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Emergency declaration
시간은 더디게 갔다. 로마 비행을 준비하기 전까지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한 박자씩 대답이 늦었다. 현실에서의 이틀이 온전히 가고 공항으로 출근하게 된 오늘 아침, 나는 한재이의 메시지에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오후 1시 랜딩. 호텔은 Libero Rome]
아쉬운 것은 레이오버가 단 하루라는 점이다. 하루를 꼬박 쉬고 다음 날 오후 비행기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하루의 시간 동안 한재이가 원했던 답을 내게서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오늘 비행 편조로 묶인 다른 한 명의 기장과 12시간 내내 PM을 보게 된 부기장 세 명이서 운항 계획을 의논했다. 파트너 항공사와의 코드 셰어로 인해 탑승객의 절반이 외국인이다. 인천공항의 날씨는 양호했고 앞선 항공기들의 연착륙 또한 거의 없었다.
무리 없이 제 시간에 날아오른 A380은 기류를 잘 만나 순항 중이었다. 후반부 조종을 맡은 나는 전반부 기장과 교체하고 조종석에 앉아 벨트를 채웠다. 옆에 앉은 부기장은 피곤에 절어 보였다. 벌써 6시간째 비행 중이니 당연했다.
“부기장님 잠깐 눈 좀 붙이시죠. I have control, I have radio(조정과 교신 채널 권한을 모두 가져갈 때 쓰는 콜 사인.)”
“아, 감사합니다. 그럼 딱 30분만. You have radio.”
그는 헤드폰을 내리고 조종석에 몸을 기대었다. 곧바로 눈이 감기더니 잠에 곯아떨어졌다.
상업용 여객기는 기본 두 명의 파일럿이 모두 깨어 있어야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는 싱글 파일럿이 허용된다. 졸면서 실수를 하느니 차라리 몇 분이라도 자고 일어나는 것이 현명하니까. 시간은 회사마다 방침이 달라 1시간에서 30분 정도로 정해져 있는데 우리 회사는 30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모두가 잠들었다. 한두 번씩 왔다 갔다 하던 객실 승무원들도 발길이 뜸해졌다. 대부분의 승객들도 창문을 내리고 잠에 빠지는 시간이다.
비행기가 3만 2천 피트 대류권 바로 위를 날고 있다. 기류가 거의 잡히지 않는 조용한 구간이라 나도 잠시 계기판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행은 중독과 같다. 내가 경험한 것들 중 가장 헤어 나오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희소성이라는 이유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누구나 볼 수 없는 풍경을 나 혼자 만끽한다는 사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맨눈으로는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태양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 비행기는 시간을 역행하고 있었으므로, 해가 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 * *
아침 8시 서울에서 출발해 12시간을 날았지만 피우미치노 공항에 착륙했을 때는 겨우 5시간이 지난 오후 1시였다. 활주로 끝에 다다른 A380의 옆으로 스텝카와 버스 두 대가 도착했다. 공항에 보딩 브리지가 충분하지 못해 탑승객들을 게이트로 실어 나르기 위함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점검이 끝난 세 명의 조종사들도 비행기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대기 중이던 버스에 몸을 싣고 터미널 입구로 향했다. 거기서 다시 모노레일을 타고 한참을 걸어서야 입국 수속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몇 대의 랜딩 시간이 겹쳤는지 다른 항공사 직원들까지 합세하여 승무원 전용 수속 카운터에 줄이 길게 늘어졌다.
“제가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어? 기장님 수속 안 하세요? 그래도 이쪽이 빠른데?”
“아, 참참. EU 회원국이시구나.”
“네, 그럼.”
나는 텅텅 빈 회원국 자동 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어차피 그들과 함께 나가야 할 이유도 없는데 굳이 시간이 더 걸리는 곳에서 동료애를 발휘할 마음은 없었다. 단 3초 만에 입국이 허가되고 밖으로 나온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잡음과 공항 안내 방송이 겹쳐 들린다.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 위를 터치하고 전화를 걸었다. 한재이는 연결음이 걸리기 무섭게 전화를 받았다.
-나왔어?
“응. 이제 터미널 밖으로 나가는 길이야.”
-앞에 버스 정류장 보여?
그의 목소리에 섞인 잡음이 익숙하게 겹쳐졌다. 눈앞에 서 있는 버스 엔진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도 들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그쪽 아니야.
반대편을 돌아보며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 냈다. 공항 외벽에 기대서서 나를 보고 있는 한재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빛이 반사되는 선글라스를 쓰고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는 그는, 우리가 자주 피우던 브랜드의 담배를 물고 있었다.
익숙한 냄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본 한재이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물고 있던 담배를 털며 연기를 뿜었다. 내가 아는, 지극히 불량한 한재이가 거기 서 있었다.
그는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는데 3일은 집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안쪽 호주머니에 멋대로 손을 집어넣어 담배를 꺼냈다. 한재이는 자동으로 라이터 불을 붙여 주었다. 끊었던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지 않았다. 벌써 그를 돌려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웬 넥타이야.”
“아, 이거.”
구겨진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그는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어제 퇴근이 늦어져서 밤새 밟았어. 11시간 안에 끊었지.”
“여기까지 운전해 왔다고?”
“응.”
“미쳤구나.”
“이제 알았어?”
그는 웃으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우리의 대화는 달라진 게 없었다.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 역시 변함이 없었다. 기내에서 가져온 생수 한 병을 나누어 마시고 한재이가 11시간을 운전해 가져왔다는 그의 차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포르쉐. 안에서는 여전히 같은 방향제 냄새가 났다.
“체크인 했어?”
“응, 열쇠만 받았어.”
한재이는 짐도 없었다. 퇴근 후 그대로 차에 몸을 싣고 시속 200킬로의 아우토반을 달려 스위스를 넘어 로마에 도착했다.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나보다 더한 강행군이다. 나는 그의 컨디션을 걱정했지만, 정작 본인은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냐는 투로 웃고 말았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로마를 두 번 정도 방문했었다. 매번 목표는 그럴듯하게 세웠다. 모니카 벨루치 같은 여자 둘을 꼬셔서 진탕 놀다 온다는 장대한 계획은 스페인 광장 계단에 앉아 둘이서 파니니를 먹으며 막을 내렸다.
심심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국적 맞히기를 하고, 시끄러운 러시아 관광객들과 싸우기도 했다. 소심하게 주변만 두리번거리던 일본인 부부에게 사진을 찍어 주고, 한국어로 대화하는 대학생들과 SNS 계정을 교환했었다. 돈이 없던 우리는 판테온 광장 분수대에 걸터앉아 주로 엉망진창으로 구워진 피자로 끼니를 때웠다.
“옛날 생각난다.”
운전을 하는 한재이가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추억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로마 시내로 들어선 그의 차는 어렵지 않게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 차를 맡기고 로비로 들어선 뒤, 나는 그에게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권했다.
“밤새웠다며. 나도 피곤하니까 좀 쉬고 보자.”
“그럴까, 그럼.”
그는 체크인을 하는 내 방 번호를 알아간 뒤 자신의 방으로 먼저 올라갔다. 그때쯤만 하더라도 한 시간 정도 후면 일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방으로 들어온 뒤 샤워를 마친 나는 침대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바보같이 눈을 뜬 다음에야 4시간이나 지나 버렸음을 알았다. 시간은 벌써 저녁 7시. 그 사이 한재이는 두 통의 부재중 전화와 한 통의 메시지를 남겼다.
[신경 쓰지 말고 쉬어]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10분 뒤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 7시였지만 밖은 아직 밝았다. 여분의 옷이 있었는지 편안한 차림으로 바뀐 한재이가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녁 먹자. 여기 레스토랑도 괜찮고, 아니면 근처에 다이닝 잘하는 데로 가도 되고. 차로는 금방 가.”
“음…… 별로 좋은 음식 먹고 싶지 않은데.”
내 말뜻을 알아들은 한재이는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 현지인들이 적당히 줄 서 있는 가게에서 피자를 사고 와인 상점에 들러 레드와인과 커다란 유리 잔 두 개를 구매했다.
나는 선글라스를 접어 셔츠에 걸었다. 관광객들로 북적되는 중심부를 지나 바티칸으로 가기 직전, 우리는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현지인들로 채워진 카페 바로 옆에 이끼가 낀 돌계단이 길게 올라가 있었다.
밑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에게 5유로를 주었다. 그 계단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와인 잔에 레드 와인을 쏟아 부었다. 조금 식어 적당히 먹기 좋아진 피자를 둘이서 나누었다. 건배. 서로의 유리잔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자세가 불편한지 한재이가 긴 다리를 한 칸 더 밑으로 내렸다. 그사이 나는 와인을 맛보았다. 싸고 좋은 품종으로 만들어져 산미가 괜찮았다. 우리는 적당히 가벼운 주제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재이는 오랜만에 직장 이야기를 했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나는 즐거웠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토마스는 페라리 본사까지 찾아가서 일주일을 거기서 일한 거야.”
“대단한 고객 서비스인데?”
“응. 근데 문제는 그날 피에로 페라리가 본사에 출근했어. 알지? 악명 높은 거.”
“들어 봤어.”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게 패션 센스 떨어지는 직원들, 회사에 정장 입고 오지 않는 직원들, 그리고 정장 재킷을 의자 뒤에 걸어 두는 직원들.”
“디테일 하네.”
“응. 페라리 본사에서 재킷은 반드시 옷걸이에 걸어야 하는데 불쌍한 독일인 토마스는 의자에 걸어 두고 일한 거야. 피에로가 발견하고 소리 질렀어. 당장 내 회사에서 나가라고.”
“계약 못 했겠네?”
“못 했지. 이탈리아인들은 그런 게 중요해. 뭐든 아름답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거야.”
“그래서 페라리 차가 그 모양이구나.”
“응. 아무 기능이 없고 매우 아름답지. 하하.”
그는 그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워 보였다. 우리는 벌써 두 잔째 와인을 비웠다. 피자는 다 먹었고 대충 뽑아 온 티슈 세 장으로 손을 닦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와 진짜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크리스한테서 전화 받았어.”
그는 대답 대신 무거운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마셨다. 괜찮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안 괜찮아.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은 것 같아.”
한재이는 시선을 정면에 두고 말을 이었다.
“들어서 알겠지만 기젤라가 결혼 다시 생각하자고 했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하면 할수록 나는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떤 이유가 되었건 기젤라가 그런 생각을 하고 힘들어했다는 건 다 내 잘못이니까.”
“그런 생각?”
“응. 말도 안 되는 생각.”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의 실체를 알고 있었기에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이번엔 내가 와인을 마셨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 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한재이는 그렇게 말하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더 물을 수 없었고 그도 그 이상을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둘이서 와인 한 병을 꼬박 비우고 나니 취기가 몰려왔다. 해도 저물어 하늘이 붉게 변했다. 나와는 달리 끄떡없어 보이는 한재이는 내게서 와인 잔을 가져가 종이봉투에 넣었다. 돌아가는 길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돌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소리만이 들려왔다.
호텔로 올라가기 전 담배를 한 대씩 물었다. 취기에 니코틴까지 들어가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나를 한재이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안 먹였는데. 너 이럴 때마다 죄책감 들더라.”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너는 좀, 나를 과잉보호하는 면이 있어.”
“그래?”
그의 눈빛이 흥미로움으로 바뀌었다. 자신에 대한 내 평가를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밥 먹는 거, 술 마시는 거. 반찬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잖아. 오버 좀 하지 마. 내가 술 취하는 건 체질이지 너 때문이 아니야.”
그는 내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말없이 뿜어 나온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지루한 싸움이다. 그와 술을 마시는 것이 이젠 즐겁지 않다. 혈관이 팽창하고 심장이 뛰면 나는 또다시 독사에 물린 카말라를 떠올린다.
“올라가자.”
나는 그를 설득해 호텔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다시 벽에 기대 섰다. 내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는지 한재이의 시선은 온통 나를 향해 쏟아졌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늘 술에 취하면 조용해지는 것은 나였는데 이번에는 그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혼자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려던 찰나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네모난 상자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여느 때처럼 양쪽 벽에 각각 기대어 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한재이의 시선이 붉게 달아오른 내 목 부근에 멈추어 있었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듯했지만 아까부터 그는 집요하게 나를 훑고 있었다. 제주도 호텔의 데자뷔가 펼쳐졌다.
엘리베이터가 6층에 멈춰 섰을 때 나는 단호하게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복도로 돌아서려는 무렵, 닫히려던 엘리베이터 문이 한재이의 손에 다시 열렸다.
“내 방에서 한잔 더 할래?”
그 역시 오래 망설이고 꺼낸 말투였다. 왠지 씁쓸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 자리에 선 채 웃었다. 나는 속으로 수천 번도 더 생각했던 말들을 결국엔 입 밖으로 뱉어 내는 한재이를 보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너는 충동적이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끌렸고 욕망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래. 내일 일요일이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술로 무너질 리 없는 그였지만 문제는 나였다. 나는 한재이의 집요한 시선에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많은 훈련을 받았지만, 오늘은 상당히 지독하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우리는 다시 두 개의 층수를 더 올라가 한재이가 머무는 방에 도달했다. 티끌 하나 없이 닦여진 와인 잔에 조금 더 비싼 종류의 와인이 부어졌다. 어떤 시인이 말했었지. 로마 귀족의 몰락은 과도한 와인 중독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함께 테라스로 나와 밤공기를 마셨다. 오래된 철제 테이블 위에는 와인병과 담뱃갑이 놓였다. 한재이는 3분의 1도 채워 넣지 않은 와인 잔을 내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꽉 채워진 자신의 잔을 들고 말했다.
“너는 조금만 마셔.”
잔을 부딪칠 새도 없이 그가 혼자 와인을 소비하고 있었다. 나는 잔을 돌리며 그런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가 어디까지 갈 셈인지 궁금해졌다.
“나는 왜 보자고 했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말했잖아. 우서진은 나한테 마약 같은 존재라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찾아간다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보니까 심신이 안정돼?”
“아니. 더 뛰어.”
그의 말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에 시간이 조금 부족했다.
“뭐, 이젠 너도 약발이 안 먹히나 보지.”
금세 농담조로 일관하는 그를 보며 호흡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무의미한 대화들만 수십 번째다. 한재이는 벌써 잔을 비웠다. 담배로 손을 뻗어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순간 어둠에 가려져 있던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문득 피차일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아까부터 집요하게 그를 훑고 있었다. 그의 행동, 손짓, 이제는 눈빛까지 좇으며 관음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한참 전에 들켰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너 그때 만난다고 했던 승무원 말이야.”
물고 있던 담배를 털어내며 그가 말했다.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기억을 떠올리는 데 한참이 걸렸다.
“만난 건 아니고. 그냥 한, 두 번 데이트한 거야.”
“응. 어쨌든.”
조금 취기가 가라앉는 것 같아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강렬한 타닌의 맛이 느껴졌다. 한재이의 취향과는 정반대의 품종이다. 그가 말 그대로 ‘취하기 위해’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잤어?”
순간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뭐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냐는 말투로 던지듯 말했지만, 얼굴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며 그는 벌써 두 번째 잔을 채우고 있었다.
“아니.”
