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Cruise
아이슬란드의 여름은 서늘하다. 일교차가 크고 날씨 예측이 어렵다. 관광용 경비행기 서비스를 운영하는 헤임멜이라는 남자는 그 외에도 이것저것을 알려 주었다. 준비해 와야 하는 것들과 짐을 줄이는 방법 등, 놀라울 정도로 친절한 그의 이메일에 나는 아침 일찍 아이슬란드로 떠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한 저가 항공기의 좁은 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시차가 문제가 아니었다. 전체적인 컨디션은 최악이었고 의식은 수면욕에 반쯤 잠긴 채였다. 착륙 후에도 몽롱한 정신 상태를 깨우려 계속해서 커피를 마셨다. 카페인의 위대함도 맥을 못 추는 날이었다.
어젯밤 밤새 섹스를 즐겼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우리는 그 짓을 멈추었고, 작별의 키스를 하는 데만도 1시간이 더 걸렸다. 한재이의 차가 엉망이 되었다. 그렇게 돌아서서 각자 차를 타고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헤어지고 1분 만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 좋았어.’
그의 감상을 듣고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또 다른 선 하나를 지웠다는 것을.
렌트카 열쇠를 받아 들고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시동을 걸었다. 혼자 여행 온 이상 스스로 운전을 해야 한다. 낯선 도로를 달리며 오늘 비행 예약은 취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겨우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어쩐지 주차가 엉성하게 되어 버렸다. 삐뚤게 엉덩이를 내민 범퍼를 보며 한숨을 쉰 채 다시 기어를 넣었다. 나도 이런 성격이 정말 귀찮았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까지 무리를 해서 여행 올 필요는 없었다. 다 취소한다고 해도 반절 넘게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계획한 일이 어그러지거나 감정에 휩싸여 무언가 결정하는 것을 싫어한다. 직업병이 아니라 그 반대다. 그런 성격이었기에 조종사라는 직업이 잘 맞았다는 뜻이다.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싱글 스탠더드 방을 5일 예약했습니다. 이름은 슈미츠, s.c.h.m.i.t.z.”
“슈미츠…… 슈미츠…… 막시밀리안 슈미츠. 좋습니다. 여기 있군요.”
호텔은 작고 아담한 6층짜리 건물이었다. 본격적인 관광 시즌이라 그런지 좋은 호텔을 예약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건 한재이가 가르쳐 준 팁이긴 한데, 호텔을 예약할 때는 직접 전화를 걸어 매니저와 딜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지 않은 조건으로 예약할 수도 있고, 원하는 날짜에 취소가 들어오면 개인적으로 연락을 부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로 체크인을 일찍 할 수 있는 방을 부탁해 두었다.
키를 받고 방으로 올라가 커튼을 치고 어둡게 만들었다. 상체만 탈의한 채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오늘은 이대로 쉬어야지. 휴대폰을 들어 한재이에게 겨우 연락을 해 둔 뒤 그대로 눈을 감았다.
[호텔이야. 지금부터 잘 거야. 언제 깰지는 모르겠어.]
끌어당기는 수마의 힘 앞에 무너져 내렸다. 휴대폰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고, 십여 분 뒤 화면 위로 답장이 떴지만 나는 확인할 수 없었다.
[잘 자. 통화하고 싶었는데 밤새 괴롭힌 벌이라고 생각할게.]
혼자 빛을 내며 어둠을 밝히던 휴대폰 화면이 수 초 후 다시 암전되었다.
* * *
호텔에서 조식을 해결하고 비행장으로 차를 몰았다. 이곳은 작은 회사가 운영하는 프라이빗 공항이었는데 수요가 점점 줄어드는 탓에 경비행기 십여 대를 들여와 관광용 비행장으로 목적을 바꾸었다. 물론 소형 기종은 여전히 활주로 이용이 가능했지만 글쎄, 전용기까지 있는 부자들이 이런 곳까지 올 이유는 없어 보였다. 대부분은 관광하러 온 사람들과 PPL(Private Pilot License. 자가 비행 자격증)을 따기 위해 연습 중인 학생들이 주 고객들이었다.
“아, 어서 와요. 헤임멜입니다. 이메일 보냈었죠?”
빨간색 셔츠를 입고 야구 모자를 눌러 쓴 사십 대 남자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슈미츠입니다. 어제는 갑작스럽게 취소를 해서 미안합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궁금했다. 헤임멜은 별 거 아니라는 듯, 혼자 여행 온 삼십 대 남자에 비행기를 훑는 폼을 보니 단박에 파일럿임을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열쇠를 가지고 나와 곧바로 내가 탈 비행기로 안내했다. 하얀색 바디의 터보프롭기가 파킹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조종석에 올랐고 옆 좌석에는 헤임멜이 앉아 기본적인 작동법을 설명해 주었다.
“러더 페달은 여기. 라디오 채널은 88.2에 맞춰요. 이놈은 싱글 엔진이라 잔디밭에서도 랜딩이 가능해요. 아, 그리고 연료 체크 수시로 하는 거 잊지 말고. 이륙은 2번 활주로를 쓰도록 해요.”
거기까지 설명을 마친 헤임멜이 조수석을 떠났다.
싱글 파일럿에 시계 비행(조종사가 눈으로 직접 주변 장애물을 인식하여 비행하는 것)을 해야 한다. 오랜만이다. 헤드셋을 끼고 엔진을 켰다. 휘발유 냄새가 메케하게 맡아진다. 천천히 바퀴를 굴려 칠이 반쯤 벗겨진 ‘2’라는 숫자를 찾았다. 짧은 활주로 거리만큼이나 이륙은 간단했다. 가볍게 떠오른 기체가 4000미터 상공까지 올라왔다.
나는 곧바로 비행장을 벗어나 다이아몬드 해변으로 향했다. 겨울이 아니라서 빙하는 녹았고 검푸른 바다만이 보였다. 아이슬란드는 ‘불과 얼음의 땅’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겨울이 유명하지만, 결로가 생길 수 있기에 비행은 조금 위험하다. 걸어서 가야 하는 곳은 겨울에 들르기로 하고, 날아서 갈 수 있는 곳들을 찾아다녔다.
휴화산을 지나 피오르드 근처를 날았다. 마그마가 굳어진 땅에 이끼가 몽글몽글 끼어 초록 버섯과 같은 모양을 만든 지역도 있었다.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면 더 좋았을 법했다. 혼자 시계 비행을 하며 경치를 온전히 구경하기란 쉽지 않은 모험이었다.
1시간 조금 넘게 비행을 한 뒤 돌아왔다. 헤임멜에게 다시 연료를 채워 달라고 부탁한 뒤 컨트롤실 옆에 있는 간이식당으로 가서 과일 주스와 샌드위치를 샀다. 반쯤 썩은 나무 의자 위에 앉아 점심을 해결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한재이에게서 온 메시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와…… 이렇게 통화하기 힘들 줄이야. 친구 사이 끝내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더니 여전하네, 우서진.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섭섭하다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미안. 틈이 나지 않아서.”
-그래. 나는 한가해서 네가 전화하면 바로바로 받나 보지.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휴가 중이고 한재이는 근무 중이다. 나의 메시지는 항상 짧고 간결했지만, 그의 긴 답변은 차곡차곡 휴대폰에 쌓이는 중이었다. 친구일 때는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사과를 해야 하는 사이가 되었다.
“너 바쁜 거 아니까 더 연락 못 했어. 나중에 퇴근할 때 전화하려고 했었고. 미안해.”
-퇴근할 때쯤에는 말라비틀어졌을 거야. 나 이렇게 먹고 버려지는 건가 싶어서 종일 아찔했어.
그의 농담에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소리에 그도 웃었다. 한재이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니 다시 웃음이 났다. 이것은 전염병 같은 것이다.
-한국 가는 티켓 끊었어, 12일 오전 비행기로. 이거 원 웨이 티켓이야. 무슨 뜻인지 알지?
알고 있다. 그리고 12일이면 2주 후다. 생각보다 빨리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머릿속에서는 행복한 카운트다운이 자동으로 시작되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걱정되었다.
“무리하는 거 아니야?”
-조금은 무리해도 괜찮잖아. 이제 못 기다리겠어. 설마 나만 그런 거야?
“아니야 나도 그래. 더는 못 기다리겠어. 무리해 줘서 고마워.”
그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나는 용기를 냈다.
“보고 싶어.”
서늘한 여름 바람이 불어오는 평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휘발유 냄새와 비행기 엔진 소리를 만끽하며 그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로서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내가 좀 더 감정 표현이 익숙한 사람이었다면 그에 대한 그리움을 한 시간 내내 토해 냈을 텐데. 옆에서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고, 그러니 빨리 내 옆으로 와 달라고 매달렸을 텐데. 불행히도 나는 그런 쪽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바보 같은 한재이는 겨우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녹아내렸다.
“듣고 있는 거야?”
-응. 형체는 없어지고 입만 둥둥 떠다니고 있어.
“오버 하지 말고. 아직 근무 시간이잖아, 들어가 봐.”
-호텔 가서 연락 준다고 약속하면 끊을게.
“약속할게.”
-약속 지켜.
“알았어. 들어가 보라니까.”
-바이.
후드득 통화가 끝이 났다. 휴대폰을 다시 재킷 주머니에 넣고 주스 팩과 샌드위치 포장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옆에는 조그맣게 차려진 기념품 코너가 있었다. 아무도 사지 않을 법한 오래된 장난감과 화산 모양의 장신구들이 늘어져 있었다. 나는 거기서 엽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조금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커피 한 잔과 함께 계산했다.
“4년째 여기 드나드는데, 기념품 팔린 거 오늘 처음 봐요.”
옆에서 커피를 계산하려던 여자 손님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녀는 새파란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올리고 재밌다는 듯 내 손에 든 엽서를 쳐다보았다.
“사진이 멋져서요.”
“그건 그래요. 여긴 관광으로?”
“뭐, 그런 셈입니다.”
“슈미츠, 연료 다 채워 넣었어요. 몇 시에 다시 출발할 거예요?”
헤임멜이 다가와 키를 돌려주었다. 그에게 30분쯤 후로 이야기하고 다시 같은 활주로를 부여받았다. 여기는 클리어런스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소박한 컨트롤 타워였다.
“파일럿이에요?”
우리의 대화를 들은 그녀가 다시 질문을 해 왔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던 시선을 조금 더 오래 유지해 보았다. 전형적인 금발의 유럽인이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쯤, 슬라브계 동유럽 억양의 영어를 쓰고 있었다.
“네. 오늘은 휴가차 들렀습니다.”
“나도예요. 매년 여름 여길 와요. 반가워요. 그런데 어느 항공사?”
그녀가 말한 ‘나도’라는 의미는 자신도 파일럿이라는 뜻이었다. 체코 출신의 그녀는 카타르에서 비행 훈련을 막 마친 신참 조종사였다. 친구들과 여행 왔던 아이슬란드의 풍경이 너무 좋아 매년 휴가 시즌이 되면 여기로 놀러 오는데 정작 비행기는 몇 번 빌리지 못한다고 했다. 이제 막 입사한 부기장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취미 생활이라며, 오늘은 헤임멜과 수다나 떨러 온 거라고 했다.
커피를 마시며 이어지던 대화가 끝나고 나는 혼자 벤치에 앉아 펜을 꺼냈다. 한재이가 선물해 준 만년필로 그에게 짧은 엽서를 썼다. 이 기분을 그에게 전달해 주고 싶었다. 나도 그를 그리워하고 늘 생각하고 있음을 증거로 남기고 싶기도 했고.
유럽의 우편 시스템은 여전히 형편없었지만, 2주 안에는 그의 독일 집으로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쓴 엽서를 가방에 넣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1시간 반 정도를 더 공중에서 보냈다. 생텍쥐페리의 취미는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까지 활자 중독은 아니었다. 물론 가지고 온 책은 한 권 있었지만 5000미터 상공에서 펼쳐 보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사진을 찍었다. 80년 전 그에게도 휴대폰이 있었다면 책을 읽는 대신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내려다보이는 초원 위로 양 떼들이 보였다. 옷감처럼 구겨진 산맥 위에는 녹지 못한 눈과 얼음이 흩어져 있었다.
오전에 둘러봤던 곳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와 가뿐하게 착륙했다. 내일은 좀 더 북쪽으로 가 볼 생각이다. 헤임멜을 찾아 키를 돌려주고 체크리스트를 받아 들었다. 서명을 하고 있는데 컨트롤실 안쪽 의자에 앉아 있던 금발 체코 부기장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예약해 둔 택시가 취소된 모양이었다.
“하루 만에 갑자기 파업을 하다니. 이 나라도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네.”
“버스를 타. 1시간에 한 대씩은 온다고, 별일 없으면.”
그렇게 말하던 헤임멜은 내가 건넨 체크리스트를 받아 들고 옆에 자신도 서명했다. 오전에 내밀었던 카드가 결제되고 영수증이 내게 돌아왔다.
“지난번에도 버스 기다리다 2시간이나 여기서 죽치고 있었다고.”
“그래도 탔으니 다행이지. 버스가 아예 안 들어오는 날도 있는데.”
“놀리는 거야?”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가방을 챙기던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시내까지 태워 드릴까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는 바쁘지 않았으니까.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 낯선 남자의 차를 얻어 타는 것은 조금 위험한 일이겠지만 나의 신원 보증은 헤임멜이 해 주고 있었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그녀는 승낙했고 투숙 중인 호텔 주소를 내게 보여 주었다.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주소라도 먼저 물어보고 오지랖을 부릴 것을 잠시 후회했지만,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와 주차해 둔 차에 시동을 걸었다.
헤임멜은 컨트롤실 문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차 트렁크에 짐을 실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느리게 해가 지는 평원 위를 달려 시내로 향했다. 피곤했는지 그녀는 조금 졸기도 했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짐을 호텔까지 들어다 주고 다시 차로 돌아가려는 나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보답으로 내가 저녁 살게요.”
