬울 때 이렇게 가장 먼저 찾게 된 사태를 생각하니 우스웠다.

“5년 계약하셨어요?”

“아니요. 3년입니다.”

“와, 짧다. 다시 독일 들어가시게요?”

“아니요, 그렇게밖에 조건이 안 들어와서.”

엄밀히 말해 나는 외국인 고용이다. 한국 국적을 가지고 평생직장으로 입사한 전성욱 부기장과는 경우가 달랐다. 외국인 기장들은 이들에 비해 많은 연봉을 받지만 계약 기간이 짧다. 나는 3년 후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사인했다. 그만큼 나는 다급했었다.

“다음 비행 언제세요? 나랑 겹치는 거 있나?”

그가 휴대폰을 꺼내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나는 내일 하루 대기 인력 스탠바이를 해야 했고 3일 후에는 프랑크푸르트 일정이 잡혀 있었다. 오랜만에 A380을 몰게 생겼다.

“이번 달은 같이 가는 비행이 없네요.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겹쳐요. 에어버스 쪽은 소수 인력으로 뺑뺑이 돌리는 편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에게 조종간을 맡겼지만, 이착륙 실력은 괜찮았다. 한국 조종사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깻잎 착륙’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면 훌륭했다. 그와 자주 비행을 나가고 싶었다.

“한국도 하우스 파티 같은 거 합니까?”

“아, 집들이요. 하죠. 하시게요?”

“네, 짐이 도착하면요. 그때까지 몇 분 더 아는 사람을 만들어야겠습니다.”

“금방 만드실 거예요. 벌써 잘생긴 미혼 기장님 오셨다고 소문 좀 퍼졌습니다.”

“기분 좋네요.”

“그렇죠? 하하하.”

전성욱 부기장은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첫 비행을 그와 함께하게 되어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인생에 행운이라는 것을 좀 누려 보고 싶었다.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닌 우연히 얻게 되는 행복 같은 거.

식사를 마치고 난 뒤 그가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사는 이틀 뒤에 하기로 했다. 이사라고 해 봐야 내 몸이 들어가는 게 다였기 때문에 그저 호텔에서 가방 3개를 싣고 택시를 타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계약한 집은 빌라였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새집처럼 깨끗했다. 원화로는 목돈이 없어 보증금을 내리고 월세를 더 올리겠다는 내 말에 집주인은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도장을 찍자고 했었다. 그렇게 해서 집을 얻었다.

인터넷으로 가구를 주문했다. 일주일 후 배송.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배달을 해 줄 수가 있지? 게다가 배송비가 공짜라니. 그럼 배달 기사분께 따로 팁을 드려야 하나.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나는 또 전성욱 부기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원래 그렇다는 말과 함께 ‘웰컴 투 코리아’ 하며 손을 흔들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렇게 4일이 지나고 나는 다시 비행을 위해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에 올랐다.

사실 어제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왔다. 도망치듯 떠나온 프랑크푸르트에 내 손으로 다시 착륙해야 했다. 레이오버도 3일이나 주어지다니 너무 길었다. 차로 서너 시간 걸리는 거리를 한재이가 올 일이 없는데도 괜히 마음이 심란했다.

설마 그가 보고 싶은 건가.

아아, 버스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 * *

프랑크푸르트까지는 장거리 비행이다. 항공법상 10시간 이상의 비행 시 반드시 2인 2조로 편성되는 것이 룰이지만, 오늘은 겨우 1시간 더 초과하는 탓에 기장만 한 명 더 추가되어 편성되었다.

후반부 조정을 맡기로 한 나는 옵저버 시트에 앉아 오랜만에 남이 조종하는 모습을 뒤에서 구경했다. 연륜 있어 보이는 기장과 신참인 듯한 부기장이 스탠더드 콜 아웃을 복창하고 택싱에 들어갔다.

곧이어 관제탑 클리어런스(Clearance. 이·착륙 승인)를 받은 A380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이륙에 성공했다. 이번에도 한식 메뉴는 선수를 뺏겼다. 신참 부기장에게 다음 순번을 양보하고 나는 마지막 남은 메뉴를 선택했다.

기장이 좌석 벨트 등을 꺼 준 뒤 나는 화장실을 찾았다. 복층으로 구성된 A380은 일부 비즈니스석이 2층으로 올라와 있다. 조종실 문을 열고 나온 나를 몇 명의 승객들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독일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은 승객들과 대화하는 것을 꽤나 좋아해서 종종 밖으로 나와 탑승객들과 잡담을 즐겼다. 이륙 전 조종석에 꼬마 손님을 앉혀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와 함께 비행을 나갈 때면 911 테러 이후 관계자 외 절대 출입 금지가 된 콕핏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나는 사교성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매뉴얼에 없는 일은 별로 하지 않는다. 가끔 요청이 있을 때는 몇 번 문을 열어 준 적도 있었지만 역시나 룰을 어기는 것이 찝찝했다. 내 그런 성격을 한재이는 고리타분하다며 놀렸었다.

‘한평생을 모범생처럼 살 거야, 너는.’

다시 말하지만 한재이는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 수업 중 혼자 말도 없이 나가 버린 후 그대로 집에 가 버린다거나, 연락도 없이 비행 훈련장에 찾아와서는 술을 마시러 나가자고 조른다거나.

크게 사고를 친 일 없이 자란 나는 그런 그에게 일종의 동경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기껏해야 내 감정으로부터 도망이나 치는 게 전부인 나 같은 사람에게 한재이의 캐릭터는 뭔가 영화 속 인물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식사가 끝난 뒤 1시간 정도 뒷자리에서 선잠을 취하고 조종간을 잡았다. 내게 바통을 넘겨준 기장은 곧바로 수면실로 가 제대로 된 잠을 청했다.

조종사라는 직업은 엄청난 신체적 무리를 요구한다. 시차가 뒤죽박죽되는 것은 물론이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컨디션 난조일 때가 많다. 기장 승급을 위해 한참 비행시간을 채워야 했을 때는 아침에 일어나 내가 오늘 어느 나라에 있는지조차 헷갈릴 때가 많았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젊은 내가 후반부를 맡은 것이다. 나도 나이가 들면 또 다른 후배가 나처럼 해 주리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한국 시각으로 새벽 3시가 넘어가니 역시 체력적으로 힘들어졌다. 윈도우 밖으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랜딩 준비하시죠.”

부기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Cabin crew, stand by for landing. (승무원 착륙 준비.)

오토파일럿을 끄고 수동 모드로 조종간을 잡았다. 비가 오고 있었지만 랜딩에 큰 문제는 없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활주로는 젖어 있었고 나는 이곳에서 일생의 반을 함께한 사람에 대한 기억에 젖어 있었다.

도망가는 것에 의미가 있었던가. 심호흡을 위해 큰 숨을 들이마시면 어느새 더 큰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사는 게 점점 손해만 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맥시!”

독일에 도착한 다음 날, 점심시간에 크리스를 만났다. 차로 2시간이 넘는 거리를 기꺼이 내 전화 한 통에 달려와 준 나의 형이다. 우리는 가볍게 포옹을 하고 노천카페에 앉았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거리가 아직 축축하게 젖은 채였다.

“다음부터는 여기 스케줄 나오면 바로 얘기해 줘.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은 만나겠는데?”

“그래, 다음엔 미리 연락할게.”

지금은 둘도 없는 나의 형제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엔 싫어했다. 여덟 살에 입양되던 그 순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크리스와 싸웠다.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우리는 장난감이나 사소한 먹을 것들을 핑계로 다투고 주먹질을 했다. 그러다 정이 들었고 철이 들면서 그가 내게 좋은 형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는 내게 휘둘렀던 주먹을 나를 놀리는 학교 친구들에게도 휘둘렀다. 내가 작은 사고가 나 수술을 받았을 때 두 주먹을 꽉 쥔 채 울먹거리며 병실에 서 있던 그의 소년 시절 모습을 기억한다. 크리스는 회계사가 되었다.

“실비아도 오고 싶어 했어.”

그리고 작년에 결혼을 했다.

“안부 전해 줘. 다음에는 같이 보자고.”

크리스와 5년 넘게 동거했던 실비아는 이미 내게도 가족과 다름없었다.

“참, 재이한테서 연락받았어?”

그가 식전에 나온 따듯한 빵을 씹으며 물었다. 나와 연락이 닿지 않자 한재이가 제일 먼저 연락한 곳은 크리스였다. 나는 대충 통화했다고 대답했다.

“둘이 싸웠어?”

“응.”

그렇게 말해 두는 편이 편할 듯해서 나는 긍정해 버렸다. 버터를 바르던 크리스가 나이프를 접시에 놓고 다시 물었다.

“거짓말하지 마, 맥시.”

서버에게서 샐러드 접시를 건네받던 나는 그를 쳐다보며 그게 무슨 말인지 골똘히 생각했다. 아마도 크리스는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웃었다. 역시 형한테는 속일 수가 없구나. 도망치듯 독일을 빠져나올 때 뒷정리를 해 준 것도 그였다. 오늘 그는 더 이상 모르는 척하지 않기로 결정한 듯 보였다.

“많이 좋아했어?”

그가 과거형으로 물었다.

“아니, 지금도 좋아.”

“결혼한다며.”

“맞아.”

내 말뜻을 알아들은 크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나이프를 집어 들고 버터를 덜어 내기 시작했다. 젠장. 그가 나를 대신해 욕을 내뱉었다.

크리스와 헤어지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치즈를 좀 샀다. 한국에선 구할 수 없는 종류들을 모두 담았더니 양이 엄청나다. 룸에 있는 미니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 않을 듯해서 반으로 줄이고 계산을 했다. 얼마 가지고 있지 않던 유로화를 모두 써 버렸다.

다음 날은 영화를 보러 가려고 대충 채비를 한 뒤 룸을 나섰다. 마침 호텔 로비에서 신참 부기장과 마주쳤는데 할 일이 없었던지 자신도 데리고 가 주면 안 되겠냐며 부탁을 했다.

하긴 현지인과 함께가 아니면 영화관 같은 곳엔 가기가 힘들 것이다. 독일의 영화관은 외화의 경우 대부분 더빙판을 상영한다. 오리지널 영어로 상영해 주는 곳이 어디인지 인터넷으로 알아본 뒤 택시를 불러 타고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다니엘 리가 조연으로 나오는 영화였다. 그는 최근 유명해진 한국계 혼혈 미국 배우인데 신참 부기장 말로는 한국 드라마에 한번 출연한 덕에 국내에서도 꽤나 유명해졌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 배우를 잘 몰랐다. 주연도 아니었고 평점이 좋다고 해서 킬링타임용으로 선택한 영화였는데 중반부가 되면서부터 깜짝 놀랐다.