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 노래를 불렀다. 적막이 흐르는 구시가지 광장에서 형편없는 오페라가 술에 취해 흘러나왔다. 한재이는 혼잣말로 ‘젠장’하고 읊조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발음의 독일어였다. 그도 반쯤은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지루한 싸움이다. 그와 술을 마시는 것이 이제는 즐겁지 않다. 나는 문득 우리가 바보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뭣도 아닌 기 싸움이다.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
느닷없는 나의 말에 한재이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독일어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거짓말?”
그의 독일어는 ‘R’ 발음이 좀 더 세다. 우리는 이 방법을 택했다. 모국어처럼 편했지만 조금은 모호하고 여지를 남길 수 있었다.
“나 왜 보자고 했어. 너 나한테 할 말 있잖아. 아니야?”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의자 뒤로 몸을 젖혔다. 할 말이 있어서는 아니라며, 그저 확인하고 싶어서라는 말이 돌아왔다. 하지만 목적어가 붙어 있지 않았다.
“무슨 확인을 해야 했는데?”
“아니. 그 전에 너부터 말해.”
“뭘.”
“너 한국 간 거, 내가 결혼한다고 해서였어?”
우리는 치열하게 우위 선점을 위해 다투고 있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이미 알고서 묻는 게 뻔해 보이는 상황에서 더는 아닌 척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담뱃갑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한재이에게 손이 붙들렸다.
“피우지 마. 더 이상은 나도 너 감당 안 돼.”
그러고는 내 앞에 있던 와인 잔도 가져가 버렸다. 그에게 붙들려진 손목이 불에 덴 듯 달아올랐다. 나는 열상이라도 입은 듯 손을 빼내고 테이블을 쥐었다. 밑으로 툭 떨어지는 그의 손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최선의 대답을 해 주었다.
“네 결혼에 영향 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
그가 웃었다. 물고 있던 담배를 끄며 세 번째 잔을 채운다.
“영향 주지 않아.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까.”
순간 나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을 잃었다.
한재이는 별다른 요동이 없었다. 나의 반응은 궁금하지 않다는 듯 와인을 붓는 데에 집중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파혼’이라는 말과 ‘이미’라는 해석에 미간을 좁혔다. 왜. 아니, 대체 언제.
“너한테 만나자고 하기 바로 전날. 그런 얘기 전화로 하긴 좀 그랬고…… 만나서 얘기하려 했는데 맨 정신에 얘기하기도 좀 그랬고.”
“뭐가 그랬는데.”
“이유가 너 때문이거든.”
나는 그 순간 양면의 감정을 느끼는 내가 저주스러웠다. 발끝에서부터 벅차오르는 희열과 더는 지혜롭게 처신하지 못할 것 같은 공포심을 느꼈다. 나에게 그따위 발언을 던지고선 끊임없이 목구멍으로 와인을 들이붓는 한재이를 보았다. 그의 입술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겠다는 바보 같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테라스를 떠났다.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에 물을 틀어 놓은 채 거울을 보았다. 밝은 곳으로 나오면 모든 게 끝장이다. 나의 눈빛은 이미 욕망으로 가득 찼다.
욕실을 나오며 방 조명을 어둡게 만들었다. 테라스에 홀로 남겨진 한재이는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거기 그대로 있으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는 멋대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재이의 뒤로 테라스 문이 닫히자 조금의 잡음도 허용되지 않는 적막이 흘렀다. 사방이 막힌 호텔 방 안에서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다.
“왜 들어와. 더 안 마셔?”
“나 술독에 빠트려 죽이려는 거야?”
“넌 아무리 마셔도 끄떡없잖아.”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슈미츠 형제는 방법이 틀렸어. 아무리 나라도 빨리 마시면 취해. 지금처럼.”
한재이가 스스로 취했다는 말은 들어 본 역사가 없었다. 물론 눈앞에서 보는 것도 처음이다. 겉은 멀쩡했고 속은 알 수 없었다. 그는 침대 옆 소파에 길게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사실은 진짜 피곤했어.”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내일 일찍 돌아가서 쉬어, 그럼.”
대답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 조금 더 기다렸지만 한재이의 감은 눈은 떠지지 않았다. 그대로 잠이 든 건가 싶어서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잠든 그를 지나쳐 문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팔이 잡혔다.
“어딜 또 도망가는 건데.”
그는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도망 좀 그만 가. 미치겠다, 진짜.”
“취했어?”
“그렇다고 이미 말했잖아.”
한재이는 그제야 눈을 떴다. 나를 올려다보며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나는 잡힌 팔을 뿌리치지 못하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 역시 점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끌어당겨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그의 위로 쓰러질 수 있는 거리였다.
“왜 혼자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어. 내가 너 때문에 파혼했다니까 죄책감 느껴?”
“그래야 해?”
“아니.”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기젤라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망상처럼 떠벌렸어. 그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으니까 살면서 갚으려고 했는데 마지막 조건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무슨 조건.”
“결혼을 다시 결심하기 위해 내게 요구한 조건. 너와는 이제 연락 안 했으면 좋겠다는 조건. 막시밀리안 슈미츠를 다시는 만나지 말아 달라고 한 조건. 나한테 불가능한 일이잖아.”
그는 잠깐의 뜸을 들인 후 계속 말을 이었다.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한테 너는 애초에 그런 대상이 될 수 없어. 왜 그럴까. 왜. 요 며칠 그걸 계속 생각했어. 나한테 너는 뭘까. 우리는 뭘까. 왜 모두가 나와 너를 비정상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이제는 그에게 잡힌 팔이 저려 올 정도였다. 놓으라고 하고 싶은데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려고 왔어. 덕분에 나는 지금 좀 제정신이 아니고.”
그제야 그가 팔을 놓아주었다. 나는 잡혔던 부위를 손으로 만지며 근육을 풀었다. 그런 나를 보며 한재이가 중얼거렸다.
“너 살 많이 빠졌다.”
그렇게 말하며 그의 눈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나를 훑었다.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에게 나는 확실하게 휘둘리고 있었다.
한재이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동요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제는 대놓고 내 입술에 시선이 꽂힌 그에게 잘 자라는 말 한마디 건네기가 어려웠다. 그대로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서진아.”
한재이가 나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나의 의지는 확고했다. 내일 아침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넬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저 문을 열고 나가야 했다. 등 뒤로 그가 체념한 듯 말했다.
“잘 자.”
문 닫히는 소리에 그의 목소리는 반쯤 묻혔다. 복도를 나와 두 층 아래로 내려간 뒤 내가 묵고 있는 방문을 열었다. 숨도 쉬지 않고 내려온 탓에 침대 위로 쓰러져 심호흡을 했다. 이마를 쓸며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혼자만의 상상은 자유로웠었다. 상대의 감정이 배제된 자위적인 욕정이 얼마나 취하기 쉬운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틀에 박힌 인간이었다. 파혼하고 찾아온 15년 지기 친구를 욕망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알았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불도 켜지 못한 방 안에서 1시간을 뒤척이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생수 한 병을 뜯어 쉼 없이 들이켰다.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새로운 메시지는 없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기 위해 가방을 뒤졌다. 라이터를 또 잃어버린 것 같아 유니폼을 확인하는 도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시간은 새벽 2시. 상대는 느긋하게 기다리다 다시 한번 두드렸다. 문을 열자 1시간 전 방에 있던 모습 그대로의 한재이가 복도에 서 있었다.
“왜. 무슨 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나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와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굳어진 몸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작정하고 달려드는 한재이의 힘에 밀려 벽에 등이 부딪혔다. 그의 혀가 입 속으로 들어와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다. 확인하고 싶어 하는 그의 물음에 나는 답했다. 마침내 두 혀가 감기고 격정이 시작되자 죽음의 쾌락이 몰려왔다.
우리는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재이에게서는 와인 향이 났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묵직한 레드 와인의 맛이 느껴져 다시 취할 것 같았다. 그의 타액이 섞이고 혀가 겹칠 때마다 혈관이 팽창되고 숨이 가빠졌다.
키스를 하는 높이가 완벽했다. 누구 하나 올려다볼 필요도 허리를 숙일 필요도 없었다. 코가 부딪히지 않게 한 번은 내가, 다음번엔 그가 고개를 틀며 입술을 삼키고 서로의 혀를 탐닉했다. 숨소리마저 완벽하게 좋았다.
더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는지 붙들고 있던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는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나의 허리를, 또 다른 손으로는 내 목을 감싸 안았다. 수천 번을 상상했던 한재이의 숨결이 내 코와 입술, 목구멍까지 침범해 왔다.
한재이의 몸이 점점 밀착되고 있었다. 빠져나간 혀가 다시 잡혀 끌려오고 입술이 삼켜졌다. 그는 끊임없이 나를 갈구하고 밀어붙였다. 호흡을 떨어트리기 위해 나는 그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다물어진 내 입을 다시 열고 싶어 하는 한재이의 얼굴에 각도를 맞추어 코끝을 세웠다.
그러자 자연스레 물고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키스가 중단되었다. 그가 아쉬운 듯 짧은 입맞춤을 했다. 그대로 얼굴을 맞댄 채 그에게 물었다.
“확인하고 싶었다는 게 이거였어?”
온통 내 입술에 정신이 팔렸던 그의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 특유의 눈매가 더 우아하게 보였다.
“아니, 확인할 필요는 없었어.”
목을 감고 있던 그의 손이 뺨을 타고 올라와 내 입술을 훑었다.
“몇 시간 전부터 결론은 이미 나 있었으니까. 다만.”
입술을 더듬던 한재이의 손가락이 어느새 내 입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네가 피하지 않았다는 게, 나를 좀 미치게 하네.”
손가락에 의해 벌어진 입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그가 혀를 넣어 키스했다. 저돌적이었지만 충분히 부드럽고 달콤하다. 수천 번도 더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한재이의 입술을 받으며 내 지루했던 싸움에 안녕을 고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혀를 섞고 뜨거운 숨을 내뿜었다. 서로의 그 무엇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우리는 키스하고, 다시 키스했다.
가까스로 호흡을 고르고 입술을 떼어냈을 때는 꽤 시간이 흘렀음을 둘 다 느꼈다. 나는 달콤한 독이 온몸에 퍼진 것처럼 잠이 몰려왔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이제 정신을 놓아도 된다는 안도감에서였을까. 쏟아지는 졸음에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한재이가 그대로 나를 안고 귓속말로 물었다.
“옆에 있어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들었다. 그에게서 벗어나 침대로 향했다. 테이블에 있던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침대 위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한재이가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나는 혼절하듯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죽어 버렸다고 해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잠이 쏟아졌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카만 밤이었다. 커튼은 쳐져 있었고 잠들 때 켜 두었던 조명들은 모두 꺼져 있었다. 침대 밑에서 무드 등 불빛만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새벽에 잠이 깨어 정신이 돌아오면 늘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있다. 오늘 나는 어느 나라에 와 있는지. 깨닫고 나면 다시 잠을 청할지를 결정한다. 나는 지금 한재이와 로마에 와 있고 어제 우리는 키스를 했다.
고개를 돌려 잠들어 있는 한재이를 보았다. 그는 24시간을 넘게 깨어 있었던 탓인지 쥐죽은 듯 잠이 들어 있었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스스로 팔베개를 하고 있었고 한쪽 손은 내 어깨를 잡고 있었다.
그는 잠귀가 매우 밝다. 조금만 뒤척이거나 소리를 내면 곧바로 눈을 뜰 것이 분명했다. 깨우고 싶지 않았기에 아주 천천히 내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을 밀었다. 그러나 역시 한재이는 곧바로 눈을 뜨고 그대로 내 손을 잡았다.
“왜 깼어. 더 자.”
오히려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몇 시쯤 된 건지 봐 줄래?”
그가 잡았던 손을 놓고 팔을 뻗어 휴대폰을 확인했다.
“5시 조금 안 됐어.”
꺼지기 직전 휴대폰 불빛에 반사된 그의 얼굴은 굉장히 지쳐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의 코와 뺨을 만졌다. 그는 내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피곤해 보여.”
한재이는 옅게 웃으며 긍정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며칠이었으니까.”
뺨을 타고 이마로 올라가 내가 좋아하는 그의 가지런한 눈썹을 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어려웠어?”
“응.”
그가 내 손을 겹치며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짧게 입 맞췄다.
“자칫하면 너를 잃을 수도 있었으니까 신중해야 했어.”
나는 그 대답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한재이 인생에서 신중하게 고민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아니까. 그가 그저 생겨나는 호기심에 ‘혹시 나 좋아해?’ 같은 성급한 질문 따위를 하지 않은 것이 무척 다행이었다.
“너는 언제부터였어?”
또한 이제는 그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해 줄 수 있게 되어 기뻤다.
“4월 24일 오후 3시쯤, 카를스루에 근처를 운전하다 받은 전화 통화에서 네가 결혼한다고 알렸을 때부터.”
한재이는 내 대답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구에서 최고로 멍청한 놈이 나였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문득 이게 현실인지 궁금해졌다. 그와 한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고, 잠에서 깨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낸 적도 한두 번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잠을 청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번 더 자고 일어났음에도 같은 상황이라면 그때는 정말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나와 닿았음을.
“잘 자.”
나는 일방적으로 눈을 감으며 그렇게 말했다. 한재이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수마가 나를 끌어당기기 전 마지막으로 들렸던 것은 그의 낮은 숨소리와 잘 자라는 인사. 그것이 수면제처럼 온몸에 퍼지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다음부터는 암전이었고, 나는 꽤 오랜 시간 꿈속에서 헤맸다.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한낮의 태양이 아니었다면 종일을 그렇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바깥에서 들리는 일요일의 소음과 호텔 복도의 발소리가 나를 깨웠다. 나는 옷을 입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한재이는 샤워를 하고 왔는지 머리가 젖어 있었다.
“커피?”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호텔 카페에서 사 온 듯한 일회용 컵을 내밀었다. 풍부한 원두 냄새가 침대 위로 퍼졌다. 나는 손을 뻗어 커피를 쥐고 몸을 일으켰다.
“너무 잤나……?”
“이제 1시쯤(1시쯤) 됐어. 내 방 체크아웃 하고 올라오는 길이야.”
그는 내일 출근을 위해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한다. 끝나려는 우리의 짧은 재회가 아쉬워 나는 마음이 조금 아팠다.
“잠깐 바람 쐬러 나갔다 올까?”
한재이가 옆에 앉으며 내게 말했다.
“너 지금 출발해도 새벽에 도착해.”
“한두 시간 더 있는다고 큰 차이는 없어. 우리 바다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못 갔잖아.”
그의 컨디션을 생각한다면 거절해야 함이 옳았지만, 나는 좀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보기로 했다. 로마 시내에서 차로 40분 정도만 나가면 해변이 있다. 그러면 정말 한두 시간 정도인데 뭐 괜찮지 않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샤워를 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한재이는 구겨진 슈트와 자동차 키를 들고 호텔 밖으로 나섰다. 태양 빛이 눈이 부셔 둘이 동시에 선글라스를 꺼냈다. 호텔 직원이 닫아 주는 문소리와 함께 포르쉐는 곧바로 산타마리넬라 해변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호텔을 보며 생각했다. 저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 밖에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기적 같다고.