어차피 나도 저녁을 해결해야 했으므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짐을 프런트에 맡기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호텔 밑에서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을 외면한 채 나를 끌고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슬란드의 물가는 아주 비쌌기에, 만약 그녀가 호텔 식당으로 들어갔다면 나는 많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엔 내가 계산하겠다고 우겨야 했을 것이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대접을 하겠다는 생각이 좋아 보였다. 나는 간단한 홍합 요리와 수프를 주문했다.
“한국은 어때요? 국적기에 외국인 조종사 고용해 주는 몇 안 되는 나라라서 나도 생각해 본 적 있었거든요.”
“고용이 좀 불안정하지만. 연봉을 따진다면 나쁘지 않습니다. 카타르도 대우가 괜찮을 텐데요.”
“여긴 반대예요. 외국인한테 박해서. 기장이 되면 좀 나아지려나.”
“네. 확실히 나아집니다.”
그녀는 웃을 때 아주 시원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음식을 먹을 때는 손으로 입을 가렸는데 붉은색 손톱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술은 마시지 않았고 탄산수로 목을 축였다. 그녀는 말주변이 좋았다.
“……그래서 기장이 참다못해 나한테 소리쳤어요. 멍청아, 브레이크를 밟으라고 브레이크를! 하하하.”
“ABS(Anti-lock Braking System. 브레이크 종류 중 하나)가 작동 안 하고 있었나 보죠?”
“하고 있었죠. 파워로 속도 조절을 하려다가 실패했어요.”
“그럴 때는 스포일러를 먼저 올려도 상관없습니다. 활주로 거리에 여유가 있다면 트러스트 리버서를 쓰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브레이크가 걸리니까요.”
“다음에는 그렇게 해 볼게요. 그나저나 다시 기회가 주어져야 할 텐데 말이죠.”
“랜딩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그렇게 상심할 필요 없어요.”
내 말에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식당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서버가 다가와 계산을 요청했다. 그녀는 벽에 걸려 있던 시계를 쳐다보고는 지갑을 꺼내 테이블 계산을 마쳤다.
신용카드를 돌려받은 그녀가 의자를 빼고 먼저 일어났다. 나는 잘 먹었다는 말과 함께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일어나려 했는데, 그녀는 갑작스레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그대로 있으라는 듯 손으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룸 넘버는 803호예요. 내일까지 머물 거고, 난 12시 전엔 자지 않아요.”
플로랄 향과 함께 그녀가 자리를 떠났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슬쩍 나를 돌아본다. 여전히 자신에게 시선이 꽂혀 있음을 알고서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남기고 간 카드 영수증이 놓여 있었다. 서명란에는 이름 대신 ‘803’이라는 숫자가 휘갈겨 쓰여 있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계산을 해 주던 서버가 힐끔 돌아보며 내 행동을 주시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그녀가 사라진 식당 밖 거리를 바라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릇한 웃음을 머금으며 내게 인사를 하는 서버를 뒤로한 채, 나는 그녀의 호텔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목적을 잃은 카드 영수증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 * *
-아쉬워?
그의 첫 반응이었다. 호텔로 돌아가 전화를 건 나는 예상보다 늦게 들어온 연유를 설명하느라 방금 있었던 일을 실토해야 했다. 한재이는 화를 낸다기보다 골이 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반응이 저러했다. 아쉽냐니.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었다.
-시간과 장소가 맞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최고의 유흥이잖아.
“내가 그런 놈으로 보여? 며칠 전엔 너랑 차에서 뒹굴다가 오늘은 모르는 사람과 몸을 섞을 만큼 유흥이 아쉬워 보이냐고.”
-모르지. 우린 그런 얘기를 너무 안 했잖아. 섹스에 관해선 초면이나 다름없다고.
골이 날 대로 난 그는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질투인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니 그럴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궁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본인이나 잘해.”
-만약 나랑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그랬으면 갔어?
그는 집요하게 추궁했다. 듣고 싶은 말이 있나 보다.
1년 전의 나였다면 갔을 것이다. 여자 친구가 없었을 때였고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한재이와 이어지지 않았다는 가정하의 오늘이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호텔에서 장송곡을 부르고 있었겠지.
“안 갔을 거야.”
그가 듣고 싶었을 말을 해 주었다. 그제야 한재이는 목소리를 풀었다. 망할 놈의 장거리 연애.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그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 면이 좀 귀여웠다.
다음날부터는 매일 저녁 일찍 전화를 걸어 주었다. 어떨 때는 퇴근 중이기도 했고 어떨 때는 아직 회사 안이었다. 그러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 그는 퇴사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부터는 정신없었다. 휴가 이틀을 남기고 한국에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한재이의 짐이 밀려 들어왔다. 항공편으로 부친 박스들이 차곡차곡 그의 방에 쌓이기 시작했다.
뜯지 않은 새 침대와 그가 썼던 책상을 보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같이 지낸다고 해도 각자 방은 필요하겠지. 줏대 없이 들어찬 가구들을 재배치하며 오랜만에 땀을 흘렸다. 쌀도 사 두고 맥주도 채워 넣었다.
휴가 이후 첫 출근을 하며 한국의 한여름을 실감했다. 숨 막히는 습도 탓에 과연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공항 터미널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땀이 났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김포공항 관계자실로 들어섰다. 오늘 오랜만에 전성욱 부기장과 편조가 되었다.
“덥죠? 휴가 다녀오셨다더니 별로 타지는 않으셨네요?”
“네. 여름에도 서늘한 곳이어서. 부기장님 시뮬레이션은 잘 끝나셨습니까?”
“잘 끝났어요. 또 이렇게 반년 벌었네요. 하하.”
전체 브리핑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운항 계획을 간단하게 논의하고 남은 시간에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곧 태어날 아이 이름을 고심 중이었다. 후보가 여러 개 있다며 내게도 한 표 던져 줄 것을 부탁했다. 설마 정말 다수결로 아이 이름을 정하진 않겠지. 결국엔 부부의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할 것 같은데 그는 그저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 즐거운 듯 보였다. 나는 2번에 한 표를 던졌다.
전성욱 부기장은 요즘 혼자 지낸다고 했다. 출산 휴가에 접어든 아내는 부모님 댁으로 가게 되었다고. 아무래도 장거리 비행이 있으면 사나흘씩 집을 비워야 하니 그녀를 옆에서 챙겨 줄 수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좋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단다.
“비행 끝나면 잠을 실컷 잘 수 있어서 좋은데 다음 날 일어나면 쓸쓸해요. 기장님은 오프 때 뭐 하세요?”
“음…… 저도 주로 쉬는데요. 책을 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취미도 고상하시네요. 저랑도 좀 놀아 주세요.”
“그럼요. 혼자 계신 줄 알았다면 연락했을 겁니다.”
“조만간 술 한잔해요, 민우랑 셋이서. 걔 요즘 뭐 하는지 연락도 잘 안 되고 그러네요.”
아, 그러고 보니 간과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조민우 부기장이 전성욱 부기장과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이다. 그와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서도 안 되었다. 어떤 핑계를 대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전성욱 부기장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뭐든지 한번 결정하면 빠르게 행동하는 민족답게 그는 셋이 있던 대화창에 오랜만에 메시지를 띄웠다.
시간 내서 술 한잔하자는 그의 메시지가 내 휴대폰 화면에도 떠올랐다. 나는 대화창을 확인했고 마지막 한 사람은 아직 읽지 않았다. 우리가 비행에 들어가 휴대폰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도 그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해결해 줄 수 없었다.
* * *
한재이와 나의 스케줄은 조금 꼬였다. 그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날짜에 나 역시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이 잡혀 있다. 문제는 각자 도착하는 공항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도착 시간은 내가 조금 빨랐기에 가능하면 데리러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괜찮다고 했다. 한 시간이 더 걸리든 열 시간이 더 걸리든 집에서 보면 되니까. 최종 목적지가 같아진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방콕에 도착한 뒤 하루를 체류하기 위해 크루들과 지난달에 묵었던 호텔을 다시 찾았다.
전성욱 부기장과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 몇 명이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모두 남자였다. 성별과 상관없이 친하게 지내는 건 아직 어색한 일인가 보다. 아니면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객실 승무원 두 명과 나와 전성욱 부기장, 그리고 어제부터 체류 중이던 또 다른 부기장 한 명이 현지 식당을 찾았다. 세 명이 기혼, 나와 객실 승무원 한 명이 미혼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좀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옵션이 있냐고 물었어요. 뭐 마사지에 옵션이라고 하면 오일 종류 고르고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 직원 말이 ‘해피 엔딩’ 추가할 거냐고.”
“해피 엔딩? 해피……? 아아, 하하하.”
“아니, 그래서? 추가했어요?”
“일단 얼마냐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또 거기서 옵션을 고르라는 거예요.”
“뭐야. 손으로 아니면 입으로, 뭐 그런 건가?”
“하하하. 아니요, 나도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점원 말이, Male or Female.”
“응? 엑? 진짜요?”
“이 사람아, 태국이잖아. 취향이 있을 수도 있는데 당연히 물어봐야지. 그래서 뭐로 고르셨어요?”
“아, 고르긴 뭘 골라요. 그냥 오늘은 마사지만 하겠다고 했죠.”
“아니, 근데 퇴폐업소 아닌데도 그런 걸 물어봤어요?”
“네! 간판은 멀쩡했거든요. 아무튼 마사지는 진짜 잘하더라. 어우, 거기 또 갈까 봐.”
나는 아까부터 이 대화에 한마디도 끼지 못한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은 직장 동료로서 나눌 수 있는 대화의 경계선을 뛰어넘고 있었다. 매우 불편했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미지근해진 물만 마시며 그들의 대화를 흘려보냈다. 왜 이렇게 음식이 나오지 않는 건지 원망스럽게 주방 쪽을 한번 쳐다보기도 했다.
“아니, 근데 여기는 진짜 개방적인가 봐요. 호텔에 TV 틀어 보셨어요? 유료 채널에 게이 포르노 나오더라고. 와, 씨! 나 진짜 식겁해 가지고, 하하하.”
“저도 결혼 전에 방콕 클럽에 간 적 있었는데 진짜 연예인같이 생긴 사람이 있는 거예요. 와, 엄청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쳐다봤는데 목소리가 남자더라고요. 진짜 문화 충격.”
“맞아요. 요즘은 덜한데 몇 년 전만 해도 밤에 유흥가 나가면 그런 애들이 오빠, 오빠 하면서 쫓아왔어요. 한국말도 되게 잘해, 보면.”
“아니, 부기장님 비행 와서 클럽도 가셨어요? 이거 안 되겠네. 사모님은 아시나?”
“결혼 전이라고, 결혼 전. 결혼 전엔 가도 되잖아.”
“그럼 저는 아직 미혼이니까 다녀와도 될까요?”
“여기 기장님도 미혼이야, 모시고 가.”
“오! 기장님, 저희 오늘 한번 불태워 볼까요?”
“아,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음식 나왔네요. 부기장님, 뒤에 음식…….”
갑자기 대화의 화살이 나에게 돌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때마침 가게 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뒤에 서 있었기에 나는 화제를 바로 돌릴 수 있었다. 그들도 그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끌고 갈 생각은 없었던지 이번에는 자연스레 태국 음식 이야기로 달아올랐다.
간간이 오가는 맥주 건배를 맞춰주고 한 번씩 던져지는 ‘독일은 어때요?’라는 단골 질문에 대답도 해 주었다. 왁자지껄한 사내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오갔지만, 내게는 좀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뭔가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 아시아와 서양, 서울과 지방, 남성과 여성. 그러다 마지막엔 꼭 혈액형을 물어본다. 나는 내 혈액형을 모른다. 그러면 터져 나오는 의문의 함성. 어떻게 자신의 혈액형도 모를 수가 있냐며. 글쎄, 30년간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 * *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기장님도요. 나가서 점심 같이하실래요?”
“아, 죄송합니다. 약속이 있어서.”
“네. 다음에 해요, 그럼.”
김포공항에 도착한 A350의 세큐어 체크가 끝나고 콕핏을 나가려던 찰나 전성욱 부기장이 점심을 제안했다. 평소 같았으면 반가웠겠지만, 오늘은 미안하게도 응해 줄 수 없었다. 우리는 예상 시간보다 10분 늦게 착륙했다. 나는 운항 일지를 반납한 뒤 유니폼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서둘러 시동을 걸고 김포공항을 빠져나왔다.
[도착했지? 나 지금 인천으로 가는 길인데 기다릴래?]
잠시 신호가 걸린 틈을 타 급하게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출발 전 확인했던 프랑크푸르트발 비행기는 지연 없이 예상 시간 내에 도착했던 것으로 나왔다. 그래서인지 얼마 안 가 한재이에게서 답신이 왔다.
[나 벌써 버스 탔는데.]
젠장. 조금 더 일찍 메시지를 보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탔어?”
-10분 전에 출발했어. 연락 없길래 그냥 탔는데 기다릴 걸 그랬네.
“김포 쪽으로 바로 빠지는 거지?”
-그렇겠지.
나 스스로가 수도 없이 타고 다녔던 버스였기에 노선은 이미 외우고 있었다. 10분 전에 출발했다면 지금쯤 어디일지 눈에 선했다. 순간적으로 고속도로와 서울 시내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가 타고 있는 버스 노선과 내가 가야 할 방향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지점을 계산해 보았다. 나는 곧바로 차선을 변경하고 유턴했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는 택시보다 더한 곡예 운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도 없이 차선 변경을 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평일이라 차가 밀리지는 않는다. 순간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여러 핑계가 있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1분 1초라도 더 빨리 그가 보고 싶었다.
변수가 없어진 계산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저 앞에서 신호 대기에 걸려 정차하고 있는 몸집 큰 공항버스가 보였다. 그가 부디 오른편에 앉아 있길 바랐다. 신호를 받자마자 옆 차선으로 따라붙었다. 끝에서부터 천천히 승객들을 확인했다.
익숙한 실루엣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읽고 있는 듯 고개를 숙인 채로 창밖은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옆을 보라고 말했다.
그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옆 차선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서진, 멋진데.
