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Flap B (6/10)

6. Flap B

콕핏에서 가장 하면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문을 열어 둔 채 자리를 비우는 것인데, 내가 요즘 제정신이 아닌지 그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우리 비행기는 상하이로 날아갈 이륙 준비를 마치고 조금 시간이 남은 상태였다. 부기장이 화장실에 들어갔고 나는 휴대폰 충전기를 가지러 잠시 밖으로 나갔는데, 그사이 콕핏에 침투해 버린 꼬마 손님의 질주를 미처 막아 내지 못했다. 까만 눈을 깜빡이며 이것저것을 만져 보려 하는 순간 나는 너무 놀라 그대로 아이를 안아 올려 버렸다.

객실 승무원 한 명이 뛰어 들어와 아이를 받아 들고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이는 자그마한 손으로 내 코를 쥐고 웃었다. 갑작스럽고 천진난만한 공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몸이 굳어 버렸다.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만 대하는 것이 영 어색하다.

부기장이 그건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자신도 아이가 없었던 미혼일 때는 그저 귀찮고 성가신 생물이라 생각했었다고. 어릴 때부터 자신을 보고 자주 울던 조카 탓에 딩크족으로 살까도 고민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낳아보니 그전에는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인생이 달라져요.”

“그렇다고들 하시더군요.”

“지난주에는 뉴욕 비행을 다녀오다 거의 서른 시간을 깨어 있었어요. 자려고 누웠는데 옆에서 애가 혼자 뒤집기를 하는 거예요. 어찌나 귀여운지, 하하하. 두 시간 더 깨어 있었습니다.”

“좋을 때네요.”

이 어린 생물들은 자각도 하지 못한 행동으로 어른들의 마음을 쿡쿡 찌른다. 나는 이런 상식들을 TV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 배웠다.

부모와 유년기에 맺어지는 유대감을 가지지 못했던 내게는 그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시각화되어 습득된 지식이다. 그래서인지 그 안에 담긴 그 쿡쿡 찌르는 듯한 감각은 얻지 못했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그 느낌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택한 사람과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이런 종류의 관계를 맺는 것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꾸준히 애정과 보살핌을 채워 넣지 않으면 말라 가는 아이나 반려동물 같은 존재들이 두렵다. 그래서 동물을 키워 본 적도 없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다 자란 어른들과의 관계만을 선호해 온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다.

성인이 되면 마음속에 여러 갈래의 방들을 만들어 둘 수 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 따라 열어 주는 방문의 종류와 횟수가 달라진다. 친구나 직장 동료들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만나 늘 열었던 방문만 열어 보여 주고 해가 지면 헤어진다. 술이 들어가면 가끔은 열지 않은 곳까지 보여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음날이 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모른 척을 해 준다. 나는 그렇게 정해진 공간들만 허용해 주는 관계가 좋았다.

사무장이 콕핏에 들어왔다.

“탑승객 총 186명, 방금 탑승 완료하셨습니다.”

“오, 빠르네요. 웬일이지?”

“그러게요. 사무장님, 게이트 닫아 주세요. 부기장님, 테이크 오프 클리어런스 바로 요청하시죠.”

“네.”

이륙 준비를 모두 마친 비행기는 푸둥 공항으로 날아오를 순번을 부여받기 위해 잠시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한국에서의 비행 기록이 늘어 가면서 아시아 지역 비행 경험이 쌓이기 시작했다. 중국행 비행기는 대체로 이륙 준비가 늦어진다. 탑승객들의 성향이 그런가. 수속은 마친 채 기내 탑승을 하지 않는 손님 비율이 항상 높았다.

나중에 사무장의 보고를 들어 보면 대체로 면세점에 있었다거나 탑승 시간을 착각하고 있었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오늘의 탑승 완료 시간은 기록적이었다. 부디 돌아오는 비행도 이렇게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헤드셋을 썼다.

* * *

서울로 돌아와 차트와 운항 일지를 반납하던 차에,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조금 더 순발력이 있었다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모른 척 지나갔을 텐데, 거기까진 아직 훈련이 안 되어 있었나 보다.

“아니, 그러니까. 마시기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왜 문자를 씹냐고. 어? 기장님!”

온 세상 우연을 다 끌어다 쓴 것처럼 거기에는 전성욱 부기장과 조민우 부기장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나를 부른 전성욱 부기장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묻어 나왔고 그 옆에서 고개를 든 조민우 부기장의 얼굴에는 복잡함이 서려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을 나누던 우리는 어른답게 행동하기로 했다. 그는 표정에 묻은 얼룩을 지워 냈고 나도 아무렇지 않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비행 있으셨나 보네요.”

“네. 신기하게 이렇게 셋이서 마주치기도 하네요. 기장님은 어디로 다녀오셨어요?”

“상하이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부기장님.”

“그러네요. 오랜만이네요.”

그는 보조개를 접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오랜만’이라는 그 단어에 한숨 섞인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들은 이미 사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아무래도 전성욱 부기장이 셋이 있던 대화방에서 메시지를 씹고 있던 조민우 부기장에게 타박을 주고 있었던 듯한데, 그가 제대로 변명도 하지 않았나 보다. 딱히 내 잘못도 아닌데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그 상황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잘됐네, 뭐. 오늘 본 김에 저녁이나 하자. 기장님도 괜찮으시죠?”

“아, 저는…….”

“그러시죠.”

내가 거절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핑계를 댈까 하며 말꼬리를 잡고 있었는데 조민우 부기장이 툭 하고 먼저 승낙을 해 버렸다. 그가 애써 직장 동료로서의 태연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럼 그렇게 하자고 동의한 뒤 탈의실로 들어갔다. 한재이에게 저녁 먹고 들어가게 되었다는 연락을 해 주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기장님 차 가지고 오셨어요?”

“아니요, 두고 왔습니다.”

“아, 그러면 저랑 같이 타시고, 민우 너는 세이렌으로 바로 와. 어딘지 알지?”

“응.”

“기장님 가시죠.”

전성욱 부기장은 신이 났다. 아마 오늘 저녁은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혼자 고민되던 차에 친구도 만나고 동료도 만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를 위해 희생양이 된 우리의 사연을 알 리 없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려고 하는 곳은 돼지 갈빗집이라고 했다. 그나마 오늘 그가 고른 메뉴는 큰 모험심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다.

“내일 오프시죠?”

“네.”

“저도 이틀 오프인데 술도 한잔할까요?”

“뭐, 그러시죠.”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는 차를 가지고 오겠으니 내게 출국장 입구에서 기다리라 한 뒤 주차장으로 향했다. 고개를 돌린 반대편에는 조민우 부기장이 혼자 담배를 무는 모습이 보였다. 어려운 저녁이 될 것 같았다.

* * *

입구에서부터 굉장한 연기와 냄새가 퍼져 나왔다. 먼저 도착한 전성욱 부기장과 나는 좌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돼지갈비 5인분을 주문했다. 그리고 소주도 시켰다.

전성욱 부기장은 신이 났고 나는 비장한 각오로 잔을 쥐었다. 3잔 이상은 마시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던 찰나 한 번에 술을 털어 넣는 부기장의 행동에 어쩔 수 없이 잔을 모두 비웠다. 벌써 2잔 남았다.

“민우야, 여기!”

뒤늦게 도착한 조민우 부기장이 신발을 벗고 올라와 맞은편에 앉았다. 등 뒤에서는 이미 취한 듯한 남자 손님이 자꾸만 내게 팔을 부딪쳐 왔다.

“나 술 안 해.”

“뭐? 네가? 아, 왜. 그러지 말고 한잔만 해.”

“안 한다니까.”

조민우 부기장이 가차 없이 자신의 잔을 뒤집어엎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전성욱 부기장이 자꾸만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조용히 반찬을 깨작거리며 그냥 술 마실 기분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다 변명은 산더미처럼 불어나 결국엔 몸이 안 좋다는 말로 제 친구를 설득해야 했다. 몸이 안 좋다는데 더 권할 수는 없다.

시무룩해진 전성욱 부기장을 달래기 위해 내가 희생해야 했다. 앉은 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이제 1잔 남았다.

“불 넣어 드릴게요. 조심하세요.”

숯불이 들어오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불판을 올리던 점원이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고기를 구웠다. 맞은편에 앉은 두 명의 부기장 중 한 명은 혼자 술을 자작하고 다른 한 명은 말없이 반찬만 먹고 있었다. 나라도 말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을 쏟아 냈다.

“이렇게 고기를 직원분이 구워 주는 데는 한국밖에 없어요.”

“그런가? 하긴 다른 데서는 본 적 없긴 하네요.”

“어떨 때는 고기에 손댔다고 막 화내시던데요.”

“맞다, 맞다. 하하하.”

오래전 일이었지만, 자신이 올려놓은 고기를 함부로 뒤집었다고 식당 아주머니께 혼이 난 적이 있었다. 내 돈을 주고 내가 먹는 것인데 마음대로 고기도 뒤집을 수 없다니. 나는 야단맞은 아이처럼 당황해서 죄송하다는 말까지 해 버렸었다.

“저희가 해 드리는 게 더 맛있어서 그래요.”

내 말을 엿들은 종업원이 구워지는 고기를 가위로 자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기름이 녹아 소스와 함께 타는 냄새가 꽤 그럴듯하게 식욕을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가위로 고기를 자르는 것도 한국의 특징이다.

“맞아. 일본도 고기는 미리 다 잘려서 나오더라고요. 한 점씩 올려서 구워 먹는 꼴을 보니 속이 다 터지더라니깐.”

“걔들 은근히 네 거 내 거 구별해서 먹어. 남이 구운 거 먹으면 욕먹는다. 이쪽에서 굽는 건 내 것, 그쪽에서 굽는 건 네 것. 구분이 딱딱 되게 올려놔야 돼.”

내 작전이 먹혀들었는지 조민우 부기장도 말문이 트였다. 하네다 전문 부기장답게 일본 문화에 관해 잘 아는 듯했다.

“어휴, 감질나서 어떻게 그렇게 먹어. 한국 사람은 한꺼번에 바로바로 먹어야 해. 나는 스테이크도 다 잘라 놓고 먹는다, 진짜.”

“하하하. 맞아. 나도 돈가스는 미리 잘라 놓고 먹어.”

조민우 부기장의 웃음에 나는 조금 더 안심했다. 여기저기서 소음을 내며 구워지는 음식들과 가벼운 잡담이 분위기를 말랑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전성욱 부기장의 잔에 술을 부어 주고 내 잔에는 반 정도만 채워 넣었다.

지글대며 타고 있던 고기들은 어느새 정확히 똑같은 크기로 잘리기 시작했다. 적당한 한입 크기로 보기 좋게 늘어선 불판 위를 보며 실감했다. 역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구나.

“조금만 더 있다가 드시면 돼요.”

할 일을 마친 식당 종업원이 집게를 내려놓고 테이블을 떠나자 우리는 급식을 배급받은 아이들처럼 그 ‘조금’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마른침을 삼켰다. 야채 접시에 소스를 붓고 고기를 기다리던 전성욱 부기장이 용기 있게 나서서 첫 시식을 시작했다.

“맛있다. 먹어도 될 거 같은데요? 밥 지금 달라고 할까?”

“응, 찌개도.”

“아, 저는 괜찮…….”

“여기요! 공깃밥 3개!”

합이 척척 맞는 두 사람에 비해 나는 계속 한 발씩 늦었다. 주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테이블로 전달된 밥 3공기가 하나씩 앞에 놓였다. 어째 덜어 가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양이라 그냥 먹기로 했다.

“근데 너 무슨 일인데 한동안 두문불출했냐? 전화도 씹고.”

“뭐, 좀 이래저래 심란했어. 집에도 좀 다녀왔고.”

“거제도 갔었어?”

“어.”

나는 고기를 먹는 데 집중하며 제삼자인 척 관망하고 있었다. 조민우 부기장의 고향이 거제도라는 사실을 지금 알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같았는데 의외다.

“어머님 아직도 서운해하시지?”

“다 지난 얘기 하면 뭐 해. 이제 포기하셨어. 별말 안 하더라.”

“하긴 이제 거의 몇 달이야, 1년은 안 됐지? 아, 기장님. 민우가 파혼을 했었는데. 야, 근데 이거 말해도 되나?”

전성욱 부기장은 내가 혼자 소외되는 것 같아 챙겨 주려 말을 꺼냈지만, 오히려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기장님도 알아. 내가 얘기했어.”

“그래? 이유도?”

나도 모르게 반쯤 채워진 소주를 스스로 마시고 있었다. 설마, 부기장의 성적 취향까지 알고 있는 건가.

“응. 집 문제 때문에 그렇게 된 거 알고 계셔.”

쓰디쓴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나를 쳐다보며 조민우 부기장이 눈빛으로 호소했다. 여기는 한국입니다. 소주를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전에 한번 들었습니다.”

“아, 들으셨구나. 나 참, 진짜 별것도 아닌 거로 그렇게 깨질 줄이야. 어머님 마음 나는 백번 이해한다.”

나한테는 그렇게 티를 내고 싶어 하더니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는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나 보다.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 역시 런던에서 요하임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으니까.

“부기장님, 아기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한참 아기 이름에 대해 리서치를 하고 다니던 모습이 생각나 화제를 그쪽으로 돌려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전성욱 부기장의 목소리에 흥분이 섞였다.

“아, 이게 진짜. 애 이름 하나 짓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드네요. 거의 결정했었는데 막판에 의견이 갈려서요. 한율이, 율이. 좋지 않나? 아니 그때 기장님은 몇 번에 투표하셨지?”

“저도 그 이름에 한 표 던진 거 같은데요. 전한율.”

“아, 역시 저랑 의견이 같으시네. 와이프는 다 좀 맘에 안 든다고 해서 아직 이러고 있네요. 뭐 좋은 이름 없나?”

“기장님 이름 좋잖아. 서진. 전서진. 좋네.”

조민우 부기장은 나 들으라는 듯 그런 말을 던졌지만, 정작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불판 위의 고기만 이리저리 굴렸다.

“제 이름은 그만두시는 게 좋아요.”

“왜요?”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한국 이름을 알려 주었을 때 설명했을 텐데 굳이 또 이러는 이유가 뭘까. 알면서 물어보는 그의 표정에는 희미하게 날이 서 있었다.

“버려져서 재수 없는 이름이거든요.”

확인 사살을 시도하는 조민우 부기장을 위해 내가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얼어 버린 분위기에 전성욱 부기장이 당황해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다.

“야, 너 왜 갑자기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어.”

“죄송해요. 술도 안 마셨는데 취했나 봅니다.”

전혀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사과를 들으며 허공에서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괜찮습니다.”

“역시, 쿨하시네.”

조민우 부기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젓가락을 놓았다. 마치 시비를 걸어 보려 했는데 상대가 받아주지 않아 재미없어졌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화장실을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먹고 있던 접시 위에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조민우 부기장은 나에게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내가 너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다고 표현하고 싶은 듯 보였다. 내 이름이 버려져서 재수가 없는 건 사실이었으니 딱히 그런 거로 기분 나쁘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그가 분위기를 마음대로 깨는 것이 못마땅했다. 둘만 있는 자리도 아닌데 말재주도 없는 내가 애써 녹여 놓은 자리를 다시 얼어붙게 만드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 오늘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얼른 먹고 일어날까요?”

전성욱 부기장의 말에 동의했다. 아직 익지 않은 과일을 입에 문 듯 떫고 신맛이 나는 술자리였다. 그와의 만남이 역시나 너무 일렀다.

대충 식사가 끝나고 테이블이 정리되자 나는 택시를 부르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조금 취한 전성욱 부기장이 나를 위한답시고 곤란한 제안을 했다.

“민우 술 안 마셨으니까 같이 타고 가세요. 집도 바로 옆인데.”

나는 조민우 부기장을 쳐다보며 승낙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먹히지 않았다.

“그래, 그럼. 넌 대리 불러서 가. 우리 먼저 간다.”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혼자 주차장으로 걸어가 버렸다. 나는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바람에 전성욱 부기장의 눈치를 봐야 했다. 대리 기사에게 전화하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조민우 부기장이 사라진 주차장으로 향했다.

“저는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모습까지 보였으니 여기서 헤어져도 들키진 않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조민우 부기장은 대답도 없이 조수석 차 문을 열어 주며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냥 타고 가요. 안 잡아먹으니까.”

등이 밀려 얼떨결에 차 안으로 들어온 틈을 타 그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래 뭐, 여기서 가 봐야 20분이면 도착할 거리인데 고집부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무슨 치정 싸움 하는 것도 아닌데 여기서 더 거절해 봐야 우스워질 것 같아서 안전벨트를 채웠다. 부드럽게 출발한 그의 차가 천천히 1차선에 진입했다.

비행 직후 곧바로 소주를 마셔서 그런지 피곤하고 졸렸다. 어색하게 침묵이 흐르는 내부 공기가 숨 막히게 답답했다. 운전하는 그를 슬쩍 쳐다보다 마주친 눈빛에는 피곤함 외에도 섭섭함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불편하세요?”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해야 하는 말이 아닌가.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리고 부기장님도 제가 불편해 보이시는데, 아닌가요?”

“편할 리는 없잖아요. 나도 사람인데.”

네가 나를 찔렀으니 당연히 아프지 않겠냐는 말투였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이 가시밭길 같은 시간을 견디고자 애썼다.

“기장님 곧 저랑 비행 같이 있던데, 보셨죠?”

안 그래도 그게 마음에 무척 걸리던 참이었다.

“원하시면 제가 스케줄을 바꾸겠습니다.”

그 말에 조민우 부기장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우서진 기장님’ 하고 또박또박 이름을 넣어 불렀다.

“본인 불편하다고 너무 칼같이 자르고 그러지 마세요.”

나는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냐는 표정을 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좀 불편해도 참아 주시면 안 되나요? 상대가 미워할 시간도 좀 주고 그러세요. 그렇게 자꾸 한발 앞서가서 먼저 다 잘라 내시면 저 혼자 너무 비참하지 않겠어요?”

“……그런 생각까지는 미처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

조민우 부기장은 역시 달변가였다. 나를 미워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사과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물론 내가 그를 잘라 내려 했던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가 민망해할까 봐, 그리고 불편해할까 봐 시간을 주려고 했던 의도가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본심과는 상관없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내가 혹시라도 그랬던 것이라면 그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내게 고백을 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아…… 또 이렇게 칼같이 사과를 하시니까 참, 미워할 수도 없고. 내가 진짜 할 말이 없네. 하하하.”

그는 웃음과 한숨이 반쯤 섞은 말투로 나를 원망했다. 그리고 더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듯 라디오를 켜고 소리를 키웠다. 우리를 대신해서 떠들어 주고 있는 DJ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라디오에서 세 번째 노래가 흘러나올 때쯤 부기장의 차가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빌라 앞에 잠시 주차를 한 뒤 그가 내게 담배를 권했다. 아까부터 왠지 죄인이 된 것 같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몇 번 같이 피운 적이 있었던 빌라 앞 흡연 장소에서 그가 건네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흡연 자체가 오랜만인 것 같다. 혹시나 해서 집 발코니를 올려다보았지만 거실 불은 꺼져 있었다. 실종되어 버린 한재이를 생각하는 와중에 조민우 부기장이 재를 털며 말문을 열었다.

“제가 쓸데없는 짓만 안 했어도, 우리 꽤 잘 지낼 수 있었겠죠?”

연기를 뿜으며 그가 웃었다. 아주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보았던 미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냈다.

“부기장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았거든요.”

“친구? 하하.”

너무 나갔나 싶은 생각에 그가 말을 이어 주기만을 기다렸다.

“기장님, 성욱이랑 제가 기장님보다 한 살 많아요.”

“아…….”

내 반응을 보며 그가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나이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역시 그도 한국 남자답게 한 살이지만 형 소리를 듣고 싶은 건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뭐, 놀리려고 한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꼰대 된 거 같은 기분이네요. 친구 좋죠. 저도 노력해 볼게요.”

나는 반쯤 타고 남은 담배를 비벼 끄며 두통을 느꼈다. 소주를 마셔서 그런지 여기서 더 피우게 되면 꽤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 같았다. 내가 담배를 끄자 조민우 부기장도 물고 있던 것을 서둘러 태우고 한 손으로 불을 껐다.

“올라가 보세요. 우리는 비행 때 보는 거로 하고.”

“네. 그럼.”

“갑니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와 내가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노력해 보겠다는 뜻은 지금은 아니라는 의미겠지. 상대가 미워할 시간을 주라는 그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게 된다. 지난 인연들을 돌아보며 차마 그런 말조차 하지 못하게 밀어낸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사람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행위 자체를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는 내게 고백을 하지도, 쫓아다니며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런 그를 나는 비난하고 무안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단 하나, 고작 내 마음이 좀 불편하다는 것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란 인간은 이런 쪽으로 전혀 어른스럽지 못했다. 좋은 말로 에둘러 거절할 수도 있었는데 나의 방식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1년이라도 더 살아 본 사람의 배려였을까. 최악으로 치달을 뻔한 관계를 그가 애써 건져 내 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 자란 어른들과의 관계도 내게는 점점 어려워진다.

현관문이 열리며 자동으로 켜진 불빛이 거실을 서늘하게 비췄다. 신발을 벗고 올라와 미등을 켜고 침실로 들어왔다. 외출을 한 건지 한재이의 슈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휴대폰에도 그의 메시지는 도착한 것이 없었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쯤 잠금장치가 해제되며 다시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재이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고단함을 뚝뚝 흘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나갔었어?”

“응. 너 저녁 먹고 온다 해서 거절했었던 식사 자리에 참석했어.”

“약속 있었어? 왜 거절했었는데.”

그는 스리피스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아 보였다. 한재이가 신발을 벗고 천천히 다가와 말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어깨에 파묻힌 그의 입술에서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어쭙잖은 중소기업 클라이언트 접대. 남자들끼리 술 마시며 떠드는 시시한 농담 먹어 주는 자리.”

“너 그런 거 싫어하잖아.”

“싫은 걸 해야 하는 게 사업이라더라.”

“그래서 이렇게 멋있게 차려입고 나간 거야?”

그 말에 한재이가 어깨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멋있어?”

“응.”

큰 칭찬이라도 들은 아이처럼 그가 겨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나를 끌어안으며 제 무게를 실었다.

“동료들이랑은, 재밌었어? 맛있는 거 먹었나 보네.”

그가 살짝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연기가 배어 버렸을 것을 생각하니 민망해졌다. 한재이에게서는 위스키 같은 고급술 냄새가 났고, 꽤 마신 탓인지 약간은 자세가 비틀려 있었다.

“뭐, 그럭저럭. 나도 방금 들어 온 거야.”

“알아.”

알고 있다는 그의 말은 아까보다 온도가 더 내려가 있었다. 혹시 나와 조민우 부기장을 본 건가 싶어 마음이 덜컹거렸다. 아무런 서사가 쌓이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에 내가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던 한재이의 질투라도 핑계 삼아 설명하고 싶었다.

“셋이서 먹었어. 너도 알잖아, 그때 집들이 왔…….”

“알아.”

그가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아니까 변명하지 마. 그게 더 이상해.”

숨 막힐 정도로 나를 안고서 내뱉는 그의 말이 서늘하게 가슴을 찔렀다. 한재이는 지금 기분이 상했다. 그것이 가기 싫은 접대 자리 때문인지 조민우 부기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 짜증을 낼 수 없어 혼자서 분을 삭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조민우 부기장과 나의 대화를 들었을 리는 없다. 나는 시력이 좋은 편이니 한재이가 주변에 있었다면 곧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기껏해야 멀리서 보았거나 헤어진 장면을 목격한 정도일 것이다. 고작 그런 거로 화가 난 것은 아닐 텐데 역시 접대로 받은 스트레스인가.

한재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샤워하고 나올 테니까 기다릴래?”

그가 우울함에 절은 눈빛으로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잠들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에는 이유가 하나밖에 없다.

“알았어.”

대답을 들은 그는 내 손에 짧게 입 맞추고 거실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어차피 나도 이렇게 연기를 뒤집어쓴 채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씻어야 했다.

침실로 들어와 옷을 벗으며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밖에서 구겨진 기분을 내게 욕정으로 풀어내려는 한재이에 의해 자존심이 상했다. 스트레스의 분출구가 되어 버린 제 처지가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렇게라도 해 줄 수 있는 위로가 있다면 뭐라도 해 주고 싶다는 양가적 감정도 들었다. 어쩌면 그 스트레스의 원인이 질투심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서겠지.

조민우 부기장에 대해 변명하지 말라던 한재이가 내 입을 다물게 했다. 재수 없다고 주먹을 쥐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날들은 지났다. 그는 이제 나를 깔아 눕히고 확인하고 싶어 했다. 결국엔 자신이 차지했음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침실과 연결된 욕실로 들어와 샤워기를 틀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닫고 스스로가 우스워 바람 빠진 소리를 뱉어 냈다.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엉덩이 안쪽을 닦고 있는 꼴이 뭐랄까, 어이가 없다고나 할까. 머릿속은 엉망이었지만 몸은 따로 놀고 있었나 보다.

앞에 달린 것은 벌써 목을 길게 빼고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 잘못이 아니다. 그 와중에 슈트까지 빼입고 화를 눌러 담던 한재이의 모습이 꽤나 섹시했기 때문이다. 더워진 나는 샤워기의 물 온도를 조금 더 내렸다.

타월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니 그는 벌써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자마자 곧바로 내 위로 올라온 한재이의 무게에 상체가 눌렸다.

키스는 깊고 질퍽거렸다. 오늘은 시작부터가 다르다. 늘 내가 느끼는 흥분의 흐름을 따라 기다리고 인내하던 그는 거기에 없었다. 제 것을 취하듯 곧바로 다리 사이로 들어온 손길에 놀라 팔을 내렸지만 소용없었다. 잔뜩 힘을 준 그의 왼손에 붙잡히고 저지당했다.

“재이야…… 천천히. 읏.”

대답은 없었다. 애널 주변을 누르던 그는 내 허리를 두르고 있던 타월을 풀고 멋대로 다리를 벌렸다. 침대 위에 뒹굴고 있던 젤을 짜내 입구에 바르고 곧바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는 모든 것을 생략하고 제 본능에만 충실하고 싶어 했다.

“아…….”

여분의 젤이 흘러내려 타월을 적시는 느낌이 났다.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 나쁜 통증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들어온 한재이의 키스에 신음은 목구멍 안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는 내 입술을 지근지근 씹을 듯 빨며 물었다. 한 손으로는 애널을 쑤시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칼을 잡고 고개도 돌리지 못하게 만든 뒤 혀를 집어넣었다.

복부에 느껴지는 뜨거운 그의 페니스가 자꾸만 움직거리며 미끈한 액을 토해 냈다. 당장이라도 넣고 싶은데 마지막 이성의 힘을 빌려 참고 있다는 투로 그는 내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유도 모른 채 화가 난 남자의 혀는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손가락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쯤, 서서히 자극되는 전립선의 흥분이 앞서 자리했던 고통을 밀어내고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아…….”

신음을 토해 내며 그를 안았다. 핏줄이 잔뜩 선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목을 끌어당기며 몸을 밀착시켰다. 입술이 닿은 내 살갗을 깨물며 애널을 빠져나간 한재이의 손이 성난 제 페니스를 쥔 채 다시 입구를 찾았다. 그렇게 몸을 겹친 채로 멋대로 제 것을 밀어 넣는 그의 폭력에 나는 턱을 젖히고 고통을 신음했다.

“윽!”

콘돔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생살의 느낌에 내벽이 쓸리며 비명을 질렀다. 좁디좁은 구멍 안을 침식하던 페니스는 조금 뒤로 빠지는 듯 여유를 주다 그 두 배의 거리만큼 더 안으로 들어왔다. 전립선이 눌리며 몸이 비틀렸다. 그래 봤자였다. 한재이의 몸에 깔려 움직이지도 못한 채 헐떡이던 나는 그에게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재이야, 읏! 천천, 하아…… 천천히. 제발.”

그 말에 페니스가 한 번에 빠져나갔다. 그제야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찰나의 자유를 채 다 만끽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허리를 굽힌 그가 애널 끝에 제 것을 맞춰 왔다.

“좋다고 말해 봐.”

“뭐? 흣…….”

성난 페니스가 질척한 젤과 함께 다시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한테 박히는 게 좋다고 말해 보라고.”

“미쳤어? 아읏…….”

그가 밑으로는 페니스를 들이밀고 입으로는 굴욕감을 선사했다. 침대 위에서 이런 유의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를 밀어내려 어깨를 돌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한재이가 마지막 남은 부분마저 구멍 안에 밀어 넣으며 내 행동을 저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으윽!”

“움직이지 마. 자존심 좀 그만 세우고.”

곧바로 이어지는 키스와 허리 짓에 멋대로 피어오른 쾌락은 그의 말처럼 자존심을 녹이고 내 몸을 열었다. 감각은 일렁이는 물결처럼 점점 더 큰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고 이를 세워 그를 쫓아내던 입은 허우적대며 혀를 빨고 타액을 삼켰다.

겹쳐진 몸 안에서 벌떡거리던 페니스는 상체를 들어 나를 내려다본 한재이의 손에 의해 애액을 흘려 댔다. 곧바로 사정을 시키고 싶은 듯 그는 앞뒤로 나를 흔들어 대며 성감을 자극했다.

“하아…….”

빨라진 한재이의 허리 움직임과 그로 인해 반동되는 몸의 흔들림에 나는 속절없이 고개를 젖히고 입을 벌린 채 흥분을 표현했다. 술기운도 남은 탓에 굳이 참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가 나를 보내고 싶어 한다면 먼저 가 줄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다만 이것은 즐기는 섹스가 아닌 욕망을 배출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른 화를 내게 뱉어 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정감이 밀려왔다.

“흐읏!”

나는 정액을 내보내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빡빡하게 조여 오는 감각에 터져 버린 오르가슴을 느꼈는지 한재이가 사정했다.

“하아, 우서진…….”

그가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모조리 내 안에 두겠다는 듯 허리를 더 짓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그와 나눈 그 어떤 섹스보다 배출에 충실한 섹스였다. 나는 그의 손에, 그는 내 몸 안에 토정을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재이는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밑에 깔려 있던 타월에 손을 닦았다. 동시에 그의 페니스가 내게서 빠져나갔다.

그대로 내 위로 쓰러져 버린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화가 난 수사자 같은 그의 근육이 아직도 움찔거렸다. 바보 같네, 한재이. 어깨 위에 입술을 댄 그의 숨이 여전히 고르지 못했다. 밑에서는 어느 쪽에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정액이 끈적거리며 흘러내렸다.

