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7. Go-around (7/10)

7. Go-around

그날 이후 우리는 약간의 거리감이 생겨났다. 함께 밥을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지만 필요할 때 외에는 가능한 말을 아끼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도 많았다. 그런 그의 곁을 지켜 주지 못하고 오늘 또다시 3일간의 일정으로 비행을 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하노이로 가는 CR711편의 기장을 맡은 슈미츠입니다. 특별한 사항은 없으니 곧바로 운항 브리핑 시작하도록 하죠. 부기장님.”

“아, 네.”

전체 브리핑을 위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나는 기력이 다한 태엽 인형처럼 감정 없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냈다. 10명의 크루들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보고를 이어 나갔다. 순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걸어 보았지만 그리 오래는 가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떨어지는 기분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침전되어 가는 중이었다.

“컨디션이 별로 안 좋으신가 봐요.”

브리핑이 끝나고 게이트로 이동하는 나를 쫓아 전성욱 부기장이 말을 걸었다. 오늘 그와 편조가 된 것은 다행이었다.

“네. 개인적인 일이 좀 안 풀려서 기분이 별로네요.”

“여자 친구랑 싸우셨구나.”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정확하게 이유를 맞춘 것도 신기했고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민우한테 들었어요.”

“아…….”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여자 친구와 싸웠다’라. 단순히 싸웠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서글펐다.

“수고 많으십니다. 정비 로그 제출할게요.”

콕핏에 들어온 정비사로부터 로그 북을 건네받았다. 빠르게 기체 점검이 끝나고 유압 장치가 작동되었다.

하노이까지의 이착륙 모두 전성욱 부기장에게 일임한 터였다. 평소에도 시끄럽게 떠드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말수가 적어진 나를 부기장이 모른 척 외면해 주었다. 이륙에 필요한 콜 사인을 내뱉으며 비행기가 기어를 올리고 난 다음부터는 아예 입을 닫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토 파일럿 셋.”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수동 모드가 해제된 직후 나는 곧바로 좌석 벨트를 풀고 조종석에서 일어났다. 힘없이 흐르는 세면대의 물로 얼굴을 씻었다. 다시 어제까지의 한재이와 나의 일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바빴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도 늘었다. 휘청이는 몸을 가누고 침대 위로 올라오면 나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그 위스키 냄새에 중독된 채 가만히 품에 안겨 잠을 청한다.

섹스를 나눈 지는 오래되었다. 서로의 이름을 잘 부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포옹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가 여전히 나와 체온을 나누고 싶어 한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한재이의 스트레스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가 직접 말한 것은 아니니 진실은 알 수 없었다. 한 번씩 옆에서 듣게 되는 그의 업무상 전화 통화는 늘 좋지 않게 끝이 났다. 그는 유럽과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기업 문화 차이에 힘들어했다. 중간에서 최정연 변호사가 조율을 하려 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내가 걱정스럽게 한마디라도 하려 하면 그는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거절했다. 마치 내가 그의 사업을 싫어했던 것을 눈치라도 챈 듯이 아무 말 하지 말라 선을 그었다. 덕분에 스트레스는 나에게도 전염되고 있었다.

“하아…….”

화장실의 거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일주일, 또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주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은 서늘한 거실을 쳐다보며 절망했다. 한재이는 이제 요리를 하지도, TV를 보지도 않았다.

그와 대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웠다. 지난 몇 번의 부딪힘으로 나는 내가 생각보다 덜 성숙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느껴 본 적도 없는 감정의 노예가 되어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했다.

한재이 역시 그 시간으로 자신에 대해 배운 것이 있으리라. 스스로 몰랐던 치명적인 약점을 알게 된 이상 섣불리 무언가를 시도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사실상 우리는 불편한 소강상태에 빠진 것 같은 관계가 되어 버렸다.

* * *

하노이 공항은 완연한 성수기였다. 너무 덥지 않은 베트남의 가을을 즐기기 위한 관광객들로 비행기가 쉴 새 없이 뜨고 내렸다. 착륙 활주로는 부여받았지만 빈 게이트가 없어 브릿지 연결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계단 차를 이용해 터미널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입국 수속을 끝내고 난 뒤 전성욱 부기장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기분이 영 별로시더라도 저녁 식사는 하세요, 기장님.”

“아, 네. 물론입니다. 같이하시죠.”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그의 제안을 반겼다. 하노이는 별로 와 본 적이 없어서 어디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모른다. 그가 함께해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호텔에서 체크인하고 들어온 룸 상태는 매우 좋았다. 준 스위트룸을 잡아 준 건지 침대는 상당히 컸고 욕실은 한국 집의 침실보다 넓었다. 유니폼 단추를 끄르며 커다란 욕조 위에 걸터앉았다. 발밑에 깔린 카펫의 느낌이 좋아 양말을 벗었다.

오늘 한재이는 출근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서로의 스케줄을 간단히 공유하던 그 짧은 아침 인사가 대화의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다. 휴대폰을 열어 그에게 전화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내가 그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응. 도착했어?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함께 들렸지만 이내 멎었다. 일하는 중이었나 보다.

“이제 호텔이야. 출근 안 했는데도 바빴어?”

-좀 그랬네. 저녁은?

“이제 먹으려고. 너는?”

-별로 생각 없어.

챙겨 먹었으면 좋겠는데. 괜한 잔소리가 될 것 같아 말을 삼켰다.

“그냥 전화했어. 바쁘면 끊어도 돼.”

나는 또 지레 겁먹고 도망갈 구석을 마련했다.

-괜찮아. 누구랑 먹으러 가? 부기장?

“응. 전성욱 부기장. 기억해?”

-기억해. 그때 ‘그 사람’이랑 같이 집들이 왔었잖아. 둘이 친구라며.

‘그 사람’이라 칭하는 그 존재 때문에 나는 더욱 신중히 말을 골라야 했다. 이상하다. 내가 한재이에게 이렇게 지은 죄가 많았었나.

-맛있는 거 먹어. 너 고수 잎은 못 먹으니까 미리 빼 달라고 해. 술은 많이 마시지 말고.

여전히 내 입맛을 신경 써 주는 그의 목소리와 술을 마시지 말라는 단골 멘트가 오늘따라 반갑게 들려왔다.

“그래, 그럴게.”

그래서 여느 때처럼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식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그러니 너도 내가 원하는 거 하나만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재이야.”

-응.

“……돌아가는 비행기, 이틀 후 오후 5시쯤 되는데. 데리러 올래? 그리고 데이트할까?”

그가 낮게 웃었다. 마치 졸업 파티에서 파트너 신청을 한 것처럼 떨리고 긴장되었다. 나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데이트해. 저녁도 같이 먹고 영화도 보러 가자.

그제야 나도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잊어버리기 전에 하나 더 당부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식당 예약 하지 마. 내가 할게. 내가 하게 해 줘.”