한재이가 창가에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았다. 스스로 하고 있는 최초의 미친 짓이 부디 그의 마음에 들기를 바랐다. 나는 운전 중이었으므로 그를 계속 쳐다볼 수 없었다. 간간이 눈이 마주치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도 그게 뭐라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따라잡았어?
“그냥 재능.”
앞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지켜 주기 위해 속도 조절을 하는 통에 아까부터 뒤차의 욕을 먹고 있었다. 클랙슨을 울리며 빵빵거리는 소리에 눈치를 챈 몇몇 버스 승객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재미난 구경이 난 듯 대체 누굴 쫓아오고 있는 건지 주인공을 찾는 듯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끝난 것 같았다. 나는 가속 페달을 밟아 속도를 내고 사라졌다.
통화는 여전히 연결된 채였기에 차량 스피커 너머로 첫 번째 정류장을 안내하는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정류장 이름을 듣고 대충 어디쯤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내릴게.
한재이의 마지막 말과 함께 전화는 끊겼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잠시 정차할 곳을 찾느라 속도를 줄였다. 번화가여서 그런지 마땅한 곳이 없었다. 정류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은행 건물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다. 저 앞에서 손님들을 내려 주고 있는 공항버스가 보였다.
가장 마지막에 그가 내렸다. 호주머니에 손 한쪽을 꽂은 채 선글라스를 쓰며 주위를 살핀다. 부를 수는 없었기에 조금 빨리 걸어갔다. 아니, 뛰었다고 해야 맞을까. 금방 땀이 흘렀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로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쳐다보며 서 있다. 그는 서 있고 내가 다가갔다.
“더운데 왜 뛰어와.”
그렇게 말하는 한재이의 모습은 뭐랄까, 11시간을 날아 온 사람이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여유 있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셔츠에 슬랙스, 심지어 헤어스타일까지 정돈되어 있었다. 혹시 서울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냥 내게는 그만큼 완벽하게 보였다는 걸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유니폼의 삐뚤어진 윙을 바로 세워 주었다. 그 밑에 달린 이름표도 매끈하게 닦아 내고는 이제 되었다는 듯 가슴을 툭툭 손으로 두드렸다. 별다른 행동도 아닌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별다른 행동도 아닌데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시선을 던졌다.
오후 3시 지하철역 앞은 평일임에도 붐볐다.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눈빛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니 한재이가 뒤로 물러섰다. 다시 호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씁쓸하게 웃었다. 인사의 포옹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의 감정이 한 발짝 다가선 만큼, 겉으로는 한 발 더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살려면 앞으로 좀 불편하겠다.”
“유니폼 때문에 더 그래. 서 있기만 해도 쳐다보거든.”
“알아, 뭔지. 나도 너한테 그런 판타지가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어 버렸다. 곤란한 상상이 머릿속을 파고든 탓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의 입술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눈은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공항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했다. 소란하게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다. 어떤 사람은 우리 둘 사이를 가로질러 가기도 했다.
집으로 가자. 세워 둔 차를 향해 걸으며 그가 말했다. 나란히 걸으며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비행은 어땠냐고 물어보니 그가 웃으며 너는 어땠냐고 되물었다. 내겐 일인데 뭐, 그냥 길고 지루했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나도 그랬어. 그 어느 때보다 길고 지루하더라.
그리고 답답하더라. 또 혼자 오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비행시간 내내 초조하더라. 그런데 그건 다 기우에 불과했어. 네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런 걱정은 다 잊었어. 버스를 쫓아오는 너를 보며, 또 뛰어 오는 너를 보며 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었지.
“고마워, 열렬히 환영해 줘서.”
* * *
잠을 잘 때는 바깥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을 만드는 것이 나의 버릇이다. 직업상 내 신체 리듬은 해가 뜨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흘러가야 해서, 내가 잠을 자야 할 때가 밤이었고 깨야 할 때가 낮이 된다.
눈을 뜨는 것은 대개 알람 소리나 휴대폰 진동 소리, 그렇지 않으면 악몽의 끝자락이 대부분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살아 있는 누군가가 뒤척이는 움직임과 숨소리, 살갗이 맞닿는 촉감에 잠이 깼다.
이곳은 집이고 한재이가 어제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정수리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부풀었다 꺼지는 그의 가슴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이렇게 밤새 끌어안고 잤을 리는 없었다. 한두 번 먼저 깨어난 후 멋대로 나를 안고 다시 잠을 청했을 것이다. 천천히 몸을 돌려 자세를 바꾸어 보았다. 순순히 떨어지는 팔에 안심하며 상체를 틀고 베개에 파묻혀 잠을 자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디가 그렇게 좋아? 알랭은 그렇게 물으며 외모는 빼자고 말했지만 역시 포함해야 할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잘생긴 것만으로 좋아하게 된 건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 싶어서였지 그의 외모를 찬양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보기 좋게 정돈된 눈썹이 맘에 들어 검지로 쓸어 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 중에서도 눈썹과 눈매를 매우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줄곧 만져 보고 싶었다. 단단하게 뼈가 만져지는 눈썹 산을 타고 내려와 광대뼈를 지나 매끈하게 면도 된 턱까지 쓸어내렸다. 그 순간 그가 눈을 떴다.
“Hey…….”
여전히 반쯤 감은 채였지만 한재이는 나를 보자마자 옅게 웃었다. 나는 그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에 닿은 손은 거두지 않았다. 내친김에 오뚝하게 솟은 코도 만져 보고 입술도 만져 보았다. 한재이는 눈은 뜬 채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저를 예뻐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커피?”
“응, 좋은데.”
그가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커피를 찾는 것을 알고 있기에 상체를 일으켜 침대 밑으로 발을 내디뎠다. 순간 내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음을 인식했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방에는 벗어 던진 옷가지와 딱딱해진 티슈 뭉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얼른 일어나 옷장에서 바지를 꺼내 입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한재이의 시선은 모른 척한 채 거실로 나가 커피 머신의 전원을 올렸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와 함께 원두가 갈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어제 그와 다시 몸을 섞었다.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올라오기까지 온갖 교양 있는 척, 품위 있는 척은 다 떨어 놓고서 둘 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서로의 입술을 찾아 부딪치고 엉켰다. 나 역시 키스만 하고 떨어질 생각은 없었기에 작정하고 리드해 볼 생각으로 침실로 그를 몰아세웠는데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뭘 해 볼 틈도 없이 한재이가 나를 깔고 상위를 점령했다. 그러고는,
‘벗지 마.’
유니폼을 벗으려는 나를 저지했다.
그는 끌어 내려진 넥타이와 헤집어진 유니폼 안에 키스를 퍼부으며 붉은 흔적을 남겼다. 곧바로 버클이 풀리고 내가 한 번의 사정을 하는 동안에도 끝까지 상의를 탈의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그런 것에 흥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런 게 좋아?’
‘뭐가.’
‘옷 입은 채로 하는 이런 거.’
나의 물음에 그의 대답이 뭐였더라. 남들은 감히 건드릴 수도 없는 사람을 손대는 것 같아서 짜릿하다고 했던가. 나는 싱겁게 웃으며 머그잔 하나를 꺼내 내려오는 커피를 받았다.
그렇게 오후부터 밤을 꼬박 새워 가며 쉬지 않고 섹스했다. 장장 7시간이었는데 막판에는 스스로 체력이 달리는 것이 자존심 상할 정도였다. 한재이가 그렇게까지 스태미나가 좋은 줄은 몰랐다. 게다가 11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인데…….
마지막에는 그가 정말 밤을 새울 작정인 것 같아서 제발 그만하자고 설득까지 해야 했다. 나는 누운 채로 현기증까지 느낄 정도였으니 얼마나 무리를 했는지 알 만했다. 그렇게 쓰러져 자고 일어난 것이 지금이었다.
사념을 걷어 내고 커피 향이 가득 찬 머그잔을 꺼냈다. 옅게 마시는 그의 취향을 고려해 뜨거운 물을 조금 섞었다. 방으로 들어오며 흐트러진 옷가지들을 손으로 정리했다.
한재이가 커피를 건네받으며 내 것을 물었다. 카페인을 줄이고 있노라고 이야기하자 말도 안 된다며 옆으로 다가와 앉은 나를 가볍게 때렸다. 그러고는 그 손으로 허리를 쓰다듬다 가슴을 야릇하게 쓸어내렸다. 그 손길을 느끼며 머릿속에서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안 된다. 나는 정말 더는 할 자신이 없었다.
그를 떼어 내기 위해 뺨에 뜨거운 머그잔을 끌어다 대어 주었다. 한쪽 눈썹을 찌푸리던 한재이가 그제야 몸을 제대로 일으켜 앉았다.
“정신이 몽롱해. 시차 적응이 안 되나 봐.”
원인은 시차 적응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입을 다물고 모른 척하기로 했다.
“더 자, 그럼.”
“함께 지내는 첫날인데 잠이나 자는 멍청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아.”
“뭐 하고 싶은데, 그럼. 나 내일 다시 비행 있어.”
“일단 아주 어마어마하게…….”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무슨 큰 발표라도 하는 듯 잠긴 목소리에 톤을 올리며,
“로맨틱한 시간을 보낼 거야.”
따위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웃으며 퍽이나 그러겠다며 창문을 가리켰다. 어제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서울은 온통 비에 젖어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침대에 몸을 기댔다. 정말로 뭐 하지. 그러면 답은 하나다. 여느 때처럼 각자 하고 싶은 걸 써서 고르기로 했다. 이번에는 진짜 다트가 집에 있기도 했고.
“비 오니까 야외 활동은 자제해.”
나는 그가 또 여행을 가자고 할까 두려웠다. 5장씩 종이를 가져가 하고 싶은 것을 적으며 혹시나 몰라 조건을 하나 더 붙였다.
“섹스도 쓰지 마.”
내 말에 무척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던 한재이가 자신이 쓴 종이를 후드득 쏟아내었다. 같이 목욕하며 XX, 부엌에서 요리하다 XX, 드라이브하고 XX…… 온통 성적이고 야한 행위들만 가득한 그의 리스트를 보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이렇게 욕구 불만인 줄은 몰랐어.”
“없던 욕구가 생긴 거라고 해 줘.”
내가 쓴 리스트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중 하나가 한재이의 마음에 들었나 보다. 다만 그도 조건을 붙였다.
“그래, 영화 보러 가자. 대신 표는 내가 살게.”
엉뚱한 데서 고집을 부리는 그를 내버려 두고 나는 샤워를 하러 갔다. 없던 욕구 불만이 생긴 그를 위해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욕실이 두 개 있어 좋은 집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간단하게 이른 점심을 준비했다. 요구르트에 블루베리와 키위를 섞었다. 토스트 빵은 너무 구워 버린 탓에 좀 딱딱해졌다. 과일 주스에 탄산수를 부어 에이드를 만들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식단이었다.
한재이도 샤워를 마치고 식탁 앞에 앉았다. 그을린 토스트 빵을 집어 버터 없이 한 입 베어 물고는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는 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말이 좋아 사업이지, 그냥 작은 법무법인 공동 대표에 이름을 올리는 것 같았다. 유럽 진출 기업들을 상대로 자문을 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고.
원래도 주 클라이언트가 법인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소송 전문 변호사였다. 현지 경영 자문이나 노동법 같은 건 적성에 맞지 않을 텐데 걱정이 좀 되었다.
“재판하는 거 좋아했잖아. 괜찮겠어?”
“스케일이 작아지긴 했지만 뭐, 일은 편하지 않을까 싶어.”
“네가 언제부터 편한 일을 찾았다고. 워커 홀릭이잖아. 너.”
“이제 아니야. 그나저나 키위는 왜 샀어?”
그가 스푼으로 요구르트 묻은 키위를 골라냈다. 추궁하듯 물어오는 한재이를 보며 며칠 전 과일 코너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 자신을 떠올렸다.
성격상 마트에 들르면 항상 정해진 것들만 사게 되는데 그날따라 모험심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게 과일이나 한식 재료들을 카트에 담았다. 그렇게 시작된 쇼핑은 점점 더 의아한 결과를 낳았다. 평소에는 내가 먹지 않던 것, 먹을 수 없었던 것들이 빠르게 카트를 점령해 갔다. 그것들의 다른 이름은 한재이가 좋아하는 것, 그가 즐겨 먹던 것들의 집합체였다.
“그냥. 살 만한 게 없었어.”
“지난번처럼 또 병원 실려 간다. 조심해.”
“영화는 몇 시야?”
나는 말을 돌렸다.
“3시. 천천히 나가도 돼.”
“밀릴 수도 있어. 비 오잖아. 서울을 만만하게 보지 마.”
“한국 사람 다 됐네.”
“한국 사람이야.”
“누가 믿어.”
그가 코웃음을 치며 놀렸다. 버터를 향해 뻗은 손에 한재이의 따뜻한 손끝이 닿았다. 그가 손을 잡았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그대로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손끝에 입맞춤한 뒤 놓아주었다. 남자로부터 받은 첫 번째 구애의 키스였다. 너도 만만치 않아. 이러는데 한국 사람이라고 누가 믿겠어. 그가 동의하며 웃었다.
식사가 끝나고 그는 짐을 정리했다. 쌓여 있는 상자들의 대부분은 옷과 신발이었다. 그의 방에 놓여 있는 침대는 여전히 뜯지 않은 그대로였다. 마치 과거의 유물 같았다. 그와 내가 엇갈리던 그 시절을 상징하는 유물. 한재이는 그 침대 위에 앉아 먼지가 쌓인 매트리스를 손으로 쓸며 물었다.
“언제 온 거야?”
“네가 기젤라 호텔로 들어가던 날 오후.”
나는 팔짱을 낀 채 방 문틀에 기대어 그를 쳐다보았다. 네가 물어보았으니 대답했을 뿐이야, 하는 표정을 짓고서.
“내가 미웠겠네.”
“패 주고 싶었지.”
거짓말이었다. 그날 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함께 바다에 가겠다고 들뜬 채 집에 들어와 신기루처럼 사라진 그를 멍청하게 기다렸다.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을 믿고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고작 2개월 전의 일이 전생의 기억처럼 흐려져 있었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기회를 줄게. 한 대 쳐.”