불쾌하고 폭력적인 섹스의 끝에서도 내가 사정을 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남자는 머릿속과 아랫도리가 따로 논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아니면 그 불쾌함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페티쉬가 내게 있었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한재이의 숨소리가 안정을 찾아 갔다.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움직이지 않는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담배 피울래?”

그러자 등 뒤의 날개뼈 부분이 움직이며 한재이가 일어났다. 나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이마와 코를 맞대었다.

“……미안.”

그의 말에 나는 픽 하고 웃었다. 그렇게 여전히 성난 표정을 짓고서도 사과를 하고 있는 한재이의 성격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기왕 할 거면 표정이나 좀 펴고 사과를 하지. 그르렁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내 앞에서 매너 챙기느라 고생이 많네.

“담배 피울 거냐고.”

“응.”

그가 몸을 완전히 일으켜 옆으로 비켜 앉았다. 나는 욕실로 들어가 그가 토해 낸 정액들을 긁어내며 몸을 씻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발코니에 나와 서로의 입에 물린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재떨이로 쓰고 있던 우유 팩에는 한 달 전 꽁초가 아직도 보였다.

“곧 네 생일이네.”

“나 안 챙기는 거 알잖아.”

나는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서류상에 적시된 9월 7일에 정말 내가 태어난 것인지도 의심스러웠고 이제는 주민 등록 번호가 없는 나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한재이는 매년 내 생일을 챙겼다.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축하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뭐 할까? 여행 갈까?”

“나 비행 있어.”

“어디로?”

“암스테르담.”

내 말에 그의 눈빛이 빛났다.

“나도 갈게. 며칠이나 머무는데?”

한재이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출근한다더니 다 거짓말인가.

“이래 봬도 대표야. 내가 출근하고 싶을 때 출근하는 거 외에는 별 장점이 없지만.”

“단점은 뭔데?”

“음……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네.”

그가 웃으며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요즘 들어 왜인지 모르게 한 번씩 낯선 한재이를 느낀다. 처음에는 그것이 연인이라 생긴 새로운 감정이라 느꼈는데 한국으로 들어오고 난 뒤부터 점점 더 자주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같은 생각을 했다. 그가 혼자 너무 많은 것과 싸우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내가 궁금한 것은 더 궁극적인 것이었다. 아니라고 부정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겁쟁이처럼 물어보지도 못하고 담배만 피웠다. 아니라고 해 줬으면 좋겠다.

나 때문에 전부를 걸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 * *

결국, 한재이와 생일 기념으로 암스테르담 비행을 함께하기로 했다. 무려 퍼스트 클래스 티켓까지 끊어 놓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말릴 수가 없었다.

교대 비행을 할 때 조종사들은 콕핏 벙커나 승무원 수면실을 이용해서 휴식을 취하는데 상황에 따라서는 퍼스트 클래스에서 쉴 수도 있다. 그 몇 시간이라도 함께 보내고 싶다는 그를 만류하기에는 나의 의지력이 부족했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암스테르담으로 가기 이틀 전인 오늘, 타이베이로 가는 턴 어라운드 비행이 하나 잡혀 있었다. 기분 좋게 1시간 일찍 공항에 도착해 운항 정보를 스크랩했다. 쇼업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임에도 비행을 함께할 파트너 조종사는 여전히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보통은 부기장이 먼저 도착해서 정보를 취합해 놓은 다음 기장이 도착하면 함께 운항 계획을 세우고 브리핑에 들어간다. 졸지에 부기장이 해야 할 일을 다 해 버린 나는 편조 스케줄에 적힌 ‘김경수’라는 이름을 보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난번 방콕 공항에서 나에게 연료 부족을 선언하게 만든 공군 출신 조종사였다.

몰 수 있는 기종이 정해져 있다 보니 친한 사람들과 자주 파트너가 되는 행운도 있지만 잘 맞지 않는 조종사들과도 마주칠 확률은 똑같이 높았다. 이상한 건 그가 기장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부기장 포지션으로 나와 묶였다는 것이다. 괜한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했지만, 출발 전부터 그와의 팀워크에 다시 불신감이 생겼다.

“아, 왔어요?”

김경수 기장은 쇼업 5분 전에 도착해서는 부하 직원 대하듯 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겉치레식 인사를 하고 그를 향해 운항 서류들을 내밀었다. 그는 내가 이번에도 PIC를 양보해 줄 거라 생각했는지 자료를 살피며 자연스레 운항 계획을 물었다.

“두 번째 웨이 포인트에서 라이트 터뷸런스가 예상되니 고도는 300피트 낮춰서 날겠습니다. 퓨얼 탱커링(Fuel Tankering. 도착지의 항공유가 비싸 왕복 연료를 미리 채워 가는 것)으로 갈 거니까 디스크레셔너리는 5톤 더 요청하겠습니다.”

“꼭 퓨얼 탱커링 할 필요 있겠어요? 타이베이에서 급유받지, 그냥?”

“의견을 물어본 것은 아닙니다.”

“네?”

그는 운항 계획표를 든 채 내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당황했다.

“포지션 변경은 없습니다. 기장님은 오늘 PM 보시죠.”

그 말은 ‘내가 오늘 너의 상사’라는 뜻이다. 그에게서 다시 서류를 건네받고자 빈손을 내밀었다. 허공에 뜬 내 손은 그에게 복종할 건지 말 건지를 지금 정하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며 계획표를 넘겨주던 김경수 기장의 얼굴에 떨떠름함이 비쳤다.

그런 것은 하등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회사는 내게 PIC를 맡겼고 조종사는 포지션에 의해 권한이 정해진다. 게다가 이미 그는 부기장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시작부터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무슨 불만을 토로하겠는가.

“쇼업 가시죠. 이미 늦었습니다.”

나는 그를 내버려 두고 먼저 이동했다. 복도를 지나 커다란 브리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10명 정도의 객실 크루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타이베이로 가는 CR770편을 맡은 슈미츠입니다. PM을 보실 기장님이 오늘 늦게 도착하셔서 운항 브리핑은 제가 직접 하도록 하죠.”

김경수 기장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무리에 끼어들었다.

“이륙에 특이 사항이 없고 중간 지점부터 난기류가 예상되어 고도를 낮출 예정입니다. 그전에 흔들림이 심할 수 있으니 기내 서비스는 가능한 빨리 시작 부탁드립니다. 타이베이 공항은 접근 경로가 도심이라 이착륙 난이도가 높습니다. 비 소식까지 있으니 랜딩 전 안전벨트 확인 같은 것들을 좀 더 신경 써 주세요. 오늘 비행은 턴 어라운드 비행이고 왕복 연료를 모두 싣고 가는 거니 현지 탑승 수속 역시 가능한 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그럼 사무장님 객실 브리핑 시작해 주세요.”

“네. 오늘 총 탑승객 210명, 캐빈 크루 11명, 총인원 221명입니다. 비즈니스에 여유 좌석 좀 있으니 몸이 불편하신 승객분께는 바로 안내하셔도 좋습니다. 탑승 마감은 디파쳐 10분 전. 기장님 말씀대로 현지 도착하면 기내 청소 끝나는 즉시 곧바로 보딩 시작하겠습니다. 이코노미가 풀이니까 서비스 밀리지 않게 부사무장님이 같이 봐 주세요.”

“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질문 있는 분 계실까요?”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브리핑이 끝날 때마다 크루들에게 늘 질문을 하라고 하는데 한국 항공사로 옮긴 뒤부터는 아무도 손을 들고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궁금한 것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경직된 직장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때 객실 승무원 중 누군가 살며시 손을 들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그녀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기장님, 난기류가 이미 예상돼서 고도를 낮추시는 거면 그냥 처음부터 쭉 낮게 비행하면 안 되나요? 그러면 저희도 기내 서비스하기가 더 편할 거 같아서요.”

그녀는 사무장 눈치를 보며 과연 이런 걸 물어봐도 되는지 스스로도 불안한 듯 목소리를 떨었다. 긴장한 얼굴에 홍조를 띤 뺨을 보니 기억이 났다. 그녀는 한국으로 첫 출근할 때 버스 옆 좌석에 앉아 내가 말을 걸었던, 싱가포르행을 함께했던 그 크루였다.

“네. 그렇게 해도 되는데 문제는 고도가 낮을수록 비행기는 연료 소비량이 많아집니다. 타이베이 한 번 가는 데 항공유를 20톤씩 쓰게 되면 제가 회사에서 잘릴 것 같아서요.”

“아아. 하하.”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작게 웃었다. 그 미소에 화답해 주고 싶어 나도 살짝 웃어 주었다. 덕분에 아까보다는 분위기가 조금 더 유연해진 것 같았다.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이 있다면 조종사들과 객실 승무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객실 승무원들은 조종사들을 어려워하고 조종사들은 운항 계획에 관해 그들에게 자세히 알려 주지 않는다. 굳이 항공 용어를 써 가며 설명하지 않아도 상식선에서 납득할 만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임무 수행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나는 가능한 이런 것들을 브리핑 시간에 좀 더 교류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녀가 물어봐 준 작은 질문이 굉장히 고마웠다.

“스탠바이 하러 가시죠.”

마무리가 괜찮았는지 다들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브리핑 룸을 떠날 채비를 했다. 먼저 나가라는 나의 신호에 사무장을 필두로 크루들이 밖으로 나갔다. 캐빈 백이 끌리고 경쾌한 구둣발 소리가 터미널 안을 울린다. 맨 끝에서 따라가는 나를 향해 뒤돌아선 싱가포르의 그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기장님, 저 기장님이랑 두세 달 전에 같이 비행한 적 있어요.”

“기억합니다. 버스도 같이 탔었죠.”

“아! 기억하시는구나. 그때가 첫 출근이셨죠?”

“네. 벌써 시간이 꽤 지났네요.”

“그쵸! 그때는 좀 무뚝뚝하시고 무서웠는데. 오늘 보니 많이 적응하신 거 같아요.”

“제가요? 무서웠습니까?”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매우 놀랐다. 평소에 인상을 너무 쓰고 있었나. 아니면 내가 쓰는 한국어가 너무 경직되어 있었나. 그녀는 재밌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감상을 들려주었다.

“한국어는 잘하시는데 뭐라 그러지? 굉장히 교과서 말투의 한국어를 쓰셔서. ‘뭐, 뭐 합니다. 뭐, 뭐 하시죠.’ 막 그러시잖아요. 하하.”

그녀는 내 말투를 흉내 내며 웃었다.

“또 그때 저희랑 싱가포르에서 밥 먹을 때도 말씀이 별로 없으셔서 말 걸기도 좀 무섭고 그랬거든요. 근데 오늘 보니까 말투도 부드러워지시고 농담도 막 하셔서 좋아요.”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녀의 정보에 의하면 객실 팀 사이에서 나는 ‘굉장히 다가가기 힘든 기장’이라고 했다. 출신과 외모 덕에 기억하는 사람은 많으나 몇 살인지 여자 친구는 있는지 등등 가볍게 다가가서 물어볼 수가 없어 소문만 무성해졌다고.

거기까지 듣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어떻게 가볍게 다가가서 물어볼 수 있는 부류의 질문인 거지?

“기장님 진짜 서른이세요?”

“음…… 만으로 따지면 그렇고 한국 나이로는 서른둘이겠네요.”

“아, 그렇구나. 미혼이신 건 맞죠?”

“네.”

의외로 바로바로 답을 해 주어서인지 그녀는 내친김에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되는지 물었다. 승낙했는데도 망설이는 표정을 짓기에 내가 먼저 답해 주기로 했다.

“사귀는 사람은 있습니다.”

“아, 역시. 여기 와서 생기신 거예요?”

“네. 싱가포르 비행 갈 때만 해도 혼자였는데 얼마 전에 생겼어요.”

“아니, 이런! 하하.”

그녀가 아쉬움이 섞인 웃음을 지으며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콩콩 때렸다. 그러면서 역시 그때 들이대 봤어야 했다며 용기 없던 자신을 탓했다. 그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서슴없이 하는 걸 보니 상당히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인가 보다.

그녀는 객실 팀이 모여 있는 단체 대화방에 빨리 이 소식을 알려야 한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한 손으로도 키패드를 치는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이렇게 남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이 적응되지 않고 살짝 불쾌한 일도 많았는데, 지나고 보니 딱히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들은 물어보는 만큼 자신의 이야기도 곧잘 꺼내 놓는다. 덕분에 금방 친해지고 낯선 사람과도 잘 어울린다.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저희 한 달에 한 번씩 모임 있는데 기장님도 다음에 오실래요? 아, 미혼만 들어올 수 있고요. 자주 오시는 부기장님들도 몇 분 계세요.”

“술을 마시나요?”

“뭐, 주로 밥 먹고 술 먹고 하는데 지상 근무 크루도 몇 명 있고. 아! 비행 근무 매니저님도 계세요. 스케줄 변경하고 싶을 때 로비하기도 좋고.”

“끌리네요. 안 그래도 회사에 아는 분이 적어서 외로웠거든요.”

“오세요, 기장님! 오세요! 휴대폰 줘 보세요.”

그녀가 게이트 입구에 멈춰 서서 휴대폰 번호로 메신저 대화 상대를 찾아냈다. 전성욱 부기장이 알려 준 앱이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그녀가 확인용으로 띄운 대화창에는 조민우 부기장이 늘 보내 주던 노란색 곰이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다음 달 모임 할 때 연락드릴게요. 저 지금 기장님 로비 성공해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거든요. 안 오시면 안 돼요!”

“하하. 네. 비행이 없으면 꼭 가겠습니다.”

그녀는 뭔가 큰일을 해냈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걷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래의 벌어질 일이 예측되기 시작해서 벌써부터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나처럼 말주변도 없고 재미없는 사람과 어울리는 게 얼마나 지루한지 모르는 모양이다. 나중에는 저런 사람을 왜 데려왔냐고 구박받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살갑게 대해 주는 그녀가 고마워 명찰의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최소영. 잊어버리기 전에 휴대폰의 대화 상대 이름을 풀네임으로 바꿔 두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콕핏에 들어왔다. 여전히 떫은 표정을 하고 있는 김경수 기장이 보였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새로 사귄 사람들. 그리고 친했지만 멀어져 버린 사람까지. 평범한 직장 생활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 * *

타이베이 비행을 마치고 하루를 쉬었다. 한재이는 종일 부재중이었고 나는 혼자 저녁을 먹은 후 암스테르담 비행을 위해 짐을 챙겼다. 레이오버는 이틀이지만 현지 시각으로 새벽에 도착하는 스케줄이라 3일 정도를 보내게 되는 셈이다.

유럽의 다른 공항들처럼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 역시 수없이 드나들었던 경험이 있지만, 의외로 개인적인 일정을 소화한 적은 없었다.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 중 하나였지만 이상하게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이번 여정을 위해 남겨 두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절대 싫어.’

나는 한재이에게 회사에서 내어주는 호텔에 함께 묵자고 제안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같이 비행을 나온 크루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손 한번 못 잡고 내외해야 하는 것이 끔찍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라서 호텔을 따로 예약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나를 붙잡고 한참이나 놓아주지 않았다. 정작 집을 비운 쪽은 자신이면서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재이가 늘 그런 식으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소파 위에 쓰러져 키스를 퍼붓는 그에게서 지난번과 같은 위스키 향이 느껴졌다.

다음날 우리는 함께 집을 나섰다. 나는 출근을 하는 것이고 한재이는 휴가를 떠나는 것이니 공항까지의 운전대는 그에게 맡겼다. 인천 공항 제1터미널에서 헤어진 후 나는 회사 관계자실을 찾아 들어갔고 그는 탑승 수속을 시작했다.

장기 비행에 2인 2조로 들어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요즘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대부분 3인 1조로 돌리고 있었으니까. 2명의 부기장 중 한 명은 나와 비행 경험이 이미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와 내가 전반부 비행을 함께 맡고 나머지 둘이 후반부를 맡기로 했다.

브리핑이 끝나고 객실 사무장에게 슬쩍 물어봤더니 오늘 퍼스트 클래스는 좌석 여유가 있다고 했다. 좁디좁은 콕핏 벙커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놓였다.

“기장님, 정기 비행 심사받으셨어요?”

조종석에 앉은 부기장이 말을 걸었다.

“아직이요.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 한다고 들었는데. 부기장님은 받으셨습니까?”

FMS(Flight Management System. 비행 관리 시스템)에 항로 정보를 입력하던 나는 그의 말에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조종사들은 주기적으로 비행 심사를 받는데 여기서 탈락하면 꽤 골치 아파진다. 지금의 회사와 계약할 때 들었던 설명으로는 점수에 따라 페널티가 쌓이고 일정 페널티를 초과하면 반년간 조종간을 놓고 재훈련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이게 어느 정도의 큰일인가 하면 한국 남자들이 흔히들 말하는 ‘군대 두 번 가기’ 정도의 충격과 비슷하지 않을까.

“저는 다음 비행 때 하는 거로 잡혔어요. 이거 편조 운도 좀 있어서 손발 잘 맞는 기장님이랑 되면 진짜 좋은데. 오늘 했으면 딱 좋은데 아쉬워요. 하하.”

그가 웃으며 아부성 발언을 했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저 듣기 좋으라고 하시는 말씀이시면 성공하셨네요. 스히폴에서 테이크 오프 해 보시겠습니까?”

“저야 좋죠.”

그가 웃으며 체크리스트를 받아 들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는 조종 욕심을 내는 조종사들을 유독 좋아한다. 많은 부기장들이 두려워하는 유럽 공항에서 오히려 해 보겠다고 나서는 그 자세가 좋아서 그의 코드 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이름을 외우고 싶은 부기장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 * *

“I have control(조종 권한을 넘겨받는 콜 사인.) 수고 많으셨습니다. 푹 쉬세요.”

러시아 영공을 가로지르는 3만 1000피트 상공에서 교대를 위해 콕핏에 들어온 후반부 기장에게 조종간을 넘겼다. 마침 함께 들어온 객실 사무장이 나를 보며 조금 다급한 목소리를 내었다.

“기장님, 잠깐 좀 와 주시면 안 될까요? 응급 상황인데.”

나는 옆에서 함께 조종을 마친 부기장을 쳐다보며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최근 응급 상황을 겪고 난 직후라 그런지 머릿속에서는 이미 회항을 위한 수정 계획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퍼스트 클래스 구역의 커튼을 치고 비어 있는 좌석 하나를 가리켰다.

“기장님, 잠시 여기 앉아 계세요.”

“네?”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 나와 부기장을 두고 사무장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우리는 컴컴한 기내를 살피며 응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리튬 배터리라도 터진 걸까. A350은 화장실의 수압 장치 불량이 많다던데 그건가 싶었다. 나름대로 상황을 예측하려 애쓰던 와중에 구역을 나누던 커튼이 열리고 그녀가 돌아왔다. 그리고 뒤에서 휴대폰 불빛을 비추는 크루 두 명과 양손에 케이크 접시를 든 한 남자.

이런…… 나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재이는 초만 꽂힌 케이크를 내 앞에 들이밀며 생일 축하 노래까지 불렀다. 짓궂은 표정에 여유로운 미소까지 띠면서.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헛기침을 했다. 비행기 안이 엔진 소리로 시끄러웠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부끄러워 벌써 자리를 떴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이야기가 다 된 상황인지 다른 두 명의 퍼스트 클래스 승객까지 소리 나지 않는 손뼉을 치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든 이 남자를 말릴 수 있는 사람에게 상금이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내게 초를 불라고 했다.

“불은 없지만 있다고 치고. 부는 척하고 소원을 빌어.”

“너 뭐 하는 거야. 기내 난동 행위로 체포해 버리는 수가 있어.”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재이를 협박했다. 그러자 사무장이 그의 편을 들었다.

“기장님 생일이라고 친구분이 탑승하자마자 부탁하셨어요. 다른 승객분들께도 다 양해 구했어요. 얼른 부세요.”

“사무장님…….”

“아, 뭐 어때요. 생일인데. 기장님 되게 쑥스러워하시네. 하하하.”

부기장까지 나서서 등을 떠미는 통에 초만 덩그러니 꽂혀 있는 케이크 위를 후, 하고 불었다. 그러자 모두 손뼉을 치며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민망하지만 일단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들을 돌려보냈다.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난 뒤 나는 한재이를 향해 타박을 퍼부었다.

“여기 내 직장이야. 좀 과하다.”

“억울하면 내 생일에 너도 우리 회사 와서 파티 열어 줘.”

그는 내 다리를 툭툭 치며 옆 좌석으로 가라는 뜻을 전했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가 본래 한재이의 좌석이었던 듯했다. 옆으로 옮겨 주자 한재이가 자리에 앉아 다시 케이크 접시를 내밀었다.

“먹어. 생일 케이크는 한 입이라도 먹어 두지 않으면 1년 내내 재수가 없어.”

그는 좌석에 붙은 미등을 켜고 접시 위를 비추었다. 아몬드 가루와 크림이 잔뜩 올라간 체리 케이크였다. 사무장이 준비해 준 플라스틱 포크로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었다. 맛은 있었다.

“선물은 내려서 줄게.”

“이거 말고 선물이 또 있어?”

그는 알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낮게 얼굴을 기울여 귓가에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서진아.”

그 말과 동시에 짧게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포크를 든 내 손을 가져가 또 짧게 입 맞추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눈을 돌려 반대편 창가 자리 손님을 확인했지만, 그는 구경거리가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는지 벌써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듯 보였다.

“고마워. 다가오는 네 생일이 부담스럽네.”

나 역시 그의 생일을 매년 챙겨 주긴 했지만, 직업이 이런 탓에 늘 며칠씩 늦게 나타나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

알고 지내는 시간이 오래된 상대의 생일을 챙기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매번 같은 선물을 해 줄 수는 없기에 올해는 또 뭘 사 주어야 하나 고민될 때가 많으니까.

나는 대부분 그의 직장 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을, 그는 옷이나 신발 같은 종류의 것들을 내게 선물했다. 우리에게는 이미 열다섯 개의 선물들이 쌓여 있었지만, 오늘은 3만 1000피트 상공에서 키스를 선물 받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받고 싶은 선물 하나 있긴 한데.”

한재이가 상체를 옆으로 기대며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뭐냐고 물었다.

“너랑 마일 하이 클럽(기내 섹스를 뜻하는 은어)에 가입하는 거.”

생각지도 못한 그의 발언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 내 반응에 혼자 웃고 있는 한재이의 허벅지를 때렸다. 그게 실수였다. 그가 곧바로 내 손을 잡고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올려놓았다. 이미 묵직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물건이 바지 위에서도 뜨겁게 윤곽을 나타내고 있었다.

“기장 권한으로 어떻게 한번 안 될까?”

“오늘 네 생일 아니잖아.”

“그때 되면 해 주긴 해 주겠다는 말로 들린다.”

“……들키면 징계로 안 끝나. 계약 해지야.”

“아쉽네.”

웃으며 장난을 치는 그를 뿌리치고 담요 포장지를 뜯어서 보기 민망한 하체를 가려 주었다.

시계를 보니 앞으로 4시간 정도는 그의 옆에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유니폼과 머리가 너무 흐트러지지 않게 좌석 등받이를 조심스럽게 내린 후 한재이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잠을 자야 하는 것이 옳았지만 나라고 늘 합리적이진 않다.

어둠 속에서 그와 조곤조곤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웠다. 근무 태도 불량으로 기록된다고 해도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생일이니까.

“아는 사람이 타고 있을 때는 더 긴장되나? 조종할 때 말이야.”

“뭐. 가족 정도 되면 아무래도 더 신경 쓰게 되지.”

“오늘은 어땠는데?”

한재이가 가족과 비교해서 자신을 줄 세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맡게 되었을 때의 기분을 묻는 것이다.

“떨렸어. 실수 안 하려고 노력했고.”

그가 천천히 내 손을 가져가 깍지를 꼈다.

“난 맘이 편했어. 추락해도 같이 죽는 거니까. 다행이다. 혼자 남지는 않겠다 싶어서.”

한재이는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네 직업이 너무 멋지지만 가끔은 너무 걱정돼서 너희 회사 플라이트 정보 페이지를 수십 번씩 확인하는 날도 있어. 비행기는 이미 랜딩했다고 뜨는데 너한테서 연락이 없으면 1분 단위로 초조해져.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보니 걱정과 근심이 늘었어. 우습지?”

나는 따뜻하게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겠지. 교통사고에 비한다면 비행기 사고로 죽을 확률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낮은 확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위험하다고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 끝이 너무 드라마틱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문득 몇 년 전에 있었던 B737 추락 사고의 블랙박스 내용을 떠올렸다. 바다에 추락하는 그 순간까지 기장과 부기장은 승객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은 운이 없었다.

조종사는 직감으로 비행기의 끝을 알 수 있다.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에는 콜아웃이 아닌 마지막 유언을 내뱉는다고 한다.

‘끝났다.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줘.’

기장의 그 말과 함께 바다로 떨어진 B737은 영원히 산화했다.

내게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오늘을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태어난 날을 감사하고 살 수 있게 해 준 나의 연인이자 가장 오래된 친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길 것이다.

‘오늘은 네가 타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야.’

왠지 그 사실만으로도 반절은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재난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벅차오른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한동안 침묵 중이었다.

* * *

출고된 지 1년도 채 안 된 A350은 먹구름이 구겨진 스히폴 공항에 날렵하게 몸을 세웠다. 나는 이틀간 여기에 머물지만, 비행기는 정비를 마치고 오늘 저녁 한국으로 다시 출발할 예정이다. 방금 운항을 마친 우리는 다음 차례가 될 동료들을 위해 콕핏 정리를 해 준 뒤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나는 크루들을 뒤로한 채 먼저 입국장에 들어섰다. 누군가 지나가듯 호텔에서 보자고 인사해 주었지만, 사실은 거기에 머물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첩보 작전이라도 수행하듯 한재이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한 후 곧바로 그와 함께 택시를 탔다.

“어디로 예약했는데?”

“가 보면 알아.”

암스테르담 캐널벨트에 늘어진 부티크 호텔들을 떠올리며 분명 구시가지 쪽으로 갈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택시는 점점 더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낡고 방치된 보트들이 떠 있는 운하를 지나 조용하고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섰다. 나의 의문은 나중에 해결해 주겠다는 듯 한재이는 택시 기사와 함께 목적지를 찾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둘은 잿빛 건물 한 채를 가리키며 긍정의 신호를 주고받았고 그 건물 바로 앞에 마침내 택시가 멈춰 섰다.

오래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입주자들이 함께 쓰는 듯한 정원이 나왔다. 우리는 그곳을 가로질러 비교적 작은 건물의 문을 열었다. 들어선 곳은 현관이 아니라 부엌으로 통하는 입구였고 거기를 통해 거실을 거쳐 침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개 이런 구조의 유럽 건물들은 근대화 이후 도시 부르주아들이 식객들과 함께 살던 집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들어온 곳 역시 당시 하녀나 집사들이 머물던 단식 구조의 건물로 보였다. 작은 목조 침대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방금 빨아 놓은 듯한 시트와 빵이 담긴 바구니까지. 누군가가 살던 곳처럼 꾸며 놓은, 그러나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었다.

“18세기 문화 체험, 뭐 그런 거야?”

내 물음에 한재이가 큰소리로 웃었다. 옻칠이 된 옷장 옆에 짐을 밀어 두고 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부엌 수납 칸에서 오래된 접시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는 딱딱한 목제 식탁 의자에 앉았다. 길게 빨아들인 담뱃재가 형태를 유지한 채 접시 위로 떨어졌다. 연기가 차면 집주인이 싫어할 텐데. 걱정을 가장한 핀잔을 받으며 그가 내게도 담배를 내밀었다.

“내가 집주인이야. 아무도 뭐라고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건네받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한재이는 은근히 내게 비밀이 많았나 보다.

“투자했어. 요즘은 베를린도 집값이 올라서 암스테르담으로 많이들 옮겨 가잖아. 여기서 페리로 들어가는 북구 지역에 커뮤니티 사무실들이 많이 생겼어. 원래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짓고 있었는데 부도가 나서 쓰임새가 애매해졌거든. 거기에 입주한 1인 기업들이 많아. 덕분에 이젠 이렇게 낡은 집도 구하기가 어려워졌어. 여기도 관리해 주시는 분은 따로 계시고 나도 실제로는 오늘 처음 와 본 거야. 나쁘지 않지?”

“응. 나 처음 독립했을 때 살았던 데랑 비슷하네. 근데 넌 와 보지도 않고 집을 막 샀어?”

“베를린의 작은 스튜디오 가격 정도밖에 안 해. 사실 여기 말고 몇 군데 더 샀어. 반은 은행 빚이야. 열심히 일해서 갚아야지.”

“부동산 재벌 되겠네.”

“왜, 시집오게?”

“내가 그 빚 갚아 줄 테니까 네가 와.”

“그것도 좋지.”

그가 내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키스를 요구하는 그를 향해 입술을 벌려 주고 혀를 섞었다. 바로 전에 주고받은 실없는 농담처럼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허리를 잡은 그가 은근히 간지럼을 태우고 있었기에 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실실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누군가가 뭉툭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나는 당황한 채 그쪽을 쳐다보며 일어나려 했지만, 한재이가 잡은 허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문을 연 사람은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그는 식탁 의자 위에 의심스레 겹쳐 앉은 우리를 보고도 꽤 매끄러운 인사를 건넸다. 한재이가 털어 낸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그 인사를 받았다. 관리인이라고 했다.

“일찍 도착했네요. 타월을 더 가져왔어요. 그리고 이건 당장 필요한 것들.”

그는 두꺼운 철제 프레임 바구니와 플라스틱 가방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깨끗하게 세탁된 하얀 타월과 버터, 우유, 햄과 달걀 같은 식자재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가 방향을 틀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마커스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막시밀리안입니다.”

나는 얼른 오른손에 있던 담배를 내려놓고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한재이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단단히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팔을 밀어내는 게 생각보다 버거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커스의 시선은 다시 한재이에게 향했다.

“부탁한 대로 자전거 바퀴 바람은 넣어 놓았는데 오늘 날씨가 이래서 멀리 안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오후부터 비가 많이 쏟아질 거 같으니까.”

“네. 안 그래도 오늘은 그냥 쉴까 합니다. 이거 고마워요. 사실 배고팠거든요.”

