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Take-off
제주도에서 돌아온 다음 날은 느슨한 하루를 보냈다. 한재이가 멋대로 주문한 책상이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마치 제집처럼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한재이가 사 준 냄비로 라면을 끓였다. 나는 요리를 할 줄 모르므로 불평 같은 것은 접수하고 싶지 않았다. 이 집에서 지내려면 이런 단점이 있다는 걸 알려 주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큰 주제 없이 지나가는 말들로만 채워진 하루가 끝이 나고 아침이 밝았다. 나는 잘 다려진 유니폼을 입고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덕에 컨디션이 좋았다.
브리핑 전 함께 조종석에 앉을 비행조를 찾았는데 그의 유니폼 어깨에 달린 견장이 나와 같은 네 줄이었다. 부기장이 모자란 탓에 기장만 둘을 붙여 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김경수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슈미츠입니다.”
나이는 오십 대 초반쯤, 다부진 체격으로 보아 공군 출신인 듯했다. 조심스레 물어보았는데 내 예상이 맞다며 웃어 주었다.
공군 출신 오십 대 기장이라…… 연공서열이 확실하게 잡혀 있을 것이다. 콕핏에서 스무 살이나 어린 나의 지시를 잘 받아 줄지 걱정되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인 척을 하기에는 내 한국어가 너무 유창하다.
“PIC 보시겠습니까?”
“아, 제가요? 그럴까요, 그럼?”
그는 이유도 묻지 않고 승낙했다. 운항 담당자를 찾아 포지션 변경을 요청했다. 캡틴을 그에게 맡기고 내가 부기장 역할을 맡기로 했다. 기장이라고 해도 모두 부기장 포지션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 역시 기체에 따라 훈련 시간을 채워야 하는데, 오늘 배정받은 A350은 예전에 훈련을 이미 끝내 놓은 상태였다.
포지션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김경수 기장이 브리핑 때 크루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브리핑 룸에서 나온 그가 성큼성큼 앞서서 게이트로 걸어갔다. 신기하게 오늘 객실 사무장은 지난번 프랑크푸르트 여정을 함께했던 분과 동일했다. 이렇게 자주 겹치는 건 쉽지 않은 터라 나는 그녀에게 친근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포지션 일부러 바꾸셨죠?”
그녀가 조금 속도를 내어 내 옆으로 걸었다.
“아, 네. 그냥 그러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요.”
“잘하셨어요. 김경수 기장님 제가 좀 아는데 사람이 좀, 으…… 아시죠?”
그녀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말을 삼켰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게이트 데스크에서는 지상 근무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무장의 말에 따르면 방콕은 가족 단위의 여행객이 많아 자리 변경 요청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했다. 같이 앉아서 가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걸 모두 조정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몇몇 탑승객들이 크루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어?! 기장님.”
게이트 대기 구역에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일본에서 인상적인 랜딩을 보여 주었던 부기장이었다. 피곤에 절어 하네다에서 돌아오던 그날, 친절히 집 앞까지 데려다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유니폼에 ‘조민우’라는 이름이 걸린 스트랩이 반짝였다. 조종사가 여기 있을 이유는 단 하나다.
“페리 비행(Ferry flight. 승객 없는 비행) 있으십니까?”
“네. 방콕에서 비행기 하나 가져와야 해서.”
“그렇군요. 자주 보네요.”
“네, 저도 반갑네요. 하하.”
그는 보조개가 들어간 얼굴을 하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객실 사무장도 그렇고 부기장도 그렇고, 벌써 아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김경수 기장을 앞세워 보내고 조민우 부기장과 이야기를 하며 게이트 브리지를 통과했다. 결함이 발견된 기체 하나가 정비 공장에 들어가는 바람에 방콕에 있는 파트너사 비행기 하나를 빌려 오게 되었다고 했다. 편조로 묶인 기장은 현지에서 조인하기로 했고 그는 오늘 내가 모는 비행기로 데드헤딩(Dead Heading. 업무상 무임승차)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오늘 술 약속이 잡혔다. 김경수 기장도 초대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건 오늘 비행을 해 보고 결정하자며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또래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콕핏에 들어와 분주하게 이륙 준비를 했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 한 점 없는 윈드컴 상태였다. 체크 리스트를 메꾸다 연료 요청 사항에 특이점을 발견했다.
“기장님, 추가 연료는 요청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컨틴전시(Contingency. 보정 연료) 10%까지 조정되었더라고요. 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어요?”
A350은 1시간 비행에 대략 6톤의 연료가 필요하다. 방콕까지의 비행시간은 6시간. 그렇다고 36톤을 딱 맞춰 채우는 건 말도 안 되고 대부분 비상 사태를 대비해 최소 3~10%의 연료를 더 채워 간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정 연료이며 기장의 요청에 따라 추가 연료를 채워 가는 것이 보통이다. 나였다면 6톤 정도를 추가로 요청했을 것이다.
“기장님, 디스크레셔너리(Discretionary. 기장 요청 연료)로 더 채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류 잘 타면 오히려 남아요.”
“그래도 40톤으로 6시간 비행은 빠듯합니다. 연료 더 채우시는 걸 제안 드리겠습니다.”
“내가 방콕만 수십 번 다녔는데 연료로 고생한 적 없어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캡틴, 지금 정식으로 이의 제기하는 거로 받아들이면 됩니까?”
나는 그의 굳은 표정을 보며 일단 입을 다물었다. 옵저버 시트에 앉아 있던 조민우 부기장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중개에 나설지 고민 중인 듯 보였다.
그가 왜 이러는지 나는 알고 있다. 모든 기장은 랜딩 욕심이 있는데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다. 아무리 이륙을 잘해도, 기류로 비행시간을 단축했다고 해도, 마지막 랜딩이 깔끔하지 못하면 전체 비행을 망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비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게다. 비행기 자체는 200톤인데 거기에 연료로 50톤, 100톤씩 추가된다. 연료의 단위를 리터가 아닌 무게 단위로 쓰는 것도 그 이유이다. 무거운 비행기는 펌 랜딩(Firm Landing. 접지가 횡포스러운 착륙)의 시발점이 된다. 가능한 한 가벼운 랜딩으로 그날 비행을 마무리하고 싶은 것은 어느 기장이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기록으로 남긴다. 또는 그의 경험을 믿고 지시에 따른다. 독일이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자를 택했겠지만 나는 한국에서 동료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어쨌든 법정 연료는 모두 채웠기에 항공법상 문제는 없다. 고민 끝에 그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Coreana 775 heavy, ready for take-off. (코리아나 에어웨이 775편 이륙 준비 완료.)
-Coreana 775 heavy, runway 11 line up. (코리아나 에어웨이 775편, 11번 활주로 대기하세요.)
관제탑의 활주로 배정을 받고 천천히 유도로를 향해 비행기가 움직였다. 부디 좋은 기류를 만나기를 빌며 기장의 기어 업 콜 사인을 받았다. 매끈한 이륙이었다.
* * *
“아이고, 나 화장실 좀 가겠습니다.”
기장이 좌석 벨트 점등을 해제했다. 조종간을 나에게 맡긴 그가 콕핏에서 나갔다. 나는 공용 주파수에 라디오를 맞추고 고도를 체크했다. 그의 말대로 기류가 좋았다. 10분 정도는 일찍 도착 가능할 것 같았다.
“저러다 고 어라운드(Go Around. 착륙에 실패하고 복행하는 것) 한번 당해 봐야 정신 차리겠죠?”
뒤에 앉은 조민우 부기장의 말에 나는 무전기가 꺼진 상태인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런 뒤 살짝 몸을 뒤로 젖히고 긴 숨을 쉬었다.
“포지션 괜히 바꿔 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오늘 PIC이셨어요? 왜 바꾸셨어요.”
“공군 출신 기장님들 소문을 들었거든요.”
“아아, 하하. 그래도 요즘은 많이 좋아졌는데. 예전엔 말도 못 했죠.”
한국의 파일럿들은 공군 출신이 많다. 민간 항공사의 파일럿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을 때 대부분의 파일럿들은 공군에서 전역한 전투기 조종사들이었다. 그들은 상명하복이 철저하고 기장과 부기장 사이의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그렇게 많은 부기장이 기장의 잘못된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비행기를 추락시켰다. 결국 거듭된 사고 끝에 조종석에 앉는 순간부터는 계급장을 떼고 존대를 하도록 규칙이 바뀌었다. 김경수 기장이 끝까지 나를 캡틴으로 존중해 준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숙소 W로 잡히셨죠?”
“네.”
“저두요. 8시쯤 볼까요? 여기 전화번호 좀.”
그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아직 한국 휴대폰을 개통하지 못했다. 독일 번호를 찍어 주자 그가 황당한 듯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닌 듯했다. 귀국하면 번호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10분 일찍 태국 상공에 진입했다. 수완나품 국제공항 주파수에 접속했다. 휴가철이라 활주로를 배정받는 데 시간이 걸리기 시작했다. 기류로 단축했던 10분은 허무하게 날아갔다. 총 4대의 비행기가 차례로 순서를 부여받았다. 우리는 3번째였다.
“아…… 간당간당하겠네.”
기장이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남은 연료 시간은 40분.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무전기를 들었다.
-Tower, Coreana 775 heavy, minimum fuel. Can we get the faster number. (관제탑, 코리아나 에어웨이 775편 연료 부족 상태입니다. 좀 더 빠른 번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Coreana 775 heavy, did you go around. (코리아나 에어웨이 775편, 복행하셨습니까)?
나는 기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복행도 하지 않은 비행기가 관제탑 상공 어프로치 이후 곧바로 연료가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한다. 대체 운항 계획을 어떻게 세웠기에 벌써 연료 부족을 선언한단 말인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조종간을 잡고 있는 그를 보고 깨달았다. 그가 추가 연료를 채우지 않은 이유는 랜딩 욕심 같은 조종사의 자존심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붐비는 태국 공항에서 빠른 착륙 순번을 위한 트릭 같은 것이었다.
-No, we had a twisted flight plan, Coreana 775 heavy. (아니요, 우리의 운항 계획이 좀 꼬였습니다.)
-Coreana 775 heavy, Number1. Wind 2605 runway 15R. Cleared to land. (코리아나 에어웨이 775편 첫 번째로 착륙하세요. 바람 2605 활주로 15R입니다.)
-That was ours. (우리가 먼저였어.)
첫 번째 착륙 허가를 부여받았던 비행기의 조종사가 교신 채널로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관제탑 주파수에 들어와 있는 서른 명이 넘는 동료 조종사들 사이에서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경수 기장은 활주로를 향해 접근을 시도했다. 그의 콜 사인을 복창하고 고도를 확인했다. 200피트에서 랜딩 기어를 내리고 무난하게 착륙했다.
그가 몇 번을 이렇게 연료 핑계로 새치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이 처음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썩 즐거운 비행은 아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착륙 점검을 하는 동안 조민우 부기장이 먼저 콕핏 문을 열었다. 그는 나가기 전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양손으로 엑스자를 만들어 보여 주었다. 아무래도 김경수 기장은 오늘 술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름의 태국 날씨는 외지인에게 친절하지 못하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열기를 모아 넣은 사우나에 갇힌 느낌을 준다. 지면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을 견디며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함께 비행했던 크루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객실 사무장이 아까부터 내내 통화 중이었다. 내용을 결코 엿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님이 봐 주신다고 하셔서 그런 거잖아. 우리 엄마는 뭐 맨날 애만 봐야 해? 그걸 왜 나한테 그래. 자기가 휴가 내,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다시 비행기 타고 서울까지 날아갈까? 그 얘기는 왜 또 하는데. 나는 노니, 그럼?”
왠지 듣는 것만으로도 죄의식이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발갛게 익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셔틀버스가 왔지만 탈 수 없어 보였다. 나는 고민 끝에 그녀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통화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던 사무장에게 택시 정류장을 가리켰다.
“같이 타고 가시죠. 저도 늦게 나와서.”
“아, 네. 감사합니다.”
낡은 일제 승용차를 개조한 현지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호텔 이름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휴대폰 메시지를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작게 한숨을 쉬더니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쌍둥이라서, 매번 이렇게 일이 터져요.”
그녀는 빠져나온 머리카락들을 쓸어 올렸다. 발이 아픈지 구두는 이미 반쯤 벗겨진 상태였다. 6시간 논스톱 비행이었으니 힘들었을 것이다. 가족 여행객들이 많아 기내 서비스에도 폼이 많이 들었을 테고.
“보통 이쯤 하면 지상 근무로 돌리는데 전 욕심이 많아서 아직 이러고 있네요.”
11년이라는 세월을 비행기 안에서 보냈다는 그녀였다. 그 정도 경력이면 독일에서는 톱 대우를 받는다. 아무도 지상 근무로 돌리라는 압박을 주지 않는다. 혼자 싸우는 것이 버거워 보였다.
“혹시 이따 8시쯤 시간 괜찮으십니까?”
“어머, 기장님한테 그런 얘기 들으니 설레네요.”
“오늘 데드 헤딩 하신 부기장님과 술 약속 있는데 같이하시죠.”
“세상에나. 저만 끼워 주시는 거 맞죠? 애들이 알면 난리 날 거예요.”
그녀의 호탕함에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부기장에게 먼저 물어봤어야 했나 생각했지만 직장 동료끼리 가지는 술자리일 뿐인데 괜찮겠지, 싶었다.
택시는 방콕 시내로 들어선 뒤부터 눈에 띄게 굼떠졌다. 그래서인지 호텔에 도착하니 7시가 넘어 있었다. 유니폼을 세탁 서비스에 맡기고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고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한재이의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사실 ‘눈에 띄었다’는 표현은 좀 우스웠다. ‘신경이 쓰였다’는 말로 정정해야 할 듯했다.
[비행 끝나고 전화 줘]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세 번 정도 신호가 가더니 한재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어?
“호텔이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주인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려니 민망해서.
“네가? 나 주일 학교 캠프 갔을 때 혼자 내 방에서 지내던 건 대체 누구였어.”
양부모는 종교세를 내는 크리스천이었다. 덕분에 주일 교회 일정은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때마다 주인도 없는 방에서 한재이는 혼자 뒹굴거렸다. 나를 기다린다는 핑계였지만 교수 부모님들의 눈을 피해 만화책을 볼 수 있어서였다. 그랬던 그가 어른이 되었다고 이제 와 쓸데없는 체면을 차리니 우스웠다.
-저녁은?
“기내식으로 대충. 시간이 애매해서 술 약속만 잡혔어.”
-많이 마시지 마.
“내가 알아서 해.”
-나 사실 크리스한테서 전화 받았어.
오, 주여. 나는 나의 형제가 내 허락 없이 사고 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크리스는 나보다 다혈질이고 참을성이 없었다.
-갑자기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너 그만 괴롭히고 독일로 돌아가래. 형, 동생이 번갈아 가면서 설득하는데 이젠 나도 좀 오기가 생기네.
이제야 그가 왜 빈집에서 민망해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당황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친형제보다 더 가족처럼 지낸 사이였다. 갑자기 내외하는 나와 그런 나를 괴롭히지 말라는 크리스의 말이 섭섭하게 들렸을 것이다. 환영받지 못한 사람처럼 집에 남겨져 있을 그가 안쓰러워졌다.
“신경 쓰지 마. 네가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괜찮아. 우리 집은 네 집이나 다름없는 거 알잖아.”