운전하는 내내 한재이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각자 이 상황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어제 그와 나는 선을 하나 넘었고 그 덕에 조금은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전에 맺고 있던 관계가 얼마나 친근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을 때 느껴지는 긴장감, 손끝 하나 닿을 때도 신중하게 내 눈빛을 살피는 한재이의 행동에 설레었다. 이렇게 꽉 닫힌 공간에 둘만 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호흡이 빨라지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일요일, 산타마리넬라 해변에는 사람들이 적었다. 내리쬐는 태양에 소매와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우리는 맨발로 해변을 걸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고요한 지중해가 햇빛에 반짝였다. 비치 볼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한 무리가 우리 옆을 쏜살같이 뛰어 지나갔다.
“내일 비행은 또 새벽이야?”
“아니야. 12시라서 적당히 나가도 돼.”
“다행이네. 나 가고 나서 좀 더 쉬어. 다음은 어디로 가는데?”
“몰라. 기억이 안 나네. 단거리였던 것 같은데.”
나는 정말 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쿄에서 한재이의 전화를 받은 그 순간부터 내 신경은 온통 한 곳에만 쏠려 있었다. 마치 오늘 이후의 삶은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듯 비행 스케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이 왔고 우리는 선택을 했다. 자,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물음에 한재이가 조용히 답을 했다.
“내가 한국으로 들어갈게.”
나는 고개를 돌려 걷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재이는 그런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정면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이것저것 다 정리하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또다시 지구 최고 멍청이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 정리를 해 두어야 하잖아.”
결혼식 직전 파행으로 치달은 약혼과 부모님, 직장. 그는 독일에 해결해야 할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인생은 영화처럼 한 번에 장면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서, 우리는 이후의 삶을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한재이는 자신이 선택한 장면으로 삶을 전환하기 위해 지금부터 홀로 독일에서 싸워야 할 것이다.
“괜찮겠어?”
“음, 부모님이 좀 난리 날 것 같긴 한데…… 감당해야지, 뭐.”
그가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한재이 아버지의 성정을 알고 있는 나는 한숨이 나왔다.
“와서 직장도 없이 뭐 하고 살려고.”
“나 한국에 돈 많잖아. 사업이라도 해 보지 뭐.”
한재이와 사업이라니. 1년도 되지 않아 망할 게 뻔하다. 한국에서 변호사 노릇을 할 수는 없을 테니 그가 한국으로 아예 온다면 그야말로 커리어를 통째로 버리는 셈이 된다. 지금껏 공부하고 매달린 노력이 아까웠다.
“나 지금 항공사랑 계약직이야. 3년. 그 후엔 다시 어떻게 될지 몰라.”
“알아. 그래도 3년이나 떨어져 지낼 순 없잖아.”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한재이는 호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허리를 펴고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분명한 어투로 내게 말했다.
“책임지라는 말 안 할게. 저번처럼 쫓아내려고 하지만 마.”
진심인 것 같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말리는 것이 옳았지만 감정적으로는 그의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 친구이자 연인이 된 입장에서 취해야 할 선택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그도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므로 일단은 의사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너희 결혼식 맞춰서 2주 정도 휴가 냈었어, 혼자 여행 가려고. 어쨌든 독일로 들어오긴 할 거야. 엘자 할머니 생일 파티에 가야 하거든.”
“아, 여전히 정정하셔?”
“응. 아직 혼자 쿠키도 굽고 케이크도 만드셔.”
“그럼 빈넨덴 집으로 들어가야 하겠네.”
“그래야 해. 하루 정도는 집에서 자고 가라고 아우성이셔. 파티 전날 도착할 거니까 그날 잠깐 봐.”
“여행은 어디로 가는데?”
“말 안 해 줄 거야. 너 따라올까 봐 겁나.”
한재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너는 나를 잘 알아.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잘 알아서 괴롭기도 하다.
달콤하게 주어졌던 1시간이 끝이 나고 이제는 그를 정말 보내 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발바닥에 묻은 모래흙을 털어 내고 차로 돌아왔다.
“어차피 고속도로 타야 하니까 호텔까지 데려다줄게.”
“응.”
나는 마다하지 않고 안전벨트를 매었다.
해변에서 이야기를 나눈 덕분인지 우리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다시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평소와 비슷한 농담을 치며 웃었다. 북적대는 로마 시내로 들어와 다른 차들과 섞였다. 멀리서 내가 묵고 있는 호텔 건물이 보인다. 아쉬운 마음은 뒤로하고 덤덤하게 표정을 다잡았다.
호텔 로비에 천천히 들어선 포르쉐의 시동이 자동으로 꺼졌다. 조수석 문을 열어 주러 다가서는 호텔 직원을 한재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푹 쉬어. 아직 졸려 보여.”
“응. 운전 조심해. 중간에 쉬는 거 잊지 말고.”
“그래, 전화할게.”
“간다.”
“서진아.”
문을 열고 나서려던 나의 팔을 끌어당겨 한재이가 키스를 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갈구하듯 서로의 입술과 혀를 찾았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이 뭐야? 나 한재이.’
열다섯 살의 우리가 처음 이름을 나누고,
‘여기는 내 친구 우서진.’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옆에 서 있던 날들이.
우리는 서로에게 쳐 두었던 결계를 넘은 어제까지의 시간에 완전한 안녕을 고했다. 15년 우정에 안녕을 고했다. 길었던 내 짝사랑에 안녕을 고했다.
청춘, Auf Wiedersehen.
* * *
로마에서 돌아온 이후 3일간의 오프가 주어졌다. 그동안 한재이에게서 세 번의 전화를 받았다. 비행에 들어가기 직전, 입국 수속을 밟은 직후,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것들을 물었다. 잠은 잘 잤는지, 밥은 먹었는지, 피곤하지는 않은지. 평소에는 인사치레로 하는 그 물음들이었지만 이제는 실제로 궁금하고 걱정되었다.
거기서 잘 있는지, 나 없이 괜찮은지.
그렇게 변화된 관계에 조금씩 적응을 해 갈 무렵 알랭의 연락을 받았다. SNS를 통해 익숙한 인천공항의 풍경 사진과 ‘Seoul now’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일본에 올 일이 있다더니 정말 옆집 들르듯 찾아왔나 보다.
통화를 눌렀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바로 전화를 받는다.
-맥시, 난 이미 서울과 사랑에 빠졌어.
“어딘데.”
-여기 아채산, 아치산? (삐에르, 여기가 어디라고 했지? 아, 그래.) 여기 아차산 근처에 있는 호텔이야. 스태프들이랑 점심 먹고 있는데 음식이 예술이야. 게다가 시키지도 않은 메뉴들이 끊임없이 나와. 모두가 친절해. 네가 왜 한국으로 들어왔는지 알 것 같아.
나는 한정식집에 앉아 7첩 반상을 받고 있는 알랭을 떠올리며 웃었다.
“얼마나 머물 거야?”
-사흘 정도. 오늘이나 내일 시간 있으면 만나자. 비행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야, 없어. 오늘 저녁도 좋고 내일 종일도 괜찮아.”
-그럼 오늘 저녁엔 술을 마시고 내일 종일은 관광을 하자. 너 한국어 할 수 있잖아.
“한국어는 할 수 있지만 가지고 있는 지식이 너랑 비슷해.”
-완벽하네. 둘이서 헤매는 것도 재밌겠다.
그렇게 나는 전화를 끊고 ‘서울 관광’이라는 단어로 인터넷을 검색했다. 알랭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몇 개 마크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나는 이런 것들에 자신이 없다. 실패할 확률이 농후한 서울 관광을 뒤로하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그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알랭이 서울에 왔어. 어디에 데려가 줘야 할지 모르겠어.]
메시지를 보내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를 하는 내내 한재이를 생각했다. 술에 취해 흔들리던 그의 눈빛과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들었던 격정적인 키스. 우리는 수천 킬로를 떨어져 변함없이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 생각을 해 주길 바랐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까지의 우리에 대해 생각해 주었으면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나는 머리를 말리며 스피커로 연결한 채 전화를 걸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아니, 너는 오후겠네.
잠이 덜 깨 잔뜩 잠겨 있는 한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출근 준비 전이야?”
-응. 게으름 피우는 중인데 눈 뜨자마자 네 목소리 듣는 거 너무 좋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커다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는 한재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입에 걸렸다.
“메시지 봤어? 알랭이 서울에 있어.”
-응, 봤어. 그냥 한옥마을 같은데 데려다줘. 알랭은 그런 거 좋아해. 아니면 이태원 클럽 같은, 아니다. 그런 데는 가지 말고. 아무튼 걔가 또 이상한 짓 하자고 하면 받아 주지 말고 그냥 버려. 은근히 혼자서도 잘 놀아.
“알았어. 오늘은 술만 마실 거야. 내일 한옥 마을에 가 보지, 뭐.”
-많이 마시지 마.
“내가 알아서 해.”
-그래. 나 이제 일어나야겠다. 이따가 집에 들어오면 메시지 줘.
“알았어. 출근 준비해.”
-응. 끊어.
우리의 대화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이제는 용건 없이 전화하고 이유 없이 연락을 부탁할 수 있었다. 서른 살 인생 동안 나를 거쳐 갔던 사람들과의 연애를 생각해 보면 대개는 그러했던 것 같다. 그래도 전화를 끊으면 그걸로 끝이었는데. 지금은 아쉽고 여운이 남았다.
* * *
알랭을 만나러 그가 머물고 있다던 호텔로 향했다. 산 중턱에 위치한 덕분에 산책로가 따로 있어 휴양지로도 좋아 보였다. 술을 마시자는 그의 제안에 걸맞게 차는 두고 왔다. 택시 문을 열어 주는 호텔 직원에게 물어 바 입구에 도착했다.
“일행이 있는데, 알랭 쥐옹…… 아, 저기 있네요.”
바 매니저와 함께 예약자 명단을 훑어보다 창가 자리에서 나를 향해 손을 든 알랭을 발견했다. 그는 스트라이프 셔츠 차림에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뒤따라온 매니저가 테이블을 세팅해 주는 동안 우리는 반가운 포옹을 했다. 그는 실제로 뺨에 입술이 닿을 듯 키스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인사를 마쳤다.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다, 맥시.”
“왜 그런 이상한 걸 쓰고 있어.”
“아, 이거?”
뱅글뱅글 돌아가는 무늬가 그려진 안경을 벗은 알랭이 자신의 금발을 쓸어 올리며 웃었다.
“도쿄에 신기한 장난감이 많더라고. 귀엽지 않아? 쓰고 나가면 다 쳐다봐. 뭐 마실래? 내가 살 거야.”
“그래? 그럼 제일 비싼 거로.”
내 농담에 알랭이 웃으며 서버를 불렀다. 이 신사분에게 여기서 제일 비싼 칵테일을 만들어 달라고 한 뒤 자신은 버번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주문했다.
“난 왜 칵테일이야.”
“어떤 분께서 너 술 많이 먹이지 말라고 친히 메시지를 주셨거든.”
알랭이 내 앞에서 휴대폰을 흔들거렸다. 한재이가 연락을 한 모양이다.
“재이 결혼식 취소했다며. 그 자식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나는 그가 어디까지 이야기한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알랭은 혼자서 떠들었다. 통화를 한 것 같지는 않았고, 짧은 메시지 대화만으로 갖가지 가설을 세워 나에게 물었다.
“바람피운 거야?”
“아니야.”
“사실 애가 있었다거나?”
“어느 쪽이.”
“나야 모르지. 네가 좀 말리지 그랬어.”
“음. 그럴 상황은 아니었어. 아무튼 내가 얘기하긴 좀 그래.”
“뭐가 좀 그래. 재이가 너한테 다 들으라고 했어.”
나는 알랭을 쳐다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나한테서 다 들으라고 했다는 건 말을 하라는 의미인 건가. 그때 주문한 칵테일과 버번이 나왔다. 건포도를 입에 넣던 알랭이 눈을 흘기며 나를 쳐다보았다.
“뭐가 있구나.”
한재이의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알랭에게 숨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 나는 조금 간략하게 설명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게 된다거나 누구는 불쌍하게 되었다 하는 동정론이 나오지 않게끔,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알랭은 입을 쩍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거의 몇 분째 ‘진짜야?’라는 말만 반복 중이다. 나는 칵테일을 마셨다.
“그렇게 놀라워?”
“그래! 난 굉장히 놀라워. 굉장히! 그런 거면 왜 진작 사귀지 않았어?”
“그런 쪽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젠장. 지젤 베버랑 결혼한다고 했을 때보다 더 짜증 나는데, 이 자식?”
실패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설명을 하려 노력했어도 한재이는 욕을 먹고 있었다.
“우주 최고 멍청이인데, 이 자식?”
나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지구에서 한 단계 격상하여 우주 최고가 된 그를 위해 건배했다.
“나중에 만나면 좀 패 줘야겠어. 넌 그 자식 어디가 그렇게 좋아? 외모 얘기는 하지 마, 의미 없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나는 한재이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걸까. 앳된 사춘기 때부터 보아 왔던 얼굴에 새삼 반했을 리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좋아서 애를 태웠을까. 기젤라가 말했듯이 처음부터 나는 그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했었던 걸까. 그렇다면 첫눈에 반한 건가.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로켓 공학보다 복잡하게 느껴졌다.
“그냥 좋아. 편안해. 결혼한다는 얘기만 안 했어도 평생 친구로 살 수 있었을 것도 같아.”
“그건 말이 안 돼. 언제고 터졌을 문제였을 거야. 너희 이렇게 된 거 또 누가 알아?”
“아무도. 네가 처음이야.”
“영광이네.”
그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옆으로 다가와 난데없이 어깨동무를 했다. 순식간에 사진이 찍혔다. 자리로 돌아간 알랭은 휴대폰 키패드를 두드리며 웃었다. 나는 뭐 하냐고 물었다.
“재이 질투 좀 하라고 사진 보냈어.”
“그런 거 안 해. 게다가 너잖아.”
“나니까 더 짜증 날 거야. 재이를 놀려 먹는 건 몇 년이 지나도 재밌어.”
알랭은 버번 잔을 비우고 같은 것을 다시 주문했다. 그러고는 진동으로 울리고 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보란 듯이 흔들어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고 알랭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 그래. 친구. 자네 연인이 걱정돼서 전화한 건가?”
그는 뭔가 대단히 우위를 선점하기라도 한 듯 능청을 떨었다. 둘 다 여전히 한심하다.
한재이와 알랭은 프랑스어로 대화를 한다. 15살에 독일로 건너와 변호사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한재이는 언어적인 면에 있어서 천재성을 보였다. 파리에서 여름 학기를 신청했던 것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70%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이 유치하다. 나는 손을 들어 서버를 불러 맥주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알랭이 통화를 하는 바람에 심심해진 나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집어 들었다.
시력이 좋았던 탓에 안경이란 걸 써 본 적이 없었다. 슬쩍 걸쳐 보았는데 마침 바텐더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을 보니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았다. 안경을 내려놓았더니 알랭이 휴대폰을 내게 건넸다. 전화를 받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응.”
-대충 놀아 주고 집에 들어가. 알랭이 클럽 간다고 할 것 같아.
아침에 했던 통화와는 달리 톤이 한층 높아진 한재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가 보지, 뭐. 한국에선 가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한데.”