한재이의 말에 허무하게 웃음이 났다. 사실 별로 언급되고 싶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이다. 하물며 그때의 기분을 동정하며 보상받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가 팔을 뻗어 나를 잡아당겼다. 멋대로 주먹을 쥐게 하고 이렇게 때리라는 듯 제 뺨 위를 툭툭 건드렸다.
“셋을 셀 동안 때려. 하나.”
침대 위에 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주먹 쥐어진 손이 닿았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맞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그가 ‘둘’을 외쳤다. 나는 주먹을 펴고 한재이의 뺨을 감쌌다. 그러고는 무릎을 벌려 그의 위에 올라타고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다음을 말해 보라고 기다리는 나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셋.”
입술이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 키스했다. 한재이의 혀는 응답하지 않은 채 갈구하는 나의 움직임을 느긋이 즐기고 있었다. 그의 말랑한 입술을 맛보고 고른 치아를 훑었다.
살짝 틀어진 틈을 비집고 그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놀고 있던 두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안더니 강하고 깊게 나를 안았다. 맞물린 입속으로 들어오는 그의 혀를 느끼며 다시금 흥분했다. 우리 나가야 하는데. 중얼거리는 나를 안고 한재이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날도 비가 오지 않았던가. 홍콩 비행을 마치고 혼자 비를 맞고 들어와 사라져 버린 그를 그리워했었다. 그렇게 주인 잃은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던 순간을 덧칠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위에 올라탄 채 키스를 퍼부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짝사랑의 시간을 지우고 있었다. 우리는 원래 서로를 점령한 상태였잖아. 자각하지 못했던 그 나날들에서조차 너도 나를 원하고 있었잖아. 그렇게 기억이 조작되어 간다. 빗소리가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한재이는 나에 의해 속절없이 구겨진 셔츠를 갈아입었다. 그동안 나는 풀어진 단추를 채우며 휴대폰을 찾아 헤맸다. 소파 위에 뒹굴고 있었다는 목격자의 말은 허위 진술로 판명 난 채 식탁 의자 옆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그리고 자동차 키를 손에 쥐었다. 현관문을 열어 밖을 보니 비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빨리 준비하라는 재촉을 했다.
우산 없이 빌라 주차장으로 뛰어 들어간 우리는 서로의 머리에 맺힌 빗방울을 털어 주며 차 문을 열었다.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평일 오후 도로는 적당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집에 있을 때도 향수 뿌려?”
그의 질문은 좀 뜬금없었지만, 바로 전에까지 나와 침대에서 뒹굴었던 사람인지라 굳이 못 할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응. 버릇이야.”
“왜?”
“애들이 자주 놀렸어. 아주 어릴 때, 너 만나기 전에. 그래서 냄새에 민감해졌나 봐.”
나는 구태여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까진 왜 묻지 않았는지가 오히려 궁금해질 만큼 별것 아닌 기억이 되었으니까. 내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일어나지 않는 그를 설득해야 했던 10분 전을 떠올렸다.
조수석에 앉은 한재이는 그 향수가 자신의 취향에 맞다고 해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힐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내 생각하면서 한 적 있다고 했잖아. 어디까지 상상했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되물음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상대에게 다시 한 번 더 물음으로서 충격 받은 자신에게 시간을 벌어다 주는 것이다.
“내 말은, 어디까지 가능하냐고. 네 취향을 알고 싶어.”
“그런 말을 꼭 지금 들어야겠어?”
나는 운전 중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괜히 한번 차선을 바꾸었다.
“우리 섹스에 관해선 초면이라고 했잖아. 이런 얘기 자주 나누고 싶어. 내가 너한테 기대하는 걸 너는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고.”
“난 지금도 좋아. 넌 뭘 더 원하는데.”
신호가 걸린 틈을 타 운전대에서 손을 내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연인과 섹스 취향 이야기를 하는 인생이라…… 나답지 않아서 새롭다.
“지금이 별로라는 얘기는 아니야. 다만 더 즐길 수 있잖아. 근데 내가 원하는 걸 말하면 네가 남자로서 기분 나쁠 수도 있어서 그래.”
“탑, 바텀의 얘기를 하는 거야?”
직설적인 내 물음에 그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뭐…… 그것만 집어서 얘기하는 건 아닌데. 그래, 맞아. 그 얘기를 하는 거야.”
신호가 다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민망함을 운전으로 해소시키며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깔리고 싶지는 않아.”
“확실해?”
“응.”
“그래, 알았어.”
이름을 묻듯 건조하게 확인을 마친 한재이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물러섰다. 이 문제에 관해선 싸움이 날 수도 있다. 나와 한재이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다.
나의 오래된 자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선 새롭게 만들어진 자아가 호기심에 눈을 깜빡였다. 아직은 전자가 유리했다. 30년 평생을 지배해 오던 존재였으니 당연한 건가. 급하게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시간을 벌고 싶었다.
* * *
비 내리는 서울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규모가 작은 경기도의 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이었다. 집에서도 멀리 떨어진 이런 곳을 왜 찾아왔는지 물어보니 한재이의 반응도 똑같았다. 그러게, 이렇게 먼 곳인 줄은 몰랐다며. 심지어 자신이 예매한 영화 제목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게다가 한국 영화도 아니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프랑스 영화를 봐야 하는 건데.”
그다지 예술 영화에 취미가 없는 나는 실망감에 가득 찼다.
“독일에서는 더 보기 힘든 거 몰라?”
“솔직히 말해. 일부러 그런 거지?”
한재이는 웃으며 앞장서서 들어갔다. 근처 사는 사람들만 이용하는 규모라 그런지 이용객이 적었고 조용했다. 상영 시간 10분을 남겨 두고 먼저 입장했다. 프랑스 영화의 명성답게 좌석은 텅텅 비어 있었고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좌석 번호 알려 줘.”
“비어 있잖아. 아무 데나 앉아. 저기는 어때?”
광고도 시작되지 않은 어둑한 상영관 안에서 한재이가 가장 좋은 중앙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성격 몰라? 좌석 어디냐니까.”
“어차피 아무도 안 올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표를 다 샀거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멍청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재이는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네가 나를 정말 몰라서 그런 반응을 짓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토해내고 그가 가리킨 좌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기가 예매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평일 오후, 아직 표가 하나도 팔리지 않은 상영관을 찾아 사재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런 영화 외에는 예매할 수 없었겠지. 여기 직원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볼 것이 뻔하다.
스크린이 열리고 광고가 시작되었다. 한재이가 옆 좌석으로 다가와 앉았다. 둘 다 자연스레 휴대폰을 끄고 말이 없어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데 인간의 몸에 밴 사회성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녁은 뭐 먹지?”
광고 소리와 함께 섞여 들어온 한재이의 낮은 목소리가 귓속을 간지럽혔다. 프랑스 영화를 볼 거니까 프랑스 요리를 먹으러 가자. ‘좋아.’ 다시 속삭이며 다가오는 그를 향해 제대로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굳이 이렇게 귓속말할 필요는 없지 않아?”
“이게 더 재밌잖아.”
동시에 웃었다. 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둘뿐인 상영관 안에서 우리는 점잔을 빼고 앉아 영화를 즐겼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보고 있는 이 시간을 즐겼다.
영사기를 통해 쏟아지는 내용 같은 건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컴컴한 공간에서 정면을 보고 있지만, 내내 옆에 앉아 있는 그 사람만 의식하게 된다는 이 100년도 넘은 전통적인 방식의 데이트는 여전히 유효하고 짜릿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티를 내지 못한다는 것인데 한재이가 돈을 주고 이 단점을 없애 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중반부터 대놓고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건드리지는 않았다. 팔걸이에 얹은 손이 잡힐까 내내 신경이 쓰인 쪽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 한재이는 여유롭고 근사한 자세로 나를 감상했다. 이쯤 되니 나도 억울해진다.
“영화 안 봐?”
그는 말없이 자신의 귀를 가리킨다. 듣고 있다는 시늉이고 자막을 보지 않고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좀 재수 없네. 가끔 품고 있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그와 경쟁하려 드는 내가 심술이 났다.
“보려면 제대로 봐. 재미없으면 나가고.”
“재밌어. 하나도 안 지루해.”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너를 보는 것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중의적인 표현을 받아칠 좋은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럴 때 보면 변호사가 맞긴 하다.
“우리도 저거 해. 좋아하는 영화 대사를 말해 봐.”
이대로 두면 내가 계속 나가자고 할 것 같아서였는지 한재이가 스크린을 가리키며 저들이 하고 있는 놀이를 따라 하자고 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좋아하는 대사들을 읊으며 프랑스 허세 예술 놀이에 심취해 있는 중이었다. 내게 제일 좋아하는 영화 같은 건 없었지만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하나 알고 있었다.
“휴스턴, 문제가 생겼다.”
한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기대했던 반응이었기에 기분이 좋았다. 이번에는 그가 하나 말해 보겠다고 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읊어 보고 싶었던 대사는 바로 이거라며 그 배우의 흉내를 내듯 턱을 쓰다듬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틀림없는 명대사였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고 같은 영화에 나오는 또 다른 대사가 생각났다.
“Keep your friends close, but your enemies closer. 한국어로는 몰라. 친구는 가까이에 두되 적은 더 가까이에 두라 정도로 해석되나.”
은근히 제대로 이어지는 릴레이 게임에 한재이가 자세를 아예 고쳐 잡았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꾸며진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포스가 함께하길.”
그렇네. 지구에서 제일 유명한 대사는 <스타워즈>였어. 재미가 들린 우리는 순식간에 다섯 개의 스타워즈 명대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영화광은 아니지만, 스타워즈를 모르면 안 되는 거였다. 한솔로가 말하던 ‘기분 나쁜 예감’이 농담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두 배 세 배로 웃어 줘야 하는 것이 그 시절 우리 또래 남자아이들의 문화였다.
둘 다 마지막까지 ‘I am your father’를 말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했다. 왠지 그 대사를 말하는 건 너무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장르를 바꾸자. Oh, I am fortune's fool(나는 운명에 희롱당하는 바보다)!”
“그건 뭐야.”
“로미오와 줄리엣.”
이러면 내가 불리하다.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하나를 생각해냈다.
“사랑에도ᅠ유통기한이 있다면ᅠ만 년으로 하고 싶어.”
<청킹 익스프레스>가 로맨스 영화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홍콩에 대한 감정이 특별해서 그 시절의 영화, 그러니까 반환 전에 들끓던 홍콩의 감성이 묻어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이건 외우려고 했던 대사가 아니라 머릿속에 남아 있던 조각이었다. 한재이가 그 영화를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그 말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이나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아는 건 이게 다야.”
게임을 더 한다 해도 내가 질 것이 뻔했다. 그러자 그가 몸을 기울여 어깨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야.”
풉, 하고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유치하지만 그 순발력만큼은 칭찬해 주었다. 로맨티스트는 역시 다르구나. 하나 더 말해 보라고 했다.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의 기억력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너는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해.”
아, 들어 본 적이 있는 대사다. 기분이 몽글하게 끓어올랐다. 한재이는 영화 대사를 읊고 있을 뿐인데 왜 내가 설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장면의 연출을 위해 극적으로 끌어 올려진 언어유희일 뿐이다. 소비되고 팔리기 위해 쓰여진 말들일 뿐인데, 마치 내가 주인공이라도 된 듯 가슴이 설렜다.
나는 턱을 괴고 한재이를 쳐다보았다. 숱하게 바뀌는 스크린의 이미지들이 다양한 밝기로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더 듣고 싶었다. 쿵쿵대는 심장이 더 뛰게 해 달라고 다그쳤다. 그래서 한 번 더 부탁했다.
“인사를 하는 순간부터 나는 네 것이었어.”
나는 멋대로 우리들의 첫인사를 떠올렸다. 그와 내가 주인공이 되어 찍힌 그 수천 개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영사되었다. 지금 내가 짓고 있을 표정이 꽤 우스울 것이다.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떨어지지 않는 기분. 입술이 조금 벌어진 채 상대에게 못이 박힌 시선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못하는 감정의 과열.
아, 그래서 다들 영화 속에서 그런 표정을 짓는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뱉은 그의 마지막 대사,
“사랑해, 서진아.”
그 한 조각의 대사가 내 세계에 균열을 일으켰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유리처럼 마음속을 감싸고 있던 무언가가 산산이 깨져 버렸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무언가가 무방비로 노출되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의식이 모두 녹아 없어지기 전에 서둘러 대답했다. 나도 너를 사랑해. 얼마나 오래전부터 사랑했는지 알 수조차 없어. 속으로도 되뇌어 보지 못한 말을 마침내 내뱉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것까지 고백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는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인사를 하는 순간부터 나 역시 그의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우리는 또 다른 선 하나를 지웠다. 이제 남은 거리는 손바닥보다 작았고 코끝이 닿을 만큼 좁아져 있었다.
* * *
런던 비행이 있었다. 비 내리는 히스로 공항에 착륙하는 순간부터 이곳의 고질병인 우울함이 몸속에 퍼지는 것 같았다. 우산을 쓰기에는 애매한 빗줄기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담배 생각이 났다. 꽤 줄였었는데. 런던 공기를 마시는 순간부터 니코틴 금단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수상한 나라였다.
“캡틴 슈미츠.”
키오스크에서 담배를 사는 도중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의 없게 큰소리로 남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닐 거라 짐작했다.
“헤르 슈미츠!”
이번에는 독일어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킬킬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요하임!”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담뱃값을 지불하는 것을 잊을 뻔했다. 서둘러 값을 치르려는데 점원이 11파운드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새 또 올랐나. 카드로 계산하고 담배를 얼른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뜨겁게 포옹했다.
“어떻게 이렇게 만나. 비행 있었어?”
“그래, 방금 도착했어. 한국 갔다더니 여기서 만나네. 너무 반갑다.”
우리는 재차 서로를 끌어안고 반가움을 표했다.