-그래? 여전히?
한재이는 의심하고 있었다. 답지 않은 되물음까지 하면서.
내가 너무 거리를 두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를 괴롭히는 결과를 낳고 있었다. 그는 이제 크리스로부터는 이유도 모른 채 미움까지 받고 있었다. 깨닫고 나니 미안해졌다.
“그래, 여전히. 현관문 서랍 맨 밑에 스페어 키 있으니까 가져가. 필요 없겠지만, 항상 네 거였잖아.”
그런 증거라도 들이대며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한재이는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었다. 불안해하지 말라고. 우리 우정에 변한 것은 없다고.
“그러니까 그냥 있어.”
가능한 오래, 라는 말은 생략했다. 휴대폰으로 다른 전화가 들어왔다. 조민우 부기장이었다. 시계를 보니 8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객실 사무장도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한재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럴 거야, 가능한 오래.”
그는 그 말을 생략하지 않고 내뱉었다.
한재이의 바람 빠진 목소리 한 번에 친구로서의 사명감이 들끓었다. 나는 다음 오프 3일간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캠핑을 가자고 했다. 물론 나는 그러자고 동의했다.
그와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며 다시 생각했다. 무슨 뜻일까. ‘가능한 오래’라는 말은 남은 3주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결혼을 미루겠다는 뜻이었을까. 후자라면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가 결혼을 미루는 것과 여기에 머무는 것에는 상관관계가 없다.
여기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 개인적인 정리. 그 모든 것이 그의 결혼을 방해하는 요소이길 나는 내심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젤라와의 관계에 문제가 없었다. 있었다면 내게 얘기했을 것이다. 그녀와 친해지길 바란다는 말까지 들은 주제에 나는 또 어설픈 꿈을 꾸고 있었다.
욕심이란 건 비울 때마다 채워졌다. 나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했다.
10분이나 지각한 탓에 로비로 내려가 그들에게 사과했다. 사무장이 합류하게 되었다고 부기장에게 전화해 두었기에 둘은 이미 통성명이 끝나 있었다. 목적지는 호텔 안에 있는 바(bar)로 정해졌다.
“전 그냥 맥주로 하겠습니다. 술이 약하거든요.”
“오, 안 그렇게 보이시는데?”
사무장은 땅콩을 씹으며 칵테일 메뉴를 훑었다. 나는 부기장의 추천에 따라 바텐더의 시그니처를 택했다. 부기장은 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 보였다.
“조주 기능사 자격증도 있습니다.”
“술 좋아하시나 봐요.”
“네, 좋아하는 것에는 항상 진심입니다.”
그래서 조종 실력도 그렇게 좋은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보니 좀 더 어려 보였다. 전성욱 부기장의 안부를 물었다.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었다며 그가 하우스 파티 이야기를 꺼냈다.
“성욱이가 집들이 곧 하실 거라고, 아직 안 하셨죠?”
“아, 네. 뭐 이렇게 부르면 되겠네요. 사무장님까지.”
“하아…… 기장님, 진짜 말씀만으로도 너무너무 고마운데요. 제가 쌍둥이 엄마라 오프 때는 집 밖에 못 나가요.”
“아, 그렇겠네요. 아쉽습니다.”
“그럼 뭐, 성욱이랑 셋이서 하죠. 치킨이나 시켜 먹으면서.”
“집에 친구가 와 있습니다. 넷이 되겠네요.”
“아! 혹시 그 다니엘 리 닮은 분?”
그러고 보니 사무장은 그날 입국장에서 기다리는 한재이를 보았다. 너희 집을 두고 왜 호텔로 가냐는 그의 말도 들렸을 것이다. 주문한 맥주와 칵테일 두 잔이 나왔다. 사무장은 휴대전화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근데 친구분 꽤 오래 계시네요? 벌써 일주일은 지나지 않았나?”
“네, 한 달 정도 있겠다고 하네요. 결혼 전이라 그런지, 뭐 싱숭생숭한가 보죠.”
나도 모르게 적당히 둘러댄 말인데 그럴듯한 이유가 되었다. 아, 설마 진짜 그런 건가 싶었다. 막상 결혼하려니 마음이 복잡해서 잠시 바람 쐬러 온 건가.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다.
“알죠, 알죠. 저도 그랬거든요. 내가 이 결혼을 하는 게 맞는가. 실수하는 거 아닐까? 저 사람이랑 평생 살 수 있을까 싶고. 좋은 시절 다 갔다 싶고.”
“여성분들이 특히 그렇다더군요.”
“남자들도 비슷해요. 저도 그랬거든요.”
“어머, 부기장님 결혼하셨는지 몰랐어요.”
“안 했습니다, 직전에 파혼했어요.”
파혼이라. 솔깃한 단어였다. 그가 파혼에 이르게 된 경위가 상당히 궁금해졌다. 물어보면 실례가 될 수 있겠지. 같은 생각이었는지 사무장도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색한 분위기에 부기장이 웃으며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칵테일을 목구멍으로 쏟아 넣었다. 그는 같은 것으로 한 잔 더 주문했고 사무장은 조심스레 자신의 경험담으로 주제를 이어갔다.
“뭐, 결혼이라는 게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잖아요. 그래서 했거든요, 저는.”
“남편 되시는 분이랑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아유…… 뻔하죠. 탑승객이었어요.”
일전에 내가 부러워했던 ‘쉬운 연애’의 길이었다. 번호를 물어보고 관심을 표하고, 만난다. 가까워지고, 마음을 쏟고. 그렇게 연애를 했다고 했다.
“그때 제가 좀 잘 나갔었거든요. 막 연예인들한테 번호도 많이 따이고, 후후. 기장님은 결혼 아직이시죠?”
“네,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말도 안 돼. 여자 친구도 없으세요? 소개해 드릴까요?”
사무장은 이렇게 좋은 소개팅 감이 두 명이나 걸려들었다며 당장 날을 잡자고 했다. 부기장과 나는 동시에 손사래를 치며 사내 연애는 사양하겠다고 그녀를 말렸다. 마음 바뀌면 언제라도 말하라는 그녀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내일 새벽 비행이 있는 부기장을 배려해 술자리는 일찍 끝이 났다.
담배를 피우고 올라가겠다는 말을 하고 로비를 나왔는데 부기장이 따라왔다. 흡연자를 보니 반가웠다. 바깥 공기가 여전히 더웠다. 체온보다 높은 온도를 피부로 느끼며 불을 붙였다. 호텔 옆 상가들이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플라스틱 통에 쓰레기가 잔뜩 쌓였다. 썩은 내와 향초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이제는 담배 연기까지 더해졌다.
우리는 새로 결함이 발견된 보잉 737 맥스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잡담을 했다. 부기장이 아는 외항사 파일럿 한 명은 이륙 5분 만에 다시 착륙해야 했다. 만약 그대로 만 피트 이상 뚫고 갔다면 공중분해 되었을 것이다.
어쩌다 에어버스사의 기종을 선택했는지에 관한 경험담이 오갔다. A320으로 시작한 그는 작년까지 LCC(Low cost carrier. 저가 항공사)로의 이직을 고민하다 결국 회사에 남기로 했단다. 대화가 즐거웠다. 아쉬운 마음에 담배 한 대씩을 더 물었다.
“기장님 집에서 골목 끝까지 가면 24시 편의점 있죠? 거기 왼쪽으로 돌면 나오는 수성 아파트, 저 거기 살아요.”
“아, 정말 가까웠군요.”
“신혼집으로 마련한 건데 혼자 살고 있죠. 하하.”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렇군요.’ 정도의 말을 내뱉었다. 내가 입양되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때의 느낌과 같았을까? 부기장 역시 나의 반응을 즐기며 미소 지었다.
“별거 아닙니다. 결혼 준비하던 커플 열에 둘 정도는 파혼해요.”
“몰랐네요. 친구한테 말해 줘야겠는데요.”
“아, 그러고 보니 친구분은 휴가라도 내신 거예요? 직장인 아니에요?”
“재택근무 한다고 하네요. 뭐 알아서 하겠죠.”
나는 담배 연기를 내뿜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화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부기장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친하신가 봐요. 휴가도 아닌데 한 달이나, 게다가 수천 킬로 떨어진 친구 집까지 굳이.”
나와 한재이의 관계를 모른다면 그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싶었다.
나는 많이 친하다는 뜻을 한 번에 표현할 수 있는 한국어를 찾는 데에 실패했다. ‘특별하다’는 단어는 너무 의미 있어 보이고, 15년이라는 숫자도 객관성을 잃었다. 그렇게 따지면 중학교 동창들은 죄다 15년 지기 친구들일 것이다.
엉성하게 계속 이어지는 나의 설명에 조민우 부기장이 어깨를 쓱 올리며 알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웃었다. 왠지 한재이를 향한 내 불손한 속을 들켜 버린 것 같아 약간의 창피함을 느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 손으로 불씨를 껐다.
올라가기 전 그는 집들이 날짜를 정하면 알려 달라고 했다. 나는 내일 비행 잘하라는 말을 건네고 그와 헤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부터 2시간을 호텔 피트니스 센터에서 보냈다. 그런 다음 낮잠을 자고 점심을 먹었다. 오후 늦게 마켓 구경을 가자는 사무장의 연락을 받았지만, 객실 승무원들의 여정에 나 혼자 낄 자신은 없었다.
티브이를 틀어 보았다. 스위트룸이라 그런지 유료 채널들이 결제되어 있었다. 생각 없이 리모컨을 눌러 대던 나는 채널 하나에 시선이 고정된 채 돌처럼 굳었다.
“…….”
동성애 문화에 개방적인 태국이라 그런지 성인 채널에 게이 포르노가 방영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화면 속 남자 둘의 행위를 뜯어보았다. 남자끼리의 섹스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것에 부끄러워할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었지만, 노골적인 영상으로 접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 무섭고 설레었다.
화면 속에선 백인 남자 두 명이 헐떡이고 있었다. 적나라한 동작과 표정에 이것이 정말 포르노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진짜로 느끼고 있는 걸까, 호기심이 일었다. 새삼 눈앞의 광경에 거부감이 없는 걸 보니 내가 이쪽 취향이 확실히 맞는 것 같기는 했다.
밑에 깔린 남자가 신음하며 침대 시트를 뜯고 있었다. 상위를 점령한 갈색 머리의 남자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 나는 어느 쪽인가. 둘의 표정을 번갈아 가며 감상했다. 갈색 머리의 눈동자가 카메라를 향했다.
순간 누군가를 떠올린 나는 수치심이 치밀어 올랐다.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심란한 마음에 담배를 피우러 호텔 밖으로 나갔다.
빵빵거리는 도로의 소란함, 퇴근길의 부산스러움이 한꺼번에 들려왔다. 초저녁이 된 방콕 시내의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나는 그 거리를 혼자 걸었다.
자랑할 만한 옷차림을 한 직장인이 150㏄ 스쿠터를 타고 퇴근을 한다. 말쑥하던 빌딩 옆으로 간이음식점들이 생겨났다. 깨끗한 인도 위에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이고 백열전구들이 하나씩 켜졌다. 저녁을 해결하려는 일행들이 간이 테이블 위에 앉는다. 용기 있는 관광객들이 그 옆을 차지했다.
어느덧 낯익은 풍경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도로 반대편에서 앳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유행이 지난 청바지에 시스템 오브 다운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길게 내려온 앞머리로 눈이 반쯤 가려진 채 혼자 휴대폰을 본다. 그러고는 야시장 입구를 돌아보았다. 일행을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의 꾹 다문 입술이 움직였다. 누군가를 부른다. 한 남자가 달려와 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혼자 있을 때의 표정과는 딴판이다.
남자는 도넛같이 생긴 스낵 하나를 그의 입에 물려 주었다. 너무 달아서 뱉어 냈던 기억은 조작된 것이었나 보다. 나는 한숨을 쉬고 담배를 꺼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빛 하나가 사라졌다. 도넛을 입에 넣은 그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스물둘의 나였다.
눈을 깜빡이며 이쪽을 응시한다. 어깨에 둘러진 한재이의 손이 그만 가자는 듯 재촉했다. 둘의 모습이 인파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담배를 문 채 청춘의 여운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 여행이었다.
이 싸움은 내게 너무 불리하다. 이 지구 어느 곳에도 한재이와 함께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작은 사찰 안에 불상이 높게 모셔져 있었다. 담장이 낮아 안이 훤히 보였다. 붉고 노란 미등이 장식을 비추고 있었다. 승려들이 불상을 모시고 관광객들은 담장 밖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들어가도 됩니까?”
나의 영어를 알아들은 건지 승려 한 명이 손을 모으고 합장을 했다. 간단한 태국어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향냄새가 피어올랐다. 묘하게 마리화나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풀어지는 신경 때문인지 아까 보았던 게이 포르노의 장면이 몰려왔다. 더러운 육신을 신전에 들여놓은 듯한 죄책감이 들었다.
학교에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떠올렸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을 떠난 싯다르타는 기녀 카말라를 통해 사랑의 즐거움을 배웠다. 그녀는 독사에 물려 죽었다. 죽어 가는 카말라가 벌거벗은 채 불상 밑에서 헐떡이는 것이 보였다. 사랑과 욕망으로 채워진 눈동자가 일렁이며 내게 말을 걸었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방콕에서 돌아오는 비행을 마치고 나는 신차 계약을 하러 갔다.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간 것은 나름의 전략이었다. 차에 큰 관심이 없는 나는 가장 빨리 출고될 수 있는, 그리고 중고로 팔기에 가장 무난한 모델을 골랐다. 일주일 후 인도받기로 했다. 정착을 위한 두 번째 단계라고 해 두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니 9시였다. 현관문을 열자 컴컴한 거실이 나를 덮쳤다. 벗어 둔 신발을 보니 집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기척이 없었다. 자동 점등이 꺼지기 전에 부엌으로 가 미등을 켰다.
한재이가 쓰는 방문은 열려 있었고 어두웠다. 내 방 침실 문을 여니 흩어져 있는 서류들과 함께 잠이든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불은 켜지 않았다. 침대 시트 위로 쏟아진 서류를 정리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한국 시각 9시면 독일은 점심시간이다. 그가 대체 어느 나라 시차에 맞춰 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왔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어두운 방 안에서 대충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한재이의 옆에 누웠다. 그를 깨워 딱딱한 바닥에서 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보인 살짝 열린 방문으로 미등 빛이 흘러들어왔다. 물을 마시면서 끄고 와야지,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고단한 비행이 수마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깊은 새벽,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꽉 막힌 터널을 뚫고 나온 느낌이었는데 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재이가 깨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혹시 내가 깨웠어?”
그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랬구나. 나도 모르는 내 잠버릇을 알게 되었다. 근사한 눈매가 어둠 속에서 깜빡였다. 그와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익숙한데 내가 느끼는 감정만이 낯설었다. 그를 위해 견디기로 한 결심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평범한 대화를 시도했다.
“침대 주문해 뒀어. 바닥에서 자는 거 불편할 거 같아서.”
“고마워.”
목소리는 점잖게 깔렸다. 깨어 있던 시간이 오래되었는지 목이 잠겨 있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부터 종종 자는 나를 구경하는 것이 취미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비행은 어땠어?”
적막감을 깨고 그가 물었다.
“그럭저럭.”
