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Turbulence (3/10)

3. Turbulence

나는 운이 나빴다. 한재이가 기젤라의 호텔로 들어간 이후 3일간 비행이 없었다. 다시 전화한다던 그는 어제 하루 종일 연락이 없었다. 멋대로 튀어 나가 버린 미움의 감정은 내가 먼저 전화 한 통 못 할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은 상처를 받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운이 나빴다.

아침 일찍 조민우 부기장이 가르쳐 준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회원 등록을 하고 곧바로 러닝머신에 올랐다. 몸이 지쳐 일어날 힘도 없어질 때까지 뛰었다. 온몸에 땀에 젖었지만 그거로는 부족했다. 그대로 수영장으로 이동했다. 레일 하나를 전세 낸 듯 나는 물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운동이 아니라 혹사였다. 갑작스러운 자극을 받은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온몸이 욱신거릴 때까지 수영하고 나왔는데도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샤워실에서 쳐다본 거울에는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남자가 서 있었다. 흐르는 물을 그대로 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숨이 막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가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그래도 그 이상을 하면 일이 어그러질 것을 알기에 다음번 전화는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메시지로 대신했다.

[서진아 오늘 비행 없지? 점심 같이해]

읽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신경 썼으면 했다. 어린애처럼 삐져 버린 꼴이 우스워 담배를 물었다. 어른 흉내를 내며 폼을 잡았지만, 입에선 나도 모르게 상스러운 욕이 튀어나왔다. 편의점으로 들어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부랑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곧 아무렇지 않게 답장을 보냈다.

[그래. 어디서 볼까?]

곧바로 그에게서 회신이 온다. 예상은 했지만 셋이 함께하자는 뜻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온 나는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던졌다. 그대로 거실 벽에 주먹을 날렸다. 반동으로 부엌 진열장에서 와인 잔이 쏟아졌다. 여러모로 최악이다.

기젤라 베버가 내 계획을 망치고 있었다. 내가 한국으로 도망쳐 온 이유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직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는데, 너무 빨리 그런 것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술을 마실 수도 없는 시간이다. 싫은 사람과의 점심 식사는 고문과도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 시간 후 그들이 머무는 여의도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 첫 테이프를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로 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어쩌면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막상 약혼녀와 함께하는 한재이의 모습을 보면 깔끔하게 포기하게 되지 않을까.

……포기라니, 젠장. 나도 모르게 다시 기대하고 있었던 건가. 그와 보낸 지난 3주 동안 되먹지도 않은 욕심을 꾸역꾸역 채워 넣은 게 분명했다. 시급히 털어 버려야 했다.

* * *

호텔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발레파킹을 맡기고 로비로 들어섰다. 오성 호텔 중에서도 상위급에 속하는 곳이다. 1층 카페에서 눈에 띄는 금발 머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입구에 서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기젤라는 혼자 앉아 있었다. 루즈하게 내려온 흰색 셔츠 안으로 슬립과 목선이 드러나 보인다. 짧은 팬츠 밑으로 뻗은 말끔한 다리 선이 하이힐까지 이어져 있었다. 전직 모델이라는 명색에 걸맞은 모습이다.

나는 아마 호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삐딱한 자세로 그녀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졸업하고 11년 만이지만 기젤라는 나를 한번에 알아보았다.

“맥시!”

그녀가 두 팔 벌려 반가움을 표했다. 진한 포옹과 뺨 키스를 나누었다. 기대보다 더한 환대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생각해 보면 그녀 역시 나의 동창이자 오랜 친구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단순하지 않듯, 한재이를 향한 내 감정과는 별개로 반가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와우. 너 하나도 안 변했네.”

그녀는 시원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너도 그러네. 바로 알아보겠어. 재이는 어디 갔어?”

“잠깐 화장실. 진짜 진짜 오랜만이다, 맥시. 잘 지내? 한국은 어때? 살 만해?”

“생각보다 좋아. 너는 어때? 결혼 축하해. 인사가 늦었네.”

“고마워. 너한테 축하받으니까, 감회가 새롭다.”

그녀는 길게 입꼬리를 올리며 탄산수를 마셨다. 메뉴판을 보여 주며 식사를 시키라고 권했다. 나는 클럽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물을 부탁했다. 곧 목이 탈 것 같았다.

“한국엔 무슨 일이야? 재이 말로는 연락도 없이 왔다면서.”

“그냥 와 보고 싶었어. 이제 슬슬 나도 알아 가야 할 것 같아서.”

기젤라는 빨대를 휘저으며 웃었다. 그녀로서는 충분히 내세울 수 있는 이유에 할 말이 없어졌다. 한재이의 국적은 독일이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 사람이다. 자세가 좋네. 그녀를 나무랄 수 없었다.

“왔어? 둘이 오랜만에 보는 거네.”

한재이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짧은 한국어는 나에게 하는 말이고, 긴 독일어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가 내 옆에 있는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그러자 기젤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본다. 표정은 웃고 있는데 시선이 미묘하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치우려 했던 옆 의자 위 가방을 다시 올려 두는 것이 보였다. 굳이 따지자면 한재이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뿐이다. 내가 오기 전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을 테니. 그는 자신이 마시던 커피 잔을 들었다.

“근사한 데서 저녁 같이하고 싶었는데, 기젤라가 시차 때문에 졸리대. 저녁은 나랑 둘이서 먹자.”

그녀와는 이미 오늘의 스케줄을 의논한 듯 보였다. 밤에 깨면 심심하니 너무 늦게는 오지 말라는 그녀의 당부에 한재이가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그의 다정함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주문한 샌드위치가 도착해 식사를 시작했다. 운동을 하고 온 덕에 식욕은 넘쳤다. 그녀는 자신의 몫으로 온 샐러드를 먹기 위해 긴 머리를 들어 올렸다. 손목에 감고 있던 밴드로 머리를 묶는 그녀를 한재이가 쳐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목선을 드러낸 그녀가 다시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먹자.”

우리는 오랜만에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했다. 기젤라와의 접점은 많지 않았기에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몰랐다. 둘이 잠깐 사귀었었다는 것을.

“사귄 건 아니고. 몇 번 따로 만났어. 나도 그땐 꽤 잘나갔었으니까, 이제 슬슬 재이 한을 만날 때가 되었었다고나 할까?”

“근데 막상 데이트하고 나니 우리 둘 다 실망했잖아. 기대가 너무 컸었나 봐.”

그건 마치 학교에서 제일 잘나가는 애들끼리 가지는 일종의 허례허식 같은 거였나 보다. 만나는 상대의 수준이 내 평판을 올려 주는 관계. 둘은 내가 모르는 기억을 계속해서 더듬었다.

“그래도 우리 두어 달 정도 만나지 않았어? 맥시한테도 얘기 안 해 줬다니 섭섭하다. 너한테는 그렇게 별거 아닌 이벤트였나 보지?”

“우리 원래 그런 얘기 잘 안 했어.”

“뭐. 여자 얘기? 진짜 그래?”

기젤라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삼켜야 했다. 글쎄, 진지하게 사귄 사람을 소개받은 적은 없었으니까.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그녀가 처음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이 모양 이 꼴이겠지.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너도 5학년쯤에 사귀던 걔 누구였지? 깡마르고 눈 커다란 영국 애.”

한재이는 나 역시 공범이었다는 듯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꺼냈다. 어디다 비교를 하는 건지 우스웠다.

“사귄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나한테는 집에 가야 한다고 빼더니 여자애랑 자기 집 정원 뒤에서 키스하고 있는 거야. 진짜 어이없었어.”

“언제 봤어, 그런 건?”

“그게 중요해? 너 완전 배신자였어. 나 하마터면 뛰어가서 주먹 날릴 뻔했잖아.”

웃겼다. 그날 나는 키스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벌에 쏘인 그 아이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멋대로 오해하고 주먹을 쥐고 있었을 한재이를 상상하니 조금 통쾌했다. 그래서 굳이 진실을 바로잡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너희 좀…… 웃긴다.”

기젤라가 팔짱을 끼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익숙한 반응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재이와 나의 관계는 주변 사람들을 질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약혼녀와 경쟁할 마음은 없었으므로 화제를 돌렸다.

“결혼 날짜 잡았어?”

스스로에게 하는 채찍질이기도 했다.

“7월 17일이야. 시청 담당 직원이 휴가 가기 전이라 겨우 잡았어.”

“한 달 남았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썼는데 눈치챈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아마 나는 도살장의 소처럼 그 자리에 끌려 나갈 것이다. 피를 쏟으며 목이 잘리는 대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결혼 서약서에 증인으로 서명할 것이다. 이 결혼이 유효함을 내 이름을 걸고 보증해야 할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는 로테의 결혼식에서 도망이라도 쳤지. 나는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꼴이 가엽다.

기젤라와 눈이 마주쳤다. 건조하게 샌드위치를 뜯고 있는 내 행동을 유심히 살핀다. 긴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리더니 내 붉게 부어오른 손마디를 보며 물었다.

“다쳤어?”

그녀의 말에 한재이가 그 시선을 따라와 내 손을 보았다.

“손 왜 이래?”

“좀 부딪혔어.”

“어디서?”

“글쎄, 운동하다가 그랬나.”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받아넘겼다. 집 안에서 깨지던 와인 잔 소리가 다시 한번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런 것들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기에 곤욕스러웠다.

더 할 얘기가 없어진 우리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한재이가 졸린 표정의 기젤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품에 안기듯 반쯤 눈을 감은 그녀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고는 이마에 키스해 주고 기젤라를 먼저 올려 보냈다.

“같이 올라가지, 왜.”

“담배 한 대 피우고 가.”

자신은 피우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 말을 했다. 나는 혼자 조용히 피우고 싶은 마음에 그를 보내고 싶었지만,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설득할 방도가 없었다. 호텔 밖 흡연 장소에서 하나 남은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의 모습을 감상하니 어때?

내 안의 분열된 자아가 속삭이듯 물었다. 대답 대신 긴 연기를 뿜었다. 실없는 웃음도 터져 나왔다.

“왜 웃어?”

“그냥. 둘이 잘 어울려.”

이번에는 그가 픽 하고 웃었다. ‘그런가.’ 하고 혼잣말도 중얼거렸다. 온 세상 행운을 다 가진 남자의 감상치고는 지나치게 반응이 빈약했다.

“기젤라가 왜 온 건지 말을 안 해 주네. 계획이 틀어져 버렸어.”

“무슨 계획?”

“바다 보러 가기로 했잖아, 우리.”

‘우리’라는 말에 다시금 나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한재이는 지금 생각 없이 돌을 던지고 있다. 물결이 요동치며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내가 살기 위해 그의 행동을 멈춰야 한다.

“됐어. 한국에 바다 별로 갈 만한 데도 없다던데. 나도 좀 피곤하고…… 너랑 놀아 주느라 제대로 오프 때 쉬지를 못했어.”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을 쏟아 냈다. 기대했던 일주일은 빼앗겨 버렸지만 미련을 두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런 속도 모르는 한재이는 자꾸만 나를 잡아당긴다.

“저녁 뭐 먹지? 내가 집으로 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더는 집으로 들이고 싶지 않았다. 주인 없는 새 침대를 보이기도 싫었다. 딱 중간쯤에서 보자고 했다. 나는 이제 우리가 그 정도 거리를 유지했으면 했다. 나도 너에 대한 마음을 접을 테니 쓸데없는 말로 나를 현혹하지 말아 주길 바랐다. 우리의 관계는 정말 우정뿐이라는 굵은 선을 그어 주길 바랐다.

담배를 비벼 끄고 올라가 보라며 채근하는 나의 어깨를 그가 잡았다. 운전 조심하고. 이따 보자. 나는 짧게 ‘응’ 하고 대답한 뒤 옆에 있던 호텔 직원에게 차량 번호를 불러 주었다. 한재이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니, 깨물고 있던 입술이 얼얼해졌음을 느꼈다.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단둘이 있고 싶은 열렬함을 이길 수 없었다.

드디어 혼자가 된 나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차례였다.

두 사람의 모습을 감상하니 어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첫 번째 구절이 떠올랐다.

‘친구여, 생각해 보면 역시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재이와 헤어지고 나는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텅 빈 그 집에서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계획하고 여가를 즐기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시내 한복판에 차를 세우고도 한참을 운전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생각 없이 들어온 백화점 건물 안에 영화관이 있었다. 때려 부수고 싸우는 영화를 택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상영관의 좌석 절반은 비어 있었다. 나는 일찍 입장한 덕에 상영 전에 보여 주는 광고를 고스란히 봐야 했다.

독일의 영화관은 한국에 비하면 낡고 노후하다. 스낵 코너에서 팔고 있는 간식거리들도 팝콘과 나초, 초콜릿 따위가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흥의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십 대 때는 영화관에 자주 왔었다. 한재이가 오해했던 그 영국 여자아이와도 두 번 이상은 왔었던 듯했다.

유럽의 모든 고등학교가 그렇듯 우리도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했었다. 크리스와 나는 프랑스 시골 동네에서 한 달을 보냈고, 그 다음해 양부모님은 영국에서 온 그 여자아이를 집에 들였다.

한 달 동안 책임지고 데리고 다니라는 엄명이 떨어진 터라, 볼링장에 가자던 한재이의 제안을 뿌리치고 집으로 가야 했었다. 그러다 정원에서 혼자 벌집을 건드려 울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을 뿐인데 키스라니. 진짜 키스를 했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 후로도 몇 번 한재이를 혼자 두고 그 아이를 챙겨 주러 일찍 간 적이 있었는데, 그걸 두고 사귄다고 오해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녀와 나는 요즘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다. 런던 비행이 있다면 만나자고 연락이나 한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젤라를 안아 주던 한재이의 모습이 경쟁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의 품에 내가 안겼으면 하는 따위의 바람은 들지 않았다. 내가 한재이에게 느끼는 감정은 생각보다 복잡한 모양이었다.

불이 꺼지고 상영이 시작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숲에서 괴물 같은 형상을 한 남자가 울부짖고 있었다. 몸에서 털이 솟아나고 척추가 굽었다. 남자는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숲길을 달리고 있던 차를 막아섰다. 겁에 질린 운전자의 멱살을 쥐고 남자가 말한다.

‘빨리 여기를 빠져나갑시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헷갈리는 첫 장면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 * *

영화를 보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어쩐지 받고 싶지 않았는데 속절없이 벨을 울려 대는 한재이의 끈기에 마지못해 휴대폰을 들었다. 역시나 좋지 않은 내용이었다.

-기젤라가 생각보다 일찍 깼어. 저녁 셋이서 같이 먹을까 해서.

나는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곤욕스러운 만찬은 한 끼로도 충분했다. 또한 이렇게 되면 내가 둘 사이에 끼게 되는 셈이다.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했다.

“나 사실 속이 좀 좋지 않아서. 둘이서 먹을래?”

-그래? 많이 안 좋아?

“그냥 좀. 체했나 봐. 저녁은 다음에 해.”

그러나 다음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는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일찍 전화해 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빵을 잔뜩 쓸어 담았다. 삼 일 치 식량을 모으는 다람쥐처럼 양손 가득 빵 봉지를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운전하면서 생각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가는 걸까. 저렇게 둘이서 관광 아닌 관광을 하며 일주일을 보내다 함께 돌아가려나. 가기 전에 한 번은 더 보지 않을까. 그냥 여자 친구도 아니고 약혼녀를 혼자 둘 리 없는 한재이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어쩌면 단둘이 보는 시간은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

신호 대기를 하는 중에 도어 트림의 비닐이 손에 잡혔다. 차를 인도받고 제대로 비닐도 뜯지 못했다. 별생각 없이 잡아당겼는데 끝도 없이 뜯기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남아 버린 비닐을 다 처리하지 못했는데 신호가 바뀌었다. 길이 익숙하지 않아 집까지 오는데 몇 번 돌아 와야 했다.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익숙한 얼굴 하나가 편의점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가 이 동네에서 얼굴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부기장님.”