-재미없어. 목적의식이 뚜렷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야.
“가 본 것처럼 얘기하네?”
-이젠 흥미 없어. 차 가지고 왔어?
“아니, 택시. 지금 회사 아니야?”
-맞아, 들어가 봐야 해. 집에 가면 연락해.
“알았어.”
나는 알랭에게 휴대폰을 다시 건네주었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맥시 너 한국어 하는 게 정말 섹시하다. 진짜 한국 사람 같아.”
“나 한국 사람이야.”
“그래, 오늘 보니까 진짜 그렇다.”
그때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기다란 맥주잔에 담긴 헤페바이젠(독일의 효모 맥주)을 마시는 나를 보고 알랭이 웃었다.
“아닌데, 영락없는 독일 사람인데.”
이건 내가 생각해도 조금 그랬기에 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랭과의 술자리는 즐거웠다. 두 시간 정도를 더 떠들다 밖으로 나왔다. 정말 클럽 같이 가지 않을 거냐고 재차 묻는 그에게 흥미 없다고 다시 한번 거절했다. 우리는 호텔 앞에서 택시 두 대를 불렀다. 그는 그대로 이태원으로 향했고 나는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 몸을 구겨 넣었다.
취기는 기분이 좋을 정도로만 올라왔다. 택시에서는 라디오가 흘러나왔는데 시청자의 사연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손님이 라디오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좋았던지 기사분이 볼륨을 좀 더 키워 주었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지만, 단 한 점의 부정적인 생각도 들지 않는 밤이었다. 나는 미소를 입에 걸고 눈을 감았다. 조금은 즐겨도 될 것 같았다.
“여기 세워 드리면 되나요?”
“아, 조금 더 가서 편의점 앞에 부탁합니다.”
나는 담배가 떨어진 것을 깨닫고 택시를 편의점 앞에 세웠다.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린 시각은 밤 11시쯤. 문을 열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이제는 얼굴이 익숙해진 점원에게 늘 같은 것으로 부탁을 했다. 생각해 보니 로마에서 라이터를 잃어버렸으니 그것도 새로 사야 했다.
“라이터도 하나 부탁합니다.”
계산을 위해 방금 택시 요금을 지불했던 카드를 다시 지갑에서 꺼냈다. 그러다 실수로 다른 카드를 떨어트려 버렸다. 허리를 숙여 줍고 있는 와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담배 같은 거로 하나 더요, 그리고 이걸로 같이 계산해 주세요.”
아. 가끔 그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있다. 지난 일본 비행 이후로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기장님은 라이터를 계속 잃어버리시네요.”
회사 유니폼을 입은 조민우 부기장이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비행 있으셨습니까?”
그는 고단해 보였다. 늘 왁스로 올려놓던 앞머리가 군데군데 빠져나와 있었다.
“네. 스탠바이였는데 운 나쁘게 제주도 다녀왔어요.”
“국내선을요?”
“네. 제가 운이 좀 많이 나빠서요.”
그는 멋대로 계산한 내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나온 뒤, 작게 마련된 재떨이를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자연스럽게 그와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제주도 랜딩이 그렇게 힘들다면서요. 소문만 들었습니다.”
“섬이니까요. 어떤 선배님은 고 어라운드 3번 하셨다가 결국 연료 떨어져서 비상 착륙까지 하셨대요. 물론 좀 옛날얘기지만.”
그와 다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주제를 찾아 끊임없이 질문했다. 다행히 조민우 부기장은 나보다 말재주가 수백 배는 좋았기에, 그의 대답은 항상 훌륭하다. 시도가 괜찮았던지 그는 계속해서 비행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회사에서 주문해 두었던 A350 두 대가 더 입고되었다고 했다. 장거리 비행이 본격화되면서 북미 직항이 늘어나고 있었다. 새로 입고된 기체 역시 모두 여기에 투입될 거라고 했다.
조민우 부기장은 아는 사람이 많아서 회사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쓸데없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좋은 동료가 되었을 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했다. 내가 먼저 성적 취향을 티 낸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결국 가드 주파수에서 한번 불러 봤는데 그제야 응답을 하더라고요.”
“다행이네요. 그대로 로스 커뮤니케이션(Loss Communication. 관제탑이 항공기와 교신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내린 상태) 났으면 징계감인데.”
“그러니까요. 제가 다 식은땀이 나더라고요.”
그는 담배 연기를 뿜으며 오늘 있었던 해프닝을 털어놓았다. 회사 비행기 한 대가 관제탑과 연락이 끊겨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었나 보다.
비행기가 관제탑의 부름에 여러 차례 응답이 없으면 로스 커뮤니케이션 상황으로 인식된다. 그렇게 되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는데, 테러 방지를 위해 곧바로 전투기가 뜨기 때문이다. 그 후 비행기의 운명은 두 갈래로 나뉜다. 전투기의 경고에 응답하여 무사히 유도 착륙을 하거나, 운이 나쁘면 그대로 격추당한다.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기 위해 관제사들은 가까이 있는 같은 회사 비행기에 교신을 시도한다. 대부분의 민항사는 조종석에 회사 내 비상 연락 수단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동료 조종사가 관제탑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대부분은 이 정도 단계에서 해결이 된다.
“아무튼 장거리도 아니고 국내선인데 그렇게 길게 자리를 비우다니 전 좀 어이없었네요. 확 그냥 모른 척하려다가. 하하.”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며 웃었다. 잠시 딴생각에 사로잡혔다.
도쿄에서 한재이의 전화를 받고 머릿속이 복잡해졌었다. 돌아오는 비행 내내 조민우 부기장의 물음에 단답형으로 일관했고 제대로 그를 쳐다보며 말 상대를 해 주지 않았다. 아마 그는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두 손 들고 항복까지 선언했는데, 그런 나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장님 곧 휴가시죠?”
“네. 다음 주부터 2주간.”
“독일에도 다녀오셔야겠네요? 친구분 결혼식 있으시니까.”
그는 웃으며 재를 털었다. 순간적으로 그에게 이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인생이었지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결혼은 취소됐습니다.”
재를 털고 있던 손이 멈칫하더니 아예 담배를 비벼 꺼 버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예의 그 묘한 미소를 지으며 새 담배를 물었다.
“그것참…… 마음이 아프네요.”
그는 중의적인 표현을 늘어놓으며 불을 붙였다. 답답한지 유니폼 맨 위 단추 하나를 풀었다. 한동안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자조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제가 그랬잖아요. 열에 둘은 파혼한다고. 잘 위로해 주세요. 파혼하면 괜히 밤에 더 외롭거든요.”
“경험담이십니까?”
“네. 퇴근하고 나면 더 외롭고. 괜히 더 먼 편의점에 가서 담배를 사게 되고.”
마지막 말은 나를 쳐다보며 이야기했기에, 그 말의 저의를 파악해야 했다.
그의 아파트 밑에도 슈퍼가 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담배를 산다는 표현이 불편했다. 조민우 부기장과 나의 거리는 정해져 있다. 멈춘다면 일부러 멀어지지는 않겠지만, 다가오면 나는 바로 물러설 것이다.
“부기장님, 실례일 수도 있는데 그냥 묻겠습니다.”
나는 다 타 버린 재를 털어 담배를 끄고 호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더 피우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할 말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저한테 관심 있으십니까?”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보조개가 잡힌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눈빛은 일그러져 있었다.
“갑자기 물으시니까 곤란하네. 그렇다고 하면 기피 대상 신청하실 것 같고, 아니라고 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고…… 관심 있다고 하면 어쩌실 건데요?”
“상관없습니다. 저는 아니니까요.”
나는 그에게 거기 그대로 있으라고 경고했다. 그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전혀 상관없었다. 내가 그것을 매번 확인하려 노력하고, 그는 교묘히 감추었다 다시 드러내는, 이런 일련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조민우 부기장과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관심을 샀다는 우쭐함에 비싼 척 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빨리 포기하기를 바랐다.
그는 벌써 세 번째 담배를 물고 있었다. 갑자기 말주변이 없어지기라도 한 듯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하려다 말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기껏 튀어나온 말은 혼잣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고백도 안 했는데, 거절을 굉장히 섹시하게 하시네.”
대꾸를 할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부디 오늘이 그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마지막 날이 되기를 바랐다. 나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 또 그 사람과 잘되고 있다는 식의 사연을 늘어놓는 일은 제발 없었으면 했다.
편의점에서 나온 손님 한 명이 담뱃갑을 뜯으며 다가왔다. 여기서 담배를 피울 모양이었다. 이제 반강제적으로 대화는 끝이 날 것 같았다.
“늦었는데, 그만 가 보세요.”
마침내 고개를 들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은 30분 전에 만난 회사 동료의 것이었다.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난 후 뒤를 돌아봤을 때, 그는 네 번째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방금 마음을 거부당한 남자의 것이었다.
설령 내가 한재이와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조민우 부기장과 연애를 할 마음이 없었다. 부기장과 나의 인연을 이렇게 독립적으로 생각해 주는 것이, 내가 그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오늘은 밤부엉이가 그를 위해 울어 주었으면 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한재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짧고 간결하게.
[전화 줘]
목소리를 듣고 싶었기에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씻고 침대에 눕기까지,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침대에서 1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지난번 서점에서 구입했던 폴란드 삼 형제에 관한 책이다. 두 번째 챕터를 끝내고 나서도 휴대폰은 조용했다. 아직 독일은 오후 5시. 퇴근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마지막까지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을 때는 클럽에서 놀고 있는 알랭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의 여성은 매우 미인이었기에 내일 아침 일찍 만날 필요가 없어질 것 같았다. 너무 알랭답다는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눈을 감으며 나는 허무하게 웃었다. 누가 누굴 위로한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모두가 외로운 밤이었다.
체감상으로는 1분, 실제로는 3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진동이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휴대폰 액정 불빛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한재이가 말을 했다.
-망할 회의가 지금 끝났어. 메시지 확인하고 곧바로 뛰쳐나온 거야. 자고 있었으면 미안한데 잠깐 목소리만 들려줘.
바깥 소음이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웅성대는 행인들 소리, 뚜벅뚜벅 걸어가는 발소리. 슈트를 입은 채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곧 고속도로가 막힐 시간이다.
“이제 퇴근해?”
-응. 알랭이 괴롭히지 않았어?
“안 괴롭혔어. 결국엔 클럽 가더라. 네 말대로 혼자서도 잘 놀던데.”
-너는 바로 집에 오고?
“응. 택시 타고 바로 왔어. 편의점에서 담배 사고 한 대 피우고.”
-너 혼자 피우는 거 싫어하잖아.
그 말에 나는 몇 초간 망설였다. 누구를 만났는지 이야기했다. 구체적인 대화 내용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한재이의 반응은 격렬했다.
-나 그 사람 정말 싫어. 너를 대하는 태도가 불량해.
“직장 동료야. 네가 싫고 말고 할 게 없어.”
나는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만났다는 말만 해도 이런 반응인데,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댄 사정을 이야기하면 당장이라도 한국행 티켓을 끊을 성격이다.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나 역시 그와 기젤라가 어떻게 결혼을 정리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좋을 것이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있다고 나는 믿었다.
-직장 동료가 뭐 그래. 내가 한국에선 말 안 하고 참고 있었는데, 이제 안 그래도 되잖아. 내가 너 욕심 내도 되는 거 아니야? 나 오늘 사표 냈어. 이제 너랑 친구 못 해.
차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가방을 조수석에 던지는 소리,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린다.
-듣고 있어? 우리 그만 절교하자니까.
한재이는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데 나는 웃음이 났다. 그에게서 조민우 부기장이 재수 없는 이유에 대해 열띤 설명을 들었다. 그 이야기는 차가 도심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들어설 때까지 이어졌다. 한재이를 달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아무튼 친하게 지내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있는데 문제는 부모님이야. 하루가 멀다고 전화해서 설득 중이셔. 단순히 기젤라와 싸웠다고 생각하나 봐. 네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 중이야.
“그건 너무 충격적이지 않으실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해를 바라는 것도 불효야.”
-걱정 마. 나는 이미 아버지한테 후레자식 소리를 듣고 있어.
한재이는 내가 가지지 않은 것들을 몇 개 가지고 있다. 자식 된 도리와 부모가 가지는 기대감 같은 것들이다.
나와 슈미츠 부부의 관계는 조금 더 현실적이다. 우리 사이에는 키워 준 은혜에 대한 보답 같은 것들이 남았다. 빚을 진 쪽은 나였으니 그들이 원할 때 가족 구성원이 되어 주어야 했다. 엘자 할머니의 생일 파티 참석 같은 것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너 화요일 몇 시 비행기로 온다고 했지?
“점심때쯤 떨어질 거야.”
-우리 집에 가서 기다릴래? 아파트 열쇠 가지고 있잖아.
“알았어.”
-겨우 하루밖에 못 보네.
그가 차선을 바꾸는 듯 블링커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과속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다 참았다. 말을 안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조금 낯 뜨거운 그의 표현에 나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15년을 봐 놓고서 잘도 그런 말을 한다고 괜한 타박을 주었다.
-말했잖아. 나는 이제 네 친구 아니라고. 여기서 버티는 하루하루가 고역이야. 정리가 다 뭐야, 예전 같았으면 다 팽개치고 벌써 너 데리고 어디론가 도망갔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기에, 나는 웃음이 났다.
-만약 내가 아니라 네가 결혼한다고 했었으면 진짜 그 사달이 났을 거야. 이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 손 들고 나오라 하면 당당하게 나타나서 너를 훔쳐 달아나는 거지.
“신부가 아니라 신랑을?”
-응. 21세기잖아.
“어디로 도망갈 건데.”
-글쎄, 어디 프라이빗 공항으로 가서 경비행기 한 대 훔쳐서 달아나지 뭐. 그럼 연료가 떨어져서 불시착할 때까지 비행하는 거야, 너 늘 해 보고 싶어 했잖아. 장소는 사막 어디쯤이 좋겠다. 그런 다음엔 죽을 때까지 너랑 키스하려고.
한재이의 상상력에 갈채를 보냈다. 나도 모르게 그가 말한 장면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연료가 고갈된 프롭기 안에서 자유롭게 활강하는 상상을 했다. 바람을 타고 추락하는 비행기가 사하라의 어디쯤 불시착했다. 찢어진 날개 하나는 모래바람에 파묻히고 우리는 남은 물을 나누어 마셨다.
죽는다면 반드시 옆에 있어 줬으면 하는 것 두 가지가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그 장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한재이는 조금 더 이야기를 이었다. 그러나 나는 버티지 못했다. 사막보다 더 뜨거운 키스를 상상하며 휴대폰을 든 채 잠이 들었다.
‘잘 자.’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장소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 한마디는, 너무 달콤해서 영원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 * *
다음날 일어나 휴대폰을 확인하니 알랭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제 만난 여성분과의 헤어짐이 아쉬웠던지 오후쯤에 보자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나는 웃으며 아닌 척 메시지를 남겼다.
[Traître(배신자)]
아침은 거른 채 운동을 하고 들어왔다. 뮤즐리를 끓여 블루베리를 넣어 먹었다. 당분간 카페인 섭취를 줄이기 위해 커피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담배는 끊을 수 없으니 가능한 줄이기로 하고 마트에서 견과류를 잔뜩 사 왔다.