분명 알아서 또 어딘가를 예약해 둘 한재이의 수고를 덜어 주고 싶었다.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는 내 조급함에 그가 한층 더 가볍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발바닥에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카펫을 쓸며 나도 조용히 미소 지었다.

“끊을게. 일해.”

-응.

그러나 그는 끊지 않았다. 나도 휴대폰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전해져 오는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몇 초간 우리는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전화를 끊었을 때 나는 알았다. 한재이를 향한 사랑은 소강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 커져 버린 탓에 내가 감당하기 벅찰 만큼 부풀어 올라 있었다.

나를 무너뜨려 보고 싶다던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다. 나는 완벽하게 무너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를 혼자 짝사랑하던 기분이 다시 들고 있었다.

전성욱 부기장과 둘이서 향한 곳은 호텔 옆에 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메뉴를 고르다 결국엔 베트남 롤과 쌀국수를 시켜 반씩 덜어 먹었다. 나와는 달리 고수 잎을 좋아한다는 그에게 많이 먹으라며 야채 접시를 밀어 주었다. 아까보단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 같은 내 표정에 전성욱 부기장도 마음 놓고 자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래서 와이프를 격주로 보다 보니까 더 애틋해지더라고요. 같이 살 때는 하루가 멀다고 싸웠는데 눈에서 안 보이니까 역시 좀 보고 싶기도 하고? 하하.”

그런 걸까. 우리도 너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서 이렇게 부딪치는 걸까. 임신한 아내를 위해 평소에는 안 하던 이벤트까지 해 준다는 부기장의 말에 최근에는 무엇을 해 주었냐고 물었다.

“프러포즈 했던 곳이 있거든요. 프랑스 요리 잘하는 곳인데 결혼 3주년 기념이기도 해서 데려가서 먹였죠. 서울 야경이 근사하게 보이는 곳이라 분위기도 좋고. 아, 여자 친구분 데리고 가 보시겠어요? 거기 정말 로맨틱하거든요. 역시 싸웠을 때는 이벤트가 최고예요.”

“음…… 글쎄요.”

나는 조금 쑥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한재이는 남자였고 굳이 따지자면 늘 이런 이벤트를 해 주는 쪽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무심하고 담백한 일상을 좋아하는 나는 그의 그런 행동이 항상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진심으로 기뻐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긴 했다. 이렇게 내가 저지른 죄목 하나를 더 발견했다.

“거기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이유가 어찌 되었건 한재이는 프랑스 요리를 좋아하니까 데려가 주고 싶었다. 그가 좋아하는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분자 요리를 즐기면 좋을 것 같았다. 서울의 야경은 고도 5천 피트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최고지만, 거기까진 여의치 않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함께 즐기면 행복할 것이다.

손을 잡아 보았으면 좋겠다. 술에 취하지 않은 그를 안아 보고 싶었다. 여유가 된다면 짧은 입맞춤도 느껴 보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었다.

하노이에서 체류하는 하루 동안 나는 책 한 권을 완독했다. 따뜻한 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야외 풀장의 비치 베드에 누워 책을 읽고 낮잠을 잤다. 평화로운 휴가를 떠나 온 듯 조용하게 하루를 마감했다. 문득 내가 꽤 오랜 시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전성욱 부기장은 나를 위해 몇 가지 충고를 건넸다. 연인끼리 다투는 건 얼마든지 해도 되지만 화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싸움의 마일리지가 쌓인다고 했다. 섭섭하고 화가 났던 찌꺼기들이 모여 발화점을 돌파하면 불이 붙는데 그렇게 몇 번을 더 반복하다 보면 헤어져 버리는 거라고.

그 말이 맞다면 우리는 마일리지가 꽤 쌓였을 것이다. 인내의 미덕을 실현하기 위해 한재이와 내가 참았던 부분들은 그대로 그을음이 되어 남았다. 사실 나는 그가 내게 말도 없이 전 약혼녀를 만났다는 사실에 여전히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재이 역시 몇 가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내 행동들을 어딘가에 박제해 두고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화해는 어떻게 하는 걸까. 욕심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하나. 친구로 지냈을 때 싸웠던 기억이 별로 없어서 내게는 한참이나 지혜가 모자랐다.

“수고하셨습니다. 나가시죠.”

“네. 부기장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세큐어 체크리스트의 점검을 끝내고 콕핏을 나섰다. 캐빈 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넣었다. 기다렸던 사람의 이름으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지만 내용은 전혀 반갑지 못했다.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서진아 미안해. 일이 생겨서 회사에 가는 중이야. 데리러 가지 못할 거 같아. 저녁은 다음에 하자.]

“기장님?”

전성욱 부기장이 휴대폰을 들고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불렀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가 다가와 나와 휴대폰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서둘러 억지 미소를 지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표정을 바꾸었다.

“먼저 가시죠. 저는 전화를 좀.”

“아, 네.”

전성욱 부기장을 보내고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한재이에게 섭섭한 것도 맞았지만 누군가 나를 데리고 놀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영 심기가 불편해졌다. 한재이와 어그러질 때는 항상 이랬다. 내가 들떠 있을 때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나를 끌어내렸다. 일 때문이라고 해 버리면 정말 할 말이 없는 거니까 불만을 표할 수도 없었다.

그의 메시지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읽었다는 표시가 생겼으니 그걸로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전화는 다른 곳에 걸었다.

“네, 예약한 걸 취소하고 싶은데요. 이름은 우서진. 네, 오늘 저녁 두 명이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영화 티켓도 취소했다.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부기장의 제안을 거절한 마당에 리무진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꼴사나워 택시를 잡아탔다. 사실 집에 들어가 종일 술을 마시고 싶었다. 잠이 들어 일어나면 오늘 하루가 지워져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집으로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샤워였다. 기분 전환으로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이다. 한재이의 메시지는 그 뒤로 더 오지 않았다. 몇 시에 들어가겠다든가 하는 추가적인 정보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뭐라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금방 해가 지고 어두워졌다. 미련하게도 그가 요즘 끼니를 자주 거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래서 오늘도 저녁을 먹지 못한 채 들어올까 봐 밥을 해 두기로 했다. 인근에 있는 슈퍼에 가서 인스턴트 반찬들을 긁어모아 상을 차렸다. 그렇게 멍하니 식탁에 앉아 1시간을 기다렸다.

밤 10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그쯤 되자 그가 오늘 상당히 늦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차려 놓은 밥상을 도로 치우고 난 뒤 TV를 틀었다. 화면 속의 장면은 내게 전혀 전달되지 못한 채로 흘러가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텅 빈 채였다. 그러다 휴대폰의 시계가 11시로 넘어가 숫자가 바뀌는 순간을 목격했다.