창문을 내려 그를 불렀다. 편안한 면바지에 셔츠 하나만 걸친 조민우 부기장이 놀란 표정으로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차 뽑으셨어요?”

그러더니 타라는 말도 안 했는데 조수석에 올랐다. 성격이 참 재미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디 다녀오셨나 봐요? 깔끔하게 빼입으셨네.”

나도 모르게 한껏 치장하고 나갔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뭐 하고 있었냐고 물으니 편의점에서 박스를 얻어 보려 했단다.

“같이 살기로 했던 사람 물건이 아직 좀 남아서 보내 주려고 보니 박스가 없더라고요. 편의점에도 없다네요.”

약혼녀의 물건이 아직 집에 있다는 것은 그도 파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헤어졌는데 그런 것들까지 처리해야 하는 것은 곤욕일 것이다.

“박스 저희 집에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독일에서 짐을 받아서. 필요하시면 가져가시죠.”

“오. 좋네요. 지금 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나는 그대로 가속 페달을 밟고 빌라 앞까지 차를 몰았다. 짧은 거리지만 조수석 안전벨트를 하라는 경고음이 울렸다. 주차 모드로 전환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1층에서 담배 한 대 하고 가자는 그의 말에 흔쾌히 동의하고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 옆에 마련된 흡연 구역에서 나란히 서서 불을 붙였다. 요즘 들어 흡연량이 늘고 있다. 끊을 생각은 없었지만 줄일 필요는 있어 보인다. 골목길을 지나가는 한 아주머니에게 조민우 부기장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이 동네에 아는 사람이 꽤 있나 보다.

“오늘 오프셨어요?”

“네. 어제 새벽 상하이에서 돌아와서. 부기장님은요?”

“저 사실 어제 하노이 비행으로 이틀 레이오버 해야 했는데, 이륙하고 10분 만에 비상 착륙 했어요.”

“트러블 슈팅(Trouble Shooting. 사고 진단 및 해결) 있으셨습니까?”

“네. 엔진 파이어 났거든요.”

“네?”

나는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릴 뻔했다. 엔진에 불이 났다니. 비상 상황 중에서도 상당히 중대급이다. 10년간 비행을 했지만 한 번도 내가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었고 이렇게 태연하게 동네에서 담배나 피우며 들을 일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기체 결함이었습니까?”

“네. 20년 된 320이었는데 엔진 플래그에 불이 붙어서 곧바로 셧 다운시키고 비상 착륙했어요. 기장님이 당황하셔서 타워에 메이데이는 제가 외쳤죠. 처음 해 봤어요. 하하.”

그는 무슨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당황하지도 않았는지 그때 시행했던 커뮤니케이트 순서를 완벽하게 들려주었다. 들어 보니 비상 대처도 매뉴얼대로 훌륭하게 처리했다.

이쯤 되니 조민우 부기장의 성격에 다시 한번 의문을 품었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남보다 빠른 것일까. 어느 쪽이 되었던 특이한 성격이다.

“그래서 어제 종일 사고 처리반에 붙잡혀서 보고서 쓰고 시달리다가 저녁에 풀려났어요. 덕분에 오늘 휴가 얻은 것 같고 그러네요.”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니까요. 공중에서 터져 죽는 건 진짜 싫은데.”

끔찍한 소리를 웃으면서 한다는 점도 추가해야겠다.

“원래 성격이 그렇게 덤덤한 편입니까?”

“저요? 하하. 네. 이제야 느끼셨나 보네. 남들은 금방 알아차리던데.”

그는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혹시 파혼을 당한 이유가 저런 성격 때문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남의 반응을 보고자 일부러 던져 보는 그런 성격.

잡담이 끝나고 우리는 집으로 올라갔다. 박스를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그가 거실 중앙에 서서 부엌 진열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젠장, 와인 잔을 깨 먹은 것을 잊고 있었다.

“아, 실수로 깨트렸어요. 그대로 두시고 이쪽에서 박스 가져가시면 됩니다.”

나는 그에게 발코니 구석에 있는 수납장을 가리키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친구분은 안 계시나 보네요.”

그가 집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네, 약혼녀가 와서 호텔로 들어갔거든요.”

“흐음…….”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내가 건네는 박스를 받아 들고 수를 세었다.

“하나, 둘…… 네 개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아요.”

발코니에서 거실로 다시 들어선 그가 깨진 와인 잔 더미를 쳐다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같이 치우죠?”

“네?”

그는 들고 있던 박스를 소파에 걸쳐 두더니 멋대로 욕실에서 수건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수건 양 끝을 잡고 마룻바닥을 쓸어 유리 조각을 모았다.

“그냥 두시죠. 제가 나중에…….”

“나중에 언제요. 이러고 계속 사실 거 같은데?”

그의 말에 당황한 나는 멀뚱히 쳐다보다 담을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정신을 차리고 쓰레기봉투를 가지고 왔다.

“이 수건 버려야 할 거 같은데요.”

“네, 괜찮습니다.”

수건과 함께 감싸진 유리 조각들이 쓰레기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툭툭 털고 다시 한번 마룻바닥을 훔치던 그가 짧게 신음을 내었다. 찔린 모양이었다.

“아…… 집에 구급약이 없는데.”

“괜찮아요. 천연 소독약이 있는데요, 뭐.”

그는 피가 흐르는 엄지손가락을 빨며 웃었다. 웃고는 있지만 찌푸려지는 한쪽 눈썹을 보니 고통이 좀 있어 보였다.

“좀 보죠. 깊게 베인 거면 감염될 수 있습니다.”

환부를 살피고자 가까이 다가갔다. 애처럼 웃으며 제 손가락을 빨고 있는 그를 설득해 상처를 살피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한재이가 뭔가를 사 들고 온 듯 두 손 가득히 음식 봉투를 든 채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우리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서서 얼굴을 굳혔다.

나는 벌에 쏘인 영국 여자아이를 살펴보고 있었을 뿐이고, 손을 베인 조민우 부기장의 상처를 봐 주고 있었을 뿐인데. 그는 혼자 오해하고 또다시 주먹을 쥐었다.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어디까지나 여기는 내 집이고 둘 다 나의 손님이니까.

“저녁 먹는다더니. 여길 왜 왔어?”

한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표정을 정돈한 채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짧은 그의 인사에 조민우 부기장이 웃으며 화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한재이는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지나치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남아 있는 깨진 와인 잔의 흔적들을 훑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나와 조민우 부기장을 번갈아 쳐다본다. 표정을 보니 상황 파악을 끝낸 것 같았다. 식탁 위에 음식을 올려두고 이번엔 그가 청소를 시작했다.

“집에 구급약 있으니까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조민우 부기장이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흔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나 보다. 거실에 놓여 있던 박스를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상당히 민망하고, 또 미안했다.

“그런데 친구분은 볼 때마다 저기압이시네요.”

신발을 신던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원래 저렇지 않은데…… 아무튼 미안합니다. 나중에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죠.”

“좋죠.”

현관문을 나서는 그를 배웅해 주고 문을 닫았다. 박스에 묻어 있던 핏자국에 신경이 쓰였다. 내 집에 와서 사람이 다쳤는데 아무것도 못 해 주고 그냥 보냈다. 그건 그렇고 대체 한재이는 왜 여기에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거실에서 팔짱을 낀 채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수건에 물을 묻혀 바닥을 닦고, 쓰레기봉투를 묶었다. 마침내 청소가 끝나자 그가 몸을 일으켜 나를 마주 본 채 섰다. 우리는 서로 질문할 것이 많았다.

“누가 이랬어.”

“왜 왔냐고 내가 먼저 물었잖아.”

한재이는 심술궂은 나의 대답에 한숨을 쉬었다. 체했다고 해서 약과 수프를 사 왔다고. 그런 그를 나는 한 번 더 몰아쳤다. 약혼녀를 혼자 호텔에 팽개쳐 두고 여길 올 만큼 내가 아프다고 한 것도 아닌데 사람을 왜 곤란하게 만드냐고.

“뭐가 곤란하다는 건데. 같이 오자니까 싫다고 해서 혼자 왔어. 룸서비스라도 시켜 먹겠대. 앉아. 나도 저녁 못 먹었어.”

그가 멋대로 식탁 의자를 빼내어 나를 앉혔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아 숟가락을 쥐여 준다. 나는 한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한재이의 다정함이 나를 병들게 하고 있었다.

“토마토 크림 같은 건 없었어. 제일 비슷한 거로 사 왔는데 별로라도 먹어.”

토마토를 갈아서 생크림과 함께 끓여 낸 수프를 나는 가장 좋아했다. 챙겨 줘서 고맙지만 진짜 체한 게 아니었으니 수프 따위가 먹고 싶을 리 없다. 그래도 나를 위해 자신의 식욕까지 희생해 주는 한재이를 보며 억지로 수저를 들었다. 문득 차 안에 두고 온 빵 꾸러미가 생각났다. 아무래도 그건 그가 돌아가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은 뭐 해? 약속 없으면…….”

“약속 있어.”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와 버린 말은 진심이었다. 약속이 없어도 만들어야 한다. 혹시라도 셋이서 뭔가를 또 하자는 건 무조건 사절하고 싶었다. 나의 그런 반응에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가 알겠다며 더는 권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나를 한재이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소파에 누워 있으라고 권한 뒤 먹은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셔츠를 걷어 올리고 그릇들을 정리하는 뒷모습이 멋있었다. 인생의 반을 함께 보내 놓고서도, 이제 와 그에게 반하는 내 꼴이 우스웠다.

대충 정리를 끝낸 한재이가 다가와 앉았다. 시간은 벌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고마워. 이제 가 봐. 기다리겠다.”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너 몸 많이 안 좋으면 자고 갈까?”

진짜 아팠다면 모른 척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을 텐데. 인간은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짐승이 못 된다고 했던가. 내 안의 양심이 작동하며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멀쩡하니까 그럴 필요 없어.”

한재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이유 없이 기젤라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그를 자꾸만 여기에 매어 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발 좀 나를 신경 쓰지 않아 주길 바랐지만, 이 또한 우리가 쌓아 둔 관계의 업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는 멍들어 간다.

“재이야.”

누그러진 나의 말투에 그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네가 여기 와 있으면 내가 기젤라한테 미안해지잖아.”

있는 그대로를 전달했다. 가 줬으면 좋겠다는 따위의 거짓말을 할 위인은 못 되는 나였으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멀리 못 나간다는 말을 하며 나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소파 껍데기에 박제처럼 붙어서, 그에게 잘 가라는 인사만을 건넸다.

현관문이 닫히고 온전히 혼자가 되고서야 외로움을 느꼈다. 한동안 눈만 깜빡이며 천장을 쳐다보다, 빵 생각이 나서 몸을 일으켰다. 수프 따위를 먹고 배가 부를 리 없었다. 식욕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여기서 살이 더 빠지면 정말 볼썽사나워질 것 같았다.

밖으로 내려가 차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던져져 있던 빵 꾸러미를 가지고 올라왔다. 크루아상 하나를 우유와 함께 먹어 치웠다. 다른 빵 하나를 더 뜯었다. 외로움에 계속 허기가 졌다.

TV를 틀어 삭막한 집 안에 사람 목소리를 채워 넣었다. 웃고 떠드는 예능 프로에 채널을 고정한 채 나는 빵을 먹었다. 꾸역꾸역 씹어 넘기는 밀가루 반죽에 갑자기 위가 경련을 일으켰다.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것을 게워 냈다. 가지가지 한다 싶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말도 없이 찾아가서 미안해.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어]

한재이의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저려 왔다. 뭐라고 답을 해 줘야 할까. 곤란하지 않았다고 하면 또 그럴지도 모른다. 그만 찾아오라고 하면 정말 발길을 끊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같았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 쉬어]

애매한 답장으로 대화를 중단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통하지는 않았다.

[내일 약속은 언제 끝나?]

그러고 보니 거짓말을 했다. 아무 약속이라도 잡아야 하는데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다. 조민우 부기장과 전성욱 부기장이 함께 있는 대화창을 열었다. 셋이 있는 채널에서 말하기는 좀 부담스러웠다. 나는 ‘조민우’라는 이름을 선택하고 개인 대화창을 열었다. 나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손은 괜찮으신가요?]

메시지 옆의 1이라는 숫자가 금방 사라졌다.

[하나도 안 괜찮아요. 감염돼서 퉁퉁 붓고 난리 났어요]

나는 순간 놀라서 당황했다. 어쩌지. 병원을 데리고 가야 하나. 허둥대며 근처 응급실을 검색하던 나를 놀리듯 그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농담이에요]

그러고는 밴드로 감싼 엄지손가락을 찍은 사진을 보내 주었다. 보아하니 별 탈 없어 보인다.

[다행이네요. 혹시 내일 점심 같이하시겠습니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되었다. 하노이 비행이 취소되었으니 내일까지 오프일 것이다. 거절당할 수도 있지만 내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내일 동호회 모임 있는데]

예상 못 한 휴일에도 그는 곧바로 약속을 잡는 성격인 듯했다.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던 차에 다시 메시지가 왔다.

[같이 가실래요? 사격 동호회인데 게스트는 언제나 환영이거든요. 끝나고 저녁까지 같이 먹는 거로]

정말 내가 껴도 되나 싶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좋다는 승낙을 하고 한재이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아마 저녁 먹고 들어올 거야]

답장이 없는 걸 보니 운전 중이거나 이미 호텔로 들어간 듯했다.

조민우 부기장에게서는 다시 답장이 왔다. 내일 3시에 집 앞으로 데리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그 사자인지 곰인지 모를 동물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메시지도 따라왔다. 정말이지 재밌는 성격이라는 생각을 하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 * *

다음날 점심을 대충 먹은 뒤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조민우 부기장의 외제 차가 빌라 앞에 정차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불을 끄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여러 가지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주로 레저 스포츠 관련이었다. 오늘은 서너 명이 모여 실탄 사격장에서 내기 사격을 하는 날이라고 했다. 사격이라, 구미가 당겼다.

“실탄 경험은 있으세요?”

“네, 면허는 가지고 있습니다. 훈련장 옆에 사냥 허가된 곳이 있어서 한동안은 자주 들렀고요.”

“아, 좋네요. 들어가시죠.”

그가 차를 세운 곳은 실내 사격장이었다. 안에서 그를 반기는 4명의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반말을 하는 거로 보아 꽤 친분이 있는 사이 같았다.

“두 팀으로 나눠서 1인당 5발씩. 진 팀이 저녁 내기.”

“서비스 미션 있어?”

“있어. 그건 10점짜리로 치자.”

그들이 하는 말을 대충 알아들었다. 꽤나 마니아들인지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온 고글과 귀마개 등을 꺼내기 시작했다. 장착하는 폼들이 예사롭지 않다. 음…… 내가 민폐를 끼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네 셋 이렇게 편 먹고. 동진이랑 나랑, 기장님도 저희랑 같은 편 하시죠?”

“네.”

조민우 부기장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나를 배려해 자신의 팀으로 넣어 준 것이 분명했으니 최선을 다해야겠다 싶었다. 사실 권총을 쏴 본 적은 몇 번 없었다. 내가 쏴 본 것은 대부분이 라이플 사냥총이었으며 야외에서의 경험이 전부였다.

자세를 잡은 상대 팀 첫 번째 주자가 과녁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5발을 쏘았고 무난한 점수를 획득했다. 첫 발은 5점 만점 부위에 명중까지 했다.

다음은 우리 팀 멤버가 총을 잡았다. 귀마개를 했는데도 총소리가 폭발하듯 고막 안으로 뚫고 들어왔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뒷벽에 기대어 한 발 한 발 마무리될 때마다 박수를 치고 응원을 했다.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예행연습용으로 마련된 모조품을 들고 과녁을 먼저 겨냥해 보았다. 시력만큼은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지라 그걸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야- 뭐, 키가 크시니까 자세가 딱.”

지인 중 한 명이 뒤에서 칭찬해 주었다. 옆에서 나 대신 장전을 해 주던 조민우 부기장이 웃으며 권총을 건넸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을 떠올리면 점수가 잘 나와요.”