요하임 마이어는 나와 함께 비행 훈련을 받았던 친구이자 동료였다. 당시 가장 친했던 무리 중 한 명이기도 했고, 부기장 시절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푸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던 대화 상대이기도 했다.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오늘 저녁 어떠냐며 그에게 제안했고 그 역시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승낙했다. 우리는 리버풀 스트리트에서 7시까지 만나기로 하고 각자의 호텔로 흩어졌다.
호텔 룸으로 올라가 한재이에게 시시콜콜한 비행 일들을 털어놓으며 공항에서 요하임을 만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행히 그가 기억하는 요하임은 상당히 마초적이고 하마 같은 면이 있어 질투 많은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세상 모든 남자를 잠정적 게이로 만드는 것은 곤란하니까.
호텔 밖으로 나갔을 때는 비가 그쳐 있었다. 로비 앞에서 대기하던 택시 하나를 잡아탔다. 요하임을 만나기 전 담배를 태우고 싶었기에 약속 장소보다 조금 덜 가서 차를 세웠다. 어울리지 않게 늘어진 시멘트 벽 위에 그라피티가 덧칠된 곳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담배 한 개비를 구걸했다. 시끄러운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 모른 척 그에게 담배를 건넸다. 그는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호주머니에 넣은 채 어디론가 걸어갔다. 저렇게 해서 담배를 모으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사라진 쪽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빅토리아풍 건물 1층에 가스등처럼 조도가 낮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펍으로 들어갔다. 너무 컴컴해서 어디가 테이블이고 어디가 카운터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서버와 손님들도 한데 섞인 탓에 누구에게 안내를 부탁해야 할지 몰라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다행히 어두운 실내에 적응이 된 시력이 곧 돌아와 요하임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달팽이처럼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자신의 허벅지만도 못한 작은 테이블 위에서 에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뒤에 앉은 손님과는 거의 등을 맞붙이고 있었고 옆에는 선 채로 술을 마시는 커플이 보였다. 펍이라기보다는 난장 파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 주인이 호빗이야?”
그에게 다가가 옆 좌석의 의자를 빼 앉았다. 나에게도 사이즈가 작았다. 킬킬거리는 요하임이 마침 지나가던 서버를 붙잡고 나 대신 맥주를 주문해 주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서버는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과연 기억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요즘 영국이 좀 정상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나는 불편하게 엉덩이를 붙인 작은 철제 의자를 다시 한번 고쳐 앉았다. 요하임이 두툼한 손으로 테이블을 바로 잡기 위해 좌우로 몇 번 흔들었다. 그러자 툭 하고 테이블 판이 아예 분리되어 버렸다. 우리는 벙 찐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테이블 판을 건네받았다.
“콘셉트에요.”
서버는 테이블을 고정해 주고 내 앞에 에일 잔을 내려두었다. 우선은 그가 주문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요하임과 잔을 부딪치고 들이켠 에일의 맛은 썩 훌륭했다. 내 표정을 읽은 그가 거보라는 식으로 자신의 안목을 과시했다.
“회사는 어때? 별일 없어?”
“플로가 기장 시험에 드디어 합격했어.”
“그것 봐, 내가 괜찮을 거라고 얘기했잖아.”
“샤샤도 회사 옮겼어.”
“아, 포스팅 해 둔 거 봤어.”
“누구처럼 말도 안 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그러진 않았지.”
“왜 또 그래.”
“왜냐니. 너 사표 쓸 때까지 우리 아무도 몰랐잖아. 대체 왜 그랬어?”
언제고 친구들을 만나면 이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 충동적인 행동의 원인이 사라진 지금은 그저 피하고 싶은 주제가 되었지만.
“천천히 말해 줄게. 배고픈데 음식 좀 시키자. 말라비틀어진 생선 튀김이라도 좋으니 뭐든 먹고 싶어.”
“음식은 저기 가서 시켜야 해. 셀프 서비스지.”
“그것도 콘셉트야?”
요하임은 킬킬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미터가 되는 거구의 사내는 사람들을 제치고 카운터 앞으로 나갔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돌아온 메시지가 없음을 확인했다. 한재이가 잠이 들었다는 증거였다. 순전히 내 탓이었지만 장거리 연애의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내심 미안했다.
“뭐야, 애인이야?”
자리로 돌아온 요하임이 휴대폰을 보는 나의 정곡을 찔렀다. 너는 오늘 딱 걸렸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그 연약한 테이블을 흔들며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연애해? 연애하냐고.”
“흔들지 마. 맥주 쏟아지잖아.”
“그거 얼마나 된다고 아직도 마시고 있어. 누구야. 한국 여자야? 너 그 여자 때문에 한국 간 거였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순서 역시 뒤바뀌었지만, 그냥 수긍하는 것이 편할 듯했다.
“그렇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 줄 거야?”
요하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늘 너그러운 그였기에 이렇게 무마해 보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영 거짓말도 아닌데 그렇다고 시인하지 뭐.
“너 전에 회사 크루랑 만나지 않았어? 그건 잘 안 됐던 거야?”
“잘 안 됐어.”
“엄청 예뻤잖아.”
“그래. 그래서 잘 안 됐어.”
좁은 통로를 지나가던 서버의 접시에서 감자튀김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미안하다고 하는 그녀의 말에 요하임이 웃으며 떨어진 감자튀김을 집어 먹었다. 여기는 정말 난장판이다. 질서가 없는 세계에 떨어진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새로 만나는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데? 우리 쪽이야?”
“아니, 전혀. 변호사야.”
“변호사? 네 주변에 변호사가 많나 보네.”
나는 에일 잔을 비우며 그의 말뜻을 해석하고 있었다.
“네 친구. 그 매번 우리 훈련할 때 갑자기 나타나서 너 빼가던 그 친구도 변호사 아니었어?”
“아, 맞아.”
“Niel & Yan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어? 돈 엄청 벌겠네?”
“뭐…… 그렇지.”
나는 한재이의 버려진 커리어를 위해 잔을 들었다. 나였다면 그렇게 빨리 결단할 수 있었을까.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은 늘 빈칸으로 버려 둔 채 ‘그의 선택을 존중했을 뿐’이라는 변명을 주석으로 달았다. 어차피 모두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최근 들어 그런 자기계발서 같은 사고가 늘어나 나 자신이 따분하다고 느껴졌다.
밤이 깊어 갈수록 펍 안은 더 북적거렸다. 이제는 서 있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많아졌다.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테이블이 움직였다. 나중에는 포기하고 흔들리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에일을 가져다주었던 서버가 벽에 기대어 버거운 노동에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술이 더 필요했다.
“딱 1분만 있다가 가져다줄게요.”
“천천히 해요. 그나저나 모자가 멋있네요.”
나는 뾰족하게 솟은 그의 빨간색 털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계절과 맞지 않는 패션도 콘셉트인가. 그러자 그가 갑자기 모자를 벗어 내게 씌워 주었다.
“기다려요. 맥주 가져다줄 테니까.”
나는 그대로 요하임을 돌아보았다. 그는 흐흐흥, 거리며 웃더니 음식을 가지러 가기 위해 일어났다. 마치 테이블 이정표가 된 것 같은 의무감에 그대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요하임이 일어난 지 10초도 되지 않아 누군가 다가와 의자가 비었는지 물었다. 사람들이 왜 서서 돌아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매너 좋게 지켜 낸 난쟁이 의자로 요하임이 다시 돌아와 앉았다. 튀겨진 지 수 시간이 지났을 것 같은 생선튀김과 감자 커틀릿이 담긴 접시를 들고 마요네즈를 뿌렸다.
“요즘 말이야. 기내식이 점점 형편없어져. 이 정도 수준만 돼도 좋을 텐데, 런치 박스를 싸 들고 다니고 싶을 심정이라니까.”
“공급 업체를 바꾼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말만 나오고 아직은 그대로야. 옮긴 회사는 어때? 거기도 국적기잖아. 스케줄은 널널하게 잡아 줘?”
“뭐, 대체로 합리적이고 괜찮아. 레이 오버가 좀 짧은 편이긴 해.”
“그게 오히려 나아. 부기장 시절에야 뭣 모르고 관광하러 돌아다녔지. 요즘은 그냥 빨리 귀국해서 집에서 쉬는 게 좋더라고. 여자 친구랑은 같이 살아?”
그는 마요네즈가 진하게 뿌려진 감자 커틀릿을 입으로 가져가며 열심히 포크질을 했다. 그사이 나는 튀김옷이 분리된 생선 살을 원상복구 시키는 데 열중이었다.
“같이 살아.”
“뭐라 안 그래? 이 직업이 겉으로만 멋져 보이지, 파트너한테는 최악의 직업인데.”
“글쎄, 아직은 괜찮은 거 같아.”
원상복구 된 생선튀김을 입에 넣었다. 뭐 이 정도 맛을 가지고 런던에서 불평할 수는 없다.
“마음이 넓네. 난 또 헤어질 거 같아. 한 달에 반 이상은 못 보니까 섭섭한 게 쌓이는지 자주 싸워. 너넨 안 싸워? 사귄 지 얼마나 되었는데?”
“음, 한 달?”
“흐흥. 최고로 좋을 때네.”
그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최고’라는 말은 비교적인 의미가 있었으므로 가능한 한 쓰고 싶지 않았다. 로마에서 키스하던 순간부터 하루하루가 같은 크기만큼 좋았으니까.
한재이가 없는 자리에서 그와의 기억을 떠올리니 보고 싶고 그리워졌다.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시시한 농담 같은 게 하고 싶기도 했다. 비행 나오는 것이 더는 즐겁지 않아졌다. 돌아가면 1초도 남김없이 그에게 쏟아 부어야지. 요하임이 킬킬거렸다.
“표정 보니 난리 났네. 사랑에 빠졌구만. 근데 왜 맥주 안 가져다주지?”
그러고 보니 주문한 지 한참이 지났다. 우리는 모자만 맡겨 놓고 사라져 버린 서버를 찾았지만, 거짓말처럼 그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10여 분을 기다렸다. 그렇게 다른 서버에게 주문을 다시 할 때까지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계산을 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뭐지, 이것도 콘셉트인가. 설마 일하다가 도망간 건가. 나는 돌려줄 수 없게 된 모자를 가지고 요하임과 함께 펍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와글와글하던 소음 대신 축축하게 젖은 밤공기가 감각을 차지했다. 다시 한번 뒤를 돌아 펍 창문을 확인했다. 컴컴한 내부의 조명 탓에 그림자 인형 놀이 상자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검은 종이 인형들이 웃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움직임이 단조롭고 반복적이다.
나는 유난히 고소하게 느껴지던 에일 맛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가자.”
요하임의 말에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엉뚱한 밤이었다.
* * *
런던 비행에서 돌아와 집 안으로 들어선 나는 식탁 위의 노트북을 두드리며 무언가에 열중인 한재이를 보았다. 그는 모니터 시력 보호용 안경까지 쓰고서는 진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거실로 들어선 나를 향해 시선을 옮기더니 옆에 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으며 인사를 했다. 아주 편안한 옷차림에 양말도 신지 않은 그는 계속해서 사과를 베어 먹었다. 그것이 첫 끼니인 것 같았다.
“오만하고 우스꽝스러운 런던은 여전하던가?”
“응, 그렇지 뭐. 일하는 거야?”
“보시다시피.”
“할 만해?”
나의 물음에 그는 안경을 벗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상광 물산이라는 회사에서 뒤셀도르프에 직원 3명짜리 영업소를 설치했는데 세무청에 걸렸어. 월급으로 자그마치 만 유로씩 입금했거든. 왜일 거 같아?”
“뭐…… 아들 유학비?”
“그렇지? 너도 한번에 알아차리는데 이렇게 허술하게 일 처리를 하면 모를 줄 알았나 봐.”
“그런 거 뒤치다꺼리하는 거야? 한재이 많이 죽었네.”
“가슴 아파. 놀리지 마.”
나는 그에게 다가가 위로의 입맞춤을 했다. 그의 입술에서 사과 향이 났다. 어떤 말을 더해 주려다 말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섰다. 빠르게 몸을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원래는 돌아와서 1초도 남김없이 한재이만을 위해 쏟아 부을 작정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피곤했다. 먼저 잠 좀 잔다고 뭐라 하진 않겠지. 젖은 머리를 털고 나오며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의 노트북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집에 누군가 있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전달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적당한 소음은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사과를 베어 먹을 때 나는 소리도 좋았다. 한재이가 내는 일상 소음이 자장가처럼 나를 잠재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TV 소리가 들렸다. 언제 소파로 온 건지, 나는 어느새 그의 다리를 베고 있었다. 멍하게 던진 시선 끝에 TV 화면이 걸렸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건가. 얼굴을 정면으로 돌려 턱을 괴고 있는 한재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말없이 나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입술이 좌우로 늘어나며 미소가 번졌다. 아, 집에 오니 천국이었다. 차지해도 좋은 사람을 마음껏 차지하고 있는 일상은 낙원과도 같았다.
“너 4시간이나 잤어.”
그의 말투에는 원망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장거리 비행이었으니까. 그래도 신기하네. 중간에 깨지도 않았어.”
“피곤했나 봐. 마사지해 줄까?”
그가 내 어깨와 목 주변을 어설프게 주물렀다. 그 손길은 근육을 이완시키기는 작용보다는 엉뚱한 흥분을 가져오고 있었으므로 나는 곧 그의 행동을 저지시켜야 했다. 어깨에서 내려간 손이 따뜻하게 배 위에 닿았다.
“배고파? 요리해 줄까?”
“괜찮아.”
“그럼 드라이브 나갈까?”
“왜 그래. 램프의 요정이라도 된 거야?”
“원한다면.”
TV 소리가 적당히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뻐근해진 육체를 스스로 가다듬었다. 고개를 바로 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적당히 해가 올라 있는 오후, 시간은 충분하다.
“내일부터 3일간 오프야. 지금부터 24시간 너랑 붙어 지내 보려고 하는데 뭘 했으면 좋겠어? 말만 해. 다 들어줄게.”