한재이는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더 필요한 게 없는지 물어보던 그는 뒤돌아서 나가려다 다시 우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혹시 영화 좋아하시면 저녁에 놀러 오세요.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미국 친구가 있는데 오늘 작게 상영회를 하거든요. 소호 하우스 옆에 에슬랑이라고 지도 맵에 치면 나와요. 상연 전에는 모임이 있으니까 9시쯤에 오면 얼추 맞을 거예요.”

그는 턱을 문지르며 무심하게 말했지만 쏟아 내는 정보의 양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친구를 위해 관객을 모아야 하는 사정이라도 있었는지 꽤 절박하게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가 보였다.

“그럴게요. 한번 가 보겠습니다.”

나는 한재이 대신 그를 안심시켰다. 마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부엌 창문으로 그가 정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 인영이 완전히 사라지자 허리에 감긴 한재이의 손이 내 허벅지를 꽉 쥐었다.

“왜 간다고 했어. 더치 파티가 얼마나 지루한지 몰라서 그래?”

그가 웃으며 나를 꾸짖었다. 그건 그렇지만, 하고 운을 떼놓고 보니 나 역시 할 말이 없었다. 네덜란드인들의 유머는 늘 어딘가 핀트가 나가 있었다. 그들에게 독일 사람들은 지나치게 재미없는 족속들로 평가되곤 했지만, 남을 웃기지도 못할 유머라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 이쪽의 생각이다.

한재이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나도 올가미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는 마커스가 놓고 간 바구니에서 달걀과 흰 빵을 꺼냈다. 그리고 자연스레 아침을 만들기 위해 소매를 걷었고 나는 침실로 들어가 밀어 두었던 짐 가방을 꺼내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침실은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공기가 서늘하게 변해 있었다. 라디에이터의 온도를 올리고 세제 냄새가 나는 담요 하나를 꺼내 침대 위를 완전히 덮어 두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허리에 손을 올린 뒤 이 오래된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첫 독립을 했던 그 낡은 아파트에서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는 한재이를 소파로 쫓아내고 내가 혼자 차지하던 그 작은 침대와 비슷하지 않나? 이제는 그를 소파에 재울 수 없었으니 둘이서 몸이라도 겹쳐 자야 할 판이다.

“서진아, 좀 나와 봐.”

이마를 쓸며 잠시 생각하다 그가 부르는 부엌으로 다시 향했다.

낡은 오븐에 넣어 둔 빵이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냄비 안에는 달걀 두 개가 나란히 춤을 추며 몸을 굴린다. 그사이 한재이가 커피를 한 잔 내렸다.

“넌 안 마실 거지? 밖에서 먹을까? 이거 먼저 가지고 가.”

그는 내게 우유를 넣은 커피와 얇게 잘린 햄 접시를 내밀었다. 등으로 문을 밀어 밖으로 나간 뒤 잎이 떨어진 철제 테라스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집 안으로 다시 들어와 소파 위에 뒹굴던 쿠션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그 뒤를 따라 나온 한재이가 빵 바구니와 꿀이 녹은 따뜻한 우유를 내려놓고 나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쿠션 덕에 따뜻해진 둔부와는 달리 등을 기댄 철제 의자에서 차가운 가을 온도가 느껴졌다.

“오늘 뭐 하고 싶어? 생일이니까 참신하고 재밌는 걸 좀 생각해 봐. 지루하게 영화 보러 가는 그런 거 좀 제발 그만하고.”

그가 작은 스푼을 건네주었다. 그걸로 달걀 위를 톡톡 두드려 깬 뒤 말랑하게 반숙된 속을 가득 떠냈다. 한재이가 작은 소금 통을 흔들어 그 위에 소금을 뿌려 주었다.

“글쎄. 난 그런 쪽으로는 창의력이 부족한 거 알잖아. 비도 온다는데 그냥 집에 있지, 뭐.”

“혹시 졸려? 너 거의 24시간 깨어 있는 거긴 하다.”

몸이 피곤하고 졸린 건 사실이었다. 그의 말에 긍정하며 햄을 얹은 흰 빵을 먹었다.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쫓아온 새 두 마리가 테이블 밑에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정원은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 키가 커다란 수국이 말라 가고 있었다. 찔레 가시가 마음대로 삐져나온 화단 맞은편에는 칠만 새로 한 파란색 자전거 두 대가 놓여 있었다. 마커스가 말한 자전거인 듯 보였다.

“여기 옛날에 나 살던 데랑 진짜 비슷한 거 같다. 거기보단 조금 더 넓긴 하지만.”

“거긴 2층이었잖아. 이사한다고 나 데려다 부려 먹기만 하고 너 약속 있다고 나가 버렸던 거 생각나?”

또 시작이다.

“약속이 아니라 훈련이었다니까. 돌아왔더니 혼자 요리해 먹고 자고 있던 사람이 누군데. 너 때문에 잘 데도 없어서 그날 소파에서 잤었어.”

“발로 차 버리지 그랬어.”

그는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빈넨덴 집에서 나온 뒤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었던 그 날을 다시 떠올렸다. 나보다 더 신이 난 한재이와 둘이서 낡아빠진 아파트를 청소하고 가구를 들였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여전히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던 그는 자유를 찾아 우리 집을 들락거렸다.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집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회사 보증으로 받은 은행 대출에 담배마저 줄여야 할 정도였으니까. 쉽게 가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쥠과 동시에 철저히 양부모로부터 독립하길 원했다. 금전적인 면에서도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 생각은 한재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20년 된 폭스바겐을 몰고 다니는 가난한 법대생이었다. 가끔 쓸데없는 유흥으로 돈을 쓰기도 했지만, 매일 싸구려 케밥 따위로 끼니를 때우고 우리 집 앞 주차장 요금에 가장 큰돈을 쓴다며 불평하던 사람이었다.

변호사가 되어 떼돈을 벌 거라던 그의 호언장담과 윙을 따고 일 년 안에 천 시간의 비행을 돌파할 거라던 나의 허세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시절이었다.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사치는 겨우 백 유로짜리 샴페인. 주변이 온통 낡고 삐걱거리는 것들로 가득 찼었지만, 우리는 결코 남루하지 않았다.

사랑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빛나던 그때의 우리 사이를 떠올리며 나는 웃었다.

“무슨 생각해?”

커피 잔을 내려놓은 한재이가 나를 불렀다. 그를 두고 한참이나 말이 없었던 나는 별거 아니라며 다시 스푼을 쥐었다.

“그냥. 여기 오니까 우리 가난에 찌들어 살던 때가 생각났어. 너나 나나 학생 대출에 시달리며 빨리 돈 벌고 싶다고 아우성쳤었잖아. 그때부터 파리 있을 때까지가 피크였지. 네가 제일 심하게 미쳐서 날뛰던 시절이었어.”

“하하. 그래, 내가 생각해도 그땐 좀 심했었지.”

그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놓고 변호사 시험 한 번에 붙은 거 보면 진짜 신기해. 난 너 떨어질 거라 생각했었거든.”

“반했었어?”

나는 그의 농담에 실없이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랬나 봐.”

법대를 졸업하고 주어지는 단 두 번의 응시 자격. 한재이는 그렇게 내내 놀기만 했었는데 보란 듯이 1차 시험에 단번에 합격했다. 자랑스러웠던 내 친구의 일화를 동기들에게 떠벌리고 다녔던 스물다섯 살의 나를 떠올렸다. 늘 멋대로 사는 듯 보였던 한재이가 천천히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멋있다는 생각은 종종 했었는데, 사실 나는 그때도 이미 그에게 반했었나 보다.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천천히 먹어.”

한재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인 나이프와 포크는 식사가 끝났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가 남겨 놓은 잼 발린 빵 하나를 입에 넣었다. 나 역시 슬슬 배가 불러오던 참이었다.

테이블 위까지 올라온 새 한 마리를 쫓아내고 빈 접시를 겹쳤다. 그리고 컵에 부어 놓은 물 두 잔을 모조리 마셔 버렸다. 마침 맞은편 건물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고 나는 그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뒤 본격적으로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왜. 더 안 먹어?”

한재이가 다시 밖으로 나와 내게서 접시를 받아들었다.

“배불러.”

남은 음식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부엌 카운터에 접시를 쌓아 올렸다. 식기 세척기도 없는 낡은 부엌까지 11년 전 아파트와 정말 닮아 있었다.

작은 선풍기 한 대가 놓여 있던 거실과 2인용 소파. 집에 들어오면 거기서 멋대로 잠든 한재이를 발견하는 게 일상이었다. 공기처럼 내 삶에 녹아 있던 그의 존재를 떠올릴 때마다 그 시절의 감상에 젖고 있었다. 날씨 때문인가. 머릿속이 따뜻한 습기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먼저 씻을게.”

나는 부엌으로 들어선 한재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는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응?”

“잠깐 이대로 있자.”

우두커니 그에게 안겼다. 가슴을 맞대어 체온을 나누고 잔잔한 숨결이 귓불에 전해졌다.

“왜…….”

“그냥. 옛날 생각이 나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네.”

그 역시 나와 같은 기억에 묶여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었나 보다. 아니면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시공간 속의 우리를 그려 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평행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스무 살의 너와 나는 이미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을까. 거기서도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쪽은 역시 너였을까. 아니면 감정 소모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벌인 최초의 일탈이었을까.

인생은 우연으로 직조된 하나의 유기체라던데, 만약 그때부터 사랑이 시작되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여전히 헤어지지 않은 채로 있을 수 있었을까.

한재이와 닿은 것은 내게 기적과도 같아서 여기까지 이르게 한 단 하나의 우연도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다 해도 결코 차지할 수 없을 스무 살의 한재이는 내게 늘 꿈같은 신기루로 남을 것이다.

“다행이다.”

나는 혼자만의 생각 끝에 다다른 결론을 소리 내 말했다.

“뭐가.”

“만약 더 일찍 이 감정을 시작했다면 우리가 잘되지는 못했을 것 같아서. 어느 한쪽이 너무 빨리 깨달아 버렸다면 다른 한쪽은 미처 준비되지 못했을 테니까. 스무 살 때 내가 이미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다고 고백했다면 너는…….”

“나는 침대 위에 구겨져 자는 네 위로 올라가 키스했을 거야.”

그는 내 말을 잘라먹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진짜야. 여기 와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고 한 건 과거의 내가 너무 부러워서 그래. 그때 너는 지금보다 더 말랑하고 귀여웠거든. 기회 있을 때 좀 더 같이 자자고 조를걸. 안아도 보고 만져도 볼 걸 너무 내외했어.”

한재이는 같은 가설을 놓고 나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렇게 늘 우리 사이를 확신했다.

“그렇다고 친구였던 시절이 별로라는 소리는 아니야. 우정이 아니었으면 가지지 못했을 추억이 너무 많잖아. 그냥 한 번씩 옛날 생각이 나면 그때의 내가 못 견디게 부러워. 과거의 우서진도 다 내가 가지고 싶어서.”

그래, 그 부분은 나와 생각이 같네. 나 역시 가난한 법대생 한재이와 소파에서 하릴없이 뒹굴거리던 과거의 내가 부러웠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별로야?”

내가 뱉어 놓고도 민망한 그 말은 마치 ‘나 예뻐?’ 하고 대놓고 물어보는 것과 같았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상대가 정답을 말해 주지 않으면 곧바로 삐져 버릴 속셈을 드러내는 얕은 수였다.

“음, 지금의 너는 미치도록 섹시하지.”

그 말과 함께 그가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게 뒤통수를 잡아당기고 혀를 밀어 넣었다. 맛으로 느끼는 것과는 다른 달콤함이 머릿속에 퍼졌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캔디, 벌꿀, 초콜릿, 코코아.

예전에 내가 부럽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 듯하다. 그를 만지고 키스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았다. 한재이 역시 같은 생각인지 입술을 겹친 채 침대로 향했다. 그의 위로 엎어져 상위를 점령하고 팔을 뻗어 목과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섹스보다 강렬하고 사랑한다는 고백보다 벅차오르는 입맞춤. 오늘 이 자리, 이 시간에서만 받을 수 있는 생일 선물이었다.

* * *

우리는 그대로 몸을 겹친 채 잠이 들어 버렸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어둑해진 저녁이었다. 나는 한재이의 가슴을 베개 삼아 엎드려 있었고 그는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천천히 빗질하고 있었다. 창문이 아닌 벽 너머로 비 오는 소리가 들릴 만큼 이곳은 낡고 방음이 되지 않았다.

“추워.”

그 말에 한재이가 팔로 나를 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발끝에 걸리는 담요를 끌어 올려 등을 덮어 주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와 있던 손을 담요 속에 집어넣으며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둔부 밑에서 냉기를 녹였다. 단단한 가슴 위에 입술을 묻고 그에게서 빼앗아간 만큼의 온도를 돌려주기 위해 혀로 핥았다. 머리카락을 만지던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할 때쯤 애무를 멈췄다. 침대 위에 온기가 충분해지자 허기가 몰려왔다.

“배고파.”

춥고 배고픈 나를 보고 한재이가 웃었다. 씻고 나가서 저녁을 먹으면 얼추 상영회까지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굼벵이처럼 감싸고 있던 담요를 걷어내고 욕실로 향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걸까. 뜨거운 샤워기 물이 어깨에 떨어지자 그 의심은 배가 되었다. 석회질의 비릿한 물 냄새를 오랜만에 맡으며 코끝에 간지러움을 느꼈다.

욕실을 나와서 속옷을 갈아입을 때 재채기까지 하는 바람에 한재이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감기 증상이 심해지면 회사에 곧바로 보고를 해야 한다. 캐빈 백에 있는 비상약을 챙겨 먹고 머리를 말렸다.

집에서 나온 것은 그로부터 1시간 뒤. 우리는 우산을 쓰고 센트룸까지 걸었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큰 우산 안에 저와 나를 밀어 넣었다. 내리는 비보다 우산 밑으로 떨어지는 빗물이 문제였다. 그의 어깨와 바짓단이 빗물에 젖었지만 한재이가 취한 조치는 고작 내 어깨를 더 세게 끌어안는 것 정도였다.

10분 정도 더 걷다 어느 모던한 건물 안에 당도했다. 큰 레스토랑 입구에 들어서자 리셉션의 매니저가 우리를 반겼다.

“예약했습니다. 이름은 Han.”

이끌리는 대로 들어간 레스토랑이라 생각했었는데 한재이가 다시 내 허를 찔러 왔다. 하긴, 대충 왔다고 하기에는 너무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예약자 명단을 훑은 매니저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 이름에 긍정했다.

“좋습니다. 금연석이시네요. 따라오세요.”

중앙에는 대리석으로 짜 맞추어진 바 카운터가 자리하고 있었고 창가를 중심으로 2인용 테이블들이 늘어져 있었다. 매니저는 그쪽을 지나쳐 좀 더 낮은 조도의 조명이 비추는 안쪽 소파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앞뒤, 그리고 한쪽 벽이 꽉 막힌 공간에서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걸어 드릴까요?”

“아, 감사합니다.”

빗물에 젖은 트렌치코트를 받아준 매니저의 눈치를 보며 나는 코를 만지작거렸다. 미리 말을 해 주었다면 좀 더 나은 옷을 걸치고 왔을 텐데. 나는 장시간 캐리어 속에서 구겨진 셔츠 위에 회색 카디건 하나를 걸친 상태였다.

“앞으로 좋은 데 데리고 다닐 거면 미리 말 좀 해 주고 다녀.”

원망 어린 핀잔에 한재이가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럼 뭐 내가 네 생일에 네덜란드 감자나 퍼먹자고 할 줄 알았어?”

오히려 그래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비행기에서부터 이어지는 한재이의 생일 이벤트에 정신없이 끌려다니는 중이었다. 조금 아까 집을 나오기 전에는 이름이 새겨진 수제 구두를 선물로 받았다. 언제 예약했는지도 모를 이 고급 레스토랑이 부디 오늘의 마지막이 되길 바랐다.

설마 내일도 뭐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계속 비가 내리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을 하겠냐는 매니저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홍차를 주문하는 나를 보고 한재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곧바로 이마를 덮친 그의 커다란 손바닥은 뺨까지 타고 내려온 다음 다시 뒤집어 손등으로 이마를 대었다.

“열은 없는데. 환절기 감기인가?”

“그러게. 코끝이 좀 싸하네. 목도 아프고.”

“잔병치레 안 하던 사람이 아프다니까 겁난다. 역시 호텔로 갔어야 했나. 지금이라도 옮길래?”

“아니, 나 그 집 좋아. 옛날 생각도 나고. 약 먹었으니 괜찮아지겠지.”

한재이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내내 나를 만지작거렸다. 음료가 서빙되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이마를 짚고 뺨에도 손등을 대었다. 보살핌을 받는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는지 나는 그를 특별히 말리지 않았다.

식사가 나왔다. 나는 밀가루와 버터를 녹여 만든 람소스를 구운 치킨 위에 듬뿍 부었다. 두께가 상당한 닭가슴살은 속이 부드럽고 육즙이 가득했다. 살짝 데쳐진 야채에도 소금 간이 알맞게 배었다. 바싹하게 구워진 우유 빵을 반으로 찢어 접시 위의 소스를 닦아 내듯 묻혀 먹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네 생일 때 여러 이벤트를 해 줬잖아.”

“응.”

“그중에 뭐가 가장 기억에 남아?”

“마음에 드는 것과는 별개로 가장 기억에 남는 걸 얘기하라는 거지?”

한재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럼 나 가슴 아프니까 가장 맘에 들었던 거로 얘기해 줘.”

“음……. 제일 처음 네가 챙겨 줬던 생일이었던 거 같은데. 너희 집에 데려가서 같이 밥 먹었던 거. 생일에는 미역국 먹어야 한다고.”

같은 반 친구에게서 내 생일을 전해 듣고선 자신의 집으로 점심 먹으러 가자며 찾아왔었던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 너는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태어난 날 미역국을 먹는데 혹시 해조류 싫어하냐며 내 눈치를 살피던 소년을 기억한다.

한참을 잊고 있었던 음식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내 옆에 앉아 이 음식을 생일날 먹는 이유에 관해 종알종알 설명했었다.

미역국만 따로 파는 식당은 없지 않냐고. 그래서 누군가 손수 만들어 주어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생일상에 오른다던 그의 거짓말은 그 후로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야 탄로 났었다. 한재이가 나를 위로하던 방식이 때로는 너무 섬세해서 가슴 아팠다.

“솔직히 네가 나한테 해 준 게 너무 많아서 죽기 전에 다 갚고 죽을 수나 있을지 걱정돼.”

“그래? 오래 살아야겠네, 우서진.”

그는 우스갯소리로 말을 받아치며 다시 한번 내 이마를 짚어 열을 쟀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다.

웨이터가 다가와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내어 가고 계산서를 가져다주었다. 테이블이 완전히 정리되고 카드 명세서에 서명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고작 몇 개월 한국에서 보낸 주제에 벌써부터 테이블 계산에 걸리는 시간이 더디다고 느껴지는 게 우스웠다.

쓰고 왔던 우산을 받아들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석회질 냄새가 섞인 암스테르담의 운하 옆을 걸었다. 에슬랑이라는 이름은 검색이 되지 않아 소호 하우스를 찾아가고 있었다. 백색 형광등을 쓰지 않는 유럽의 밤거리는 아시아보다 늘 더 어둡고 채도가 낮았다.

남자 둘이서 우산을 함께 쓰고 있는 풍경이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마약과 매춘이 합법인 공간이라 그런 걸까. 고향도 살아온 곳도 아니라는 익명의 보장성이 주는 안심 때문인지, 우리는 처음 집을 나섰을 때보다 더 가까이 어깨를 붙이고 심지어 가벼운 입맞춤도 나누었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을 죽이며 마커스가 말했던 9시에 맞추어 소호 하우스 건물에 도착했다. 두꺼운 철문은 30도 각도로 열려 있었고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통해 에슬랑이라는 간판을 알아볼 수 있었다. 비어 있는 건물이었고 안에는 쓰이지 않는 책상과 비품들이 가득했다.

관객이 없을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웅성거리며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스무 명은 되어 보였다. 이런 지역 예술 이벤트에 이 정도만 모여도 반은 성공한 셈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외국인 두 명까지 포섭했으니 꽤 괜찮은 성과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눈에 띄지 않게 가장 뒷자리를 서성거리다 벽에 붙은 실내 온풍기 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흔히 말하는 Cool Kids 자리, 학교 다닐 때 한재이와 내가 늘 고집하던 쿨한 아이들을 위한 전용 좌석이었다. 단체로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거나 체험 학습 여행을 가는 버스 안에서 잘나가는 아이들은 가능한 뒷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게 우리의 지론이었다.

따뜻한 온풍기의 온도가 엉덩이로 느껴질 때쯤 상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매우 지루했다.

영상은 시공일관 기차가 달리는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거기다 흑백에 무성 필름. 처음에는 <대열차 강도> 같은 것을 오마주 했나 싶어 지켜보았지만, 강도조차 나오지 않는 무성의함에 나는 곧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한재이의 어깨에 대충 고개를 걸치고 꾸벅대던 시간 동안 영화는 끝이 나고 감독의 코멘터리가 이어졌다.

“서진아.”

공간을 가득 채운 감독의 목소리를 비집고 나지막한 한재이의 부름이 귓가에 울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응’ 하고 대답만 들려주었다.

“비 그친 거 같아. 나가자.”

나는 엉덩이에 따뜻하게 배어 버린 온도가 아쉬워 머뭇거리고 있었다. 눈치를 챈 한재이가 어깨를 안고 자신의 온기를 나누어 주며 일어나라고 부추겼다. 다행히 철문은 여전히 30도만큼 열린 상태였고 이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유럽인들을 뒤로한 채 우리는 그곳을 슬며시 빠져나왔다.

“진짜 지루했어.”

나오자마자 터져 나온 나의 불만에 한재이는 미소만 지었다. 그에게 살짝 몸을 기댄 채 집을 향해 걸었다.

“대열차 강도 같은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그거 맞아. 당시 그 작품이 만들어진 과정에 관해 다큐멘터리로 만든 거였어.”

“뭐? 아니던데?”

그는 내 허리를 바짝 감으며 다시 한번 웃었다. 그리고 네가 본 게 대체 뭐가 있냐며 놀려 대기 시작했다.

한재이의 말에 따르면 나는 정말 상영이 시작됨과 동시에 잠이 들어 버렸다고 했다.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졸지 않은 척하려던 내 모습이 웃겨서 몇 번이나 속으로 웃었다고. 비가 그치면 곧바로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은근 영화 내용이 재밌어서 끝까지 본 건 미안하다며 사과도 했다.

“많이 피곤했나 봐. 감기 기운은 좀 어때?”

한재이가 민망해하는 나를 위해 대신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는 기억을 더듬어 왔던 길을 돌아갔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내일의 일정에 대해 고민했다. 이대로 계속 비가 오지 않는다면 피크닉을 가도 좋을 것이다. 뒤에서 찌르릉 소리를 내며 나타난 자전거가 우리를 앞질러 갔다.

길을 비켜 주려고 걸음을 멈춘 한재이가 재킷 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동시에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왼쪽 손이 트렌치코트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손을 마주 잡고 집을 향해 걸었다.

* * *

다음날 우리는 마커스가 준비해 준 자전거를 타고 고흐 갤러리 맞은편에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어제저녁까지 비가 왔던 게 거짓말처럼 맑게 갠 날씨였다. 깨끗한 하늘 위에서 내리쬐는 직사광선이 암스테르담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자전거는 건조한 바람에 적당히 마른 거리를 달렸다. 프리 마켓이 열리는 시가지에서 치즈와 빵, 사과 그리고 소다수를 샀다.

광장의 잔디는 여전히 축축하게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누워서 햇볕을 쬐고 싶어 했던 한재이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 채 적당한 벤치 하나를 골라 아침 겸 점심을 해결했다.

몇 개의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잔디 광장에는 스낵과 음료수를 파는 푸드 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지나치게 딱딱하고 방부제가 들어간 핫도그를 받아든 관광객 두 명이 우리가 앉은 벤치를 가리키며 자신들도 비슷한 장소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고흐 갤러리에는 아침부터 늘어선 줄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선글라스로 시선을 가린 우리는 관광객 구경이라는 오랜 취미 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들어가는 데 거의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것 같아.”

한재이가 벤치 뒤로 팔을 벌려 느긋하게 기댄 채 말했다.

“명화를 감상하는 데 그 정도는 투자해야 하지 않겠어? 유럽 어디를 가나 박물관과 갤러리는 붐비잖아.”

그러자 그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며 내 말에 반박했다.

“음, 넌 저 안에 걸려 있는 고흐의 그림이 진품이라고 생각해? 아니야. 전시장에는 가품을 걸어 놓고 진품은 어딘가로 빼돌렸을 거야.”

“설마.”

한재이가 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예전에야 도난을 우려해 모조품을 전시하고 진품은 지하 금고 같은 곳에 숨겨 놓기도 했었다지만, 설마 21세기에도 그렇겠냐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저렇게나 열성적으로 줄을 서서 보겠다는데 만에 하나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허망할까. 나 같으면 차라리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걱정 마. 저 사람들이 정말 고흐를 좋아해서 그림을 보러 온 거 같아?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 그냥 오늘 내가 ‘해바라기’와 ‘자화상’을 봤다는 사실을 얻어 가기 위해서 줄을 선 거야. 저들의 진짜 목적은 그림 감상이 아니라 그림을 봤다는 경험이야. 거기에 시간과 돈을 지불하는 거라고.”

“그렇게 염세주의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어?”

“사실인데 어쩌겠어.”

“그래. 그러면 저기 가서 아침부터 꼬박 줄 서서 기다린 사람들한테 직접 얘기해 주는 건 어때? 이거 다 사기라고.”

“그럴까?”

한재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진짜 그 행위를 실행에 옮기려는 듯 갤러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아 다시 벤치에 끌어 앉혔다. 그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는다는 걸 알기에 진심을 다해 말려야 했다.

“알았어. 그만해. 네 말이 다 맞아.”

당황한 내 얼굴을 쳐다보던 한재이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소리 내 웃었다.

“아, 미치겠다. 너 표정 진짜 귀여워.”

반응을 보니 처음부터 나를 놀리고 있었나 보다. 어디서부터가 농담이었을까. 모조품을 건다는 말을 꺼낼 때부터 이미 계획된 장난이었나. 나는 여전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는 한재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어디까지가 진실이야.”

그는 대답도 없이 계속해서 혼자 웃고 있었다. 그러다 턱을 세우고 나를 향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네가 점점 더 귀여워지고 있어. 나 이제 진짜 어떡하지?”

어이가 없어서 픽 하고 따라 웃고 말았다.

한재이가 왁스를 바르지 않은 내 머리칼을 헝클이며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하는 연인으로서의 모든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조금도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 덕에 아까부터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옆 벤치에서 핫도그를 먹고 있던 관광객들과 잔디 광장을 가로질러 가던 행인들, 심지어는 푸드 트럭에서 음식을 팔던 남자까지도 한재이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내게 하는 다정한 행동들을 한참 동안 구경 중이었다.

다행히 그들의 눈빛에는 혐오나 편견 같은 것들이 들어 있지는 않았다. 대개는 마지막에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거두어 주었으니까.

이제는 웃음소리가 옆 벤치에서도 들리기 시작했다. 행복의 전염도가 생각보다 강한가 보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밖에서 마음껏 표현하는 데 신이 난 우리는 계획보다 좀 더 오래 그 벤치에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스히폴 공항에서 한재이와 헤어져 파트너사 관계자실로 복귀하던 중 크리스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내 안부를 물으며 별일 없다는 식으로 대충 넘기려는 그의 말투에서 뭔가 있음을 직감했지만, 크리스는 쉽사리 말을 꺼내 놓지 않았다. 말끝마다 ‘뭐 그냥’을 붙이는 거로 보아 내가 물어봐 줬으면 하는 뉘앙스만 읽히고 있었다.

형의 요즘 인생 관심사는 딱 두 가지밖에 없었다. 회계사 사무실을 차려서 독립하는 것과 아이를 가지는 것. 전자는 아니라고 했으니 후자가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 혹시 하고 물었는데 기쁨을 감출 수 없어 슬며시 웃는 그의 목소리에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 둘은 오랫동안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정말 축하해. 몇 개월이야?”

-4개월. 아직 좀 이르긴 한데 너만 알고 있어.

“그럴게. 실비아한테도 축하한다고 전해 줘. 아니다, 내가 직접 메시지 보낼게.”

-고마워. 생일은 잘 보냈고?

“그래. 누구 덕에 호강했지.”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나는 혼자 웃었다. 그가 나를 따라 네덜란드까지 와서 수작질을 벌인 걸 알면 크리스가 비웃을 거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는 내가 한재이를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눈치챘었을까.

기젤라가 말했었다. 한재이를 보는 내 시선이 특별해 보였다고. 누군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들킬 수 있는 거였나. 인간의 표정이 그렇게나 많은 정보를 전달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맞아, 네 표정이 좀 남다르긴 했지. 어릴 때부터 그 녀석이랑 있을 때는 네가 잘 웃더라고. 같은 나라 출신이니까 맘이 편해져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다른 한국 사람 만날 때는 또 다르던데? 그래서 뭐 긴가민가했었는데 재이 결혼 얘기 듣고 네가 허둥거리는 거 보니까 다른 이유는 없겠다 싶더라. 그나저나 그 녀석 지네 부모님한테는 사실대로 얘기했대? 전 약혼녀가 유명 인사다 보니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돈다.

“음…… 부모님은 아셔. 한국 간 걸 많이 섭섭해하시는 거 같아서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했대. 근데 어떤 소문이 도는데?”

-뭐, 그냥. 성격 안 맞아서 헤어진 거로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약혼자가 바람피웠다더라. 속아서 결혼할 뻔했었다, 뭐 그런 가십이지. 어쩌겠어. 기젤라가 이 동네에선 아직 유명하잖아.

나는 양아버지가 즐겨 보던 지역 신문의 한 귀퉁이에 그런 식으로 휘갈겨 쓴 루머성 기사 한 꼭지를 상상해 보았다. 방 2개가 딸린 집을 구한다는 광고와 며칠 전 죽은 누군가의 부고와 함께.

독일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동네에서 아직도 사람들의 입방정에 오르내리는 나의 연인과 그의 전 약혼녀를 애도했다. 나만 비겁하게 이 전쟁에서 빠져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크리스, 다음 비행 나갈 때 빈넨덴 집에 한번 들를까 해.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시간 되면 너도 와 줄래? 25일 토요일이야.”