“우리 방콕 여행 갔을 때 생각난다.”
“응.”
긍정한 것치고는 자신 없는 내 목소리에 한재이가 말을 보탰다.
“기억 안 나? 그때 유행했던 TV 쇼 있었잖아. 그거 보고 카오산 로드를 가야 한다고 내가 티켓 먼저 끊고 너한테 말했던 거. 덕분에 너는 바비큐 파티를 취소해야 했어.”
생각났다. 그 당시 나는 훈련 동기들과 작은 이벤트를 계획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배낭을 메고 들이닥친 한재이 때문에 모든 게 날아가 버렸다. 내 여권 번호까지 알고 있는 그는 이미 티켓 발권까지 마친 뒤였다.
그렇다고 내가 화를 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한재이는 내게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안 가 본 데가 있을까?”
지겹다는 듯 말했지만, 일종의 자랑이기도 했다.
“많아. 아프리카, 사막, 북극, 아마존.”
“이제 목숨 걸고 가야 하는 곳들만 남았네.”
“무서우면 죽을 때쯤 해서 갈까?”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한재이, 너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 말은 내가 죽을 때쯤까지 옆에 있어 주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가 허기진 내 욕망에 다시금 양분을 채워 넣었다.
“사막은 진짜 가고 싶다.”
예전부터 나는 사하라에 가고 싶었다. 조종사였던 생텍쥐페리는 사하라에 불시착해 어린 왕자를 만났다. 나도 그림 실력이 형편없었지만, 적어도 모자처럼은 보이지 않는 보아뱀을 그릴 자신이 있었다.
내 설명이 끝이 나자 한재이가 소리 내 웃었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응시한 채. 나는 문득 그 눈빛에서 애정을 느꼈다. 그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물론 친구로서 말이다.
“그래 가자, 곧.”
꿈을 꾸듯 거짓말을 하는 그를 믿고 싶어졌다. 애석하게도 그때 전화가 울렸다. 침대 위에 던져져 있던 한재이의 휴대폰에 기젤라의 이름이 떴다. 늘 통화하던 시간이었다. 이쪽은 새벽인 줄 알면서 이 시간을 고집하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민하는 그의 모습에 영겁의 시간이 흘렀다.
“안 받고 뭐 해.”
그를 떠밀어 보내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타적인 행동 따위는 아니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얕은 트릭일 뿐이었다.
“그래, 나야.”
왠지 모르게 한층 낮아진 톤으로 전화를 받으며 방 안을 나가는 한재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게 시끄러울 것을 염려했는지 방문이 닫혔다. 이제 완벽한 어둠이 깔렸다.
그 어둠 속에서 싯다르타가 충고했다. 기녀 카말라는 독사에 물려 죽었다.
여행에는 늘 진심인 한재이가 캠핑카를 끌고 왔다. 어디서 어떻게 이런 카라반을 하루 만에 빌려 온 건지 놀라웠다. 예전부터 그는 연금술사 같은 기질이 있었다. ‘내가 알아볼게’라는 한마디면 마법 같은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내가 그와의 여행을 좋아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침을 먹고 곧바로 떠나려던 우리의 계획은 조금 틀어지기 시작했다. 온라인으로 주문해 둔 가구가 온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거실 소파는 절실했다.
배달 기사가 2시간 뒤에 도착할 거라는 소리에 우리는 집을 나왔다. 그 시간 동안 장을 봐 두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캠핑에 필요한 일회용품들을 사야 했다.
바이스부어스트(뮌헨의 전통 소시지)를 사고 싶었지만 구할 수 없었다. 맥주와 치즈, 올리브를 카트에 담았다. 캠핑카에 포함된 버너의 화력을 알 수 없었기에 가능한 조리를 하지 않고 지낼 수 있게 채워 넣었다. 담요와 휴지, 배터리와 라이터도 담았다.
“더 사야 할 거 있을까? ……어?”
뒤를 돌아보았는데 한재이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물품 구매를 하고 있는데 도와주지도 않고 매장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계산을 할 때쯤 나타나서 카트에 무언가를 넣었다. 휴대용 스피커와 LED 램프였다. 꽤나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기에 다른 말 없이 잘했다고 칭찬만 해 주었다. 우리는 간신히 2시간 안에 집으로 돌아왔다.
배달 기사분들은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우리 둘을 포함해 남자 네 명이 일곱 점의 가구를 옮겼다. 몇 가지는 집 안에서 조립해야 했기에 거실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그들이 가고 나서 앉아 본 소파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이제 좀 사람 사는 집 같다.”
한재이가 체중을 실어 소파의 쿠션감을 체크했다. 나도 그 옆에 몸을 앉히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벌써 저녁 시간인데 내일 갔다 하루 만에 올까, 그냥?”
“무슨 소리야, 지금 출발하면 완벽해.”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일어나라고 한다. 나는 좀 고단함을 느꼈기에 이런 그의 활기참이 원망스러웠다. 차량에 짐을 실었다. 그런 다음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채웠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건데?”
“대관령.”
“운전은 1시간씩 교대해, 그럼.”
그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미안하게도 나는 고속도로 분기점이 지나기도 전에 잠이 들어 버렸다.
덜컹덜컹대는 소리에 잠이 깬 것은 출발한 지 3시간 후였다. 밤이 고요하게 내려앉은 산길을 통과하는 카라반이 도로에 떨어진 돌을 밟으며 소리를 냈다.
“왜 안 깨웠어. 교대해.”
“여기서 못 세워. 반대편에서 차라도 오면 어쩌려고.”
“안 피곤해?”
“피곤해.”
그는 솔직하게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구글 맵이 작동하지 않아 불편했다. 한국에서 쓰는 다른 지도 앱을 다운받았다. 대관령을 가는 길목쯤인 듯했다. 창문을 내려 밤기운을 쐬니 정신이 맑아졌다. 앞뒤가 꽉 막힌 산길이다. 시야가 트여 있는 알프스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터널 하나를 통과하고 나서야 비교적 평평한 구릉지가 나왔다. 한재이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애타게 찾았다. 향이 날아간 드립백 하나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주었다. 야영 중에 맛을 탓할 수는 없다. 나는 그를 달래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대를 잡았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캠핑장이 있었다. 서둘러 입장을 하고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캠핑장이라고 해 봐야 식수대와 화장실이 전부였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밥을 먹기에는 늦은 시간이라 치즈와 맥주가 트레이 위를 차지했다. 뒷문을 열고 가림막을 설치했다. 허리를 숙인 산맥들 너머로 달이 보였다. 한재이의 휴대용 스피커에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울려 퍼졌다.
그는 LED 램프 스위치를 껐다 켰다 반복하며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나는 간신히 서늘함을 유지한 맥주를 들이켜고 상체를 젖혔다. 두 팔로 무게 중심을 잡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좀 보이는 거 같아?”
“몇 개는 확실히 보인다.”
별이란 건 수소 덩어리가 타 버린 흔적이다. 우주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넓어서, 1초에 30만 킬로를 이동하는 빛이 지구에 다다를 때까지 몇 만 년이 걸린다. 우리가 보는 저 별은 이미 타고 없어진 존재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허상과 죽음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음 비행은 어디?”
“파리.”
“아,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도시.”
“네 여름 학기를 통째로 날린 곳이기도 하지.”
“넌 직업을 진짜 잘 고른 거 같다. 가끔은 네가 같이 파일럿이 되자고 우겨 주지 않아서 섭섭한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내가 우겼다면, 정말 할 생각이 있었어?”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네가 하자고 했다면.”
그와 함께 훈련을 받고 비행을 나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우리가 비슷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그 일상은 너무도 찬란해서 수소 덩어리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우주는 참으로 좁아서, 그 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가 조금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살면서 후회한 적 있어?”
옅은 미소를 걸고 있었지만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간간이 들려오던 다른 야영객들의 대화 소리가 잦아들었다.
“왜 없겠어. 너를 따라 한겨울 보덴지 호수에서 수영한 게 가장 후회돼.”
“아, 하하, 맞아. 우리 둘 다 감기에 걸려서 며칠 앓아누웠지.”
가볍게 받은 내 대답에 그가 꽤 길게 웃었다. 나를 떠보려는 건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최대한 그 웃음을 받아 농담처럼 물었다. 그러는 너는 후회하는 게 있는 건지. 대답은 의외로 묵직했다.
“매 순간 후회해.”
그의 얼굴에 서늘함이 잠시 비쳤다 사라져 버렸다.
“난 늘 충동적이잖아. 하하.”
그러더니 그따위의 핑계를 대며 빠져나갔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맥주와 함께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가 갑자기 일어나 담요를 가지고 나왔다. 춥냐고 물어보는데 담요가 내 무릎 위에 떨어졌다. 그 위에 멋대로 머리를 베고 누워서는 예의 그 긴 다리를 접었다. 스피커의 노래는 어느새 ‘우주 괴짜’로 바뀌어 있었다.
“우서진, 궁금한 게 많지?”
허벅지에 전해지는 그의 체중이 나를 강하게 눌러 내렸다.
“뭐든 물어봐. 다리 베개 해 주는 대가로 대답해 줄게.”
한재이는 눈을 감은 채 곧 잠이 들 것처럼 굴었으므로 나는 빨리 기회를 잡아야 했다.
“정리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일은 뭐였어?”
감은 눈은 뜨지 않고 입술에 미소만 걸렸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뜻이었다.
* * *
우리는 구릉지 밑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마쳤다. 캠핑장에서 나온 뒤부터 계속해서 드라이브를 했다. 한 번씩 목이 좋은 장소가 나오면 차를 세웠고, 경치를 구경하며 커피와 스낵으로 허기를 때웠다.
마침내 배고픔이 극강에 달했을 때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 둘 다 동의했고 우리는 한재이가 알아봐 둔 산장 음식점을 향해 차를 몰았다.
“해 지기 전에 고속도로 타면 딱 맞을 거 같다.”
“응.”
“화장실 가고 싶으면 말해.”
“응.”
“또 혼자 생각 중이야?”
“응.”
나는 한재이가 어젯밤 해 준 이야기를 내내 복기하는 중이었다. 그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의 가족이 독일에 이민을 온 진짜 이유였다.
‘나 사실 호적상 할머니가 따로 계시거든.’
중소기업을 운영했던 한재이의 할아버지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후처를 들였다고 했다. 말이 후처이지 불륜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이에서 아들 둘이 태어났는데 재산 싸움이 있었다고 했다.
둘째 아들이었던 한재이의 아버지는 상속을 포기하고 독일에 이민을 와 버렸다. 그렇게 아들은 버렸으면서도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손주만은 놓지 못하신 모양인 듯했다.
한재이가 가끔 한국으로 들어갔던 이유를 이제야 납득하는 중이었다.
‘할아버지가 땅을 좀 주신 게 있는데, 내가 국적이 한국이 아니라서 그런지 처리가 복잡하더라. 정리는 해야 하는데 계속 미루고 있었거든. 이번엔 진짜 정리하려고. 아버지한테는 비밀이야.’
한재이의 아버지는 대학교수답게 점잖고 기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집 서재는 어마어마했는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한 번씩 숨어 들어가곤 했었다. 한국어 책이 많았다. 몇 번은 빌려 주시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이런 아버지를 가진 한재이가 부러웠다. 만화책을 읽는 아들을 나무라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았다.
‘다 정리하고 독일로 가져오려면 세금만 수십억이 떼이더라.’
‘뭐?’
내가 그 액수에 놀라는 바람에,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그를 밀쳐 낸 꼴이 되었다. 그는 그대로 상체를 일으키며 내 손에 있던 맥주를 가져가 마시며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냐며.
땅을 조금 준 정도가 아니고 유산을 물려받은 것 같았다. 기젤라는 아냐고 물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왜 얘기해.’
‘결혼할 사이잖아.’
‘아직 안 했잖아.’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졸리다며 카라반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며 생각했었다. 나한테는 왜 얘기하는 건데. 다리 베개 한번 해 준 값치고는 분에 넘쳤다.
거기까지가 어제의 기억들이었다. 캠핑카가 산장 음식점에 도착했다. 근처에 양 떼 목장이 있어서인지 관광객들이 많았다. 부침개와 비빔밥, 산적류를 파는 곳이었다. 음식 맛보다는 경치로 승부를 보는 곳이라고 했다. 테이블 없이 대청마루에 올라가 상을 받는 형식이었다. 나무 그늘이 져 햇빛을 가려 주는 건 마음에 들었다.
“파리는 체류 기간이 어떻게 돼?”
“이틀.”
“파리가? 왜 그렇게 대중없어? 방콕도 이틀이더니.”
“누가 휴가 냈나 보지, 뭐.”
객실 승무원들과 달리 조종사의 휴가는 상당히 자유롭다. 비행 스케줄이 나오기 전이라면 원하는 만큼 신청해도 대부분 받아 준다. 나도 한재이의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긴 휴가를 쓸 작정이었다. 목적지는 아직 고민 중이다.
옆자리에서 가족 단위로 온 관광객이 양 떼 목장에서 사 온 듯한 기념품을 보고 있었다. 양털 모자를 뒤집어쓴 아이가 밥을 다 먹었는지 평상 밑으로 내려가 흙장난을 시작했다.
“우리도 양 떼 보러 갈까?”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내가 되물었다.
“그런 거 좋아했어?”
“여기까지 왔는데 아깝잖아. 바쁜 일 있는 것도 아닌데.”
“너 일 안 해? 그러다 잘려.”
“잘려도 할 수 없지, 뭐.”
그는 젓가락으로 요령 좋게 파전을 찢었다. 사이사이로 빠져나온 해물들은 그 위에 올렸다. 그러더니 새 모이를 주듯 조심조심 내 접시 위에 올린다. 내가 거절할 방도는 없다. 그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어미 새가 만족한 듯 미소를 짓는다.
아무래도 양 떼 목장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관광객들을 따라 오솔길을 걸어가니 입장권을 파는 곳이 나왔다. 끝날 무렵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대부분 목장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표를 사서 길을 따라 더 올라갔다.
생각보다 목장의 규모는 작았다. 목초 사이로 양들이 듬성듬성 풀을 뜯고 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울타리에 몸을 비비며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한 남성이 아기의 손을 쥐고 양을 만졌다. 양과 아기는 서로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귀엽다.”
아기인지, 양인지 주어가 없다. 뭐가 되었든 ‘귀엽다’는 수식어를 쓰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러네, 하고 응대해 주었다.
우리는 길을 따라 더 걸었다. 울타리가 쳐진 곳은 모두 관광객들이 붙어 있었기에 거리를 두고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이대로 한 바퀴를 돌고 나면 해가 질 것 같았다. 멀어지는 태양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내려가는 등 뒤로 양들이 매에, 하고 울었다.
계획보다 몇 시간 늦어졌기에 곧바로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4시간 정도를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꽤 지쳐 버렸다.
이틀을 제대로 씻지 못한 탓에 뜨거운 물로 장시간 샤워를 했다. 방에서 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가구가 들어찬 모습을 보니 드디어 집이라는 느낌이 든다. 머리를 말리며 소파에 앉으니 보슬보슬한 카펫에 맨발이 닿았다. 정착이 썩 만족스러워졌다.
거실에 딸린 욕실에서 한재이가 나왔다. 허리에 타월을 걸친 그의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흘렀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의 몸은 여전히 다부지고 건강해 보였다.