그 말에 한재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흠, 하는 소리와 함께 턱을 괸 그가 새끼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고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나는 저 눈빛을 잘 알고 있다. 지금부터 어마어마한 헛소리를 시작할 건데 후회 안 할 자신 있냐는 표정이다.
“그냥 말해.”
“3일 내내 너랑 섹스하고 싶어. 질펀하게 침대에서 뒹굴면서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인간의 기본 욕구에만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거야. 행동반경은 최소한으로 하고 외출은 금지야. TV를 보거나 휴대폰을 만지는 것도 안 돼. 너는 나한테만 집중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러고 싶거든.”
나는 웃었다. 너무 한재이다워서 놀랍지도 않았다. 내용 역시 딱히 내가 손해 볼 것이 없어 보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당장 실행에 옮기기 위해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여기서 말고.”
키스하려던 나의 손길을 저지하며 그가 조건을 달았다.
“호텔로 가자. 좀 난잡하게 뒹굴고 싶은데 뒤처리는 하기 싫어서.”
그득하게 욕망을 담은 한재이의 눈빛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기왕이면 아주 비싼 호텔이면 좋겠다. 서울 시내 가장 우아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가서 인간이 가진 3대 욕구를 지저분하게 뱉어내고 돌아오는 거로 하자.
돈을 내고 쓰레기를 처리하는 거다.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니지. 요즘은 뭐 다들 그렇게 살잖아. 재활용도 안 될 만큼 난잡한 욕망은 땅속에 묻어 버리거나 태워서 날려 버려야 한다. 오랜만에 둘이서 하는 미친 짓이 동했다.
* * *
“3일 정도 있고 싶은데요.”
한재이는 호텔 멤버십 전용 카운터에 마련된 의자에 삐딱하게 앉았다.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아 일행임을 암시하는 중이었다. 그의 멤버십을 확인한 호텔 매니저가 웃으며 물었다.
“트윈 베드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요, 퀸 사이즈 더블베드로.”
조금 거만하게 말을 끊어 먹는 그의 태도에 웃음이 났다.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매니저는 다시 한번 한재이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미팅 룸도 함께 예약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우리 잠만 잘 건데.”
성인 남자 두 명이다. 호텔을 잡아 밤샘 작업을 하는 프로젝트 팀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미소가 옅어진 매니저가 룸을 찾기 위해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한재이가 다시 쐐기를 박았다.
“스위트룸으로 주세요.”
그는 손에 든 신용 카드로 마호가니 책상을 딱딱 두드리며 재촉했다. 언젠가 우연히 보았던 한국 드라마의 장면을 흉내 내고 있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매니저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에게서 카드를 받아 들었다. 평범한 회사원 월급 정도의 돈이 하룻밤 숙박료로 거론되었다. 그렇게 3일 치 결제에 동의하냐는 매니저의 말에 한재이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할극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도중 내가 물었다.
“재밌어?”
“응. 나름대로 기분 좋던데. 넌 별로였어?”
“뭐. 옆에서 몸 파는 사람 된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웃기긴 했어.”
“팔래? 나 돈 많은데.”
그가 내 허리에 팔을 두르며 쓸데없이 스킨십을 유도했다. 뒤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매니저의 표정을 상상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슈트를 입은 두 남자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쳤다. 쓰레기를 버리러 온 사람들치고는 지나치게 빼입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가장 꼭대기 층까지 올라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레스토랑은 귀찮았기에 룸서비스를 주문하기로 했다. 우리는 육지에서 가장 비싼 것과 바다에서 가장 귀한 것을 시켰다.
득달같이 올라온 호텔 직원이 라운지 공간에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사방에서 한강 전경이 보였다. 마침 해가 지고 있어 방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조도가 적당하고 좋았다.
나는 가죽으로 처리된 소파에 앉아 부산하게 움직이는 직원을 쳐다보고 있었고, 한재이는 책상 위에 구둣발을 올린 채 의자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았고 넓디넓은 방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테이블 위에 리넨을 깔고 있던 직원은 민망해했다. 표정에서 얼른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가 보였다. 마침내 할 일을 끝내고 나가려는 그를 막아서서 나는 팁을 건넸다. 식사를 좀 빨리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손수 문을 열어 보내 주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그 노력의 산물인지 팁으로 건넨 돈의 영향인지 몰라도 식사는 상당히 빨리 올라왔다. 나와 한재이는 맞은편에 앉아 나이프를 들고 각자가 좋아하는 메인 요리를 가차 없이 잘라 냈다. 둘 다 샐러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고백할 게 있어.”
“해.”
나는 별다른 감흥 없이 핏물이 배어 나오는 고기를 잘라 으깨진 감자를 얹어 입에 넣었다. 또 무슨 엉뚱한 말을 하려고 하나 싶어 별 기대 없이 듣고 있었다.
“예전에 너 샤워하는 거 훔쳐본 적 있어. 훔쳐봤다기보다는 우연히 시선이 갔는데 나도 모르게 쳐다보게 되더라고.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었는데 양심에 찔려서 오늘 말할게.”
“그게 언제였는데?”
“몰라. 한 3~4년 전에 네 아파트에서였던 거 같은데. 집에 온 뒤로도 좀 생각나더라. 남자 몸이 섹시할 수도 있구나, 처음 생각했었어.”
그는 구워진 바게트 위에 딜이 들어간 버터크림을 잔뜩 바르고 철갑상어 알을 얹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마음에 들었는지 똑같이 하나 더 만들어 내게 건넸다.
“그게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뭐야.”
레드 와인으로 입 안을 헹군 뒤 그가 건넨 음식을 맛보았다. 훌륭하다. 남은 부분을 다 입에 넣고 냅킨으로 마른 입을 닦았다. 한재이는 음식물을 씹어 삼키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좀 있다가 네가 벗을 걸 상상하다 보니 연쇄 작용이 일어났나 보지.”
나는 여전히 철갑상어 알을 씹는 중이었다. 입을 열어 대꾸할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적어도 오늘은 옷을 벗고 할 작정인가 보네, 따위의 생각을 했다.
“어차피 곧 보게 될 건데 미리 상상은 왜 해.”
물을 마시고 다시 한번 더 입을 닦았다. 또 같은 걸 만들어 주려는 그에게 그만하라는 뜻으로 손을 저었다. 대신 그에게 내가 먹고 있던 메인 접시를 건넸다. 나는 샐러드 볼을 내 쪽으로 당겨 비네가 드레싱을 모두 쏟아 부었다. 드레싱에 젖어 물기를 뚝뚝 흘리고 있는 로메인을 입에 넣으며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기대감의 극대화 같은 건가 싶어. 지금 내 맞은편에 앉아 우아하게 식사하고 있는 이 남자가 1시간쯤 뒤엔 세상에서 제일 야한 표정으로 신음할 걸 나만 알고 있다는 우월감도 좀 있고.”
한재이의 식탁 예절은 형편없었다.
“밥 먹는데 이런 얘기를 꼭 해야겠어?”
“뭐 어때. 식욕과 성욕은 연결되어 있다는데. 담당하는 중추신경이 같이 붙어 있다고 하더라. 여자는 포만감을 담당하는 쪽과 더 가까워서 배가 불러야 성욕을 느낀대. 그래서 여자랑 데이트할 땐 항상 뭘 먹이고 시작해야 해. 반면에 남자는 허기를 느끼는 쪽과 더 가까워서 배가 고픈 상태에서 성욕을 더 느껴. 제대로 된 섹스를 하려면 남자는 좀 굶겨야 하지.”
“근데 우리는 왜 미리 먹는 건데.”
“밥도 안 먹고 시작하면 내가 너한테 사고 칠 거 같아서.”
그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기를 베어냈다. 내가 저를 보며 시선을 고정한 걸 알면서도 나이프 질을 멈추지 않았다. 한재이가 사고 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수십만 원에 호가하는 고깃덩어리를 위 속에 채워 넣는 동안 나는 와인을 들이켰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눈빛은 이미 사고 칠 작정을 하고 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테이블 위에 매너가 실종되었다. 비싸고 고급지다는 재료들로 구성된 요리들은 우리에게 외면받았다. 짓이겨지고 모양새가 흐트러진 접시들이 쌓이자 나는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음식물을 씹고 있지 않았다. 한재이가 다 먹은 거냐고 물었다. 대충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가 테이블을 치워 달라고 프런트에 전화하는 동안 마지막 남은 와인을 털어 넣었다. 아까부터 나는 무언가 목에 걸린 듯 물과 와인을 계속 들이켜고 있었다.
한재이는 분명 사고 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내게는 그 말이 꼭 사고 칠 수도 있으니 각오하라는 말로 들렸다. 아니면 사고를 치고 싶은데 억지로 참고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인 건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해가 지며 느슨하게 들어오는 빛이 넓디넓은 호텔 방을 비추고 있었고, 젖혀진 커튼과 창밖으로 한강 너머의 풍경이 들어왔다. 그 경치를 바라보며 허리보다 조금 낮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한재이는 포지션을 정확히 하고 싶어 하는 같았다, 그러니까 안기는 것이 아니라 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남자끼리의 섹스에 삽입 행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파트너의 만족감을 위해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행위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의 말대로 이것은 취향의 문제일까.
나 역시 본능적으로 어딘가에 삽입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내 밑에 깔려 신음하는 한재이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바로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가 늘 말해 오던 ‘무너뜨려 보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인 건가.
그때쯤 호텔 직원이 올라와 문을 두드렸다. 아까는 혼자였던 그가 젊은 직원 한 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들은 라운지 한가운데 차려진 음식물과 테이블을 빠르게 정리해 나갔다.
스위트룸의 구조는 방 두 개와 라운지로 구성되어 있었고 하나는 침실, 다른 하나는 집무실 같은 형태였다. 한재이는 욕실에 있었고 나는 계속해서 팔짱을 낀 채 책상 위에 걸터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그들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으레 하는 말일 텐데도 지금 내 상황에서는 듣기가 좀 그랬다. 들어올 때만 해도 의기양양하게 몸을 판다느니 하는 농담까지 해 놓고서 지금은 호랑이굴에 남겨진 초식동물처럼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곧 잡아먹힐 현실을 부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욕실에서 한재이가 물기 젖은 손을 털며 나왔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자신의 셔츠 단추를 망설임 없이 풀고 있었다.
지금 바로 하겠다는 건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낯선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다. 금방이라도 호텔 직원이 다시 문을 두드릴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여전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한재이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머릿속을 둥둥 울렸다. 단추가 모두 열린 셔츠 안에서 그의 매끈한 가슴 윤곽이 드러났다. 코앞까지 다가와 나를 훑는 그에게 의미도 없는 말을 던져 보았다.
“……이렇게 바로?”
“다른 거 하고 싶은 거 있어? 난 없는데.”
말로는 내 의사를 묻고는 있었지만, 일방적인 통보였다. 네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뜻이었다.
한재이는 멋대로 내 소매 끝의 커프스를 빼고 시계를 풀어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내 허리에서 벨트를 풀어 바지를 느슨하게 만든 뒤, 목 끝까지 채워 놓았던 셔츠 단추와 넥타이도 끌어내려 풀어버렸다.
그가 내 허리를 잡고 강하게 자신의 하체를 밀착시켰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것이었다는 듯 멋대로 셔츠를 헤집고 유두를 빨았다.
“아…….”
키스도 없이 곧바로 시작된 한재이의 전희에 나도 모르게 책상 모서리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메말랐던 감각에 찌릿한 흥분이 비집고 들어왔다. 사방이 너무 트여 있는 공간에서 혼자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싫어 입술을 깨물었다.
유두 끝을 건드리던 그의 혀가 뱀처럼 긴 자국을 내며 가슴을 핥았다. 천천히 그리고 여유 있게 맛보려는 듯 구석구석 입술을 대고 살갗을 물었다.
그의 혀가 지나간 곳곳이 붉게 물들고 조금씩 강도가 높아지는 조임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서서히 위로 올라오는 그의 머리카락을 잡으며 키스를 갈구했다. 그러나 좀처럼 얼굴을 내어주지 않는다. 귀와 목이 이어지는 선을 따라 입술을 파묻던 한재이가 이빨을 세워 내 목덜미를 물었다.
“흣!”
고통과 흥분 그 중간쯤에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귓불을 빨던 그가 속삭였다.
“오늘은 좀 아플지도 몰라.”
무슨 소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혀가 입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질펀하게 한 바퀴를 휘젓고 나서는 내 혀를 감고 그대로 자신의 입속으로 빨아 당겼다. 뿌리가 뽑힐 듯한 흡입력으로 빨려 들어간 내 혀를 그가 맛보고 핥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자신의 혀를 넣어 영역 표시를 하듯 잇몸과 천장 곳곳을 헤집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내 바지 버클을 풀고 속옷 안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반쯤 발기된 페니스가 그의 손에 사로잡혔다. 나는 가까스로 저지시키며 한재이를 설득했다.
“하아…… 잠깐. 침실로 가.”
“왜. 난 서서 하는 것도 좋은데.”
잡힌 손을 빼지 않고 멋대로 내 페니스를 쥐고 흔들려던 그에게 다시 말했다.
“……나도 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자 한재이의 눈빛이 변했다. 호기심과 흥분, 기대감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침대에서 해야 하는 거야?”
“응.”
그의 손이 바지 속에서 빠져나왔다. 먼저 가라는 듯 고개를 침실 쪽으로 까닥거렸다. 나는 엉덩이에 걸려 있던 바지와 속옷을 탈의하고 한재이에 의해 헤집어진 셔츠도 벗어 던졌다. 침실 문을 열자 높고 너비가 넉넉한 퀸 사이즈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올라가 나를 따라 들어온 그에게 다음 단계를 이야기했다.
“너도 벗어.”
망설임도 없이 한재이의 상체가 탈의되고 버클이 풀렸다. 스스로 벗어 던진 그의 의복들이 카펫 위로 떨어졌다. 허리에서부터 어깨까지 군살 없이 뻗은 그의 상체를 눈으로 훑었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단단한 허벅지와 치솟은 페니스를 보며 아주 낮은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나의 눈빛은 조금 탐욕스러웠을 것이다.