그가 한재이를 너무 심하게 닮아 있었다. 속쌍꺼풀만 짙게 낀 긴 눈매와 끝이 가지런한 언덕 모양의 눈썹은 한재이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90에 가까운 큰 키는 덤이었다. 한재이는 항상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녀들로 하여금 한국이라는 나라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 그런 그를 쏙 닮은 배우가 있었다니.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가슴이 지하까지 쿵쿵 내려앉았다.

“아, 재밌었습니다. 두 시간 딱 때우기 좋은데요.”

“그러네요.”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부기장이 저녁을 제안했다. 우리끼리만 먹기는 그래서 객실 전화를 써서 다른 기장님도 내려오시라 연락을 했다. 셋이서 내가 자주 가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시차에 적응될 만하니 다시 한국으로 비행해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세탁을 맡겼던 유니폼이 룸 옷장 안에서 비닐에 씌워진 채 기다리고 있었다. 유니폼을 갖춰 입고 로비로 내려가니 다들 체크아웃이 한창이었다.

“저희 그냥 로비에서 쇼업 해도 되겠는데요.”

객실 사무장이 웃으며 농담을 했다. 정말이었다. 운항 계획서만 누가 가져다주면 여기서 브리핑을 끝내고 곧바로 비행을 가도 될 법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체크아웃을 끝내고 스무 명이 넘는 크루들이 우르르 공항 가는 셔틀버스에 올랐다. 레이오버가 길어 푹 쉰 모양이었는지 뒷좌석에서 재잘재잘 수다들이 들려왔다. 이번 객실 승무원조는 유난히 젊어 보이는 크루들이 많았던 덕에 분위기가 계속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그에 비해 나를 비롯한 앞 좌석 세 명의 파일럿들은 모두 표정이 굳어 있었다. 버스 밖으로 굵게 때리는 빗줄기의 모양이 심상치 않았다. 휴대폰을 열고 플라이트 정보 애플리케이션으로 프랑크푸르트의 현재 바람 세기를 확인했다.

“테이크오프 고생 좀 하겠는데요.”

부기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이번에는 기장님이 전반부 맡으시는 게 좋겠는데? 조금이라도 여기 익숙한 사람이 해야지.”

다른 한 명의 기장이 나를 보고 이륙을 맡아 달라고 했다.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다시 한번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했다.

바람 210에 풍속 25노트. 계속 이 정도만 유지해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 올라가면 정말 곤란하다. 그나마 기체가 4발 초대형 기종이라 흔들림이 적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관제탑과 교신을 하는 부기장도 잔뜩 긴장했다. 비가 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비행기는 자동차가 아니므로 미끄러져 사고가 나지는 않는다. 문제는 바람이다. 활주로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이륙 시 윈드 시어(Wind shear. 갑작스럽게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가 바뀌는 현상)를 일으킬 수 있다. 모든 조종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다.

객실 사무장으로부터 탑승객 전원 탑승 완료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비행기 문이 닫혔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맥시, 긴장 좀 해!’

8년 전 나를 다그치던 교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기욕, 걱정 말아요. 이런 날은 나도 진짜 긴장됩니다.

-Coreana 803 heavy, number1, runway 21 line up and wait(코리아나 에어웨이 803편, 21번 활주로 라인업하고 대기하세요.)

관제탑의 안내에 따라 21번 활주로로 진입했다. 수십 번도 더 왔다 갔다 했던 공항이었던 덕에 택싱은 어렵지 않았다. 빗줄기가 콕핏 윈도우를 때렸다. 오른쪽에 앉은 부기장이 관제탑에서 이륙 허가를 받고 오케이 사인을 주었다. 천천히 활주로를 미끄러지며 속도를 올렸다.

50, 80, 110, 130…….

비행기 날개에 달려 있는 스포일러가 공기 저항에 미친 듯이 떨려왔다. 130 구간에서 조종간을 더 올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혹시라도 윈드 시어를 일으킨다면 위험했다. 이륙을 포기해야 할까. 활주로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150노트까지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이륙했다.

그르르 소리를 내던 기체가 안정을 찾았다. 다행히 바람은 깊게 불지 않았었던 듯했다. 2만 피트 상공 위를 뚫고 올라간 후부터는 기체 떨림이 완전히 사라졌다.

휴…… 세 명의 파일럿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셋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뒤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들에겐 평범하게 왔다 간 해외여행 중 하나로 치부되었겠지만 사실 오늘 이륙은 많이 위험했다. 공용 교신 채널에서 많은 파일럿들이 이륙을 포기하고 게이트에서 대기하겠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기어 업 포기하실 줄 알았는데 대단하십니다.”

침묵 속에서 신참 부기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럴까 생각했었습니다.”

“속도가 이미 100 이상 나가서 어쩔 수 없으셨을 거야. 그렇죠?”

“네, 정확합니다.”

옵저버 시트에 앉아 있던 다른 기장이 알고 있다는 투로 설명을 거들었다. 순조롭게 3만5천 고도까지 올라가고 나서 오토파일럿으로 전환했다. 기내 방송을 위해 무전기를 쥐었다.

-Hello everyone, this is your captain speaking Coreana airway. Welcome to flight number 803 non-stop Frankfurt to Seoul……. (안녕하십니까. 기장입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서울로 가는 코리아나 에어웨이 803편에 탑승하신 것을……)

이륙을 맡아 준 내가 고마웠는지 두 명의 파일럿이 기내식 선택권을 나에게 먼저 주겠다고 했다.

“그럼 저도 한식을 한번 먹어 보죠.”

특별히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번이나 선택권을 빼앗겼던 덕에 한번은 먹어 보고 싶었다. 조금 긴장했던 탓인지 커피도 마시고 싶었다. 마침 사무장이 콕핏 카메라에 들어왔다. 커피는 지금 바로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문을 열어 주니 밖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클레임이라도 들어온 건가 싶어서 물었다.

“아, 네. 비즈니스 석 손님 중에 인물이 훤칠하신 분이 계셔서. 후후. 저희 애들이 좀 난리네요.”

“하하. 뭐 연예인이라도 탄 거예요?”

상대적으로 가장 젊은 부기장이 궁금해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기장님 커피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부기장님은 뭐로 하시겠어요?”

“저도 커피 좀.”

“네.”

그녀가 다시 밖으로 나갔지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재잘거리는 객실 승무원들의 소란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객실 승무원들도 사람인지라 자신들끼리 있을 때는 탑승객들의 이야기를 종종 한다. 비행을 하다 손님이 관심을 표하게 되어 번호를 주게 되거나 하는 일은 아직도 꽤 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연애를 쉽게 시작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객실 사무장이 다시 들어왔다. 커피를 받고 설탕을 조금 녹였다. 아직도 뒤쪽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옵저버 시트에 앉은 기장이 대체 누구냐며 다시 묻자 사무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니엘 리 아세요? 굉장히 닮으신 손님이 타고 계셔서요. 서로 자기가 서비스 가겠다고 저래요.”

“아, 이번에 드라마에 나온 그 미국인 친구. 우리 와이프가 아주 난리여서 기억해요.”

“본인도 아니고 닮은 사람인데도 난리인 거예요? 허허, 참.”

“후후. 이쪽이 더 잘생겼어요. 제가 봤을 때는.”

셋은 재미있다며 웃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왠지 등 뒤로 쎄한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나도 그 배우 이름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닮았다고 할 만큼의 외모를 말하면 떠오르는 건 처음부터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지난주 싱가포르에서 들었던 전화 통화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설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가 한재이라면 가능하다. 매사에 충동적이니까.

“사무장님 탑승객 명단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아, 네.”

이런 찝찝한 기분으로 계속 비행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눈으로 보고 확인을 해야 했다. 그녀가 가져다준 탑승객 명단을 훑었다. 그렇게 명단 J열을 보고 나는 절망했다.

[Jei Han (B) ST Diamond – 21A]

역시, 한재이가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5시간의 전반 비행을 마치고 조종간을 놓았다. 곧바로 수면실로 갈 거냐는 부기장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콕핏 문을 열고 비즈니스석으로 다가갔다.

승객들의 수면을 위해 조명은 모두 꺼져 있었지만 엔진 소리가 고막을 꽉 채우며 기묘한 고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굳이 좌석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모두가 잠든 어두운 기내에서 혼자 미등을 켜고 일을 하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트레이 위에는 화이트 와인이 반쯤 소모된 채 놓여 있었고 턱을 괸 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불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옆에 다가가 말없이 서 있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가 여기 왜 있는 건데. 내 표정은 아마도 그런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마치 어제도 만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첫마디를 내뱉었다.

“신기하지 않아?”

“뭐가.”

“그냥 한국 가는 제일 빠른 티켓 달라고 해서 탔는데, 아. 물론 요행을 바라는 마음에 너희 회사 티켓을 살 정도의 노력은 있었어.”

“응.”

“날씨를 보니 이륙하는 데 애 좀 먹겠다 싶었지. 나도 네 덕에 비행에 대해선 좀 알잖아. 침착하게 뚫고 올라가는 걸 보고 여기 캡틴 실력 좀 있네 싶었거든. 근데 기내 방송을 듣는데 목소리가 너인 거야. 와…… 감동적이었어.”

복에 겨운 칭찬을 듣고 나니 뭐라고 해 줘야 할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종 교대한 거야?”

“응. 그건 그렇고 네가 여기 왜 있는지 알고 싶은데.”

독일 변호사 양반이 한국에 출장 올 일도 없을 것이고. 휴가라도 받은 거냐고 했더니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한 달 정도만 재택 근무하겠다고 했어. 요즘은 법원 갈 일도 별로 없는데 괜찮지 않겠나 싶어서.”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는 건데.”

“너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어디 있겠어.”

“그러니까 왜 나 때문에…….”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앞쪽 좌석에서 잠을 청하던 승객이 고개를 들어 슬쩍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되는 대화가 수면에 방해된 모양이었다.

“잠깐 나와. 얘기 좀 해.”

그가 트레이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보다 조금 더 큰 인영이 뒤를 따라온다. 그대로 그를 데리고 뒤쪽 캐터링 카트 수납공간으로 간 뒤 커튼을 쳤다. 승무원 전용 화장실 문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왜.