현실은 절대 그런 상황이 아님에도 바람맞은 기분이 드는 건 최악이었다. 인간이 잦은 망상으로 인해 어떻게 상대에게 집착하게 되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체가 된 것 같았다. 이토록 철저하게 나를 무너트리는 한재이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12시가 되기 몇 분 전에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하등 그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을 풀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척했지만, 한재이가 거실로 들어서는 내내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안 잤어?”

그 말과 함께 풍겨 오는 술 냄새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술 마셨어?”

“응. 접대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진짜 늦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상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저녁 식사를 걱정하던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그는 소파 위에 앉아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술 마신 날은 늘 이랬다. 그런데 그 위스키 냄새가 오늘은 불쾌하게 다가왔다.

“놔.”

한재이를 뿌리치고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유치하긴 하다. 하지만 이 기분으로는 도저히 그와 스킨십을 할 수 없었다.

“화났어? 미안해.”

그 말도 몇 번째 들은 건지 셀 수조차 없다. 그는 내게 화났냐고 묻고 미안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매번 화내는 나 자신도 짜증 났고 다짜고짜 사과부터 하는 그의 태도도 조금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술 마시고 피곤할 텐데 자. 늦었어.”

나는 가능한 한 감정을 담지 않은 목소리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그러나 한재이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만. 잠깐만 이러고 있어.”

그는 밀쳐낸 내 팔을 다시 끌어당겨 감싸 안고 뒷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한재이의 것이 아닌 싸구려 향수와 담배 냄새가 짙게 맡아졌다.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이거 놔.”

나도 모르게 그를 밀치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명백한 오버액션이지만 돌이키려니 구구절절 사연이 길어질 것 같았다. 품 안에서 빠져나간 나를 보고 한재이는 허탈한 듯 웃었다. 그는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눈을 감았다.

“너까지 이러지 마. 안 그래도 힘들어 미칠 거 같으니까.”

“뭐가 그렇게 힘든데. 좋아서 하는 일 아니었어?”

작은 가시를 단 내 말투는 정갈하지 못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나랑 사업은 안 맞나 봐. 좀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할 걸 그랬나.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드네.”

“언제는 네가 안 그런 적이 있었어? 일생이 그랬잖아.”

“우서진, 말이 심하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겨우 아물어 가는 상태에서 또다시 생채기를 내면 안 된다. 그런데도 미웠다. 나는 이렇게나 노력하는데 대체 너는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우리 사이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결 방법을 찾고 있는 나에 비해 그저 굴러가는 대로 일상을 살고 있는 그에게 실망했다.

“메시지라도 보내 주지. 계속 기다렸어.”

“그래서 시위하는 거야? 네가 하면 되잖아. 몇 시에 들어오는지, 많이 바쁜지. 너는 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건데.”

“바쁜 거 뻔히 아는데 바보같이 메시지 보내서 뭐 해.”

한재이는 그 말에 픽 하고 웃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씹힐 거 같아서 안 보낸다는 거잖아. 너는 진짜. 하…… 어찌나 그렇게 도도한지.”

순간 불쾌한 감정이 확 밀려들었다.

“취했어? 그래서 지금 막말 하는 거야?”

“왜, 맞는 얘기잖아. 뭐든 네가 조금이라도 불편할 것 같으면 싹을 잘라 내잖아. 네 자존심에 금 가는 일도 싫어하고. 자의식이 드높다 못해 하늘을 찌르잖아. 하아…… 가끔 널 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나. 얼마나 고귀하고 빳빳한지 목이 꺾이겠어.”

한재이의 발언에 나는 눈가가 떨리는 경험을 했다. 이런 모욕적인 이야기를 듣고서도 참아야 하나. 순간 내려다본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검은 안개가 보였다. 그것은 저주였다. 우리는 저주에 걸려 눈이 가려진 채 서로를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해. 나도 더는 안 참아.”

“참았었어? 언제? 이 관계에서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한 건 나 아니었나.”

“말 함부로 하지 마.”

“좀 하면 어때. 혼자 어른인 척 좀 그만해. 너도 나한테 할 말 많잖아. 쏘아붙이고 싶으면 그냥 뱉어 내. 왜? 그렇게 다 쏟아 내고 나면 내가 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한재이는 소파에 고개를 기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는 초점이 흐려져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한없이 구겨진 내 표정이 상상되었다. 그가 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래. 그래서 말 못 했어. 너한테 따지고 묻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아. 질투도 나고 화도 나고…… ‘그 사람’은 언제부터 너를 쫓아다녔을까. 네가 남자도 가능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뭐 그런 거. 그 좁은 조종석 공간에 둘이 있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불쾌해. 그래도 나는 그런 거 따질 수 없지. 어른스럽지 못하니까, 그렇지?”

아니라고 대꾸를 해야 하는데 작정한 듯 흘러나오는 그의 고백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 너 못지않게 지켜온 것들이 많다고. 그래도 늘 너를 절대적인 우선순위에 두고 살았어. 그런데 너는 아닌 거 같아. 나라는 사람이 네 인생의 규칙을 파괴하고 예외적인 존재는 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아니잖아. 너는 항상 너 자신이 먼저야. 기젤라에게 네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확인 사살을 당한 것 같았어. 그랬구나. 너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네 커리어를 내팽개치고 도망갈 용기는 있어도 나와 이어지기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구나.”

한재이가 해묵고 부패한 감정을 토해 내며 아파했다.

“그래서 화내고 따져 묻고 싶었어. 그게 아니라는 네 변명을 듣고 나도 안심하고 편안해지고 싶었거든. 그런데 말 못 했어. 시작도 하기 전에 일그러지는 네 얼굴을 보면서 자신감이 사라졌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

“…….”

“너는 나를 참지 않을 것 같았다는 뜻이야. 물론 너는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만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내게 준 믿음은 그게 전부라는 게 중요하지. 그래서 나는 여기에 갇혔어. 더는 다가서지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해. 술 취하면 겨우 한번 너를 안아 보는 게 내가 가진 용기의 전부였는데 이젠 그거마저 거부당했으니 남은 게 없어.”

한재이가 토해 놓은 고백은 미래가 없는 잿빛이었다. 그것은 거실 곳곳에 흩뿌려져 암흑 같은 공간을 만들어 버렸다. 제 말을 모두 듣고서도 한마디 반응도 하지 못하는 나를 기다리던 그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 같이 독일로 돌아가자.”

“뭐?”

아까보다 더 빠르게 몸이 떨렸다.

“왜. 싫어?”

“회사는 어쩌고.”

“나는 상관없는데 너는 신경 쓰이나 보네.”

내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누가 봐도 부정적인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제안에 당황한 것도 맞았지만 그와 동시에 부정적으로 반응해 버린 스스로에게도 놀랐다. 언제든 그를 위해 그렇게 하겠다고 스스로 해 왔던 다짐이 무색할 만큼 지금 이 반응은 그의 눈에 꽤 이기적으로 비쳤을 것이다.

한재이는 기대고 있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신경 쓰지 마. 그는 자신이 건넨 제안을 거두어 들였다.