-당연히 되지. 걱정 마, 내가 옆에서 잘 거들어 줄게.

“고마워. 나 이제 들어가 봐야 해. 아빠 된 거 다시 한번 축하해. 진짜 기뻐.”

-그래, 고맙다. 비행 조심하고. 와서 보자.

그와 전화를 끊고 쇼업에 합류하기 위해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대화에 집중한 나머지 한곳에 우두커니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나 보다.

사실 양부모님의 반응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확실한 건 내가 남자를 사귄다는 이야기보다 그 상대가 한재이라는 사실에 더 놀라실 것 같았다. 개인적인 연애사를 일일이 보고드릴 마음은 없었지만, 남의 입에서 이상한 소문을 듣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미루어 둔 숙제를 이제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쇼업을 들어와서 운항 브리핑을 하는 내내 목소리가 잠겨 몇 번이나 목을 긁으며 불쾌한 소리를 내야 했다. 생일과 함께 찾아온 감기 기운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리는 중이었다. 콕핏에 들어와 이륙 준비를 할 때도 몇 번이나 나온 기침 소리에 부기장이 우려 섞인 걱정을 건넸다. 나는 일찌감치 그에게 조종간을 넘기고 이륙을 맡겼다.

다행히 이번 비행이 끝나면 한동안은 장거리 스케줄이 잡혀 있지 않다. 휴가 시즌도 끝나는 마당이라 홈 스탠바이를 해야 하는 날도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뜨거웠던 여름을 뒤로하고 찰나와 같은 가을이 다가왔다.

* * *

“이리 와 봐.”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운 한재이는 운전대에서 손을 내려 내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병원 안 가 봐도 되겠어?”

“응. 쉬면 괜찮겠지. 3일 오프인데, 뭐.”

나는 조수석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짧았던 생일 기념 비행을 끝내고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올라가. 내가 가지고 갈게.”

한재이의 말에 사양하지 않고 작은 가방 하나만 어깨에 메고 먼저 빌라 계단을 올라갔다. 확실히 컨디션이 저조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기 바이러스에 함락된 몸이 장시간 조종으로 쌓인 피로를 풀어 줄 것을 요구했다. 관성처럼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 집 아무 데나 가방을 던져 놓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재이야, 나 물 좀.”

그가 들어온 기척을 확인하고서 거실까지 겨우 닿을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간사하다. 혼자 살았다면 충분히 부엌으로 혼자 걸어갈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불러 나를 간호하게끔 만들었다. 한재이가 가져다준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시고 그의 가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는 그대로 나를 안아 주었다.

몸이 아픈 건 별로지만 연인으로서의 호사를 누리는 것은 좋았다. 따듯한 그의 손이 목덜미부터 허리까지 쓰다듬어 주는 느낌도 좋았다. 코알라처럼 그에게 엉겨 붙어 옆에 있어 달라 떼쓰는 것도 이럴 때만 가능하다. 나는 노트북을 두드리는 한재이를 옆에 앉히고 혼자서 평화롭게 잠에 빠져들었다.

약 기운에 취해서였는지 꽤 오랜 시간을 자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 문득 잠결에 손을 뻗었는데 기대했던 사람이 잡히지 않았다. 바로 잠에서 깨어나 얼굴을 들었다. 앉아 있던 자리에 남은 온기로 봐서는 방금까지도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로 갔을까.

“가지고 논 게 아니에요.”

낮게 들려오는 한재이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거실에서 조용히 전화 통화를 하는 그의 말투에서는 불쾌감이 묻어나왔다.

“네. 빌었어요. 네. 사과할 만큼 했고 또, 하아…… 본인이 괜찮다는데 왜 이러세요, 자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래서 미안하다는 이유 하나로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는 그래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호칭을 듣기도 전에 상대가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한국어로 대화하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나와 가족, 그 외에는 별로 없다.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요. 아니에요. 그런 거였으면 혼자 한국으로 들어가 버릴 생각을 왜 했겠어요. 서진이 성격 아시잖아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았다. 이 상황이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새벽 3시마다 약혼녀와 통화를 하던 그를 모른 척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었던 지난 몇 번의 밤을 떠올렸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머리가 울리고 있는 이유는 감기 기운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한재이의 통화 내용에 기분이 점점 상했다.

비루한 내 상상력은 한재이의 아버지를 몰상식한 인간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의 통화가 끝날 때까지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째깍째깍. 있지도 않은 아날로그식 초침 소리를 속으로 흉내 내며 그를 기다렸다.

한재이가 통화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거실에서 들어온 미등 불빛이 내 얼굴을 비췄다. 언제 일어났냐는 그의 말과 표정에는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다 들었냐는 질문 역시 하나 마나 한 것이다. 본의 아니게 터져 나온 첫 번째 물음부터 나는 이미 날을 세우고 있었다.

“혹시 아직 기대하고 계셔? 너희 재결합할 수 있다고?”

그는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실망감이 크셔서 그래. 어른들끼리 워낙 친한 사이기도 하셨고. 맹세해. 기젤라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설명했어.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시나 봐. 지금은 기다려 드리는 것 외에 방법이 없어.”

한재이는 내 손을 가져다 가볍게 입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내내 마음에 두었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그러시겠지. 네가 파혼했다는 사실보다 네가 변호사를 그만둔 것이, 그리고 그 이유가 된 내 성별이 남자라는 것에 화가 나셨겠지. 그렇지만 그 탓을 할 수는 없으니 꺼내기 좋은 말로 너를 설득하고 계시는 거라고 생각해.”

나는 요동치던 감정을 걷어 내고 제삼자처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가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고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바랐기 때문이다. 저쪽은 이미 객관성을 잃었으니 남은 한쪽만이라도 현명하게 처신하는 게 빠른 해결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구원하지 않았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야. 기젤라를 긍정하면 나를 부정하실 수 있잖아. 아마 진짜 재결합을 원하시는 것도 아닐 거야. 똑똑한 분이니까. 그냥 네가 돌아오길 바라시는 거야. 잘나가던 네 인생을 내가 망쳤다고 생각하시는지도 몰라.”

한재이는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나의 말투는 조금 더 신랄해졌다.

“널 말리지 못해서 미안해. 네가 여기로 온다고 했을 때 역시 말렸어야 했어. 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

“그만해.”

그는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내 말을 막았다. 찌푸려진 미간에 음영이 박히고 마침내 나를 질책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 입장은 뭐가 돼.”

“…….”

나는 뒤늦게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담담한 척 쏟아 냈던 말 속에 나도 모르게 작은 가시를 숨겨 두고 있었나 보다. 바이러스 때문에 잠시 말이 헛나갔다고 농담이라도 할 수 있는 성격이면 좋았을 텐데. 꽉 잡힌 내 손에 피가 돌지 않을 정도로 한재이는 감정을 참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위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이어지는 긴 한숨과 함께 천천히 내 손을 놓아주었다.

“……미안해.”

그가 무엇을 사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없이 작아지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뭐가 미안해. 내가 말이 심한 거지.”

한재이의 부모님에게 미움을 받아 마음이 상한 건 나였으니까.

나는 이런 관계가 어려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피를 나눈 가족,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 거는 기대. 나는 잘 알 수 없는 한국의 정서까지 포함해서 어디까지가 상식적이고 어디서부터가 선을 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재이가 내 허리를 감싸 안고 품에 얼굴을 밀어 넣었다. 마치 날아가는 풍선이라도 잡는 듯 잔뜩 무게를 실어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매어 놓고 중얼거렸다.

“내 멋대로 와 버린 게 사실이긴 하지. 너한테 책임지라는 말 하지 않겠다 약속해 놓고 섭섭해하는 게 우습잖아.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나는 너를 두고 선택 같은 걸 할 수 있는 위인이 못 되거든.”

그는 변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게는 그것이 사랑 고백으로 들렸다.

“1년 정도 떨어져 지내 봤잖아, 작년에. 우리 겨우 서너 번 본 게 다였어. 찾아가도 바쁘다고 돌려보냈잖아. 나 진짜 외로웠어. 그걸 깨닫지 못하고 결혼하겠다고 나섰던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

“그래도 조금은 위로해 줘.”

깊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통증을 느꼈다. 한재이의 목을 껴안고 부드러운 그의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 우리가 그동안 지은 죄가 많지. 그걸 다 갚느라 너도, 나도 한 번씩은 이렇게 씁쓸한 새벽을 보낼 모양이야.

인생은 동화같이 끝나는 법이 없어서 마냥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는 없다. 그와 함께 긴 터널을 통과했다고 생각했지만, 밖은 여전히 밤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나의 숨결에 한재이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서 오늘의 긴 밤을 위로했다.

* * *

늦게 잠에서 깬 나는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비릿한 정어리 냄새가 풍겼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레인지 후드의 소음과 함께 토마토에 절인 정어리 파스타 소스가 팬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에이프런까지 둘러맨 한재이를 향해 아침부터 웬 생선 요리냐며 타박하려 했지만, 시계는 벌써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요리하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등 뒤에서 치근덕거렸다.

“깨우지 그랬어.”

“믿기지 않겠지만 두 번이나 깨웠어. 아픈 사람 괴롭히려 한 건 아니고 약 먹이고 다시 재우려 했는데 네가 한사코 거부했잖아. 열은 어때?”

뜨거운 요리를 하던 한재이의 손이 내 이마 위로 올라와 온도를 재었다.

“지금 네 손보다 더 뜨겁다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야 하지 않겠어?”

“하긴.”

그 역시 느껴지는 것이 별로 없었는지 이번에는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대로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하고 나를 놓아주었다. 한재이는 곧바로 나가 봐야 한다고 했다.

에이프런을 풀고 셔츠로 갈아입은 그가 서류와 재킷을 챙기며 방에서 나왔다. 자신은 먹지도 않을 요리를 하고 있었나 보다. 언제 끝날지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저녁까지 먹으라고 했다. 나는 어질러진 부엌의 흔적을 보며 다시 한번 늦게 일어난 스스로를 질책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술 마실 거니까 차는 두고 갈게.”

“누구랑 마시는데?”

“접대밖에 더 있겠어? 나오지 마. 간다.”

“끝날 때 전화해. 데리러 갈게.”

“웃기지 마. 쉬어.”

현관문이 닫히며 그의 모습이 일방적으로 사라졌다. 급하게 나가는 걸 보니 시간에 쫓기고 있었나 보다.

한재이가 만들어 놓은 파스타를 볼에 덜어 내고 파마산 치즈를 강판에 갈았다. 그러다 문득 스쳐 가는 어떤 생각에 휴대폰을 가지고 나와 그에게 전화했다. 헤어진 지 겨우 5분 정도 지난 시간이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신호가 가고 곧바로 전화를 받은 한재이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그를 놀려 주고 싶어서 아픈 척을 해 볼까 했지만 나는 그렇게 능청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안 아파. 인사도 못 했는데 그렇게 나가 버리는 게 어딨어.”

-미안. 통화하자. 택시 안이거든. 잘 잤어? 밥은 먹고 있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소하게 맛이 밴 정어리 몸통을 찾아 입에 넣었다. 밥 먹으며 통화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었지만, 이제 한재이에게 예의를 차리는 행동은 그만두기로 했다.

“잘 잤고 지금 먹고 있어. 아주 맛있고 몸은 괜찮아. 어제 못한 얘기가 있어서 전화했어. 곤란하면 한국어로 대답하지 마.”

-그래. 말해.

“다음 주 토요일에 독일 비행이 있어. 집에 들를 거야. 우리 얘기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너도 알잖아, 그 동네 소문이 빨라.”

-응. 전부 말씀드려. 숨길 거 없잖아.

그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말투였고 오히려 그것을 사전에 물어보는 속뜻을 궁금해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싶어서. 너희 부모님 반응 들으시면 이쪽에서도 속상해하실 것 같은데. 아버님은, 음…… 역시 상대가 나라서 많이 실망하신 거지?”

어제는 날을 세운 탓에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역시나 나는 그 부분이 신경 쓰였다. 양부모님 핑계를 대면서까지 다시 한번 그에게 진실을 요구했다. 짓이겨진 정어리 살코기를 깨작거리며 한재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돌아오는 그의 말에 대꾸할 타이밍을 놓칠 수 없어 음식물은 씹지 못하고 포크로 이리저리 파스타만 돌리고 있었다.

-아니야. 나한테 실망하신 거야. 갑자기 친구한테 미쳐서 날뛰는 아들놈이 보기 흉해서 그러시는 거지, 다른 건 없어. 네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건 알아. 네가 무슨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도 알고. 아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모른 척해 주라. 곧 끝날 거야.

한재이는 이 싸움에 나를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이길 수 있는 방도는 없다. 부탁의 형식을 띠고 있는 그 친절함을 이용해 내가 모른 척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하긴 나라도 솔직하게 말해 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 우리 부모님이 너랑 만나는 걸 아주 싫어하시더라. 누가 이런 말을 연인에게 전달할 수 있겠냐마는, 마냥 모른 척 그의 뒤에 숨어서 보호받는 것도 이래저래 불편했다.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나는 엉뚱한 곳에 심술을 부렸다.

“알았어. 대신 오늘 데리러 갈 거야. 안 된다고 하지 마. 벌써 심심하고 보고 싶으니까.”

한재이는 웃으며 마지막 말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알았다며 끝날 때쯤 연락하겠다는 말을 받아 내고 전화를 끊었다. 먹기 한결 편해진 식사를 끝낸 뒤에 한재이가 수선을 떨어 놓은 부엌을 열심히 청소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가을 공기를 집 안으로 들였다.

약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누워 책을 읽었다. 동시에 30분의 시간을 재고 있었다. 나는 틈날 때마다 시간 감각을 맞춰 보는 버릇이 있는데, 특정 시간을 정해 놓고 겉으로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속으로만 시간을 세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10초까지의 간격을 익히고 다시 60초, 5분 단위로 숫자를 세면서 동시에 다른 일을 하면 된다.

폴란드 삼 형제의 마지막 챕터에 도달했다. 유럽 문학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을 읽으면 어휘력 향상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방금 먹었던 정어리 같은 것들이 해당될 것이다. 물론 ‘사디네’를 ‘정어리’라고 부른다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본 뒤 알게 되었다. 다만 그 검색의 계기들을 만들어 주는 것은 대부분 독서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의 언어 감각에는 재능이 깃들지 않았기에 집중해서 대화하지 않을 때는 듣기가 꽤 불편할 것이다. 특정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그때그때 끌어다 쓰기 좋은 언어를 가져다 쓰기 때문인데, 편한 자리에서는 독일어와 한국어 그리고 영어가 뒤섞인 얼토당토않은 말을 쓸 때가 많다. 그걸 온전히 알아듣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한재이가 유일했다.

30분이 지났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봤는데 2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기에 1분 정도의 오차는 썩 훌륭한 성적이 아니다. 다시 정확히 1분을 센 뒤 ‘식후 30분’이라는 글씨가 적힌 약봉지를 뜯었다.

한재이가 없는 그런저런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 * *

휴대폰 메시지로 안내받은 주소 근처에는 일반 차량과 택시들이 바글바글했다. 밤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서두르는 사람들도 많아 보였다. 나는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렇게 연료를 낭비하는 짓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 두고 한재이가 기다리는 일식집을 향해 걸었다.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보도블록 위에 서 있던 중 술에 취해 소리 지르고 비틀거리는 몇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크고 우렁찬 웃음소리를 내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집에 가지 않겠다 고집을 부렸다.

갖춰 입은 정장이 팽팽하게 달라붙어 주춤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펭귄을 연상시켰다. 드문드문 끼어 있는 여성들은 실수하지 않으려 가방을 쥔 채 택시를 찾았다. 그러면 꼭 누구 씨, 하고 뒤에서 남자들이 부른다. 모른 척 뛰어가 버리는 그녀들을 보며 남은 사람들은 입맛을 다신다. 우렁차던 웃음소리는 딱 그 지점에서 멈춰 버린다.

일식집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청주를 들이부은 티를 내지 않으려 점잖은 척 걷고 있었지만 일행 중 세 명의 걸음걸이는 이미 흐트러져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나온 남자는 꼿꼿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앞서 나간 사람들을 재밌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가장 많이 취한 듯 보이는 남자가 뒤를 돌아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대표, 우리 3차 가야지.”

한재이는 그 말에 씩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나이는 사십 대 초반 정도. 잘 갖춰 입은 옷 모양새로 보아 클라이언트인 것 같은데 술은 어지간히 못 하나 보다. 발갛게 얼굴이 익어서 자신이 잘 아는 술집으로 3차를 가자며 한재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렇지만 힘에 부쳐 실제로 끌지는 못했고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었다.

“이사님,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대리 이미 부르셨는데.”

한재이 다음으로 멀쩡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웃으며 그를 데리고 다른 일행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니까 접대받는 쪽은 저렇게 세 명, 하는 쪽은 한재이와 이 남자를 포함해서 두 명이었나 보다. 동업한다고 했던 그 변호사인가. 호리호리한 체격에 안경을 쓴 남자는 누가 봐도 먹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나머지 일행을 두고 한재이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동업자를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였고 불구경하듯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클라이언트가 가고 싶어 하는 그 술집은 VIP 대접이 융숭한 것 같았고 잘하면 불법이 아닌 성매매를 할 수 있다는, 대관절 어떻게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고 그런 뜻인 것 같았다.

다행히 나머지 일행은 그쪽에 큰 미련이 없는 듯, 함께 이사님이라는 남자를 설득해 차에 태우는 데 성공했다. 한재이의 동업자로 보였던 그 젊은 남자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이 사라진 도로를 쳐다보다 한숨을 한번 쉬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이쪽으로 걸어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인사해.”

우리가 서로를 탐색하던 사이 한재이가 다가와 정식으로 소개해 주었다. 이름은 최정연. 변호사이고 동업자이자 법무법인 ‘소율’의 공동 대표라고 했다.

“우서진입니다.”

나는 상대가 더 익숙하게 받아들일 이름으로 악수를 청했다. 그는 반갑게 손을 내밀며 다른 한 손으로는 흘러내린 안경을 집어 올렸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최정연입니다.”

어떤 말씀을 많이 들었을까. 나는 한재이를 쳐다보며 해명을 요구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가는 길에 최 변호사 집에 좀 내려 주고 가자. 너 감기는 괜찮아?”

한재이가 자연스레 내 이마에 손을 올리며 열 상태를 체크했다. 순간적으로 최정연 변호사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별다른 놀라움이나 동요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건가.

“괜찮아, 멀쩡해. 차는 좀 멀리 세워 놨어. 길 건너야 해. 좀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지금 택시 잡기도 힘든데 태워 주시는 거로도 감사하죠.”

나를 대하는 그의 말투는 매끄러웠다.

우리 셋은 방금 신호가 바뀐 건널목에 서서 파란불을 기다렸다. 차가 세워진 유료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재이와 그는 오늘 있었던 자리에 관한 간단한 소회를 나누었다.

한국에서 법인을 상대로 하는 모든 일에는 영업과 접대, 인맥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한재이로서는 오늘 같은 자리가 어떻게 느껴졌을까.

나는 묻고 싶었다. 너 정말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냐고.

“그래도 아텍 개발 정도는 양호한 거지. 몇 번 설득하면 집에 가 주긴 하니까 얼마나 고마워. 영수증 처리도 안 되는 곳에 가자 그러면 진짜 답 없지.”

“나 때문에 최 변호사가 고생이 많네.”

최정연 변호사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나는 운전을 하는 중이라 큰 반응을 보여 주지 못했지만, 한재이가 꼬박꼬박 대꾸해 주는 덕에 말이 끊이지 않았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그래도 한 대표 성격에 2차까지 따라와 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해야 하나. 지난번에 상광 물산 생각나지? 아, 정말 졸부들이 꼭 그렇게 더럽게 놀아요.”

영업소 운영비로 아들 유학비를 지불했다던 그 클라이언트를 말하는 듯했다. 더럽게 놀았다는 날은 언제였을까. 자기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위로해 준 한재이 역시 그 접대에는 동참했을까. 어쩌면 밖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나에게 섹스로 풀고서 사과하던 날이었나.

그러고 보면 한재이는 요즘 일 이야기를 내게 하지 않았다. 재판을 준비하며 신나 하던 모습을 본 것도 꽤 오래전이다.

“아, 저기 신호등에서 세워 주세요. 차 돌리려면 유턴하셔야 하니까 건너갈게요.”

“아닙니다, 안까지 들어가…….”

“그렇게 해.”

한재이가 내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말을 막았다. 반사적으로 룸미러에 비친 최정연 변호사의 표정을 살폈지만 역시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가 말한 신호등에 잠시 정차를 하고 내려 주었다.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그를 향해 한재이가 창문을 내렸다.

“나 내일은 출근 안 할 거야. 급한 건 전화로 얘기해.”

“아이고. 네, 대표님. 마음대로 하시죠.”

그는 넉살도 좋아 보였다. 사업을 하려면 성격이 저래야지. 내 옆에 앉아 점잔을 떨고 있는 이 남자는 정말 대표로서 소질이 없어 보였다.

최정연 변호사가 무사히 건널목을 건너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곧바로 차를 돌려 집으로 가려는데 한재이가 제안을 했다.

“배고픈데 라면 먹고 가자.”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는 김밥을 주로 파는 분식집이 ‘24시간’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 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재이는 라면을 좋아했다. 독일에서도 한 번씩 비상식량이라며 끓여 주던 라면은 땀이 흐를 정도로 매웠던 기억이 난다. 술도 마셨겠다, 출출하기도 해서 매운 것이 당기나 보다. 반면에 나는 너무 매운 것은 잘 먹지 못한다.

골목길에 차를 대 놓고 그와 함께 분식집을 방문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음식이 쓰인 메뉴판에서 하나를 고르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한재이가 주문하는 대로 똑같이 따라 했는데 시뻘겋게 고춧가루가 뿌려진 라면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그가 웃으며 김밥을 내 쪽으로 밀어 넣었다.

“너 불고기는 좋아하잖아. 이거 그거 들었어.”

“응.”

기계처럼 정확한 크기로 썰린 김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굉장히 맛있었다. 나는 한식 중에 간장 베이스로 양념이 된 음식들을 좋아한다. 적당히 달콤하고 간이 밴 불고기가 한 움큼씩 들어간 덕에 입맛에 딱 맞았다. 그 덕에 라면에도 도전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근데 그 최정연 변호사라는 사람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야? 네가 말했어?”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것을 물어보았다.

“아니, 말 안 했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내 성적 취향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잖아. 근데 이런저런 정보를 종합해 보면 대충 눈치채지 않았을까 싶어. 예전부터 알던 사이라서 네 얘기도 들은 적 있었고. 어, 너 괜찮아?”

매운맛에 땀 흘리며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며 한재이가 말을 잘랐다.

“괜찮아. 근데 다 눈치챈 것 같…….”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급하게 휴지를 뽑아 캑캑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라면만으로도 충분히 매운데 왜 여기에 고춧가루까지 섞는 걸까. 연거푸 물을 들이켜고 다시 한번 기침을 하며 간질거리는 목 안을 긁어냈다.

“국물은 마시지 마.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해.”

“네가 너무 맛있게 먹고 있었잖아.”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휴지에 얼굴을 묻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한재이는 라면을 굉장히 맛있게 먹고 있었다. 평소에는 나 때문에 먹지도 않던 김치와 단무지까지 올려 가며 젓가락질 한 번에 국물 한 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면을 먹고 국물까지 따라 마셔 버린 결과가 참담했다.

빨개진 코를 휴지로 닦으며 끊어졌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근데 너는 매번, 음음. 그렇게 접대하면서도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거야? 뒤처리는 그 변호사분이 다 하시고? 미안하지도 않아?”

말을 하는 중간중간 열심히 목을 긁어 댔다. 다시 한번 물을 마시니 이제야 조금 가라앉는 듯하다.

“미안하지. 근데 나도 나름 최선을 다하는 거야.”

“다른 일 알아볼 순 없어?”

“응?”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말에 그가 먹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제 와서 주워 담기에는 내가 던진 화두가 좀 무거웠다.

“그냥, 너무…… 뭐랄까. 너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다행히 한재이는 픽 하고 웃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젓가락을 들어 라면 먹는 데 열을 올렸다. 그 모습 뒤로 ‘물은 셀프’라는 팻말이 적힌 정수기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한재이는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진 사람의 차림새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름이 잘 잡히지 않는 재질로 만들어진 고급 셔츠에 팽팽하게 선이 드러난 베스트까지 갖춰 입고서 24시간 분식집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는 것 자체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보자면 사실 안 어울리는 걸 떠나서 ‘격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쓰고 싶었다. 보쉬, 지멘스, 포르쉐와 같은 대기업들과 일했던 변호사가 여기 와서 밤늦게까지 그저 그런 자들을 접대하고 싸구려 분식으로 속을 풀고 있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더 솔직해져 볼까. 그 모든 게 나 때문인 것 같아서 기분이 한층 더 엉망이었다.

“재미없지? 여기서 사는 거.”

그 물음에 한재이가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재미없을 수가 있어, 너랑 사는 게.”

그 대답을 듣고 나니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가 그렇게 말해 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죄책감이 들면 들수록 한재이에게 기대어 원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어제 일 때문일까. ‘아니야, 난 다 괜찮아’와 같은 말로 나를 안심시켜 달라고 조르고 확인받은 뒤 나만 편안해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서진아.”

계속되는 내 침묵을 보다 못한 한재이가 진지하게 나를 불렀다.

“창피하지만 나도 사실 그렇게까지 잘난 놈은 아니라서 한 달 만에 한국 건너와서도 마냥 멋지고 폼 나는 일을 찾을 수는 없었어. 그래, 네 말대로 여기 생활이 다 맘에 들지는 않아.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올라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거고. 어제부터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잘 알겠는데, 그런 생각 제발 좀 접어 둬.”

“…….”

“어차피 완벽한 인생이란 건 없어. 독일에 남았다면 그랬을 것 같아? 똑같아. 그래도 굳이 선택하라고 한다면 네가 옆에 있는 게 나는 더 좋아. 접대나 영업은 솔직히 쥐약이지만 이렇게 끝나고 너랑 마주 앉아서 라면도 먹고 집에도 같이 가고, 멋지지 않아? 난 지금이 진짜 행복하다고.”

한재이는 어제부터 좌우로 흔들리는 내 마음을 단단히 잡아 쥐고 멈춰 세웠다. 준비라도 한 듯 쏟아지는 그의 말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래, 알았어.”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는 다시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대화 내용에 김밥을 말던 아주머니가 힐끔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내 잘못이다. 이런 이야기는 아주 시끄러운 술집에서 반쯤 정신을 놓고 얘기하든가 아니면 둘만 있는 집에서 해야 했는데. 테이블 8개를 놓고 24시간 영업하는 분식집에서 라면 먹다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피하지 않고 나를 잡아 준 한재이가 고마웠다.

그가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쯤 한 무리의 취객들이 들이닥쳤다. 6명쯤 되는 남자들이 테이블을 연달아 차지한 뒤 앉은 자리에서 큰소리로 주문을 넣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공간이 불편해진 우리는 얼른 일어나자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갑을 먼저 꺼내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에서 한재이가 승리를 거두었다. 아까부터 의심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보던 아주머니는 카드가 아닌 현금을 건네받고 목소리 톤이 기쁘게 올라가 있었다.

“이야, 오빠들 키 크다.”

칭찬인지 비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 취객 중 한 사람으로부터 튀어나왔다. 음식을 기다리는 게 심심한 모양이었는지 주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상을 골라 시비를 걸었다.

“와, 씨…… 뭐 이쪽은 모델이야?”

나는 후드 티에 청바지 차림이었으므로 그가 지칭하는 상대는 한재이를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190센티에 달하는 키와 슈트 차림이 거스름돈을 받는 잠깐 동안에도 이목을 끌었나 보다.

“그냥 가.”

문제는 이쪽도 완벽하게 맨정신은 아니라는 것. 술기운에 낯선 이에게까지 다정하지 않은 한재이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먼저 서둘러 그를 돌려세웠다. 한재이는 나와 취객을 번갈아 쳐다보다 분식집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아이러니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비자를 유지해야 하는 이방인들이다. 대한민국 정부에 잘 보여야 함과 동시에 쓸데없는 시비에 걸리면 불리한 입장이다. 그래서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담배?”

내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한재이는 혼자 불을 붙였다.

차를 세워 놓았던 골목길로 돌아가는 동안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시차를 고려하지 못한 업무상 전화였는지 내가 옆에 있음에도 끊지 못하고 차 안에 먼저 들어가 있으라는 손짓을 주었다.

운전석에 앉아 라디오를 들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차량 미등에 실루엣이 비친 한재이는 전화기와 담배를 들고 한참을 통화했다. 마침 흘러나오는 노래는 Harry Connick Jr.의 . 나는 운전대에 턱을 괴고 정면에 보이는 완벽한 피지컬의 남자를 감상했다. 새벽에 잠긴 도시 한가운데서 이방인이 뿜는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 * *

뮌헨으로 가는 A350의 PIC라고 전달하자 스케줄러는 내게 뜬금없이 태블릿을 건넸다. 생경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무슨 뜻이냐고 그에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운항 정보는 늘 종이로 전달해 줬으면서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 걸까.

“어? 연락받으신 걸로 아는데? 오늘 방송국에서 나오신 분 콕핏 촬영 있으니까 태블릿으로 진행하라고 위에서 지시 내려와서요.”

흠, 그런 것이었군.

이제 내 기억은 오프였던 어제 무심결에 회사 전화를 받았던 오후로 되돌아간다. 한재이는 출근하지 않은 채 나와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의 다리를 베고 영국 공영 방송 다큐멘터리 채널을 시청 중이었다. 회사 전화로 내 휴대폰이 울렸을 때는 테이블까지 손이 닿지 않아 한재이가 휴대폰을 대신 받아 내 가슴 위에 올려 주었다.

‘기장님, 내일 비행이요. 방송국에서 무슨 특집 촬영한다고 촬영 협조가 들어왔는데, 이거 홍보팀에서 슈미츠 기장님 비행기로 해 달라고 해서요. 괜찮으실까요? 좀 갑작스러우시죠.’

스피커폰으로 울리는 담당자의 말에 나는 당황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런 걸 하루 전에 알려 주는 게 어디 있어. 정기 비행 심사에 관한 일정 통보 전화인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어…….’ 하는 망설임으로 대답을 못 해 주고 있던 와중에 한재이가 자신의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써서 내 앞에 들이밀었다.