“내가 그렇게 같이 가자고 할 때는 매번 거절하더니 갑자기 한국에서 아예 살겠다고 가 버린 게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꼴을 보니 전화로는 알려 줄 생각이 없는 것 같고…… 한 달 정도 옆에 있으면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뭘.”

“네가 도망간 이유.”

나는 좀 어이가 없기도 했고 내심 기분이 좋기도 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열 일 제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배덕한 행복감이 느껴졌다.

“어차피 결혼식까지 시간도 좀 남았고, 최근 몇 년간 너랑 거의 같이 있을 시간이 없었는데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일종의 베첼러 파티 같은 거지.”

그 말에 잠시 느껴졌던 행복한 기분이 다시 산산조각 나 버렸다. 결혼 전 총각 파티를 한 달 동안 나와 하겠다는 말에 복잡한 감정이 밀려온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닌 탓에 한 달 내내 그의 결혼을 축하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뭐가 되었던 적당히 방어하면서 그를 다시 독일로 돌려보내야겠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기장님, 여기 계셨네요. 어?”

갑자기 커튼이 걷히고 객실 승무원 두 명이 들어왔다. 캐터링 카트를 가지러 왔다가 나와 한재이를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한 명은 아는 분이셨구나, 하는 표정이었고 다른 한 명은 기장님이 먼저 꼬시다니, 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들이 힘들게 위 칸에서 카트를 꺼내려 하기에 대신 손을 뻗어 내려 주었다. 누군가 나이트 스낵을 요구한 모양이었다.

“기장님도 뭐 좀 가져다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손님도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말씀 나누세요.”

그녀들을 보내고 다시 한재이를 마주 보았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적당한 방어와 인내심. 다음엔 현실적인 문제들이 남았다.

“너 이러고 한국 온 거 기젤라도 알아?”

“뭐, 대충은.”

그래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거네. 나는 갑자기 인간이 어디까지 유치해질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피실험체가 된 것 같았다. 뭘 바란 건지 모르겠다. 한재이가 갑자기 내 마음을 읽어서 결혼도 다 때려치우고 나를 보러 왔다는 생각이라도 했던 건지. 실망감에 주저앉는 기분을 느끼며 한없이 초라해졌다.

“유니폼은 이 회사가 더 낫다. 아닌가, 다 거기서 거긴가? 네가 살이 좀 빠졌나 본데.”

한재이가 내 어깨를 잡다가 팔뚝으로 손을 내려 쥐어 본다. 묵직한 악력에 꽉 잡힌 내 팔뚝은 힘없이 모양을 으스러뜨렸다. 사실 한 달 사이 6킬로가 빠졌다. 정기적으로 운동을 할 여유도 없었던 탓에 근육도 좀 빠진 감이 있었고. 그런 걸 바로 알아채는 걸 보니 15년 우정이 어디 간 건 아닌가 보다.

한재이는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태닝이 좀 되어 있는 듯했다. 그는 햇빛을 좋아해 여름이 돌아오면 어디든 자리를 깔고 누워 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수업 시간 중 사라진 한재이를 찾아 네카어 강변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 기억이 많다. 그를 찾은 뒤 옆에 누워 잠들다 깨어나면 어느새 일어나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고 나면 매일 오후 3시쯤 종소리를 울리며 나타나는 아이스크림 트럭을 기다렸다. 결국엔 같은 맛을 고를 거면서 매번 트럭 앞에서 고민하는 서로를 놀려 댔었다.

나의 청춘은 그를 빼고는 도저히 그려 낼 수 없는 일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서진아.”

서른이 된 그가 현실 세계로 나를 끌어당겼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지?”

나는 먼 곳을 향했던 시선을 그에게 되돌렸다. 사람 하나 겨우 더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그와 나는 어둠 속에서 서로 다른 대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와의 우정이 나를 멍들게 했다.

“아니야.”

나는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억지로 졸린 척을 했다. 한재이를 자리로 돌려보내고 수면실로 향했다. 성인 남자 하나가 겨우 누울 만한 공간에 몸을 구겨 넣은 뒤 팔베개를 하고 눈을 감았다. 잠이라도 자야 할 것 같았는데 눈만 감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컨디션이 상당히 좋지 못했다.

* * *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착륙했다. 부기장이 세큐어 체크리스트를 정리하는 동안 기장은 엔진들을 하나씩 셧다운 시켰다. 곧바로 게이트 브리지가 연결되고 탑승객들은 썰물처럼 기체를 빠져나갔다. 화물차와 정비사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윈도우 밑으로 보였다.

부기장과 기장이 운항 일지 정리까지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그들과 함께 이동했다.

“다음 비행 언제 있어요?”

내 오른쪽에서 걷고 있던 기장이 비행 스케줄을 물어왔다. 비슷하게 일이 끝난 객실 승무원들이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바로 도쿄 일정 있습니다.”

“빡세네.”

“괜찮습니다.”

일본 정도의 거리는 당일 출장 가는 기분으로 갈 수 있다. 대부분 이런 스케줄은 나가는 승객들을 내려 주고 곧바로 귀국행 탑승객을 태워 들어오는 턴 어라운드 비행으로 이어진다. 하루 반짝 중노동에 시달리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5일간의 오프를 확인한 터라 불만은 없었다.

“수고하십니다.”

우리는 승무원 전용 심사대를 거쳐 밖으로 나왔다. 다시 회사 관계자실로 들어가 차트와 운항 기록을 반납해야 하기에 나를 비롯한 세 명의 조종사들은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누군가 ‘기장님.’ 하고 뒤에서 불렀다.

“저분, 기장님 기다리시는 거 같은데요?”

캐터링 카트 코너에서 마주쳤던 객실 승무원 중 한 명이 입국장 로비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한재이가 일어섰다. 그리곤 호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비즈니스석은 게이트 열리자마자 나갔을 텐데 날 기다린 건가 싶었다.

“아직 안 갔어?”

“어딜.”

“호텔, 아니면 숙소?”

“내가 호텔을 왜 가. 너 한국에 집 있을 거 아니야.”

이런…… 우리 집으로 들어오겠다는 뜻이었구나.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긴, 한 달이나 있겠다고 벼르고 온 사람이 호텔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왜? 곤란해?”

“아니야. 여기서 기다려. 올라갔다 올게.”

그는 씩 웃으며 다시 대기 구역 의자로 돌아갔다. 옆에 놓여 있는 작은 크기의 캐리어를 보니 알 만했다. 또 충동적으로 온 게 틀림없다. 딱 일주일만 있다 가는 사람 정도의 짐 크기였다. 크루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다니엘 리가 친구분이셨나 봐요.”

“아, 네.”

“뭐 하시는 분이에요?”

“변호사요.”

“어머, 대박…….”

한재이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크루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이구, 좀 그만해라.”

옆에서 지켜보던 객실 사무장이 웃으며 그녀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자기네들도 재밌는지 까르르 웃으며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나갔다.

운항 일지 서류들에 사인을 하고 반납했다. 나는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나머지 조종사들이 먼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로커 룸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집에 아무것도 없으니 밥을 먹고 들어가든지 장을 봐서 들어가든지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입국장 로비에 가니 한재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이동할까? 택시를 타도 되고, 회사 리무진 버스를 타도 되고.”

내 말에 그가 웃으며 둘 다 별로라고 했다. 걸어서는 못 가는데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차 렌트했어, 가자.”

렌트카 업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그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 예약한 거야.”

“방금. 10초 전에.”

아, 그래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구나. 못해도 1년에 한 번씩은 한국에 들어왔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이 나보다 더 익숙해 보였다.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은 나인데 어째서 리드당하고 있는 걸까. 캐리어 바퀴 소리만 드르르륵 들렸다.

렌트카 업체에서 차를 받고 짐을 실었다. 둘 다 피곤했지만 우리는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나와는 달리 한식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한정식집을 검색했다.

“두 분이세요? 안쪽으로 오세요.”

나는 관광을 온 외국인처럼 신기한 눈으로 한정식집을 훑으며 종업원을 따라갔다. 그녀가 안내해준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 한재이가 고른 메뉴를 똑같이 주문했다.

주문한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곧바로 밑반찬이 깔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빠르다. 아직 수저도 챙기지 못한 탓에 나는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저 테이블 밑에 있어요.”

서빙을 해 주시던 분이 테이블 밑에서 서랍처럼 수저통을 꺼내 주었다. 심지어 티슈까지 구비되어 있는 시스템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재이는 알고 있었을까.

“나도 처음엔 신박하다고 생각했었어.”

“신박?”

한재이에게서는 가끔 새로운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다. ‘신박하다’는 뜻은 새롭고 놀랍다는 의미라고 했다. 언어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 그는 신조어들을 자주 알려 주었다. 나의 한국어가 퇴화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의 영향이 컸다.

문득 6년 전쯤 홍콩으로 첫 비행을 갔었을 때의 일화가 떠올랐다. 현지 기장이 야시장에 데려가 주었는데 주문을 하자마자 직접 큰 그릇을 가지고 천막 뒤에 있던 수돗물을 받아 왔었다. 마시는 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저를 씻는 물이었다. 그냥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키지 않으면 직접 물을 떠 와서 씻는 시스템이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기분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신박하다’는 말이 딱 맞을 것 같았다. 새롭고 놀라웠다.

“그거 먹지 마. 드레싱에 키위 들어가 있다.”

나도 모르게 샐러드에 젓가락을 들이밀자 한재이가 접시를 자기 쪽으로 가져가며 나를 제지했다. 나는 몇몇 열대 과일들에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다. 나를 잘 아는 사람과 식사를 할 때는 여러모로 편하다.

그렇게 밑반찬을 축내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메인 요리가 나왔다. 잘 구워진 갈빗살과 찌개를 보며 한재이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살았으니 그 세월만큼 나보다 더 향수병이 강했다. 그는 늘 나에게 한국에서 있었던 추억들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마치 책을 읽는 듯 감상하곤 했다.

한재이는 남자들만 있는 중학교에 다녔었다고 했다. 입학하면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는 특수한 목적을 가진 학교였는데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따로 받은 과외만 열 종류가 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의 교복 사진이었다. 기숙사 방 한구석에서 친구들과 어설픈 포즈를 취하고 찍었던 사진, 거기에는 내가 아는 것보다 좀 더 마르고 앳된 얼굴의 한재이가 교복을 입고 슈퍼맨 흉내를 내고 있었다.

감청색 바지에 하얀 면 셔츠, 붉은색 짧은 넥타이와 삐뚤어진 명찰이 달린 재킷을 입은 그는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았다.