부엌으로 가 와인 하나를 집었다. 깨끗한 잔에 반 정도만 채웠다. 샤워로 풀어진 몸에 알코올을 흘려보내니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나도 줘.”
그대로 자러 간 줄 알았던 한재이가 다시 방에서 나왔다. 잔을 하나 새로 꺼내 그의 몫으로 건넸다. 와인을 따를 때 들리는 소리는 늘 듣기가 좋다. 묵직한 레드 와인 향이 거실에 퍼졌다.
“내일은 너 일해야겠네.”
“응. 넌 쉬면 되고.”
“캠핑 굉장히 좋았어. 기대보다 더.”
“기대가 낮았던 건 아니고?”
“100점 만점에 1000점이었어.”
한재이가 웃으며 내 와인 잔에 잔을 부딪쳤다. 사실 뭘 해도 기대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빠르게 와인을 소모하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잘 자라는 말을 하며 등을 돌리는 그에게 나는 문득 용기를 냈다.
“바닥에서 자는 거 힘들잖아. 내 방에서 자, 침대 올 때까지만.”
한재이가 천천히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의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가 걸리며 고맙다고 했다. 나는 그가 들어올 수 있게 방문을 열어 두었다. 1년 전에도 이런 호의는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믿으며.
벽 쪽으로 몸을 돌려 먼저 누웠다. 취기가 돌아서 그런지 금방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옆자리에 같은 종류의 샴푸 냄새가 스며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기에 나는 자는 척을 해야 했다. 부디 오늘은 악몽으로 그를 깨우지 않길 바랐다.
꿈에서 양 한 마리가 울었다. 목자는 이미 산등성이를 내려가고 있었는데 서른여섯 마리의 양이 그 뒤를 따랐다. 낙오된 양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양을 안고 목자를 쫓아갔다.
‘그게 무엇이오.’
그는 불결한 것을 보듯 내게 물었다.
‘양입니다.’
그의 시선이 내 팔에 닿았다. 나는 독사를 안고 있었다. 그대로 목덜미가 물렸다.
귀에서 이명 소리가 들린다. 잠에서 깨고 나서야 그것이 휴대폰 진동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한재이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새벽 3시일 것이다.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그 소리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끈질기게 스무여 차례를 울리던 휴대폰이 멎었다. 그가 깨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눈을 뜬 채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 * *
익숙한 독일어에 잠이 깬 것은 아침 시간이 훨씬 지나서였다. 온갖 법률 용어가 난무하는 터라 어학적으로 알아듣기만 했을 뿐, 의미는 알 수 없었다.
한재이는 어느새 거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전화 회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도대체 그가 잠은 자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문득 한재이가 안드로이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간밤에 양의 꿈을 꾼 것은 나였는데도 말이다.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회의하던 그가 잠깐 고개를 돌려 눈빛으로 아침 인사를 했다. 그를 위해 커피를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싸구려 티백은 버리고 그라인더를 꺼내 원두를 갈았다. 뜨거운 물에 커피 잔을 담가 온도를 맞춰 두었다. 거름망 위로 갈린 커피를 쏟아 내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어 주었다. 커피 향이 진하게 우러나왔다.
발코니 문을 열고 밖을 쳐다보던 그에게 커피 잔을 쥐여 주었다. 타이밍 좋게 ‘맘에 들어’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전화 상대에게 한 이야기였지만, 그가 나를 쳐다보며 톤을 올렸으므로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커피 한 잔을 더 내려 방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태블릿으로 읽을 만한 책을 골라 다운로드했다. 기술이 발달한 덕에 한재이 아버지의 서재는 쓸모가 없어졌다. 이젠 거기에 가지 않아도 한국어로 된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창 독서의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 한재이가 문을 두드렸다. 이미 몸은 방 안에 들어와 있으니 내 주의를 끌기 위해 두드린 것이었다.
“밥 먹을래?”
“응. 나갈까?”
“내가 해 줄게.”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한재이가 요리를 잘했었던가. 지난 몇 년간 그의 아파트에 찾아갔을 때 먹었던 음식들은 꽤나 훌륭했었다. 뭐가 되었든 나보다는 잘하는 게 분명했다.
“고민하지 마, 굴라쉬 할 거야.”
맙소사. 나는 그런 유럽 음식이 너무나 그리웠다. 메뉴를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현관문을 나섰다. 고기를 사 오겠다고 했다. 결대로 찢어지는 고기가 들어간 비프스튜의 맛이 떠올라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금방 올 줄 알았던 한재이는 30분을 넘겨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각종 야채와 고기를 사 왔는데 어느 것 하나 신선해 보이지 않는 재료가 없어 나는 상당히 기대되었다. 내심 도와주고 싶었지만, 괜히 방해될까 주변을 얼쩡거리게 되었다.
“저리 가 있어, 좀.”
그런 소리까지 듣고 나니 어쩔 수 없었다. 티브이를 틀어 시청하기도 하고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가 파프리카와 레드 와인을 때려 붓고 1시간이 지났다. 목을 길게 빼고 저를 쳐다보는 나를 향해 드디어 그가 손짓했다. 꼬리라도 있으면 흔들고 싶었다.
“싱거운가?”
손가락으로 소스를 찍어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말캉하게 들어온 한재이의 손가락을 덥석 물었다. 그 맛이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앓듯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혀까지 돌려 가며 한재이의 손가락을 빨아먹었다. 당황하는 그의 표정을 읽고서야 아차, 싶었다.
“……맛있어.”
칭찬을 듣고 그의 얼굴이 겨우 풀렸다. 민망해진 나는 식탁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처벌을 기다렸다. 허기가 져서 그런 것이었다고 스스로를 옹호했다. 마음씨 좋은 한재이 변호사는 한 그릇의 굴라쉬를 대접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숟가락이 쥐여지고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 * *
파리 비행은 큰 이벤트 없이 이루어졌다. 등급이 다른 손님 중 동명이인이 있어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둘 다 업그레이드를 해 줌으로써 해결이 되었다.
오늘 함께 조종석에 앉은 부기장은 외국인이었다. 우리는 이 회사의 계약 조건에 대해 작은 불만을 토로하며 아랍계 나라에서의 조종사 대우가 얼마나 괜찮은지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후반부 조종을 맡은 팀은 둘 다 한국 조종사였는데 파리에서 뭘 하고 보낼지에 관해 이야기 중이었다. 파리에 체류하게 되면 할 일은 많다. 나는 일주일 전부터 이미 약속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맥시,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알랭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페에서 뛰쳐나와 나를 안았다. 가볍게 뺨으로 키스를 나누고는 다시 한번 두 손바닥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고, 대체.
“나 한국으로 들어갔어.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서 좀 빠졌네.”
“한국? 갑자기?”
나는 이 모든 상황을 프랑스어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중간에 영어로 바꾸어야 했다. 나의 프랑스어 실력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알랭은 한재이가 파리에서 교환 학기를 신청했을 때 머물렀던 아파트의 주인이었다. 부모님이 사 놓았다는 학생용 아파트 중 방 하나를 세놓으며 살았는데, 당시 1차 비행 훈련이 끝난 나까지 덤으로 얹혀 지내는 바람에 셋이 친구가 되었다.
죽이 워낙 잘 맞았던 탓에 우리는 내내 놀러만 다녔다. 덕분에 한재이의 여름 학기 성적은 말도 못 했다.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셋이서 주로 했던 짓은 술을 마시고 좋아하는 영화의 장면을 따라 하는 등의 허세 섞인 놀이였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마리화나를 나눠 피우며 냄새나는 센강 둑을 걸었고, 사르코지 대통령 퇴진 시위 행렬 같은 것을 따라다녔다. 아침이 되어야 잠을 잤고 밤이 되면 싸구려 햄버거 따위로 끼니를 때웠다.
“그래서, 한국은 어때?”
“생각보다 좋아. 아, 재이가 안부 전해 달래.”
“그 자식 결혼한다는 소식 들었어.”
“응.”
“상대가 지젤 베버라니. 온 세상 행운을 다 가져간 놈이야.”
“여기서도 유명했어?”
“모델로는 꽤 알려진 편이지.”
기젤라는 모델 활동을 했었다. 지금은 여성 속옷 브랜드를 창업하고 런웨이에는 더 이상 서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도 시폰 드레스에 워커를 신고 다니는 여자였다. 미인이라는 말로는 부족했고 뭐랄까, 아우라가 있다고 하면 어울릴 것이다. 그녀가 한재이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그 둘은 부모님 때문에 가족 행사 때나 보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졸업하고서도 연락을 계속했다는 것은 누구 한 명은 그 끈을 계속 당기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솔직히 어느 남자가 마다하겠는가. 알랭의 말이 맞다.
“나 다음 달에 일본 가. 너 서울에 있으면 보고 가면 좋겠다.”
“그렇게 막 옆집 들르듯 다녀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야. 유럽이 아니라고.”
“언제는 일본과 한국이 마치 독일과 프랑스 같다며.”
“응. 서로 싫어하니까.”
“우린 너희를 싫어하지 않아.”
“그래, 그럼 일본은 아시아의 영국 같은 곳이라고 해야겠다.”
“오…… 재수 없어.”
“맞아. 딱 그런 느낌이야.”
나는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워도 되는지 확인하고자 함이었는데 알랭이 어깨를 치며 타박했다.
“담배 피우는데 누구 눈치를 보고 있어? 여기 파리라고.”
종업원이 다가와 긴 테이블 바 구석에 있던 재떨이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불을 붙이고 정면을 응시했다. 우리는 차양이 쳐진 카페 안쪽 바 테이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6월의 유럽 날씨는 남은 1년을 버티게 해 줄 만큼 매력적이다.
커피를 마신 뒤 알랭과 나는 부흐도네 항구를 따라 다리 위를 산책했다. 본격적인 관광 시즌이 되어 에펠탑으로 가는 가로수 길은 마라톤이라도 열린 듯 사람들로 꽉 차 보였다.
사실 알랭은 나보다는 한재이와 죽이 더 잘 맞았다. 그 역시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에 타고난 친구였다. 단적인 예로 나는 항상 ‘언덕길 사건’을 꼽는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파리 제7구역에 자리했다. 소르본 대학에서부터 뻗은 세브르 거리를 따라가면 중간부터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오른쪽 길은 점점 언덕을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매번 주의하지만 셋이서 잡담을 하며 걷다 보면 늘 어느 한 명은 꼭 이 오른쪽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한번은 알랭이 끝까지 올라가 보겠다며 걷다가 갑자기 우리와 너무 멀어졌다며 밑으로 뛰어내렸다. 다시 말하지만 뛰어내릴 높이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인대가 늘어나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기억 속에서 자리 잡았던 그 언덕길이 실제로 보이기 시작했다.
“들렀다 갈래?”
알랭은 아직도 그 아파트에 살고 있다. 실내를 개조해 공유 사무실로 만들었는데 1인 기업을 운영하는 그가 방 하나를 쓰고, 나머지 하나는 렌트 중이라고 했다. 나는 방해가 안 된다면, 이라는 조건을 붙였지만 사실 오랜만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공용 현관문을 지나 퀴퀴한 나무 계단을 올랐다. 2층에는 폴란드 출신 노부부가 살고 있다. 낯익은 발 매트를 보니 그들도 여전한 듯하다.
알랭의 아파트 문은 열려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니 옛 기억이 물씬 풍겼다. 카펫을 깔아 놓은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뭇하게 얼룩이 진 마룻바닥은 온통 우리가 피웠던 담배 자국들이다. 페인트칠을 새로 해서 벽은 깨끗해 보였다.
부엌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던 쇼트커트의 여자가 인사를 건넸다.
“멜, 인사해. 여긴 맥시밀리옹. 내가 한참 개차반으로 살 때 제일 친했던 친구야.”
“막시밀리안 슈미츠입니다.”
나는 제대로 된 독일어 발음으로 통성명을 다시 하며 손을 내밀었다.
“대충 맥시라고 불러. 멜은 여기 세입자야. 사진 찍는 일을 해.”
“멜라니 씨몽이에요. 미안해요. 내 손이 차갑죠.”
악수를 마친 그녀는 다시 손으로 얼음을 꺼냈다. 커다란 와인 잔이 준비되었다.
“화이트 포트 와인이에요, 토닉이랑 섞어서 얼음 띄우면 끝내주는데. 한잔할래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한낮의 포트 와인 칵테일을 만드는 동안 천천히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바뀐 것은 그다지 없었다. 우리가 정크 푸드를 먹으며 뒹굴던 소파도 그대로 거실에 있었고, 낡아 빠진 부엌과 테이블들도 여전했다.
한재이가 쓰던 방을 멜이라는 여자가 사무실로 개조한 듯 보였다. 너비가 꽤 큰 검은색 데스크와 비싸 보이는 디자이너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카메라 렌즈들과 거대한 프린트 기계도 보였다. 침대는 없어졌고 조명은 LED로 교체되어 있었다.
창틀에 놓여 있는 재떨이가 익숙했다. 촌스럽게 채색된 에펠탑 기념품 깡통이었다. 당시 내가 99센트 할인 용품점에서 아무거나 집어 온 것이었다. 최근에 피운 듯한 담배 필터엔 립스틱 자국이 묻은 채 버려져 있었다.
“맥시, 테라스로 나와.”
알랭의 부름에 나는 거실로 나갔다. 손바닥만 한 작은 테라스에 테이블 하나와 의자 세 개가 놓였다. 테라스로 통하는 입구가 너무 좁아서 한 번에 한 사람씩 들어가야 했다. 그녀가 건네준 포트와인 잔을 들고 셋이서 건배를 했다.
한재이가 이 아파트를 택했던 이유가 다시금 떠올랐다. 집 테라스에서 파리 시내 전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얻는 행운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일전에 말했던 적 있었잖아, 멜. 나 대학교 2학년 때 독일에서 온 친구들 때문에 한 학기 통째로 날린 거. 그 친구 중 한 명이야. 지금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고, 파리 비행이 있어서 잠깐 보게 됐어.”
“반가워요. 안 그래도 알랭은 그때 했던 미친 짓 에피소드를 아직까지 술자리에서 우려먹고 있거든요.”
“그랬군요. 난 취해도 도저히 얘기할 용기가 안 나던데.”
“우리 말이야, 경찰에 체포될 뻔한 적도 있었어.”
“어련했겠어.”
멜라니는 익숙한 반응을 보이며 포트 와인을 마셨다. 붉은 립스틱 자국이 와인 잔에 묻어났다. 그녀의 영어에는 프랑스인 특유의 악센트가 없어 문득 출신지가 궁금해졌다.
“근데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었어. 셋이서 이태리까지 로드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돌아오는 니스 국경선에서 갑자기 경찰이 차를 세우라는 거야. 너도 알잖아. 유럽에서 국경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아무런 의미가 없지.”
“그런데 경찰이라니! 드디어 프랑스 경찰이 일이란 걸 하나 보다 싶어서 난 사실 좀 감동 먹었었거든. 근데 대뜸 우리를 난민 불법 운반으로 체포하겠다는 거야.”
“그런 일을 했어?”
“아니, 나는 인류애가 별로 없는 사람이야. 그런 위험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근데 반전은, 경찰이 우리 차 트렁크를 딱 열었는데 거기서 사람 두 명이 나오는 거야.”
“뭐야. 시체였어?”