[한다고 해. 나 그거 완전 보고 싶다!]

기대감에 눈이 빛나다 못해 투명해지기까지 하는 연인의 표정을 보자 거절하기가 힘들어졌다.

‘뭐,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더니 한재이가 내 어깨를 흔들며 신나 했다. 그는 예전부터 내가 조종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영상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오랜만에 또 하나 건지게 되었다며 소파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된 연유로 오늘 비행은 방송을 위한 홍보 비행이 되어 버렸고, 회사 차원에서는 대외적 이미지를 고려하여 디지털 운항 시스템으로 진행하라고 태블릿을 건네준 것이다. 입사 전 교육을 받기는 했었지만 제대로 써 본 적은 없어서 걱정이 좀 되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아, 오셨어요. 이거 저희도 많이 안 써 봐서 어색하네요. 하하.”

오늘 나와 편조로 묶인 두 명의 부기장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 이들의 외모를 보면 회사가 굳이 오늘, 그리고 이 비행편에 카메라를 동참시킨 이유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조민우 부기장과 또 한 명의 훤칠한 부기장 이렇게 세 명이서 인사를 나누었다.

뭐, 한재이조차 첫눈에 인정했던 외모가 아니던가. 조민우 부기장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따라온 여성 한 분을 소개해 주었다. 카메라를 메고 있던 그녀는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TBC 홍이라 PD라고 합니다. 와, 기장님이 엄청 젊으시네요.”

“네. 안녕하세요. 막시밀리안 슈미츠입니다. 어디서부터 찍으실 건가요? 주로 이륙 전 과정부터 많이 촬영하시기는 하는데.”

“오, 촬영이 처음이 아니신가 봐요?”

“전에 있던 회사에서도 몇 번 동행한 적은 있습니다.”

“하하, 네. 그러셨을 거 같네요. 브리핑하시는 거부터 쭉 찍고 있을 테니 카메라 의식하지 마시고 평소대로 부탁드려요. 아, 중간중간 질문은 해도 되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륙 후에는 조종석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걸로는 촬영이 어렵겠는데요.”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아, 네! 이걸로는 인터뷰만 좀 딸게요. 조종석 카메라는 따로 설치하려고요. 인터넷 방송하듯이 재밌는 얘기도 좀 나눠 주시고 그러실 거라 믿습니다!”

말주변이 없는 나로서는 상당히 곤란한 부탁을 받았지만, 다른 두 명의 부기장이 열심히 해 주리라 믿고 알겠다며 넘겼다. 사실 어제 전화로도 인터뷰도 해 주고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 주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그래도 인터넷 방송처럼 시끄럽게 떠들어 달라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상념은 그만두고 조민우 부기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브리핑 시작하시죠.”

“네.”

그가 선선히 웃으며 태블릿의 첫 번째 화면을 터치했다.

선임 부기장으로 그를 지목한 것에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다른 한 명의 부기장은 잘 모르는 동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난번에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그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결국엔 이렇게 또 직장에서 만날 사이인데 나도 나름 노력해 보는 쪽으로 마음을 이미 굳힌 터였다.

맑은 얼굴에 보조개를 접은 그가 미리 습득해 놓은 기상 정보와 항로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웨이포인트(Waypoint. 비행 경로상 특정 지점)에 따른 고도를 의논하고 빠르게 운항 계획을 세웠다.

“이동하시죠.”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를 따라나선 홍이라 PD가 조민우 부기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어디로 가나요?”

“합동 브리핑이라고 전체 미팅을 하러 가요. 저희가 운항 계획을 세우는 동안 객실 승무원들 역시 팀 미팅을 했을 거고요. 이제 같이 모여서 오늘 비행에 관해 서로 알아야 할 것들을 주고받고 주의할 점에 대해 미리 알려 드리는 거죠. 어느 지점에서 좀 흔들릴 거다, 오늘 비행 날씨가 좋지 않아 긴장해야 한다, 뭐 이런 거요. 대부분 운항 브리핑은 부기장이 하고 기장은 마지막에 인사만 하고 끝나요. 뭐 사실 서로 얼굴 보는 자리인 거죠. 들어오세요.”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우리 셋 중 조민우 부기장을 콕 짚어 질문한 이유를 몇 가지 생각 중이었다. 다른 한 명의 부기장은 아까부터 별말이 없었으니 고려 대상에서 빠진 것 같았고, 조민우 부기장의 인상은 원래 좋으니 말 걸기가 편해서였을 수도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지난번에 최소영 승무원에게 들었던 내 인상에 대한 평가였다. 말 걸기가 무섭고 말투가 좀 딱딱하다고 했던가. 그 후로 나는 조금 더 부드러운 한국어를 쓰기 위해 노력 중이었는데 통 나아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한재이에게도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난 섹시해서 좋은데’와 같이 전혀 도움 되지 않는 피드백만이 돌아왔다.

브리핑이 끝나고 게이트로 이동했다. 콕핏에 마련된 옵저버 시트에 후반부 조정을 맡을 부기장이 자리를 잡았다. 기체 위로 올라온 정비사에게서 점검 로그를 보고 받고 운항 계획이 담긴 태블릿을 조민우 부기장에게 건네주었다.

“어, 기장님은 어디 가세요?”

핸드 그립으로 조종석을 촬영 중이던 홍이라 PD가 나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비행기 외견 점검을 하러 잠깐 내려가 봐야 합니다.”

“같이 가도 되나요?”

의외였다. 이륙 준비를 하는 부기장을 찍을 줄 알았는데 홍이라 PD는 카메라를 들고 나를 따라 비행기 밖으로 내려왔다. 이런 장면들은 시청자들에게 별 흥미가 없을 텐데.

“점검은 정비사분께서 다 하신 게 아니었나 보죠?”

“물론 정비는 끝났습니다. 제가 하는 건 외견 체크에 해당하는데, 대부분은 기어나 휠, 파킹 레버에 이물질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의외로 이런 것들로 사고가 자주 나서 기장이 눈으로 확인을 해야 하죠. 엔진 보시겠습니까?”

“네!”

나는 날개 밑에 둥그렇게 달린 엔진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크고 아름다운 롤스로이스의 제트 엔진이 나선형의 무늬를 뽐내며 팬을 벌리고 있었다. 내 가슴을 가장 뛰게 만드는 비행기의 심장이다. 거대한 팬이 돌아가며 공기를 모아 주면 터빈을 돌려 불을 뿜고 제트를 형성하는 발사체. 시속 300㎞를 달려 200톤이 넘는 기체를 들어 올리는 항공 기술의 집약체이다.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장님 표정만 찍어도 영상은 잘 뽑히겠네요. 비행기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표정이 확 사셨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직업이긴 하죠.”

나는 웃으며 그녀를 데리고 좀 더 앞쪽으로 다가갔다.

“A350은 겉으로도 구별하기가 쉽습니다. 윈드 실드라고, 저기 조종석 창문 가장자리가 검게 도색되어 있는 거 보이시죠. 가면 쓴 것처럼.”

“오, 정말이네요. 몰랐어요.”

“저희들 사이에서는 너구리라고 불립니다. 에어버스의 가장 최신 기종들은 이 도색을 많이 하니까 어디 가서 아는 척하기에 좋죠.”

“그러네요. 재밌어요!”

“먼저 올라가시죠. 저도 남은 점검 끝내고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아, 네.”

그녀를 다시 비행기 위로 올려 보낸 뒤 집중해서 외견 점검을 끝냈다. 저녁 비행이었으므로 해가 벌써 지고 있었다. 브리핑 룸에서 체크했던 오늘의 일몰 시각은 오후 6시 10분. 이륙할 때쯤에는 완전한 밤 비행이 될 것이다.

* * *

“오토 파일럿 셋.”

수동 조종간을 놓음과 동시에 안전벨트 지시등을 끄고 자세를 조금 뒤로 젖혔다. 아까부터 옵저버 시트에 앉은 부기장이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홍이라 PD가 신신당부하며 건네준 질문지가 들려 있다.

“기장님, 이거 꼭 해 달라고 아까 그 피디님이.”

“네…….”

나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고민에 빠졌다. 사실 조종 중에 딴짓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운항 중에 조종사들끼리 잡담조차 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 규칙 위반 사유는 아니었고. 그저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는 질문들 몇 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 달라는 부탁이었는데 너무 빡빡하게 구는 것도 실례일 것 같았다.

나는 민망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뒤에 앉은 부기장에게 두세 가지만 뽑아서 읽어봐 달라고 했다.

“네. 그럼 첫 번째 질문. 비행기 탈 때 휴대폰을 비행 모드로 전환 안 하면 기장님께 혼나나요?”

“하하하. 질문 귀엽다.”

옆에 앉은 조민우 부기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양 측면에 달린 작은 카메라가 빨간 불을 깜빡이며 그 모습을 모두 찍고 있었다.

“대답해 주시죠, 기장님. 시청자 여러분들이 궁금해하십니다.”

조민우 부기장이 넉살 좋게 진행을 맡았다.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그 질문을 받아 대답하게 되었다.

“아, 사실 비행 모드 전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전에는 전자파 때문에 운항에 방해가 될 거라는 가설이 있어서 매뉴얼에 들어간 항목인데 증명된 바는 없습니다. 관습으로 굳어져서 지금도 일부 항공사에서 요구하고 있긴 한데. 사실 휴대폰 켜 놓으셔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저희 코리아나 에어웨이에 탑승하실 때는 비행 모드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조민우 부기장이 회사 홍보도 잊지 않고 챙겼다. 다음 질문이 들어왔다.

“파일럿이 되면 승무원과 사귈 수 있나요?”

우리 셋은 동시에 웃었다. 이 질문은 조종사가 되고 난 이후 늘 단골처럼 따라다니곤 했다. ‘어떻게 하면 파일럿이 되나요?’ 다음으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기도 했고. 여기에는 조민우 부기장이 대신 대답했다.

“많이 만날 수 있죠. 아무래도 여기도 직장이다 보니 자주 얼굴 보고 그러면 정도 들고. 안 그래요, 부기장님?”

“그렇죠. 하하하.”

두 명의 부기장이 웃으며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하긴 나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으니 발뺌할 수 없는 진실이기도 하다.

“마지막 질문, 파일럿 연봉은 얼마인가요?”

“하하, 부기장님! 그 질문은 스스로도 좀 곤란하지 않아요?”

조민우 부기장이 뒤를 돌아보며 질문자를 채근했다.

“이거 아까 피디님이 꼭 물어봐 달라고 별표 쳐 주고 가신 거라서요. 패스할까요?”

“이미 다 찍히고 있을 텐데요, 뭘. 시청자 여러분, 제가 알려 드리죠. 일단 윙을 따고 부기장이 되면 첫해는 6천 정도 받습니다. 이게 금액이 높아 보이지만 위험수당이 포함되어서 그렇지 기본급은 그렇게 높진 않아요. 나중에 기장이 되면 확 오르지만, 그것도 주로 모는 기종과 경력에 따라 좀 다릅니다. 한국은 기장 연봉이 평균적으로 1억 5천쯤 된다고 보시면 되는데, 여기 계시는 이런 외국인 기장님들은 대우가 더 세죠. 얼마 받으십니까, 슈미츠 기장님?”

조민우 부기장이 손으로 마이크를 만들어 내게 넘겼다. 음, 왠지 둘이서 짜 놓은 덫에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밝히기 좀 그런데요.”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으로 무마해 보려 했다. 그러나 조민우 부기장이 포기하지 않고 따라붙었다.

“1억 5천에서 업 앤 다운?”

“업.”

“그럼 1억 8천에서 업 앤 다운?”

“음…… 업?”

내가 둘의 눈치를 슬쩍 보며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올리자 조민우 부기장이 큰소리를 내며 흥분했다.

“와! 여러분 보셨죠? 견장에 줄 하나 더 있고 없고에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A350이 최신 기종이라 연봉이 좀 세게 잡히긴 하는데, 그래도 대단하죠? 1억 8천 이상 받으신다네요. 가만있어 봐. 나 이거 좀 화나는데요?”

“그러게요. 저도 억울한데요? 도착하면 맛있는 거 얻어먹어야겠습니다, 기장님?”

두 명의 부기장이 툴툴거리며 나를 원망했다. 나는 웃으며 둘의 컴플레인을 받았다. 지금도 반응이 이 정도니 실제 연봉을 들으면 진심으로 화내겠네. 유로 환율로 득을 본 부분이 좀 있었지만 내가 계약한 연봉은 한화로 2억이 좀 넘었다.

그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간 후 비싼 저녁을 사 주기로 하고 질문 코너를 서둘러 마치게 했다.

그 후로도 잡담과 업계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덕에 지루할 틈 없는 비행이 이어졌다. 조민우 부기장의 친화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와 있었던 불편한 서사를 지워 가고 있었다. 어느새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웃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역시 내가 너무 정색하고 받아들였던 것이었을까. 도쿄에서 조민우 부기장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살지 말라고 했었지. 그 말을 한번 따라 보기로 했다. 조금 더 가볍게, 때로는 방치해 보는 쪽으로 말이다.

* * *

크리스는 퇴근 전이었기에 공항으로 마중 나올 수 없었다. 나는 뮌헨 공항에서 동료들과 작별한 뒤, 차를 한 대 빌려 곧바로 빈넨덴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가을이 들어찬 아우토반의 풍경을 보며 애늙은이 같은 생각을 했다. 시간이 참 빠르다.

-빠르지. 벌써 가을이잖아.

전화 너머의 한재이가 내게 동조했다.

“한국 들어갔던 게 봄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겨울이 올 거 같아. 점점 가을이 짧아지는 느낌이야.”

-그게 바로 사람들이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야. 느낄 새도 없이 지나가 버리니까 늘 아쉬운 거지.

한재이는 회사에서 나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의 휴대폰 너머로 밤 11시의 도시 소음이 들려왔다. 버스가 정차하며 내는 바람 빠지는 소리, 신호등 불이 바뀌기 전에 내는 경고음. 내가 없는 집은 들어가기 싫어서 야근을 하고 저녁을 때운 뒤 밤거리를 혼자 헤매고 있다고 했다. 올해 처음으로 개시했다는 트렌치코트 자락을 날리며 서울 한복판을 떠도는 한재이를 상상했다.

-촬영은 잘했어? 언제 볼 수 있대?

“정규 방송은 아니고 인터넷 채널 같은 거였나 봐. 편집하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린다던데.”

-더 좋네. 휴대폰에 저장해 둬야겠다. 차 막혀? 언제쯤 도착할 거 같아? 피곤하겠다.

“차는 안 막히고 도착은 1시간쯤 후에. 피곤하긴 한데 계속 통화하면 괜찮을 거 같아.”

-왜. 내 목소리 들으니까 좋아서?

“응. 정말 좋아.”

그가 청량하게 웃었다. 나는 앞차를 따라 느긋하게 속도를 줄이며 그 웃음소리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차 안 가득 퍼진 한재이의 목소리가 미약처럼 몸속에 스며들어 간질거렸다.

-서진이 네가 그런 표현해 줄 때마다 진짜 미칠 거 같아.

“별것도 아닌 거로 왜 이렇게 감동해. 사람 미안하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짧게 스쳐 가는 게 아쉬워서 더 좋은 거라고 했잖아.

그는 찰나같이 지나가는 나의 애정 표현을 1년 내내 기다렸던 가을에 비교했다. 그리 따뜻하진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인디언 서머’라는 비유까지 곁들여서. 그렇게 세기의 로맨티스트가 들려주는 세레나데를 감상하며 집으로 향했다. 비행으로 쌓였던 피로는 증발해 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집에 도착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크리스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임신으로 배가 조금 나온 것 같기도 한 실비아와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평소보다 더 반갑게 인사를 하는 크리스의 몸짓을 보고 그가 오늘 저녁을 함께하며 나눌 주제에 관해 신경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 역시 그랬다. 내 사정을 듣고 난 후의 부모님의 반응이 자못 궁금해졌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한 슈미츠 부인의 요리를 테이블로 나르며 가족들은 가벼운 일상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번 건강 검진에서 발견된 양아버지의 혈액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과 실비아의 임신에 따른 크리스의 고충이 주된 이야깃거리였다.

새 생명을 품은 가족들의 표정은 밝았다. 아까부터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 금방이라도 열 달을 채워 조카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어나면 바로 세례를 받게 할 거야. 아 참, 맥시 네가 대부가 되어 줬으면 좋겠는데.”

크리스는 돼지고기를 넣고 빚은 마울타셰(독일의 만두)를 반으로 갈라 입에 넣었다. 나는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거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실비아가 거들었다.

“처음부터 당연히 너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어. 거절당해도 어쩔 수 없지만, 우리 마음 아플 거야.”

“거절한다는 뜻은 아니야. 정말 나로 괜찮다고 생각해?”

대부가 된다는 것은 부모 다음으로 법적 보호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후견인이 되어 성인이 될 때까지의 아이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부분 형제를 지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나는 피가 이어지지 않은 사람인데 괜찮을까. 동의를 구하듯 양부모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당장 후원 계좌부터 만들어야겠다. 한 달에 30유로씩 넣어 줄 거야. 그런데 딸이야, 아들이야?”

“딸이야.”

“그럼 50유로로 올려 줄게.”

우리는 모두 웃었다. 슈미츠 집안은 딸이 귀한 집이었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는 벌써부터 이 작은 소가족 사이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와인 잔이 부딪치며 축복의 건배가 몇 번 더 오가고 난 뒤, 나는 조심스레 내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양아버지가 입으로 들어가던 와인을 급히 삼키며 잔을 내려놓았다.

“재이와 함께 지내고 있다고?”

“네.”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미 한재이에 대한 소문을 모두 알고 계신 듯했다. 다만 그 상대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하셨겠지. 어쩌면 그들 입장에서는 ‘새삼스럽게’ 내지는 ‘왜 이제야’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었다. 한재이와 내가 함께해 온 15년이라는 세월은 또 다른 의미로 ‘의외성’을 제시한다.

“저희 진지하게. 음, 만나고 있어요.”

“아…….”

이번에는 양어머니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내쫓기듯 몰아세워졌을 한재이의 기분을 상상했다. 다행히 이쪽은 비교적 교양 있게 흘러갈 모양이다. 양아버지는 서둘러 목소리를 정리하고 ‘그랬구나’ 정도의 반응을 내보인 채 입을 다물었다.

호불호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성 정체성 변경에 놀라신 것 같았다. 서른이 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하겠지. 양어머니가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아 어릴 때는 잠깐 만났던 여자 친구의 사진을 보여 준 적도 있었다. 그렇게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사춘기를 보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별에 상관없이 한재이만이 내 운명의 짝이라 그렇게 되었다는 셰익스피어적인 감성을 호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둘이 웬만했어야지, 안 그래? 하루가 멀다고 붙어 다녔잖아. 나는 걔 결혼한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엄마, 뭐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맥시 무안하게.”

크리스가 끊어진 대화를 이어붙이며 개연성을 던져 주었다. 너는 진작 알았냐는 그녀의 말에 나의 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런데 왜 결혼을 한다고 그 난리를 쳐서 온 동네 시끄…….”

“엄마.”

큰아들의 눈치를 보며 슈미츠 부인이 다시 입을 닫았다.

“그건 어쩌다 보니…… 둘 다 자각하는 게 좀 늦어져서요.”

나는 접시 위의 마울타셰를 잘게 조각내며 포크에 묻은 소스로 입맛만 다셨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각하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의미는 이 감정이 오래전부터 우리 둘에게 자리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적어도 나는 그 경우가 맞았지만, 한재이의 입장은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대변해 버린 것 같아 마음이 찝찝했다.

“맥시, 이거 더 줄까?”

실비아가 일부러 적막을 깨고 큰 볼에 담긴 양배추 절임을 권했다. 양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한 교수가 아들 문제로 길길이 날뛰는 모양이던데. 우리가 미리 알았으면 이야기를 좀 해 보는 건데 그랬다.”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좀…… 그렇잖아요. 이런 문제에 부모님이 개입하는 건.”

“우리야 그렇지만 그쪽 집은 분위기가 다른가 보다.”

“아무래도 거긴 문화적으로 아직 받아들이기가 좀 그런 거 아니겠어? 여기서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관습이라는 게 있잖니. 영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우리로서는 좀 기분 나쁘네. 우리 아들이 어디가 어때서. 여보, 나 거기 치즈 좀 집어 줘.”

양어머니는 다시 진보적인 시민의 자세로 돌아와 내 편을 들었다.

“그래, 아무튼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네.”

그렇게 한동안 머뭇거려지던 식사는 재개되고 접시 위로 나이프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궁금하고 캐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모른 척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누가 고백한 건지 어떻게 해서 파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같은 세세한 부분에 관해 대놓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자식에게도 매너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내가 자진해서 말을 이어 주지 않는 이상 이제 이 주제는 그만 끝이 나야 한다.

사귄다고 말했고 허락을 받을 부분은 아니었으니 간단한 소감을 주고받고 그렇게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올라가려는 나를 크리스가 붙잡았다. 2층에는 그와 내가 어릴 때 쓰던 방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가끔 부모님 집에서 자고 가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 소년 시절부터 써 왔던 낡은 침대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 실비아가 이미 크리스의 침대를 차지해 쉬고 있었고 그는 체스판을 가지고 와 내게 들이밀었다.

“흐트러지지 않게 잘 보존해 두었어. 메모를 보니 내 차례인 거 같은데?”

빈넨덴 집에 오면 크리스와 나는 꼭 체스를 두곤 했다. 둘 다 워낙 지는 것을 싫어한 탓에 말 하나를 움직이는 데만도 수십 분씩 걸린다. 그러면 꼭 중간에 졸린다며 누구 한 사람이 올라가 잠들어 버렸는데, 그렇게 이어져 온 게임이 1년도 넘게 끝나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꼭 승부를 봐야겠다.

“기다려. 와인이 필요하겠다.”

나는 수를 생각하느라 생각에 잠긴 크리스를 두고 진열장에서 잔을 꺼내 왔다. 저녁때 먹다 남은 와인을 부엌에서 찾고 있을 때, 안으로 들어온 양아버지와 마주쳤다. 그는 마침 잘 만났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하루 더 자고 갈 거지? 내일은 둘이서 페더바이서(그 해에만 먹는 가을 와인)를 사러 갈까? 쟤들은 아침 일찍 돌아갈 모양이야. 네 엄마는 다른 약속이 있는 듯하고.”

“늘 가시던 포도주 제조업체(양조장)가 있잖아요. 올해도 거기로 가나요?”

“맞아. 오는 길에 장작용 나무도 좀 사야 하고.”

“벌써 벽난로를 때우시는군요.”

“아직 개시는 안 했다. 너 있는 김에 장작이나 좀 패 놓을까 해서.”

“그래요. 같이 가요.”

힘쓰는 일을 맡기고 싶다는 그의 말에 나는 웃었다. 어느새 하얗게 변해 버린 양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보며 다시 한번 느꼈지만,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른다.

독립한 뒤로는 자주 함께 있어 드리지 못했다. 충분히 다정했던 유년 시절을 내게 주셨지만 크게 보답해 드린 적도 별로 없었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갚을 생각이니 마지막 한 톨까지 다 돌려받으시길 바랐다. 그러려면 오래 살아야 할 것이고 건강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부모님의 안위를 바라는 순간에도 핑곗거리를 찾는 인간이었다. 감정에는 모두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양부모님은 나를 키우면서 무엇을 얻어 가셨을까.

나는 그것이 동정심과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했었다. 유기견을 키우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고. 하지만 요즘은 혼란스럽다. 인간은 개가 아니었고 동정심만으로 설명하기에는 22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최근 들어 경험한 몇 가지 감정들이 내가 이해 못 했던 과거의 개연성을 엮어 주고 있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크리스와 실비아는 일찍 집을 떠났다. 양어머니는 지역 중창단 회원들과 가지는 티타임을 위해 집에 남았고 나와 양아버지는 양조장으로 향했다.

그가 E 클래스 벤츠 후미에 짐을 싣기 위한 트레일러를 걸었고 운전대는 내가 잡았다. 늘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한국과는 달리 익숙한 도로를 안내 없이 달렸다. 산맥이나 큰 건물이 시야를 가리지 않아 지평선이 어디든 뻗어 있는 평원이 보였다. 옥수수를 추수하고 지나간 자리에는 까마귀 같은 새들이 몰려와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저기 캠프 보이지? 이제 여기까지 들어왔다. 대책도 없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정말.”

양아버지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는 컨테이너 촌으로 보이는 난민 시설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비난하는 상대는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와 이탈리아를 거쳐 여기까지 당도한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저들을 독일로 불러들인 정치인과 행정부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북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유럽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지만 요즘 독일인들은 모든 것이 모자란다고 성토했다. 한재이가 말했던 슈미츠 집안사람들의 말다툼 역시 대부분 세금 이야기로 시작해서 연방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끝이 난다.

“그래도 난민 문제는 터키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잖아요.”

“에르도안한테 갖다 바친 돈이 얼만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양아버지 칼 슈미츠는 전형적인 남부 독일 사람이다. 이들은 대체로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고집이 세고 보수적인 면이 있다. 또한 지나치게 자존감이 높고 대부분이 부유하다. 전쟁이 끝난 직후 독일 경제를 구한 것도 자신들이고 동서 통일을 위한 비용 역시 모두 남부에서 지불했다고 생각한다. 온 유럽이 골머리를 썩고 있는 난민 문제 역시 자신들의 세금으로 지탱하고 있다고 믿는다.

증거를 달라고 하면 아마도 벤츠와 포르쉐, BMW 본사를 보여 줄 것이다. 그중 두 회사를 보유하고 있는 슈투트가르트 출신들은 더 했다. 그들에게 베를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대답이 비슷하다.

‘가난한 학생들과 외국인 노동자들만이 사는 도시’

‘날씨도 좋지 않고 해외여행을 가기도 애매한 위치’

두 번째 말에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를 무시하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모두가 서울을 사랑하던데, 내가 자란 고향에서는 수도를 무시한다.

그런고로 이 보수적이고 콧대 높은 지역에서 동양인으로 살아남는 것은 커다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인종 차별은 커튼 뒤에 숨은 숨바꼭질처럼 발목만 드러내 놓고 웃곤 했었다. 꼭꼭 숨으라고는 하지만 머리카락이 다 보이는 현실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학부모의 밤’과 같은 행사가 있던 날은 어린 내게 힘에 부치는 경험이었다. 금발 머리의 파란 눈을 한 양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아왔을 때의 주변 시선은 하나같이 ‘아, 역시 그랬구나’ 같은 반응들. 순혈 동양인에게서 나오기 힘든 옛 독일 왕의 이름을 가진 나는 그 학부모의 행사가 참으로 싫었다.

시인들은 유년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노래하지만 나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그 세월을 견뎌 내고 어른이 된 지금이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로운가. 영원히 서른하나의 인생만 살고 싶다면 너무 욕심인 걸까.

그때 내 상념을 비집고 들어온 양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기 앞에 자리가 하나 있네.”

평원에서 포도밭 언덕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차를 대 놓고 그와 함께 양조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슈미츠 씨.”

양조장의 매니저가 아버지를 알아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는 듯해서 그에게 정식으로 악수를 청하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아, 둘째 아드님이셨군요. 기억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지난주에 출하된 페더바이서가 시음을 위한 셀러 곳곳에 꽉꽉 들어차 있었다. 매니저가 차갑게 식힌 화이트 계열 한 병을 따라 주었다. 나는 향을 확인하고 잔을 돌려 양아버지에게 건넸다. 10년 넘게 이어진 거래였음에도 그는 매년 퀄리티를 확인한다.

“올여름은 햇빛이 좋아서 당도가 강하게 나왔죠.”

“그래서인가. 도수가 좀 세네요.”

사실 작년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다. 유럽은 점점 더 더워지고 있었고 산도가 강한 와인은 구경하기가 힘들어졌다. 달콤한 리슬링 품종을 즐기는 한재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양아버지는 4년 전 출하했던 피노 누아 계통의 개량 품종을 세 박스 구매했다. 그 외에도 파티용 로제 와인과 화이트 페더바이서 한 상자를 차에 실었다.

“좀 걸을까?”

둘이서 양조장을 나온 뒤 포도밭 언덕을 올랐다. 따듯한 공기를 머금은 오후 1시의 가을바람이 우리와 함께했다. 수확되지 못한 포도알들이 앙상하게 마른 가지에 미련하게 달려 있었다. 속상해할 필요는 없다. 밤사이 여우가 찾아와 먹을 것이다.

“둘이서 이렇게 외출하는 게 오랜만이지?”

“네. 그러네요. 어릴 때는 일요일마다 늘 산책에 데려가셨죠. 그 후에 먹을 수 있었던 파이와 케이크가 없었다면 크리스와 저는 절대 따라가지 않았을 거예요.”

“하하하. 그럼 오늘도 돌아가는 길에 먹고 가자. 여기 온 김에 살을 좀 찌우고 가. 식사는 매번 어떻게 해결하니? 네가 입맛이 좀 까다로운 편일 텐데. 한국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잖아.”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이에요. 신기한 요리도 많이 도전했고. 돼지 창자에 야채를 넣어서 먹는 블루트부어스트(독일의 선지 소시지) 같은 게 있는데 맛있어요. 같이 다니는 동료 중 한 명이 그런 음식을 좋아하거든요. 사 먹는 게 대다수다 보니 처음 먹는 음식들이 많기도 하고 그래서 아직은 재밌어요.”

한참을 오르던 포도밭 언덕은 두 갈림길로 갈라졌다. 한쪽은 언덕 측면을 빙 돌아가는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곧바로 언덕 정상을 향했다. 양아버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길을 택했다.

“그래,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사실 네가 한국으로 갑자기 떠난다고 했을 때 네 엄마와 나는 무척 섭섭했었지. 역시 너한테는 여기보다 거기가 더 편한가 싶기도 했고. 어릴 때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네가 한국을 아주 잊고 사는 줄 알았거든.”

“모르겠어요. 확실히 어릴 때는 별로 좋지 않은 기억들만 떠올라서 기피했던 건 맞는 거 같은데, 가장 미련이 없었던 곳이라서 그런지 새로 시작하는 곳으로는 완벽하더라고요. 기대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었으니까.”

양아버지는 내 이야기를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기피했던 무언가와 마주 보기 시작하면, 거기에 묻혀 있었던 보석 같은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고. 그에게는 그것이 일곱 살의 나였다고 했다.