한재이는 그 사진에 나온 친구들 한 명 한 명을 내게 반복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 덕에 나는 그들에게 내적 친밀감을 느낄 정도로 그의 인간관계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정운이 있잖아.’ 그렇게 운을 떼면 나는 ‘아, 그 친구’ 하고 금방 알아들을 정도였으니까.

평상시 대화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화제 전환을 할 때 우리는 큰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두 단어만 얘기해 주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문득 정신이 들어 맞은편에서 밥을 먹고 있는 한재이를 쳐다보았다. 그를 앞에 두고서도 과거의 그를 추억하고 있는 꼴이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가는 정말 정신병자가 될 것 같아 마음이 심란해졌다.

“재이야.”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을 삼키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도망 온 거 아니니까 너 일주일 정도 있다가 그냥 가. 짐도 제대로 챙겨 온 거 같지도 않은데 일하기도 불편할 거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잖아. 한 달은 너무 길어.”

물로 입을 헹군 한재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얼굴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내 표정을 살피고 있는 듯 보였다.

“내가 온 게 불편해?”

“설마.”

“근데 왜 이렇게 기를 쓰고 보내려고 하는 건데.”

“어차피 한 달에 반은 비행 나가서 못 볼 텐데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게 나는 좀 이해가 안 돼서.”

“아.”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그가 수저를 아예 놓고 커다란 몸을 뒤로 기대었다.

“걱정 마. 사실은 나도 정리할 게 좀 있어서 그래.”

팔짱을 낀 채 다른 곳을 향한 그의 시선이 낯설어 보였다. 무엇을 정리하고자 하는지 몰랐으나 어쩌면 그는 내 핑계를 대고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러 온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고 하니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 * *

스스로도 아직 낯설어하는 집으로 들어왔다. 잠자는 곳, 먹는 곳, 앉아서 쉬는 곳 외에 필수적인 가전제품들은 이미 구비되어 있는 집이었기에 내가 주문해 둔 것들은 소파나 티브이, 테이블, 옷걸이 같은 것들이었다. 그나마도 아직 배송되지 않은 탓에 거실에는 작은 소파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정도.

도둑이 들어도 훔쳐 갈 것이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아예 문을 열어 놓고 살아도 될 만큼 텅 비어 있는 집이다.

“이사 온 지 일주일도 안 됐어. 손님은 네가 처음이고.”

“손님은 무슨.”

한재이는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각 방문을 여닫으며 구조를 확인했다. 집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두세 명이 사는 데 큰 문제가 없는 크기였다. 다행인 건 화장실도 두 개고 방도 세 개다. 거실이 부엌과 연결되어 매우 크게 나온 편이고 발코니가 안방까지 이어져 있어 공간 활용도가 높게 빠졌다고 집주인이 설명해 줬다. 그게 왜 공간 활용도가 높은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한재이가 비교적 크기가 작은 방 하나에 짐을 두고 외출을 하겠다고 했다. 어디를 가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를 내보내려는 나의 계획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일주일은 같이 지내야 하는데 너무 크게 신경을 쓰다 보면 나는 정신이 나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짐 정리를 했다. 내일 비행을 위해 필요한 것들은 그대로 두고 더러워진 옷들만 꺼냈다. 세탁물을 모으기 위해 유니폼에서 윙 배지를 떼어 냈다.

조종사 시험에 합격한 날 처음 부여받았던 윙을 기억한다. 동기 중 절반 이상은 스스로 포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절반은 시뮬레이션 훈련 중 낙오되었다. 이 윙 하나를 따내기 위해 스무 살의 나는 고군분투했다.

성적이 우수한 신규 조종사들에게는 회사에서 거주지를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가능한 한 집에서 빨리 나오고 싶었던 나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치열하게 싸웠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회사에 그대로 있었다면 점수가 꽤나 쌓여 좋은 조건으로 계약 갱신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날리면서 이곳에 와 유니폼 세탁까지 직접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헛웃음이 나왔다.

서너 시간쯤 후 한재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냐고 물으니 집 앞이라고 했다.

“좀 내려와 봐.”

그의 말대로 집 앞에 내려가니 자동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짐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침구 세트와 부엌 용품들, 청소용품과 작은 하우스 가젯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집 보러 온 사람처럼 이곳저곳 확인하더니 이걸 사러 간 거였구나.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고 있자 뭐 하냐며 트렁크 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린다. 가지고 올라오라는 뜻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짐들을 싣고 올라가는 그를 보낸 뒤 나는 돌돌 말려 있는 카펫과 침구 세트를 가지고 계단을 올랐다. 대부분은 스웨덴 조립식 가구 회사의 제품이다. 이십 대의 우리는 질리도록 이 회사 제품을 조립하고 해체해 왔기에 낯익고 반가웠다.

“숙박료 지불한 걸로 치자.”

영수증을 달라는 내 말에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는 마치 집주인처럼 구매해 온 물건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그런 것에 불만이 있을 리 없다. 우리가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한재이가 로스쿨 시절까지 옮겨 다닌 아파트만 해도 세 군데가 넘었다. 나 역시 두 번의 이사를 했고 그때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둘이서 짐을 옮겼다.

독일에서는 이사 나갈 때 이전 세입자가 페인트칠을 새로 해 주어야 한다. 덕분에 둘 다 페인트칠 실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 사람이 시트를 붙이기 시작하면 나머지가 알아서 롤링을 한다.

비상용 열쇠는 항상 서로에게 맡겼다. 직장 문제로 이사를 할 때마다 거리는 점점 멀어졌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는 가까운 데 사는 친구들을 무시하고 차로 1시간이 넘는 거리에 사는 나에게 열쇠를 맡겼다. 어쩌면 그런 것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여긴 비밀번호로 문을 열어. 문 잠겨서 집에 못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 같아.”

“아, 그랬지. 안 그래도 열쇠 달라고 하려 했는데. 필요 없겠네.”

그와 나 사이를 묶어 두고 있었던 것들은 이렇게 하나씩 깨져 갈 것이다.

별다른 감흥 없이 거실을 가로질러 간 한재이가 자신이 점령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속옷들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 소리가 들린다. 다시 말하지만, 욕실이 두 개라서 다행이었다.

둘 다 샤워를 끝내고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 나는 내일 아침 비행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 시차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탓에 새벽 3시에 잠에서 깼는데 거실에서 한재이의 전화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응. 글쎄…… 맥시 말로는 진짜 별 이유 없이 온 거라는데. 하아…… 잘 모르겠어. 더 있어 보고 판단하지 뭐. 그래, 응. 잠이 안 오네.”

다정하고, 한없이 부드러웠다. 낮게 웃는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소소한 대화들이 부러웠다. 기젤라를 아끼고 있구나.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그의 성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약혼녀와의 통화를 엿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렇게 매일 밤 통화를 하겠지. 그녀는 친구 때문에 잠시 떨어져 있자는 약혼자의 사정을 이해해 주는 속 넓은 사람이었고 나는 내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다.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모든 면에서 내가 불리했다.

* * *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컨디션이 최악인 상태였다. 출근 후 관계자실에서 부기장과 빠르게 통성명을 하고 운항 계획을 주고받았다. 2시간 반 거리인 만큼 다른 크루들과의 브리핑에서도 언급할 만한 특이 사항은 없었다. 우리는 곧바로 기체로 올라가서 이륙을 위한 점검을 시작했다.

“아, 참. 성욱이 제 동기에요. 아시죠?”

“네. 첫 비행을 같이 했었습니다.”

전성욱 부기장과 항공대 동기라고 밝힌 그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나이 서른에 FSC(Full service carrier. 대형 항공사) 대형기 기장이 된다는 것은 한국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계약으로 고용된 외국인 기장들은 사정이 달랐지만, 그들은 나를 같은 민족 대열에 끼워 준 것 같았다. 나쁜 소문이 돌지는 않았기를 바라며 그에게 젭슨 차트(Jeppesen chart. 운항 매뉴얼)를 건네주었다.

나는 계속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므로 지체 없는 이륙을 원했다. 서두르고 있는 나를 눈치 챈 부기장도 덩달아 차트를 보며 체크리스트를 빠르게 메꾸어 나간다. 그 사이 정비사가 콕핏에 들어와 정비 로그를 건네주었다. 뭔가 이심전심으로 팀워크를 이루어 낸 것 같았다.

비행기는 문제없이 이륙했다.

동해 상공을 날아오르는 기체 안에서 나는 어제 일을 복기했다. 기젤라와 무려 30분이 넘는 전화 통화를 하는 한재이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다. 당연히 시끄러워서는 아니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지새우고 새벽 6시쯤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나가기 전 방문을 열어 불편하게 잠을 뒤척이는 한재이를 깨워 내 방 침대에서 자라고 했다. 그는 눈을 비비며 나를 쳐다보았는데, 이미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날 보더니 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말리는 실랑이까지 해야 했기에 지금 컨디션이 최악인 것이다.

“연속 비행이셨어요? 피곤해 보이시네요.”

“네, 좀 그러네요.”

“랜딩은 제가 할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30분만 있으면 다시 착륙 준비를 해야 하는 탓에 짜증이 났는데 눈치 빠른 부기장이 조종간을 잡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손으로 눈을 마사지했다. 하네다 공항 관제탑의 주파수가 잡히기 시작했다.

-Tower, Coreana 776 final 7 miles south. (관제탑, 코리아나 776, 7마일 밖입니다.)

하네다로 접근 중인 또 다른 비행기가 시야에 보일 만큼 근접해졌다. 관제탑에 교통정리를 부탁하고 우리는 랜딩을 위한 콜 아웃에 들어갔다.

-Coreana 776, reduce speed 290. (코리아나 776, 속도 290으로 줄이세요.)

부기장은 하네다 공항에 굉장히 익숙한 듯 관제탑의 유도에 따라 속도를 줄이고 서클링을 시도했다. 180도를 빙 돌아 하네다 국제공항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비행기가 바다 위를 날았다.

그가 천천히 고도를 낮추고 바퀴를 내린다. 나는 300피트에서 콜 사인을 내렸다.

“기어 다운.”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부기장이 내린 뒷바퀴가 무사히 그라운드에 닿았다. 이어 앞바퀴가 터치되자 양 날개에 달린 스포일러가 열리며 바람과 마찰음을 낸다. 각도가 거의 0에 수렴하는 굉장한 소프트 랜딩이다. 인상적이다.