나는 그의 농담을 듣고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새 과녁이 나타나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죽일 만큼 미운 사람이라. 한 명 있었다. 과녁 한가운데 떠오른 그 얼굴을 향해 연속으로 5발을 모두 쏴 버렸다. 내가 떠올린 것은 빌어먹을 내 자신이었다. 1발을 제외하고 모두 만점이었다.

“오…….”

“연발하셨네? 이야…….”

순식간에 차례를 넘겨받은 상대 팀 멤버가 휘파람을 불며 권총을 건네받았다. 다시 뒤로 가서 팔짱을 끼고 그가 하는 사격을 지켜보았다. 보아하니 이 무리의 에이스인 듯했다. 자극을 받았는지 그 역시 연발로 5발을 모두 쏴 버렸다. 한 발도 빗나가지 않은 25점 만점이었다.

“아…… 이렇게 되면 민우가 부담되겠는데?”

에이스는 여유롭게 웃으며 권총을 내려놓고 뒤로 빠졌다.

“난 연발 못 해. 알잖아.”

조민우 부기장이 웃으며 사격대에 발을 올렸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한 발 한 발 공을 들여 사격을 했다. 나쁘지 않은 실력인데 아슬아슬하게 동점으로 끝날 듯 보였다. 마지막 한 발을 남겨 놓고 조민우 부기장이 누군가를 불렀다.

“사장님! 저 미션 하나 던져 주세요.”

카운터 쪽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과녁이 바뀌고 작은 담배 한 대가 핀에 물려 목표물로 내려왔다. 여기선 잘 보이지도 않는다. 설마 저걸 맞히겠다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조민우 부기장이 나를 돌아보며 윙크를 했다. 그러고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마지막 한 발을 쏘았다. 정확하게 담배 필터 부분이 터져 나가고 10점을 얻었다.

“우리가 이겼네? 하하.”

예상했지만 몰랐다는 듯 말하는 저 말투가 이제는 낯설지도 않았다.

일행들과 함께 사격장에서 곧바로 횟집으로 향했다. 한 잔씩 돌리는 와중에 조민우 부기장이 맹물을 소주잔에 부었다. 차를 가지고 왔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고, 나 역시 술 마실 기분은 아니라서 탄산수를 시켰다.

사실 회는 여전히 낯선 음식이다. 바다가 별로 없는 독일에서는 신선한 생선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작정하고 돈을 쓰러 가는 일식 레스토랑이 아니라면 익히지 않은 생선 살을 먹는 것은 드물다. 언젠가 한국이 세계에서 수산물 소비량이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일본보다 순위가 높았던 사실에 꽤 놀랐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니 모두 신기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말주변이 없는 탓에 항상 어디서 읽은 것들을 화젯거리로 삼는다. 내가 책을 좋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면 정말 어디 가서 한마디도 끼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게 식사를 같이하다 보니 이 모임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꽤 친한 지인들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냥 인터넷 커뮤니티 모임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조민우 부기장은 이런 동호회 활동만 열 개 넘게 하고 있다고 했다.

“체력이 대단하시네요. 시차 때문에 컨디션 조절 힘드실 텐데.”

“그렇죠? 이제 좀 줄이려고요.”

끄떡없다는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조민우 부기장의 대답은 항상 재미있다. 뭐랄까, 예상을 빗나가는 말들을 자주 하니까.

“그러고 보니 소개해 주신 피트니스 센터 등록했습니다. 시설 좋던데요.”

“네. 새로 생긴 데라 괜찮아요. 다음엔 같이 가요. 밖에서 더 자주 봤으면 좋겠어요.”

“저를요?”

“네.”

빙그레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쓸데없는 상상이 머릿속에 스쳤다.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조금 우스웠지만, 그가 혹시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워졌다. 예전부터 묘하게 느껴지는 그의 이상한 태도와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정말 설마 했었다. 그런 연유로 이런 자리에서 꺼낼 말은 아닌 걸 알면서도, 용기를 내어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질문했다.

“부기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어떤 이유로 파혼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최대한 정중히, 그리고 그가 충분히 거절할 수 있을 정도의 뉘앙스로 물었다. 그러자 조민우 부기장은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물어봐 주시는군요! 기다리느라 좀 지쳤었는데.”

그다운 답변이었다. 이런 건 형식적으로라도 한잔하고 말해 줘야 한다며 맹물이 든 소주잔을 원샷 했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은 일행이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여자 친구가 결혼식 1주일 전에 헤어지자고 했어요. 제가 차였죠.”

“무슨 이유로…….”

“우연히 제가 전 애인과 찍은 사진을 들켰거든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네. 문제가 되는 사진이었어요. 왜냐하면 전 애인은…… 자, 오늘은 여기까지!”

그가 나지막이 속삭이느라 숙였던 고개를 바로 들며 말을 끊었다.

“다음에 또 밖에서 만나게 되면 더 얘기해 드릴게요. 궁금하시죠?”

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장난하나…… 그는 보조개가 잡힌 얼굴로 콜라 잔을 부딪쳐 왔다. 아무래도 파혼의 이유는 그 사진이 아니라 이런 어이없는 성격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허망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고 접시를 비웠다.

이른 시각에 만났던 만큼 7시도 안 되어 테이블이 정리되었다.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나는 조민우 부기장의 차를 타고 왔던 만큼 집까지 함께 이동하게 되었다. 직장 동료인 게 이럴 때는 좋았다. 억지로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아도 업계 관련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금방 시간이 간다. 또래 친구 삼으려 했던 나의 계획은 절반쯤 성공한 셈이다.

“담배 한 대 하고 갈까요?”

그가 빌라 앞에 차를 세우고 나를 쳐다보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해는 이미 지고 없는데 하늘 위로 붉게 흔적만이 남았다. 동네 꼬마들이 뛰어다니며 소리를 냈다. 라이터가 없어지는 바람에 그의 손을 빌려 담뱃불을 붙였다.

“저도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그가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곧바로 질문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연애하신 게 언제예요?”

게다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그렇게 막 던지고 있었다. 나는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연애의 기준이 뭘까. 육체적인 관계를 말하는 거라면 2년 전쯤인가. 감정의 교류를 말하는 거라면, 내가 과연 연애를 한 적이 있었을까. 한 번 더 담배를 빨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2년 전쯤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게 사귀셨나 보네요.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면.”

“네. 그래서 반성합니다.”

서로에게 독점적인 관계는 맞았지만, 여자 친구라고 부르기도 애매할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녀와의 섹스에는 큰 흥미가 없었고 관계는 곧 정리되었다.

그 후로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성욕에 괴로워하거나 외로움을 느끼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별다른 저항 없이 2년이 흘렀을 것이다. 한재이가 결혼할 줄 알았다면 더 노력했어야 옳았다. 나도 결혼까진 아니더라도,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좀 더 가볍게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었을 텐데. 후회는 매 순간 내가 하고 있었다.

“라이터 가지세요. 저는 집에 가면 많으니까.”

“감사합니다.”

“피곤하실 테니 가 볼게요. 쉬세요.”

그는 미련 없이 담배를 끄고 작별을 고했다. 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계단을 올라왔다. 거실 문을 열었더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불청객 아닌 불청객이 와 있었던 모양이다.

“언제 왔어? 전화를 하지.”

“금방.”

한재이는 발코니 문을 닫으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

“많이 친한가 보네.”

발코니에서 우리가 담배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친해지면 좋겠지. 집도 가깝고 직장도 같은데. 둘 다 싱글에다 취미도 맞아 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한재이가 허탈한 듯 웃었다.

“그래. 듣고 보니 그러네.”

입 모양은 웃고 있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 역시 그랬다. 그를 봐서 반가운 마음과 괴로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한재이는 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문에 기대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계속 그를 외면했고 그의 시선은 나를 좇는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거실 테이블 정리 따위를 하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뭐 잘못한 거야?”

어질러진 책을 정리하던 나는 상체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쉽게 답을 찾지 못했나 보다. 그랬겠지. 그 답을 찾았다면 우리는 이미 끝난 관계였을 테니.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괴로움이 녹아 있었다. 다시 한번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얘기 좀 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쥔 채 등 뒤의 발코니 문을 열었다. 담배를 줄이는 건 당분간 어려워 보였다. 조민우 부기장이 주고 간 라이터가 요긴했다. 없었다면 이 어색한 상황에서 편의점을 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불을 붙일 때쯤 한재이가 발코니로 나와 문을 닫았다. 그를 향한 열렬함과 아픈 시선을 지웠다. 우정의 허물을 뒤집어쓴 친구가 이제 거짓말을 시작한다.

“우리 집에 그만 좀 와. 결혼할 사람 혼자 두고 뭐 하는 거야. 3주 동안 잘 놀았잖아, 나랑. 추억팔이도 많이 했고. 무슨 베첼러 파티를 한 달씩이나 해. 그만 좀 가. 너 좀 귀찮다, 나는.”

나는 대충 아무 말이나 둘러대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 사는 나라도 다른데 나도 여기 친구 좀 만들어 놓자. 아님 네 말대로 연애라도 할게. 너는 결혼하고 인생에 변환점 주고 있는데, 나는 그대로인 거 같아서 마음 계속 심란해. 자극받았다고. 무슨 말인지 알지?”

귀찮다거나 하는 말은 처음 들었을지도 모른다. 한재이는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관객의 마음을 동하게 하지 못한 연극은 막을 내려야 하는데, 어리석은 미련이 입속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그리고 너 진짜 그러다 회사 잘린다? 아무리 변호사라도 직장은 직장이잖아. 대충하고 빨리 독일 들어…….”

“돌아가는 비행기, 이틀 후야.”

그가 나의 말을 끊어 내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틀 후 나는 비행이 있다. 우리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내일 하루 정도라는 이야기였다.

“결혼할 사람 혼자 두고 왜 자꾸 찾아오냐고 하니까 민망하네. 나한테 너는 그런 거 따질 필요 없는 사람이라서 전혀 그런 생각은 못 했어. 며칠 네 표정이 계속 좋지 않은 거 같아서, 마음에 걸려서 그랬어. 미안해.”

나는 열상을 입은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나한테 너도,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없는 사람인 건 맞아. 거기다 미안하다는 말까지 듣고 나니 더는 못 할 짓이 되어 버렸다. 서둘러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내 표정이 왜. 자꾸 오버 하지 마. 나 비행 있어서 너 가는 거 못 보겠다. 그럼 이제 결혼식 당일에 보겠네. 괜찮으면 내일 저녁이라도 같이해, 셋이서.”

“불편하면 안 봐도 돼. 무리하지 마.”

“내가 왜 불편해. 그런 거 없어. 7시쯤 내가 호텔로 갈게.”

한재이는 아까부터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애달프게 느껴졌다 한다면, 그건 나 스스로를 너무 동정하는 것일까.

피우지 못한 담배가 재가 되어 떨어졌다. 손으로 털어 불을 끄고 꽁초가 쌓인 우유 팩에 던졌다. 채 꺼지지 못한 담뱃불이 깜빡이며 마지막 연기를 밀어 올린다. 나는 피에로처럼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고 한재이의 어깨를 툭 쳤다.

“들어가자.”

발코니 문을 열고 거실에 먼저 발을 디뎠다. 뒤따라 들어오는 그에게서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혼자 부엌으로 이동해 물을 한 컵 마셨다. 그에게도 권했으나 필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에 손을 얹고 아일랜드 식탁 너머로 한재이를 쳐다본다. 자, 이제 뭘 할까. 가라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선택권을 넘겨야 했다.

그는 말없이 현관으로 이동했다. 가는구나. 그를 배웅해 주기 위해 나는 처량하게 뒤를 따랐다. 신발을 신는 한재이에게 운전 조심하라는 말 따위를 건넸다. 옅은 미소와 함께 쉬라는 말, 내일 보자는 말이 돌아왔다.

“서진아.”

한재이가 갑작스럽게 몸을 돌려 나를 불렀다.

“내 결혼이, 너한테 그렇게 큰 의미였어?”

“뭐?”

예상하지 못했던 물음에 멍청하게 그를 향해 서서 시선을 흔들어 댔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제는 한재이의 표정이 읽히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라는 전제가 생략된 질문임을 알았다. 내 연기가 참으로 미숙했었나 보다.

순간 미친 척하고 모든 걸 고백해 볼까 생각이 든 건 단순히 내가 좀 지쳐서였다. 지난 몇 주간 이렇게 저렇게 아닌 척 둘러대는 것이 힘들었으니까. 그러다 그냥 다시 의미 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너한테 큰 의미니까 나한테도 의미 있지. 당연한 걸 물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현관문을 열고 문을 잡아 주었다.

“그런 뜻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아무튼 쉬어.”

더 물을 필요는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한재이는 계단을 내려갔다. 문을 닫고 몸을 돌리는데 현관과 이어지는 거실 벽 한구석에 팬 우묵한 홈이 눈에 들어왔다. 반대쪽에 진열장을 넣기 위해 이쪽만 목재를 쓴 것 같았다.

늦게 온 사랑이 정말 격렬하긴 했었나 보다. 이 집에 들어온 둘 중 한 명은 그 격렬함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나는 겁도 없이 나무 위를 올라가고 있었다. 손바닥에 까슬한 나무껍질 부스러기가 묻어났다. 다 자라지 못한 다리를 힘껏 뻗어 나뭇가지 위에 단단히 고정했다. 이제 되었다 싶었을 때 잡은 가지가 부러졌다. 아무렇게나 뻗은 팔은 그그그극, 소리를 내며 나무줄기를 긁었다. 안간힘을 써서 나무에 매달렸다. 크리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맥시, 움직이지 마!’

울음이 터지며 나는 밑으로 떨어졌다. 새파란 하늘을 뒤덮은 형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더니 금세 암전되었다. 20년 전에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었고, 오늘은 꿈에서 깨어났다.

긴 숨을 들이마시며 현실을 자각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벽 4시. 문득 크리스가 보고 싶었다.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보낼까 했지만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는 나의 가족인데, 눈치 볼 것도 없지 않나.

-헤이. 웬일이야.

그는 운전 중인 듯했다.

“퇴근해?”

-그래. 또 시차가 뒤죽박죽되어 버린 거야?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지. 퇴근이 늦지 않아?”

-오늘만 좀 그래. 안 그래도 너한테 전화 한번 하려 했었어.

“그러니까. 우리 통화 안 한 지 꽤 되었잖아.”

-너 괜찮아?

“뭐가.”

-별일 없냐고. 재이는 아직 거기 있어?

크리스의 사무실에서 집으로 가는 아우토반의 풍경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라인네카어 지역을 지나 하일브론으로 빠지는 4차선 도로에 진입하면, 그는 항상 시속 180킬로까지 속도를 내곤 했다. 그러고는 추월 차로에서 제 속도를 내지 않는 차들을 발견하면 네덜란드 놈이 틀림없다며 흉을 본다. 번호판에 ‘NL’이라고 쓰여 있기라도 한다면 역시 제 말이 맞았다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맥시, 왜 말이 없어.

“과속하지 마.”

-또 딴소리한다. 재이 아직 거기 있냐고. 그 자식 왜 안 가고 거기 있는 거야.

“간대. 이번 주 금요일.”

-그래? 넌 괜찮고?

“그래, 난 괜찮아. 곧 다음 달 스케줄 나오는데 보내 줄게. 그때 봐.”

-잊지 말고 보내. 참, 실비아가 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래.

“토마토 크림 수프.”

-그래, 그건 너 좋아하니까 어차피 해 주려고 했어. 다른 거 생각나면 말해.

“알았어. 운전 조심해.”

-바이.