“크리스를 낳고 두 번째로 가진 아이의 이름은 율리안이었지. 그 아이가 다닐 유치원까지 미리 알아봤었다. 배 속에서 7개월을 보내고 혼자 심장이 멈춘 그 아이를 떠나보내는 데 꼬박 2년이 걸렸어. 원인이 내 유전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다시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지 못하겠더구나. 너무 무서웠다. 그 생지옥을 또 경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다시 시도해 볼 용기도 나지 않았어. 그래서 아이는 크리스 하나로 만족하며 살기로 했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나는 쉽게 감상을 내놓지 못했다. 그저 조금 전 갈림길에서 그가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길을 택한 이유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 안지(앙겔라의 애칭)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더구나. 실은 센터와 연락 중이었는데 우리가 입양을 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더라. 호기심에 이것저것 알아보았는데 어쩌다 연이 닿은 복지사에게서 네 서류를 받았다. 나이가 꽤 차 있어서 여기서 사는 게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고 돌려보내려는데 사진이 있더라고. 하하, 안지와 나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동시에 외쳤단다.”

“…….”

“우리 아들이 여기 있었구나.”

걸음을 멈춘 그가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아, 일곱 살 때 증명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나기 시작했다. 완전히 침전되어 있던 파편 하나가 떠올라 가슴을 찔렀다. 그러고 보면 나란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은가.

그는 그 후 1년간 나를 독일로 데려오기 위해 벌어졌던 수많은 시행착오도 설명해 주었다. 내게는 여덟 살의 공항에서 시작되었던 기억이, 그들에게는 30년도 더 된 멍울에서 시작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기대할 것도 바라는 것도 없었다고 했지만, 너도 결국엔 그렇게 기피하던 한국에서 무언가를 찾은 거겠지?”

바람이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옆구리에 양손을 집어넣은 채 걷고 있던 자세를 풀고 트렌치코트 자락을 여미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긍정했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단 한 사람을 생각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보여요. 늘 무언가를 계획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만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덕에 원하는 걸 얻은 적도 있지만 놓치고 있었던 것들이 많았던 거 같아요. 자로 잰 듯 살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걸 예전엔 몰랐어요.”

“그래서 재이 성격이 너한테는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좀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지 않니.”

“하하. 네, 저도 알아요.”

“그나저나 새로 들어간 회사 유니폼 입고 사진 한 장 찍어서 보내 줘라. 재이랑 둘이서 찍은 사진도 좋고.”

나는 그가 그 사진을 어디에 쓰려는지 알 것 같았다.

“피아노 위에 전시하시려고요?”

“해야지, 그럼.”

어느새 우리는 천천히 포도밭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빈넨덴 집 응접실에 자리하고 있는 낡은 피아노를 떠올렸다. 크리스와 내가 집에서 독립한 이후부터는 아무도 연주하지 않는 오래된 유물이다. 다만 그 위에 올려진 가족들의 사진은 세월이 갈수록 개수를 더해 갔다.

맨 뒷줄에는 양부모님의 연애 때 사진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습들이, 그 바로 앞에는 크리스의 어릴 때 사진부터 실비아와 함께 찍은 결혼식 사진이 늘어져 있다. 이제 곧 태어날 아기의 사진은 바로 그 옆을 차지할 것이다.

오른쪽에는 나의 여덟 살 때부터 사진들이 이어져 있고 맨 끝자락에는 기장 승급 후 처음으로 입었던 넉 줄 금색 견장의 유니폼 사진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제 그 옆을 장식할 내 인생의 다음 장면에 한재이가 함께해도 좋을 것이라는 양아버지의 말에 나는 무척이나 감동했다.

기피했던 존재를 마주하고 내가 얻어 낸 보석은, 어쩌면 사랑만이 아니라 가족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 * *

독일 비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고대하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야?]

메시지를 보내 놓고도 한동안 확인하지 않는 한재이 때문에 욕실 안까지 휴대폰을 들고 들어갔다. 가능한 한 빨리 샤워를 끝내고 다시 메시지 함을 확인했지만 답장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 집에서 공항 근처 호텔로 이동 중에 잠깐 했던 통화를 제외하면 24시간 이상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가 한국으로 들어오고 난 뒤 처음으로 가지는 공백이었다.

그 대신 다른 메시지 함은 터져나갈 듯 알람을 울려 댔다. 지난번에 최소영 승무원과 약속했던 운항 크루들의 모임이었다. 내일 있을 술자리에 참석해 달라는 권유 메시지를 받고 아직 이렇다 할 답장을 하지 못했다.

모임 내 비행 근무 매니저가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내가 내일 오프라는 사실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재이의 일정을 먼저 물어보고 싶은 마음에 아직 미적거리며 대답을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때 마침 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안. 일 때문에 좀 늦을 것 같아.]

짤막하고 간결한 대답. 일 때문에 바쁜 것 같은데 거기다 대고 ‘내일 동료들과 술을 마시러 가도 될까?’라는 메시지를 보내기엔 좀 부끄러웠다.

나는 생각 끝에 최소영 승무원에게 참석하겠다는 회신을 주고 휴대폰을 닫았다. 때 되면 알아서 집으로 들어올 사람의 메시지를 자꾸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휴대폰도 저 멀리 치워 버렸다.

침대에 누워 전자책을 읽던 와중에 잠이 들었다. 고단한 몸을 일으켜 컴컴한 거실로 나가 불을 밝혔다. 꼼꼼히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한재이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깨어나면 돌아와 있을 줄 알았는데 대체 뭐가 얼마나 바쁜 건지. 시계는 벌써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을 것 같다는 그의 메시지를 끝으로 아무것도 오가지 않은 대화창을 바라보았다. 휴대폰 키패드를 두드리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가도 받지 않기에 포기하려던 찰나 한재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아, 내가 5분 뒤에 바로 전화할게.

어디냐고 물어보려던 나는 할 말을 삼켰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주변 소음에 집중하고 있었다. 노랫소리와 고함, 듣는 것만으로도 휘청거리는 취객의 술주정이 이어진다.

“…….”

나는 대답도 없이 잠깐 동안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끊을 듯 서둘러 말하던 한재이가 조용히 나를 기다려 주었다.

“응, 알았어.”

그 말을 끝으로 내가 먼저 전화를 끊어 주었다.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더니 접대 중이었나. 나는 목덜미를 쓸며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며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뻗었다. 지난번 목격했던 클라이언트가 기어코 한 대표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걸까. 그들이 말하는 ‘영수증 처리가 되지 않는 곳’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를 말하는 거지? 간접적으로 들어 왔던 한국의 접대 문화에서 가장 어둡고 더러운 부분만 떠올라 마음이 괴로웠다.

연인으로서도 기분이 나빴지만 그런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내가 너 사업은 진짜 안 된다고 예전부터 그랬는데…….

그때, 다시 손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통화를 끝낸 직후부터 그대로 들고 있었던 듯했다.

-미안해. 이제 집에 가는 길이야. 푹 쉬었어? 저녁은?

“응, 자고 일어나서 연락한 거야. 밥은 생각 없어. 술 많이 마셨어?”

-술? 아니, 전혀. 난 회사에서 계속 일했어. 아까 메시지 못 봤어?

“봤어. 근데 방금 전화한 곳은 술집 아니었어?”

-아, 응. 방금은 접대 중인 최 변호사 구해 주고 오는 길이었어. 일이 좀 한꺼번에 터져서 하나씩 맡아 수습하는 중이거든. 집에 가서 이야기해 줄게.

그제야 복잡하게 뭉쳐 있던 마음이 슬그머니 풀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참 알고 보면 단순한 인간이구나.

“저녁은?”

-아직. 뭐 좀 사 갈까? 도시락 같은 거. 사실 나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바빠서 밥 좀 못 먹었다고 하는 게 이렇게도 가슴 아플 일인가. 속상한 마음에 울컥 화가 나기까지 했다. 무슨 회사가 밥도 안 먹이고 일을 시키냐고 따지려 했는데 따질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빨리 집으로 들어오기나 하라고 전한 뒤 부엌으로 향했다.

한재이에게 밥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사다 놓은 인스턴트 국과 스팸을 꺼냈다. 그리고 쌀도 꺼내 씻었다. 압력 밥솥 설명서에 나와 있는 대로 눈금에 맞추어 물을 넣었다. 물과 쌀의 비율이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서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흡족할 만한 결과를 얻고 나서야 취사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다음은 스팸을 썰어 팬에 구웠다. 그가 자주 해 먹는 간단한 요리 중에 그나마 내가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반찬이다. 스팸이 구워지는 동안 냄비에 정확하게 500㏄의 물을 넣어 인스턴트 국을 끓였다.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볶음 김치 한 팩을 뜯어 그릇에 담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던 밥솥에서 증기가 빠져나갈 때쯤 한재이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타이밍이 좋았다.

“너 지금 밥 차리는 거야?”

재킷을 팔에 걸고 부엌으로 다가온 한재이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응. 옷 갈아입고 나와.”

“나 먹으라고?”

“보시다시피 내가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는 노릇하게 구워진 스팸이 담긴 접시와 국그릇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와, 나 좀 눈물 날 거 같아. 우서진이 나를 위해 한식을 차렸어.”

한재이가 내게 다가와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살짝 닿은 숨결을 맡으니 그가 정말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냉장고에서 반찬이 될 만한 것들을 더 찾아보았다. 뜯지 않은 감자 샐러드 하나를 확보하고 유통기한을 보았다. 날짜에 며칠 더 여유 있음을 확인하고 접시에 덜어 담았다. 반찬 세 개에 국 하나. 밥상이 나름 나쁘지 않게 차려졌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재이가 신이 난 얼굴을 하고 식탁 앞에 앉았다. 열심히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차려진 밥상을 받는 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일이었다. 내게는 지금까지 자주 있었던 일이었지만 정작 나는 한재이에게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었다.

비행을 나가면 사나흘은 집을 비우는 탓에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요리에 재능이 없었다. 사실 요리라고 할 것도 없는 오늘 같은 상차림이 아마 내 능력의 최대치일 것이다.

“나 일 때문에 며칠만 독일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

내가 차린 밥을 열심히 먹던 한재이가 전화 통화에서 잠깐 언급했던 그 ‘터졌다는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맡고 있는 클라이언트 중 가장 규모가 큰 기업의 독일 지사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직장 내 협의회에 대한 의견 충돌로 사측이 노동조합과 대립 중이었는데 이제는 원격으로 해결이 힘들 것 같아 직접 가서 조정을 해야 할 것 같다고.

그 와중에 또 다른 클라이언트는 거래처와 NDA(기밀 유지 협약) 소송이 걸렸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터진 건 최정연 변호사가, 독일에서 터진 건 한재이가 각각 맡기로 한 것이다.

“혹시 내일도 늦게 들어와? 나 술 약속 있어.”

“그래? 너 때문에 일찍 퇴근하려고 했는데 약속 있으면 나도 편하게 일 더 하다 오면 되고. 누구 만나는데?”

그는 내가 좀 많다 싶게 담은 밥을 거의 다 먹어 가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감자 샐러드를 함께 깨작대던 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며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운항 승무원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있는데 초대받았어. 많이 늦지는 않을 거야.”

“그럼 차는 내가 가지고 갈게. 너 끝날 때 전화해. 같이 들어가자.”

“응. 그렇게 해.”

“서진아.”

“어?”

“밥 진짜 맛있다.”

말도 안 되는 칭찬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스스로 맛을 낸 게 하나도 없는데 맛있다는 칭찬은 내게 할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러자 한재이가 한식은 정성이라며 그 말에 반박했다. 아니, 그러니까 정성을 쏟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니까. 그는 말을 말자는 듯 투덜거리며 다시 밥 먹는 데 집중했다. 나는 웃으며 조용히 물을 떠다 주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한 한재이를 배웅하고 나는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한동안 조민우 부기장을 피하느라 제대로 다니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수영장 레인을 돌았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보냈지만, 다행히 그와 마주치지는 않았다. 어제 인천 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대화가 이어졌기에 설사 만나게 된다 해도 편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저녁 술 약속에서 뜻밖의 만남으로 실현되었다.

“아, 부기장님 여기 멤버셨군요.”

친숙하게 회사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테이블 의자를 빼는 조민우 부기장을 보며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했다. 하긴, 그는 회사 밖에서 어울리는 동호회만도 손가락에 다 못 꼽을 정도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부기장들도 가끔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를 떠올리지 못한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저 여기 창설 멤버예요, 하하. 기장님 오신다는 소문 듣고 오랜만에 한번 와 봤습니다. 아니면 안 오는 건데.”

“와, 부기장님 완전 섭섭해요! 지난번에는 말도 없이 문자 씹고 잠수 타시고. 일단 술 뭐로 하시겠어요? 소주? 맥주? 아니면 섞어서?”

“오랜만에 섞을까요?”

“역시 우리 부기장님! 여기요, 저희 맥주잔하고 소주잔 하나씩 더 주세요.”

이제 올 사람은 다 왔다며 테이블이 정리되었다. 참석자는 총 8명. 최소영 승무원을 비롯한 객실 팀 4명과 지상 근무 팀에서 2명, 그리고 나와 조민우 부기장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자탕을 앞에 두고 잔이 두 개씩 돌아갔다. 한국 사람들이 술을 섞어 먹는 습관에 관해서 예전에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린 결론은 ‘재미있어서’였다. 처음엔 ‘빨리 취하기 위해’ 내지는 ‘맥주가 너무 비싸서’ 같은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원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요즘은 그냥 ‘재미있어서’인 게 분명하다.

“오, 저도 동의해요. 술맛을 음미하는 문화라기보다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문화라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섞어 먹는 게 재밌으니까.”

“그리고 혼자 너무 점잔 빼고 앉아 있는 사람 속도 맞춰 주는 데는 폭탄주만 한 것이 없죠. 그런 의미에서 기장님, 뭐 하십니까? 잔 비우세요.”

첫 건배 후 아직 줄어들지 않은 내 잔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최소영 승무원이 옆에서 다시 잔을 부딪쳐 왔다.

“아, 음…… 천천히 마실게요.”

“기장님 술 약하시거든요.”

조민우 부기장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맞은편에서 말을 거들었다. 그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며 재미있어했다.

“술이 약하세요? 어머, 그럼 제가 흑기사 해 드릴까요?”

“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술 약한 사람을 위해 대신 마셔 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마음속에서 심한 내적 동요를 일으키며 급히 잔을 비웠다. 그녀는 씩 웃으며 내 빈 잔에 다시 소주를 투하하고 맥주를 부었다. 갑자기 최소영 승무원의 인상이 180도 달라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짜잔, 제가 특별히 연하게 말았습니다!”

나는 순식간에 다시 제조된 폭탄주를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주량은 소주로 따지면 반병 정도인데 섞어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한재이에게 미리 메시지로 여기 주소를 보내 놓고 한마디 덧붙였다.

[10시 이후에 내가 연락 없으면 곧바로 좀 데리러 와 줘.]

어제와는 다르게 곧바로 답장이 왔다.

[많이 마시지 말라고 하려 했더니 그런 분위기가 아닌가 보네. 알아서 모시러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놀아.]

휴대폰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말이 뭐라고 아까보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기까지 한다. 믿을 구석이 생겨서인지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술자리를 즐기기로 했다.

모인 멤버들의 평균 연령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중반까지 다양했다. 화젯거리는 대부분 회사 뒷담화, 업계 이야기 그리고 진상 손님들에 관해서였다. 승객들과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저 그저께 홍콩 다녀왔는데 어떤 비즈니스석 손님이 라면에 계란 안 넣어 준다고 어찌나 뭐라 하는지. 비즈니스 탔는데 그런 것도 하나 못 해 주냐면서. 하하. 그거 사실 봉지 라면 아닌 거 알면 엄청 화내셨을 거예요.”

“에이, 그건 진상도 아니죠. 그 정도는 늘 있는 일 아니에요? 저 지난주에 오사카 턴 어라운드 다녀오는데 어떤 단체 손님이 자기 일행들 아직 못 탔다고, 출발하면 안 된다고 문을 못 닫게 하는 거예요.”

“어머, 그분들 짐은 다 빼셨어요? 안내 방송해도 안 오신 거예요?”

“네, 다행히 화물 짐이 없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사무장님이 다른 승객들까지 늦어지니까 어쩔 수 없다고 출발해야 한다고 설득하시는데도 그 일행분이 계속 화내면서. 아니, 돈을 다 냈는데 안 태워 주면 어쩌냐고. 그래서 기장님이 열 받아서 다 내리라고 그랬거든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기장으로서는 내적 갈등이 아주 심하게 오는 순간이다.

출발 10분 전까지 준비 완료가 되지 않으면 이륙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리고 만다. 그런데 테러의 위험 때문에 탑승하지 않은 승객의 짐은 싣고 갈 수 없다. 이런 상황이면 오지 않는 탑승객을 기다리는 편이 빠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짐을 빼고 출발하는 편이 빠를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결과는 매번 다르다.

“그분들 좀 노린 거 같았어요. 늦게 와도 짐 빼는 게 더 오래 걸리니까 기다려 줄 거 알고서 그런 거죠. 그랬는데도 기장님이 그냥 짐 빼라고, 그리고 다 내리시라고. 그러니까 나머지 승객분들이 다 박수 치셨어요. 속이 다 시원하다면서, 좀 늦어도 괜찮으니까 잘하셨다고.”

“하긴 요즘은 승객분들이 더 싫어하니까요, 남한테 피해 주는 진상이라고.”

그들의 수다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폭탄주 제조가 더디게 흘러갔다. 사람이 여러 명이다 보니 모두가 한 주제에만 집중할 수 없어 조민우 부기장과 나는 자연스레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듭된 추락 사고가 일어난 B737 맥스의 생산 중단으로 보잉사가 약 90억 달러의 손해를 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실적이 둔화된 에어버스사의 주가 폭락까지. 뒤숭숭한 업계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쯤 최소영 승무원이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 자꾸 두 분이 지방 방송 하시면 안 되고요. 다 같이 놀아요. 기장님은 진상 손님 없으셨어요? 유럽분들은 그래도 좀 얌전하시죠?”

음…… 얌전하다기보다는 사실 위험한 사람들이 많다.

“부기장 시절에 밀라노에서 베를린으로 들어오는 비행이 있었는데, 거기 테러리스트가 탄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 웬일이야, 진짜요?”

그 말에 각자 대화 중이었던 다른 사람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륙하고 10분 만에 회사로부터 비상 연락이 들어오더군요. 테러 제보를 받았으니 승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가까운 공항으로 회항하라고. 급하게 이머전시 선언하고 스위스로 항로를 틀려는데 취리히 타워에서 어프로치 승인이 안 떨어지는 겁니다.”

“웬일이야. 중립국이라서 그런 거예요?”

“음,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래서였지 않았을까 싶네요. EU 회원국도 아니었으니까 괜히 뒤처리만 곤란해질 거고.”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이야, 진짜 에피소드의 스케일이 다르네요.”

어느새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엔 뮌헨까지 가서 비상 착륙을 하고 용의자는 공항에서 곧바로 체포되었는데 알고 봤더니 회사 승무원 중 한 명이 조력자였습니다. 둘 다 이슬람 원리주의자였고 독일 국적이었죠. 기장님이 착륙 직전까지 회항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해서 객실 팀에도 알리지 않았었습니다. 만약 정보를 미리 공유했다면 그가 콕핏에 들어오려 했을 것이고 조력자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문을 열어 주었겠죠.”

“와…… 무서워요. 진짜 하이재킹(Hijacking. 항공기 납치) 일어날 수도 있었겠네요.”

“일어나지 않았으니 다행이죠.”

나는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마무리했다. TV 뉴스라도 본 듯 눈을 크게 뜨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사람들이 저마다 소감을 한마디씩 내뱉었다.

최대한 담백하게 전달했지만 사실 꽤 큰 사건이었다. 그 일 이후로 회사는 전 운항 직원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배경 조사를 받았다. 그러니까 라면에 계란을 넣어 달라거나 하는 승객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꽤 귀여운 측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기장님, 테러의 위협 속에서 무사히 살아 나오신 기념으로 한 잔 드릴게요.”

“아…….”

최소영 승무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술잔을 권했다. 나는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또 한 잔을 마셔야 했다. 술기운이 확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자신이 대학 때 공부했던 이슬람주의에 관해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술이 올라 있었고 내 이야기가 마침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나는 딱히 테러리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이 사회 문제에 큰 의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듣고 있기가 퍽 곤란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술잔만 비운 탓에 예상보다 더 빨리 취하기 시작했다.

그때쯤부터 1시간여에 걸친 내 기억에는 드문드문 공백이 생겼다. 집중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이제는 각개 전투로 흩어져 두 명씩 짝을 이루어 느릿느릿한 대화를 이어 갔다. 내 옆에서 피를 토하며 테러리스트를 규탄했던 멤버는 술에 취해 테이블 위에 혼자 쓰러져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조민우 부기장이 물을 건네며 내 어깨를 잡아 주고 있었다. 시간은 10시 30분쯤을 가리키고 있었고 잠깐 화장실에 가겠다고 일어났던 것을 끝으로 다시 기억이 끊어졌다.

시간의 필름이 이어지기 시작한 건 라디오 소리가 들려오고 난 뒤였다. 익숙한 차량 방향제 냄새가 나서 눈을 떴더니 어느새 나는 내 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슈트 차림의 한재이가 말없이 운전 중이었다.

“……미안. 잠들었었나 봐.”

까마득하게 잠겨 있는 내 목소리에 스스로가 놀랐다. 한재이가 라디오 볼륨을 줄이고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속은 괜찮아? 뒷좌석에 필요한 거 사 놓았으니까 물이라도 좀 마셔.”

뒤를 돌아보니 숙취 해소 음료와 생수 그리고 우유 같은 것들이 편의점 봉투에 담겨 있었다. 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은데…….

“나 뭐 실수한 건 없었어?”

그러자 한재이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실수? 네가 어떻게 실수를 하겠어. 필름 끊길 시간까지 예측하고 데드라인 정해서 주소 찍어 보내는 사람이잖아. 하여간 대단해, 우서진.”

이상하다. 한재이는 내가 실수한 게 없다고 하는데 그 말속에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표정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화가 나 보였다. 그가 사 놓은 음료 중에서 숙취 해소 음료를 꺼내 들이켰다.

나는 좀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오래된 감이다.

“화났어?”

“화? 내가 화나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거야?”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한재이는 굉장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설마하니 그 이유가 내가 술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친구였을 때도 취해서 정신 못 차리는 나를 챙겨 집에 데려다준 적은 많았으니까.

그렇다면 원인은 단 하나인데…… 설마 고작 그런 이유로 이렇게까지 뒤틀려 있는 것일까.

“혹시 조민우 부기장이 거기 있었다고 화난 거야?”

내 말에 그가 다시 정면에서 시선을 옮겨 나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 이름을 콕 짚어서 지명하는 이유는 뭐야? 그냥 동료라면서.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던데.”

“네가 조민우 부기장을 싫어하니까.”

“내가 싫어하는 게 뭐 대수야?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너.”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인내심이다. 그리고 절제력이다. 한재이는 나를 도발하고 있었다. 대놓고 화를 내거나 다투는 것이 아닌 어느 모퉁이 한쪽을 살살 긁으면서 어디까지 참는지 두고 보자는 듯 말을 꼬고 쥐어틀었다. 머리가 아파 왔다.

“그냥 동료라고 몇 번을 말해. 라이센스 기종이 같아서 매달 한 번씩은 같이 비행도 나가야 한다고. 그리고 나쁜 사람 아니야. 둘만 만난 것도 아닌데 밑도 끝도 없이 계속 싫다 그러면 나는 직장 생활 어떻게 하라는 거야.”

“누가 뭐래? 왜 이렇게 발끈해. 잠이나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한재이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나도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혹스럽고 흥분된 마음에 잠은 오지 않았다. 도어트림에 팔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조민우 부기장에게 가지는 반감도 처음엔 이해할 수 있었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 대한 마음을 자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저 사람 재수 없다며 혼자 투덜거릴 때는 조금 기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오늘 한재이의 태도는 예의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조민우 부기장은 내게 실수하지 않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대충 핑계를 대고 나를 식당 밖으로 데려가 준 것이 다였다. 친절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 수도 있겠다.

한재이는 내내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했다. 이윽고 골목길에서 빌라 주차장까지 한 번에 미끄러져 들어간 차가 조용히 멈췄다. 곧바로 시동을 끈 그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를 부축해 빌라로 올라간 뒤 현관문 앞에서 다시 등을 보였다.

“어디 가?”

“들어가 있어. 바람 좀 쐬고 갈게.”

“하아…… 진짜 왜 그러는 건데.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한테 왜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현관문 앞에 서서 주고받는 대화가 빌라 건물 계단 밑으로 울려 퍼졌다. 듣기 싫다는 표정을 한 한재이가 말없이 나 대신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억지로 나를 들여보내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미안하지만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려나 본데 그걸 기다리다가는 내가 말라 죽을 것 같았다. 화를 내든 때리든 그가 이렇게까지 기분이 상해 버린 진짜 이유가 알고 싶었다.

“조민우 부기장이랑 얘기했었어?”

그러자 한재이의 표정이 고요해졌다. 내쉬는 숨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어느새 한숨 소리로 둔갑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뭐라고 했는데 그래. 설마…….”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린 그 문장을 차마 이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라도 내가 한재이를 좋아하는 걸 뻔히 아는 사람이 그런 얘기를 했다고? 그것도 스스로? 아니라고 해, 제발.

“밖에서 너 부축해서 같이 기다려 주고 있길래 인사를 안 할 수는 없었어. 호감 가진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말이 좀 딱딱하게 나갔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넉살 좋게 웃더라. 느낌이 이상해서 유도 신문을 좀 했어. 우리 사이를 알고 있다는 건 좀 충격적이던데.”

그도 이제 바람 쐬러 나가는 건 포기한 듯 보였다. 다시 나를 향해 몸을 틀어 다가왔다. 아까보다 표정은 풀려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물론 네가 말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모른 척하고 그 자리에서 대화를 좀 했거든. 네 말대로 성격 참 좋더라.”

“…….”

“고백도 못 해 보고 차였다고 하던데.”

나는 다가오는 한재이에 의해 한두 걸음씩 밀리고 있었다. 어느덧 물러설 곳이 없어 차가운 대리석 벽이 등 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민우 부기장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속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내게 호감을 느꼈던 사실 자체를 숨기고 동료로서 잘 지내보려다 한재이에게 들키는 상황.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죄가 아니었으니 조민우 부기장을 탓할 수 없었고 내가 그에게 한순간도 휘둘린 적이 없었으니 나 역시 죄가 없다. 연인의 서사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은 한재이 역시 충분히 화낼 수 있는 입장이었으니 그야말로 최악의 케이스였다.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감정을 소모해야 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는 와중에 한재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표정 할 거 없어. 널 의심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널 몰라? 너무 완벽하게 끊어 내서 상대가 당혹스러웠겠지. 혼자 깔끔하게 정리하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하려고 했을 거고. 아니야?”

“실제로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는 그 대답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래서 허무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뭘 그렇게 숨겼어.”

변명은 아니었지만 바로 이렇게 될 것 같아서였다. 불필요한 싸움을 할 거 같아서. 내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 때문에 한재이와 이런 날 선 대화를 하는 것이 싫었으니까.

정작 당사자와는 거의 다 해결이 된 상태였는데 마지막에 일이 이렇게 어그러질 줄 몰랐다. 설마하니 조민우 부기장이 스스로 실토해 버릴 줄이야. 이것은 예측 범위 밖이다. 명백한 내 실수다.

“미안해. 기분 나빴겠네. 그냥 네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럴 일도 아니었고. 진짜 별일 아니잖아. 이렇게 분위기 잡고 따질 문젯거리조차 안 돼.”

“별일이 아니야?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누가 나 좋다고 쫓아다녔다는데 내가 그 사람이랑 아무 일 없다는 듯 너한테는 말도 안 하고 친하게 지내고 그러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기분은 나쁘겠지. 하지만 뭘 어떻게 하겠어, 네 직장 동료라는데. 단지 내 기분이 나쁘다고 네게 강요할 수 있는 건 없어. 그건 네가 선택할 문제니까.”

한재이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우리의 대척점이 있다. 일과 사생활이 분리되어 있는 나와, 모든 것에 늘 절대적 우선순위를 두고 사는 그의 가치관. 연인으로서의 기분은 이해하지만 그는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열다섯 살 아이들이 아니니까.

“조민우 부기장도 뭘 시도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 고백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은 아무 감정 없이 동료로만 대해 주고 있어. 너도 봤잖아.”

“아무 감정 없다고 네가 어떻게 확신해.”

이런 것도 싫었다. 의심은 물감처럼 번져 갈 텐데 나로서는 해결해 줄 방법이 없다. 회사를 관두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 소모전을 매번 치를 자신도 없었고.

“그래, 실제로 아직 감정이 남아 있다고 쳐. 그래도 뭘 어쩌겠어. 내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해.”

오로지 한재이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그를 억지로 멀리하고 나 스스로가 고립되는 생활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가. 그가 조금만 더 선을 넘으면 기피 대상 신청까지 하려 했던 나를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건지. 이제 조금 짜증이 났다.

내 표정을 눈치챈 한재이가 한층 톤을 내리고 말을 이었다.

“알아. 아까도 말했지만 네 처신은 완벽해.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그 사람이 너 좋다는 티를 냈을 때 미리 말해 줬으면 이렇게 섭섭하진 않았을 거야.”

“아닐지도 모르는데 혼자 착각해서 소란 떠는 것도 우습잖아.”

“좀 우스워지면 어때서. 네가 나한테 체면 차리는 거 섭섭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말싸움. 술 때문에 점점 더 머리가 아파 왔고 가능한 한 이 말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는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무기가 있었다. 단 1초 만에 한재이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전지적인 힘을 가진 무기가.

“하…… 체면, 차려야 했어.”

“그러니까 그런 게 나는 섭…….”

“그때 너한테는 결혼할 사람이 있었으니까.”

“…….”

한재이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내게 화낼 수 없어 침묵을 택했다.

우리의 시작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해서 파헤칠수록 서로에게 손해인 부분들이 있다. 어설프게 묻어 둔 흙더미를 치우면 시뻘겋게 드러나는 상흔. 그가 무리하게 칼자국을 내서 끊어 버린 반대편 인생의 흔적이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벌인 처사임을 알면서도 원죄는 그에게 있음을 상기시켰다.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재이와 대립하고 부딪히는 것은 내게 또 다른 공포였으니까.