컨디션 난조로 통성명을 대충했던 탓에 다시 한번 운항 일지에 적힌 그의 이름을 확인했다. 뜻밖의 곳에서 실력가를 만나면 언제나 흥미롭다.

“부기장님. ATPL 이후 플라이트 시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음…… 2천 시간 정도 된 것 같네요. 랜딩 괜찮았나요?”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네, 굉장히 좋았습니다.”

겨우 2천 시간이라. 솔직히 놀랐다. 조종사는 비행시간과 실력이 절대적으로 정비례하지만,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간혹 나온다. 나도 10년간 몇 명 만나 보지 못했는데 마치 태어날 때부터 조종간을 쥐었던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부기장은 그런 부류인 것 같았다. 이런 사람과 함께 하는 비행은 자극이 된다. 유치하지만 나도 한 수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탑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난 뒤에도 우리는 콕핏을 떠나지 않았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스트레칭을 좀 했다. 곧바로 턴 어라운드 될 비행기를 위해 급유차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객실 청소가 시작되었다.

“성욱이가 집 얻는 거 도와줬다고 들었어요. 거기 저희 집이랑도 가까워요.”

“네, 다들 비슷한 동네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때웠다. 솔직히 기체 점검 받는 시간만이라도 어디 가서 잠을 좀 잤으면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지상 근무 요원 한 명이 콕핏에 들어왔다.

“오늘 일본 중학교에서 단체 수학여행이 있어서 좀 시끄러울 거예요. 그리고 탑승객 중에 뇌전증 환자분이 계신다고 노티가 들어왔는데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요.”

급박한 일이 생길 수 있는 만삭 임산부나 발작을 일으킬 수 있는 환자들은 사전에 기장이 알아 두는 편이 좋다. 물론 챙겨 주지 않는 객실 팀도 있었지만 바빴거나 잊어버렸겠거니 맘 편하게 생각하곤 했다. 탑승객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탑승 마감 직전이 제일 바쁜 시간이니까.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려보냈다.

다시 게이트와 연결되고 창이 있는 브리지를 통과한 승객들이 하나둘 비행기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탑승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우르르 브리지 창문에 몰려 비행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조종석 윈도우 바로 밑에 있던 차트를 줍다 눈이 마주쳐 버린 탓에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헤에에-’ 하는 비명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본의 아니게 사진을 엄청 찍혀 버렸다. 부기장이 그런 나를 보며 옆에서 웃었다.

돌아오는 비행은 그럭저럭이었다. 컨디션 탓도 있었지만 김포 공항이 북적대는 바람에 착륙 허가를 받는 데만도 10분이 넘게 걸렸다. 연료가 떨어지는 시간을 계산하고 여의치 않으면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포지셔닝 할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그 전에 착륙에 성공했다.

파킹 레버를 걸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제는 몸에 한계가 온 듯해서 정말이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대신 부기장이 엔진을 끄기 시작했다.

“집도 가까운데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빠르게 운항 일지를 작성하고 우리는 잰걸음으로 관계자실을 나왔다. 부기장의 외제 차 조수석 시트는 너무나 편안한 나머지 곧바로 나를 잠들게 했다. 1분 같은 30분이 지나고 그가 조용히 나를 흔들어 깨웠다. 여긴 어디지 싶었는데 우리 집 빌라 앞에 도착한 것 같았다. 아직도 낯설다.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한재이가 우리를 쳐다보며 주차장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외출했었나 보다.

“쉬세요, 그럼.”

부기장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나를 보고 다가오던 한재이가 호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물었다.

“같은 회사?”

“응. 오늘 비행 같이 하신 분.”

“잘생겼네.”

“그래? 언제 봤어, 그런 건.”

“너인 거 같아서 계속 보고 있었지. 하긴, 남자 얼굴 잘생긴 게 무슨 소용이야. 회사에 여자 파일럿은 없어?”

“몰라, 있겠지.”

“관심 좀 가져, 제발.”

그가 내 어깨에 장난스레 손을 두르며 빌라 입구로 몸을 밀었다. 1초 정도 쓸데없는 기대를 한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 * *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뻗어 버렸다. 아직 초저녁이었지만 저녁도 해결하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중간중간 한재이의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업무상 통화는 딱딱했고 연인 간의 대화는 부드러웠다. 피곤해서 다행이었다. 그런 것들에 하나하나 연연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잠이 고팠다.

한참을 잤다고 생각했다. 아침이라 짐작하며 눈을 떴는데 캄캄한 암흑이었다. 옆에서 누군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재이가 내 침대 한쪽을 차지한 채 일하는 중이었다. 노트북 모니터의 불빛이 그의 얼굴에 부딪혀 야트막한 윤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너 안 자?”

나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잤어. 아까 깨 버렸는데 이대로 일어나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

한재이도 시차로 밤을 헤매고 있었나 보다. 침대가 넓어서 다행이었다. 장정 같은 사내 둘이 자리를 차지해도 거뜬히 거리를 둘 수 있는 사이즈였다.

워커 홀릭 한재이. 베개 옆에 무수히 많은 서류가 떨어져 있었다. 그의 로펌은 법인 소송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그간 처리해 줘야 하는 건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책상 하나 주문했어. 허리가 아파서.”

그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꼬리만 올린 채 말했다.

“식탁 의자 있는데 거기서 해. 거긴 좀 나아.”

“거기서 하다 들어온 거야. 너 잠꼬대하더라.”

“어떤?”

“친어머니 만나러 갔던 날. 그때 꿈꾸는 거 같던데.”

그는 타이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지런한 눈매가 찌푸려지며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었다. 한재이를 방으로 불러들인 범인은 나였던 듯했다. 어쩐지 깼을 때 땀이 좀 난다 했다. 나는 기억도 안 나는 내 꿈에 대해 그가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완벽한 악몽임이 분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나를 낳아 준 친어머니가 독일로 찾아왔다. 어떤 이들은 그런 별것 아닌 인연을 굉장히 소중히 여겨 눈물겨운 상봉을 한다고 했다. 나의 양부모님은 위선자들이었기에 그런 가족 상봉의 장을 마련해 주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다. ‘잘 키워 줘서 고맙다.’라는 인사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장단에 맞춰 주고 싶지 않았던지 나는 선뜻 만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었다.

‘같이 가 줄까?’

한재이는 주저하는 나를 위해 그런 말을 해 주었다. 그 말에 용기가 난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와 함께 어느 이름 모를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어떤 사람일까. 나이가 많을까 적을까. 다짜고짜 안고 울면 어쩌지. 장애가 있을까. 생활이 어려웠을까. 결국엔 내가 생각이 나서 온 것일까. 그렇다면 줄곧 내가 보고 싶었을까.

그녀를 기다리는 그 시간 내내 나는 끝없이 반복되는 가설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덕에 2시간이나 지나 버린 것을 몰랐다. 한재이가 말없이 내 어깨를 잡았다.

그날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두 번 버려졌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만나고 싶다고 11시간을 날아와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고는 다시 도망가 버렸다.

어쩌면 자기만 어디 먼발치에서 보고선 가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멀리서도 열일곱 살의 동양인 남자아이를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겠지. 한재이가 아닌 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까.

언제부턴가 울고 있던 나를 한재이가 안아 주었다. 눈물을 보인 것은 쪽팔린 일이었지만 나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다시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한국에 대한 미련은 그날 모두 버렸다.

“괜찮아?”

“13년 전 일인데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평생 안 괜찮을 수도 있지. 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니까, 열 번쯤 물어보면 그때서야 대답하잖아.”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친구인 거야, 한재이. 속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 그를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뜻을 알아차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코니 문을 열고 밤부엉이가 울 것 같은 새벽 공기를 마셨다. 불을 붙이고 담뱃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끊었어.”

“뭐?”

순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되물어 버리고 말았다. 나한테 담배를 가르친 것도 한재이였고, 혼자 피우는 담배를 싫어하게 만든 것도 그였는데. 끊었다니, 언제.

“한 반년 됐지. 와…… 우리 그렇게 안 보고 지냈었나?”

“왜 끊었는데.”

“뭐, 기젤라도 싫어하고 겸사겸사.”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방어만 하자고 했는데 공격이 들어왔다. 일주일의 유예 기간이고 뭐고 당장 그를 이 집에서 쫓아내고 싶어졌다. 나는 고작 호텔 직원과 피우던 한 대의 담배에도 불륜을 저지르는 것 같은 감정을 느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경찰에 신고당하더라도 한번 자자고 해 볼 걸 그랬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불평할 수 있으랴. 담배는 백해무익한 것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옆에 서서 상대를 해 주고 있는 한재이의 다정함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불평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잘했어.”

서른이 된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제 혼자 피우는 데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 속에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밤부엉이가 구슬프게 울었다.

* * *

5일간의 오프였다. 네 소원대로 총각 파티를 열어 줄 테니 뭘 하고 싶은지를 물었다. 클럽을 가야 하나, 아님 후터스라도 가야 하나. 술을 마시고 달리는 건 둘 다 좋아하지 않는 편이니 전적으로 주인공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오랜만에 다트 던질까?”

실제로 다트를 던지러 가자는 말은 아니다. 그와 나는 어릴 때부터 휴일을 보내는 방법에 몇 가지 룰이 있었다. 먼저 각자가 하고 싶은 것들을 종이에 쓴다. 어느 정도 모이면 글자가 보이지 않게 뒤집은 뒤 방문에 붙인다. 각자 다트를 던져서 당첨된 두 개의 종이에 쓰인 대로 그날을 보내는 것이다. 물론 이 집에는 다트가 없었으므로 적당히 던질 것을 찾아 손에 들었다.

“먼저 던져.”

그가 나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잉크를 묻힌 테니스공을 가볍게 던졌다. 툭 하고 튕겨 나온 자리에는 빨간 마크가 찍혔다.

“간다.”

한재이는 마치 시구라도 하는 듯 갖은 폼을 잡았다. 그러더니 던지기 직전 자세를 풀고 그냥 가볍게 툭 공을 던졌다. 또 한 장의 종이에 마크가 찍혔다.

사실 어릴 때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공포 영화 보러 가기, 수영하러 가기, 마리화나 피우기. 때로는 동네 베이커리 파트타임 직원의 전화번호 물어보기 같은 장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번은 정말 그 장난이 당첨되어 버린 탓에 한재이가 열 살은 많아 보이는 베이커리 종업원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아야 했다. 정말 할 거냐며 거듭 그를 말렸지만 룰을 룰이라며 씩씩하게 들어가 그녀와 대화를 시도했다. 싫지 않은 웃음을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아마 둘은 그 뒤로 데이트도 몇 번 했던 걸로 기억한다.