나체가 된 그가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위로 몸을 겹쳤다. 묵직하게 눌러지는 무게감을 매트리스가 빳빳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이어지는 키스와 서로의 몸을 더듬는 행위에 정돈되어 있던 시트가 구겨지고 밑으로 떨어졌다.
완전히 몸을 겹친 정상위는 안정감을 준다. 그의 뛰고 있는 심장과 숨결을 느끼며 꽉 조여진 키스를 받아내면 자연스레 페니스가 부풀고 그의 것에 닿는다. 손은 어깨와 등을 훑다 엉덩이를 쥐기도 하고 근육 잡힌 허벅지 안으로 넣었다 빼며 촉감으로 그의 몸을 감상한다.
“하아…….”
숨소리가 조금씩 가빠지고 타액에 질척이는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아까부터 참고 있던 하나의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의 페니스를 입에 넣고 빨고 싶었다.
뱀처럼 몸을 구부려 머리를 밀어 넣었다. 둥그렇게 말린 내 몸에 의해 상위를 점령하고 있던 한재이는 자연스레 침대 위로 떨어졌다. 나는 머리를 침대 아랫부분으로 향하게 하고 그와 나란히 누워 식스 나인 자세를 만들었다. 내가 원한다고 했던 것을 몸으로 표현해 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페니스를 입에 넣고 질척한 펠라를 시작했다. 나는 제대로 자세를 잡기 위해 서서히 상체를 올려 그의 몸 위로 완전히 포개진 채 무릎을 세웠다.
“읍…….”
내 입에 반도 들어가지 못한 그의 페니스에서 익숙한 보디 클렌저 향이 났다. 혀끝을 세워 귀두를 핥고 입으로 좁은 동굴을 만들어 압박감을 주었다. 낮게 들려오는 그의 신음에 흥분된 나는 페니스를 물고 아래위로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행위가 시작되자 음란하고 야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살덩이들이 빨고 빨리는 난잡함과 본능에 충실한 두 남성의 신음이 침실을 가득 덮었다. 흥분에 흥분이 더해지자 한재이의 허리가 저절로 들썩이며 자신의 페니스를 좀 더 깊이 내 목구멍까지 밀어 넣고 있었다.
“하아, 하아.”
무시할 수 없는 그 크기가 감당되지 않아 잠시 입에서 빼내서 숨을 쉬었다. 그 사이 한재이는 내 엉덩이를 감싸 쥐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은 채 페니스와 음낭을 빨고 있었다. 그 혀의 질척임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며 애널 바로 위의 회음부를 건드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허리를 들어 몸을 옆으로 빼냈다.
“윽! 뭐 하는 거야.”
당황한 나를 놓칠세라 한재이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내 어깨를 잡고 침대 위에 쓰러트렸다.
“쉬잇. 괜찮아.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는 아이를 달래듯 내 뺨을 비비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안 할게. 네가 싫으면.”
“내가 싫지 않으면 계속하고 싶다는 거야?”
“그런 건 상관없어. 네가 싫으면 절대 안 해. 근데 정말 싫어?”
타액에 번들거리며 욕망이 그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그는 꽤 집요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지를 두고 있다는 내 감정을 이미 다 알아차린 것 같았다. 오히려 그게 더 부끄러웠다.
“……더럽잖아.”
“샤워하고 왔잖아. 좋은 냄새만 나던데…….”
한재이가 내 목덜미에 코를 대고 살갗을 비볐다. 베개 없이 평평한 침대 아랫부분에 머리를 대고 있으니 피가 쏠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는 몸을 더 겹쳐 오며 목과 어깨, 가슴까지 키스를 퍼부었다. 평소에는 성감대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몸 구석구석에 한재이의 입술과 혀가 닿을 때마다 허리를 들썩일 만큼 찌릿하고 자극적인 쾌락이 몰려왔다. 그저 사정감을 유도해 정액을 분출하고 싶은 욕구가 아닌, 몸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알 수 없는 감각들이 깨어나는 듯했다.
“싫으면 바로 싫다고 해.”
그의 혀끝이 유륜을 따라 원을 그리며 돌자 유두가 팽팽하게 솟아오르며 그의 입속에 삼켜졌다.
“흣…….”
빨리고 있는 가슴도 터질 것 같았지만 한재이의 손에 의해 쓸어 내려지는 페니스와 허벅지 안쪽이 간질거리는 쾌감을 동시에 주었다. 혀를 길게 빼 배꼽 끝까지 내려간 그의 입술이 페니스 바로 위를 여기저기 쪼듯 빨고 핥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허벅지를 벌려 얼굴을 들이대고 다리 사이 구석구석을 침범하며 다시 혀를 비벼 댔다.
“대신에 좋으면 감추지 마.”
그의 혀는 다시 한번 음낭 밑으로 내려가 회음부를 핥고 문질렀다. 이번에는 말리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헤집으며 절로 허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재이가 쿠션 하나를 허리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에 의해 벌어진 하체가 좀 더 위를 향하게 되었고 끈적하게 회음부를 문지르던 그의 혀는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가 한 번도 누군가의 손이 닿지 않았던 곳을 침범하기 이르렀다.
“아읏…….”
나도 모르게 손을 내려 그의 얼굴을 밀어내려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더 깊숙이 들어오는 한재이의 혀끝에 신음만 나왔다.
“재이야, 잠깐만…… 흣!”
싫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한 그가 애널 주변을 혀로 문지르고 핥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자 주름 하나하나에 박제되어 있던 감각들이 유령처럼 깨어나 온몸을 파고들었다.
말려야 하는데 숨소리만 거칠어진 채 헐떡이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마음 한쪽에서 더한 것도 해 달라고 몸부림치는 자아가 꿈틀거리며 내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일차적으로 놀랐고 그 감각이 주는 의외의 쾌감에 두 번째로 놀랐다.
가장 부드러운 살덩이가 제일 민감한 부위를 핥고 있었다. 수치심이 들었다. 행위 자체가 아닌 내가 이것에 흥분하고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이었다. 움찔거리는 허리를 잡으며 최후의 이성의 끈을 붙잡은 채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그만, 읏…… 그만해.”
그와 동시에 거짓말처럼 한재이의 혀 놀림이 중단되었다. 너무 그대로 내 말을 따라줘서 조금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그가 번들거리는 입술을 훔치며 올라왔다. 자신은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 죄의식 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싫었어?”
싫었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분명히 처음 느끼는 감각에 허리까지 들썩이며 신음을 뱉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수치심과 자존심, 그 중간쯤에 놓인 쓸데없는 고집인 것 같았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대신해 한재이가 소감을 내뱉었다.
“나는 미치게 좋았는데.”
그는 증거라도 되는 듯 아까보다 더 발기된 자신의 페니스를 쓰다듬으며 내 복부를 꾸욱 눌렀다. 따뜻하고 단단한 그의 물건이 저도 좀 만져 달라는 듯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한재이가 나를 애무하며 흥분을 느끼는 것은 내게도 벅찬 감동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보통은 하지 않을 행위까지 하면서 나를 안길 원한다는 사실에 나는 점점 더 설득당해 가는 중이었다.
“사고 안 치겠다며.”
“맞아. 안 칠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 손을 밑으로 내려 회음부 밑을 스치듯 건드렸다. 이미 민감해진 부분이라 손길 한번에도 감각이 쏠렸다. 내 반응을 살피는 그의 손은 좀 더 밑으로 내려간다.
“근데 네가 원하면 사고 칠 수도 있고.”
“하아…….”
그의 손가락이 애널 주변을 훑었다. 이미 한번 그에게 침범당한 그 부분은 그만이라고 했던 내 말에 칼같이 멈춰선 아쉬움을 달래 달라는 듯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문지르던 손길은 대답 없는 내 반응에 점점 더 압박을 동반하기 시작한다.
“진짜 싫어?”
“읏…….”
그의 손가락 하나가 애널 주변을 누르며 슬그머니 안으로 침범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이물질 하나를 머금은 그곳은 서서히 감각을 풀어 헤쳐 내 이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원해.”
그가 나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너를 온전히 가지고 싶어.”
이미 다 가졌음에도 그에게는 조건이 하나 더 붙는 듯했다.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서진아.”
한재이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혀를 밀어 넣고 내게 키스했다. 구멍 안에서 지분거리는 손가락과 뜨거운 그의 혀를 느끼며 함락당한 자아가 희미해져 갔다. 허락의 의미로 그의 혀를 감고 있는 힘껏 빨아 당겼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은 구멍의 깊숙한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으음…….”
뻑뻑하게 살갗이 마찰하고 내부가 쓸렸다. 왔다 갔다 하며 이곳저곳을 문지르는 그의 손가락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쯤 되면 ‘쑤셔지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한재이는 지금이라도 내가 거절할까 봐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다. 한마디도 하지 말아 달라는 듯 제 숨만 거칠게 밀어 넣는다.
한동안 이어지던 키스와 애무 끝에 그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욕실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젤과 콘돔이었다. 아까부터 혼자 욕실에서 서성거리던 이유가 있었군. 내 표정을 보며 그가 다가와 입맞춤을 하고 변명을 했다.
“오해하지 마. 혹시나 해서 가져온 것뿐이니까.”
그러면서 슬쩍 미소를 띤 그 얼굴이 보기 싫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 위에 젤을 짜낸 뒤 페니스부터 애널까지 부드럽게 발라 주었다. 살짝 죽어 버린 페니스가 미끈거리는 젤의 감촉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페팅을 해 주며 발기를 도와주던 그는 다시 몸을 숙여 애널 주변까지 풀어 주며 내 뺨과 귀밑을 키스해 가기 시작했다.
질펀하게 소리를 내는 한재이의 혀와 입술, 능숙하게 애널 안을 파고드는 손길에 목이 꺾이고 입술이 말라 갔다. 숨은 고르게 쉬지 못했고 자꾸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끈덕지게 이어지는 그의 애무와 집요하리만큼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전희에 나는 어느새 수치심이나 자존심 따위는 잊어버린 채 헐떡이고 있었다.
네가 하려는 게 무엇이든 좋으니 어떻게든 빨리 그 끝에 도달했으면 좋겠다는 갈망을 느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뭘 더 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귓불을 빨았다.
“하아…… 이제 해도 될 거 같은데.”
뭘 얼마나 사전 조사를 철저하게 한 건지는 몰라도 몸으로 하는 것은 나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에 일단은 부딪혀 보자는 뜻이었다. 한재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애널 안에 손가락을 하나 더 넣어 주었다.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그의 행동이 오히려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호기심과 기대감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한재이가 아까부터 발기된 채 스스로 끄덕거리고 있던 자신의 페니스를 쓰다듬으며 콘돔을 씌웠다. 뭔가 살아 있는 또 다른 생물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묵직한 생물체가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모습을 보며 자극적인 공포심에 아드레날린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의 허리에 내 다리를 감게 한 후 상체를 살짝 숙인 후 짧게 입맞춤을 했다. 그 순간이었다.
“윽!”
밑에서 느껴지는 파열 같은 고통에 머릿속이 한꺼번에 씻겨 나가는 듯했다. 굉장한 통증이다.
충분히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든지 아니면 한재이의 사이즈는 초보자인 내게 난이도가 높았던 건지, 나는 온몸이 시멘트처럼 굳어 버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내 반응에 그가 허리를 숙여 키스해 주었다. 부드러운 혀로 나를 달래며 괜찮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천천히 입 안을 더듬었다. 떨고 있던 내 혀를 감아 제 입으로 가져간 뒤 비비고 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 감각이 모르핀처럼 다시 몸에 녹아들자 굳어졌던 몸이 풀리고 다시금 스멀스멀 흥분이 올라왔다.
시트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껴안았다. 한재이와의 키스에 정신이 팔려 그의 페니스가 들어오고 있다는 느낌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그가 허리가 좀 더 크게 움직였다. 그 바람에 빠듯하게 입구에서 움찔거리던 페니스가 구멍 안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데 성공했다.
“어때?”
“아파…….”
“그리고?”
아프기만 하냐는 그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뭔가 느껴져야 하는 건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는 받는 쪽이 아닌 건가 싶기도 했고.
“잘 모르겠, 윽, 모르겠는데. 하아…….”
그는 허리를 들어 페니스를 빼내고 다시 젤을 짜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손가락 세 개를 넣고 동굴을 탐험하듯 내벽을 훑었다. 일부러 그러는지 찌걱대는 소리까지 내며 야하고 음탕하게 애널 안을 문질렀다. 그러면서도 나를 향한 시선은 녹을 듯이 뜨겁다. 내 반응 하나하나를 촬영이라도 하듯 살피고 좇았다.
“여기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흐읏!”
그는 페니스 바로 위와 닿아 있는 내벽의 둔덕을 누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곳이 눌러질 때마다 눈썹이 움찔, 찌푸려졌던 것 같기도 했다.
찌릿하게 자극이 전해져 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고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예상에 확신을 얻은 한재이가 다시 몸을 일으켜 제 페니스를 잡고 구멍 끝에 맞추었다.
“윽!”
그리고 한 번에 입구까지 밀어 넣었다. 나는 거의 숨을 멈추었다.
그의 것은 꿈틀거리며 그 좁은 동굴 안을 점점 더 비집고 들어왔다. 그 감각이 주는 야릇한 느낌과 내 안에 제 것을 밀어 넣고 흥분한 한재이의 숨소리가 쾌락으로 전이되어 내게 녹아들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들어 온 느낌인데 고통은 알 수 없는 무언가와 섞여 격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하체를 밀어붙이며 더 깊이 들어오고자 했다. 그와 동시에 끈적이는 젤이 발라진 내 페니스를 잡고 조금씩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앞과 뒤에서 질척이는 소리와 촉감, 그에 따라 내쉬는 한재이의 숨소리에 점점 더 몸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아아…….”
서서히 안쪽으로 향하던 그의 귀두 끝이 한재이가 눌러 놓았던 둔덕에 닿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거기서부터 그가 드디어 조금씩 허리를 움직였다.