그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그의 팔을 잡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일단 들어가. 현관문 앞에서 서서 할 얘기는 아닌 거 같아.”

취기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기에 내 걸음걸이는 바르지 못했다. 현관문 턱에 구두가 걸려 넘어질 뻔한 나를 한재이가 잡아 주었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면서 말은 진짜 잘한다.”

그 말에 나는 한숨을 쉬고 현관문 턱에 걸터앉았다. 신발 끈을 풀려고 했는데 제대로 손이 닿지 않았다. 한재이가 그 모습을 보고 단단히 매여 있던 옥스퍼드 끈을 나 대신 풀어 주었다. 그리고 힘없이 늘어진 헝겊 인형처럼 바닥에 앉아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허무하게 웃음이 나왔다.

“우리 이거, 싸운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며 힘에 부쳐 벽에 등을 기대었다. 한재이는 마른세수를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싸우긴 뭘 싸워. 내가 너한테 싸워서 이길 재간이 어디 있어.”

내 앞에서 약자인 척하는 그 말이 우스워 길게 뻗은 그의 다리를 툭 하고 때렸다.

“툴툴거린 건 뭐야, 그럼. 비꼬고 날 세우고 혼자 다 했잖아.”

“반항.”

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실소를 터트렸다.

그제야 한재이가 꽤 지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뒤집어쓴 그는 고개 숙인 피에로 인형 같았다. 억지로 웃을 필요는 없어. 나는 손을 뻗어 축 늘어진 그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다른 사람 통해서 그런 얘기 듣게 해서.”

그냥 처음부터 사과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내 기대만큼 의연한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시를 세웠다. 상처받은 그의 얼굴을 보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태울 것을 모두 태우고 소강되어 가는 싸움의 불씨를 보며 그도 나도 한 발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단둘이 있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그것만 지켜 줘. 더 이상은 터치하지 않을게.”

“그럴 일 없어. 날 알잖아.”

“그래, 알아.”

세상에서 제일 잘 알지. 그는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긴장이 풀리자 잡아 두고 있던 취기가 다시 한번 몰려왔다. 기어가듯 한재이에게 다가가 두 팔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많이 마시긴 했나 보네. 아직 정신 못 차리는 걸 보니. 힘들어?”

그가 내 어깨를 주무르며 등을 쓸어내렸다. 그 느낌이 좋아서 스르륵 다리를 베고 누워 버렸다. 올려다본 그의 표정이 아까보다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출장 가는 거 내일 바로 출국이라고? 며칠이나 있다 오는데?”

“일주일. 빨리 해결되면 날짜 당겨서 바로 올게.”

“집에 들를 거야?”

“음, 아니. 안 갈 거야.”

본가가 있는 독일로 출장을 간 김에 부모님을 만나고 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고 했다. 괜히 만나서 서로 상처를 주느니 모른 척 방치해 두는 편이 나을 거라고. 그렇게 마음을 정한 듯 보이는 그를 지켜보는 내 마음도 결코 편하지 않았다.

“영원히 안 보고 살 수는 없어.”

“알아. 그냥 시간을 드리는 거야.”

“너무 길어지면 돌이킬 수 없게 돼.”

“그래, 알겠어. 이제 조용히 해.”

한재이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쳐 왔다. 부드럽게 벌어진 입 속에서 천천히 두 혀가 섞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말랑한 혀의 촉감을 느끼다 점점 더 열이 오르는 감각에 그의 목을 손으로 감아 끌어당겼다. 적극적으로 바뀐 내 태도에 키스는 조금 더 질척해졌다. 목을 길게 빼고 구애를 하듯 그의 혀를 받고 있는 나는 술기운 때문인지 벌써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한재이의 손이 어느새 내 셔츠 안으로 침범해 가슴을 더듬었다. 내 뒷덜미에서 묵직하게 커지고 있는 그의 페니스가 느껴지자 평소와는 다른 종류의 음심이 생겨났다. 나는 키스를 멈추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뒤 곧바로 그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최소한의 탈의로 모습을 드러낸 그의 페니스를 문 채 엎드려 누웠다.

“음…….”

한재이는 팔꿈치로 바닥을 지탱한 채 고개를 길게 뒤로 빼고 나른한 소리를 내었다. 겉옷을 입은 채 펠라를 받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가히 이질적이다. 나는 단단히 치솟아 오른 그의 페니스를 입 안에 넣고 강한 자극을 주며 빨아 댔다. 한재이를 흥분시키고 싶다는 내 욕망의 분출이었고 그의 것을 입 안에 넣고 흔들고 싶다는 성욕이 들어서였다.

그래서였는지 펠라를 받는 것은 그였지만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는 것은 내 쪽이었다. 입 안에 채 반도 들어가지 않는 페니스를 손으로 쥐고 번들거리는 타액을 윤활제 삼아 피스톤 질을 해 댔다. 그런데도 욕심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더 깊게 넣어 봐.”

그가 지긋이 내 목덜미를 누르며 목구멍 근처까지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윽…….”

“좋아. 더 깊게.”

뿌리 부분을 손으로 쥐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미끄러질 뻔했다. 천천히 트레이닝을 하듯 넣는 길이를 조금씩 늘려 보았다. 입가에서는 제대로 삼켜지지 못한 타액이 흘러나왔다.

내 목덜미를 누르고 있는 한재이의 손길이 묘하게 강압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나는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속으로 겨우 열 번의 횟수를 센 뒤 빨고 있던 페니스를 빼내 숨을 쉬었다. 한재이의 것은 석고처럼 단단해졌지만 사정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힘들어.”

“이리 와.”

그가 나를 끌어당겨 다시 입 맞추었다. 묵직한 페니스를 받아 내던 입 안에 다시 말랑한 혀끝이 점막을 훑으며 지나갔다.

“욕실에서 할까?”

참기 힘들다는 듯 혀를 굴리는 그의 제안을 곧바로 수락했다. 사실은 내가 급했다. 분해된 알코올들이 쾌락의 입자가 되어 어딘가에 쌓인 것 같았다. 한재이는 이미 내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옷가지들은 현관에서부터 욕실에 이르는 동안 하나씩 던져졌고 마지막으로 남은 속옷이 욕실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샤워기의 물줄기가 몸을 때렸다.

“천천히…… 아!”

한재이는 내 몸을 닦아 내고 뒤를 풀어 준 뒤 곧바로 삽입을 시작했다. 나는 샤워 부스 벽에 등을 기대고 그의 목에 팔을 걸었다. 좀 더 나은 각도를 위해 한쪽 다리는 그의 허리에 감은 채 뒤를 내어주었다. 강하게 박혀 들어오는 느낌에 천천히 해 달라고 말렸지만 죽을 것같이 흥분한 그의 표정을 본 뒤부터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아…….”

그 대신 입술을 깨물고 몸 어딘가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쾌감에 집중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좁은 구멍 속 전립선을 건드리며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그의 페니스를 떠올렸다. 온몸이 젖어 미끌거리는 한재이의 육체와 흥분으로 점철된 그의 눈빛. 그렇게 서서히 번지는 욕망의 초입부에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사정감이 몰라오기 시작했다.

스스로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다. 본능에 충실한 나의 행위에 그가 더 속도를 올리며 귓불을 깨물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나는 절제력을 잃고 곧바로 사정했다. 그러자 한재이도 곧바로 제 것을 빼내고 손으로 흔들어 정액을 뿜었다.

우리는 긴 여운을 담은 키스를 하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벌거벗은 몸을 맞대고 있으면 체온과 살갗, 정사를 끝낸 내 연인의 숨 쉬는 폐와 심장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단단하게 붙들려진 한재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가 조용히 샤워기를 틀었다. 떨어지는 물줄기가 욕정의 부산물과 불신의 찌꺼기를 씻어 내렸다.

다음날, 한재이는 독일로 출장을 떠났다.

* * *

이틀 후, 나는 모스크바로 가는 CR713편을 이륙시키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부기장은 이미 나와 두 번 정도 비행을 같이한 적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출하된 지 15년이 넘은 낡은 A380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유도로에 들어섰다. 이륙 예정 시간은 오전 9시 10분. 총 350명의 탑승객과 10톤이 넘는 화물을 싣고 9시간의 비행을 예정에 두고 있었다.

도착지까지 가는 항로 곳곳에 난기류와 낙뢰가 예상된다는 정보를 받았다. 운항 브리핑을 듣고 있던 객실 승무원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여차하면 기내 서비스를 전면 중단할 수 있다는 나의 말에 모두 얼굴이 굳었다.

변풍 20노트에 돌풍 35노트. 인천 공항에서의 이륙 역시 만만치 않았다. 실력 있는 부기장과 함께하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활주로 위를 미끄러지며 V1(이륙 결심 속도)에 도달한 순간 부기장의 콜 사인에 맞춰 조종간을 당겼다. 500톤의 비행기가 공중으로 떠오르고 관제탑으로부터 작별 인사를 받았다.

-Coreana 713 heavy, contact Departure on 131.8. Good bye(코리아나 에어웨이 713편 디파쳐 주파수로 131.8로 접속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Contact Departure on 131.8. Coreana 713 heavy. Good day(코리아나 에어웨이 713편 디파쳐 주파수 131.8로 접속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고도를 계속해서 상승시키는 와중에도 기체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이 거대한 몸집이 흔들린다는 의미는 기류가 꽤 불안정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항로 조정을 관장하는 디파쳐 센터로부터 3만 5천 피트까지 고도를 올려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기체는 곧바로 대류권을 뚫고 올라갔다.

“음, 아직 범핑이 더 있겠는데요?”

부기장이 윈드 실드 밖으로 보이는 구름의 모양을 보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계획했던 항로에 접어들고 오토파일럿을 작동시켰지만 좌석 벨트 표시등은 아직 끄지 못했다. 고도를 오히려 더 낮춰야 했나. 떠나기 전 세웠던 운항 계획에 조금 후회가 남았다. 기체 흔들림이 완전히 소강되기 시작한 것은 10분이나 더 지나서였다.

“한동안 모스크바 좀 안 걸릴 줄 알았더니. 에이고.”

부기장이 천장에 달린 좌석 벨트 표시등을 끄며 한숨을 쉬었다.

“다들 기피하는 노선인가 봅니다.”

“악명 높죠, 우리 회사에서는. 투입된 항공기들도 대부분 낡았고 9시간이나 걸리는데 교대도 없지. 공항 시설 열악하고 겨울에는 활주로도 자주 얼죠. 직항 노선 놓고 나서 제대로 흑자 전환을 못 해 골칫덩어리예요.”

“저도 한국에서 가는 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불안하네요.”

“항로도 러시아 애들이 소비에트 시절에 제멋대로 그어 놓은 데가 많아서 직선으로 못 가요. 서유럽 들어갈 때랑은 또 느낌이 완전 다르죠.”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독일에서 모스크바는 단거리에 속했기에 까다로운 노선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오늘처럼 곳곳에 뇌우가 잔뜩 끼어 있는 항로는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확률적으로 모든 비행기는 1년에 한 번 정도는 낙뢰를 맞는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그 즉시 추락하거나 감전되지는 않는다. 항공기는 전류를 외부로 흘려 넘기도록 만들어져 있다. 즉, 10억 볼트의 전압이 흐른다 해도 날개 끝에 달린 방출기로 즉시 방전해 버리기에 승객들은 낙뢰에 맞았다는 사실 자체를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낙뢰는 당연히 피하는 것이 좋고 가능하면 뇌우가 없는 지역을 비행하는 것이 좋다. 항공기는 늘 예측할 수 없는 사고를 유발하고 노후한 부품들은 그 확률을 수십 배로 높인다. ‘무사고’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겨우 얻어 낸 행운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밥은 먹을 수 있겠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콕핏 밖 카메라에 잡힌 객실 사무장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기장님, 저희 기내 서비스 개시해도 될까요?”

그녀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대신 뜨거운 음료는 생략하시죠. 혹시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두 분 식사 뭐로 하시겠어요? 한식은 소고기 조림 있고요. 양식은 라자냐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는 양식으로 하죠. 부기장님이 한식 드셔도 됩니다.”

내 말에 부기장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크…… 역시 기장님이랑 편조 되면 이게 너무 좋아. 저 그럼 한식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무장님.”

“네.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콕핏을 나가는 그녀를 부기장이 애매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문이 닫히고 다시 둘만 남자 그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 비행이래요.”

“아, 아시는 분이셨군요. 지상 근무로 바꾸시나 보죠?”

내 말에 그는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예 관둔대요. 애들 때문에 힘들어서 안 되겠다고. 저랑은 거의 입사 동기급이라서 자주 비행 나갔었어요. 아깝죠. 12년 넘게 다녔는데.”

“제가 그런 쪽으로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애들은 유치원이나 학교에 보내면 되지 않나요? 남편분도 계실 텐데 사무장님이 일을 관둬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나는 사실 예전부터 궁금했었다. 전에 있던 회사에서는 경력 30년의 오십 대 크루들도 많았는데 유독 이 회사의 객실 크루들은 젊고 어린 동료들이 많았다. 그 이유에 대해 제대로 짚지 못하고 있었다.

“손이 많이 가요, 한국에서 애 키우는 거는. 방치하면 뒤처지니까. 학원이나 과외 같은 거 챙길 것도 많고. 부모가 옆에서 신경 써 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비행을 나가면 며칠씩 집을 비워야 하니까 힘들죠.”

“같은 이유로 그만두시는 남자 승무원이나 기장님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하하. 그렇죠. 그…… 참, 아직까지 그래요. 저도 뭐 할 말은 없네요.”

나는 지난번 방콕 비행을 함께 했었던 또 다른 객실 사무장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쌍둥이 아이들 때문에 지상 근무로 돌려야 하는데 일 욕심에 그게 잘 안 된다며 속상해하던 그녀의 한탄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죄책감을 느껴야 했었다.

또 한편으로는 오사카 비행을 마지막으로 화려한 은퇴를 하던 박종대 기장을 떠올렸다. 40년간 좋아하는 비행기를 몰았고 마지막 순간에는 승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행복하게 떠난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같은 직업 소명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 끝이 참으로 다른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많은 것이 바뀌어 가고 있는 세상이었지만 여전히 그 속도에 차이가 드러나 보였다.

우월감이나 동정심 같은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살아온 곳에서 차별을 받았고 동성 연인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사회에서는 약자에 속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그녀가 가졌던 12년의 경력이 동료로서 안타까웠고, 그녀를 대신해 다시 누군가가 쌓아야 할 사회적 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부기장의 랜딩으로 모스크바 공항에 무사히 도착한 A380의 엔진이 멈췄다. 다행히 낙뢰를 맞거나 하는 사고는 없었지만, 착륙 전 마지막 1시간 동안 기체 흔들림이 심해 두통을 호소하는 승객들이 많았다. 최악의 컴플레인을 받으며 뛰어다니던 객실 팀은 착륙 후 진이 다 빠진 표정이었다. 모스크바는 벌써 겨울이 온 듯 서늘함을 띠고 있었다.

“저희 쇼업 시간을 10분만 당기죠.”

착륙 후 콕핏에 들어온 사무장과 부사무장에게 귀국 비행 전 브리핑 스케줄을 변경하겠다고 알렸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부기장이 그 이유를 추정하며 내게 운항 일지를 건넸다.

“러시아 애들 정비하는 데 시간 걸릴 것 같아서 그러시죠?”

“음…… 뭐, 그런 이유도 있고요. 나가서 저녁이나 같이하시죠.”

“그럴까요, 그럼.”

그와 함께 공항을 빠져나간 뒤 시가지에서 러시아 고기 요리를 먹었다. 나는 부기장의 이런저런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들어 주고 나서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상의했다. 부기장은 흔쾌히, 아니 사실은 더 기뻐하며 내 계획에 찬성해 주었다.

호텔로 돌아온 뒤 오늘따라 조용한 휴대폰을 살펴보며 내가 놓친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통화 이력과 메시지 함을 확인했지만 한재이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그는 독일에, 나는 러시아에.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위해 수천 킬로를 날아와 있었지만 나는 틈틈이 그를 생각했다.

한재이는 싸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조민우 부기장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에게 각을 세웠다. 직장 동료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민망한 이야기를 굳이 연인에게 말했어야 했나. 그래, 어쩌면 정말 그게 옳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주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아 보자면 나는 꽤 비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재이가 기젤라와 보냈던 그 1년의 시간을,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그들만의 서사를 사실은 내내 질투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굳이 부기장의 이야기를 해 주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내게도 네가 모르는 비밀을 만들어 두고 싶다는 저속한 욕망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것이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낭패감과 함께 자그마한 희열이 스며들었다. 질투로 일그러진 한재이의 표정을 보며 묘한 카타르시스까지 느꼈었다.

구역질 나지만 그게 나였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씩 의식의 맨 밑바닥을 들여다볼 때는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때 너한테는 결혼할 사람이 있었으니까.’

원망에 가까운 협박이었다. 그 말을 듣고 한재이는 눈치채 버렸던 걸까. 그래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 주었던 것일까.

문득 그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속마음의 깊이를 재어 보았다. 다른 누구보다 깊었지만, 여전히 보여 줄 수 없는 부분은 존재한다. 한재이 역시 그런 영역을 내게서 지켜 내고 있는 것일까. 서로가 그 끝을 보게 되면 사랑이 식고 등을 돌리게 되는 걸까.

우리의 관계에 그어져 있는 경계가 모호하다. 친구로서 지냈던 선을 모두 지우고 났더니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멋모르고 손을 대었다 그에게 거절당하는 날이 오면 나도 상처를 받겠지. 그렇게 헤어지고 만남을 반복하는 게 인생이라면 내 인생은 너무 짧게 끝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짧은 레이오버였지만 여독이 좀 풀리셨길 바랍니다. 운항 브리핑에 앞서 드릴 말씀이 좀 있습니다.”

이틀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에 앞서 전체 브리핑 시간이 되었다. 10분 일찍 쇼업을 당긴 덕에 시간적 여유가 좀 있었다. 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모인 크루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그중 한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사무장님.”

“아, 네.”

단정한 올림머리에 조금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지목하고 내가 쇼업 시간을 당겼던 원래 목적을 털어놓았다.

“오늘 마지막 비행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은 따로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오늘 일찍 모여 주시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어머. 아, 네…….”

그녀는 뜻밖에 전개에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친분이 없는 내가 자신의 퇴사를 아는 것 역시 의아한 듯했다.

“12년간 비행하셨는데 이렇게 끝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요. 들어오는 플라이트에서도 터뷸런스가 심했는데 사무장님 덕에 안전사고 하나 없이 착륙할 수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저보다 회사에 훨씬 오래 계셨겠지만, 일단 오늘 제가 CRM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 회사를 대표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기장으로서 또 동료로서 오늘 사무장님의 마지막 비행을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끝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거기까지 말한 나는 부사무장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미리 준비해 온 선물을 꺼내 사무장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무장님. 이거는 저희가 원래 준비하려고 했던 건데 기장님이랑 부기장님이 돈을 좀 보태 주셔서 많이 업그레이드됐어요. 하하.”

어제 부사무장과 몇몇 크루가 모스크바 쇼핑몰에서 사 온 스마트 워치가 예쁘게 포장된 채 사무장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이 따로 선물을 준비할 거라는 이야기는 들어오던 날 저녁을 먹으며 부기장에게 전해 들었다. 기왕 살 거 가장 좋은 모델로 사 오라고 돈을 보태 준 건 비밀이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드러나 버렸다.

선물을 받아든 사무장은 부사무장의 손을 꼭 잡고 무언가를 말하려다 목이 메는지 말을 삼켰다. 둘은 원래 친한 듯 보였다.

“감사했습니다, 사무장님.”

“수고하셨어요.”

“사무장님, 고생 많으셨어요.”

다른 객실 팀 크루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박수를 쳤다. 그들에게는 이제까지 그녀가 캡틴이고 리더였을 것이다.

“아, 음음. 감사합…….”

그녀는 인사를 하려다 한번 머뭇거렸다. 점점 표정 관리가 되지 않던 사무장의 눈시울이 빨갛게 익어 가기 시작했다.

“어머, 나 어떡해. 웬일이니. 어후, 눈물 나려고 하네…….”

사무장이 살짝 뒤로 돌아서서 화장이 번지지 않게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다시 정렬된 자세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옷매무새도 고쳤다.

“음음.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기장님. 예상을 전혀 못 해서 눈물이 좀 나네요. 그래도 근무 시간이니까 개인적인 감상은 플라이트 끝난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운항 브리핑하시죠.”

사무장은 마지막까지 프로의 모습을 보여 주며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그래서 그녀가 이제부터 하려는 다른 일도 무리 없이 잘 해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전체 브리핑이 끝나고 게이트로 이동하는 와중에 부기장이 옆으로 와 말을 걸었다. 보기보다 내 성격이 많이 좋아 보인다는 말에 소리 내 웃었다.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한국 와서 많은 게 바뀌네요.”

다정한 이벤트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영향인가. 그래도 내가 한 거라곤 고작 10분 정도의 시간을 빼 준 것에 불과하다.

“저 처음에 기장님이랑 같이 비행했을 때 기억하는데. 그때랑은 분위기가 많이 변하셨어요. 뭐지, 그 말투도 좀 유연해지신 것 같고요.”

“아, 그건 정말 반가운 말인데요? 안 그래도 고치려고 노력 중이었습니다.”

“하하하. 아직 좀 더 고치셔야 할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좋네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던진 게이트 밖으로 우리가 타고 갈 A380이 묵직한 몸체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 역시 안전하고 사고 없는 비행이 되길 바랐다.

* * *

모스크바 비행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한재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통화를 하지 못했다. 현지에서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그는 쌓여 가는 나의 부재중 통화에도 콜백을 바로 주지 못했다. 간간이 들어오는 메시지들을 보며 그가 살아는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잠시 신호가 걸린 틈을 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목소리 듣고 싶어. 많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한재이의 주의를 끌어 보기 위해 낯 뜨거운 표현까지 써서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신호가 걸리는 동안에도, 그보다 한참을 더 달려 빌라 앞 편의점을 지날 때까지도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사 들고 귀가하는 동안에도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암전된 화면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깨어 있는 시간 내내 그를 기다렸다.

혹시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벨 소리 모드로 전환시켜 놓았다. 잠귀가 밝아서 진동 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자신감마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작은 소음에도 청각은 예민하게 머리를 깨웠다.

그렇게 몇 시간이 더 흐르고 마침내 누군가가 내 휴대폰을 울렸다. 그러나 기다리던 사람은 아니었다. 안부를 물어오는 크리스와의 짧은 통화를 끝내고 다시 몇십 분을 뜬눈으로 기다렸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메시지조차 들어오지 않는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보다 잠이 들었다.

한재이와 통화가 된 것은 그로부터 5시간이 지나서였다. 새벽 동이 트기 전 비몽사몽간에 확인한 휴대폰에 실망해 무작정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기가 생겨서였다. 이렇게까지 나를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조금의 심술이기도 했고.

-응, 서진아. 아직 안 잤어? 아님 깬 거야?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금방 받을 거였으면서 연락도 없었다니. 그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왜 전화 안 했어. 기다리는 거 알면서.”

그래서 볼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거기 새벽이잖아. 너 깨울까 봐. 나도 종일 시달리다 방금 클라이언트랑 헤어져서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야.

“무슨 집?”

-내 아파트. 아직 비어 있어. 조금 거리가 있어도 호텔보다 편할 거 같아서 거기서 지내는 중이야.

“아직도 정리 안 했어? 팔 거라고 했잖아. 집 내놓은 거 아니었어?”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다. 처분한다더니 여전히 그대로 두고 있나 보다. 들어가서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면 가구도 그대로 있다는 이야기인데. 다 버리고 온 사람처럼 굴더니 돌아갈 곳이 있었다는 사실에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그가 아직 독일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고.

-왜 또 이렇게 또 날이 서 있어. 전화 안 받아서 화났어? 미안해. 근데 진짜 너무 바빴어. 종일 밥도 못 먹었다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고 있는 와중이야.

그가 다른 말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자 속에서 바스락거리던 불씨가 더욱더 번지기 시작했다. 바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거의 며칠째 생존 신고 정도의 짧은 메시지에 ‘전화할게’ 해 놓고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그의 무성의함에 나는 꽤 화가 나 있었다.

“메시지 정도는 보내 줄 수 있잖아.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좀 해.”

-나는 매번 수십 시간을 그렇게 너 기다려. 그런 거 따지기 시작하면 너 나 못 이긴다.

“그거랑 같아? 난 비행 중이잖아.”

순간 말을 해 놓고도 아차 싶었다. 비행 중 전파가 닿지 않는 건 맞는 말이었지만 기내 인터넷을 쓰면 얼마든지 연락할 수는 있다.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라기보다는 조종에 집중해야 하니 내가 연락을 안 한 것이 맞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 말은 마치 한재이가 하는 일을 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중간에 휴대폰을 좀 봐도 큰일이 아닌 듯 치부하는 것이다. 그 말을 뱉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따져 묻지 않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너무 피곤하다, 서진아. 화내지 마. 나 오늘 진짜 힘들었어. 좀 봐주라. 한국 가서 얘기해.

고단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점점 흐릿해졌다. 피곤하겠지. 종일 터진 현장을 수습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녔겠지. 거기다 대고 나는 연락이 안 된다는 이유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순간 어른스럽지 못한 내 행동을 자책했다.

동시에 제 앞에서 체면을 차리지 말아 달라는 한재이의 말을 떠올리며 속마음을 더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그런 일은 너와 안 어울린다고 했잖아. 그의 새로운 직업이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아 자꾸만 티를 내고 싶었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매번 그가 일에 치여 힘들어할 때마다 응원과 격려 대신 불만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지켜야 할 선이 없어져 버린 대신 약간의 무례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한재이 인생에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이제 막 시작하는 사이일 뿐인데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이미 15년 된 연인들처럼 짙고 무거웠다. 그런 모순으로 벌어지는 간극에 불화가 스며드는 것은 막아야 했다.

“알았어. 와서 얘기하자. 그래도 저녁은 먹고 자. 그만 쉬어.”

-조금 더 통화해. 나도 목소리 듣고 싶었어. 넌 이제 일어난 거야?

오랜만에 듣는 애정 표현에 가슴 한구석에서 찌르르한 통각이 느껴졌다.

“몰라. 마음 상해서 잠도 안 와.”

다정한 온도를 찾아간 그의 목소리에 안심했던 탓인지 나도 모르게 또 볼멘소리를 입 밖에 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유치하고 어른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언짢은 이유의 절반은 스스로에게 있었다.

-미안해. 빨리 갈게. 화내지 마.

나는 그에게 조련되고 있었다. 달콤하고 뜨겁게 녹았다가 그가 원하는 모양대로 굳어져 이제는 도저히 예전처럼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재이에게 너무 빠져 버려 단 3일도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가 애처롭고 가여웠다.

바닷물처럼 마실수록 더 애타게 갈구하게 되는 그의 애정이 결국엔 나를 죽음을 몰고 갈 것 같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바닷물을 마셔 버렸다.

그와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이 터 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보내는 시간을 상상해 보니 메마르고 버거웠다. 외로움을 타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우리는 친구도 가족도 없는 이곳에서 서로만 부둥켜안은 채 살고 있었나 보다.

한재이 역시 혼자 남아 나를 기다렸을 때 외로움을 느꼈을까.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그의 고통마저 멋대로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나는 사랑이라는 중증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과연. 인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이 병의 전이 속도가 상상을 뛰어넘는다.

* * *

한재이가 한국으로 돌아온 날은 그로부터 다시 3일 뒤였다. 그 통화 이후로도 그는 여전히 바빴지만 일을 마치고 나면 늦게라도 메시지를 보내 주고 다음 날 일정을 알려 주는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나는 지나친 관심으로 그를 구속하지 않기 위해, 그는 무관심으로 나를 방치하지 않기 위해 각자가 노력했다. 언제든 반대의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서로 너무 잘 알았으니까.

사랑에 빠지는 속도는 제각기 다르다. 첫눈에 반해 동시에 시작하게 된 관계라 할지라도 각자가 가진 무게만큼 누군가는 빠르게 또 누군가는 천천히 빠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시작한 이 관계에서 그와 나 둘 중 누가 먼저 심연에 도달할지 묻는다면 당연히 내가 될 것임이 자명했다.

질식할 것 같은 그에 대한 감정으로 나는 이미 폐부가 터질 것 같았다.

상하이 비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미 한재이가 집에 도착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공항에서 빠져나가는 발걸음이 바빠졌다. 운전을 하는 동안에도 빌라 계단을 올라가는 와중에도 한 박자씩 더 빨리 뛰는 심박에 피가 빠르게 돌고 있었다. 이윽고 도달한 현관문을 열고 곧바로 침실로 들어간 나는 곤히 자고 있는 그의 위로 올라가 몸을 겹쳤다.

따뜻하다. 20시간 넘게 휘발되고 남은 향수 냄새도 옅게 맡아졌다.

“음…… 왔어?”

한재이가 깨어나 두 팔로 나를 안았다. 자는 동안 올라가 있었던 그의 체온이 등과 허리에 전달되었다. 부드러운 뺨이 내 귓불을 스치며 그가 속삭였다.

“역시 집이 좋다.”

그 말에 요 며칠 불안했던 마음 하나가 가라앉았다.

“여기가 네 집이 맞긴 해?”

“네가 있는 곳이 집이지, 뭐.”

대답하는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어 나도 모르게 한재이의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꽉 맞물린 두 육체로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재회의 여운을 나누었다.

“유니폼 입고 날 덮치는 건 반칙이야. 이거 봐, 벌써 이렇게 됐잖아.”

그가 웃으며 허리를 슬쩍 위로 들어 올렸다. 나는 묵직하게 허벅지에 와 닿은 그것을 다리 사이로 밀어 넣으며 은근히 그의 하체를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할래?”

그러자 한재이가 허리를 감았던 손을 내려 내 엉덩이를 쥐었다. 그대로 다시 제 허리를 올리며 성행위를 암시하는 몸짓을 보여 준다.

“새삼스럽게 물어봐 주니까 은근히 더 흥분되는데.”

미소를 건 채 나를 쳐다보는 그의 표정이 야릇하게 바뀌었다. 상체를 일으켜 유니폼 넥타이를 끌어 내리는 나의 허리를 그가 단단히 받쳐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허리를 들썩이며 과시했다.

“나 지금 자고 일어나서 힘이 넘치는데 괜찮겠어?”