크리스와의 전화를 끊고 나니 잠이 달아나 버렸다. 운동을 갈까 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 차가 있었다. 상하이 비행 때 마크해 둔 바다 위치를 검색해 보았다. 여기서 1시간 정도의 거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컴컴한 골목길로 나왔다.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낯선 자동차에 몸을 구겨 넣었다. 내부 등이 켜지며 골목길이 조금 환해졌다. 나는 야반도주를 하듯 소리 없이 차를 몰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도로는 조용했다. 가끔 택시들이 옆을 지나다녔다.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는 5시가 다 되어 갔다.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싶었던 나는 과속하지 말라던 스스로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속도를 냈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 작은 해변을 발견했다. 조용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차를 세워 둘 곳이 없어 문이 닫힌 횟집 주차장에 도둑 주차를 하게 되었다. 미안하다는 메시지와 전화번호를 남겨 둔 채 차에서 내렸다.

바닷바람이 조금씩 불어왔다. 대충 시멘트를 발라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모래사장으로 걸었다. 백사도 아니었고 군데군데 먹다 버린 쓰레기가 눈에 띄는 해변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손으로 바람막을 만들어 불을 붙이고 고개를 들었다. 해는 이미 뜨고 있었다.

겹치는 영상이 없어서인지 한재이와의 추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다녔던 바다는 이렇게 외롭고 서늘하지 않았기에, 나는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담뱃불이 빠르게 타들어 갔다.

나라는 인간에 대해 돌이켜 보면, 한마디로 말해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인간’이라 볼 수 있겠다. 속으로는 이렇게 해 볼까, 저렇게 해 볼까 갖은 수를 생각했으면서 결국에 하는 것 따위가 혼자 바다 구경이라니.

한번은 크리스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독일로 입양된 것은 정말 행운이라며, 만약 다른 나라에서 적응해야 했다면 두 배는 힘들었을 거라고.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독일 사람들은 고지식하고 매뉴얼을 좋아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하게 매듭을 지어야 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 모든 성정과 잘 어울렸지만, 특히 더 잘 맞았던 것은 사색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 가면 괴테와 헤겔이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나는 그 길을 꽤나 좋아해서 몇 번이나 올라갔었는데, 과연 사색에 잠기기 딱 좋은 곳이었다. 평평한 돌 위에 앉아 네카어강 건너편을 보면 반쯤 부서진 성이 보인다. 일부러 복원하지 않은 모습이 더 마음이 들었었다. 그 목가적인 마을에서 괴테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연인과 불륜을 저질렀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스워 담배를 끄고 발길을 돌렸다. 나는 차를 주차해 놓은 횟집으로 향했다. 마침 셔터를 올리며 영업을 시작하려는 주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먼저 사죄를 하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잠깐 바다 구경을 하던 중이었는데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고. 그는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무뚝뚝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해 주었다.

“뭐, 땅이 닳는 것도 아닌데.”

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녹이 슨 수조 물을 갈고 산소 공급기를 가동했다. 그러고는 가게 안에서 빨간 플라스틱 통을 가지고 나와 안에 담겨 있던 생선들을 수조 안에 넣었다. 몇 놈들은 힘없이 바닥으로 잠수한 뒤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아침 식사 됩니까?”

미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주인 남자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들어오라며 문을 열어 주었다. 홀에서는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났다.

“뭐로 자시려고? 매운탕?”

사실 이틀 연속 생선을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찌개 같은 것이라면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신발을 벗었다. 장판이 깔린 마룻바닥 위로 올라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혼자 하는 가게인지 주인 남자는 부지런히 안팎을 왔다 갔다 한다.

10분쯤 기다리니 야외용 버너 하나와 작은 냄비가 상 위에 올랐다. 제법 살이 붙은 생선들이 많이 보였다. 찬거리로 나온 감자조림을 먹으며 찌개가 끓기를 기다렸다.

“우일이 아빠, 도미 이거 죽었는데? 어머야, 손님 계셨네.”

지방 사투리가 섞인 말투의 삼십 대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인인 듯했다. 그녀의 뒤로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도 들어왔다.

“계란 후라이라도 하나 해 드릴까예?”

그녀가 상차림을 보고 민망한 듯 내게 물었다. 나는 웃으며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주방으로 사라지고 꼬마 아이가 테이블 옆에 다가와 앉았다. 공룡 피규어를 가지고 혼자 놀더니, 엄마가 들고 온 접시를 보며 ‘나도 햄’ 하며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반숙으로 구워진 달걀 하나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분홍색 햄 반찬이 내 앞에 놓였다. 아직도 이걸 파는구나. 보육원에 있을 때 일주일에 한 번쯤 먹을 수 있었던 그 가짜 햄이었다. 한참 끓어오르던 찌개 불을 낮추고 빈 접시에 조금 덜어 두었다.

“우일이도 아침 먹을래? 일로 와.”

그녀는 건너편 테이블로 아이를 불렀다.

“여기서 같이 먹으라고 하세요. 치우시기 힘드실 텐데.”

나는 꼬마 아이 앞에 햄 접시를 밀어 주었다.

“젓가락질할 줄 알아?”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똥글똥글한 눈을 하고 쳐다보더니 쥐여 준 스테인리스 젓가락으로 햄을 콕콕 찍어 입에 넣었다. 엄마는 밥이 반쯤 담긴 그릇 하나를 가져와 아이 앞에 놓아 주었다.

“잘생긴 형아하고 밥 먹고 있어. 엄마 요 앞에 잠깐 장 좀 봐 올게. 필요한 거 있으시면 애기 아빠 부르세요. 잠깐 갔다 올게요.”

아이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손님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다섯 살 난 꼬마를 맡겨 둔 채 시장을 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인상이 좋은 탓이라고 자화자찬을 해 본다. 주인 남자는 어디로 가 버렸는지 홀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이런 경험이 전무한 탓에 아이에게 뭘 주면 안 되는지를 몰라 어물쩍거리고 있었다. 공룡 피규어를 든 채 ‘김치이…….’ 하기에 내가 손도 대지 않았던 김치 접시를 콩나물 접시와 바꿔 주었다. 다행히 아이는 혼자서도 밥을 잘 먹었다.

둘이서 그렇게 아침을 해결했다. 상대는 꼬마 친구였지만 누가 같이 먹어 주었다는 게 즐거웠다. 찌개가 많이 남았으나 배가 불렀다.

아이는 레더호젠이 변형된 듯한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 부근에 커다란 호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나는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이거 주머니에 넣을래?”

“네에.”

아이는 돈을 받아 제 주머니에 넣으려 애썼다. 접을 줄을 몰라 구겨져 버린 오만 원짜리가 계속해서 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왔다. 나는 가능한 아이를 만지지 않으려 조심조심 다시 지폐를 받아 들고 4등분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공룡 피규어 사.”

알아들은 건지 만 건지 아이는 다시 혼자 놀이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주인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나란히 앉아 있는 나와 제 아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려 하기에, 재빨리 그를 불러 계산을 부탁했다. 그의 아들에게 준 돈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해가 완전히 떠 아침이 밝아 있었다.

주차된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49로 시작하는 독일 번호. 짐작 가는 데가 없었던 탓에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슈미츠입니다.”

-나야, 맥시.

뜻밖의 목소리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기젤라가 내게 전화를 했다. 내 번호를 알아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용건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고 있었던 건 아니야?

“아니야, 밖이야. 어쩐 일이야.”

-할 얘기가 있어. 너하고 단둘이. 어차피 우리 저녁 약속 있잖아. 그 전에 잠깐 따로 볼 수 있어?

“오늘?”

-그래, 오늘. 오늘이 아니면 시간이 없어.

나는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고자 머리를 굴렸지만 알 길이 없었다. 나를 따로 보자고 하는 한재이의 약혼녀가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 역시 알 길이 없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머릿속에서 거절의 방법을 찾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알았어. 호텔로 한 시간 일찍 가면 되겠어?”

-그래. 한 시간이면 될 것 같아. 재이한테는 비밀로 해.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

그녀는 수화기 너머로 작게 웃었다. 그리고 내가 절대 웃을 수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뭐 대신 고백이라도 해 주길 원하는 거야? 맥시, 날 바보로 생각하지 마.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기젤라 베버의 말을 곱씹었다. 조금 전 전화로 들은 말과 무려 11년 전 들었던 말을.

‘맥시, 너 혹시 게이야?’

학교 다닐 때 내가 그녀와 몇 번이나 제대로 된 대화를 했었을까. 한재이와 만난 적이 있는 사이라는 걸 몰랐었던 그때의 나는 저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나 자신보다 먼저 내 감정을 알아차린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도로에는 차들이 빠른 속도로 불어나 있었다. 갈 때는 1시간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두 배가 걸렸다. 나는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 욕실로 향했다. 몸이 떨렸기 때문에 뜨거운 물로 진정시키고 싶었다.

어깨에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10여 분을 서 있었다. 그렇게 뜨겁게 고민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샤워를 끝내고 7시간이 지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눈에 띄지 않는 디자인의 셔츠와 검은색 데님을 입고 집을 나섰다.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녀를 맞닥뜨리기 전 내가 내린 결론은, ‘무조건적인 부정’이었다.

“왔어? 앉아. 미안해, 갑자기 보자고 해서.”

우리는 가벼운 포옹을 나누고 호텔 카페 구석진 테이블에 몸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머리를 완전히 틀어 올려 길게 포니테일을 내렸다. 새빨간 립스틱과 커다란 귀걸이가 시선을 앗아 갔지만, 어딘가 조금 지쳐 보였다.

“왜 보자고 한지는 짐작이 갔어?”

“글쎄, 조금은.”

“말해 봐.”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뭘?”

“재이와 나를.”

곧바로 터진 그녀의 웃음소리는 청량하고 맑았다. 거짓말이 힘을 잃는 순간이었다.

“맥시. 내가 한국에 왜 왔다고 생각해?”

그녀 스스로 밝혔던 이유는 핑계였나 보다. 도망간 약혼자를 잡으러 왔다거나 하는 텔레노벨라식의 전개는 곤란하다. 한재이의 무죄를 내가 입증해 줘야 하는 억울한 상황에 놓였다.

“재이가 내 핑계 대고 한국 온 건 아는데 그게 다는 아니야. 집안 문제로 해결할 일도 있었고…….”

“무슨 집안 문제?”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급히 말을 닫았다. 한재이가 말해 주지 않은 사생활을 내가 멋대로 털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직접 들으라는 말을 하자 그녀가 다시 웃었다. 너희는 정말 사람을 질리게 해.

“설마했어. 결혼을 코앞에 두고 그럴 줄 몰랐거든. 불안해서 나 퇴근할 때마다 전화해서 확인도 하고, 근데 어느 순간부터는 전화를 안 받아. 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어. 나 바보 같지?”

한재이가 전화를 꺼 둔 이유에는 내 책임도 있었다. 고해성사를 해야 하나. 나는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오해야. 내가 부탁했어. 나는 잠을 제대로 자 두는 게 중요해서. 재이 책임이 아니야.”

“괜찮아, 딱히 원망하는 건 아니야. 매일 새벽 3시에 전화를 받으라는 건 내가 생각해도 심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이는 화를 낸 적이 없어. 알잖아, 그는 그런 사람이야.”

그녀는 주문해 둔 홍차를 우려내며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복잡해 보였다.

기젤라는 내게 한재이를 처음 본 날에 관해 이야기했다. 모델 일로 방과 후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그녀가 하루는 우연히 친구들과 늦게까지 학교에 남았다. 그날 농구를 하던 한재이를 보았고,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고 했다.

잘나가던 아이들이 한 번씩 돌아가며 사귀는 연애였을 거라 치부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꽤 진지하게 좋아하는 마음에도 자존심에 그를 먼저 당기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잠깐 만났던 사이를 핑계로 매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연락을 할 수 있었다고.

그녀는 홍차를 한 모금 맛보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잔에 붉은 립스틱 자국이 옅게 묻었다. 생소한 이야기들이다.

“몰랐어, 그렇게 오래된 감정인 줄은.”

“하하. 오해는 마. 나도 그동안 남자는 많이 만났었어. 목매다는 성격은 아니라서 내내 그를 기다렸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어. 잘나가는 남자는 친구로라도 계속 옆에 두고 싶은 게 사실이니까. 나한테 별 관심 없는 남자라서 더 끌리기도 했고. 그러다 1년 전쯤인가, 둘이서 술을 마신 날 내가 용기를 냈어. 그가 외로워하는 게 눈에 보였거든.”

“그때부터 다시 만난 거야?”

“그래. 그런데 그게 내 실수였어. 만나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더 좋아지더라고. 옆에 평생 두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도 순식간이었어. 너도 알잖아. 그는 다정해.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해 주거든.”

“그래도 결국 프러포즈를 받았잖아. 재이 마음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하하하. 누가 그래? 내가 프러포즈 받았다고. 재이가 그랬어?”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젤라는 왼손을 펼쳐 내게 보여 주었다. 그러고 보니 반지가 없었다.

“내 자존심 지켜 주려고 그랬나 본데, 당연히 결혼은 내가 하자고 했어. 그날 그의 대답이 정말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확실히 나에게는 그렇게 말했었다.

“뭐, 난 그 정도라도 괜찮았어. 결혼이라는 걸 무슨 세기의 사랑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무엇보다 부모님들이 무척 좋아하셨고. 누가 더 좋아하는 걸 따지는 시대도 아니고 말이야. 기회가 있을 때 가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나는 제주도에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망설이던 한재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 와 진실을 알았다고 한들 그 무게가 무거워 기뻐할 수조차 없다.

그녀는 작정이라도 하고 온 듯 많은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허리를 뒤로 제치고 물었다.

“이런 얘기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야?”

기젤라도 의자에 기대어 고개를 젖혔다. 그런 다음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허공에서 시선을 교차하며 서로의 표정을 읽었다. 그녀는 내게 바라는 것이 있어 보였다.

“맥시. 나는 그날 농구를 같이 하던 너를 기억해. 재이를 좇는 너의 시선은 특별했거든. 언젠가 내가 너의 성 정체성에 관해 물었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아. 너는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재이를 좋아하고 있잖아, 친구 이상으로.”

나는 침묵을 택했다.

“사실 너희가 좀 유별난 사이라는 건 알았지만, 난 그게 줄곧 너 혼자만의 감정이라고 생각했어.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재이와 따로 만났었으니까 그가 너를 보는 시선은 볼 기회가 없었거든. 내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해? 한국으로 와서 직접 확인해야 했다고.”

“그래.”

“확인해 보니 역시 그랬어. 내가 와 있는데도 줄곧 너만 걱정하는 그를 보면서 나 정말 당황했어. 셋이서 밥을 먹을 때도 너만 신경 쓰더라고. 물론 내게도 변함없이 다정했지만, 뭐랄까…… 그에게는 우선순위가 있는 것 같았어. 네가 나타나면 나는 뒤로 밀리는 거지. 그때 내 미래가 그려졌어.”

그녀는 숨을 한번 가다듬었다.

“평생 남편의 친구를 질투하며 살고 싶지는 않아.”

왜 나는 그 순간 기젤라 베버에게 동지애를 느꼈을까.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주고 싶었다.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이 지저분한 관계에서 누군가 퇴장해야 한다면 그건 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내가 계속해서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동안 그녀는 준비해 둔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재이가 너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 나는 몰라. 너도 모르니까 이러고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우리 이제 이런 촌극은 그만두자. 나는 이런 상태로 결혼할 수 없어.”

“진심이야?”

“그래, 진심이야.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마. 너무 많이 고민해서 이제는 눈물도 안 나.”

지쳐 보이는 얼굴이 확실하게 눈에 띄었다. 그녀는 붉게 칠한 입술을 깨물고 조금은 자조 섞인 말투를 이어 갔다.

“자존심 때문인 것 같아. 내가 더 좋아하는 건 괜찮지만 다른 사람을 품고 있다면 그건 얘기가 다르잖아. 그래서 나는 그에게 선택지를 주려고 해.”

홍차는 이제 김이 식었다. 뜨겁지 않아 꽤 많은 양을 마신 그녀는 비밀 계획을 말해 주는 양,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의 마음이 어느 쪽에 기울어 있는지 스스로 깨달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 결혼 내가 한번 물러 주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이혼보다는 파혼이 낫잖아, 안 그래?”