좀 더 건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문득 아침에 눈을 뜬 후 든 생각이었다. 로마를 다녀온 뒤부터 내가 부쩍 들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겠다.
점심때를 조금 지나 집을 나섰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엉뚱한 알랭이 지하철을 타 보자고 제안했다. 나 역시 제대로 타 본 기억이 없었기에 예행 연습 삼아 약속 장소까지 지하철로 이동해 보기로 했다. 첫인상은 넓고 깨끗하다는 점, 그리고 문이 상당히 빨리 닫혀 놀랐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지하철은 굉음을 내며 빠르게 달렸다. 대부분은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고 자리가 있는데도 앉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알랭을 만난 곳은 서울에서 가장 사람들이 북적댄다는 곳이었다. 그 명성에 맞게 지하철역에서 밖으로 올라가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이제는 어울리기 조금 어색해진 나이대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 가뜩이나 더운데.”
나는 그와 대충 포옹하며 인사를 마쳤다.
“수지가 여기서 갈아타면 된다고 알려 줬거든.”
“그게 누군데.”
“어제 만난 귀염둥이.”
나는 그가 보내 준 사진의 여성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인파 속에 섞여 커다란 쇼핑몰 안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 주었는데 아무도 바통을 이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줄지어 열댓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나는 당황한 채 호텔 도어맨처럼 문을 붙잡고 1분 정도를 서 있었다. 옆에서 알랭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잠시 후 한 남성이 유모차를 끌고 들어오는 여성을 위해 내가 잡던 문의 바통을 이어 주었다. 마침내 도어맨에서 해방된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보아하니 그냥 놓아 버리면 되는 거였나 보다. 우리는 쇼핑몰을 통과해 다른 지하철역으로 이동했다.
어느 방향의 열차를 타야 하는지 몰라 노선표를 보며 잠시 서 있었다.
“어디 갈라 하시는데?”
갑작스레 옆으로 다가오신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역무원은 아니고 그냥 도와주려는 분인 것 같았다. 목적지를 말해 주자 ‘왼쪽’ 하며 방향을 가리켰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승강장으로 내려왔다. 알랭의 금발 덕에 쳐다보는 시선이 늘어났다.
“도쿄에 있다 와서 그런가, 한국 사람들은 키가 다 큰 편이구나. 너는 말할 것도 없고.”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이가 너보다 더 큰가?”
“음…… 3~4센티 더 클 거야.”
“맞아. 나랑 비슷했지.”
곧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가능한 한 빨리 타는 편이 좋을 거라고 그에게 경고했다. 열차 안에 들어서자마자 닫히는 문을 보곤 내 말의 의미를 실감하는 듯 알랭이 웃으며 말했다.
“스릴 있는데?”
우리는 건너편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왜 지하철을 타자고 했어?”
나는 알랭에게 물었다.
“재밌거든. 그 나라 사람들의 성격을 엿볼 수 있어. 도쿄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눈치를 봐. 휴대폰만 내내 쳐다보지만 시끄러울까 봐 통화는 못 해.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사람이 들어찬 공간에 열차 소음만 들리는 거야. 진짜 웃겼어.”
“한국은 어때?”
“일단 눈이 즐겁다. 귀염둥이들이 많아서. 물론 네가 평균 점수를 올려놓았다는 건 부정 안 해. 혹시 그 코, 수술한 건 아니지?”
“무슨 헛소리야.”
“아무튼 난 좋아. 여기 자주 올 거 같아. 근데 너희 이대로 계속 장거리 연애야? 그래 가지고 제대로 연애가 되겠어?”
“재이가 한국으로 들어올 거야.”
“변호사 때려치우고?”
사실 나도 그의 구체적인 계획을 잘 모르고 있었기에 ‘아마도’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미쳤네.”
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미쳤네, 아주.”
마지막 말에는 반응하지 못하고 모른 척 노선표를 쳐다보며 시선을 돌렸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내려야 하네. 이따위 말을 하며 호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 * *
토요일 오전. 나는 휴가 전 마지막 비행인 상하이로 가는 A350의 조종간을 잡았다. 당일 턴 어라운드로 돌아오는 스케줄이었는데, 다음 날부터 휴가가 시작된다. 나는 그날 바로 독일로 들어가는 일정의 티켓을 끊어 두었다.
한재이의 결혼식은 취소되었지만, 부수적인 이유로 스케줄은 여전히 빽빽하게 채워진 채였다. 생일 파티 당일은 빈넨덴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곧바로 아이슬란드로 가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와 취소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전부터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으니까.
“오토 파일럿 셋.”
기체가 안정권에 접어들자 부기장이 자동 운항 스위치를 누르고 기지개를 켰다.
그는 기장 승급 시험을 앞둔 베테랑 조종사였다. 괜찮으면 시험에 나올 만한 상황 설정을 제시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예행 연습 같은 것이다. 나는 미니멈 퓨얼(minimum fuel. 연료 부족)을 선언한 상태에서 입력된 A공항까지 아슬아슬하게 갈 것인지, 항로를 틀어 계획을 새로 세우고 더 가까운 B공항을 찾을 것인지 물었다. 부기장은 전자를 선호했다. 사실 정답은 없다.
“A공항은 부기장님에게 익숙한 공항이지만 계기 접근이 안 된다고 가정해 보죠. 게다가 안개가 끼는 곳이라 빌로 미니멈(below minimum. 활주로가 50피트 상공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우)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B공항은 ILS 접근이 가능한가요?”
“등급은 열악하지만 가능하다고 해 보죠.”
“음…… B공항에서 실패할 시 A공항까지 회항에 필요한 연료는요?”
“5톤 정도 필요하다고 가정해 보죠. 부기장님이 가지신 연료는 10톤. A공항까지는 30분의 비행이 소요됩니다.”
“하…… 랜딩 실패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A공항으로 회항한다고 했을 때, 겨우 도착은 하겠네요.”
“네. 다만 더 이상의 고 어라운드는 할 수 없을 만큼 연료는 바닥나겠죠.”
“전 그럼 B공항으로 가겠습니다.”
“이유는요?”
“사고 확률이 낮아 보여서요. 확률상 따지면 B공항에서 ILS 실패하고 회항해서 A공항에서도 수동 랜딩까지 연속 실패할 확률이 극히 낮으니까. 운항 계획을 새로 세울 시간적 여유만 가능하다면 B공항으로 가는 게 더 안전하겠어요.”
나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좋네요. 저도 동의합니다.”
곧 있을 기장 승급 시험에 어떤 상황이 문제로 제시될지는 모르겠지만 부기장의 감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사고는 확률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저러한 대답은 항상 환영받는다. 내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부기장이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콕핏 바깥 카메라에 객실 사무장의 얼굴이 보였다. 문을 열어 주었다.
“응급 환자 발생해서요. 지금 탑승객 중 의사 면허 가지신 분이 계셔서 봐 주고 계신 데 어떡하죠? 판단이 안 서시는 거 같은데.”
“아이고, 저런.”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십니까?”
“좀 그래 보여요.”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사무장의 표정을 보니 단순한 응급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같이 가 보죠.”
나는 안전벨트를 해제하고 조종석에서 일어났다.
2인 파일럿 체제에서 한 명이 콕핏을 비우는 것은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다. 독일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만, 한국 민항사들은 화장실 가는 정도의 시간은 허락해 주고 있었다. 나는 부기장을 믿고 컨트롤 권한을 넘겼다.
사무장을 따라 비즈니스석을 통과해 이코노미석으로 향했다. 통로에 누워 있는 한 중년 남성이 보였고 젊은 여성 한 분이 그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곧바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저산소증 쇼크가 오신 거 같은데. 일단 응급 처리로 호흡은 다시 돌아왔어요.”
“보호자분이 안 계십니까?”
나는 사무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분 혼자 타셨어요.”
통로 쪽에 있던 젊은 남성 탑승객이 한마디 거들었다. 쓰러졌다던 중년 남성은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일으켜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몇 명이 힘을 합쳐 그를 부축하여 비어 있던 비즈니스석에 눕혔다. 호흡은 괜찮아진 듯 보였지만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남성 승객이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는 거냐며 조심스레 물었다. 출장을 가는 듯 트레이에는 노트북과 서류가 올려져 있었다. 탑승객들 모두가 이쪽을 쳐다보며 눈치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젊은 의사의 이름과 전공을 물었다. 그녀는 마취과 전공의였고 상하이 학회를 가는 중이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회항을 결정해야 하는 분위기를 느꼈는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호흡은 돌아오셨는데 계속 말씀을 못 하시는 게 좀 불안한데…….”
“괜찮습니다. 의사로서의 소견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최종 결정은 제가 합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결심한 듯 직업적인 소명을 다했다.
“잘못하면 뇌 손상이 올 수도 있어요. 가능한 한 빨리 병원으로 옮기시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곧바로 사무장을 데리고 콕핏으로 돌아갔다. 부기장이 긴장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김포공항으로 회항하겠습니다. 부기장님, 타워에 바로 메디컬 이머전시(Medical Emergency. 의료 응급 상황) 선언하시죠. 사무장님 회항 안내 방송 부탁드립니다. 컴플레인 들어오면 직접 처리하지 마시고 저한테 바로 보고해 주세요.”
“네.”
우리 비행기는 곧바로 항로를 바꾸고 김포공항으로 회항을 시도했다. 착륙을 위한 기체 무게를 맞추기 위해 지금부터 20톤의 연료를 버려야 한다. 회사로서는 대략 1,500만 원 정도의 손해가 될 것이다. 회항과 연료, 이어지게 될 연착. 그 모든 것을 금전적으로 따지게 되면 손실은 더 불어난다.
-Tower, Coreana 441 heavy. Medical emergency. Request handling approach. (타워. 코리아나 에어웨이 441편, 응급 상황 발생으로 긴급 접근 요청합니다.)
-Coreana 441 heavy. Gimpo approach roger. Altimeter 30. 25. Runway 22 available(코리아나 에어웨이 441편. 김포 접근 알겠습니다. 고도계에 30. 25를 적용하세요. 22번 활주로 사용 가능합니다.) Is passenger…… 그, 많이 위급하세요?
교신 채널에서 친근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가끔은 관제사들도 위급 상황의 국적기를 대할 때는 모국어가 먼저 튀어나온다. 라디오 주파수 너머에 있는 것이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저산소증이시고 승객분이 말씀을 못 하세요. 곧바로 응급 차량 준비 좀 해 주세요. Coreana 441 heavy.
-Coreana 441 heavy. Roger that(알겠습니다.)
탱크를 열어 20톤의 연료를 조금씩 공중에 쏟아 부었다. 중간에 휘발되어 땅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부기장이 수정된 항로를 입력하고 오토파일럿을 해제했다. 나는 조종간을 잡았고 비행기는 곧바로 머리를 틀어 김포 공항으로 회항했다.
우리는 20분 후 무사히 착륙에 성공했다. 다행히 210명의 승객 중 누구 하나 컴플레인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Coreana 441 heavy. Emergency vehicles are responding(코리아나 에어웨이 441편. 응급 차량이 출동했습니다.)
활주로 끝에 멈추어 선 채 파킹 레버를 걸었다. 멀리서 스텝카와 구급차가 달려왔다. 구급요원들이 기내로 들어와 곧바로 환자를 데리고 나갔다. 부기장과 나는 조종석 창문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부디 시간 내에 도착한 것이길 빌었다.
기장 승급 시험을 치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실제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한 훈련을 위해서이다. 안전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조종사는 항상 더 적은 숫자의 확률에 기대야 한다. 다만 1%의 확률이라도 절대 운에 기댈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오늘 턴 어라운드로 못 돌아오겠죠?”
“그렇겠네요.”
급한 불을 끄고 나니 현실적인 문제가 닥쳐왔다. 환자의 짐을 찾아 빼내고 연료를 채운 뒤 다시 이륙 순서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비행 스케줄과 함께 개인 스케줄도 꼬였다. 하루 일찍 독일로 들어가 한재이를 만나는 시간이 없어질 듯싶었다. 기껏해야 그의 회사로 찾아가 점심 한 끼 정도 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택시 하시죠.”
부기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가 수천만 원 손실 본 것보다도 그를 만나는 시간이 줄었다는 사실에 더 속이 쓰려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트러스트 레버를 밀었다.
결국, 독일로 가는 티켓을 하루 뒤로 조정해야 했다.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회사로부터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는 크리스가 마중을 나오기로 했는데, 생일 파티 때문에 아예 하루 휴가를 낸 모양이었다. 평일에도 공항에는 사람이 많았다. 우르르 쏟아지는 입국 행렬 속에서도 크리스는 금방 나를 찾아 손을 흔들었다. 형제는 반갑게 포옹했다.
“너 얼굴이 좀 좋아졌다.”
그는 내 손에 들린 캐리어를 멋대로 잡아끌고 성큼성큼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갔다. 지하로 연결된 통로를 지나 주차장 앞에서 파킹 티켓을 계산했다. 그의 차를 타고 내리 달리는 아우토반에서, 여덟 살의 시작을 떠올렸다.
내가 입양된 곳은 독일의 남쪽, 슈투트가르트에서 조금 떨어진 빈넨덴이라는 도시였다. 사실 도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빈약한 인프라에 트램이 다니는 길도 한정되어 있었다. 포장된 도로보다 들판과 언덕이 많았고, 사람들은 근처 공장이나 슈투트가르트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늘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었다.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학교에서 돌아오면 친구가 없어 뒷산을 혼자 헤매고 다녔다. 주로 나무에 올라가거나 벌레를 잡았다. 그러다 한 번은 크게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는 크리스가 늘 따라다녔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중단하고 나니 독일어가 빨리 늘었다.
“여행은 어디로 가는 건데? 결혼식도 취소된 마당에 그냥 집에 좀 있지 그래.”
“그러게. 근데 지금 와서 취소하자니 좀 그래.”
“그, 혹시 말이야. 재이 결혼 그렇게 된 거…… 그거 너 때문이야?”
크리스는 운전하랴 내 표정을 살피랴, 고개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움직였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눈치를 보고 있었나 보다.
“음……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러니까 너 때문에 결혼을 아예 취소한 거라는 거지? 너희 그럼 사귀고 있는 거야?”
나는 조금 민망해진 탓에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독일은 7월의 한가운데 와 있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은 탓에 건조해진 잎들이 말라 가고 있었다. 포도나무가 줄지어 심어진 언덕과 거위나 말을 키우는 농장들이 나타났다. 백 년 전에도 같은 풍경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른다. 변화는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완전히 바뀌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맥시, 대답 안 할 거야?”
크리스는 기어이 내 입으로 듣고 싶은 듯했다.
“그래, 그렇게 됐어. 우리, 사귀고 있는 거 같아.”
그제야 만족한 듯 그가 내 어깨를 잡으며 흔들었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내가 좋으면 자긴 무조건 좋다며 기뻐했다. 나도 ‘무조건’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힌다. 크리스도 내게 그런 사람이었기에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두 명으로 늘어난 셈이다. 아니, 세 명인가. 기젤라에게 따로 연락을 할 수는 없었으니 그녀가 부디 괜찮기를 바랐다. 그녀가 나를 원망할 권리도, 내가 그녀를 동정할 이유도 없었다. 자신의 행동과 감정에 책임을 지는 나이가 되면 우리는 ‘성인’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따 점심 때 차 좀 빌려줘.”