잉크가 찍힌 종이 두 장을 뒤집었다. 둘 다 한재이의 글씨였다.

번지점프.

승마.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고작 영화 보러 가기나 등산하기 정도를 써 냈던 나에 비해 그가 제출한 위시 리스트는 화려했다. 다른 것들을 뒤집어 봐도 일출 보기, 윈드서핑, 패러글라이딩 등등…… 하나같이 거대하고 충동적이었다.

“제주도 가자.”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던 듯 그가 웃으며 속내를 드러냈다.

“굳이 나 쉬는 날에까지 비행기를 태워야겠어?”

“룰은 룰이야.”

그랬다. 룰을 어기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내 성격을 알고 있는 그에게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말을 타는 것은 언제나 즐겁지만 번지점프는 부담스럽다.

제주도에 제발 그런 시설이 없기를 바랐는데 인터넷 검색창 맨 위에 뜨는 것은 ‘국제적인 시설을 갖춘 제주도의 번지점프 시스템은……’ 이런 것들이었다. 티켓 예매를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2박 3일 정도면 충분해?”

“그래, 하루 정도는 너도 쉬어야 하니까.”

“너도 일해야 하지 않아? 휴가 낸 것도 아니라며.”

“하하. 서진아, 나 회사원 아니야.”

어쩌라고, 그래서. 나도 회사에 다녀 본 적이 없으니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제주도 가는 데 문제는 없다는 이야기인 듯 보였다. 여행이라. 그러고 보니 한재이와는 여행의 역사도 깊었다. 갑작스럽게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그였기에 희생양은 늘 내가 되었다.

둘이서 자전거만 가지고 바이에른 지방을 일주했던 일,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산악 여행을 갔던 일, 10시간 넘게 운전해서 프랑스 해변으로 무작정 떠났던 날. 그와 함께했던 그 모든 여정은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좀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나 사이에 시한부 같은 타임아웃이 다가오거나 말거나 오랜만에 둘이서 떠나는 여행에 한껏 고무되어 보기로 했다.

당일 티켓을 끊으니 회사에서 연계된 호텔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어느새 짐을 싸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한재이의 짐은 똑같았다. 여기를 올 때나 제주도를 갈 때나 그는 그저 자유로웠다.

공항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국내선 출발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라운지 창문 밖으로 B737만 네 대가 보였다. 인기 기종은 역시 다르네. 보잉사의 비행기는 조종실 윈도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오각형인 에어버스사에 비해 보잉사는 항상 직선으로 떨어진다.

파킹된 비행기들 사이로 정비사들이 분주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외항사 비행기 한 대가 토잉카에 의해 푸시백 되고 있었다. 비행기는 후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유도로에 잘못 들어선 비행기들은 그라운드에서 견인해 줘야 한다. 여기까지 와서 비행기 구경이나 하고 있는 내가 웃겼다. 뭐, 나는 그만큼 비행기가 좋았다.

“들어가자.”

출발 시간이 되었는지 한재이가 라운지 의자에서 일어섰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 곧바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만들어진 지 20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보잉 737의 좌석은 상당히 좁았다. 그래 봐야 1시간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한재이가 자신의 무릎을 내 쪽으로 밀어 넣었다.

“뭐 하는 거야.”

“보시다시피. 그렇다고 서서 갈 순 없잖아.”

앞 좌석과의 거리가 너무 좁은 탓이었는지 한재이의 긴 다리는 갈 곳을 잃고 방황 중이었다. 통로 쪽으로 다리를 내자니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 터라 내가 앉은 쪽으로 아예 방향을 틀어 버렸다. 나도 겨우겨우 몸을 구겨 넣은 탓에 우리 둘은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출발 전 객실 사무장이 내게 인사를 하러 왔다. 나는 미안하지만 자리가 남는다면 좌석을 좀 바꿀 수 없겠냐고 특별히 부탁했다. 좁은 좌석에 한껏 구겨져 있는 키 큰 남자 둘을 본 그녀가 웃으며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객실 사무장의 제안에 마음 좋은 여성 승객 한 분이 자리를 옮겨 주었다. 연결된 자리 두 개가 비었다. 나는 얼른 이 장신의 남자를 그쪽으로 유배 보내 버렸다. 덕분에 나도 구겼던 몸을 좀 펼 수 있게 되었다.

* * *

짧은 비행이 끝나고 호텔에 도착 후 각자 룸으로 올라갔다. 저녁을 함께하기로 하고 7시까지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릴 때 우리는 여행지에서 항상 같은 방을 썼었다. 첫째 돈이 없기도 했고, 둘째 같이 묵는 편이 움직이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그런 전례가 있어서였는지 제주도 호텔을 예약할 때 나는 조금 망설였다. 그래도 다 큰 성인 남자 둘이 한방을 쓴다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체크인할 때 방이 두 개라는 것을 알아차린 한재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니 나는 말을 아꼈다.

둘 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난 터라 피곤했다. 어딜 가자니 아는 데도 없고 해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한식 중식 일식 중 일식을 골랐다. 편안한 니트 차림으로 갈아입은 한재이가 먼저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섰다. 그사이 샤워라도 한 건지 콜로뉴 냄새가 연하게 맡아졌다.

“와인 할래?”

둘 다 와인을 좋아하는 탓에 음료 주문은 빠르게 매듭지어졌다. 마음에 드는 스시를 골라 주문을 한 뒤 나머지는 한재이의 선택에 맡겼다. 이것저것 테이블에 음식들이 놓이고 젓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둘 다 시장기가 돌았지만 대화를 멈추진 않았다.

“그때 그 댐에서 뛴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나? 번지점프 말이야.”

“둘이서 간 건 그럴 거야. 난 호주 비행 갔을 때 한 번 더 있어.”

아비투어(독일의 수능)를 끝내고 우리는 스위스로 자동차 여행을 갔었다. 007 시리즈에 나오는 베르차스카 220미터 댐 위에서 열아홉 살의 나와 한재이는 겁도 없이 뛰어내렸다. 나로서도 꽤 큰 용기가 필요할 만큼의 아찔한 높이였기에 그 후로 도전해 본 익스트림 스포츠가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첫 경험이 너무 짜릿해서 그랬는지 그 뒤로 계속 생각났어. 겁도 없이 내가 하자고 했잖아. 막상 그 앞에 섰을 때는 무섭더라. 너한테 지기 싫어서 억지로 뛴 것 같아.”

“뭐 나도 그랬어.”

누가 먼저 뛸 것인지 스텝이 물었는데 한재이가 호기롭게 손을 들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잔뜩 쫄았던 마음에 오기가 생긴 게 사실이긴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경쟁자였고 운동 실력도 비슷해서 방과 후 클럽에선 늘 같은 조로 묶였다.

“그래도 내가 테니스 실력은 너보다 뛰어났어.”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공으로 하는 건 내가 다 우위였어.”

“농구만 인정할게. 키는 네가 더 크니까.”

“아, 우리 진짜 한때 NBA에 미쳤었지.”

“너 갑자기 미국 가겠다고 짐 싸서 우리 집 찾아온 거 기억나?”

“그래, 그건 내가 생각해도 진짜 충동적이었어.”

코비 브라이언트를 보겠다고 부모님 돈을 몰래 훔친 그는 미국을 가자며 한밤중에 우리 집을 찾아왔었다.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무시한 채 얼른 짐을 싸라며 멋대로 트렁크에 내 옷을 구겨 넣던 그의 흥분된 표정이 떠올랐다. 어떻게 말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절 우리는 몸싸움도 곧잘 하고 다녔다. 한 번은 이슬람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 시비가 붙은 한재이가 웃통을 벗고 달려들었다. 그를 말리겠다고 뛰어갔다가 오히려 내가 더 주먹질을 해 버린 탓에 일이 커진 적도 있었다.

한재이가 나였고 내가 한재이였다. 학교 친구들은 그를 찾고 싶을 때 내게 전화를 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웃음이 나왔다.

“너네 어머니의 그 황당한 표정 아직도 기억난다.”

“걔들 양아치였어. 더 패 줬어야 했지.”

추억팔이가 재밌어진 우리는 조금 흥분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 값비싼 이야기가 저녁 시간 내내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다.

그가 웃는다.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입 꼬리를 올린다.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니 잘생긴 눈썹이 드러났다. 턱을 괴고 내 이야기를 듣다 픽 웃어 주는 모습도 좋았다. 음식을 입에 넣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쪽으로 접시를 밀어 주는 다정함도 좋았다.

내 감정을 깨닫고 난 뒤 처음으로 느껴 보는 설렘에 흠뻑 취해서 나도 모르게 와인 잔을 끝없이 리필해 가고 있었다.

“와인 더 하시겠습니까?”

“저만 같은 거로 한 잔 더 주세요. 이 친구는 그만할 거예요.”

한재이가 자기 쪽으로 내 잔을 치워 냈다. 서버는 비워진 접시들을 가져갔다. 테이블이 정리되자 나에게는 물이 담긴 잔을 밀어 넣는다.

“술 많이 늘었네. 그래도 이제 그만 마셔.”

“응. 안 그래도 똑바로 걸어갈 수 있을지 걱정되던 참이었어.”

“업어서라도 데리고 올라갈 테니 걱정 마. 그러고 보니 나한테 한번 업힌 적 있었잖아.”

“부축 한번 받은 거로 오버하지 마.”

“기억은 나나 본데?”

그가 웃으며 7년 전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다, 8년 전이었던가. 뮌헨에 있을 때였다. 내 생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한재이와 크리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동창생까지 4명이서 술 파티를 벌였다.

한재이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 함께 마시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경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날따라 기필코 그를 취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오기가 슈미츠 형제 사이에서 맴돌았고 크리스와 나는 작전을 짜고 그를 다운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다만 형이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은 턱도 없이 적은 나의 주량이었다.

싸구려 예거 마이스터 반병을 마시고 테이블에 엎어졌다. 일어날 수조차 없게 된 나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퍽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었다. 그때 바에서 주차장까지 나를 업고 갔다고 주장하는 쪽이 한재이였고 부축 조금 받은 게 다라고 우기는 사람이 나였다. 진실은 나도 모른다.

첨잔되고 있는 한재이의 와인을 보며 나는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그때가 정말 좋았어.