말도 안 된다. 나는 이제 그만 그녀의 어리석은 망상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젤라, 너는 전부 오해하고 있어. 나는 재이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건 재이도 마찬가지야. 그가 나를 걱정하는 건 일종의 버릇이야. 우린 예전부터 그랬어.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 아무튼 네가 오해하는 것도 난 다 이해하는데. 제발 말도 안 되는 상상하지 마. 결혼을 앞두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고 들었어. 아마 너도 그런 종류일 거야.”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녀의 홍차는 이제 동이 났다. 기다란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나의 반응을 살피던 기젤라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1년 전에 말이야. 재이랑 무슨 일 있었어?”

“1년 전?”

“그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틈도 보여 주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외롭다고 한 건 너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둘이 싸우거나 그랬던 건 아니었어?”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1년 전, 한재이는 대형 로펌에 들어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기장 승급이 되고 1년 차가 된 탓에 비행이 몰리기 시작했다. 스물아홉. 우리는 각자의 커리어를 짊어진 채 자연스레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인생에 어떠한 계기가 있어야만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가 지나고 나서야 그 균열을 깨닫는 일들이 허다하다. 한재이와 나 사이의 그 작은 균열을 뚫고 기젤라가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각자의 연애 사정에 무지했고 균열이 파열이 되어 돌아오자 나만 내 감정을 깨달을 수 있었을 뿐.

그러므로 나는 내가 둘 사이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젤라는 나름대로 한재이 인생의 한 파트를 당당하게 거머쥐었다. 그녀는 그것을 우연이라 깎아내리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걸 운명이라고도 부른다.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기젤라. 아무리 재이라도 결혼을 그런 식으로 생각 없이 결정하진 않아. 너희 사이를 아무것도 아닌 거로 치부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둘이 얘기를 좀 하는 건 어때. 네가 느끼는 그런 감정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실마리가 풀릴지도 모르잖아.”

“그래, 좋은 생각이야. 당연히 나도 그러려고 해. 근데 그 이야기를 꺼내려면 네 얘기를 해야 해, 맥시.”

내 얘기를 해야 한다니.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물론 네 감정을 내가 멋대로 주장하진 않을 거야. 재이에게는 내 입장에서 내가 느끼는 그대로만 말할 거야. 너와 맥시의 과한 우정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맥시에게 향하는 네 관심은 도를 넘어 질투를 느끼게 한다, 정도? 내가 약혼녀로서 그 정도는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근데 그럼 나만 너무 유리하잖아.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가산점을 얻고 싶지는 않아.”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내 쪽으로 몸을 당겼다. 양팔을 테이블 위에 얹고 나를 쳐다본다.

“우리 페어플레이 해, 맥시. 오늘 자리 비켜 줄 테니까 고백해 보는 건 어때? 그래서 재이가 너를 향한 결론이 뭐가 되었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혼을 진행하겠다고 한다면 나 진짜 행복하게 그와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뭐, 나도 미련 없이 그와 헤어져야 하지 않겠어? 오늘 너를 보자고 한 진짜 이유는 이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이미 정했어. 선택은 네 자유야.”

그녀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시간 다 됐어. 그가 돌아올 시간이야. 내가 뭘 부탁해서 사러 나갔거든. 난 오늘 두통이 심할 예정이니까 셋이 보기로 한 건 취소하고 둘이서 시간 보내.”

자리에서 일어난 기젤라는 내 어깨를 가볍게 쥐고 말했다.

“마지막 기회야, 맥시. 나중에 후회하지 마.”

그러고는 그대로 테이블을 떠났다.

기젤라와 헤어진 뒤 나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진실과 감정을 떠안은 바람에 두통은 내가 다 올 지경이었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아까부터 멍하니 호텔 입구로 들어오는 차량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필터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고백을 하라니, 이렇게 갑자기 어떻게.

시계를 보니 약속된 7시가 지났다. 아직 반쯤 남은 담배가 아쉬워 휴대폰을 꺼냈다. 최근 통화 목록을 열어 늦어진다는 전화를 하려는데 익숙한 향수 냄새가 뒤에서 맡아졌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한재이가 내 등을 가볍게 치며 웃고 있었다. 정확하게 선이 잡힌 슬랙스 하의에 청색 스트라이프 셔츠가 눈에 들어온다. 소매를 걷어 올린 부위로 드러난 적당히 태닝 된 팔이 그대로 내 어깨를 잡았다.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는데 그의 등장이 너무 이르다.

“미안, 기젤라는 못 올 것 같아. 갑자기 몸이 안 좋다고 하는데 잠깐 나가서 인사만 하라는 데도 싫대. 너한테는 따로 연락했다는데, 받았어?”

“응. 아까 전화 왔었어.”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의 말을 넘기고 담배를 비벼 껐다.

“우리끼리니까 한식 먹어도 돼.”

한재이의 취향을 존중해서 그렇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조건을 달았다.

“근데 좀 조용한 곳이면 좋겠다.”

1시간 후의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지만, 환경은 만들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호텔에 딸린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테이블이 없을 것 같았는데 한재이가 묵고 있는 룸 번호를 말해 주니 금방 개인실을 배정받았다. 마룻바닥이 아닌 테이블 좌석이라 편했다. 나는 의자를 멀찌감치 그에게서 떨어트려 앉았다. 한재이는 조금 더워 보였다.

“알아서 시킬게.”

“응.”

그는 주문을 받으러 온 매니저와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적당한 한식 코스를 골랐다. 분위기로 보아 오늘 방문이 처음은 아닌 듯했다. 나를 상대하지 않는 한재이를 보며 조금의 시간을 벌 수 있었기에 다시 기젤라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그녀가 느낀 것은 질투와 자존심의 상처라고 했다. 나는 연민을 느꼈지만, 책임감은 느끼지 못했다. 그 두 가지 모두 나의 어떤 행동이나 처신에서 나온 결과는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 사내의 모호한 행동들 때문이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을 곁에 있었는데 최근 한재이에 대해 자신이 없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잠은 자는 걸까? 일은 하고 있는 걸까? 혹시 내가 아는 한재이는 이미 증발해 없어진 지 오래고 여기 있는 그는 누군가 가져다 놓은 복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마음을 읽기 힘들 리가 없지 않나.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주문이 끝나고 매니저는 방을 나갔다. 한재이는 의자의 위치를 다시 잡고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네가 안드로이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뭐?”

“요즘 너는 뭐랄까, 속마음을 읽기가 힘들어서.”

그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사실 나도 농담처럼 던진 말이긴 했지만, 정말 영화처럼 이 말이 암호가 되어 그의 머릿속에 접속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마 나는 ‘우서진’이라는 이름을 검색하고 기다릴 것이다. 15년 치 데이터는 용량 초과가 되어 처리가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하나쯤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관계의 정의.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가끔은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인지 통 알 수 없을 때가 많아.”

서빙을 하시는 분이 문을 열고 들어와 밑반찬들을 테이블에 깔기 시작했다. 그분이 다시 문을 닫고 나가자 반찬들은 한재이에 의해 새로 배치되기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먹지 않는 음식들. 차례로 분류되고 위치가 바뀌었다. 마침내 새로 배열된 테이블을 보며 그가 뿌듯하게 웃었다. ‘먹어.’ 우리는 젓가락을 쥐고 식사를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그런 느낌 들 때는 언제였어?”

“뭐가?”

“가끔 너도 네가 무슨 생각인지 통 알 수 없다며.”

“아, 사소하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예를 들면 방금 내가 왜 이렇게 주문을 너무 많이 해 버렸을까 하는 거? 바로 후회되더라고. 나 좀 많이 시켰어. 너 오늘 많이 먹어야 해.”

“응. 그리고 또?”

“크게는 나 한국 와 버린 거? 이건 후회라기보다 뒷감당이 좀 힘들어져서 내가 왜 그랬을까 곱씹어 봤던 것 같다.”

“왜 그랬던 거 같은데?”

“네가 연락이 안 되었잖아. 어느 날 SNS에 ‘이직합니다. 한국 갑니다.’라는 포스트 한 줄.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씹히고. 크리스한테 연락하니 너 이미 한국으로 이사 갔다 그러지. 난 무슨 사고 난 줄 알고 진짜 놀랬었거든. 일단 너 괜찮은지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싶어서 다짜고짜 찾아왔는데 일이 점점 꼬였어. 나 원래 너 있는 곳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그랬잖아. 근데 너무 먼 장소는 안 되는 거였나 봐. 진짜 내가 오버 한 건가, 뭐 그런 생각 들었어.”

“나 때문에 여기저기 욕먹고 다니는 거야? 미안하네.”

“욕은 정작 너한테 먹었지. 귀찮게 쫓아다닌 놈 취급당하고. 어제 네 말 듣고 느끼는 게 많았어.”

한재이는 거기까지 말하고 음식을 씹었다. 그사이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옥수수 맛이 느껴지는 찻물이었다. 많이 먹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뒤로하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어느 정도 그의 속마음을 끌어내기 시작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더 듣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치자 한재이는 천천히 음식물을 넘기고 냅킨으로 입을 한번 닦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진짜 오래가는 건 우정이라고. 난 너랑은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거든. 너는 내 가족이나 다름없으니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우선순위가 바뀌거나 그런 일은 없어. 그런데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나 보지. 네가 나한테서 체면을 차리기 시작하니까 나만 민망해졌어. 아, 우리도 이렇게 각자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구나. 나한테서 정 떼는 거 같아서 진짜 슬펐어. 왜 안 먹어. 이거 네가 다 먹어야 해.”

그의 채근에 못 이겨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밥이 넘어 갈 리 없다. 그래도 요리는 계속해서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마지막으로 신선로가 테이블 중앙에 놓이고 서빙을 하시던 분은 방을 나갔다. 진짜 주문을 많이 하긴 했구나.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접시들이 그득했다.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요리들을 한쪽으로 밀어 넣고 있다.

“너만 뒤처지는 거 같다고 그랬잖아. 그 말 일리 있어. 나도 느낀 적 있었거든. 너 캡틴 승급 시험 준비할 때 진짜 바빴잖아. 집에 찾아가도 반응 없고 놀러 가자고 해도 시큰둥이고. 그래서 나도 회사 옮기고 좀 바쁘게 살아봤었어.”

“맞아, 우리 그때쯤부터 연락 뜸해졌지.”

“왜 그런지 알아?”

“바빴다며.”

“그래, 너 말고 내가 바빠지니까 연락이 뜸해진 거지. 너는 좀처럼 먼저 연락을 안 하니까. 항상 내가 연락하고 내가 찾아갔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먼저 연락한 적도 많아.”

“뭐…… 1년에 한두 번? 15년간 한 번도 네가 뭘 먼저 하자고 한 적이 없어. 안 그래?”

그런 것도 몰랐냐는 듯 한재이는 나를 한번 쳐다본 뒤 수저를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간의 데이터들을 꺼내 놓았다. 그와 함께했던 여행과 추억들이 셀 수 없이 쏟아진다. 하나하나 들춰 보고 분류해 본다. 그 모든 것이 정말 한재이에게서 비롯되었나. 그래도 내가 먼저 제안한 것이 하나쯤은 있지 않았을까. 분명 한 번은 있었겠지, 다만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들이.

“그래서 억울해?”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그를 취조했다.

“아니, 그렇진 않아. 각자의 역할이 있는 거잖아. 미친 짓은 항상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너는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는 역할을 맡았으니 그렇게 굳어진 거지. 그래서 나는 너랑 있는 게 좋아. 한국 오기 전에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너희 집에서 지내니까 다시 심신의 안정을 찾았어.”

“스트레스는 왜 받았는데.”

“나도 그 원인을 모르겠어. 원인도 모르는 채 해결 방법만 알고 있었다고 해 두자. 예전부터 그랬어. 아, 기분이 별로다 그럼 다짜고짜 너한테 찾아가는 거야. 일종의 마약 같은 건가? 근데 너 왜 이렇게 안 먹는 건데, 진짜.”

내가 슬쩍 밀어 놓은 음식들을 눈치챈 한재이가 접시들을 재배치했다. 그는 말을 멈추고 내가 먹을 때까지 두고 보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나를 감시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졌다.

나는 도토리묵이 담긴 접시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묵을 집으려고 했는데 젓가락질이 서툴러 온통 짓이겨 버리고 말았다. 그가 숟가락을 건넸다. 나는 은근 오기가 생겨 숟가락은 다시 내려놓고 계속해서 묵사발을 만들고 있었다.

“쓸데없는 데 고집 피우지 말고 편한 방법을 택하라니까. 너는 성격이 진짜 왜 그 모양이야.”

그를 무시하고 젓가락으로 조각난 묵을 조금 맛보았다. 다른 접시로 옮겨 가며 성실하게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물론 밥공기의 밥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지금 밥맛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기젤라 손에 반지 없던데.”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 보기로 했다. 프러포즈를 정식으로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반지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르는 그가 어떤 변명을 할지 궁금해졌다.

“반지는, 음…… 결혼반지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해서.”

“너 그거 진짜 자격 없는 거 알지?”

“응. 미안하긴 한데 불만 없다고 해서. 그래서 좋아. 예전 여자 친구들이랑은 다르게 쿨하게 넘어가는 면이 많아서. 사소한 걸로 감정싸움을 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래서 결혼하…….”

“그래서 결혼하면 나쁘지 않겠다 생각이 든 거야?”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비꼬고 있었다. 한재이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틀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턱을 괴었다. 할 말이 있으면 더 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나도 내 몫의 말을 조금은 움직여야 했다.

“제주도에서 네가 한 말 기억해? 매 순간 후회하고 있다는 말.”

“응.”

“결혼하기로 한 거, 후회해?”

그는 잠시 침묵했다. 서로를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나도 그도 복잡한 계산이 시작되었다. 한재이는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광대뼈를 누르며 ‘글쎄.’라는 말을 먼저 내뱉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갔다.

“그런 질문은 아무리 너라도 대답 못 해 주겠는데.”

그는 순식간에 선을 그어 나를 밖으로 내몰았다. 하지도 않은 프러포즈를 했다고까지 했으니 약혼녀를 존중하는 그의 배려를 알 만했다. 그래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질문에 ‘아니’라고 쉽게 답했을 것이다.

“그래, 미안해.”

우리는 한동안 식사에 집중했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음식물 삼키는 소리, 조리 상태를 확인하러 들어온 매니저의 방문. 나는 열심히 음식물을 입에 넣었다. 이미 같은 요리를 씹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또 한 숟갈 구겨 넣었다. 그만큼 식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힐끔 쳐다보니 한재이는 어느새 제 몫을 다했다는 듯 수저를 놓고 물로 입을 헹구고 있었다.

“네 말을 듣고 나니 생각난 건데, 너도 나한테 털어놓기 힘든 게 있어?”

자업자득이었다. 나는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목소리 톤과 표정을 일치시키려고 애를 썼다. 최대한 깊게 생각하는 듯, 그렇게 깊게 생각했지만, 딱히 생각나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럴 게 뭐 있겠어.”

그러고는 한동안 별 값어치 없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부모님 이야기, 크리스 이야기. 심지어는 이번 주 슈피겔 특집 기사였던 지방 선거 결과 따위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음식을 먹었지만, 항복을 선언하고 수저를 내렸다.

“나 진짜 못 먹겠다, 이제. 네가 시킨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

“도기 백 해 달라 할까? 내일 비행 몇 시야? 아침 먹고 가면 좋잖아.”

“내가 아침으로 한식 먹고 갈 거 같아?”

“하긴. 그냥 남기자, 그럼.”

절반도 채 사라지지 않은 음식들이 식어 가고 있었다. 모든 책임은 한재이에게 있다.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마시며 시계를 보았다. 저녁 9시. 우리의 마지막 만찬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사랑과 우정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나는 소유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 왔다.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우정으로 평생 옆에 둘 수 있을 것이고, 소유욕이 끓기 시작하면 차라리 떠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소유욕에 괴로웠던 나는 이곳으로 도망 왔고 한재이는 계속 나를 옆에 두고자 쫓아왔다. 각자의 이유는 달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는 둘 다 이기적이다.