“아니, 살아 있었어. 시리아 난민이었는데. 고속도로 휴게소에 숨어 있다가 프랑스 차 번호를 보고 무작정 탄 거야. 우린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니스까지 운전을 해 온 거고.”
“둘이나 더 탔는데 무게도 못 느꼈단 말이야?”
“아니, 못 느꼈어.”
“아, 그게…… 취해 있었거든요, 셋 다. 음…… 그, 술 말고.”
나의 부가 설명에 멜라니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에피소드는 재미로 치자면 꽤나 상위권에 속하는 편인데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그럼 술자리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거지?
“내가 들은 것 중에 기억나는 건…… 그 ‘루브르 박물관 1층 질주’를 따라 했다가 벌금 물었다는 얘기.”
“벌금 안 냈어. 혼만 났지.”
뭐 대단한 선처라도 받은 양 알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이야기는 사실 좀 부끄러운 기억이다. 나는 잊고 지냈었는데 알랭에게 있어서는 이런 게 상위권에 속하는 에피소드였나 보다.
모든 프랑스인이 그렇듯 알랭은 누벨바그 영화의 신봉자였다. 하루는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의 〈쥴 앤 짐〉에 나오는 장면을 따라 하자며 한재이와 나를 꾀었다. 주인공 셋이 고요한 박물관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는 그 장면을 말이다.
숨죽인 듯 조용했던 루브르 1층 입구에서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먼저 달려 나가는 둘 때문에 나도 엉겁결에 뒤따라 뛰어야 했다. 관람실 끝에서 반대편까지 우악스러운 발소리를 내며 달리던 우리는 영화와는 달리 곧바로 경비원에게 붙들렸다. 나는 쪽팔린다며 투덜거렸고 현실적인 마무리라며 알랭과 한재이는 킬킬거렸다.
그런 둘에게 끌려가 그날 술을 기절 직전까지 마셨다. 나는 너무 취해서 클레망소 광장에서 넘어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매일 그렇게 부랑자들처럼 놀고 늘 새벽에 들어왔다. 집에 오면 셋 다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던지고 빈 침대를 점령해 쓰러져 잠이 드는 것이 다반사였다.
한번은 알랭의 부모님이 집에 들이닥치시는 바람에 오해를 산 적도 있었다. 남자 셋이 속옷만 입은 채 엉켜 자고 있던 모습은 프랑스인의 똘레랑스로도 한번에 받아들이기 힘드셨을 것이다. 여름이라 더워서 그랬다는 변명은 통할 리 없었다.
우리는 그때 당시 정말 ‘엉켜서’ 자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것을 ‘파리적 허용’이라고 불렀다.
“그 후로 엄마가 몇 번이나 확인하셨어, 남자 좋아하냐고.”
“아니야?”
멜라니가 눈을 흘기며 담배를 꺼냈다.
“아니야. 난 여자가 좋아. 근데 그때는 왠지, 우리 셋이 연애하는 기분이 들긴 했어.”
“너무 붙어 다녀서 그랬을 거야.”
나는 그의 말에 조금은 동조를 해야 했다.
“그래, 그거야. 게다가 우린 그때 아무도 여자랑 섹스 하러 가지 않았어. 진짜 우리끼리만 놀았지.”
“말 그대로 짐과 쥴, 그리고 카트린이네.”
멜라니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
“그래, 맥시가 우리의 카트린이었어. 여자는 필요 없었지. 둘 다 이 녀석한테 잘 보이려고 경쟁이 붙었었거든.”
“헛소리하지 마.”
나는 테이블 밑으로 삐져나온 알랭의 다리를 발로 차며 말을 막았다.
“진짜야. 재이랑 나는 누가 더 미친 짓을 잘 생각해 낼 수 있을지 혈안이 되어 있었거든. 그리고 판정은 얘가 하는 거야. 맥시의 표정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었지.”
나는 멜라니에게서 담배 한 대를 빌려 불을 붙였다. 낯선 멘솔 향이 퍼졌다. 그때 당시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스스로도 궁금했다.
“그래서 알랭, 네가 이겼어?”
“그럴 리가 있겠어? 재이와 맥시는 영혼의 동반자야. 거기에 내가 낄 틈은 없어. 당시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때는 그냥 그게 재밌어서 막 우겼어. 게다가 멜, 그 자식 이번에 지젤 베버랑 결혼해. 나의 완패야.”
멜라니는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웃으며 그건 다 젊고 철없을 때의 일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달랐다. 자연스럽게 받아 준 반응과 달리 알랭의 증언은 내게 양면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담배의 맛이 시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한재이와 나는 어쩌면 정말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육체적 결합만이 결여되었을 뿐, 우리는 서로를 정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우리 사이가 주변 사람들을 곧잘 질리게 했는데, 알랭만은 달랐다. 감정의 편견이 없는 그는 이런 우리의 관계에 거부감 없이 스며들었다. 마침내 트라이앵글 같은 삼각관계가 형성되자 화학 반응이 일어나 ‘파리적 허용’이 탄생했다. 여름이라 더했을 것이다. 여름은 유럽인들을 미치게 만든다.
알랭은 그렇게 제 할 몫을 다하고 이 관계에서 빠져나갔다. 다시 둘이 된 우리는 여느 때처럼 쭉 살아왔는데, 거기에 종지부를 한재이가 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랭의 증언으로 자신감을 얻은 나는 좀 더 현실적으로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한마디로 말해서 짝사랑이었다기보다는, 일방적인 배신이었다.
* * *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어느새 러시아 상공을 날고 있었다. 후반부 조정을 맡은 우리는 일찌감치 기내식을 먹고 조종석에 앉았다.
호주 출신 부기장은 좋게 말하면 유쾌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부산스러웠다. 그는 비행 내내 끊임없이 개인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무전기가 꺼질 때는 어김없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요즘 유행하는 비디오 클립에 관한 이야기나 자신이 데이팅 앱으로 여자를 만난 에피소드들을 풀었다. 비행기 조종석에서 유니폼을 입고 찍은 사진 한 장이면 다 넘어온다며 웃었다. 부디 그가 회사 이름까지 프로필 사진에 넣지는 않았길 바랄 뿐이었다.
비행은 별다른 이벤트 없이 끝이 났고, 이틀 만에 다시 도착한 인천 공항은 떠날 때보다 북적였다. 도착 게이트를 부여받는 대기 순번이 밀리기 시작했다. 안내 방송을 해야겠다 싶어서 마이크를 잡았는데, 갑자기 교신 채널에서 누군가의 기내 방송이 들리기 시작했다.
-This is your captain speaking. We are currently waiting for the gate sequence at Incheon Airport. (기장입니다. 우리는 현재 인천 공항에서 게이트 순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와 부기장은 서로를 쳐다보며 잠시 당황하다 이내 상황을 눈치채고 어이없이 웃었다. 대기 중인 다른 비행기에 있던 조종사가 실수로 교신 채널 라디오의 버튼이 눌러진 채 기내 방송을 시작한 것 같았다. 관제탑은 물론 인천공항에 대기 중인 수십 대의 조종석에 그 방송이 울려 퍼졌다.
-Please do not stand up until the seat belts sign out. We are expecting to take another 10 minutes from the arrival time. Thank you. (좌석 벨트 점등이 꺼지기 전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도착 예정 시간에서 10분 정도 더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감사합니다.)
-Nice. (잘했다.)
-Welcome to Seoul. (서울에 온 것을 환영한다.)
장난기 있는 조종사 몇 명이 곧바로 당사자를 놀리기 시작했다.
-Oh! so sorry. (앗! 미안해.)
-Give some nuts here, please. (여기 땅콩 좀 줘요.)
-Can I use my cellphone now. (이제 폰 사용해도 되나요?)
너도나도 한마디씩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민망해할 그 조종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꽤 오래 웃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가끔은 이런 사고가 터진다. 딱딱했던 교신 채널에 한동안 농담과 웃음이 이어졌다. 비행이 유쾌하게 끝이 났다.
젭슨 차트와 운항 일지를 반환하고 내려오는 와중에 전성욱 부기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게 전화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어 받았는데 그가 잠깐 거기 서 보라고 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에스컬레이터 맞은편에서 그가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아, 역시 맞네. 키가 커서 눈에 딱 띄시더라고요.”
“오랜만이네요. 비행 있으셨습니까?”
“네. 베이징인데 나이트 플라이트여서 레이오버 하루 했네요. 기장님은요?”
“파리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도착 로비로 내려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당연하다는 듯 주차장으로 걸어갔기에 자연스레 그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식사하셨습니까?”
나는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에 아침 식사를 대접하려 물어보았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시간이 애매했다. 11시면 아침도 아니고 점심도 아닌 게 된다.
“저 아직인데, 같이 하실래요?”
의외로 그가 시원하게 승낙해 주었다. 그러고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차량 스피커로 들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그의 부인과 하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는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부인 되시는 분이 매우 좋아했다.
-너무 바람직하다, 자기야. 많이 먹고 들어와. 나 저녁도 못 해 줘.
아내가 임신 중이라 집안일을 거의 하지 못한다고 했다. 청소는 자신이 할 수 있지만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항상 문제라고. 그가 내 물음에 덥석 식사를 같이하자고 한 이유가 이해되었다.
전성욱 부기장이 나를 끌고 간 곳은 순댓국밥집이었다. 지난번엔 선지, 오늘은 순대. 평소 그를 호감 있게 보고 있지 않았다면 나한테 일부러 이러나 싶어 오해하기 딱 좋았다.
“이게 머리 고기인데, 못 드시면 야채 순대만 시켜서 드셔도 돼요.”
“아닙니다. 도전해 보죠.”
지난번과 같이 또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슬슬 다음번에는 어떤 곳에 데려가 줄지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파리 다녀오셨으면 한 3일 오프시겠네요.”
“아, 사실 하루 쉬고 다음 날은 스탠바이 걸려 있습니다.”
“휴가철이라 그래요. 다음 달 스케줄 나오기 전에 미리미리 휴가 내세요. 이거 넣어서 드시면 맛있어요.”
전성욱 부기장이 야채가 수북이 담긴 접시를 내게 내밀었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그는 반을 덜어 자신의 그릇에 붓고 나머지를 다시 나에게 건넸다.
“이거 부추요, 부추. 기장님 진짜 검은 머리 외국인이시네. 하하.”
이 야채가 부추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다만 생소해서 잠시 머뭇거렸을 뿐이었는데 그가 웃으며 나를 놀렸다. 서슴없는 그의 말투가 싫지는 않았다.
“민우랑 술 한잔하셨다면서요.”
“아, 네. 방콕 비행 때 데드 헤딩 있으셔서. 많이 친하신가 보네요.”
“친하죠. 대학 때부터 내내 붙어 다녔으니까. 그 친구 비행 잘하죠?”
“네, 플랩 각도 잡는 게 예술이시던데.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동기들 중에선 유명했어요. 완전 난 놈이라서. 작년에 LCC 가서 기장 달까 고민하더니 그냥 여기 남았어요. 거기로 가면 대형기는 더 못 모니까.”
“부기장님들이 이직을 많이 하시나 보네요.”
“작년 재작년, 거의 붐이었죠. 여기서 기장 달려면 5년은 더 굴러야 하는데 거기는 대우가 좋잖아요. 평생 A320만 몰아야겠지만서도.”
그는 한국 사정에 관해 여러 가지를 실토했다. 저가 항공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끽해야 천 명도 되지 않는 항공기 조종사들의 이직률이 늘었다. 그 때문인지 대형기 부기장들의 이탈이 심화되었다. 유물이 되어 버린 A380 정도의 점보급을 몰 수 있는 부기장은 이제 회사에서도 손에 꼽힌다고 했다.
“그나저나 집들이 왜 안 하세요.”
“아.”
말이 나온 김에 날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오프 스케줄을 맞춰 보는데 날짜가 맞는 날이 무려 13일 뒤였다.
“차라리 내일로 하세요. 저야 밖에서 밥 먹고 온다 하면 집에서 좋아하고, 민우는 혼자 사는데 뭐 눈치 볼 사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까요?”
부기장이 한국에서 쓰는 노란색 메신저 앱을 소개해 주며 이걸 깔아 보라고 권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앱을 깔고 등록을 하자 조민우 부기장과 나를 초대해 대화 채널을 열었다.
[민우야, 우 기장님 집들이 내일 할까 하는데 메시지 보고 답장해라]
친한 사람에 한하여 한국 이름을 알려 주었었다.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그들에게서 독일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그렇게 메시지를 던져 놓고 우리는 다시 밥 먹는 데 집중했다. 구역한 돼지 냄새가 올라올 줄 알았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맛은 괜찮았다.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서인지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일어난 뒤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었다. 사인해야 하는 카드였기에 전자 패널에 펜을 들려는 순간, 주인아저씨가 패널 위를 손가락으로 그어 멋대로 사인을 마쳐 버렸다.
내 카드인데 대신 사인을 하다니……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하하. 괜찮아요, 기장님. 여기선 다 이래요. CCTV에 결제하신 거 다 찍혔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부기장이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가게를 나서면서도 나는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사거리 앞에 나를 내려다 주고 집으로 향했다.
거실로 들어서자 잠이 쏟아졌다. 한재이는 집에 없었고 나는 옷만 갈아입은 채 침대에 쓰러졌다.
3시간 정도를 자고 일어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뒤늦게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가까운 슈퍼에서 먹을 것을 사서 냉장고를 채워 넣고 나니 금방 어둑해졌다. 저녁을 먹고 올 건지 한재이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대답이 없었다. 내게 일일이 어디 간다고 말을 해야 하는 의무는 없었기에, 그를 내버려 두고 혼자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편의점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있는데 휴대폰 대기 화면에 메신저 알람이 떴다. 조민우 부기장이 이제야 메시지 확인을 한 모양이었다.
[방금 인천에 떨어짐. 내일 콜]
말투로 봐서 내게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모임 주최자로서 그 메시지에 화답해 주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뵙죠]
전자레인지가 소리를 내며 타이머를 울렸다. 뜨거워진 도시락을 꺼내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 두고 수저를 찾았다. 다시 알람이 떴다. 조민우 부기장이었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그러고는 거수경례를 하는 곰 캐릭터를 보내 주었다. 곰이 아니고 사자인가. 아니, 개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현관문이 열렸다. 한재이가 집에 들어왔다.
“어디 갔었어? 저녁은?”
“생각 없어.”
돌아오는 서늘한 대답에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한재이는 슈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까지 세팅되어 있는 걸 보니 중요한 약속이 있었던 듯했다. 그는 거실을 저벅저벅 가로질러 소파로 향했다. 그대로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주저앉는다.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안 좋은 일 있었어?”
“응. 무례한 사람을 만나서.”
거기까지만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싶은 듯 보였다.
“내일, 집들이라는 걸 할까 하는데. 새로 사귄 동료들이 오기로 했어. 괜찮아?”
“나한테 왜 물어. 네 집이잖아, 맘대로 해.”
그의 짜증 섞인 대답을 들으니 나도 기분이 언짢아졌다. 내버려 두고 밥을 먹었다. 그는 한참을 혼자 소파에 앉아 있더니 곧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샤워 소리가 들렸다. 입맛이 떨어진 나는 반이나 남은 도시락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물로 입을 헹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재이와 나는 자주 싸우는 편이 아니다. 학교 다닐 때나 사소하게 부딪쳐 말다툼을 한 적은 있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서부터는 그런 일도 거의 없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감정 소모를 하는 모든 행동에 무심한 편이었고 그는 웬만해선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같은 한재이는 낯설다.