“그냥, 이렇게 물으면 넌 어떻게 반응할까 늘 궁금했는데.”

마지막 말은 절망 그 자체였다.

“이제 답을 알았으니 됐어.”

그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나를 한번 응시하던 눈동자는 이내 시선을 거두어 정면을 향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가려는 듯 셔츠를 끄르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렇게 끝나면 정말 최악이다. 나는 변명할 시간조차 없었다.

“기다려. 네 할 말만 하면 끝나? 무슨 오해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다 틀렸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한재이가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내 손에 눈길을 주었다. 그대로 잡혀 주려는 듯 더는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욱더 세게 그를 붙잡았다. 뿌리치지 말고 내 말을 들어. 이렇게 된 이상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 불화의 뿌리를 뽑아 버려야 했다.

“우리가 왜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어. 서로 이해한다 말만 하지, 핵심에 전혀 도달하지 못하고 있잖아. 네 불만은 뭐야. 내가 말하지 않고 숨긴 게 많아서 속상한 거야?”

내게 팔을 잡힌 채 응시하고 있는 한재이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빛을 읽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더 빨리, 또 서둘러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 기젤라와 만났던 건 잊고 있었어. 괜한 잡음을 내고 싶지도 않았고. 조민우 부기장 건도 그래. 네가 싫어하는 거 뻔히 아는데 거기에 기름을 들이부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나였어도 말 안 했을 거야. 마음이 불편하다는 건 알아. 이해해. 그렇다고 모든 걸 네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어. 알잖아. 듣고 있어?”

“계속해.”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목소리는 차가웠다. 입술을 깨물고 다시 말을 이었다. 평화스럽고 신사적인 말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변명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내 머릿속은 이미 암전된 상태였다.

“기젤라와 만나 곧 너희가 내 얘기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던 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15년 지기 친구를 혼자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여유 따위 부릴 정신이 있었다고 생각해? 자존심을 지키는 건 그 지옥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어책이었어. 모르겠어?”

“글쎄, 그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한재이의 목소리는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게 잡혔던 팔을 조용히 걷어 내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는 소다수에 얼음을 넣고 도수가 높은 진(Gin)을 꺼내 부었다. 빠르고 간단하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을 한 번에 들이켜고 나서 다시 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

“우리가 그저 그런 친구였다면 네 말을 이해했겠지. 하지만 너와 나는 특별했어. 네가 고백했다고 해서 틀어질 관계가 아니었잖아. 하물며 힌트라도 줬다면 이렇게 멀리 돌아오는 일은 없었을 거야. 기젤라도 나도 좀 더 깔끔한 마무리를 할 수 있었겠지.”

“네 파혼의 책임을 나한테 묻는 거야, 지금?”

나는 언성을 높였다. 그 때문에 내가 빠른 속도로 이성을 잃어 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에 비해 한재이는 여전히 침착하고 고요했다. 녹지 않은 얼음 잔을 돌리며 나를 향해 비스듬히 시선을 던졌다.

“조금도 없다고 할 수 있어? 내가 한국으로 들어왔었잖아, 오로지 너 때문에. 거기서부터 너 역시 도의적 책임이 있지. 네 멋대로 내 곁에서 사라졌잖아. 설명도 변명도 없이. 내 반응을 짐작하지 못했다고 할 생각은 마.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 봐. 우리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걸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어? 내가 너를 받아주는 건 정말 꿈에서도 생각 못 할 일이었다고 맹세할 수 있냐고.”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맹세할 수 없다. 나는 한재이가 나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 자각할 만큼 강력한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파혼에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우스웠다. 시작은 모두 한재이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으면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날 먼저 배신한 건 너야.”

“배신? 와…… 그래, 이제야 워딩이 제대로 나오잖아. 좋아, 그래. 내가 배신했지.”

그는 아일랜드 바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손가락으로 유리잔을 톡톡 건드렸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한재이가 자주 하는 행동이다.

“너는 계속해서 화내고 있었을 거야. 감히 내가 너를 두고 다른 사람을 인생에 들이겠다고 해서 열 받았겠지. 내가 결혼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두고두고 나를 괴롭히려 했을 거야. 내 약점을 거머쥐고 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오면 언제든지 그 사실을 들이대며 나를 가라앉히려고.”

지난번 그의 입을 막았던 강력한 무기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나를 찔렀다. 그러나 나는 아파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까부터 한재이는 내 침묵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때문에 서둘러 내가 말을 받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우리 우정에 금 가는 짓도, 네 결혼에 영향을 주는 일도 일절 없었어. 지쳐서 다 털어 버릴까 했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실수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뒤집어씌우지 마. 모두 네가 자초하고 벌인 일이잖아. 널 죄인 취급한 적 없어. 네 양심이 너를 죄인으로 몰고 간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래. 다 내 책임이지. 수습도 못 할 일을 벌이고 너를 쫓아 한국에 들어와서 이런 꼴을 당하는 것도 다 내 충동적인 선택이 자초한 일이겠지. 넌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지? 그래서 내가 죄지은 놈처럼 평생 이렇게 살 걸 생각하니 마음이 좀 시원해졌어?”

모멸감.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그 감정을 한재이에게서 받은 나는 심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리는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와 나, 누구 하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앞을 달리며 누가 먼저 깃발을 꽂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바보들처럼 서로의 상태를 살피지 않았다.

“파혼을 한 것도 회사를 그만둔 것도 다 네 선택이야. 그 때문에 적성에 맞지도 않는 일을 하느라 고생하는 건 참 유감이야. 가족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 또한 매우 유감이야, 매우. 옆에서 위로해 주는 것 외에 내가 해 줄 게 없다는 것도 상당히 유감이고! 하지만 어떡해. 이미 벌어진 일인데. 나한테 괜한 시비 걸 생각 말고 네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라고.”

그 말을 마친 나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재이가 쥐고 있는 술잔을 빼앗아 싱크대 안에 던져 버렸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저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서 술 마시는 것도 좀 그만해. 그렇게까지 해서 벌어야 할 만큼 돈이 아쉬운 것도 아니잖아. 유산으로 수십억이나 쌓아 두고 무슨 신선놀음이야. 자아실현을 할 거면 다른 일을 알아봐.”

머릿속에서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구슬처럼 튀어나와 온 사방에 굴러다녔다. 연인으로서 넘을 수 있는 선인지 아닌지 늘 고민했던 그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부모라도 하지 못할 심한 말을 그에게 쏘아붙였다. 나는 자멸하는 중이었다.

“또 시작이네. 그냥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 왜? 내가 이젠 변호사도 아니고 뭣도 아니니까 별 볼 일 없어졌어?”