“나도 많이 쌓여서 만만치 않을 텐데.”

한재이가 쳐올리는 허리 짓을 함께 타며 둔덕처럼 솟아오른 그의 성감대를 문질렀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함께 목 안에서 삼켜지는 그의 신음에 바지 버클을 풀었다. 최소한의 탈의와 가장 효과적인 전희로 섹스가 시작되었다.

* * *

세 시간 정도 이어진 격렬한 섹스 이후 나는 다시 한재이를 빼앗겼다. 쉼 없이 울려 대는 그의 휴대폰은 나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는지 실감 나게 했다.

산일 테크는 한재이 회사의 가장 큰 고객이었다. 그들은 프랑크푸르트와 가까운 오펜바흐에 물류 센터를 두고 있었는데 그곳이 단체로 직원들에게 소송이 걸렸다. 총 80명의 직원 중 30명이 넘는 직원들이 법정 노동 시간을 지키지 않고 부당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 하청 업체를 고용하여 뒤집어씌우기 때문에 본사에서 신경 쓸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수주 받는 물량이 산일 테크 하나인 그 하청 업체와의 자본 관계를 독일 판사 앞에서 전면 부정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독일 법원은 파산 신청을 한 하청 업체 대신 산일 테크에 도의적 책임을 묻고 있었고 본사는 생각지도 못한 일로 골치 아파지게 된 것이다.

동네 슈퍼를 상대로도 밥 먹듯 소송을 거는 국민성을 우습게 본 것일까. 독일에서는 노동자가 소송을 걸면 결코 기업에 유리하지 않다. 지루한 싸움이 몇 년간 계속될 테고 그동안 기업은 절대 해당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없다.

“아니요, 계약서는 제가 이미 살펴봤는데 엉망이었습니다. 한국어로는 뉘앙스가 좀 다르지만, 원문으로는 충분히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었습니다. 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모든 조건을 상정해서 계약서에 써넣었어야죠. 계약서에서 정의되지 않은 항목에 대한 해석은 판사가 합니다. 그 판사가 지금 전혀 우리 편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그의 모습은 스트레스에 찌들어 있었다. 섹스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담배를 찾았다. 나는 그에게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를 쥐여 주고 구겨진 셔츠 단추를 여며 주었다. 한재이는 그런 내 뺨을 한번 쓰다듬고서 발코니로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소파 위에 몸을 둥그렇게 말아 앉았다.

꽉 닫힌 문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그는 사건 자체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고 클라이언트는 피고인들을 괘씸죄로 물 먹일 방법을 찾고 있었다. 접점이 쉽게 찾아질 리 없어 보였다.

내가 아는 한재이 변호사는 의뢰인을 편들어 주기 위해 돈을 받는 사람이 아니다. 지루한 싸움으로 더 큰 비용이 들 것 같은 케이스라면 차라리 합의하거나 최소한의 벌금으로 끝내는 것을 선호한다. 개인의 복수나 정의 구현 같은 것에 큰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예전부터 그가 법인만을 상대했었던 가장 큰 이유이다.

“진짜 말 안 통하네.”

그가 거실로 다시 들어왔다. 쌀쌀한 가을바람을 한껏 묻히고서 내 옆에 와 앉았다. 여미어 준 셔츠 사이로 맨살이 드러나 보였다. 시간은 벌써 저녁때가 훨씬 지나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안. 통화가 길어졌네. 밥 먹으러 나갈까?”

“피곤하지 않겠어? 내일 또 일찍 출근해야 한다며.”

“가까운 데로 가지 뭐. 아니면 배달 시켜 먹을까? 치킨?”

우리는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 먹지 않았지만 둘 다 치킨은 좋아하게 되었다. 한식을 잘 먹지 않는 나를 간단히 배불리고 싶을 때 한재이가 자주 쓰는 방법이다. 그는 예의 그 붉은 소스를 선호했고 나는 간장 베이스를 좋아하니까 늘 반반씩 섞어서 시켰다. 주문을 마친 한재이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확인했다.

“토요일은 같이 장 보러 가자. 냉장고도 텅텅 비고 맥주도 하나밖에 없어. 내가 없으니까 집안 살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

그가 농담을 던지며 내 볼을 톡톡 건드렸다.

“이번 주말은 쉴 수 있는 거야?”

“하하. 누가 보면 넌 집에서 종일 나 기다리는 사람인 줄 알겠다. 일요일까지는 같이 쉬자. 너도 오랜만에 주말 오프인데.”

“그럼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 있어.”

“그러고 싶어?”

“응. 그러고 싶어.”

나는 한재이를 쉬게 해 주고 싶었다. 독일 출장 때 전화로 그를 괴롭혔던 일에 대한 사죄의 의미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여전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 먼지 쌓인 오해를 방치한 채 그를 대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독일 집, 처분 안 할 거야?”

“음…… 안 그래도 그 얘기 하려고 했었어.”

그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목울대를 울려 나온 그의 저음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런 시선에 이런 목소리라면 나는 그저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 되었든 나는 이미 패배했다.

“3년 후엔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서. 너 지금 항공사랑 계약한 거 말이야.”

“응. 보통은 연장하지만, 또 모르지.”

“그냥 우리가 계속 한국에서 살 것 같지는 않아서. 너도, 나도 아직은 독일이 더 편하잖아. 거기 살지 않는다고 해도 왔다 갔다 하는 일은 많을 텐데 집 하나는 그냥 두었으면 해. 너도 편하게 머물 곳이 있으면 좋잖아. 열쇠 아직 가지고 있지?”

그러고 보니 한재이의 아파트 여분의 열쇠는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었지만 그렇게 쉽게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항공사가 파일럿을 채용하는 것은 일반 회사 같은 상시 채용이 아니니까. 저가 항공사로 옮기는 거라면 또 모를까, 대형 항공사의 기장 자리가 그렇게 자주 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항공사 체급을 유지한 채 한국으로 이직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행운이 갈려 들어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 그렇게 해.”

그래도 나는 한재이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었다. 혹시 또 모르지. 그때 또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나 때문에 잘나가던 직장을 버리고 온 사람 앞에서 고작 그런 이유로 불안감을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나갈게.”

치킨을 받아 들고 온 한재이가 식탁 위에 뒤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맥주 하나를 컵에 나누어 붓고 손으로 먹는 걸 싫어하는 나를 위해 포크와 나이프를 올려 두었다.

“뼈 없는 거로 시켰지?”

“그래, 걱정 마. 이 까탈쟁이야.”

그는 빈 접시 하나를 내게 건네고 딸려 온 무는 볼에 담았다. 나는 식탁에 앉아 한재이가 상차림을 끝내고 맞은편 자리에 앉기만을 기다렸다.

“먹어.”

그의 말에 맥주를 들이켜고 반으로 가른 치킨을 입에 넣었다. 겉은 바삭한데 살코기는 부드러웠다. 요즘 들어 제일 좋아하게 된 한국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고민 없이 치킨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은 독일에서 부모님 만났어.”

아직 식사를 개시하지 않은 한재이가 맥주잔을 쥔 채 말을 꺼냈다. 씹고 있던 고기를 먼저 삼켜야 했기에 나는 입을 열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계속 말해 봐. 속으로는 그렇게 대답 중이었다.

“거기까지 갔는데 안 뵙고 오는 건 자식 된 도리가 아닌 거 같아서 밖에서 저녁만 같이했어. 근데 후회해. 보지 말 걸 그랬어. 시간을 더 드렸어야 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 건가 싶기도 하고.”

“왜. 뭐라시는데.”

급히 입을 헹군 나는 말문을 열었다. 분위기를 심각하게 잡고 싶지 않은 듯 한재이는 옅은 미소를 걸고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머니는 별말씀 없으셔. 아버지가 문제야. 계속 멋대로 살 거면 자식 없는 셈 치겠다고 하시더라.”

“……그냥 죄송하다고 하지 그랬어.”

나는 두 번째 치킨을 이리저리 조각내며 입에 넣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서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 죄송하다고 했어. 그리고 자식 없는 셈 치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시라고 했어.”

“재이야.”

“네 말이 다 맞아. 사실은 아들이 남자와 연애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그런 거면서 대학교수라는 체면 때문에 그런 말은 못 하시지. 그래서 다른 핑계를 자꾸 대시는데 더는 설득 못 하겠어. 진보적이지 못하다면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하든가. 강단에서는 계몽주의자인 척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식 인생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관여하고 싶은 모순을 뭐라고 이해해야 해. 나도 지쳤어. 기다릴 만큼 기다려 드렸고. 아버지 말처럼 차라리 안 보고 사는 게 서로 좋을 거 같아.”

어느새 그의 맥주잔은 비어 있었다. 나는 식탁 위에 올려진 한재이의 손을 잡았다. 그 속상한 마음이 전류처럼 내게도 흘러들어와 똑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한재이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나 사이를 오고 가는 통증이다.

그들은 자꾸만 엇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진짜 피가 이어진 부자지간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인지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혹시라도 전자의 이유일까 봐 선뜻 위로조차 해 줄 수 없었다.

네가 뭘 알아.

그렇게 물어본다면 나는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한재이의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도 없었다.

* * *

오랜만에 둘 다 쉬는 날이 겹친 주말, 우리는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식어 가는 공기는 계절감을 느끼게 하고 끝없이 늘어지는 육체의 고단함은 어제의 정사를 떠올리게 했다.

최근 들어 우리의 섹스는 집요하고 가학적이었다. 연달아 이어진 대립과 불안이 헤집어 놓은 틈을 메꾸려는 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더 격렬하고 열성적으로 서로의 몸에 집착했다.

그것은 정말 집착이 맞았다. 한재이는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처럼 몇 번이고 내 안에 삽입하고 사정하기를 반복했다. 받아 내는 역할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내게 가학적 행위에 대한 페티쉬가 있었던 걸까. 밑이 헐고 쓰라린 와중에도 꼬박꼬박 토정을 하며 오르가슴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섹스도 대화의 일종인데 그렇게 따지자면 나는 꼼짝없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두라는 말 한마디면 곧바로 모든 행위는 중단되지만 나는 쉽게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렇게 기묘한 기 싸움을 하는 것조차 흥분이 되어 어제는 마지막을 어떻게 끝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직 일어나지 마.”

내 움직임을 느낀 건지 등 뒤에서 한재이의 커다란 팔이 감겨 왔다. 나체로 잠에서 깨어 연인의 살갗을 느끼는 아침은 평화로웠다.

“어제 나 몇 시에 잠든 거야? 기억이 안 나.”

“음…… 3시쯤? 너 기절했었어.”

“뭐?”

나는 놀라서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가 다시금 뒤에서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기력이 소진돼서 축 늘어졌더라고. 정신 잃은 사람 데리고 계속하면 나쁜 놈 될 거 같아서 그대로 재웠어. 이제 일어났으니 다시 할까?”

그 말에 순간적으로 몸을 굳어지며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여기서 더 하면 기절이 아니라 토를 할 거 같았다. 그러자 한재이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 웃었다.

“반응이 너무 싸늘하다. 어디 가서 좋은 거 좀 먹여야겠는데?”

“내가 싸늘한 게 아니고 네가 과해. 밥 먹고 자는 거 제외하면 요 며칠 섹스밖에 안 했잖아.”

“너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 그래도 오늘은 그만해. 진짜 죽을 거 같아.”

“그래, 나도 죽을 거 같아. 아침이라 더 해. 일어나자마자 벗고 있는 너랑 닿으니까 미치겠어.”

뭐라 저지할 틈도 없이 한재이가 다시 내 몸 위로 올라왔다. 헝클어진 그의 머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멋대로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전희를 시작했다.

“하아…….”

한숨을 쉬었지만 그뿐이다. 멈추라는 말을 하면 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의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뒤로 꺾은 채 쾌락에 잠겼다.

* * *

1시간이 지난 후 한재이를 침대 밖으로 끌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딱 한 번씩만 사정하고서 그대로 욕실로 데리고 가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주말 내내 쉬게 해 주려고 집에 있자고 했던 것인데 그가 쉴 생각이 없어 보여 차라리 밥이라도 먹으러 나가는 게 나을 듯했다.

메뉴를 고르게 해 주었더니 나를 끌고 간 곳은 장어 구이집이었다. 한재이의 의도가 너무 뻔히 보인다. 점심 특선으로 딱 100그릇만 판다는 유명한 집이라며 머뭇거리는 내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우리를 맞은 점원이 이름을 물었다.

“아, 예약하셨어요? 그럼 안으로 들어가세요. 예약 손님 두 분이요!”

그 말에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한재이를 쳐다보았다. 대체 언제 전화해서 방까지 잡아 놓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 있는 내내 옆에 붙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나.

그는 웃으며 나를 끌고 개인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없이 수상한 한재이가 맞은편에 앉아 메뉴판을 건넸다. 가장 무난해 보이는 장어 덮밥을 고르고 따뜻한 차도 주문했다. 방석을 깔고 앉는 온돌방의 열기가 전해져 와 좋았다.

“근데 너 장어 먹어 본 적 있어?”

“응. 일본 비행 나갔을 때 몇 번.”

“아, 그랬겠네. 여기 맛있어. 비리지도 않고. 입맛에 맞으면 장어만 더 추가해서 시켜도 돼.”

남자 둘이서 점잖게 앉아 섹스를 더 오래 즐기기 위해 특정 물고기를 잡아먹는 기분이 이상했다. 정력에 좋다는 소문은 오래 살게 해 준다는 소문과 함께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인간의 모험심 그 바닥을 시험한다. 사슴의 생피를 빨거나 살아 있는 자라를 구워 먹는 등의 야만 행위도 그 이유만 붙으면 무한한 용기가 솟아나는 것이다.

딱히 그런 것에 편견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미식 외의 이유를 음식에 붙이는 걸 나는 선호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이 집의 장어 덮밥은 요리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했다.

“오해야. 여기 맛있어서 데려온 거야.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내가 너를 먹이는 이유를 그런 식으로 갖다 붙이지는 마.”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기왕 먹는 거 그런 쪽으로도 도움이 되면 좋겠지. 그러니까 많이 먹어 둬. 앞으로는 안 봐줄 거야. 또 정신을 잃으면 이제는 기절할 정도로 너무 좋았다 생각하려고.”

농담이었겠지만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의 말에 설득이라도 당한 건지 아니면 맛이 너무 좋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실제로 장어를 더 추가해서 먹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한재이가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부터 네가 잘 먹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

“양어머니도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 내가 식성이 까다로우니까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게 드물어서 그렇대.”

그는 그 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를 생각하는 듯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덮밥 한 숟갈을 먹어 치운 뒤 깨끗하게 비운 내 몫의 그릇을 옆으로 밀어 두었다. 그리고 찻물로 입 안을 헹군 뒤 휴지로 입을 닦았다.

“왜?”

한재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자 예상 밖의 질문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계속해서 양어머니라고 부르는 건 친어머니가 따로 있으니까 구분해 두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딱히 해 줄 대답을 찾지 못했다.

“글쎄…… 별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닌데.”

독일어로 그들을 호칭할 때 나는 이름을 불렀다. 칼, 그리고 안지. 크리스 역시 부모님의 이름을 부를 때가 많았으니 위화감이 들지는 않았는데 한국어로는 어쩐지 양아버지, 양어머니라는 호칭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한국어를 내내 들었던 사람은 지구상에 한재이 외에 없었다.

그와 내가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는 곳이 가까웠다거나 나이가 같았다는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사실 무엇보다 큰 기여를 한 것은 언어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려주지 않았던 나의 모국어. 그것은 어릴 때부터 우리만을 이어 주는 암호처럼 시도 때도 없이 그와 나를 묶었다.

그래서 이따금 한재이는 내가 미처 의식하지도 못했던 것들에 대해 묻곤 했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내가 그들을 왜 아직도 양부모라 칭하고 선을 긋는지 궁금해했다. 당사자들이 알았다면 매우 슬퍼했을 것이다.

“섭섭해하실 거야. 네가 아직도 내외하고 있다는 걸 아시면.”

“내외라기보다는…… 그냥 계속 이렇게 불러 왔으니까 고치지 못하겠어. 그리고 양부모님이 맞긴 하잖아. 친부모는 아니니까.”

“가슴 찢어지는 소리 한다.”

“네가 왜.”

“남 일같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래. 너희 부모님이 22년을 노력하셨는데 아직도 네가 이런 걸 보면 나는 한참 멀었겠다 싶어서.”

그는 상반신을 뒤로 젖히고 느슨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바람에 셔츠 단추가 빳빳하게 잡아당겨지며 한재이의 흉곽이 드러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는 경우가 달라.”

“어떻게 다른데?”

그가 슬그머니 기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어서 그 민망한 대답을 해 보라며 종용했다. 얄미웠지만 나도 별거 아닌 거로 쑥스러워 얼굴 붉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한재이만큼 대단한 로맨티스트는 아니지만 듣고 싶어 한다면 들려줄 수 있다.

“다르지. 네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어도 이미 나 혼자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잔잔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내 대답의 의미를 찬찬히 되짚어 보는 듯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늘 왠지 모르게 의문이 드는 점이 있었는데 말이야.

“혼자 좋아했다고 하면서, 나한테 고백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그가 사념 속에서 끄집어낸 그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잠시 찻잔으로 눈길을 돌리고 입술을 축였다. 한재이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고 거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왜 그게 궁금한데.”

“그냥 생각을 좀 해 봤어. 처음엔 고백할 정도까진 아니었나 보다 하고 넘겼는데 너 한국으로 들어온 거.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나 때문인데 그 무게를 따지면 앞뒤가 맞지 않잖아. 그래서 그냥 내가 전혀 힌트를 주지 않아서라고 생각했어. 가능성이 제로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고. 근데 또 그런 생각 하니까 좀 아찔하더라고.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었잖아. 너와 나 그리고 기젤라까지. 그걸 제동시킨 그녀에게 고맙긴 한데 여전히 의문이 드는 건.”

거기까지 말한 한재이가 잠시 머뭇거리며 다음 말을 이을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결심이 선 듯 무거운 말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우리 사이를 확신할 수 있었을까. 마치 당사자에게서 확인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조용히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시선 처리를 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내 눈빛을 고스란히 들켜 버렸다.

“…….”

수 초간의 정적 속에서 우리는 표정을 읽기 위해 바쁘게 서로를 훑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는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빠르게 펼쳐지며 필름을 감고 있었다.

‘우리 페어플레이해, 맥시. 오늘 자리 비켜 줄 테니까 고백해 보는 건 어때?’

한재이의 감정을 두고 기젤라와 치열한 눈치 싸움을 했던 그날, 내가 했던 선택은 고백이 아닌 방관이었다. 그녀를 만났던 일을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짝사랑 중이었던 내가 가진 선택의 자유였고 연인이 된 지금은 선의의 침묵이었다.

그걸 숨긴 이유를 이제 와 따져 묻는다면 사과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불만이 돋아나고 있었기에 섣불리 대화를 시작할 수 없었다. 그의 두문불출했던 독일에서의 일주일간 행적에 의문이 생겼다.

잠시 그대로 나를 기다려 주던 한재이가 무언가를 포기한 듯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예의 그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 그냥 궁금했어. 표정 좀 풀어.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그가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코트를 끌어 내리고 여전히 앉아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조련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 기분은 어떤 여유를 부릴 처지가 못 되었다.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이 불만의 감정이 못내 찝찝하게 마음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다.

“독일에서 기젤라 만났어?”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나를 보며 한재이 역시 입가에 걸고 있던 미소를 거두었다. 그리고 조금은 서늘하게 물었다.

“왜 그런 예상을 하는지 이유가 궁금하네.”

묻는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를 떠보는 듯한 그 말투에 짜증이 솟구쳤다. 섹스와 인내로 겨우 봉합시켰던 상처가 또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말 돌리지 마. 둘이 만났냐고 묻고 있잖아.”

정색을 한 내 말투에 한재이가 한숨을 쉬었다.

“너는 그게 중요해? 다른 할 말은 없어?”

또 시작이다. 서로 내어 주지 않으려 대답은 피하고 꼬리잡기만 하는 대화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없어. 그러니까 너도 내 질문에 대답해. 둘이 만났냐고.”

점점 더 끓어오르는 내 불만의 원인은 명백했다. 독일에서 전화도 받지 못하고 바빠서 메시지조차 보내 주지도 않았던 그의 행동이 괘씸해서였다. 종일 시달려서 밥도 못 먹었다 할 때는 언제고 내가 없는 곳에서 전 약혼녀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에 섭섭함과 분노가 몰려왔다.

“그래, 잠깐 만났어. 아버지가 기젤라에게 몇 번 연락을 했나 보더라고. 부모가 저지른 일 대신 사과는 해야 하잖아. 전화로 하기엔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잠깐 찾아갔어. 그게 다야. 화내는 건 질투인 거야, 아니면 날 의심해서인 거야? 어느 쪽이든 여기선 하지 마. 집에 가서 해. 일어나.”

그가 다시 한번 코트를 건네며 나를 재촉했다. 그런 태도에 더 화가 났다. 먼저 시작한 건 저였으면서 모른 척 뭉개려는 저 태도. 들불처럼 번지는 감정을 나만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이 상황이 짜증 났다.

나는 벌떡 일어나 코트만 받아 들고 먼저 방에서 나가 버렸다.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않고 홀 테이블을 지나 카운터에 있는 직원에게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한재이가 급히 따라 나왔다.

“내가 낼게.”

“그냥 계산해 주세요.”

그를 무시하고 싸늘하게 대답하는 내 표정에 계산대의 직원이 눈치를 보았다. 한재이는 입을 다물고 내가 계산을 끝낼 때까지 뒤에서 기다렸다. 그러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혼자 식당을 나섰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향하는 와중에 생각이 났다. 자동차 키를 한재이가 가지고 있었다.

“키 내놔.”

“내가 운전할게. 너 지금 그 상태로는 바로 사고 나겠다.”

그가 차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잠시 생각 끝에 조수석에 올랐다. 한재이가 운전석에 올라 곧바로 집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한동안 침묵이 오가는 차 안에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의 감정을 살폈다. 이 분노의 주체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한재이의 감정을 의심하는 것은 조금도 아니었다. 기젤라에게 미련이 남았다면 내가 알아차렸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나는 정말 질투에 눈이 멀어서 이러는 걸까. 아니다, 이것은 배신감이다. 그 일주일간 그를 기다리며 애태웠던 내 시간에 대한 애도였다.

부모님을 만나고 왔었다는 이야기는 스스로 꺼냈으면서 기젤라를 만나고 왔다는 건 왜 숨겼을까. 분노는 불안으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파혼의 폭탄을 떨어트리기 직전 나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한재이에게 했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최근 들어 자꾸만 최악의 케이스로 돌아와 나를 괴롭혔다.

“만나서 무슨 얘기 했어?”

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와 자꾸 대척점에 서게 되는 이 상황에 머리가 아팠다.

“진짜 알고 싶어?”

“응, 알고 싶어.”

내 대답에 한재이는 곧바로 말을 이어 가지 않고 잠시 묵묵히 운전에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신호가 걸려 정차 중인 틈을 타 시작된 그의 딱딱한 그의 목소리는 그대로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기젤라 사무실 옆에 있는 카페에서 정확히 1시간 만났어. 혹시 미련이 있다면 다시 나를 잡아 보라고 아버지한테서 몇 번 전화 받았었나 봐. 정중하게 거절했고 끝난 사이라고 말씀드렸대. 그랬더니 어떻게 그렇게 갑작스럽게 끝낸 거냐고 물으셨다더라. 문득 이 싸움이 지긋지긋해져서 나한테 차였다고 말해 버렸나 봐. 뭐 그런 이야기였어. 너랑은 잘 지내고 있는지 묻더라. 더 듣고 싶어?”

“응.”

그러자 그가 조금 더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잘 지낸다고 했어. 그런 얘기를 하니까 또 기젤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사과했어.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요즘 난 늘 사과해. 모두에게 죄인이니까. 심지어 너한테도 원망을 듣지. 감히 너를 두고 결혼 같은 걸 할 생각을 한 나는 끝없이 벌 받는 중이야. 그래도 괜찮아. 그녀 덕에 그렇게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니까. 그랬더니 기젤라가 허탈하게 웃더라. 아직도 모르냐고. 맥시가 얘기해 주지 않았냐고 물었어. 더 듣고 싶어?”

나는 그다음에 그가 할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의 원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래. 듣고 싶어.”

“기젤라가 한국에 왔었을 때 이야기를 들려줬어. 와서 너와 나를 보고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중이었는데 결정적으로 이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순간이 있었다고 했어. 파혼할 때 거기까진 얘기 안 했었는데 문득 그게 궁금해지더라고. 그래서 그게 언제였냐고 물었어. 하아…… 너랑 호텔 1층에서 따로 만났을 때라고 하던데.”

“…….”

“정말 더 듣고 싶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고 어느새 차는 빌라 앞 골목길로 들어섰다. 감정 없이 운전을 하던 한재이의 손이 후진 기어를 넣고 차를 돌렸다. 한 번에 주차를 끝낸 뒤 사이드 브레이크 버튼을 누르자 기계적 제동이 걸리고 엔진이 꺼졌다.

운전대에서 손을 내린 한재이는 정면을 응시한 채 나를 기다렸다. 더 듣고 싶냐는 그 물음은 이 싸움을 계속할 자신이 있냐는 뜻과 같았다. 나는 고민했지만 피하지 않기로 했다.

“들어가서 얘기 좀 해. 나도 할 말 있어.”

그렇게 말하며 내가 먼저 내렸다.

집으로 올라가는 동안 가능한 머리를 차갑게 식혀야 했다. 여기서 제대로 풀지 못하면 그가 나를 영원히 오해할 것 같았다.

기분 나쁠 수 있다. 충분히 한재이를 이해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기젤라와 나는 둘이서 그의 감정에 관해 진단 내리고 선택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도의적인 문제였다. 기분 나쁘다고 마음 상해할 수는 있겠으나 잘못되었다 원망할 수는 없다. 나는 그 둘의 진실게임에 휘말리지 않고자 한 발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정말 그뿐이다.

그 행동이 비겁하다고 느꼈다면 사과하면 그만이고 미리 얘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묻는다면 조민우 부기장의 케이스와 같았다. 이미 지나간 일에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거실로 들어선 한재이가 신발을 벗는 동안 나는 새로 사다 놓은 맥주 하나를 냉장고에서 꺼내 들이켰다. 조금 더 머리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술 마시지 않으면 말 못 할 정도로 심각한 거야?”

어느새 소파에 앉은 한재이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기젤라에게 다 들었을 테지만 내 입으로 확인 받고자 하는 걸까. 나는 최대한 감정을 비우고 그에게 설명했다.

“미리 말 안 한 건 미안해. 사실 잊고 있었어. 맞아. 너랑 호텔 한정식집 가기 직전에 기젤라를 만났어. 먼저 만나자고 했던 건 그녀였고 내가 너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는 걸 알고 있다며 파혼하고 싶다고 얘기했어. 너희 둘 사이가 나 때문에 틀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그녀를 설득했고. 그런데 이미 늦었더라. 혼자 결론이 나 있는 상태에서 내게 확인만 받고 싶었었나 봐. 그래서 모른 척했어. 그게 다야.”

“그래서 그때 밥 먹을 때 나한테 물었던 거야? 결혼하기로 한 거 후회하냐고?”

한재이가 그런 사소한 대화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나와는 다른 의미로 그에게도 그날은 무거웠던 모양이었다.

“……그래.”

“고백은 왜 안 했어? 기젤라 말로는 하라고 판까지 깔아 줬다던데.”

그 말에 다시금 스멀스멀 차오르는 감정을 겨우 누르고 최대한 건조하게 대답했다.

“네 선택에 영향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

내 말에 그가 허무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알고 있었나 보네. 내가 파혼하고 너한테 올 거라는 걸. 너는 자신 있어서 고백할 필요를 못 느낀 거 아닐까?”

“…….”

“……라고 기젤라가 얘기하더라. 네가 고백을 해 줬다면 페어플레이가 되었을 텐데 그것조차 안 한 너를 선택하고 떠난 나 때문에 스스로가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었대. 그래서 널 찾아간 걸 매우 후회한다고 했어.”

나는 맥주를 찌그러트릴 듯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 앞에서 전 약혼녀 편드는 거. 정말 최악인데.”

“편드는 건 아니야. 듣고 싶다며, 무슨 얘기 했는지. 그래서 그대로 얘기해 주는 것뿐이야. 하나만 묻자.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한 발 뒤로 물러선 건 나를 위해서였어? 아니면 네 자존심을 위해서였어?”

한재이가 마침내 내 원죄에 도달했다. 그의 결혼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던 그 마지막 챕터에서 기젤라 베버는 진실을 원했고 나는 자존심을 택했다. 어쭙잖은 우정의 배려 따위 없는 순수한 사랑만을 가지고 오라는 내 드높은 자의식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질문에도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어.”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식탁 위에 걸터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점점 더 암흑 속으로 빠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갈등의 선들이 꼬여 이제는 풀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와 나 사이에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했던 많은 것들이 독을 품은 채 돌아왔다. 하나하나 터질 때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중독되어 갔었나 보다.

잠깐의 침묵 후에 한재이가 입을 열었다. 어딘가 더 쓸쓸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기젤라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만큼 화가 났어. 왠지 너희 둘에게 기만당한 것 같았거든. 그러다 원망은 점차 너한테로 옮겨 가더라. 뭘 더 숨기고 있는 걸까. 언제까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야 할까. 출장 가 있는 내내 그 바쁜 와중에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연락 자주 못 했어. 혼자 삭히는 데 시간이 필요했거든.”

나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대꾸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긁어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깨달았던 그 순간부터 한순간도 너를 포기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너는 나를 그냥 놓아줄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그런 절박한 순간에도 자존심을 지킬 여유가 있었을까. 그래서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 어쩌면 우리가 지낸 시간이 너무 오래돼서 너는 그저 관성적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와 나는 방식이 달라.”

한재이의 마지막 말은 다급하게 내 입을 열게 했다. 그를 다그치며 그 생각은 정말 틀린 것임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 알아. 우린 달라. 너는 늘 제자리를 지키고 내가 항상 움직이지. 그래서 좀 비참했어. 만약 내가 이 움직임을 멈추면.”

“…….”

“우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는 걸까 해서.”

비워 냈던 모든 감정이 일순간에 차올라 숨이 막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석고처럼 굳어 버린 몸을 지탱하는 데만 집중했다.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가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달았다.

이런 싸움은 이제 정말 그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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