상대방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그가 스스로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냥 두기로 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본다거나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것은 관두었다.
침대에 기대어 책을 읽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으로 참전했던 제임스 벨이라는 전투 조종사의 자서전이었다. 훈련 동기의 SNS 피드에 추천되어 있길래 찾아보았는데 독일어 번역본이 없었다. 영문 원서로 읽으려니 속독이 어려워 한 달 내내 붙들고 있는 중이다.
제임스는 영국 전투기 스핏파이어를 모는 조종사였다. 독일군의 Bf109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전투기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롭기(프로펠러 항공기의 줄임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비행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 스핏파이어와 Bf109의 공중전은 유명하다. 그중 하나인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얼마 전 영화로도 개봉된 바가 있다.
그 영화를 보고 나는 오랜만에 제대로 흥분했었다. 도합 열 번을 넘게 봤던 것 같다. 그만큼 고증이 완벽했다. 프롭기를 몰아 보고 싶은 충동에 며칠간 잠을 못 이룰 정도였으니까. 사실 Bf109는 아직도 실제로 비행이 가능한 기종이다. 패전의 불명예와 역사의 죗값을 받느라 바이에른 비행장에 유물처럼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어김없이 비행기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을 때쯤 한재이가 문을 두드렸다. 노크까지 먼저 하는 것을 보니 안 봐도 뻔했다. 사과하려는 모양이다.
“들어가도 돼?”
“언제부터 허락받고 들어왔다고 그래.”
슈트를 벗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재이가 내 다리를 밀어내고 침대 한쪽에 걸터앉았다.
“짜증 내서 미안해. 기분이 좀 더러웠어.”
“네가 기분이 더러워질 정도면 어지간한 일은 아니었겠네.”
“응. 할아버지 댁에 다녀왔거든.”
그는 팔베개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상체를 기댄 채였다. 우리는 십자가 모양이 되어 서로를 쳐다보았다. 왜 애꿎은 나에게 화풀이를 했냐는 쓸데없는 소모전을 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 걸로 마음이 상할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이야기하고 싶어?”
제 마음을 곧바로 읽어 낸 나를 보며 한재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읽고 있던 태블릿을 끄고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가 몸을 내 쪽으로 돌려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가끔 ‘응’ 내지는 ‘심한데’ 정도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큰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 한재이는 조금 흥분한 듯 침대보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의 말에 100% 동조하며 함께 큰아버지라는 자를 비난해 주었다. 1시간 넘게 이어지던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쯤 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튼 난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데 그런 식으로 사람을 폄하하니까 짜증 나더라. 나도 돈은 많은데.”
“그렇게 얘기했어?”
“응. 그랬더니 네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하면서 무시하는 거야. 예의 없고 무례해. 아, 또 이야기가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그만하자. 너 피곤하겠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한재이는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계속 올려다보며 뻔한 질문을 했다.
“나 여기서 자도 되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도 괜히 뻔한 변명을 들이댔다.
“새벽에 전화할 거잖아. 나 자꾸 깨.”
내뱉어 놓고 1초 만에 후회했다. 고민할 틈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릴 그를 보면 기분을 잡쳐 버릴 것 같았다. 한재이가 잠시 생각한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의 전원을 꺼 버리고 암전된 화면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를 내버려 둔 채 거실로 나왔다. 불을 끄러 나온다는 명목하에 움직였지만, 원래의 목적을 잊은 듯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켰다. 얼굴에 달아오른 열기는 식히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한재이는 아침부터 부재중이었다. 늦지 않게 돌아올 테니 손님들이 오면 먼저 시작하라는 말만 덩그러니 남겨 놓은 채 집 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애초에 나는 집들이라는 것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필요하다는 것 외에는.
한재이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바보 같은 내 몸을 이끌고 동네에 있는 큰 마트로 향했다. 내 주제에 요리를 할 수는 없으니 거기서 파는 조리 완료 식품들을 쓸어 담았다. 맥주와 와인, 혹시 몰라 소주도 한 병 샀으나 아무도 마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 없이 카트를 밀어 담고 계산을 하는 도중에 생각이 났다. 차가 없다. 아무리 나라도 이 많은 걸 짊어지고 집으로 걸어갈 수는 없다. 그때, 마트 조끼를 입은 직원 한 명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배달 시키실 거예요?”
순간 그가 구원자처럼 보였다. 나는 감격에 겨워 차마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를 그에게 써 주고 나는 빈손으로 마트를 나왔다.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독일보다 습도가 높아서인지 체감되는 불쾌지수가 높았다. 집으로 들어가 에어컨을 가동했다. 청소를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배달 기사분이 도착하고 냉장고에 음식들이 채워졌다. 점심은 혼자 해결하고 시간을 때웠다. 인터넷 비디오 클립으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청했다. 한번 즐거운 기분이 되자 별로 재미없는 농담에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국인들의 현란한 정치 풍자 코미디에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보내자 동영상 맞춤 추천이 온통 정치 풍자 개그 클립으로 꽉 채워졌다.
[저희 지금 같이 출발합니다.]
휴대폰 상단에 전성욱 부기장의 메시지가 떴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은 온통 웃음과 코미디로 꽉 차 있었기에 손님을 맞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에 들어선 그들을 실제보다 더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의 손에는 휴지와 세제 등이 들려 있었다.
“이게 한국에서는 이런 걸 사 와야 하거든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그들의 손에서 비닐봉투를 받아 들고 거실로 안내했다.
“독일에도 집들이 같은 거 하나요?”
“음, 네. 따로 파티를 하지는 않는데 이사 온 집을 처음 방문할 때는 딱딱한 빵과 올리브 오일을 선물합니다.”
“생필품 선물하는 건 비슷하네요. 집 넓네요. 혼자 사는 것치고는 진짜 넓다.”
조민우 부기장은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혼자 사는 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혼자 사는 게 맞긴 했다. 한재이는 곧 갈 사람이니까.
“앉으세요. 혹시 배고프시면 곧바로 식사하셔도 됩니다.”
“일단 맥주 한 잔씩 하죠?”
그의 말에 나는 냉장고를 열어 어떤 맥주를 원하는지 물었다. 한국산부터 외국산, 흑맥주, 과실 맥주까지. 전성욱 부기장이 웃으며 독일 맥주를 집어 들었다.
“맥주의 나라에서 오신 분답게 냉장고가 꽉 찼네. 하하하.”
우리는 아일랜드 식탁 테이블에 앉아 건배를 했다. 유니폼을 벗고 만나는 사적인 자리였지만 화제는 으레 그렇듯 비행기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허기가 진다고 했던가. 어느새 우리는 마트에서 사 온 조리 식품들의 포장을 뜯고 있었다. 정성 없는 음식을 대접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치킨 시킬게요. 여기 주소가 어떻게 돼요?”
전성욱 부기장이 휴대폰을 들었다. 임신한 아내가 치킨 마니아라며 새로 나온 메뉴를 추천해 주었다. 그렇게 배달을 시켜 놓고 우리는 두 번째 맥주를 골랐다. 그러면서 밥을 가장한 안주들을 먹기 시작했다.
“기장님, 다음 시뮬레이션 언제 받으세요?”
“아직 3개월 정도 남은 것 같네요.”
“저는 다음 달이에요. 죽겠어요, 진짜.”
조종사들은 1년에 두 번씩 시뮬레이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각종 비상 상황들을 가정에 놓고 정확한 상황 판단을 내려야 한다. 평상시에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기에 익숙하지도 않다. 준비를 철저하게 해 가지 않으면 비행기는 추락한다. 신체검사는 1년에 한 번. 텀이 길어 보이지만 이 두 가지를 통과하지 못하면 비행이 중지된다. 스트레스가 여간 쌓이는 일이 아니다.
“저는 지난달에 받았는데, 하필이면 또 그날이 행안부 공무원이 나와서 참관을 하는 거예요. 요즘 조종사들 사고율이 높다고 위에서 뭐라 했다나, 뭐라나.”
“공무원이 보면 뭘 압니까?”
“그 와중에 또 공군 출신을 보냈더라니까요.”
“아…….”
공군 출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런 선입견은 좋지 않은데, 나는 지난번 방콕 비행이 생각나 어쩔 수 없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순간적으로 치킨이 온 건가 싶었지만 배달하시는 분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 리가 없다. 한재이였다. 셋 다 고개를 빼고 쳐다보고 있으니 당황한 한재이가 눈을 크게 뜨고 상황 판단을 시작했다.
“아, 이거 기다리셨구나.”
그가 손에 든 치킨 포장지를 올려 보이며 문 밖에서 받아 왔다고 했다. 오늘도 슈트 차림이었다. 본의 아니게 그의 정면 샷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다리가 긴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또 새삼 놀라웠다. 손에 든 치킨 포장지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계산 안 했는데 그냥 주고 가시던가요?”
“돈은 제가 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드세요. 서진아, 나 옷 갈아입고 올게.”
식탁 위에 치킨을 올려 준 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그릇에 담아야 할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식기 수납장을 열었다. ‘야, 닮긴 닮았네.’ 하며 둘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니까 오기 전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겠거니 싶었다.
치킨이 중앙에 자리를 잡으니 이제야 뭔가 대접하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재이가 방 안에서 나왔다.
“뭐 마실래? 맥주?”
나는 집주인 생색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그가 어깨를 누르며 나를 다시 앉혔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에게서 향수 냄새가 옅게 맡아졌다. 한재이는 우리를 스쳐 지나가 컵을 꺼내 물을 마셨다. 술 마실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어제처럼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 와서 같이 드세요.”
전성욱 부기장이 그에게 합류를 권했다. 한재이는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지만 저게 대외용 웃음이라는 것을 나만 눈치채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비슷한 이유로 기분이 상해 있다는 것만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 보는 손님들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낌새가 보였기에 나는 그를 내버려 두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체력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근처에 센터가 있을까요?”
“아, 헬스장 같은 데 말씀하시는구나.”
“주로 뭐 하세요? 근력?”
“네. 그리고 수영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저 가는데 풀 딸려 있어요. 같이 다니시죠.”
조민우 부기장의 말이 상당히 반가웠다. 같은 동네인 것이 이럴 때 좋구나 싶었다. 조깅 할 만한 곳도 없어서 허리가 아파 오던 참이었다. 한재이가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곧 결혼하신다고요.”
친근하게 붙여 온 조민우 부기장의 말에 한재이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게 실례되는 질문도 아니었는데, 그를 빤히 쳐다보며 네가 그걸 왜 알고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오히려 당황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얘기하게 됐어. 나쁜 일도 아니잖아.”
경사는 나누는 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재이의 신경이 곤두서지만 않았더라도 웃으며 넘어 갔을 텐데 괜히 내가 눈치를 보게 된다.
“네, 뭐.”
“축하드려요, 날짜는 언제예요?”
조민우 부기장의 보조개가 한껏 들어갔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흥미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무례한 질문은 아니지 않는가. 한재이는 대답을 해야 했다.
“7월 말에 합니다. 날짜는 여자 친구가 조율 중이고요.”
사실 그건 나도 몰랐다. 씁쓸한 마음에 맥주에 손이 가고 있었다.
“독일에선 결혼식을 어떻게 올리나요? 교회에서 하나요?”
“뭐, 종교가 있다면 교회에서 하는 게 대부분이긴 합니다. 저희는 그냥 시청에서 서명하고 끝낼 거긴 한데…….”
그러면서 한재이가 나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내게도 한 적이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식을 올릴지 나는 물어보고 싶지 않았고 그도 스스로 말해 주지 않았다. 보아하니 피로연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부모님 성정상 그렇게 간단하게 하고 싶지 않으셨을 텐데, 누군가가 고집을 피웠겠거니 싶었다.
“그러고 보니 너 증인 필요하잖아. 누가 해?”
“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물어는 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긴, 한재이 인생에 결혼이 있다면 당연히 증인 서명은 내가 하겠지. 문제는 결혼 그 자체를 상상 못 했던 내게 있었으니 그는 잘못이 없다.
“기젤라 쪽은 누가 하는데?”
“사촌 언니라던데.”
준비 안 하는 것처럼 굴더니 세팅이 끝나 있었네.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기장님 휴가 내서 다녀오셔야겠네요.”
“맞춰서 독일 비행 있으면 딱 좋을 텐데.”
“그러게.”
나는 그들의 대화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디쓴 입맛이 감돌았다. 담배를 찾아 물고 발코니로 나가려는데 두 명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연스레 내 상대를 해 주기 위해 일어난 한재이와 주머니에서 제 담배를 꺼내 손에 든 조민우 부기장. 우리 셋은 잠깐 그대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부기장님 흡연자야, 안 따라와 줘도 돼.”
나는 한재이를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는 두 명은 발코니로 나갔고 피우지 않는 두 명은 식탁에 남았다. 바람 빠진 웃음을 짓는 한재이의 표정은 애써 외면했다. 재떨이로 쓰고 있는 우유 팩이 어느새 꽁초로 반절 채워졌다. 발코니 문을 닫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친구분 기분이 별로신가 봐요.”
눈치가 백 단이다. 그게 아니면 한재이가 너무 티를 낸 것이겠지.
“어제부터 좀 그러네요. 밖에서 골치 아픈 일이 있나 봐요.”
“저희가 빨리 자리를 비켜 드려야겠네요. 두 분 얘기하시게.”
“아닙니다.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저러다 혼자 풀립니다.”
나는 연기를 들이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조민우 부기장은 좀 묘한 구석이 있다. 뭔가를 알고 있는데 자신이 알고 있다는 티는 내면서 모른 척해 준다는 느낌이었다. 말이 좀 어려운데, 뭐랄까. ‘어떠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맞는지 하나하나 맞혀 보는 느낌’이라면 설명이 될까.
“내일 저랑 등록하러 가실래요?”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니 헬스장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저 내일 스탠바이라서.”
“아, 요즘 대기 콜 잘 안 오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스탠바이가 걸리는 날에는 무조건 자택에서 콜을 기다려야 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비행이 어렵게 된 동료를 대신해야 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이 콜을 받지 못하면 징계감이다. 열에 한 번 정도 받을까 말까 하는 확률이라 오프에 가깝긴 하지만, 나는 뭐든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을 좋아한다.
“성욱이한테 저 조종 괜찮게 한다고 칭찬해 주셨다고요.”
“네. 사실이니까요.”
“기분 좋아서 어제 밤잠 설쳤어요.”
나는 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웬 오버지. 나한테 잘 보여서 얻을 게 없을 텐데. 끽해야 한 달에 한번 편조로 묶이면 비행시간 좀 더 얻어 가는 정도일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사람한테 칭찬 듣는 건 좋잖아요. 제가 인사팀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봤는데, 이미 유명하시던데. 독일에서 훈련도 수석으로 끝내셨다고.”
“그런 것도 알던가요?”
“유명 인사시라니까요.”
나는 그들이 나에 대해 어떤 식으로 유명 인사 취급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정말 내 훈련 성적과 경력 때문인지, 아니면 외모와 이름의 불일치 때문인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왜 물어보셨습니까, 저에 대해?”