한재이는 기대었던 상체를 느긋하게 일으켰지만, 눈빛에는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넌 우리는 멈출 수 없었다.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적성에도 안 맞는 일 하겠다고 덤빈 것도 너잖아. 매일 스트레스 받으며 일하는 모습 옆에서 보기 괴로워.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해. 독일로 돌아가고 싶다고. 아까 그 얘기가 사실 네 진심 아니야? 떠본 게 아니라 진짜 속내 아니었어? 여기 있는 게 싫잖아. 지긋지긋하잖아.”

“어디서도 마냥 행복할 수는 없다고 이미 말했어. 그 뜻이 지긋지긋하다는 말은 아니니까 넘겨짚지 마.”

그의 목소리에는 마지막 남은 인내가 깔려 있었다. 이성을 잃은 나는 그것마저 들춰내고 있었다.

“아니, 넘겨짚는 게 아니라 정곡을 찔렀겠지. 여기 온 뒤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 후회하고 있으면서 아닌 척하는 것도 다 티나. 매일같이 독일에선 이러지 않는다, 유럽에선 그렇지 않다, 듣는 내가 다 짜증 날 지경인데 네 파트너는 오죽하겠어.”

“왜 얘기가 그쪽으로 튀어. 말 나온 김에 다 털어 내고 속 시원해지겠다 그거야? 너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었어?”

한재이는 내 팔을 강하기 쥐었다. 그 악력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가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화가 내게도 전염되며 불꽃이 일었다.

“너야말로 핑계를 대고 있잖아. 아버님 탓할 거 하나도 없어. 이러쿵저러쿵 내게 화낼 이유를 가져다 부풀려서 날려 보지만 성에 차지 않지? 알아. 그 화의 근본은 거기에 있지 않으니까. 그냥 여기서 사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 내 옆에 있는 게 행복하지 않다고 인정하라고.”

“자학하지 마. 장단 맞춰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왜. 돌아가고 싶잖아. 나 때문에 인생이 더럽게 꼬여서 후회하는 중이잖아!”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죄책감이 나를 여기까지 떠밀었다. 또 한 번 이렇게 덫을 만들어 그를 기다렸다. 이번엔 아주 깊고 어두운 굴속에서. 한재이는 여느 때처럼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 주고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이 깊은 굴 안쪽까지 나를 찾아와 내 멱살을 움켜쥐고 분노를 토했다.

“그래, 여기서 일하는 거 끔찍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아서 갑갑하고 짜증 나. 그렇다고 내가 너한테 화낸 적 있어? 옆에서 보기 괴로웠다고? 나는 티 좀 내면 안 돼? 가뜩이나 모두가 나를 천하의 몹쓸 놈으로 모는데 너까지 그렇게 해야겠어? 그래, 돌아가고 싶어. 여기서 사는 거 하루하루가 전쟁 같아. 그래도 네 옆에 있겠다고 하잖아. 다 상관없으니까 너만 있으면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의 팔을 거머쥔 손은 파르르 떨렸다.

“너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온 날 어떻게 이렇게 대할 수가 있어!”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소각되는 느낌을 받았다. 발화점에 도달한 불신의 찌꺼기들이 동시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상은 안쪽에서부터 빠르게 번진다. 뜨겁게 뛰고 있던 심장이 녹고 혈관이 타들어 갔다.

내 팔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스르륵 풀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까부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정신 나간 놈처럼 중얼거렸다.

“뭔가를 버려야만 유지되는 관계는…… 이미 정상이 아니야.”

드디어 우리는 핵심에 도달했다. 나는 한재이가 나를 위해 버리고 온 것이 너무 많아 불안했고, 그는 내가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 생각하고 절망했다. 다른 것들은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질투나 오해, 섭섭한 마음들은 켜켜이 쌓여 있던 이 핵심적인 문제의 착화제일 뿐이었다.

한재이는 잠깐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벗어 놓았던 코트를 다시 쥐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소각되어 버린 관계의 잿더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잡혔던 팔이 욱신거리게 아파 왔다.

나가기 전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 그러나 현관문을 닫기 직전 내뱉었던 말은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래, 어쩌면 친구로 지내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지.’

이 불화의 원인을 모조리 뽑아 버리겠다 자신했었던가.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었다. 뿌리가 뽑힌 나는 아마 이대로 말라죽을 것이다.

* * *

한재이는 만 하루를 꼬박 방황하다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예전에 사 두었던 유물 같았던 침대에 누워 죽은 사람처럼 잠이 들었다. 어디서 무얼 하고 돌아온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거실 소파에 아무렇게나 벗어 둔 외투에서는 비릿한 바닷바람 냄새가 났다.

어제. 서로를 향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쏟아 낸 말들은 시간이 갈수록 생명력을 얻었다. 친구로 지내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그 마지막 한마디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누구보다 한재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자부하던 나는 비참하게 쪼그라들어 판단력을 상실했다. 그것이 그의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몰라 그가 잠들어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온갖 망상에 빠져들었다.

한재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일어나길 기다리면서도 동시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담배를 피웠다. 다시 저녁이 되고 밤이 되어서도 그가 잠든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새벽녘에 문득 깨어 기척을 들었다. 힘없이 내딛는 발소리와 한숨 소리. 한재이는 10분 정도를 부엌에서 보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내가 있는 침실로 들어올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침 일찍 비행이 있었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 나는 집에 없을 것이다.

“도어 오픈할까요? ……기장님?”

정신없이 펼쳐 놓았던 어제의 상념들을 정리하고 멍했던 표정을 다잡았다.

“아, 네. 죄송합니다. 오픈하시죠.”

객실 청소가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온 뒤 한참이 지나도록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부기장이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는 베이징에서 오전 비행을 마치고 턴 어라운드로 돌아가는 이륙 준비에 한창이었다. 컨디션은 최악이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머리를 비워 냈다. 집중하지 않으면 사고로 이어진다. 내 개인의 불행을 재난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한재이에 대한 생각을 끊어 냈다.

미리 출력해 온 운항 계획표를 손에 쥐었다. 작은 알파벳 버튼을 꾹꾹 눌러 항로 데이터를 FMS에 입력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모습은 유령처럼 떠돌았다. 서늘한 손이 한 번씩 심장을 움켜쥐고 가는 것 같았지만 애써 외면하고 태연한 척했다.

“테이크 오프 예정 시간 10분 전입니다.”

기체는 이륙 준비를 끝내고 순번 요청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 부기장은 초조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승객 탑승 완료 보고가 지금쯤은 들어와야 하는데 늦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도로까지 비행기를 밀어 줄 토잉카가 이미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부사무장이 콕핏으로 들어왔다.

“탑승객 한 분이 천식이 있으신데 드시는 약이 든 가방을 실수로 화물로 부쳐 버리셨대요.”

“아…….”

부기장은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 꺼내 드리고 하면 30분 넘게 지체되겠네요.”

“아우…… 어떡하죠, 기장님?”