크리스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좀 자 둬. 피곤하잖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밤까지 깨어 있으려면 시차 적응이 필요하다. 나는 시트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크리스가 파노라마 창을 닫아 주었다. 위에서 쏟아지던 밝은 빛이 차단되자 곧 낮잠에 빠져들었다. 낯익은 라디오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아우토반 어디쯤에서 작은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 * *
나는 마땅한 주차 장소를 찾지 못해 벌써 세 번째 같은 거리를 돌고 있었다. 한재이의 회사는 복잡한 시내 한가운데 있었고 주변은 이미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좀 떨어진 유료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야 했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 방문은 2년 전 한재이의 생일 때였다. 친구들과 다 함께 모이기로 했지만 비행이 있던 나는 약속을 따로 잡아야 했다. 내가 그를 찾아오는 건 그때도 참 드문 일이었기에, 회사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나를 보고서 그가 지었던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 그날과 같은 레스토랑을, 오늘 다시 찾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한재이를 기다리는 동안 시계를 몇 번이나 쳐다보았는지 모르겠다. 마치 지난 15년간의 세월이 모두 리셋된 듯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물을 마셨다. 주어진 시간은 겨우 한두 시간이었지만 하루가 이미 그로 채워져 있었다.
서버가 다가와 물을 채워 주었다. 나는 조용히 메뉴를 살피는 척했지만 이미 창밖에서 빠르게 걸어오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1초, 2초, 정확히 3초 만에 레스토랑의 문이 열렸다. 푸른빛이 감도는 셔츠에 브랜드 슈트를 입은 한재이가 들어왔다. 휴대폰을 든 손에 차고 있는 메탈 시계는 그의 28번째 생일에 내가 사 준 선물이다.
“그대로 두시죠. 제가 들어가서 다시 보겠습니다. 아니요. 지금은 좀 곤란하고. 네.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네. 죄송합니다. 그럼.”
그는 테이블로 걸어오며 전화를 끊었다. 맞은편에 앉은 한재이의 첫마디는 웃음 섞인 투정이었다.
“믿을 수가 없다, 진짜. 나는 직장도 사표 내고 너한테 매달리는데 돌아오는 게 겨우 점심 한 끼라니.”
“미안. 스케줄이 꼬였어.”
그가 화를 내면 받아 줄 생각이었다. 집에는 내가 좋아하는 치즈 더미와 레드 와인이 박스째 쌓여 있다고 했다. 함께 밤을 보낼 줄 알았던 우리는 화창한 대낮에 서로를 내외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서버가 다가왔다. 한재이가 메뉴도 보지 않고 주문을 한다. 단골인 듯했다.
“클라이언트와 점심 약속 있을 때는 항상 오거든. 너하고도 한번 온 적 있잖아.”
“응, 기억나.”
그가 웃으며 다시 서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잘 아는 사이인 듯 농담도 건넸다. 내가 좋아하는 한재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무언가를 설명하는 듯 부지런히 손짓이 오갔다. 나는 정신없이 그를 감상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헤어진 지 겨우 열흘 정도가 지난 것 같은데 몹시도 그리웠었나 보다.
서버가 돌아가고 한재이의 시선이 내게 돌아오자 아닌 척 물을 마시며 딴청을 피웠다. 그는 다정하게 물었다.
“몇 시까지 들어가야 해?”
사실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닌가 싶었다. 오는 데 1시간이 좀 넘게 걸렸으니 3시쯤에 출발하면 파티에 늦지는 않을 듯싶었다.
“2시간 남았네.”
그는 테이블 반대편에서 한껏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손을 깍지 끼고 턱을 괴고서는 마치 전시품을 감상하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건넸다.
“정리는 잘되고 있어? 별일 없었어?”
전화로는 물어보기 힘들었던 것들이 궁금했다. 당장이라도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던 그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었고.
“뭐…… 별일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 사촌 오빠라는 사람이 회사에 찾아와서 행패 부리기도 했고. 양쪽 부모님이 합심해서 자리 만들어 주시고는 도망가시기도 했고. 함께 아는 친구 여러 명한테서 돌아가며 전화도 오기도 했고. 다들 내가 바람난 거라고 생각해.”
그 열흘간의 치열한 싸움에 관해 그는 남의 일을 전달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기젤라는 괜찮아?”
그 질문에는 미소를 거두었다. 그는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그러기를 바라고 있어. 내 앞에서는 티를 안 내니까. 서로 합의하에 파혼한 걸로 했다고 해도 나 때문에 큰일을 겪었잖아. 위로를 해 주고 싶지만 나는 도움이 안 될 거야. 더군다나 내가 너와 이렇게 된 마당이니 더 할 말이 없지.”
그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생각보다 무거워 보여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아? 정리하는 데.”
“몇 주만 더 시간 줄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파혼은 그렇다 쳐도 한국으로 들어가겠다는 계획을 부모님이 어떻게 받아들이셨을지 궁금했다. 그는 질문을 그냥 웃어넘겼다. 해결이 제대로 되지 않은 눈치였다.
따뜻한 빵과 샐러드가 나왔다. 오랜만에 먹는 낯익은 음식들이 좋았다. 식초가 들어간 감자 샐러드를 먹으며 서로 최근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비행기와 한재이의 일상. 들어가는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할 만큼 포만감에 이미 젖었다.
“나는 요즘.”
그가 다음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나는 손에 쥔 나이프로 빵을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온종일 네 생각을 해.”
그리고 채 잘라지지 않은 빵을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너는 어때. 한재이의 눈빛은 내게도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에 관해서 말을 하자면, 장거리 연애 중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연애를 하고 있었다. 시차가 맞지 않았고, 내가 비행에 들어가면 기본 열 시간 이상 오프라인 상태가 된다.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짧게 메시지를 남기는 정도. 어쩌다 시간이 맞으면 통화를 하는 행운도 주어진다. 그래서 남은 시간은 모조리 그를 생각하는 데 쏟아 붓고 있었다.
마음이 닿지 않았을 시절에는 추억 놀이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도시 한 가운데서 청춘의 기억에 허덕이며 도망 다녔다. 그리움은 똑같이 여기에 남았지만, 이제는 밖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기뻤다.
“나도 그래.”
걸러지지 않은 내 대답에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나도 좋았다.
그가 나를 생각한다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길든 짧든 상관없었다. 조금씩 바뀌어 가는 워딩과 친구일 때 그어진 선을 지워 나가는 속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았지만 새로 생긴 감정을 맞춰 볼 때마다 설레었다. 조심스레 마음을 표현한 뒤 상대도 그렇다고 하면 못 견디게 기쁘고 행복하다.
지금 한재이의 표정이 그러했다. 나도 네 생각을 한다는 그 짧은 말 한마디 들었다고 내내 웃기만 했다. 밥 먹을 생각은 별로 없어 보였다.
“왜 안 먹어. 여기 비싼 데잖아.”
“괜찮아. 먹기 위해 지불하는 돈이 아니니까.”
마주 앉은 지 1시간쯤 지났다. 한재이는 구워진 송아지 안심살을 몇 조각 맛본 뒤 나이프와 포크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 후로는 쭉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체할 거 같아. 그만 쳐다봐.”
“천천히 먹어. 아직 50분 정도 남았어. 네가 좋아하는 거로만 시킨 거야. 다 먹고 가.”
“왜 나 먹는 거에 그렇게 집착해?”
“그거 외에는 틈이 없어서.”
나는 음식을 씹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너는 좀, 뭐라 해야 하지? 무너뜨려 보고 싶은 충동을 자아내게 하거든. 직업병인지 몰라도 항상 완벽하고 단호하니까 틈이 안 보여. 그래서 네가 술이 약하다거나, 입이 짧다거나 하는 약점들이 좋아. 그런 걸 챙겨 주면 왠지 너를 정복하는 느낌이 들어. 그래서 집착하는 거 같아.”
관계가 변해도 여전한 버릇들이 남았다. 그래도 한재이가 나에게 집착하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기에, 그 버릇들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 잔에 물을 따라 주며 그가 말했다.
“가기 전에 내 차에 잠깐 들렀다 가. 줄 게 있어.”
“뭔데?”
“엘자 할머니 생일 선물. 못 뵌 지 오래되었는데 안부 전해드려.”
정작 손자인 나는 선물을 사 오지도 못했는데 어릴 때 몇 번 봤던 게 전부였던 그가 나의 할머니의 생일을 챙겼다.
“고마워.”
무엇을 샀는지 궁금했지만 30분 후면 알 수 있을 테니 굳이 묻지 않았다. 그냥 문득 깨달은 사실은, 내가 계속 시간을 세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일 몇 시 비행기로 가?”
“10시. 그래서 아침 일찍 가야 해.”
“아이슬란드 가서 뭐 할 건지 물어봐도 돼?”
나는 그가 부어 준 물을 마시고 냅킨에 입을 닦았다.
“비행기를 빌렸어. 아주 작은 일인용으로. 훈련할 때 담당 교관이 보여 준 사진이 있었는데 굉장했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사진 중에 단연 최고였거든. 사진을 찍게 되면 보내 줄게.”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저트를 생략하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10분쯤 남았을 때 우리는 계산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토랑을 나와 한재이의 회사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우습지만 나도 모르게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는 뒷좌석 문을 열어 커다랗고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내게 안겨 주었다. 무게가 좀 있어서 뭐냐고 물었더니 티 포트 세트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위에 작은 상자를 또 하나 얹어 주었다.
“이건 네 선물. 집에 가서 풀어 봐.”
별거 아니라고 하는데도 두근대고 궁금했다. 두 손을 쓸 수 없게 된 나는 상자를 든 채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들어가.”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그래, 그럼 연락할게.”
“너도 집에 도착하면 메시지 줘.”
꼬리에 꼬리를 문 인사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웃음이 났다.
“왜 웃어.”
한재이 자신 역시 웃고 있으면서 괜히 나에게 뭐라고 한다.
“헤어지기 싫은가 보다.”
우리 둘 다.
웃음을 머금은 한재이의 얼굴이 한 뼘 더 다가왔다.
“말만 해. 지금이라도 데리고 도망가 줄 테니까.”
슈트를 입은 서른 살의 한재이가 열다섯 살처럼 소곤거렸다. 나는 거절했지만 대신 그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키스 공격에 그의 몸이 석고처럼 굳어 뻣뻣해졌다.
“잘 가.”
뒤를 돌아 그에게서 멀어지면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한재이의 표정을 떠올리며 나는 웃었다.
다시 한번 우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온종일 서로를 생각하고 그리워했지만 정작 만나면 보고 싶었다는 말 한마디가 어려운 사이였다. 새삼스레 체면을 차리고 내외를 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리감에 나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에게도 나의 이런 행동이 설렘을 주었으면 했다. 남은 하루는 나와 나눈 짧은 입맞춤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기를.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재이는 여전히 차에 기댄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연애하고 있다는 것이 처음 실감 났던 오후. 그의 회사 앞에서. 오늘을 이렇게 기억하고 싶었다.
* * *
엘자 슈미츠는 비어크만슈바일러 동쪽에 자리한 농장 주인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패전 후 농장 일부를 식당으로 개조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팔았다. 그녀는 가족이 운영하던 식당 일을 도우며 살던 이십 대 초반에 헤르만 슈미츠를 만나 결혼했고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 중 둘째 아들이었던 칼 슈미츠가 앙겔라 슈미츠를 만나 크리스티안을 낳았고 10년 후 나를 입양했다.
슈미츠 집안은 대가족이었다. 부유한 남부 독일 출신들답게 보수적이고 콧대가 높았다. 형제들은 친해 보였지만 자주 만나지는 않았다. 헤르만 슈미츠가 사망한 뒤 엘자 슈미츠는 이 대가족의 꼭대기 층 권력자가 되었다. 그녀가 가진 힘은 헤르만이 남기고 간 자산의 크기만큼 불어났다.
“생신 축하드려요, 할머니.”
“맥시, 오랜만에 보는구나. 이리 와. 안아 다오.”
나는 허리를 숙여 그녀를 안으며 가볍게 뺨에 키스했다. 내 손을 붙잡고 안부를 묻는 그녀에게 그저 그런 일상의 한 꼬투리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비행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파일럿이 되겠다고 처음 말했을 때 공군 입대를 하는 거라 오해했었다며, 어릴 적 하늘에서 떨어지는 전투기를 봤던 기억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의 집 창고에는 아직도 헤르만이 입었던 군복이 남아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그 창고는 내게 박물관 같았다. 나는 거기서 통일 전에 쓰던 마르크 동전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해 발행된 기념 우표를 찾았다. 개조하지 않은 오래된 집터에는 아직도 마구간으로 쓰이던 큰 건물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가진 땅은 매우 넓었고 지금은 값이 많이 올랐다. 슈미츠 형제들은 유언장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에 여전히 효자 효녀처럼 그녀의 생일을 챙겼다. 자식들을 동원하여 파티를 열었고 나도 그 장단에 곧잘 맞춰 주는 편이었다. 기왕이면 양아버지가 많은 땅을 물려받길 원했다. 나를 위해서는 아니고, 크리스를 위해서였다.
“샐러드 더 하겠어?”
크리스가 건너편에서 샐러드 볼을 받아들며 내게도 권했다. 한재이와의 점심이 너무 과했던 탓에 식욕이 별로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6시 정각에 시작된 생일 파티는 느릿느릿 진행되어 이제야 메인 요리에 들어갈 참이었다.
엘자 슈미츠의 대저택 뒤편에 있는 정원 한가운데 커다란 테이블을 놓고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앉았다. 누군가 전담해서 요리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조금씩 음식을 가져왔고 실비아는 디저트용 케이크를 구워 왔다.
요리 하나가 나올 때마다 빈말이라도 다섯 번 이상씩 맛있다고 칭찬해 주는 것이 슈미츠 집안의 전통이다. 나는 치즈가 들어간 누들 요리를 특히 칭찬했다.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사촌 누나를 향해 두 번 정도 웃어 주었다.
오늘은 십 년 만에 보는 친척들도 있었다. 소식만 전해 들었지,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만난 적이 없었던 탓에 어색하고 반가웠다. 대부분은 내가 한국으로 들어간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이야?”
사촌 한 명이 물었다.
“모르겠어.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다시 들어와야 할 수도 있고.”
“맥시 네가 있을 때 우리 모두 한국에 놀러 가면 좋겠다. 율리우스, 나 거기 후추 좀 집어 줘.”
“너 친구 결혼식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원래는 그랬는데…….”
“취소됐대. 혼자 여행 간대.”
“그래? 어디로 가는데? 도미닉, 이거 좀 받아 줘.”
“앉아. 앉아서 일단 먹으라고. 맥시, 옆에 소스 통 좀 건네줘.”
“어, 그래.”