“서진아.”

“응.”

“너 할 말 있는 표정으로 10분째 쳐다보기만 하면 내가 답답할 거 같아, 아닐 거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답답했겠네. 그러는 동안 서서히 결론을 내려 가고 있었다.

“일어나자.”

그는 내게 담배를 피우러 갈 건지를 물었다. 아니, 피우지 않을 것이다. 술과 담배 없이 결정지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기젤라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마지막 기회야, 맥시. 나중에 후회하지 마.’

‘마지막 기회’라는 단어가 우스웠다. 한재이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기회인가? 내게 그런 것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자 애초에 내가 고백하지 않았던 이유가 명확해졌다. 그와의 우정을 지키는 것 외에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던 듯했다. 나는 아마도 자존심을 지키려 했었나 보다. 네가 나에 대한 감정이 혹시 우정 이상이라면, 너 역시 스스로 자각했으면 좋겠다는 구질구질한 자존심이다. 내 고백을 통해 그가 느낄 어쭙잖은 우정의 배려 따위는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운전 조심하고.”

“올라가.”

로비에서 짧은 헤어짐의 포옹을 했다. 어깨를 감싸 안고 작게 툭툭 쳐 내는 그의 방식. 영혼의 단짝 같았던 친구와의 마지막 포옹이 끝났다.

기젤라 베버는 진실을 원했다. 나는 자존심을 택했고, 이제는 한재이가 답할 차례였다.

* * *

한재이가 독일로 돌아가는 날, 나는 홍콩 비행에 하루 현지 체류가 걸렸다. 홍콩 국제공항에 떨어지는 시간은 오후 4시. 하루를 꼬박 쉬고 다음날 새벽 5시에 인천으로 돌아온다. 이런 스케줄은 야간 비행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한다.

같은 편조가 된 부기장은 굉장히 어려 보였다. 총 비행 시간을 물어볼 게 아니라 몇 번이나 조종석에 앉아 보았는지가 궁금할 정도였다. 그는 계속해서 마른침을 삼키며 체크리스트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러다간 날이 새도록 택싱조차 못 할 것 같았다.

“탑승객 121명 모두 탑승 완료하셨습니다.”

객실 사무장이 콕핏에 들어와 보고를 했다. 지상 점검 역시 이미 끝이 나 유압 장치 작동이 시작되었다. 부기장은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체크 리스트를 받아 들었다.

“같이 하시죠.”

“아, 죄송합니다.”

“APU 테스트.”

“APU 파이어 클리어.”

“랜딩 기어 체크.”

“랜딩 기어 다운 클리어.”

나는 확인 사항을 하나하나 불러 주고 그가 알기 쉽게 각각의 계기판을 손으로 가리켰다. 혼자 하는 것이 빠르지만 그의 배움의 기회를 뺏고 싶지 않았다. 조종사는 도제 교육이 중요하다. 좋은 기장을 많이 만난 부기장들은 빠르게 성장한다.

체크리스트가 끝이 났다. 그는 조금 안심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이제 엔진 스타트 클리어런스 요청 할까요?”

“네.”

-Tower, Coreana 882 heavy, request clearance to start the engines. (코리아나 에어웨이 882편 엔진 기동을 요청합니다.)

그가 교신을 하는 동안 나는 객실 사무장에게 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게이트를 연결하던 브리지가 떠나가고 비행기는 유도로에 들어설 준비를 마쳤다. 컨트롤 타워에서 승인이 떨어진 뒤 엔진을 가동시키고 천천히 택싱에 들어갔다. 부여 받은 활주로는 10R.

부기장에게 인천공항 이륙이 몇 번째인지 물었다.

“오늘이 세 번째입니다.”

“ATPL 취득하시고 총 비행 횟수는 어떻게 되십니까?”

“그것도…… 세 번째입니다.”

나는 웃으며 트러스트 레버에 손을 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 이직하고 첫 비행 때 인천공항에서 헤매던 나를 전성욱 부기장이 유도해 주던 기억이 났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몇 번의 비행으로 익숙해진 탓인지 이제는 무리 없이 택싱에 성공한다. 활주로 끝에 비행기를 세웠다.

-Coreana 882 heavy, wind 300 at 10R runway cleared for takeoff. (코리아나 에어웨이 882편, 바람 300, 10R 활주로. 이륙 허가합니다.)

관제탑에서 승인이 떨어졌다.

-Cleared for takeoff 10R, Coreana 882 heavy. (코리아나 에어웨이 882편, 이륙합니다.)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2만 피트에 오를 때까지 부기장의 콜 아웃 복창은 씩씩하게 이어졌다. 오토파일럿이 작동되고 나서야 그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긴장하셨습니까?”

“네? 아, 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저는 오늘 외국인 기장님인 줄 알고.”

“아.”

“어제부터 엄청 긴장되어 가지고…… 제가 영어가 조금 약하거든요. 첫 비행 때도 외국인 기장님이랑 편조 묶여서 진짜 7시간 내내 토하는 줄 알았어요.”

“지루해서요?”

“아니요, 말을 너무 많이 시키셔 가지고. 아, PM 보랴, 말대답 하랴, 진짜 머리 터지는 줄 알았어요.”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그가 구사하는 언어가 날것으로 돌아섰다. 조종사들은 콕핏에 들어온 이상 가능한 한 정갈한 언어를 쓰려고 노력한다. 모든 대화가 블랙박스에 기록되기 때문인데, 나 역시 10년을 일해 온 탓에 말투와 표현이 딱딱해졌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듣는 팔딱팔딱 뛰는 언어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기장님 저……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그는 조종석 안전벨트를 풀고 콕핏을 나갔다. 긴장한 탓에 배라도 아픈 건가. 혼자 남았으니 교신 채널을 집중해서 들어야 했다. 도착지까지 예상 소요 시간은 3시간 10분. 홍콩은 정말 오랜만에 가는 곳이었다.

기장 승급을 위해 한참 비행시간을 채우고 있었을 때, 한국보다 더 자주 오던 곳이 홍콩이었다. 아직 부기장이었던 그때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동아시아 노선을 선호했다. 난기류가 많았던 탓에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많았다. 덕분에 쉽게 배울 수 없었던 경험들이 쌓였다.

부기장은 금방 돌아왔다. 안경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세수를 하고 온 모양이다. 문득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부기장님, 스페어 안경 가지고 오셨습니까?”

“네? 아, 네!”

그는 마치 숙제 검사 맡는 학생처럼 여분으로 준비해 온 안경을 내게 보여 주었다.

조종사의 시력은 승객들의 목숨과 직계된다. 따라서 안경을 쓰는 조종사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여분의 안경을 챙겨야 한다. 경력 있는 기장쯤 되면 이런 사소한 규정들을 무시하기 십상인데, 그 이유는 아무도 검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앞으로도 이런 사항들을 잘 챙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슬쩍 확인해 보았다.

구름 위로 올라가자 태양빛이 콕핏 안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지품 컨테이너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같은 종류로 열 개 이상 가지고 있다.

“이야, 기장님 레이밴 끝내주네요. 쓰시니까 그냥 딱! 인터넷에 파일럿 치면 뜨는 이미지 같아요.”

그는 혼자 소란을 떨고 있었다. 마침 기내식을 물어보러 사무장이 들어왔는데, 그녀에게도 같은 소리를 해 대며 법석을 떨었다.

“진짜 미남, 아니 훈남인가. 뭐라 그러지? 아무튼 파일럿의 정석 같지 않아요? 그죠?”

“네에, 다 맞는 말씀이고요. 이미 유명하신 분이니까 구경은 천천히 하시고 빨리 메뉴나 정하세요.”

“어, 그럼 저 한식 먹어도 되나요?”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라고 했다. 덕분에 나는 중국식 소고기 덮밥을 먹게 생겼다.

확실히 현장에서 만나는 한국 부기장들은 이제 나이 어린 항공대 출신들이 많아졌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조종사가 되는 관문 역시 넓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독일은 그 반대다. 동료 조종사 중 한 명은 나이 사십이 되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돈을 주고 비행 학교를 졸업한 뒤, 여객기 면허증을 따고 부기장이 되었다. 그런 경우는 드문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 뒤늦게 찾아온 열정에 노력까지 겸비한 실력가였다.

내가 이런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부기장은 공용 주파수에서 흘러나오는 교신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가 집중할 수 있도록 비행 내내 말을 많이 걸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리는 예정된 시간에서 10분 빠르게 홍콩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 * *

공항에서 나는 크루들과 헤어져 택시를 탔다. 호텔에 들러 유니폼을 갈아입고 갈까 생각했지만 자칫하면 늦을 수도 있었다. 웡의 가게는 오후 6시가 되면 재료가 떨어져 문을 닫는다.

택시는 침사추이 입구로 들어서면서부터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행인들과 차량들이 한데 섞여 전진하기 어려웠다. 나는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홍콩에 대한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7~8년 전쯤 처음 비행이 잡혔을 때 현지 체류 휴가를 내고 일주일을 머물렀다. 지금은 중국어도 많이 들리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동어만 썼었다. 아직도 영어는 대부분 통하지만, 잘하는 사람을 찾는 건 이제 많이 힘들어졌다. 웡의 영어 역시 처음엔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는 영화 <청킹 익스프레스>에 나오는 소호 거리에서 간이식당을 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수도 없이 올라갔다 내려오는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처음 보러 간 날, 나는 바로 옆에서 알아챌 새도 없이 가방을 도둑맞았다. 무엇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누군가 내 옆을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걸 마침 뒤에서 보고 있던 웡이 범인을 쫓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800미터에 달하는 에스컬레이터 안에서 때아닌 질주극이 이어졌다. 그는 사람들을 제치고 소매치기를 잡으려 난리 법석을 떨었다. 뒤늦게 헉헉대며 꼭대기까지 올라간 나에게 그는 되찾은 가방을 건네주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사례하겠습니다.’

‘에이, 에이, 필요 없어.’

그는 두꺼운 팔뚝을 저으며 돈을 바란 게 아니라고 했다. 정 고마우면 자신의 가게에 와서 완탕면을 먹어 주라고 했을 뿐. 그날 그를 따라 내려간 초라한 간이식당에서 맛있냐고 물어보는 그의 물음에 나는 열 번 넘게 그렇다고 해 주었다. 예의상 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 열 배의 값을 치르고 싶을 정도로 맛이 훌륭했다.

그때부터 홍콩 비행이 있을 때마다 나는 웡의 식당을 찾아갔다. 어느 날은 동료들과 함께, 어느 날은 혼자서. 갈 때마다 그의 가게는 조금씩 확장되어 갔고, 이제는 줄을 서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허름한 상가 건물 1층, 커다란 테이블 홀이 있는 웡의 식당에 도착했다. 그는 ‘판매 완료’라고 쓰인 중국어를 내걸며 질척대는 손님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매일 웍을 돌리던 팔뚝에는 근육이 더 붙었고, 최근 이발을 했는지 머리는 잔디처럼 깎여 있었다.

그가 손님들과 벌이는 실랑이를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내일 다시 오면 먹게 해 주겠다며 설득 중인 것 같았다. 말투는 시큰둥하지만 그는 상냥한 사람이다.

“어어, 스미스!”

그는 나를 ‘스미스’라 부른다. 통성명을 할 때 ‘슈미츠’라고 발음해 주었지만 그의 발음은 ‘스미스’로 굳어져 버렸다. 처음 몇 번은 고쳐 주려 노력했지만, 자신은 나를 제대로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이름 같은 건 나한테 별 의미 없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뭐라고 불리든 난 상관없었다.

“들어 와 앉아. 오랜만에 왔네? 뭐 줄까, 새우?”

“그래, 아직 재료가 남았으면.”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서너 개의 테이블이 식사 중이었다. 유니폼을 갈아입지 못한 탓에 주목을 좀 끌고 있었다. 민망해진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8살의 내가 독일로 입양되었을 때,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홍콩 반환은 유럽에서도 감정 섞인 뉴스였고 밀레니엄으로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청산해야 하는 과거였다. 철수하는 영국 군인들과 새로 올라가는 중국의 국기. 영어와 중국어가 울려 퍼졌지만, 정작 사람들은 광동어를 쓴다. 새로운 기회를 기대한다는 시민의 인터뷰와 울고 있는 시위대의 영상이 동시에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지금의 홍콩은 그런 열망마저 사라진,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도시가 되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웡은 완탕면을 내려놓으며 의자를 끌어다 맞은편에 앉았다.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새우 완탕이 보인다. 원래 넣는 양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페이는? 안 보이네.”

“토니 데려다주러 갔지. 영어 학원을 보내고 있거든.”

페이는 그의 아내고 토니는 그의 아들이다. 토니에게 용돈을 줘야 하는데 큰일이다.

“장사는 여전히 잘돼?”

그는 대답 대신 판매 완료 문구를 가리키며 덤덤하게 긍정했다. 그러나 곧 살인적인 홍콩의 집값과 임대료에 대해 불평을 털어놓았다. 들어오는 손님도 쫓아낼 정도면 돈방석에 올라야 하는 것이 경제학적으로 맞을 텐데 여기서는 적용되기 힘든 듯했다. 소호 거리를 떠나 좀 더 싼 동네로 이사하는 것을 생각 중이라 했다.

물론 나는 그가 어디로 가든 찾아올 생각이었지만, 웡이 사라진 소호 거리를 생각하니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국으로 들어갔어.”

“한국? 아, 그래. 너 한국 출신이라고 했지. 맞아.”

그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듯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고향이 좋아. 그렇지?”

“글쎄, 별로 고향처럼 느껴지지는 않아.”

“독일이 더 편한가?”

“그냥 그래. 어디에도 소속감은 들지 않아.”

“어. 그래, 그래. 나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그는 내 식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다 맛있냐는 질문을 한번 했다.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해 주었다.

웡의 가게에는 문이 없다. 덕분에 몇몇 관광객들이 멋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곤 했다. 지금 들어온 손님은 아예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하려 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즈!’를 외치며 그들을 내보냈다. 그러고는 그대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튀긴 과자가 담긴 접시 하나를 가지고 내게 돌아와 다시 정치 이야기를 시작했다.

웡이 선택하는 단어들은 늘 한정적이다. 시위, 자유, 경제. 그 단어만으로도 혼자 10분을 떠들 수 있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덕에, 나는 이제 그가 하는 영어를 모두 알아들을 수 있다. 그가 하는 이야기의 결론은 늘 동일하다. 웡은 그저 홍콩을 사랑한다.

“너는 잘 살고 있는 거야?”

헤어질 때나 되어 안부를 묻는 그에게 나는 솔직하게 답변했다.

“힘들어. 좀 미칠 거 같아.”

나는 웃으며 그에게 징징대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풀리는 게 하나 없어. 어떻게 하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러면 그는 늘 같은 말을 해 준다.

“스미스,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해가 점점 지고 있었다. 질서 없이 도로 밖으로 튀어나온 상가 간판들이 네온사인을 밝히기 시작했다. 소호의 쓸쓸한 밤이 시작되었고, 나는 웡의 가게에서 완탕면을 먹으며 위로받고 있었다.

홍콩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 날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 활주로는 비에 젖었다.

부기장이 착륙 점검을 하는 동안 나는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비닐 작업복을 입고 정비사들이 뛰어다닌다. 짐을 실어 나르는 카트 차량과 인부들이 도착했다.

아무래도 우리 비행기가 오늘의 첫 랜딩 스케줄이었나 보다. 승객들을 기다리는 다른 항공사 비행기들이 줄지어 게이트에 대기 중인 모습이 보였다. 땅이 젖어서 그런지 비행기들이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생긴다.