부사무장이 나를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해당 승객을 내리게 해도 화물 짐은 다시 빼야 했으니 이륙이 지연될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승객이 약을 찾고 그냥 탑승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지상 요원 한 명 붙여서 짐 리턴해 드리고 곧바로 입국 수속 다시 밟게 하시죠. 부기장님, 저희는 예정 시간 40분 후로 다시 잡죠.”

“네.”

관제탑에 이륙 지연 보고를 한 뒤 우리는 대기에 들어갔다. 지상에는 트랙터가 다가와 짐칸을 다시 열고 해당 승객의 화물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기다림이라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질 것이다.

이런 시간은 내게 불리하다. 손과 머리가 놀게 되면 한재이의 유령이 다가와 기억의 해마를 건드렸다. 현재와 과거가 뒤죽박죽 섞이고 옆에 있는 부기장은 어느새 그의 모습으로 바뀌어 내게 다시 묻는다.

‘그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숨이 막혔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하는지 머릿속에 온갖 변명들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교신 내용은 해석되지 못한 채 활자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총 승객 206명, 탑승 완료되셨습니다. 바로 문 닫겠습니다.”

예상보다 빨리 부사무장이 들어왔다. 지체된 시간은 27분 남짓. 하지만 우리 순번은 이미 지나간 후였다.

“부기장님, 바로 클리어런스 요청하시죠.”

안개처럼 펼쳐졌던 잔상을 걷어 내고 다시 현실로 복귀했다. 3개의 활주로 중 가운데를 부여받고 택싱에 들어가기 위해 지상 요원에게 연락했다. 묵직한 토잉카가 우리 비행기를 끌고 유도로까지 후진시켰다.

비행기가 자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기체 흔들림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부기장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 역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바퀴의 움직임이 매끄럽지 못함을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닌 듯했다.

“휠에 이물질 낀 거 같은데요?”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륙 준비 전 외관 체크할 때는 분명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불신하고 있었다. 지금의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도로 한가운데 멈춰 설 수는 없으니 게이트로 다시 복귀하겠다고 요청할 참이었다. 여러모로 오늘 참 비행이 풀리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MAYDAY MAYDAY MAYDAY. Cierra 2441, Bird strike, we got an engine failure on the left.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시에라 에어 2441편, 새 충돌로 인해 왼쪽 엔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신 채널에서 누군가 비상 상황을 선언했다.

-Cierra 2441, Tower Roger. Say intentions. (시에라 에어 2441편,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죠)?

-We need to return. (회항하겠습니다.)

버드 스트라이크. 조류에 의한 항공기 충돌을 의미한다. 공항 주변에 서식하는 조류들은 이착륙을 방해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이들을 쫓고 여의치 않으면 총으로 사살해야 한다. 그런 조치를 취함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몇 번씩은 꼭 사고가 일어난다.

버드 스트라이크는 충돌 부위에 따라 심각성이 갈리는데 방금 비상 상황을 선언한 항공기의 조종사는 정확하게 ‘engine failure’라고 교신했다. 팬 블레이드 안으로 새의 몸뚱어리가 갈려 들어간 모양이었다. 비상 상황 중에서도 가장 높은 단계에 해당한다.

-Cierra 2441, maintain 3000, vector ILS runway 6R final approach course. (시에라 에어 2441편, 3천 피트 고도 유지하세요. 6R 활주로 접근 유도하겠습니다.)

관제탑이 유도하려는 6R 활주로는 우리가 이륙을 위해 부여받았던 곳이었다. 곧바로 이쪽에도 대기 사인이 떨어졌다.

-Coreana 770 heavy, hold your position. Everybody calling, stand by. Do not taxi. (코리아나 에어웨이 770편, 그 자리에 멈추세요. 모든 항공기, 택싱 멈추고 대기하세요.)

그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유도로를 주행하고 있던 항공기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부기장과 나도 트러스트 레버에서 손을 떼고 그대로 파킹 레버를 걸었다. 동시에 교신 채널도 조용해졌다. 이제부터 관제탑과 사고가 난 여객기의 커뮤니케이션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 쓸데없는 통신을 삼가야 한다. 채널 너머에 있는 수십 명의 조종자들이 숨을 죽였다. 다시 관제탑에서 비상 선포가 들어왔다.

-All traffics, remain clear of Beijing air space. (모든 항공기의 베이징 공역 접근을 금지합니다.)

이제 인근에서 접근 중이던 비행기들은 연료 상황에 따라 그대로 대기하거나 다른 공항으로 회항해야 한다.

-All runways are closed. Airport is closed. (모든 활주로를 폐쇄합니다. 공항을 폐쇄합니다.)

그리고 베이징 공항은 폐쇄되었다.

우리는 유도로 위에 선 채 지시를 기다렸다. 잠시 후 멀리서 검은 연기를 뿜으며 내려오고 있는 시에라 에어 2441편이 보였다. 수평을 잡기가 힘든 듯 기체가 심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긴 사고였기에 곧바로 고도를 낮출 수 있었다는 것이 천운이었다.

-Cierra 2441, cleared to land 6R. Thank you all. (시에라 에어 2441편, 6R 활주로에 착륙합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교신 채널에서 들리는 사고 여객기 기장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는 남은 엔진 하나로 착륙을 시도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고도를 너무 가파르게 낮춘 탓에 랜딩 속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너무 빠른데요.”

부기장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며 나와 함께 그들의 착륙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관제탑을 비롯한 모든 동료 조종사들이 무사히 랜딩 기어가 내려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행히 직전에 수평 각도가 잡히기 시작했다. 속도는 여전히 빨랐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곧이어 그들은 착륙했다. 굉음을 내며 흔들리던 비행기가 활주로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고 날개에 달린 스포일러가 진행 방향과 반대로 올라오며 속도를 줄였다.

사고 여객기의 기장은 있는 힘껏 트러스트 리버서를 당기고 있을 것이다. 비행기는 여전히 가속도를 못 이기고 끝도 없이 미끄러진다. 활주로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점점 더 피어올랐다. 마침내 그들이 아슬아슬하게 활주로 경계선에 멈춰 섰을 때 부기장과 나는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Cierra 2441, fire services are on the way. (시에라 에어 2441편, 화재 진압 차량이 가고 있습니다.)

비상구가 열리고 두 개의 탈출용 슬라이드가 곧바로 지상을 향해 펼쳐졌다.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와 있는 힘껏 도망가고 있는 승객들이 보였다. 그들을 향해 소방차와 응급 구조 차량이 달리고 있었다.

-Cierra 2441, we are evacuating on the runway. We have the fire out, I repeat, we are evacuating. (시에라 에어 2441편, 우리는 대피 중입니다. 반복합니다. 화재가 발생하여 우리는 대피 중입니다.)