“흐읏…….”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재이는 내 애널에 페니스를 박아 넣은 채 허리를 움직이며 내가 느끼는 모습을 관음 중이었다. 그의 페니스에 의해 자극되던 전립선에 의한 쾌감이 점점 더 부풀어 올라 배 속을 꽉 채운 느낌이 들었다.
“하아…… 서진아.”
그 역시 이제는 못 참을 정도로 흥분이 되는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나를 향해 박아 대던 허리에 힘을 더 채워 넣었다. 그 소리에 나는 녹을 듯이 흔들리는 하체를 맡겼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순간 한재이에 의해 턱이 잡힌 채 목구멍까지 혀를 받았다. 동시에 밑에서도 그의 남은 페니스가 내벽을 꽉 채우며 내 안으로 들어왔다.
“윽!”
“미안, 아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허리를 꾹 누르며 제 것을 끝까지 밀어 넣는 그였다. 아파서 미간을 찌푸린 내 얼굴에, 이마에, 뺨에, 입술에 미칠 듯이 키스를 쪼아 대며 퍼붓고서도 흥분되어 죽겠다는 듯 뜨거운 숨결을 쏟아내는 그였다.
그런 행위 하나하나가 나를 휘저으며 멋대로 쾌락의 강물에 빠트렸다. 거기서 허우적대던 나는 점점 더 뚜렷해지는 욕구를 느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저열하게도 나는 내내 그에게 박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 확실했다. 조금씩 빠져나갔다 다시 묵직하게 밀고 들어오는 그의 페니스를 온전히 느끼면서 이런 감각이 주는 짜릿한 흥분을 속으로는 뜨겁게 열망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하아…….”
밑을 만져 주는 것만으로는 가질 수 없었던 쾌락의 환희가 모조리 해제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아프냐고 물어 오던 한재이의 물음은 확신에 찬 흥분감이 섞여 돌아왔다.
“좋아?”
좋았다. 그저 좋았다는 말로는 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쾌감이다. 점점 더 빨라지는 그의 허리 움직임으로 자극받은 내 페니스가 쿠퍼액을 뚝뚝 흘렸다. 나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 그것을 스스로 비비며 얼마나 좋은지를 표현하고 있었다.
“좋아, 흣…… 빨리.”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희도 길었고 흥분도 깊었다. 무엇보다 내 위에서 제 것을 밀어 넣으며 열기에 가득 찬 한재이의 모습이 너무 큰 자극이었다. 내 안에 들어오고 싶다고 속삭이던 입술을 겹치고 뇌 끝까지 찌릿한 키스를 나누었다.
“하아…… 재이야, 읏!”
더 깊이, 더 세게. 혀를 넣고 페니스를 박으며 섞이던 몸이 하나가 되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감각이 폭발하며 내는 탄성과 신음. 나는 막을 수 없이 줄줄 흐르는 쾌락의 액체가 온몸을 빠져나가며 선사하는 극강의 오르가슴을 맞이했다. 그렇게 분출된 정액과 녹아내린 감각으로 침대 위를 모조리 적시며 몸을 떨었다.
한재이 역시 곧바로 허리를 움직여 참고 있던 욕정을 토해 냈다. 그가 사정할 때 내는 소리가 매우 좋았다. 그 우아한 눈매가 사납게 꺾이며 본능적인 수컷의 눈빛으로 바뀔 때, 그리고 그 눈동자로 나를 먹어 치울 듯 쳐다보며 자신의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는 모습을 보자 나는 다시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끓어올라 그에게 키스하며 달려들었다.
질척대는 두 혀가 섞이고 또 다른 감각이 연결되었다. 그의 말대로 3일 내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재이는 관계를 가지고 싶을 때 말이 없어진다. 그러면 그의 시선이 닿는 곳들이 대개 시작 지점이 된다. 좋아하는 곳은 입술과 가슴 부위 그리고 손가락이다.
그는 내 손을 가져가 키스하는 것을 즐겼다. 일부러 소리 내서 입을 맞추거나 가끔은 입속에 넣고 살짝 깨물어 빨기도 했다. 다음은 가지런히 손을 겹쳐 나를 잡아당긴다. 내가 끌려오면 다시 전희가 시작되고 또 다른 섹스가 막을 올린다.
내 안에 삽입한 후 내가 느끼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는 제 입속에서 혀를 굴렸다. 턱을 위로 세우고 시선을 내린 채 밑에 깔려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야릇한 미소를 걸 때도 있었다. 절정에 달할 때는 표정을 지우고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신음을 삼킨다.
이것이 내가 지난 3일간 관찰한 한재이의 특징이었다.
그 역시 저 나름대로 나와의 섹스에 관한 감상을 가지고 있었다. 구구절절 많은 것을 이야기했지만 가장 많이 강조했던 부분은 내 표정이었다. 꾹 다문 입술이 미치도록 타입이라고.
그가 그렇게 말하며 검지 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눌렀다.
“특히 넣을 때가 제일 섹시해. 아파 죽겠는데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인달까. 그러다 안을 눌러 주면 곧바로 신음을 터트리잖아. 그걸 보는 게 진짜 좋아.”
그가 바란 대로 우리는 서로의 성적 취향과 특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 침대 위에 몸을 기댄 채 그와 나는 초콜릿 가나슈를 먹고 있었다.
그 옆 작은 티 테이블 위에는 커스터드푸딩과 사과 코코넛 파이가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놓여 있었다. 모두 한재이가 주문한 디저트들이다. 나는 그가 입속에 넣어 주는 초콜릿 덩어리들을 녹이며 현기증이 나도록 빠져나간 당도를 채워 넣고 있었다. 문득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솔직히 말해 봐.”
“뭐가.”
“왜 이렇게 능숙해? 남자랑 경험 없잖아.”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다. 의심이나 질투 같은 감정 섞인 질문은 아니었기에 순수한 정답만을 알기를 원했다.
“능숙했어?”
칭찬으로 받아들인 한재이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너무 자연스럽게 리드하는 거 같아서.”
“글쎄, 나도 그냥 재능인데.”
한재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일주일 전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대충 짐작이라도 해 본다면 아마도 그는 이것저것을 보며 공부했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도 집중력을 발휘하면 모국어라는 이점을 가진 아이들보다 뛰어난 점수를 받았으니까.
환상적인 전희와 절정을 선사하는 스킬도 재능이었지만, 고집을 부리며 깔리지 않겠다고 우기던 나를 조용히 함락시킨 솜씨 역시 능력이었다. 그러니 둘도 없는 정답이 맞았다.
“다음 주부터는 나도 출근이란 걸 해.”
“사무실이 어디라고 했지?”
“논현 쪽이야.”
“많이 머네. 차는 네가 쓰는 게 좋겠다.”
“한 대 더 뽑을까?”
그는 코코넛 가루가 뿌려진 사과 파이를 갈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맛있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남은 반쪽을 덜어 내 입에 넣어 주었다. 합이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아 물컹한 사과 조각이 시트 위에 떨어졌다.
침대 위는 이미 엉망이었다. 시트가 여러 겹으로 구겨져 어디가 앞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 옆에는 3일 내내 식욕을 채우며 쌓인 접시들이 정액이 묻은 타월과 콘돔 속에서 함께 뒹굴고 있었다. 프런트에서는 계속해서 하우스키핑을 위해 전화벨을 울려 댔고 그때마다 받을 수 없어 곤란해진 우리는 방해하지 말라는 의사를 전달한 채 이 방에서 3일째 기생 중이었다.
“같이 목욕할까?”
한재이가 떨어진 사과 조각을 접시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응. 근데 너무 뜨거운 건 난 좀 별로야.”
“하여간 까다로워, 우서진.”
그는 몸을 일으켜 침실과 연결된 욕실로 향했다. 그러자 곧바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워할 때 보니 자쿠지 욕조가 딸려 있었는데 성인 남자 두 명이 들어가기엔 조금 넉넉하지 않은 사이즈였던 기억이 난다. 함께 몸을 구기고 살갗을 마주 대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남은 파이를 입에 넣고 탄산수와 함께 꿀꺽 삼켰다.
전쟁터 같은 침실을 지나 몸에 두르고 있던 가운을 벗고 욕실로 들어왔다. 한재이가 욕조 안에 샤워 젤을 풀어 거품을 만들었다. 손을 넣어 물을 휘젓더니 뜨겁지 않다며 나를 안으로 잡아끌었다.
거짓말. 다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뒤에서 나를 안은 채 등을 들썩이며 웃었다.
“앉아 봐. 금방 익숙해져.”
한재이의 가슴에 등을 대고 몸을 겹쳤다. 엉덩이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던 그의 페니스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바닥에 깔려 있던 수위는 두 사람의 부피만큼 차올라 어느새 허리 위까지 뜨거워졌다.
“다음도 장거리 비행이야?”
“아니. 상하이. 저녁에 돌아올 거야.”
“데리러 갈까? 차 두고 가.”
“그럴게. 데리러 올 필요는 없어. 너도 바쁘잖아.”
“상황 봐서 정하지 뭐. 고개 더 뒤로 젖혀도 돼.”
그가 젖은 손으로 내 뺨을 밀어내며 자신의 어깨 위에 얹었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입 맞추는 그의 얼굴과 턱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눈을 감았다. 둔부 쪽에서 딱딱하게 커지는 어떤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일단은 외면했다.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하다.
“어릴 때 얘기해 줘.”
귓가에 대고 살랑거리는 한재이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잘 기억 안 나. 그리고 자주 해줬잖아.”
나도 그렇지만 그 역시 틈날 때마다 조르는 것이 있다. 우리는 서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겼다. 특히 지금의 모습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보육원에서의 일들이나 독일어가 아직 서툴던 때의 이야기를 하면 그의 반응은 늘 같았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를 듣는 것 같다고 했다.
“뭐가 듣고 싶은데.”
조금 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에게 물었다.
“보육원 이야기, 그냥 일상 이야기 같은 거.”
나는 눈을 감고 아무거나 생각나는 기억을 하나 끄집어냈다. 다듬지 않고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급식소 뒤편에 큰 나무가 있었어. 종류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자주 올라갔던 거 같아. 녹슨 사다리 같은 게 있었는데 그걸 이용하면 올라가기 아주 쉬웠거든. 그때만 해도 키가 작은 편에 속해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좋았어. 주택가여서 주변이 항상 조용했어.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아주머니가 기억이 나. 늘 뒤에 아기를 업고 있었어.”
“상상이 안 돼. 키 작은 꼬마 우서진이 나무 위에 올라가는 거.”
“버릇이었어. 독일에서도 자주 그랬는데 한번은 떨어져서 많이 다쳤어. 나보다 크리스가 더 많이 울었어.”
“여기쯤이지.”
그가 내 오른쪽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졌다. 당시에는 겨드랑이 바로 밑이었는데 크면서 점점 상처가 내려가기 시작해 이제는 옆구리쯤에 자리를 잡았다. 티도 안 날 만큼의 흉터가 그때의 기억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한재이는 내 정수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더 해 달라 졸랐다.
“원장실 문이 가끔 열려 있을 때가 있었는데 거기선 늘 오래 둔 과일이 익어 가는 냄새가 났어. 물러지기 직전,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썩을 것 같은 냄새. 대개는 모과나 석류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어. 그리고 원장실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누구나 담배를 피웠어.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냄새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
“너한테서 나는 담배 냄새도 좋아.”
“그러고 보면 우리 요즘 담배 많이 줄었지.”
“응. 피우고 싶은 생각이 별로 나지 않으니까.”
그가 내 턱을 잡고 입술을 맞춰 왔다. 초콜릿 가나슈와 사과 파이의 맛이 난다. 욕조를 채우던 물소리는 잠잠해지고 서로의 혀를 감고 맛보는 소리가 욕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욕조 안의 온도는 금방 적응되었다. 가스와 전기로 데워진 온수보다 뜨거운 발열체가 몸 안에 퍼지고 있었으니까.
쉬겠다고 선언했던 나 자신이 물색해질 만큼 다시금 찌릿하게 흥분이 올라왔다. 허벅지 사이로 손을 내린 한재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낮게 웃었다. 몸을 돌려 그를 안고 하체를 맞대었다. 또다시 긴 밤이 시작되었다.
* * *
다음날 정오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조수석에서 3일 만에 전원이 들어온 한재이의 휴대폰이 끊임없이 울리며 부재중 메시지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일 때문만은 아닌 듯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누군가에게 답장을 보냈다. 전화가 곧바로 울렸지만 한재이는 받지 않았다. 나는 신경이 쓰였다.
“누구?”
“아버지.”
혹시나 하고 떠올렸던 사람의 성별은 여자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존재였다.
“아버님이랑 계속 안 좋아?”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든 채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과의 일에 관해 묻지 못했다. 독일에서 짧게 만났던 날 그가 해결하지 못했다고 했던 숙제는 가족 문제였다. 나는 가지고 있지 않은, 물보다 진하다는 그 관계였다.
“속상해하시지. 부모님.”
말해 뭐 하겠냐마는.
“아버지가 좀 많이 언짢아하시네.”
“어디까지 말씀드렸어?”
“다 얘기했어. 회사 관두는 거는 둘째 치고 한국 들어가는 걸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시길래. 너에 대한 내 감정 말씀드렸어.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되잖아.”
너에 대한 내 감정이라. 그는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에 의해 벌어진 듯한 표현을 썼다. 공범인 나는 머쓱해졌다. 물론 그가 부모님께 내 얘기를 해서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후련했다. 그가 내내 숨기며 내 존재를 부정하는 기간을 늘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의 이 마음은 그와는 상관없이 나와 한재이의 부모님이 맺었던 신뢰에 관한 것이다. 그들에게서 지난 15년간 쌓아 올렸던 나에 대한 믿음이 모조리 무너져 내렸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씁쓸해진 것이겠지. 나아가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꾀어내어 한국으로 데리고 도망간 파렴치한이 된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 찝찝함은 내 속에 자그맣게 얼룩져 있던 또 다른 감정과 맞닿아 있었다.
‘다들 내가 바람난 거라고 생각해.’
그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도 이런 마음이 들었었다. 마치 내가 모두에게서 한재이를 빼앗아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