나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길을 잃었다. 간간이 양어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억지로 웃으며 미소를 지어야 했다. 나는 괜찮다,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확신을 그녀가 끊임없이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9시쯤 되자 할머니는 졸려 하셨다. 음식 접시를 대충 정리하고 디저트와 와인 잔만이 남은 테이블 위에 선물 개봉식이 이어졌다. 수북이 쌓인 선물들이 하나씩 개봉될 때마다 고른 사람의 안목과 노력을 칭찬해야 했다.
“여기 큰 걸 뜯어 봐요, 엄마.”
양아버지는 내가 들고 온 커다란 상자를 그녀에게 밀어 주었다. 우아한 은박 포장지가 벗겨지고 비싸 보이는 영국산 티 포트 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안목이 훌륭했다.
“너무 예쁘다, 맥시.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한 교수님 아들 생각나시죠? 저랑 친했던.”
“그래, 알지.”
“그 친구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저는 꽃을 사 왔고요.”
“세상에…… 고맙다고 전해라.”
“재이 만났니?”
그녀가 다음 선물을 뜯는 동안 양어머니가 고개를 숙이며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점심 때 잠깐 만났어요.”
“걔 괜찮다니? 왜 그랬다니?”
양어머니는 한재이의 어머니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지금도 빈번하게 연락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질문의 강도를 보아 내막을 무척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대답을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남의 얘기 함부로 하는 거 아니잖아, 엄마.”
큰아들의 질책에 멋쩍어진 슈미츠 부인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가져가 먹는 것으로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가 소곤거렸다.
“네가 얘기할 때까지 모른 척할 테니까 충분히 시간 가져.”
케이크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 파티는 거의 끝났는데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밤 열두 시가 다 되는 시간까지 와인을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대개는 마을의 소소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세금 이야기, 난민 문제, 그러면 결국엔 정치 이야기로 번진다. 오늘은 고함이 오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던 듯했다.
[아직이야?]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정원 뒤편을 돌아 집 밖으로 빠져나온 뒤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직 안 잤어?”
-응. 나도 퇴근이 좀 늦었고 저녁을 늦게 먹었어. 더 걸릴 거 같아?
“응. 엘자 할머니는 이미 잠자리에 드셨어. 남은 사람들은 대화가 끊이질 않네.”
-슈미츠 집안 파티는 원래 유명하잖아. 지루해하는 맥시 슈미츠를 기다려 주는 건 15년 동안 내 일이었고. 또 정치 얘기하셔?
“그렇지 뭐. 지금은 녹색당에 투표한 사람을 색출 중이야.”
한재이가 웃었다.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며 자수를 했다.
“할머니가 네 선물 좋아하셨어. 고맙다고 전해달래. 참, 내 선물도 고마워. 잘 쓸게.”
-맘에 들어?
“응.”
그가 내게 준 것은 만년필이었다. 비행을 나갈 때는 늘 서너 개의 펜을 준비해 가야 하는데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왜 주는 건지는 모르겠다. 지나가다 샀다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 같았다. 뭐든 해 주고 싶어서라는 두 번째 대답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게 들렸다.
“아버지는 좀 취했어. 저러다 또 싸울 거 같아. 대충 눈치 봐서 먼저 집에 가야겠어.”
-여전하시네. 매년 부활절 레퍼토리였잖아. 형님 되시는 분이랑 언성 높이면서 싸우시다가 일 년 내내 서로 연락 안 하시는 거.
“응. 우린 다 질려서 집에 먼저 가 버렸지.”
-그러고 나면 넌 나한테 전화해서 밤새 짜증을 부렸어. 너희 집에서 파티한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안 자고 기다리게 된다니까.
그의 말에 나는 웃었다. 실제로 그랬다. 어릴 때는 재미도 없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리를 지키는 것이 고역이었다. 식사 예절을 중요시하는 그들이었기에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한재이에게 전화해서 심술을 부렸다. 그러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차라리 만나서 얘기하자며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딱 중간 지점에서 만났었어.
“거기가 정확히 중간 지점은 아니야. 네가 우겨서 그렇다고 해 준 거지.”
-어쨌든 간에. 거기가 벤치도 있고 놀기 좋았잖아.
“응. 베이커리 앞에 버스 정류장.”
우리는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집에서 자전거로 15분 정도를 달리면 큰 자작나무가 서 있는 베이커리가 나오는데 그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밤에 몰래 집에서 빠져나와 그와 놀다 들어가는 것은 재밌는 비행(非行)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 시간이 늦어지고 행실이 나빠졌다. 졸업할 즈음에는 그렇게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웠다. 대부분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갔지만, 부모님은 내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잠들어 계셨다. 사실 들켜도 상관은 없었다. 그는 신뢰받는 친구였기에 핑계를 대는 데 매우 좋았다. ‘재이랑 있다 왔어요.’ 그렇게 한마디 하면 대부분은 이해하고 넘어가셨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거기서 만났을 텐데.
“네가 이젠 여기 안 사니까.”
나는 현실을 직시하며 마음을 달랬다.
어느새 동네를 다 돌아 다시 엘자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정원 한구석에 심어진 커다란 사과나무는 내가 입양되던 해에 헤르만이 심어 둔 것이다. 나와 함께 자란 사과나무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커다란 나무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한재이의 목소리가 꿈을 꾸듯 들려왔다.
-그래도 만날래?
차로 한 시간 거리다. 중간 지점을 찾는다고 해도 지금은 12시가 넘은 시간. 그는 내일 출근해야 하고 나는 공항으로 가야 한다. 한국보다는 가깝잖아. 이어지는 그의 변명에 웃음을 터트렸다. 한재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데, 안 될까?
나는 결국 무너졌다. 물리적인 눈은 뜨고 이성의 눈을 감았다. 그래, 만나자. 오랜만에 그의 미친 짓에 동조해 보기로 했다.
등이 켜진 정원에서 반이 넘는 사람들이 아직도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크리스의 뒤로 조용히 다가가 자동차를 빌릴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곧바로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 건네주었다. 목적지는 묻지 않았다.
오랜만에 진짜 아우토반을 달렸다. 계기판의 속도가 150에서 160을 왔다 갔다 했다. 한재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고 있어.”
-압슈타트에서 하일브론 쪽으로 빠져. 그게 빨라.
포르쉐의 엔진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텅 빈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10분 정도 더 걸려.”
-괜찮아, 천천히 와.
달이 보였다. 하일브론으로 빠지는 길목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가슴이 뛰었다. 급하게 속도를 줄이고 좁은 들길로 들어섰다. 양옆으로 밀을 심어 놓은 들판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나는 혼자였다. 그 상태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17세기쯤 만들어진 것 같은 허물어진 수도원 터가 나왔다. 익숙한 차량이 거기에 서 있었고, 차에 기댄 채 나를 기다리는 한재이의 뒤로 달이 보였다.
혹시라도 지나갈 차량을 위해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밖으로 나와 그를 향해 걸었다. 주변은 암흑처럼 고요하고 어두웠다.
밀밭 위로 여름 바람이 불어와 간간이 소리를 냈다. 한재이는 담배를 문 채 내가 걸어오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오늘 낮에 만났을 때와는 표정이 조금 달랐다. 내가 옆으로 다가오자 그가 조용히 차량 후미등을 껐다.
“안녕.”
우리는 다시 인사를 했다. 이 상황이 조금 웃겼다. 그의 입에 물려 있는 담배를 멋대로 가져가 한 모금 빨았다. 빼앗긴 담배를 쳐다보던 한재이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 입술로 옮겨갔다.
“몇 시까지 들어가야 하는지 이제 안 물어볼 거야.”
“괜찮아. 지금쯤은 다들 주무실 거야.”
두 번째 연기를 내뿜으며 나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1시가 넘었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나랑 있었다고 해.”
“그럴게.”
“너희 부모님, 내가 너한테 담배도 주고 나쁜 짓 많이 가르쳤는데도 공부 잘한다고 나 좋아하셨어.”
사실 그랬다. 우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어울려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의 부모님이 좋게 봐주신 덕분이었다.
“퇴근은 왜 늦게 했어? 사표 냈는데도 바빠?”
“사표는 사표고. 중요한 소송 건이 있는데 관두기 전에 마무리해 주고 싶어서. 소송에서 지는 건 제일 싫어.”
“바쁜데 나 때문에 시간 냈었나 보네.”
“아니야. 네 덕에 일을 더 많이 했어. 일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엘자 할머니 파티에 찾아갈 뻔했거든.”
세 번째 연기를 내뿜으며 나는 웃었다. 초대받지도 않은 그가 나타나 황당해하는 가족들의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 때문이야. 네가 키스하고 도망갔잖아.”
이번엔 주차장에서 멍하게 서 있던 한재이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효과를 전혀 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꽤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또 만날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달빛만으로도 서로의 얼굴이 충분히 보일 만큼 우리는 가까이 서 있었다. 무너진 수도원 안쪽으로는 숲길이 나 있었고, 베어진 나무그루가 군데군데 보였다. 난쟁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밤이었다. 한재이는 말이 없어졌다.
“피울래?”
계속해서 내 입술을 쳐다보고 있었기에 나는 멋대로 가져간 담배를 돌려주려 했다.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내 입에서 담배를 빼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털어 불을 끈 뒤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나는 마지막 연기를 내뿜었고 그는 조용히 입술을 부딪쳐 왔다.
혀가 섞이고 숨결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나는 한재이의 차에 기대어 부드러운 그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한 번, 두 번. 몇 차례를 오가던 혀끝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달콤함을 맛본 입술이 떨어지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술도 없고, 담배도 떨어졌어. 이제 뭐 하지.”
“뭘 하고 싶은데.”
우습게도 모른 척 그를 밀어내어 보았다. 선을 하나 지워 낼 때마다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궁금해하는 과정들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긴 한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너도 원하는지를 모르겠어.”
나는 한재이의 뺨을 쓸며 대답 대신 짧게 입을 맞췄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확인하고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나도 너를 원해. 두 번 세 번 부딪혀 오는 나의 입맞춤에 마침내 그가 반응했다. 내가 입술을 벌리자 그대로 혀를 밀어 넣고 허리를 감아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재이의 어깨를 쥐었다.
감겨오는 속도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그는 내 목덜미를 쥐고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빨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로맨틱하던 우리의 키스는 어느덧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다렸던 시간은 내가 더 길었기에 나도 그를 내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에 반응한 한재이가 뒷좌석 문을 열었고 우리는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에 의해 구겨지듯 좌석 위로 넘어졌다. 뒤따라 들어온 그가 곧바로 입술을 겹쳐 왔다. 혀가 섞이고 타액에 젖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소리 그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침내 그가 내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했다.
오늘 밤 우리는 가장 행실이 나쁜 짓을 벌일 것이다.
그는 조금 거칠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면 다시 넘어뜨리고 키스하려 달려들면 상체를 숙여 다시 상위를 점령했다. 짧고 강렬하게 혀가 섞인 뒤부터는 귓불과 목울대가 빨리기 시작했다. 한재이는 단추가 모두 풀린 내 셔츠를 젖히고 쇄골과 가슴, 복부까지 키스를 퍼부었다.
온몸에 자국을 남기듯 쉴 틈 없이 느껴지는 그의 입술에 나는 가쁜 숨을 들이마시며 그의 얼굴을 다시 위로 끌어당겼다. 흥분으로 얼룩진 그의 표정은 낯설었다.
성욕이 선명하게 드러난 눈빛을 보며 내가 가졌던 그의 이미지는 흩어지고 재정렬되었다. 나를 갈구하며 여기저기를 더듬던 그의 손길이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 무언가를 확인했다. 자신에 의해 흥분한 내 상태에 만족한다는 듯 더한 것을 물었다.
“내 생각하면서 한 적 있어?”
때로는 행위보다 뱉어 낸 언어들이 더 야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나는 턱을 들어 그의 입술을 먹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응. 몇 번쯤.”
그러자 한재이가 벌어진 내 입술 안에 혀를 넣고 딥 키스를 했다. 한번에 밀어 들어와 영역을 침범하듯 멋대로 입 속을 누볐다. 내 혀를 물고 제 입 속으로 가져가서는 빠듯하게 조여 오며 감각을 마비시켰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겠지.
나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욕망은 어디까지 오고 있었는지 가늠해 보고 싶었다. 내가 자신과 같은 몸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에 거부감은 없었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나른하게 퍼진 욕조 속에 앉아 나와의 질척이는 섹스를 상상하며 신음했을까.
“의심할 여지도 없이 거의 매일 밤. 어떤 날은 한 번으로는 부족했어.”
그 말과 동시에 그의 손이 내 바지 버클을 천천히 내렸다. 상상 속에서 관음했던 장면들을 하나하나 실현에 옮길 생각인 듯했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내 턱을 잡고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밑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다시 천천히 입술을 물고 빨았다. 혀끝을 세워 여기저기를 침범하고 다시 겹치기를 반복했다. 입술이 떨어지면 그대로 뺨을 지나 귓불을 핥았다.
“제일 많이 상상했던 건 네 표정.”
한재이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감전된 듯 척추 끝에서부터 찌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그 소리에 집중하느라 그가 이미 한 손으로 내 벨트가 풀고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너도 내게 흥분할 수 있을까. 나를 원하는 네 표정은 어떤 표정일까.”
깨닫고 난 후에는 이미 늦었다. 어느새 속옷 안까지 침범한 그의 손길이 발기된 페니스를 쓸어내리며 천천히 페팅을 시작했다.
“어떤 기분일까. 너를 가지는 기분은.”
“흣…….”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손길에 열렬히 반응했다. 한재이는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내 표정을 훑었다. 그에게 만져지고 있는 가장 뜨거운 부위가 단단하게 발기했다. 생리적으로 몰려오는 흥분을 감추는 재주 따위는 내게 없었다.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미간을 찡그리기도 하며 느껴지는 그대로를 표현했다. 코앞에서 관찰하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혼자 벌거벗은 것 같은 수치심을 느꼈다.
한재이가 쇄골 밑을 천천히 핥으며 가슴과 유두를 빨고 깨물었다. 섹스 전 전희를 받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열상을 입었다. 복부까지 내려간 그의 입술이 다시 허리를 지나 옆구리와 가슴에 닿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들어 바지 속에서 잡고 있던 내 페니스를 밖으로 꺼냈다.
그가 살짝 시선을 내려 제 손에서 미끈거리는 쿠퍼액을 흘리는 살덩이를 보았다. 끈적한 시선을 던지며 자신에게 흥분한 나의 상태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페니스 끝을 손바닥에 비비며 헝겊을 감싸듯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예민한 부분이 손바닥에 닿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그의 손길이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 흣.”
몸속에서 흐물거리는 쾌락의 감각이 뇌를 거치지 않고 목울대를 향했다. 여성과의 섹스에서는 한 번도 내 본 적 없던 신음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한재이는 더 듣고 싶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내 목덜미를 빨고 물었다.
“잠깐만…… 하…….”
이건 상상 이상이다. 겨우 그에게 한 손으로 페팅을 받으며 간간이 키스를 나눌 뿐인데도 터질 것 같은 사정감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빨리 절정에 오를 수는 없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열기에 내가 녹을 것 같았지만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재이야, 잠깐…… 흣.”