“지금도 좋은데,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한재이가 옅은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돌리고 있던 와인 잔을 들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입술이 벌어지며 투명한 와인 잔이 붉은 액체를 흘려보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는지 레드 와인을 주문한 그였다. 살짝 입 안에 머금은 채 향을 음미하더니 한 번에 목구멍으로 넘겨 삼킨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 것인가. 물이 든 잔을 가져가 소리까지 내 가며 원샷 해 버렸다. 열기가 올라왔다.

한재이가 손을 들어 서버를 불렀다. 물을 더 가져다 달라고 한 뒤 자신의 물 잔을 내게 내밀었다.

“입 안 댔어.”

그런 것 따위 상관없었지만 그의 손이 닿았다는 생각이 들자 욕심이 났다. 물 잔을 끌어와 내 앞에 두었다. 그가 챙겨 주는 모든 것을 사양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나는 좀 취한 것 같았다. 맞은편에 앉아 식사한다면 상대를 쳐다보는 것이 당연한데 아까부터 나를 향한 그의 시선이 과하다고 느껴졌다.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을 때는 어땠을까. 순도 100%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던 과거의 내가 부러웠다. 나는 한재이의 시선에 갇혀 물만 마시는 하마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컨디션 많이 안 좋으면 이만 올라갈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러자고 했다. 사실은 이대로 그의 방으로 함께 올라가고 싶었다. 내가 왜 방을 두 개로 잡았을까 아쉬웠다. 미친 척하고 내 방에서 한잔 더 하자고 해 볼까. 취했다는 핑계로 다시 한번 부축해 달라고 할까. 갖가지 지저분한 상상을 하는 동안 그가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쩡하네?”

따라 일어선 나를 보고 그가 웃었다. 나도 내가 우스웠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한재이는 나에 대한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버튼 옆 벽에 기대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계속 쳐다본다.

“너 왜 자꾸 쳐다봐.”

“귀여워서. 너 술 마시면 항상 무슨 생각하는지 입 꾹 다물고 강아지처럼 혼자 끙끙거리잖아. 오늘은 좀 심하네. 얼굴도 많이 발갛고. 올라가자.”

대꾸라도 해 주려 했더니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한재이가 버튼을 누르며 먼저 타라는 투로 고개를 까딱였다. 뒤이어 그가 들어와 문이 닫히고 천천히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네모난 상자 양쪽 벽에 각각 기대어 섰다. 적막이 흐르고 기계음만이 요동친다. 니트 안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나를 바라보는 한재이의 시선은 붉어진 내 목 부위 어디쯤을 향하고 있었다.

후회할 때 후회하더라도 한잔 더 하자고 말해 볼까.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오늘 식사 자리는 정말 즐거웠다. 조금 더 은폐된 곳에서 그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타올랐다.

속절없이 올라가는 층수를 보며 마음속에서 두 개의 자아가 싸우고 있었다. 시도해 봐. 그냥 별거 아닌 투로 ‘내 방 갈래?’ 정도는 물을 수 있잖아. 그런 말도 못 할 만큼의 사이는 아니잖아. 아니야. 이미 취한 걸 아는데 술을 더 마시겠다고 하는 건 속 보이는 짓이야. 마실 거면 레스토랑에서 마실 것이지 올라가자 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그때, 한재이가 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고 내게 다가왔다. 그 역시 술기운에 공간 감각이 사라졌는지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나는 등을 벽에 바짝 붙였다. 그가 마신 달콤한 레드 와인과 샤워 콜로뉴 향이 섞여 코끝을 간지럽힌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건데?”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오뚝한 코와 긴 눈매를 10센티 거리에서 감상했다. 오늘따라 네가 너무 좋아져서 더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이대로 너와 침대에서 뒹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대답해 주고 싶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몇 초 동안 정적이 흘렀다. 요동치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나는 깊숙이 가라앉고 있던 이성의 끈을 잡아당겼다.

“비켜.”

그를 제치고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한재이는 한 층 더 올라가야 한다. 안에서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가 보였다.

“방은 찾아갈 수 있겠어?”

“애 취급 하지 마.”

“하…… 까칠하기는. 그래, 그럼 쉬어. 내일 일어나서 전화한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내 욕망의 문도 굳게 잠겼다.

조용히 복도를 걸어와 룸 안으로 들어왔다. 담배가 심하게 당겼다. 호텔 안내 책자를 보고 흡연실을 찾았다. 나 혼자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한재이의 전화를 피트니스 룸에서 받았다. 체력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을 가진 덕에 아침부터 러닝머신을 뛰었다. 수영하고 싶었지만, 수영복을 챙겨 오지 않은 터라 포기했다. 어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이 아침부터 참 부지런하다며 수화기 너머로 그가 웃었다.

샤워를 끝내고 조식이 준비된 뷔페 식당 입구로 들어섰다. 룸 넘버를 말해 주고 시선을 돌려 한재이를 찾았다. 테라스 석에 커피와 토스트만 가져다 놓은 채 서류에 파묻힌 남자 손님 한 명이 눈에 띄었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사원 아니라더니 일복 터졌네.”

“알다시피 나는 좀 성실하잖아. 커피 마실래? 여기요.”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나도 손이 있고 말을 할 줄 아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챙기는 스타일이다. 연인에게는 더할까.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궁금해졌다.

“기젤라는, 잘 지내?”

“그럼. 어제부터 부모님 댁에 가 있어. 너한테 안부 전해 달래.”

어제도 통화를 한 모양이었다. 룸을 따로 잡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랬다저랬다, 밤낮으로 달라지는 내 심술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물론.”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정리하고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낀 채 내 질문을 기다렸다.

“결혼은, 네가 하자고 한 거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기 위해 냅킨을 깔고 커피에 따듯한 우유를 부었다. 각설탕 하나를 녹이며 티스푼을 저었다.

“음…… 그래, 내가 하자고 했어.”

망설이는 듯한 말투였지만 결국 긍정했다. 나는 각설탕 하나를 더 넣었다. 채 녹지 못한 설탕 알갱이들이 찌걱대는 소리를 내며 커피 잔 밑바닥에서 맴돌았다. 동거라도 1년 해 주었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곧바로 결혼이라는 걸 할 정도로 급했나. 혹시 임신한 걸까. 그런 말은 물어보지 못했다.

“그게 궁금했어?”

“응. 난 좀 아직 어색해서.”

“우리 졸업 후에도 계속 연락하고 지냈었거든. 급격하게 가까워진 건 1년 전쯤…… 빠르긴 하지. 네가 의아해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야.”

“그래. 빠르긴 하지만, 뭐 어쨌든 좋은 일이잖아.”

“그렇게 말해 주니까 고맙다. 나 좀, 마음이 불편했거든. 내가 속인 건 아닌데 네가 받아들이는 모양새가 좀, 하여튼 그랬어. 물론 네 입장에서 섭섭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인데, 결혼 얘기 그렇게 꺼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어. 내가 마치 폭탄 선언한 것 같이 되어버렸잖아. 이상하게 옛날부터 나 연애하는 얘기는 너한테 말을 잘 못 하겠더라. 아무튼 미안해.”

“사과까지 할 일은 아니야. 기젤라한테도 내 안부 전해줘. 축하한다고도 전해 주고.”

“그래. 둘이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이제 좀 가깝게 지내 줘.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이제 너희 둘이 의논해야 해.”

절친과 배우자. 당연한 그의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어 주었다.

어젯밤 그의 벗은 몸을 상상하며 내 멋대로 욕망을 품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뒤로 퇴행하기 시작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이 애달프게 나를 짓눌렀다. 술에서 깨고 꿈에서 깨어나니 현실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재이를 나눠 가질 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하는 나는 앞으로의 일이 막막했다. 어서 번지점프를 뛰러 가고 싶었다. 내가 뛰어내린 후 누군가 그 줄을 끊어 줘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쓰디쓴 아침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택시를 타고 번지점프 장소로 향했다. 깎아진 절벽 봉우리 위 지지대의 높이는 100미터쯤 되는 것 같았다. 밑으로는 일렁이는 바다가 집어 삼킬 듯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 레저 수준으로 생각하고 온 터라 살짝 놀란 것이 사실이었다. 한재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날씨는 조금 흐렸고 바람이 불었다.

“중도 포기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한번 올라가시면 걸어 내려오는 데 20분 걸리거든요. 잘 생각하세요. 가시겠어요?”

“네.”

“1인당 오만 원이요.”

입구에서 접수를 받던 스태프에게 두 명 분을 지불한 뒤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말대로 포기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남자는 계단 구석에서 훌쩍거리는 여자 친구를 안아 주며 웃고 있었다. 덕분에 덩달아 뛰지 않게 되어 안심했다는 표정이었다.

“대관절 번지점프는 왜 하자고 한 거야.”

뒤따라 올라오는 한재이에게 다 늦게 이유를 물었다.

“말했잖아, 첫 경험이 너무 짜릿해서 잊기가 힘들었다고. 왜. 무서워? 너도 안아 줄까?”

어이가 없어서 그를 무시하고 두 계단씩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니 점프 지점에 다다랐다. 오른쪽에 마련된 긴 의자 위에 대기 일행들이 서로 손을 모으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찌릿한 긴장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도움닫이 위에는 순번이 다가온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상당히 긴장한 표정의 그에겐 속절없이 안전 장비가 채워지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김주한이요.”

“네. 직업은요?”

“아, 저기, 회사원이요…….”

“네, 일행분들이랑은 친구? 동료?”

“친구요. 아씨, 야, 나 이거 못 하겠다.”

이용객의 긴장을 풀어 주려 끊임없이 말을 걸던 스태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점프를 포기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붙잡으며 주저앉았다.

“그러면 일단 여기 앉아 있다가 혹시 다시 도전하실 거면 말씀하세요. 환불은 안 돼요. 다음 오세요. 다음? 먼저 뛰실 분 아무나 오세요.”

남자의 안전 장비를 풀어 주고 있던 스태프가 다음 타자를 찾았다. 대기 인원들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순번에 놀라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뛰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앞으로 나갔다.

“뛰시겠어요?”

“네.”

“바로 장비 걸어 드릴 테니까 혹시 포기하실 거면 중간에 말씀하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우서진입니다.”

“직업은요?”

“파일럿입니다.”

“오우…… 그래서 이렇게 침착하시구나. 일행분은 친구분이세요?”

어느새 내 옆으로 와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한재이가 보였다. 나는 그를 원수처럼 노려보았다.

“네, 15년 지기 친구요.”

“좋습니다. 이제 준비되시면 뛰셔도 됩니다. 하나, 둘…….”

나는 그가 셋을 세기 전에 뛰었다.