담배를 물고 있던 조민우 부기장이 나를 쳐다보았다. 다시 보조개가 잡혔다. 연기를 내뿜으며 단순한 대답을 내놓았다.
“궁금해서요.”
그는 담배를 우유 팩에 비벼 껐다. 한 대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다시 피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기다려 주고 있는 것이 뻔한 상황에서 여유를 부릴 수 없어 나도 불을 끄고 꽁초를 버렸다. 연기가 어느 정도 날아갈 때쯤 그가 발코니 문을 열었다. 서늘한 거실 에어컨 공기가 닿았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한재이는 전성욱 부기장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알고 보니 법률 상담이었다. 그의 처가가 고소를 당했다고 했지만 한재이는 한국 판례를 모르니 현실적인 조언은 불가능했다. 다만 어떻게 접근해 가야 하는지 정도를 조언해 주던 한재이가 아는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며 휴대폰을 열었다.
“한국에 아는 변호사도 있었어?”
“왜, 너도 필요해?”
웃는 얼굴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 모양이다. 앞에 놓인 포크로 보아 치킨도 좀 먹은 것 같고. 역시 내버려 두면 혼자 풀리는 성격이라 다행이다.
30분 정도를 더 머물던 둘은 그만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 버린 집들이 파티가 나는 조금 아쉬웠다. 더 있다 가라는 나의 말에 ‘다음에 우리끼리 한잔해요.’라며 조민우 부기장이 대답했다. 그런 그의 표현 방식에 한재이가 다시 한번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이 묘하게 서로를 쳐다보며 인사를 나눈다.
“그럼.”
“잘 놀다 갑니다.”
전성욱 부기장은 손까지 흔들며 인사를 했다.
손님을 보내고 다시 거실로 들어왔다. 혼자 식탁을 치우고 있는 한재이를 거들었다. 죄다 포장 음식들이라 쓰레기가 끝도 없이 나왔다. 싹 다 몰아서 쓰레기봉투에 넣고 있는데 한재이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손님들 있을 때는 맹물만 마시더니, 이제 와서 술을 마시는 행동이 기이해 보였다.
“저 사람, 그때 너 데려다준 그 사람이지?”
“누구? 조민우 부기장? 응, 맞아.”
그는 식탁 치우는 걸 중단하고 의자에 앉았다. 예의 그 긴 다리를 뻗어 늘어지더니 혼자 중얼거린다.
“좀 재수 없네.”
나는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그를 쳐다보았다. 몇 마디나 나눠 봤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몰라. 그냥 태도가. 지가 뭐라도 되는 양…….”
그가 말을 안으로 삼키며 맥주를 마셨다. 겨우 기분이 풀렸다 싶었는데 조민우 부기장의 묘한 태도에 다시 짜증이 난 것일까. 한재이를 내버려 둔 채 쓰레기봉투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눅눅하게 피부에 닿았다.
* * *
다음날 나는 세탁소에서 유니폼을 찾아왔다. 샤워만 미리 해 두고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아침을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한재이가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 주었다. 과일이 없어 아쉬웠다. 간단히 끼니를 해결한 뒤 그는 일하러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날이 바뀌어 그런지 어제의 예민했던 기분은 없어진 듯 보였다.
독일에서도 스탠바이 콜을 받은 기억이 몇 번 없었기에 오늘도 그렇게 오프로 끝날 줄 알았다. 그랬는데 전화가 울렸다. 회사에서 온 콜이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바로 김포 오사카행 투입 가능하실까요?
“네, 쇼업 몇 시죠?”
-1시간 뒤입니다. 편명은 CR711이고, 근데 A320 PM 보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문제없습니다.”
역시 부기장 자리가 펑크 난 듯했다. 나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 방문을 두드려 한재이를 불렀다. 나가 봐야 할 것 같다는 내 말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저녁 맛있는 데 가려고 예약해 뒀는데.”
“미안. 집에 도착하면 10시 넘을 거야.”
“내일은?”
“내일도 비행 있어. 상하이.”
“할 수 없지. 잘 다녀와. 가서 운전 조심하고.”
그의 말투는 마치 자동차 운전을 조심하라는 것처럼 들렸기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런 반응을 노렸던 것인지 그도 웃었다.
문지방을 밟고 서서 그대로 나를 배웅하는 한재이를 두고 급하게 현관문을 나섰다. 운항 일지를 점검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곧바로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달렸다.
택시에서 내려 관계자실로 직행한 나는 운항사에게서 오늘 비행 서류를 받고 곧바로 체크에 들어갔다. 쇼업까지 10분이 남았다. 거리가 짧은 비행이었기에 특이 사항은 없어 보였다. 간사이 국제공항 날씨와 바람을 체크하고 메모를 하는 와중에 누군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캡틴이 대기 콜 받았지요? 오늘 PIC 보는 박종대 기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막시밀리안 슈미츠입니다.”
그는 외모로 보아 육십 대가 넘어 보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발음은 분별력 있게 들린다. 주름 하나 없어 보이는 유니폼과 빳빳한 견장. 한눈에 봐도 수십 년 비행 선배임이 틀림없다.
“오늘 좀 특별히 운항 브리핑부터 객실 크루들이랑 함께 하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아, 네. 근데 제가 아직 준비가…… 방금 전에 도착해서.”
“괜찮아요. 운항 계획 내가 벌써 끝냈으니까.”
“네?”
“좀 미리 와서 준비했어요. 사실 이게 마지막 비행입니다. 내가 오늘 은퇴하거든.”
나는 더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나 중요한 비행에 대기 콜로 들어와 버렸다. 그는 거듭 내 의사를 물었고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우리는 곧바로 브리핑 룸으로 이동했다. 이미 그의 사정을 알고 있는 듯한 객실 크루들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반겼다.
“아, 여기. 오늘 원래 편조였던 이수환 부기장이 갑자기 모친상을 당해서 대신 오셨어요. 아마 일지 읽어 볼 시간도 없으셨을 테니 제가 운항 브리핑하겠습니다. 괜찮지요, 캡틴?”
“아, 네!”
나긋나긋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오히려 기합이 들어가 버렸다. 모인 크루들도 그를 아는 사람이 대부분인 듯했다. 회사 측에서 배려해 오늘 편조를 동료들로 맞춰 준 것 같았다. 나는 운 나쁘게 거기에 끼어 버린 사람쯤 되겠다.
기장의 브리핑, 객실 사무장의 브리핑이 끝나고 모두가 함께 게이트로 이동했다. 지상 근무 크루들도 박종대 기장을 보고 모두 인사를 했다. 그는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 응대해 주고 콕핏에 올랐다.
“면장은 뭐로 땄어요?”
“아, 380에서 지금은 350으로 기종 변경했습니다.”
“운 좋네. 나는 320만 23년 몰았지. 그전에는 F-4 팬텀 조종사였고.”
나는 A320의 조종 경험이 거의 없다. 게다가 전투 조종사 출신 기장이라니. PM만 보는데도 긴장이 되었다.
A320은 낡고 역사가 오래된 기종이다. 80년대에 개발되었고 동체가 긴 것이 특징이다. 장거리 비행에도 좋아 한동안 에어버스사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여 보잉사의 737 대항마가 되었었다. 내가 만약 10년 일찍 조종사가 되었다면 두말할 것 없이 이 기종을 택했을 것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그의 이륙 준비에 나는 거의 할 일이 없었다. 탑승이 완료되자 그가 신호를 보내 문이 닫혔다. 나는 관제탑에 이륙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고 활주로 11번을 부여받았다. 우리는 택싱에 들어갔다.
유도로 끝에 선 A320이 활주로 진입 전 마지막 이륙 허가 교신을 기다린다.
-Coreana 711, cleared to take-off. (코리아나 에어웨이 711편 이륙 허가합니다.)
나는 기장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륙을 위한 콜아웃을 주고받으며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셋 테이크오프 트러스트.”
“트러스트 셋.”
그의 명령에 복창하고 계기판을 주시했다. 이륙할 때 기장은 정면을 보고 활주로를 주행한다. 부기장은 계기판과 옆 동선을 살피며 기장의 이륙을 도와야 한다. 80노트가 되었을 때 그에게 알렸다.
“80 노트, 체크.”
속도가 빨라지고 기체가 이륙 속도에 근접했다.
“브이 원. 로테이트.”
기장의 손은 이제 트러스트 레버에서 조종간으로 이동한다. 서서히 몸 쪽으로 조종간을 당기며 들어 올리자 기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기어 업.”
그의 마지막 비행 여정이 막을 올렸다.
* * *
박종대 기장은 도합 40년을 하늘에서 보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공군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장교에 지원하여 전투 조종사로 선발되었다.
“당시만 해도 훈련 나갈 때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잘라서 관물대에 넣어 뒀어요. 사고 나면 시신 수습이 어렵거든. 장례 치를 방도가 없는 거예요.”
“전투기 추락에 관한 보고서를 읽은 적 있습니다. 끔찍했습니다.”
“응. 항공기 잔해도 못 건지지. 운이 좋으면 겨우 살점 몇 점 수거해 와서 이게 시체다, 하고 장례를 치르는 거예요. 그래서 혹시 훈련 나갔다 사고 날까 싶어서 머리카락 같은 신체 일부를 두고 가는 거죠. 아, 이거 내가 너무 옛날얘기만 하나? 허허.”
“아닙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 재밌는데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아버지뻘이신데.”
우리는 상공 3만 피트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난기류의 조짐이 보였기에 평소보다 조금 낮게 날고 있었다. 비행기는 조용히 일본 영공에 들어서고 있었다.
“실제로 보신 적 있으십니까? 사고 현장.”
“아, 봤지. 잊을 수가 없지, 그날은…… 나랑 제일 친했던 동기 놈이 죽은 날이었거든.”
그는 플라스틱 컵을 손에 든 채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지금도 그랬지만 그때도 팬텀기는 굉장히 노후했거든. 20년 이상 된 것들이 대부분이고 하다 보니 사고가 자주 났어. 그날 훈련은 전폭기 훈련이었는데 유학산 근처에서 동기 놈이 탄 기체가 실종됐어. 잔해가 발견되고 나서 사고사 처리되었는데 시신은 못 건졌지. 다 타고 뭐 없더라고. 1계급 추서해서 소령으로 묻히면 뭐 해, 그 친구 딸내미가 그때 5살이었는데 무슨 의미가 있었겠어.”
“기체 결함이었습니까?”
“글쎄 말이야. 블랙박스도 손상돼서 원인은 못 가렸지. 내가 화가 났던 건 당시 언론이었어. 그때만 해도 전투기 추락 사고가 생기면 군인 정신으로 포장하기 바빴거든. 민간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참된 군인이다 뭐 그런 거 한국 언론 좋아하잖아.”
“어이없네요.”
“그때는 그런 게 먹혔어. 비상 탈출 포기하고 전투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군인 정신 같은 걸 은근 강요받았다고. 팬텀기 하나에 몇 백 억인데 그거 부셔 먹고 진급 바라면 양심 없다 그랬지.”
“친구분께서 비상 탈출을 포기하신 거라고 보십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아무튼 그때 뭔가 머리에 쨍하고 드는 생각이 있었어. 나는 비행을 좋아하지만 군인으로서는 맞지 않나 보다.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역했어. 다행히 15년 비행 의무 기간 채운 뒤라 민간항공사 취직은 쉽게 했지. 아니면 나 같은 허접떼기가 코리아나 에어웨이에 어떻게 들어오겠나. 허허.”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팬텀기는 당시 에이스들만 모는 거라 들었는데요.”
“허허허. 뭐, 그때는 좀 그랬지. 자, 슬슬 내려가 보자고.”
그가 웃으며 랜딩 준비에 돌입했다.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에 큰 취미는 없었지만 박종대 기장의 경험담은 특별했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던 ‘한국 공군 출신 조종사’들의 이미지를 희석해 주었다. 겸손했고, 연륜 있었으며 무엇보다 실력 있었다.
그의 손에 맡겨진 A320이 간사이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2시간 뒤 다시 턴 어라운드 비행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우리는 조종석을 지켰다.
주유가 끝나고 정비사가 들어왔다. 박종대 기장이 일본어로 정비사와 말을 주고받는다. 친근한 그의 대화에 일본인 정비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그가 돌아가고 나는 물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가 궁금했다.
“뭐, 여기 공항 칭찬해 줬지. 정비가 항상 깔끔하고 매뉴얼대로 해 줘서 올 때마다 편하다고. 우리야 이륙 전에 한 번씩 보는 게 다지만 저 양반은 오늘만 열 번 넘게 콕핏에 들어왔을 텐데. 어떤 조종사들은 쳐다도 안 본다지? 조종만 하는 게 다가 아니야. 저렇게 말해 주면 앞으로 우리 회사 비행기는 좀 더 꼼꼼히 봐 주거든.”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조종을 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나는 오늘 대기 콜을 받은 것이 행운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더 배우지 못해 안타까웠다. 승객들의 탑승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 A320이 생소했던 탓에 일일이 젭슨 차트를 보고 체크해야 했는데, 우리가 확보한 이륙 시간 내에 끝내고자 등에 땀이 흐를 정도였다. 주어진 시간대를 놓치게 되면 다음 시간대 비행기들에 의해 가장 뒷순위로 밀리게 된다.
온 정신을 집중해 엔진과 계기판 체크를 마치고 관제탑에 보고했다. 다행히 우리가 1순위를 부여받았다. 박종대 기장이 잘했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그의 마지막 비행에 누가 되지 않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시 기체가 날아오르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고국의 땅으로 마지막 비행이 시작되었다.
“오토파일럿 셋.”
수동 조종간을 놓자 타이밍 좋게 객실 사무장이 들어왔다. 기장님을 위해 특별한 기내식을 준비했다며 눈을 감으라고 했다.
눈을 감고 손을 내민 박종대 기장에게 그녀가 내민 것은 공군 전투식량이었다. 기장이 웃으며 이거 민간 반출이 불법인데 어떻게 구했냐며 궁금해했다. 과정이 꽤 험난했으니 묻지 말라며 그녀가 웃으며 콕핏을 나갔다.
그는 옛 생각이 나는지 한참을 쳐다보다 포장 하나를 뜯고 발열팩 고리를 당겼다.
“캡틴도 이거 하나 먹지.”
그가 내게 건넨 것은 소시지 볶음 팩이었다. 그가 하던 것처럼 밑으로 고리를 잡아당기자 팽팽하게 발열이 되기 시작했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나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팩을 잡아 뜯고 한 스푼 맛보았다. 나트륨 함량이 어마어마했다.
“행군할 때 많이 먹었거든. 그때는 꿀맛 같더니 먹을 게 못 되네.”
“이거 먹고 G-LOC(G-Induced Loss of Consciousness. 중력에 의한 의식 상실 현상. 이를 방지하기 위한 훈련을 뜻함) 훈련 받으면 바로 토하겠는데요.”
“아이고, 끔찍하네. 하하.”
우리는 둘 다 반쯤 먹고 포기했다. 생수로 입가심을 했더니 입이 심심해져 남아 있던 팩 중 초코볼을 하나 뜯었다. 이건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캡틴은 어쩌다 파일럿 할 생각을 했나?”
오랜만이었다. 나의 옛날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은.
“여덟 살 때 독일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때 처음 탔던 비행기를 잊지 못해서 그때부터 쭉 하나만 생각했습니다.”