“기장님, 나가시죠.”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착륙 점검을 끝내고 조종석에서 일어났다. 운항 일지를 반환하러 가는 동안 휴대폰을 확인했다. 비행 중 한재이의 전화가 왔었나 보다. 그는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방금 도착했어. 아직 프랑크푸르트 공항이야. 전화기 꺼져 있는 거 보니 비행 중인가 보네. 아, 전화 왜 했냐 하면, 잘 지내다 간다는 인사를 못 했잖아. 아무튼 고맙다. 이젠 진짜 멀리 사니까 연락 더 자주 하자. 아니, 넌 원래 안 하니까 내가 더 자주 할게. 비행 조심하고. 곧 봐.

곧 보자는 그의 말에 나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기젤라가 아직 폭탄을 터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나중에 내가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배신감을 느낄까. 기젤라가 언제쯤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지 몰라 나는 더 곤란해졌다. 이제는 한재이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도, 진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혼식까지는 3주가 남았다.

나는 공항 리무진 버스에 몸을 실었다. 꿉꿉한 여름비가 유니폼을 적셨다. 버스 안에서는 오래된 에어컨 냄새가 났다. 밤을 새운 것과 다름없었기에 피곤했다. 앞 좌석에 앉아 창문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쳐다보다 잠이 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차량 속도가 더디어진 것 같아 눈을 떴다. 서울 시내로 들어선 공항버스는 차례차례 정류장에 정차하고 있었다. 비는 오늘 안에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새벽 비행이라 운전할 자신이 없었던 탓에 차를 놓고 온 것을 후회했다.

캐리어 가방을 들고 집 앞 정류장에 내렸다. 빌라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홀딱 젖어 버린 후였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거실로 들어섰다. 욕실로 가던 중 문득 한재이가 쓰던 방의 문을 열었다. 컴컴한 방 한가운데 매트리스 비닐도 뜯지 않은 침대가 쓸쓸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위로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매트리스 비닐 위로 물이 고였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나를 쳐다보던 눈동자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나는 내 나름의 방식대로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 * *

나는 허기짐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주변은 여전히 어두웠다. 거실로 나가 발코니 문을 열었다. 빗줄기 소리와 서늘한 공기가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비에 젖어 축축한 유니폼을 벗고 샤워를 했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전화는 아니었고 메신저 알람이었다. 전성욱 부기장과 조민우 부기장이 함께 있는 대화창에서 이번 달 새로 나온 스케줄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도 내 스케줄 화면을 찍어 대화창에 올려 두었다. 그러자 곧바로 전화가 울렸다.

“네.”

-저랑 하네다 한 번 겹치네요, 기장님.

조민우 부기장은 인사를 생략했다.

“그러네요. 덕분에 제가 편하겠군요.”

-칭찬이죠?

“물론입니다.”

-집이세요?

“네, 새벽에 떨어져서 지금까지 잠들었네요. 한국이십니까?”

-네. 전 이틀 오프였어요. 집에 들어가는 길인데, 잠깐 들러도 되나요?

나는 ‘왜’라는 질문을 하려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요.’ 정도일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실속을 챙기기로 했다.

“혹시 식사하셨습니까?”

-아직 안 한 걸로 하죠. 금방 갈게요. 30분 주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식사를 이미 했다는 건지 안 했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발코니로 나갔다. 담배가 점점 늘고 있었다. 혼자 시대를 역행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화창에 띄워진 스케줄 표를 다시 한번 확대했다. 무려 2주간의 휴가가 잡혀 있다. 나는 한재이 앞에서 굉장히 도도한 척 굴고 있었지만, 7월 17일 이후의 나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상태로 비행기를 모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판단했기에, 어디든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틈만 나면 날씨를 읽게 되는 것이 일종의 버릇인데, 오늘 저녁은 태풍이라도 올 것 같았다. 이럴 때 내가 비행이 없어 안심하기보다 누구든 오늘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조민우 부기장은 집으로 올라오지 않은 채 빌라 밑에서 전화를 했다. 내려오라는 말에 그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그의 아파트였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어제 어머니가 왔다 가셨거든요. 이것저것 냉장고가 꽉 찼는데, 집에서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오늘 날씨도 별로고. 올라오세요.”

나는 너무 깨끗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돈된 현관 문 앞에서 조심스레 신발을 벗었다. 신혼집답게 여기저기 로맨틱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파스텔 톤으로 페인트칠 한 아치형의 문이 인상적이다. 전 약혼녀의 취향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동냥하러 온 사람처럼 민망하게 거실에 서 있었다.

그는 이것저것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런 것들을 잘 먹지 못한다. 전성욱 부기장과의 식사처럼 그저 도전하는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부디 허기가 이 사태를 해결해 주길 바랐다.

“스케줄 보니 휴가 길게 내셨던데.”

“네. 여행을 좀 할까 해서.”

“어디로?”

“아직 모르겠어요.”

물론 나는 생각해 둔 곳이 있었지만 이런 개인적인 일을 그와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차려 놓은 반찬은 훌륭해 보였으나 나는 아까부터 감자볶음만 줄기차게 먹고 있었다.

“입맛에 안 맞으세요? 우리 어머니 요리 꽤 하시는데.”

“아니요, 맛있습니다.”

조민우 부기장에게 실례할 수 없어서 나는 이것저것 탐색전에 들어가야 했다. 열 개가 넘는 반찬 접시들을 하나하나 맛보고 있던 중 야채 볶음을 먹다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음식물을 뱉어 냈다. 파인애플 맛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 왜 그러세요? 뭐 들어 있었어요?”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욕실로 뛰어갔다. 뱉어 낸 음식물은 휴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물로 입을 헹궈냈다. 씹어 삼키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방심했다.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괜찮으세요?”

욕실 문을 열고 나오니 조민우 부기장이 놀란 듯 문 앞에 서 있었다.

“아, 제가 열대 과일 알레르기가 있어서. 뱉어 냈으니 괜찮습니다.”

“그런 알레르기도 있어요?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음…… 두드러기가 나고 호흡 곤란 증세가 조금 나타납니다.”

“와, 살기 불편하시겠는데요? 제가 새콤한 걸 좋아해서 어머니가 같이 넣고 볶으셨나 봐요. 다행이네, 별일 없어서. 파인애플을 못 드실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하하.”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기에 나도 그에게 허탈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호흡 곤란 증세라고 둘러댔지만, 지난번엔 병원에 실려 갔었다. 조심했어야 했는데 근래 들어 부주의함이 늘었다.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빵 드릴까요?”

눈치가 빠른 조민우 부기장이 식빵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계속 먹죠.”

그는 식사를 하고 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제 몫으로 담아 놓은 밥공기는 거의 줄지 않았다. 남의 집에서 대접받은 음식을 남기는 것은 굉장한 실례이므로 나는 열심히 밥을 비워 냈다. 요즘 들어 밥 먹는 것이 늘 곤욕이다.

“드시는 동안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조민우 부기장이 갑작스레 운을 띄웠다. 지난번엔 마지막 연애가 언제인지를 물었는데 이번엔 뭐가 될지 궁금했다.

“네.”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랑 연애하는 거 가능한 얘기일까요?”

그 물음엔 교묘하게 주어가 빠져 있었으므로 나는 그와 수수께끼 같은 대화를 해야 했다.

“부기장님이 요즘 연애하는 거에 관심이 많아지셨나 보네요.”

“네. 저도 제 인생 빨리 되찾아야죠. 그래서 대답은요?”

“가능하다고는 생각합니다. 저는 아니지만.”

나는 그가 회사 크루 중 관심 가는 사람이 생긴 것이길 빌었다. 은근히 신경 쓰이는 그의 말투나 태도는 요즘 내가 이런 쪽으로 예민한 탓에 혼자 한 오해로 여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중얼거림으로 그건 그냥 내 바람일 뿐이었음을 깨달았다.

“아…… 기장님은 안 되시는구나. 더 기다려야 되겠네.”

들으라고 한 이야기가 틀림없는 혼잣말에 나는 숟가락을 놓고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조민우 부기장은 뭐든 피하는 법이 없다.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저도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실례되는 거라면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들어 보고 판단할게요.”

“……들켰다는 사진에 찍힌 그 전 애인은, 남자분이셨습니까?”

표정 없던 그의 얼굴에 보조개가 잡혔다. 그리고 긍정했다. 전혀 실례되지 않는 질문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역시 조민우 부기장은 바이섹슈얼이었다.

“신기하네요. 대부분은 약혼녀의 아는 사람이나 핏줄이랑 사귄 거냐고 오해하던데. 사람은 자기 평소 생각에 맞춰서 사고하는 동물이라더니. 기장님이 정확하게 맞히시니까 저도 오해가 생기려 하네요.”

“독일에서는 흔하니까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을 마셨다. 그가 시인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내 사정까지 털어놓을 의향이 전혀 없었다. 조민우 부기장 역시 혼자 커밍아웃하고 손해 본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내게 그 질문을 하게 함으로서 적어도 내가 동성애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여기저기 그물망을 쳐 놓았다. 완전히 불편한 관계가 되기 전에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데 대놓고 고백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거절하기도 애매하다.

“잘 먹었습니다.”

“두세요. 제가 치울 테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치운다던 식탁은 내버려 둔 채 조민우 부기장이 따라 나왔다. 비가 오고 있으니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했다. 거절하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아 그를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비는 이제 폭우가 되어 낙뢰를 동반했다. 사정없이 때리는 빗줄기에 와이퍼가 빠르게 물기를 닦아낸다. 빌라에 도착하기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생각건대 그와의 비행이 이제 불편해질 것 같았다. 조민우 부기장은 보기 드문 조종 실력을 가진 좋은 동료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비 때문인가. 그는 담배를 피우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가끔 이륙 우선순위가 꼬일 때가 있잖아요.”

빌라 앞에 차량을 정차시킨 그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비행기 하나는 원래 이륙 시간을 두 번 세 번 놓쳐서 컴플레인까지 걸린 상태고. 다른 하나는 제 시간보다 이르게, 완벽하게 이륙 준비를 끝냈다고 가정해 보죠.”

와이퍼가 앞 유리를 긁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경우 둘이 동시에 클리어런스 요청을 했다고 한다면, 어느 비행기가 먼저 이륙하는 게 맞을까요?”

그가 조수석에 앉은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깨진 와인 잔의 열렬함을 눈치챈 사람은 이쪽인 듯했다.

“그건.”

차 문을 열었다.

“순전히 관제사 마음이겠죠.”

나는 빗속을 뚫고 집으로 올라갔다.

* * *

다음 날 나는 약국에서 두통약을 사서 돌아가는 길에 양부모의 전화를 받았다. 양아버지의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셨는데 그분의 아흔 살 생일 파티에 참석하길 원하셨다. 한재이의 결혼식 때문에 내가 독일로 들어오는 날을 이미 알고 전화한 것이다. 독일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게 생겼다. 한숨이 나왔다.

어제부터 내리는 비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다. 집에 있으려니 답답해서 차라리 대기 콜이라도 받고 싶었다. 두통약을 삼키고 샤워를 시작했다.

‘아…… 기장님은 안 되시는구나. 더 기다려야 되겠네.’

며칠 전 조민우 부기장의 간접적인 고백을 듣고 난 후 느낀 점이 있었다. 나의 성적 취향을 정의 내려야 한다. 누군가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 연애를 시작하려면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느 쪽에 흥미를 느끼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게이인가, 바이섹슈얼인가. 아니면 한재이에게만 한정된 성욕을 품은 스트레이트인가.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애착인형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감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재이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는 소릴 듣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없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한편으로는 진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있지 않나. ‘나는 네가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좋은 게 아니야’. 유치하다고 비웃었는데 내 상황이 딱 그에 걸맞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엇이든 현실이 상상을 뛰어넘는다.

만에 하나 그가 내게 느끼는 감정들이 나와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그걸 받아들이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 나는 알을 깨고 나온 것 같은 극렬함을 느꼈는데 한재이에게 있어서 이런 류의 감정은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궁금했다.

욕실에서 나온 나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정말 이럴 때는 매일 출근하는 회사원의 삶이 부러웠다. 회사에서 쉬라고 마련해 준 휴일에 나는 몸을 누일 수조차 없었다. 무엇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 서울에서 가장 큰 서점을 검색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서점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각자 한 권씩 집어 들고 주변에 마련된 의자나 바닥에 앉아 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겁다. 나도 몇 권 집어 들고 빠르게 책장을 훑었다.

소설 한 권과 항공 사진이 잔뜩 담긴 에세이집을 샀다. 바로 옆에 카페가 보였다. 커피 한 잔을 사서 1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양옆으로 혼자 온 사람들이 길게 앉아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처럼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도 있다.

소설책의 내용은 폴란드의 삼 형제에 관한 이야기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시즘이 몰아치던 시기에 각자가 처한 상황을 챕터별로 나누어 놓았는데 문장이 간결해서 읽기 좋았다. 한 시간 정도 만에 한 챕터를 끝냈다.

화장실을 가야 할 것 같아 주변을 살폈다. 마침 옆에 앉아 있는 여성분의 인상이 좋아 보였기에, 그녀에게 소지품을 봐 달라고 부탁했다. 조금 당황하는 눈빛을 보내던 그녀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화장실을 다녀온 뒤 감사 인사를 했는데 그녀는 수줍게 웃기만 했다.

“저도 봐 드릴 테니까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네? 아, 네.”

그녀는 펜으로 무언가를 계속 적고 있었는데 대학생 같아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리포트를 작성중인 것 같았다. 몇 번씩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더니 그만 펜을 바닥에 떨어트려 버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굴러가는 펜을 왼쪽 발로 막아 주었다. 그녀가 펜을 줍기 위해서는 높은 1인용 의자에서 내려와야 했기에 내가 허리를 숙여 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대학생이신가 봐요?”

“네? 아, 네…… 근데, 저 남자 친구 있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뜻인지 몰라 그녀를 몇 초간 쳐다보고 있었다. 앳되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가만 보니 다들 소지품을 테이블에 두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소매치기가 없는 나라다 보니 휴대폰마저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한다. 그녀는 아마 내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일부러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독일에서 소지품을 두고 자리를 뜬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혼자 온 사람들은 옆 테이블의 사람에게 물건을 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말도 몇 마디 주고받는데 한국에서는 이것이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나 보다.

“아, 네.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나는 그냥 그녀가 마음에 들어 말을 걸어 본 남자가 되어 주기로 했다. 이런 걸 ‘작업 건다’고 표현한다 했던가. 생각지도 못한 작업 실패를 겪고 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 저기. 제가 그쪽이 맘에 안 들어서 일부러 핑계 대는 게 아니고요. 진짜, 진짜 남자 친구가 있어서…….”

“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미지근해진 커피를 마시며 다시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옆에 앉은 그녀는 펜을 놓고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채팅 중인 듯했다. 정말 빠른 속도로 키패드를 치는데 나는 감히 따라갈 수도 없는 속도였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커피를 리필할지 자리를 뜰지 고민하던 차에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오프 때 걸려오는 전화는 뻔하다.

-진짜 진짜 죄송한데, 기장님 한 분이 급하게 병가를 내셔서 A350만 이번 주 3편이 비거든요.

그는 급하게 공석이 된 스케줄을 메꿔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의 거절과 조율을 거쳤는지 목소리에서 피곤함이 묻어나왔다.

“괜찮습니다. 지금 제일 급한 편명이 뭐죠?”

-CR771, 싱가포르이고 내일 1120 출발입니다.

“그럼 제가 그걸 맡죠. 레이오버 있나요?”

-네. 잠시만요, 어, 다음날 바로 돌아오시면 되는데. 아, 근데 그렇게 되면 기장님은 하네다까지 연속 비행 되시는데 괜찮으실까요?

“괜찮습니다. 이번 달 휴가를 잡아 놓은 게 있기도 하고 또 다른 분들보다는 제가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까요.”

-아으…… 진짜 감사합니다. 기장님이 오늘 저를 살리셨어요.

전화기 너머로 안심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동료들도 다른 뜻이 있어서 거절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다른 약속이 잡혀 있거나 했을 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

내일 잡힌 비행 스케줄로 인해 오늘의 여유는 여기까지인 듯했다. 나는 책을 덮고 커피 잔을 정리했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 찰나 옆자리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지 민망해 하며 딴 짓을 한다. 나는 웃으며 카페를 나왔다.