그가 시끄럽다는 듯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말을 막았다. 손가락이 타액에 젖고 숨이 가빠졌다. 그가 손가락 하나를 더 넣어 입을 벌린 뒤 혀를 넣어 다시 딥 키스를 했다. 입 속은 그로 인해 난장판이 되었다. 손가락을 빼내 번들거리는 오른손이 페니스의 페팅을 이어받았다. 그는 질척한 키스가 이어가며 나의 흥분을 자신의 것처럼 즐기고 있었다.
한참을 빨리던 혀가 잠시 자유로워진 틈을 타 이번엔 내가 그의 귓불을 물었다. 그리고 목으로 옮겨가 강하게 자국을 냈다. 벌어진 셔츠를 잡아당기며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방심한 그에게서 흘러나온 낮은 신음이 울대를 통해 저릿하게 느껴졌다. 그가 느끼는 반응 하나하나가 터질 듯한 쾌감을 내게 선사했다. 허벅지 위로 단단하게 발기된 그의 페니스가 느껴졌다. 손을 내려 그곳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하아…… 상상했던 거랑 비교해 보니 어때.”
나는 한재이의 몸이 조금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내 손이 닿은 그의 앞섶이 묵직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겉에서만 만져 봐도 철근처럼 단단하다. 그가 자신의 아래와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손안에 있는 것이 더 부풀어 올랐다. 그의 바지가 터질 것 같았다.
“무슨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있어.”
그는 그렇게 대답한 뒤 시럽을 핥듯 내 입술을 서너 번에 걸쳐 훔쳤다. 그리고 자신의 페니스 위를 문지르고 있는 내 손을 떼어 내 잠시 끊어졌던 페팅을 이어 나가며 나를 다시 흥분시켰다. 바짝 열이 오른 내 페니스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자극하던 그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후…… 스스로는 잘 모르겠지만, 너는 원래 사람을 좀 미치게 만드는 그런 게 있는데.”
“흣…….”
“네가 흥분한 모습을 보니까 병적으로 더 집착하게 될 거 같아.”
그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빨라지는 페팅 속도에 대답하지 못하고 나는 녹아내렸다. 한 번 더 입술을 받았다가 떨어졌다. 쾌락으로 점철된 뇌 속은 이성적인 사고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해석할 수 없었고 그런 나를 보고 더욱 흥분한 한재이의 목소리에 온몸이 저릿하게 떨려 왔다.
“진짜 미치겠다, 우서진.”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은 말하는 데 쓰이지 않았다. 혀뿌리가 끊길 만큼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그의 딥 키스에 나도 모르게 욱,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작정한 듯 체중을 실어 몸을 덮쳐오는 덕에 숨이 막혀 왔다. 발버둥 치듯 한쪽 다리를 세우며 틈을 만들려 했지만, 완력으로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가 내 육체를 탐미하는 소리가 기이했다. 타액에 젖어 질펀해진 혀의 움직임이 내는 소리에 신음이 섞이고 숨소리가 섞였다. 서로의 합의하에 시작된 행위임에도 묘하게 그에게 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감각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한재이의 키스가 질척해질수록 페니스에서 끈적한 액체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페팅만으로 나를 보내 버릴 작정인지 그의 손길은 더욱 빨라졌다. 입술과 뺨, 목과 쇄골을 지나 가슴 곳곳이 물리고 빨렸다. 나는 허리 안쪽에서 느껴지는 사정감을 참으며 버티고 있었다. 가빠지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힌 채 쾌락으로 범벅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아…… 움직이지 마.”
그가 남은 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밀어내던 내 팔을 잡아 시트 위에 고정시켰다. 포르쉐의 부드러운 물소 가죽이 느껴졌다. 그제야 눈을 뜬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행의 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한재이에게 완전히 깔린 채 상의가 반쯤 탈의되어 있었고 바지는 엉덩이에 걸쳐진 채 페니스가 드러나 있었다.
좁은 차 안에서 180센티가 한참 넘는 남자 둘이서 몸이 구겨진 채 성욕을 푸는 중이다. 나는 문득 여기가 수도원이 있던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검은 숲 입구에서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 서늘한 눈동자가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경고했다. 친구와의 섹스, 동성애에 대한 금기. 목 끝까지 단추를 걸어 잠근 금욕의 옛터에서 흥분된 숨소리를 내쉬며 우리는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용서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심판의 눈동자가 둘이 되고 셋이 되기 시작했다.
그 검은 숲을 등지고 한재이가 몸을 일으켰다. 한 번에 상의를 탈의하고 단단하게 근육 잡힌 몸을 드러냈다. 이렇게나 관능적이었나. 탄탄하게 굴곡을 드러낸 복근과 반쯤 드러난 장골이 완벽한 선을 이루며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의 벗은 몸을 보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나는 마치 생일날 아침 선물을 뜯는 어린아이처럼 말을 잃었다.
한재이 역시 나의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천천히 벨트를 풀고 스스로 바지 버클을 내리며 내가 기대하는 자신의 욕망 덩어리를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지켜보는 나는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고 속옷까지 내려간 그의 다리 사이에서 마침내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묵직하고 단단해 보였다. 크기와 형태로는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조각 같았다. 철심을 박은 듯이 곧게 서 있는 그의 페니스는 이미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잡아당겨 입술을 삼켰다. 하나하나 끈적하게 맛보고 싶었다. 질펀하게 그의 입술을 빨고 목구멍 속으로 혀를 넣어 보고 싶었다.
내 것이었다. 완벽한 내 것이다. 나는 감지 않은 한쪽 눈으로 지켜보는 자들을 비웃어 주었다. 보라, 우리는 함께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두 페니스가 겹쳐지자 한층 더 격양된 신음이 차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한재이의 손이 두 기둥을 맞잡고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도 나도 같은 몸을 가진 사람과의 섹스가 처음이었기에 상대의 행위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받아 주어야 하는지가 헷갈렸다. 페니스를 비비고 페팅하는 것은 좋았지만 몸을 움직일수록 더한 갈증이 생기고 해소되지 않는 욕구 불만이 일어났다.
그것은 아마도 삽입에 대한 욕구였을 것이다. 한재이와 몸을 섞는 것과는 별개로 나의 몸은 익숙하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 상대에게 거칠게 파고들고 싶다는 수컷의 본능이 일어나는 바람에 우리는 물고 물리기를 반복하며 서로를 압박했다. 그것이 절대 채워지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에 더 흥분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재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는 좁은 좌석 밑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더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어.”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순간 기대감으로 피가 몰렸다.
한재이가 손으로 뿌리 끝을 쥐고 천천히 혀끝으로 페니스를 핥았다. 온갖 예민한 신경이 몰려 있는 귀두 위에서 원을 그리며 조금씩 나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인내심이 바닥을 보인 나의 그곳에서 미끈한 액체가 흐르기 시작하자 그대로 입술을 비비며 자신의 타액과 섞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또 완전히 페니스를 입 안에 머금었다.
“흐읏…….”
나는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채워지지 않던 욕구가 해소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그의 입 안이 점점 좁아지며 동굴을 만들었다. 부드러운 점막이 맞닿은 채 점점 더 조여드는 감각과 함께 피스톤 운동이 시작되었다. 좁은 입속에 삽입된 채 질척하게 빨려 들어간 페니스가 점점 더 부풀어 오르며 쿠퍼액을 쏟아 냈다.
나는 한재이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내가 얼마나 그의 행위에 흥분하고 있는지를 전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펠라가 이어지고 터지듯 밀려오는 사정감에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흣…… 그만해.”
혼자 가고 싶지 않았기에 한재이의 어깨를 밀어 펠라를 중단시켰다.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꾸었다.
그 사이 그가 시트 위로 올라와 정자세로 앉았고 나는 거추장스러운 하의를 스스로 탈의했다. 엉덩이에 걸쳐진 바지 위로 튀어나온 그의 커다란 페니스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말끔하게 왁싱된 탓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그 엄청난 살덩이를 입에 넣고 아래위로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의 물건을 빠는 것은 처음이다. 반의반도 들어가지 못하고 입 속에서 맴도는 페니스를 혀로 건드리고 핥았다. 그가 해 준 것처럼 입 안을 좁게 만들어 조임을 주었다. 입천장에 닿은 귀두에서 흘러나오는 비릿한 액체의 맛이 느껴졌다. 거부감이나 불쾌함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목구멍으로 집어삼켜 음미하고 싶었다. 꿀을 빨듯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가져가고 싶었다.
이것은 그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한재이의 페니스를 빨면서 쾌락을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가장 은밀한 그의 신체 부위를 내가 맛보고 있다는 쾌감이기도 했다. 그의 페니스가 입 속을 들어오고 빠져나갈 때마다 동시에 전해지는 한재이의 낮은 신음 소리와 내 혀끝에 반응하며 움찔거리는 그의 핏줄과 근육을 보며 내가 가져가는 것은 그보다 더한 흥분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나 역시 신음을 흘렸다. 그의 페니스를 목구멍에 넣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다음을 갈망하는 욕망이었다. 입술이 찢어질 만큼 발기된 그의 것이 금방이라도 사정을 터트릴 듯 성이 나 있었다. 더 조이고 더 깊게 넣었다.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한재이가 나를 제지시키며 목덜미를 감싸 왔다. 자연스레 물고 있던 페니스가 빠져나오고 얼굴이 들렸다.
“하아…… 올라올래?”
흥분에 젖은 그가 내 허리를 감싸며 끌어당겼다. 나는 다리를 벌려 그의 위에 올라탔다. 허벅지에 걸린 그의 바지를 내려 살갗을 맞대고 페니스를 겹쳤다. 붉게 열이 오른 그의 목에 숨결을 불어 넣고 혀끝을 세워 귓불을 핥았다. 그가 내 뺨을 쓸어내리며 자신 쪽으로 고개를 틀게 했다. 코와 코가 맞닿았고 시선이 엉켰다. 욕정에 가득 찬 서로의 눈빛을 보며 우리가 지금 무슨 행위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나직이 내리깔리며 내 입술을 향했다. 살짝 벌린 채 혀를 내밀며 그를 기다렸다. 곧이어 한재이의 혀가 질척하게 밀고 들어왔고 우리는 포르노에 나올 법한 더티 키스를 시작했다. 입술이 붙지 않은 채 혀가 섞이고 뱀처럼 서로를 자극하며 타액을 흘렸다.
그런 야하고 정숙하지 못한 행위들을 하며 나는 쾌락에 몸이 떨려 왔다. 점점 더 길게 혀를 빼고 그를 농락하던 나는 마침내 인내심이 끊어진 한재이에게 통째로 입술이 먹혀 버렸다.
“읍…….”
엄청난 완력에 의해 허리가 꺾였다. 다시 제대로 된 키스가 이어지고 우리는 서로의 페니스를 쥔 채 허리를 움직였다. 입술을 빨리며 터져 나오는 신음과 질척이는 하반신 운동에 차 안은 열기로 가득 찼다. 흥분으로 터질 듯한 서로의 얼굴을 보며 거친 숨을 내뱉다가도 다시 키스하고 물고 빨기를 반복했다. 이미 사정감을 참을 때까지 참은 터라 언제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먼저 가도 돼.”
그는 내 페니스를 더욱 빠르게 자극하며 목 주변과 귀를 빨았다. 그런 한재이의 키스 세례를 받으며 지지 않겠다는 듯 나도 그의 뺨에 입술을 비비고 귓가에 숨을 불어 넣었다. 서로의 신음이 점점 더 강해질수록 상대를 흥분시키고 있다는 쾌감에 페니스를 쥔 손은 더욱더 빨라졌다.
너무 오래 참은 탓에 이제 컨트롤이 힘들어졌다. 그가 거세게 혀를 빨아올리며 이제 그만 놓아도 된다는 사인을 주었다. 그 순간 봇물이 터지듯이 사정이 밀려왔고 아주 깊고 진한 쾌락의 순간을 맞았다.
“으윽…….”
반쯤 목 안에 삼켜진 내 신음을 들으며 한재이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그에게서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것과 같은 숨 끊기는 신음을 들었다. 그러고는 내 귓불을 깨물며 독일어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사정했다.
꿀렁이며 뿜어져 나온 정액이 손과 복부에 흘러넘쳤다. 여운에 젖어 고개를 젖힌 내 허리를 단단히 쥐고 한재이가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그러고는 좌석 포켓 안에서 티슈를 꺼내 난장판이 된 손과 복부를 닦아 주었다. 대충 처리된 티슈들이 시트 밑으로 굴러다니고 우리는 다시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말로는 설명조차 불가능할 만큼 완벽한 섹스를 즐겼다. 사정을 하고 난 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혀끝 움직임에 여전히 몸을 떨었다. 좁디좁은 차 안에서 서로에게 매달린 채 끝내주는 여운의 감각을 나누었다.
길고 긴 키스는 점점 더 농염해지고 대범해졌다. 목덜미를 더듬으며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의 손길이 내 엉덩이를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그의 혀가 상당히 자극적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섹스 후의 여운을 즐기려 시작된 키스는 점점 더 질펀한 페팅으로 다시 이어지려는 듯 나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이며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한재이의 페니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은근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회복이 빨라?”
나는 아직 그의 무릎 위에 있었기에 살짝 내려다보며 질책하듯 물었다.
“15년간 못한 걸 어떻게 한 번에 끝내겠어.”
“웃기지 마. 그때 우리는 진짜 친구였어.”
“알아. 그래서 더 흥분돼.”
그가 다시 내 페니스 끝을 지분거리며 속삭였다. 한 번 더 하자는 의미였다.
“우리 이미 경범죄로 걸려도 할 말 없는 건 알아?”
그러자 그가 상체를 틀어 자세를 바꾸었다. 시트 위에 눕혀진 나는 다시 깔린 자세가 되어 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더 짜릿하게 해 줄까?”
한재이가 손을 들어 차량 천장 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닫혀 있던 검은색 커버가 열리며 파노라마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유리 천장 너머로 달빛이 쏟아지고 마치 야외에 누워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별이 보였다. 타오르는 수소 덩어리의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 밤은 찬양하고 싶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목덜미에 입술을 부딪쳐 왔다. 마치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다시 공을 들인 입맞춤이었다. 그와 동시에 조심스레 만져지는 페니스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미 한번 몸을 섞어서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들어 올리고 그의 손짓에 응답하고 있었다. 보란 듯이 그를 탐했다. 그리고 내어주었다. 어느 한쪽에도 일방적이지 않은 섹스가 이어지며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그를 원하는 만큼 그도 나를 욕망한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한재이의 몰아치는 키스와 강하게 내리누르는 상체의 압박에 나는 서서히 발화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껴안고 그가 더 뜨거운 숨을 불어 넣었다. 서로의 혀를 갈구하고 질척한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터져 나오는 열기에 우리는 그대로 녹아 버렸다.
밤은 길었고 욕망은 끝이 없었다. 하일브론으로 들어가는 입구, 사람의 발길이 드문 폐허가 된 수도원 옆에서 욕정의 노예가 된 두 육체가 뒹굴었다. 밀밭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배덕한 소음이 섞여들었다. 쾌감에 몸부림치며 흘리는 목소리, 서로를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멘트들.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가 거기에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낯 뜨거운 정사를 관음이라도 하듯 바람은 점점 더 고요해지고 적막이 흘렀다. 그렇게 모두가 숨을 죽인 밤, 우리는 또다시 절정에 달한 신음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