교신 채널에서는 그들의 급박한 보고가 이어졌다. 비상 상황에서 조종사는 가장 마지막에 탈출해야 한다. 또한 기장은 승객들이 모두 대피한 후 남은 사람이 없는지를 눈으로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저 검은 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몇 번이나 객실을 왔다 갔다 하며 남은 승객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탈출한 승객들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비행기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여기서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만큼 검은 연기가 무섭게 치솟기 시작했다. 비상 탈출구는 이미 막혔을 것이고 이제 남은 방법은 조종석 창문을 열고 와이어를 통해 내려올 수밖에 없다.

이윽고 날개 옆구리에 커다란 불이 붙었다. 나는 절망했다. 날개에 가득 실은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연료를 버리지 못했을 텐데.”

“아…….”

나의 중얼거림에 부기장이 탄식을 내뱉었다. 활주로 끝에 소방차가 도착했다. 그러나 기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고민은 길지 않게 끝이 났다.

오전 10시 10분, 시에라 에어 2441편은 베이징 공항에 비상 착륙한 지 1분 30초 후 활주로 끝에서 폭발했다.

비행기는 한동안 무서운 불꽃을 일렁이며 타올랐다. 활주로와 유도로 곳곳에 주저앉은 승객들이 울고 있었다. 우리는 망연자실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며 절망에 젖어 들었다.

그 누구도 교신 채널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기장과 부기장이 탈출하지 못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담당하던 관제사 역시 말을 잃었다. 우리 모두는 1분 동안의 침묵으로 동료의 죽음을 추모했다.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무한 대기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상황들을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우리 비행기의 원래 이륙 시간은 오전 9시 40분. 사고 났던 시에라 에어가 이륙했던 시간 역시 9시 40분을 넘긴 시점이었다. 여기서 첫 번째 운명이 비켜 나갔다. 사고는 늘 확률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그 확률의 주인공이 우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천식 환자의 화물을 찾고 다시 이륙 순번은 받았던 그 30분의 대기 시간이 우리에게 천운으로 작용했다.

두 번째는 부기장과 내가 바퀴 움직임에 이상을 느꼈던 시점이었다. 유도로에서 곧바로 비행기의 속도를 줄이고 멈춘 덕에 우리에게 부여되었던 6R 활주로가 마침 비어 있을 수 있었다. 부기장과 나는 시에라 사고가 수습되는 동안 그라운드에서 곧바로 기체 점검을 받았다. 그러나 이물질이나 바퀴 이상은 보고되지 않았다.

나는 미신이나 초자연적인 현상 같은 것들을 별로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죽음 앞에서 초연함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정말로 운명이라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면 시에라 항공 조종사들과 맞바꾼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우리 비행기의 이륙 시간을 멈춰서 살려 낸 206명의 승객들과 마침 활주로가 비어 제때 탈출 가능했던 시에라 항공 승객들의 목숨까지 모두 짊어지고 간 두 명의 조종사들을 깊게 애도했다.

* * *

결국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김포 공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륙 순번을 아직 받지 못했던 다른 항공기들을 비롯한 베이징 공항의 모든 항공편이 그날 결항되었다. 뉴스 속보가 떴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찍힌 비디오 클립이 인터넷에 유포되었다.

“CR851편, 베이징 턴 어라운드 비행 차트 반환합니다.”

“어, 바로 오셨네요?”

“아이고. 큰일 치르셨습니다.”

“사고 현장 직접 보셨어요?”

운항 관계자실에서 차트를 반환하는 와중에 마주친 많은 동료들이 사고에 관해 물었지만, 부기장과 나는 침묵했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모험담처럼 떠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기장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사고가 우리에게 일어날 수도 있었다.

비켜 나간 운명의 자애로움에 구원받은 나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재이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장님도요. 그…… 아무 생각 마시고 푹 쉬세요.”

“네. 그럼.”

부기장과 헤어져 공항 주차장으로 향했다. 운전석에 홀로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적막감이 주는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항상 헤드폰을 쓰고 교신 내용을 들어야 하는 직업이기에 청각은 늘 예민하다. 메이데이를 다급하게 외치던 그 목소리가 여전히 머릿속에서 윙윙거리고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충격이 꽤 무거웠다. 그전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 어떤 것들도 감히 그 무게를 이겨 낼 수 없었다. 결국엔 살아 있기에 할 수 있는 고민이니까.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고차원적인 감정을 느끼게 했다. 예를 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수 없게 됨으로써 가지는 슬픔과,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느끼는 상실감의 차이. 물론 나는 후자를 더 두려워한다. 전자는 그저 나 자신을 위한 연민에 불과하다.

이제 나는 한재이와 이야기해 볼 용기를 얻었다. 그가 어떤 가시 돋친 말을 꺼낸다 해도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질투와 소유욕, 배신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기에 오히려 행복했다. 결국엔 그가 살아 있기에 할 수 있는 고민이니까.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 것이 내 심연의 끝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한재이에 대한 내 감정은 죽음의 깊이만큼 깊었다는 것도 알았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쯤. 나는 긴 여정을 끝내고 돌아온 사람처럼 빌라 앞 골목길에 서서 불 켜진 거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집에 있는 듯했다. 캐빈 백을 끄는 소리가 골목에서부터 계단 위까지 울려 퍼졌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자 식탁 의자에 멍하게 앉아 있는 한재이를 발견했다.

그는 숨을 쉬고 있었고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한재이는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슬픔에 짓눌려 터져 버린 실핏줄로 인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독일 집에 가 봐야 할 거 같아.”

한재이는 인사를 생략하고 잔뜩 젖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순간 이유를 묻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임을 직감했다.

“아버지가 아우토반에서 3중 추돌 사고가 나셨는데.”

그는 그 말을 내뱉음으로써 스스로도 다시 한번 현실 자각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현장에서 돌아가신 것 같아.”

나는 탄식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거듭되는 참혹함에 피가 거꾸로 쏠릴 것 같았다. 오늘 하루 내내 내 곁을 떠돌았던 죽음의 냄새가 그에게서 진동하고 있었다.

그대로 한재이를 안았다. 그가 천천히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건네주어야 하는 위로의 차원이 지금까지와는 너무도 달라 고통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몸은 뜨겁게 열이 올라 있었다. 나는 한재이의 머리 위로 얼굴을 묻고 천천히 등을 쓸어 내렸다. 그가 느낄 상실감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말을 아꼈다.

한재이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내게 안겨 있었다.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를 베이징 공항에 묶어 둔 것 역시 죽음의 그림자였으니 오늘은 살아 있는 자들이 설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머리칼을 만지며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 숨을 불어 넣었다. 이대로 밤새 그를 위로해야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너무 침착한 한재이의 태도가 나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참 후 그가 고개를 들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독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비행기가 있을까?”

“알아봐 줄게. 뮌헨이 더 가깝겠지?”

“어디든 상관없어.”

힘없이 나를 놓아주는 그를 보며 통증을 느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한재이의 표정에는 상실감 외에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유니폼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곧바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뮌헨으로 떠나는 티켓을 급하게 마련했다. 내가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에도 한재이는 멍하게 앉아 무언가를 생각 중이었다. 울지는 않았다. 아직 직접적인 슬픔을 토해 낼 자신이 없어 보였다.