* * *

갑작스레 잡힌 비행이었지만 내게는 집에 있는 것보다 좋은 선택이었다. 그러고 보니 첫 출근 때도 싱가포르를 왔었는데 이렇게 한 달이 돌아오고 다시 싱가포르를 방문한 셈이었다.

다음날 바로 인천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공항 옆에 붙어 있는 호텔이 배정되었다. 저녁시간임에도 숨이 막힐 듯 날씨가 더웠다. 그래도 바깥 공기가 낫다.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순간 과하게 돌아가는 에어컨 바람에 목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배정된 방의 체크인을 하기 위해 지갑과 여권을 가방에서 꺼냈다. 이름을 말하고 호텔 매니저가 여권을 복사하러 간 사이 크리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조금 흥분된 목소리였다.

-통화 가능해?

“그래, 호텔 체크인 중이야. 무슨 일 있어?”

매니저가 여권을 돌려주었다.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쥐고 남은 한 손으로 여권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재이한테서 연락 없었어?

“아니, 없었어. 무슨 일인데 그래.”

-어제 나한테 전화 왔었어. 이상한 걸 묻더라. 아무래도 결혼에 문제가 생긴 거 같던데.

“아니에요, 이 카드로 하죠. 크리스, 네가 하는 소리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알기 쉽게 설명해 봐.”

나는 보증금으로 개인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호텔 매니저와의 대화가 겹치는 바람에 크리스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너희 둘을 오래 알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의견을 묻고 싶었대.

“무슨 의견.”

-너희 사이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사이인거냐고.

“잠시만 기다려. 감사합니다. 아니요, 짐은 제가 직접 가지고 올라가죠. 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객실로 올라가는 다른 손님 한 명이 내 뒤에서 순번을 기다렸다. 다시 휴대폰을 제대로 쥐고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답해 줬는데?”

-상식을 뛰어 넘는 사이 같다고 해 줬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상식. 왜 쓸데없는 얘기를 해. 재이는 뭐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잠깐 전파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의 말이 끊기기 시작했다.

-……겠…… 모든…… 탓……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17층까지 올라가는 데 시간이 더디게 느껴졌다. 함께 탄 다른 손님은 중간에 내렸다. 크리스는 안 들리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혼자 말하는 중이었다. 17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그의 말을 막았다.

“엘리베이터여서 하나도 안 들렸어. 다시 얘기해.”

-아직 시간 있으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해 줬어.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 아니라고.

“아니, 아니. 그 전에. 네가 상식을 뛰어넘는 사이라고 했다며. 그랬더니 뭐래?”

-잘 알겠대. 모든 게 자기 탓이라던데.

나는 룸 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몸을 밀어 문을 고정시킨 뒤 한 손으로 캐리어 가방을 룸 안으로 옮겼다.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대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크리스와의 통화에 집중했다.

“재이가 그렇게 말했어?”

-그래. 그리고 목소리가 굉장히 음…… 뭐랄까, 좀. 아무튼 나 결혼했을 때 이야기를 묻더라고.

“어떤 거?”

-그냥 결혼 전에 어땠는지. 나도 결혼을 물 흘러가듯이 한 게 맞긴 한데. 우린 동거를 오래 했잖아. 이미 가족 같았고. 약혼녀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재이는 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어.

“그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나는 유니폼 단추를 끄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아팠다.

-아무튼 다행이다. 막판에 일이 어그러지려나 봐. 너한테는 좋은 일일 수도 있겠다.

“재이에게 안 좋은 일은 나한테도 안 좋아.”

-바보 같기는. 너 때문에 나까지 속상하잖아.

“그 얘기 하려고 전화한 거야?”

-그래. 네가 미리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고마워.”

-쉬어. 나도 들어가 봐야겠다.

크리스와의 전화를 끊고 커튼을 걷었다. 싱가포르 공항의 야경이 보였다. 동시에 잔뜩 미간을 찌푸린 내 모습도 유리창에 투영되고 있었다. 이렇게 모른 척 기다리고 있는 것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크리스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기젤라는 하고자 한 바를 모두 끝낸 것 같았다. 한재이는 혼란 그 자체에 휩싸인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전화를 하지 못했다는 건, 내 생각을 할 겨를이 아예 없거나 그 혼란의 바로 중심에 내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 * *

아침 스케줄로 도쿄에 도착하는 비행을 앞두고 나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조민우 부기장은 이런 나의 기색을 읽기라도 한 듯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다. 브리핑이 끝나고 콕핏에 들어가기까지,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비행에 관한 이야기들로만 대화를 채웠다. 그런 그를 두고 신경을 쓰고 있었던 내가 다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PF 보시죠. 하네다는 부기장님 전문이시니까.”

나는 그에게 조종간을 내주었다. 차라리 이편이 낫다. 그가 나를 챙겨 주는 이유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닌 순전히 조종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으로 치부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하네다행 비행기는 항로 문제로 대부분 써클링(Circling. 진로를 선회하는 것)을 해야 한다. 동해상에서 불어오는 남풍으로 활주로 방향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의치 않으면 ILS 접근(Instrument Landing System. 주파수를 이용한 계기 착륙)을 해야 하는데 지난번에 조민우 부기장은 관제탑의 유도만으로 수동 랜딩을 했다.

오늘도 그는 ILS 접근을 요청하지 않았다. 비행기는 착륙 직전 180도를 돌아 곧바로 활주로를 향해 내려왔다. 이런 그의 랜딩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다.

“하네다 공항에 익숙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이쯤 되자 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기장님들이 자꾸 시키시니까요. 처음엔 귀찮다는 이유로, 나중엔 잘한다는 이유로.”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조종사들마다 익숙한 공항들이 있는데 그에게는 하네다 공항이라는 태그가 붙었나 보다. 나 역시 같은 핑계로 그에게 랜딩을 맡겼으니 할 말은 없었다. 우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파킹을 시키고 다 함께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돌아오는 비행까지는 8시간이 넘게 남았다. 쇼업을 출발 3시간 전에 한다고 해도 5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공항에서 대기를 하지만, 몇 명의 객실 승무원들이 도쿄 시내로 나가고 싶어 했다.

“물론 규정 위반은 아니지만…….”

“4시까지는 들어올 수 있을 거 같은데. 여기서 택시 타면 30분밖에 안 걸려요, 기장님.”

객실 사무장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말로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이제는 조민우 부기장까지 합세해서 거든다.

“다 같이 가는 건 어때요? 가는 김에 점심도 먹고 오면 되지 않나?”

“아, 좋아요!”

부기장까지 이쪽 편으로 만든 마당이었으니 분위기는 이미 기울어진 듯 보였다. 객실 승무원 5명을 포함해 나와 부기장까지 총 7명이다. 기장에게는 CRM(Crew resource management. 운항 승무원 관리) 권한이 있으므로 이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나의 책임이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을 했지만, 공항에서 마냥 대기하기엔 지루한 시간이긴 했다.

“그렇게 하시죠, 그럼.”

6대 1로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기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5시간 레이오버를 하기로 했다. 조건은 하나만 걸었다. 회사 유니폼을 입고 있는 상태이므로 품위 유지를 할 것. 우리는 곧바로 하네다 공항 정류장에서 점보 택시를 타고 도쿄 시내로 이동했다.

객실 승무원 중에 남자 크루가 한 명 있었으므로 우리 셋이 뒷좌석에 오르고 남은 크루들을 앞에 앉게 했다. 그중 한 명은 일본어가 매우 훌륭해서 택시 기사님에게 이것저것 정보를 묻고 있었다.

“일본어는 고등학교 때 배웠는데, 지금은 거의 기억이 안 나요.”

남자 객실 승무원이 웃으며 말했다.

“아, 저도 일본어 선택했었는데. 독일에도 있어요? 제2외국어 선택하는 거?”

“네.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라틴어 중에 고릅니다.”

“라틴어를 배워요? 하하. 쓸 데가 있나?”

“그러게요. 누가 선택해요, 그런 거? 프랑스어가 딱 좋겠다.”

음…… 한재이와 나는 라틴어를 선택했었는데. 순간 너드가 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택시가 도쿄 시내 안으로 들어섰다. 빌딩 사이로 갈래갈래 늘어진 도로를 롤러코스터 타듯 미끄러진다. 하네다 공항 고속도로를 벗어나고 창밖으로 오다이바의 레인보우 브리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풍경이 좋아 보이는 이유는 달리는 택시의 높이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더 이상 팽창할 수 없게 된 도시는 기형적인 형태로 위로 솟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빌딩은 50층, 60층을 넘었고 그 옆으로 100미터 높이의 도시 고속도로가 생겨났다.

자동차는 게임을 하듯 그 위를 신나게 질주하다, 내리고 싶은 목적지가 보이면 빙글빙글 회전목마를 타듯 내려온다. 그렇게 내려온 땅 위에는 신호등도 있고 보행 도로도 있다.

우리는 도쿄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붐빈다는 시부야의 한복판에 내렸다. 크루들이 모두 내린 후 요금을 치르며 기사에게서 명함을 한 장 받았다. 문제없이 공항에 돌아가기 위해 4시간 후로 예약했다.

“저희 뭐 좀 사러 갈게요.”

4명의 여성 크루들은 팔짱을 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은 셋은 버스를 개조해서 만든 관광안내소 옆에서 담배를 피웠다.

흡연소 옆은 만남의 광장처럼 사람들로 꽉 찼다. 친구와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내내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신호가 바뀌고, 3차선 교차로는 수백 명의 사람들로 뒤덮였다. 또 다른 의미로 장관이었다.

“저희는 뭐 해요? 아, 근데 제가 두 분 계신 데 껴도 되나요?”

“이미 꼈으면서 뭘 물어요. 하하.”

남자 크루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조민우 부기장이 눈치를 주면서도 유쾌하게 받아 주었다. 셋이 모두 항공사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너무 눈에 띄는 듯했다. 여고생들이 재미있는 감탄사를 흘리며 지나갔다. 아무튼 더 구경거리가 되기 전에 뭘 하고 시간을 보낼지 생각해야 했다.

“게임 센터 갈까요?”

“어! 저는 좋아요.”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크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머뭇거렸다.

“기장님 잘 모르시는구나. 일본에 오면 조금 유치해져야 재밌는데.”

조민우 부기장의 담배 물린 얼굴에 보조개가 잡혔다. 딱히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으므로 나도 그의 제안에 찬성했다.

담배를 끄고 우리는 인파가 몰리는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 사이 마리오 캐릭터 분장을 한 대여섯 명의 외국인이 경주용 카트를 몰며 도로 위를 지나갔다. 커다란 파칭코 가게 문이 손님을 맞기 위해 열렸다. 담배 연기와 알 수 없는 방향제가 섞인 특이한 냄새가 풍겨 왔다.

거리에는 두 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켜켜이 쌓인 드러그스토어 물건들이 세일에 세일을 거듭하고 있었다. 반은 관광객이었고 반은 현지인들로 보인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게임 센터를 찾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요란한 아케이드 소리가 한데 섞여 우주선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굉장히 넓고 종류가 많았다.

먼저 현금을 동전으로 바꿔야 했는데 엔화가 없었다. 조민우 부기장이 사비를 털어 백 엔짜리 동전을 서른 개나 바꿔 왔다. 배급하듯 우리에게 나눠 주고선 각자 흩어질 것을 지시했다. 여기서는 그가 캡틴이었다.

나는 뭘 해야 하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우리 이거 하죠.”

흩어지라던 조민우 부기장은 2인용 슈팅 게임 기계 앞으로 나를 끌고 왔다. 동전을 넣더니 앞에 걸려 있는 총 하나를 잡았다. 둘이 힘을 합쳐 마피아 조직을 소탕하는 게임이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재촉했다. 나는 남은 총을 쥐고 모니터 앞에 섰다.

“제가 선발할 테니까 엄호만 해 주세요.”

커다란 모니터 속에 두 명의 플레이어가 나타났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마자 조민우 부기장의 캐릭터가 달려 나갔다. 나는 그를 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멀리 보이는 적들을 쓰러트렸다. 조준이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초반에는 좀 헤매었다. 실수로 유격탄을 맞아 버린 내 캐릭터는 피가 반쯤 깎여 버렸다. 한번 깎인 체력은 보충이 안 되는 건지 그대로 진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저 불편해하지 마세요.”

첫 번째 스테이지가 끝날 때쯤 느닷없이 조민우 부기장이 말을 시작했다. 우리는 계속 게임을 하는 와중이었고 그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무 밀어내시니까 티 낸 거 후회되잖아요.”

그의 목소리는 범람하는 게임 사운드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그의 캐릭터가 보스를 향해 달려갔다. 지원 사격을 하고 있었는데 캐릭터 체력이 벌써 간당간당해졌다.

“장거리 비행이라도 같이 걸려야 뭐든 해 볼 텐데. 이놈의 하네다가 매번 제 발목을 잡네요.”

내가 잠시 장전을 하는 사이 그의 캐릭터가 쓰러졌다. 조민우 부기장의 모니터가 검게 변하고 ‘You died’라는 자막이 떴다. 이어서 하려면 동전을 넣어야 하지만 그는 게임을 계속하는 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기장님은 인생을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사는 거 같아요.”

이제는 아예 몸을 틀어 내 쪽을 향했다.

“물론 그게 매력이긴 하지만.”

혼자 남은 나는 보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같은 자막이 뜨고 동전을 넣으라는 카운트다운이 올라간다. 나도 총을 내려놓고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는 명백하게 선을 넘고 있었다.

“조민우 부기장님, 이 이상 제 사생활에 관심 보이시면 기피 대상 신청하겠습니다.”

그는 허탈한 듯 웃었다. 조종사는 파트너 기피 대상 신청이 가능하다. 물론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못 할 것은 없었다. 사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나는 진심이었다.

“알았어요. 항복.”

그는 장난스레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게임 센터 밖으로 나갔다. 그가 지나간 입구 옆에서 인형 뽑기에 열중인 크루가 보였다. 다행이 이쪽 상황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옆으로 다가가니 동전을 벌써 다 썼다며 울상을 지었다. 나는 내가 받은 동전을 그에게 건네고 밖으로 나왔다.

차도와 보도를 가르는 펜스에 걸터앉은 부기장은 밖으로 나온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인파가 지나 다녔다. 인형 뽑기를 하는 크루가 돈을 다 쓰고 나오면 셋이서 영화나 보러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하면 그 사람은 내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니까.

나는 스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줄 생각이 없다. 고루하고 따분한 성격이겠지만, 누구든 태어날 때 버려지는 경험을 해 보면, 그게 얼마나 서글픈 버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우습게도 그때 전화가 울렸다. 휴대폰 액정에 뜬 한재이의 이름을 확인하니 더욱 그랬다. 이게 무슨 TV 드라마 같은 상황인가.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웃음이 나왔다. 조민우 부기장의 말처럼, 여기서는 모든 상황이 유치하게 돌아가나 보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이야.”

-밖이야?

한재이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실제 상황이겠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가상 세계의 인물 같았다. 이제 스토리가 어떻게 바뀔지 사뭇 궁금해진다.

“괜찮아. 말해.”

-당장 좀 만날 수 있을까?

그는 침착했지만 서두르고 있었다. 당장 만나자는 그런 선택사항은 우리 사이에 이제 존재하지 않는데, 마치 거리 따위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듯 말하고 있었다.

“독일 비행이 이번 달엔 없는데.”

-상관없어. 그냥 내가 언제 어느 나라로 가는 게 가장 빠른지만 말해 줘.

그 순간 나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이것이 드라마였다면 곧바로 그를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졌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는 그렇게 빨리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따위의 생각을 말이다.

나는 다음 비행 스케줄인 도시를 떠올렸다. 한국으로 오는 것보다 거기서 보는 편이 빠를 것이다. 만나자는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로마로 와. 이틀 뒤에.”

나 역시 더 이상 기다리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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