검푸른 바다 위로 몸이 추락하고 있었다. 짜릿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왔다. 러브크래프트 신화에 나오는 크툴루가 바닷속에서 입을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일렁이는 파도 속에서 거대한 촉수가 튀어나와 내 목을 감고 끌어당겼다. 호흡이 멈췄다.

드디어 삼켜졌다고 여겨지는 순간, 나를 동여매고 있던 생의 끈이 거기까지 하라며 낙하를 멈춰 세웠다. 반동에 의해 몸이 위로 들려졌다. 나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한번 죽고 환생한 듯한 느낌이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기억에 변화가 없었다.

줄곧 한 사람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번지점프를 끝내고 우리는 다시 택시를 탔다. 기사분께 현지인이 자주 가는 맛집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수제비집을 추천했다. 도착하면 웨이팅이 있을 거라며 손수 전화까지 해서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주었다. 통화 내용을 들어 보니 자주 가는 단골인 듯했다.

역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본의 아니게 지인 찬스를 쓰게 된 우리는 곧바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칼칼한 제주도 바지락이 들어간 수제비 두 그릇이 펄펄 김을 내며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여기 장 넣어 드시면 맛있어요.”

서빙을 보시는 아주머니가 작은 장독 모양의 단지 뚜껑을 열어 주었다. 한재이의 표정을 보니 취향을 저격한 것 같았다. 하긴 저 표정은 번지점프를 마치고 난 직후부터 계속이었다. 그는 줄곧 즐거운 얼굴이었다.

“말은 어디서 탈 거야?”

“아까 전화해 봤어. 3시 전까지만 오래. 관광용 코스 아닌 곳은 한군데밖에 없더라.”

조금만 외진 곳에 들어가면 말을 보는 일이 흔하디흔한 독일이었다. 있는 집안 자제들은 어릴 때부터 승마를 배웠고 그런 것에 인색하지 않았던 양부모는 나와 크리스를 유소년 승마 클럽에 등록해 주었다.

어느 날 말을 타러 간다는 내 말에 호기심이 생긴 한재이가 구경하겠다며 따라왔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바로 나와 같은 클럽에 등록했다. 타고난 운동 체질이었던 그는 나보다 더 빨리 자세가 잡혔다. 오랜만에 달릴 생각을 하니 나도 조금 들뜬 기분이 되었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그가 알아보았다는 목장으로 향했다. 제주도 곳곳에는 5월의 늦봄이 깔려 있었다. 청량한 초목 언덕 어귀에 우리를 내려 준 택시가 쏜살같이 내려갔다. 이곳은 한국이 아닌 것 같았다.

동물의 분변 냄새가 맡아졌다. 목선이 굵은 적토마 몇 필이 울타리 안에서 건초를 뜯고 있었다. 전화를 받았던 목장 주인이 나와 악수를 청했다.

헛간 안에서 안장을 챙겨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밤색 말 한 마리를 골랐다. 만족할 만한 몸집의 중종마는 아니었지만 갈기가 고르고 다리가 튼튼해 보였다. 목을 쓰다듬으며 녀석과의 교감을 천천히 시도했다.

주인이 안장을 올려 준 뒤 규칙을 말해 주었다. 울타리가 쳐진 코스로만 이동해야 하고 30분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고른 검은색 말에 올라탄 한재이가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엄지를 들어 보였다. 나는 말없이 밤색 말 위에 올랐다.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앞으로 걷는다. 몸에 힘을 풀자 반동에 맞추어 상체가 들썩였다. 잠깐 풀을 뜯는 듯 머리를 숙였다. 나는 녀석이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한재이가 옆으로 다가왔다.

“둘이 친구인가 봐.”

그가 탄 검은 말이 밤색 말을 향해 목을 숙이며 머리를 내뻗는다. 친근함의 표시였다. 푸르르 소리를 내더니 두 말은 다시 나란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언덕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코스를 따라 이동하니 언덕을 꽤나 올라가게 되는 모양이었다. 울타리가 쳐진 수평선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구름에 가려진 태양 한 조각이 길게 수직선으로 물 위에 닿았다. 오길 잘하지 않았냐는 그의 말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혹시 다 알아보고 온 거였어?”

“물론이지.”

한재이다웠다. 유채꽃밭이 바람에 일렁였다. 그 냄새에 자극을 받았는지 밤색 말은 조금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보폭을 맞춰 주던 한재이의 검은색 말도 속도를 냈다.

“다음 비행은 어디야?”

“방콕. 이틀 체류할 거야.”

“그래. 난 너 없는 동안 일 좀 해야겠다.”

“그러지 말고 주말쯤엔 독일로 들어가. 불편하게 그럴 필요 없잖아.”

“서진아.”

그가 고삐를 당기며 말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워워- 나는 급히 왼쪽 고삐를 당겨 방향을 틀었다. 밤색 말이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의 옆에 섰다.

“진짜 아무 일 없는 거 맞아?”

아무래도 끝까지 캐낼 심산인 듯했다. 차라리 어제 술 취했을 때 물어봤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났다.

“왜, 걱정돼?”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뭐라고.”

“네가 뭐라니.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아무리 나라도 한 달이나 시간 내서 여기 와 있을 정도로 한가하진 않아.”

“그러니까 가라고. 안 갈 거면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 마. 너도 개인적인 일 보러 온 거라며.”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혼자 말을 달렸다. 명명백백 그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한재이는 잘못이 없다. 비정상적인 행동을 자꾸만 하는 나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차라리 그가 인성이 더럽고 고약한 사람이었다면 이 관계는 더 쉬웠을 것이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목에 다다랐을 때야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췄다.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누가 가져다 놓기라도 한 듯 버드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었다. 목장을 만들 때 다른 나무들은 다 베어 낸 듯했다. 이 버드나무만 너무 거대해서 베지 못한 것 같았다.

말에서 내렸다. 뒤따라오던 한재이가 나를 따라 말을 멈췄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나뭇가지에 줄을 고정한 뒤 풀밭 위에 누워 버렸다. 나무 냄새를 맡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여덟 살 처음으로 갔던 독일의 학교는 지옥 같았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 당연했다. 방과 후 활동은 그중에서도 가장 지독했다. 나는 항상 중국인 여자아이와 짝을 이루어야 했는데 그 아이에게서는 늘 나무 냄새가 났다.

왈츠 시간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타고난 재능이 없어 그 아이를 곤란하게 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중국어를 못 했고 독일어는 여전히 부족했다.

그 아이는 졸업식 전날 찾아와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열 살짜리 남자아이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호기심에 키스하자고 했다.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받았던 그 아이는 울었다. 그날 맡았던 나무 냄새에 죄책감이 배어 버렸다.

두 번째 키스는 욕망이 배어 있었다. 열네 살의 나는 성적인 호기심이 들끓었는데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 그런 것을 분출하고 싶었다. 우리는 미숙하고 어리석은 행위를 했다. 섹스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여성의 육체에 대한 호기심이 가라앉을 때쯤 열다섯의 한재이가 나타났다.

세바스챤 호프만을 우리는 바스티라고 불렀다. 여름 방학이 한창일 무렵 바스티의 생일 파티에 몇몇이 초대되었다. 언어학적인 장애가 사라진 내가 그런 친구 몇 명쯤은 쉽게 얻을 수 있을 때였다.

열 명 정도의 남자아이들이 피자를 먹으며 그 집에서 콘솔 게임을 했다. 주 종목은 당시 유행하던 축구 게임이었다. 나는 연승 무패를 달리며 한국인의 유전자를 과시하고 있었다. 어깨에 힘을 준 채 피자 하나를 입에 물고서는 기름 묻은 손으로 콜라 잔을 쥐었다.

‘그거 내 건데.’

어색한 독일어의 남자아이가 자신의 콜라를 마시고 있는 나를 보며 웃었다. 거기 모인 또래 아이 중 키가 제일 컸다.

눈매가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웃을 때마다 올라가는 눈꼬리는 우아했다. 가지런한 눈썹과 눈썹 사이에서 떨어지는 직선의 콧날이 혼혈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자주 웃는 것이 버릇인지 입술에는 미소가 걸린 채였다. 혹시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는 그의 질문에 나는 멍청하게 그렇다고 독일어로 대답했다.

하얀 치아가 드러나며 반갑다는 말을 들었다. 그에게서는 또래보다 성숙함이 묻어났다. 제일 멋있는 애가 말을 걸어 주는 것에 우쭐해졌다. 나는 알렉산더 왕을 발견한 헤파이스티온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 집 갈래?’

별다른 오락 없이 게임만 하던 아이들의 창의력에 실망한 그가 내게만 제안했다. 1승을 더 올리면 10연패를 기록할 수 있었던 나는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생일 주인공을 뒤로하고 멋대로 그 집을 나왔다.

‘이름이 뭐야? 나 한재이.’

두 손을 놓고 자전거 바퀴를 구르는 내게 그가 뒤늦게 이름을 물었다.

‘……막시밀리안.’

‘아, 그래서 애들이 맥시라고 불렀구나. 한국 이름은 없어?’

‘있어. 우서진.’

‘무슨 연예인 이름 같다. 하하.’

그는 내리막길을 먼저 내려갔다. 나도 자전거 기어를 올리고 핸들을 제대로 잡았다. 집이 어딘지나 물어볼걸. 너무 멀리 가는 건 안 되는데도 그를 쫓아 내리막길을 달렸다.

그해 방학은 신나는 일만 생겼던 걸로 기억한다.

“예전부터 네가 이유 없이 삐질 때가 있긴 했어.”

추억의 장막을 걷어 내고 한재이가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나는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내가 뭘 잘못했나 쭉 곱씹어 보는데, 의외로 나는 답을 빨리 찾거든.”

“그래서 지금도 찾았어?”

“응. 이제 안 물어볼게. 말해 주기 싫을 수도 있고 곤란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는 먼 지평선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목소리에 욕심을 비워 냈다.

“역시 똑똑하네.”

“대신 가라는 소리만 하지 마.”

그가 털썩 풀밭에 누웠다. 햇빛이 눈부신지 손으로 이마와 눈을 가렸다.

“그냥 나 좀 여기 있게 해 주라.”

말끝에는 지친 기색이 녹아 있었다. 어느새 도망자의 역할이 바뀐 듯했다.

사실은 너야말로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어 보고 싶었다. 정리하러 왔다는 그 개인적인 일 때문인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 해 준 배려가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말해 주기 싫을 수도, 곤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비밀이 쌓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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