“아, 자수성가했구만.”
“아니요. 입양된 집이 부유했습니다. 잘 키워 주신 덕분이죠.”
“그래도 쉽지 않아. 인물도 훤칠하고 실력도 있는데, 사위 삼으면 딱 좋겠네. 근데 내가 딸이 없어. 허허.”
“아쉽네요.”
우리는 실없는 농담을 하며 웃었다. 그가 첫 비행에 관해 물었을 때는 나 역시 한껏 감상에 젖었다. 두 조종사가 옛날이야기에 취해 있을 무렵 비행기는 벌써 대한민국 상공에 들어서고 있었다. 기장이 사무장을 불렀다.
“착륙 안내 방송 내가 해도 되겠나?”
“그럼요. 직접 하세요.”
사무장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에게 마이크를 양보했다. 나는 착륙 준비를 위해 김포 공항 공용 주파수에 라디오를 맞추었다.
-승객 여러분, 기장입니다. 오늘도 저희 코리아나 에어웨이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천천히 안내방송을 시작했다.
-우리 비행기는 지금 고도 2만4천 피트 대한민국 영해를 날고 있으며 도착지인 김포공항까지 이제 약 15분여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도착지의 날씨는 맑으며 출발지인 오사카와의 시차는 없습니다. ……오늘은 저의 마지막 비행입니다.
그는 목이 메는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는 지난 40년간 비행을 해 왔으며 그중 23년을 이곳 코리아나 에어웨이에서 보냈습니다. 저의 목표는 언제나 승객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는 것이었으며 오늘 마지막으로 그 임무를 다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이제 저는 비행을 마치지만 저희 후배 조종사들과 크루들은 끝까지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앞으로도 저희 코리아나 에어웨이를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십시오.
-Hello everyone this is your captain speaking, thanks for using Coreana airway…….
이제 고도는 2만 피트까지 내려왔다. 육안으로 김포 공항의 타워 라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곧바로 랜딩 콜아웃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했다.
-Cabin crew, stand by for landing(객실 승무원 착륙 준비.)
우리가 부여받은 활주로는 7번, 숫자마저 좋았다. 착륙 허가가 떨어지자 기장이 조종간을 잡고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랜딩 기어에 손을 올렸다.
“300.”
활주로가 보인다.
“어프로칭 미니멈.”
착륙에 필요한 최소 조건이 갖추어지고 바퀴가 내려간다.
“200.”
이제는 복행이 불가능한 고도에 들어섰다.
100…… 70…… 50…… 20…… 착륙했다.
뒷바퀴가 그라운드에 닿아 출렁거린다. 플랩이 열리며 맞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트러스트 레버에 올라간 기장의 손이 조금 떨렸다. 유도로를 통과해 게이트까지 들어서고 파킹 레버를 걸었다.
그렇게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자 콕핏 바깥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승객들이 그의 은퇴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그는 조종석에 몸을 기대어 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수고 많았네.”
“제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아니야, 캡틴이 모는 메인 기종도 아닌데 훌륭했어. 썩 괜찮은 비행으로 마무리를 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웠네.”
“선배님과 함께 비행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악수를 권했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같이 나가겠나? 난 승객들한테 인사를 좀 하고 싶은데.”
“그러시죠.”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그를 따라 콕핏 밖으로 나갔다. 그는 게이트로 나가는 승객 한 명 한 명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 옆에는 나와 객실 승무원들이 함께했다.
‘조종만 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11시가 넘어 있었다. 당연히 자고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한재이는 여전히 일하는 중이었다. 잘려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치부하더니, 워커 홀릭 성격이 어디 갈 리 없다.
나는 내일 오전 비행이 또 있었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자야 할 때 잠들 수 있는 것도 조종사의 덕목 중 하나다. 괜히 생각이 많아지면 컨디션이 나빠진다.
“먼저 잔다.”
“응.”
그의 방문을 닫아 주고 침실로 돌아왔다. 잠시 고민 끝에 문을 살짝 열어 두었다. 언제든 들어와서 같이 자도 괜찮다는 표현이었다.
눈을 감고 누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재이가 들어왔다. 옷은 그대로인 걸 보니 자러 들어온 것 같지는 않은데 할 말이 있나 싶었다.
“그냥 일하기 싫어서.”
그가 내 배 위에 머리를 두고 대자로 누워 버렸다.
“무거워.”
그랬더니 베개 하나를 올려 두고 다시 누웠다. 베개의 쿠션이 압박을 흡수해 준 통에 무겁진 않았지만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닿지도 않은 스킨십이 이렇게나 불편하게 다가올 줄 몰랐다.
“나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음. 한 3주 좀 안 된 거 같은데.”
“시간 진짜 빠른데?”
“곧 돌아가야겠네.”
“다음 오프 언제야? 이제 뭐 하지.”
돌아간다는 계획에 대해서는 알려 줄 마음이 없었는지 그는 내 말에 대꾸도 없이 주제를 바꾸었다.
“상하이에서 하루 체류하고 올 거야. 오는 길에 신차 인도받을 건데, 드라이브할까? 그 뒤로 3일 오프야.”
“그래. 바다 보러 가자.”
언제는 안 그랬겠냐마는 그의 제안이 썩 마음에 들었다. 바다를 본 지는 좀 오래되었다. 수영을 좋아하는 나지만 해수욕은 취미에 맞지 않는다. 수영은 늘 풀에서 하는 것을 즐겼기에 해변을 가본 지가 1년은 넘은 듯했다. 제주도에서도 바다는 먼발치의 그림이었다.
“잘 거야?”
“응, 자야 해. 내일 쇼업 8시에 있거든.”
“잘 자.”
“무겁다니까. 내려와.”
그제야 한재이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닫아 주고 거실로 나간다. 배 위에 올려진 베개를 제자리에 올려 두고 잠을 청했다.
그가 앞으로 머물 시간이 머물렀던 시간보다 짧아졌다. 한재이가 말한 총각 파티라는 것은 이별 여행인가 보다. 원 없이 그와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준비를 해야 하는 내가 서러웠다.
* * *
“기장님, 식사 같이하실래요?”
상하이 비행을 함께 마친 부기장이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객실 크루들은 이미 자신들끼리 약속이 있는 듯 보였다.
“6시쯤 볼까요? 제가 아는 데가 있습니다.”
“아, 좋죠. 그럼 1층에서 기다릴게요.”
체크인을 끝낸 그가 웃으며 먼저 룸으로 올라갔다. 체류하게 된 호텔은 독일 회사에서도 제휴했던 곳이라 매우 익숙하다. 주변에 괜찮은 요릿집도 많아서 상하이 비행은 반가운 편에 속했다.
고객 정보가 남아 있었는지 호텔 매니저가 룸 컨디션을 업그레이드시켜 주었다. 덕분에 엘리베이터가 끝도 없이 올라간다. 꼭대기 층 끝방이다. 과할 만큼 넓은 방과 욕실 크기였지만 뷰가 좋았다. 대리석으로 마감된 욕조에 물을 받았다.
컨시어지에 전화를 해 사람을 올려 보내 달라고 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보이는 직원 한 명이 문을 두드렸다. 유니폼을 넘겨주며 내일 새벽 6시까지 반드시, 라는 단서를 붙였다.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100위안을 팁으로 건넸다. 그의 목소리에 한층 더 기합이 들어갔다.
욕조 물이 반쯤 찼을 때 가운을 벗고 입욕했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뜨거운 욕조 안이 대비되어 몸이 노곤해졌다. 벗은 몸을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살이 빠졌다고 해 대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옅어진 복근이 아쉬웠다.
손으로 몸을 훑다 보니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떠올렸다. 여성의 육체에 관심이 없어진 탓에 스스로를 위로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뜨거운 김이 얼굴 위로 올라왔다. 온도를 맞추기 위해 온수를 잠그는 사이 한 손은 이미 다리 사이를 향했다. 오랜만에 절정을 맛보았다.
목욕을 끝내고 로비로 내려간 시각은 정확히 6시였다. 부기장이 반소매 차림의 티셔츠를 입고 인사를 했다. 사실 나는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한 번씩 마주친 조종사들의 이름까지 모두 외울 수는 없다. 나는 이름 외에 그를 부를 수 있는 명칭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식당은 걸어서 5분 거리였으므로 우리는 걷기로 했다. 10차선 도로가 광활하게 뻗은 상하이 시내는 언제나 그렇듯 스케일이 크다. 내 키의 세 배쯤 되어 보이는 음식점 입구에 도달하니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역시 동파육을 먹어야겠죠?”
부기장이 이것저것 주문을 했다. 중국어에 능통한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자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션전에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기서는 홍콩이 워낙 가까우니까 많이 들락날락거렸죠. 홍콩 반환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라 핫했거든요.”
“한국에는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중학교 입학 맞춰서 들어왔어요. 공부해야 하니까. 그때 중국에선 못 봤던 한국 드라마들을 불법 비디오테이프로 많이 봤는데, ‘파일럿’이라는 드라마가 있었거든요. 그걸 보니까 비행기 조종사가 너무 멋있는 거예요. 아, 내 길은 이거구나 싶었어요.”
그가 말하는 드라마가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만나 본 많은 한국 조종사들이 이 길을 택했던 이유로 그 드라마를 꼽았다. 한 사람의 인생 방향을 정할 만큼의 힘을 가진 콘텐츠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대한민국 항공의 역사는 공군, 항공대 그리고 드라마 ‘파일럿’이 다 했다고 본다.
“기장님도 한국 들어오신 지 얼마 안 되셨다면서요. 오프 때는 뭐 하세요?”
“뭐 그냥 쉬기도 하고…… 이번엔 바다를 가 볼까 합니다.”
“바다 좋죠. 어디로 가시게요?”
“잘 모릅니다. 추천해 주실 만한 장소가 있을까요?”
“데이트?”
“아니요. 친구랑 갈까 해서요.”
“동해가 좋기는 한데 좀 멀어요. 서울에서 가실 거면 영종도 이런 데가 가깝죠. 당일치기로도 갈 수 있고. 인천공항에서 가기에는 을왕리 해수욕장도 가깝고.”
휴대폰을 열어 그가 말한 장소들을 마크했다. 나도 한재이와의 여행에 뭔가 공헌하고 싶었다. 다행히 부기장도 여행하는 걸 즐기는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먹어야 하는지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메모를 마쳤다.
요리를 물리고 후식으로 차를 마셨다. 직원이 포춘 쿠키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중국 본토에도 포춘 쿠키가 있는지는 몰랐다. 아무래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좋아하니 도입한 것 같았다.
내 몫으로 배달된 과자를 부수고 말린 종이를 펴 보았다. 싸구려 인쇄기로 찍어 낸 듯한 붉은 글씨의 영어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은 늦게 올수록 격렬하다. -호리티우스-]
나는 실없이 웃고 말았다. 격렬함이 꽤나 오래가네. 궁금해하는 부기장에게 종이를 건넸다. 맞는 말 같냐며 나를 추궁한다. 그런 것에 넘어가 줄 생각이 없던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치부했다. 저녁 식사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새벽에 일어나 문을 열어 보니 룸 손잡이에 세탁된 유니폼이 걸려 있었다. 희미한 석유 냄새를 맡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는 모습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왜 이렇게 들떠 있는지 모르겠다.
상하이 푸둥 공항은 러시아워 전이라 이륙 대기 시간이 거의 없었다. 280명의 승객을 태운 A350이 제시간에 날아올랐다. 부기장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반쯤 눈이 감겨 있었다. 어제 그는 저녁을 먹고 곧바로 호텔로 오지 않았다. 여자를 만난 것 같았다.
“많이 졸리십니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다시 상체를 세우며 눈을 떴다. 두 손으로 뺨을 때리더니 눈 마사지를 시작한다. 객실 승무원 한 명이 콕핏 카메라에 잡혔다. 문을 열어 주었다.
“식사 어떻게 하시겠어요? 닭요리와 소고기 볶음 있습니다.”
“기장님 먼저 고르세요.”
“전 그냥 롤빵 하나와 버터만 부탁합니다.”
“부기장님은요?”
“저는 닭요리로. 아, 커피도 좀. 땡큐.”
객실 승무원을 향해 씽긋 웃음 짓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얼핏 보니 그녀 역시 그를 보며 부끄러운 듯 눈웃음을 짓는다. 사내 연애인 것 같았다. 그녀가 가고 난 뒤 그에게 물었다.
“계속 모른 척해 드릴까요?”
“네? 하하하. 아…… 네, 좀. 모른 척해 주세요.”
그가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제 저랑 헤어지고 두 분이 만나셨나 보군요.”
“네. 비행 스케줄이 겹치는 일이 또 흔히 있는 일은 아니라서.”
아마도 객실 팀은 어제 단체 행동을 한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빠질 수 없었을 테니 혼자가 된 부기장은 나와 저녁을 먹어야 했을 테고. 이제야 상황이 이해되었다. 자유 시간이 얼마 없었을 테니 밤을 거의 샌 것 같았다. 연신 하품을 해 대는 그를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내가 이런 일에 관대해진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2시간 단거리 비행이라 식사가 끝나고 곧바로 랜딩에 들어갔다. 한국은 아직 출근 시간이다. 천천히 고도를 낮춘 기체가 꽉 막힌 도로 위를 날았다. 무리 없이 내려간 바퀴가 활주로 위를 미끄러졌다. 착륙 점검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졸린 부기장의 손에서 체크 리스트를 건네받았다.
“기장님 약속 있으신가 보네요.”
“아, 오늘 신차를 인도받기로 했습니다.”
“오, 어디 걸로 뽑으셨어요?”
“그냥. 국산으로 했습니다.”
점검이 끝나고 게이트로 빠져나왔다. 왠지 발걸음이 빨라지는 내가 우스웠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류를 반환하고 부기장과 헤어진 후 곧바로 택시를 탔다. 옷차림 때문인지 나와 계약했던 딜러가 입구에서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차 키와 서류를 넘겨받았다. 마감 체크를 해야 했지만 리콜 따위 할 생각이 없으니 곧바로 운전석에 올랐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한재이의 휴대폰으로 한차례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자고 있거나 일하는 중인 듯했다. 먹을 것을 사 가야 할까 싶었지만 여차하면 나가서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시승조차 해 보지 않은 덕에 계기판 작동이 낯설었다. 곧 익숙해질 것이라 믿었다.
빌라 주차장으로 들어오는데 한재이의 차가 없었다. 반납한 건가 싶어 집으로 올라갔는데 신발이 없었다. 거실에도 방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의 짐이 모두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전화가 울렸다. 벨소리를 한참 흘려보내고 나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비행 끝났어?
“……응. 집에 없네?”
-아, 벌써 집에 왔어? 음…… 기젤라가 왔어, 한국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머뭇거렸다.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 있어?”
-모르겠어. 나도 도착해서야 연락받았거든. 어젯밤에 왔어.
“……응.”
-서진아,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해도 될까?
“그렇게 해.”
-그래. 쉬어.
전화를 끊고 한참을 거실에 서 있었다. 그가 멋대로 배치해 놓은 가구들이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다. 약혼녀와 함께 서울 시내 어느 호텔에 머물고 있을 한재이가 미웠다. 그의 행동에 조금의 잘못된 점이 없는데도, 감정은 멋대로 날을 세운다.
그날 오후 늦게 한재이의 침대가 배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