“회사에 연락해야 하지 않아?”

그가 놓치고 있을지 모를 신변들을 정리해 주고 싶었다. 한재이는 힘없이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마도 최정연 변호사일 거라 짐작했다.

“연락은 어머니한테서 받은 거야?”

“응.”

“빨리 가서 곁에 있어 드려야겠다.”

“응.”

영혼 없이 대답하던 그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형제가 없는 그는 의지할 곳이 없을 것이다. 내가 그의 연인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인 것만은 진실이었으니, 가서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무사히 그를 가족의 품에 밀어 넣어 주고 싶었다.

“나도…… 같이 들어갈까?”

그러자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머무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괜찮아. 가서 절차 밟으려면 정신없을 거 같아. 장례식 잡는 것도 일주일은 넘게 걸릴 텐데. 발인할 때 와.”

한재이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같이 들어간다고 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그의 가족도 법적인 파트너도 아니다. 옆에서 위로를 해 주고 싶었지만, 그 또한 그가 거절한다면 내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금 우리는 헤어진 것도 사귀는 것도 아닌 모호한 경계선에 걸쳐 있었다.

직전에 파국으로 끝난 이 관계에 관한 정리를 해야 했지만,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사과할 타이밍을 놓쳤고 언제 다시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한재이 인생에서 나는 최초로 순번이 밀린 상태였다.

“알았어. 장례식 교회가 정해지면 알려 줘, 바로 휴가 낼게. 뭐 좀 먹을래? 물론 안 넘어가겠지만.”

이틀 만에 마주한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핼쑥해져 있었다. 그가 나를 챙겨 왔던 것처럼 되돌려주고 싶어 말을 꺼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사람은 며칠 굶는다고 죽지 않더라. 모른 척해 줘.”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묻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겠다고 했고 잠시 그를 기다렸다.

한재이는 손가락으로 식탁 위를 두드리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나는 조용히 맞은편에 앉아 그를 쳐다보았다. 종일 비행 사고에 시달리다 왔음에도 이상하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강력한 주술이라도 걸린 것처럼 한재이를 지켜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눈에 보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잊히지 않아.”

마침내 그가 입을 열고 내뱉은 말은 후회였다.

“화가 나서 영원히 보지 말고 살자고 했거든.”

한재이가 어떤 연유에서 그 말을 하게 되었는지 기억하고 있던 나는 가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평생 교회를 다니셨으니 당신 소원대로 하느님 곁으로 가신 게 분명할 텐데.”

“…….”

“대신 나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거 같아.”

그제야 그에게서 풍겨 왔던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다. 우리가 바로 지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나는 새벽까지 깨어 있는 채였다. 내일 아침 일찍 그를 공항에 데려다주기 위해 몸을 쉬어야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까부터 침대 옆 작은 스탠드 램프에 시야를 고정한 채 밀랍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나의 온 신경이 밖에서 나는 기척 소리에 쏠려 있었다.

한재이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벌써 세 번째였다. 그가 머무는 작은 방문을 여는 소리와 물을 마시는 소리, 식탁 의자에 앉아 숨을 쉬는 소리까지 모두 내게 전달되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 볼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독일로 함께 들어가겠다는 요청을 거절당한 마당에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무능력한 인간이다.

어느 순간 한재이의 기척 소리가 사라졌다. 방으로 다시 들어간 것인가 싶어 청각을 곤두세웠다. 그때 내가 있는 침실 방문이 열리고 컴컴한 어둠 속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몇 시간 동안 얼굴은 구석구석 더 초췌해져 있었다.

“나, 아무래도 잠을 좀 자야 할 거 같은데.”

“응. 여기서 잘래?”

늘 자던 침대가 아니라 불편했었던 걸까. 그에게 넓은 침대를 양보하고 내가 작은 방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내 손을 잡고 돌아서는 발걸음을 막았다.

“침대 때문에 그런 건 아니야.”

“…….”

나는 한재이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필요하다는 의미일까. 스트레스 받을 때는 항상 나를 찾게 된다던 예전 그의 말을 떠올렸다. 잡은 손을 천천히 제 쪽으로 끌며 한재이가 말했다.

“여기서 같이 자.”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없이 침대 위로 올라가 몸을 뉘었다.

한재이는 뱀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아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크게 한번 숨을 쉬었다. 그의 긴 손가락 끝이 나지막이 팔에 닿았다. 조금씩 내 팔을 쓸던 움직임이 서서히 멈추고 그는 거짓말처럼 곧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렇게나 초라했다.

신기하게도 그가 잠든 이후부터 나 역시 졸음이 쏟아졌다. 종일 쌓여 있던 고단함과 정신적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작게 내쉬는 그의 숨소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수마는 망설임 없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날 밤 죽어 가는 양의 꿈을 꾸었다. 나는 울퉁불퉁한 돌무더기와 마른 풀 몇 포기가 다인 황무지를 걷고 있었다. 무리에서 떨어져 헤매던 양을 발견하고 다가갔으나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어린양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목을 졸랐다.

‘비구는 낙원을 즐겼는가.’

새파랗게 얼굴이 중독된 카말라가 내게 다가와 웃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양의 목을 조르던 내 손은 파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제 대가를 치르게 되나요?’

나는 가르침을 얻으려는 수행자처럼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곧이어 양의 숨이 끊어졌다는 걸 알았다. 이곳에서 단 하나 살아 있던 생명의 불씨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녀 카말라는 독사에 물려 죽었고 나는 처음부터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 * *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한재이는 이미 내 옆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침이었다. 나는 땀에 흠뻑 절어 있었고 타는 듯한 갈증에 마른기침을 했다.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에 세수했다. 어느새 꿈의 내용은 반 이상이 증발하여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이 짓눌리는 듯 답답했다.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공포의 주체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혼자 두려움에 떠는 그런 느낌이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늘 내가 해 오던 방식으로 현실을 자각했다.

여기는 서울, 어제 한재이의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갔다. 작은 방문을 여니 한재이가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는 나를 보고 아침 인사를 했다. 나는 그런 한재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따뜻한 우유를 데워 줄까 권해 보았다.

“그래. 고마워.”

그가 승낙했기에 부엌으로 가 작은 냄비를 꺼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우유 팩 하나를 뜯어 그 안에 부었다. 금방 끓어오르기 때문에 자리를 떠나면 안 된다. 부글부글 거품이 일기 시작할 때 곧바로 불을 끄고 머그잔에 옮겨 담았다. 거기에 벌꿀 한 스푼을 덜어 녹여 주었다.

감기에 걸리거나 몸이 좋지 않을 때 서로에게 늘 해 주던 처방법이었다. 지금의 한재이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지만, 마음의 병을 얻어 열이 들끓고 있었다.

내게서 우유 잔을 건네받은 그가 말했다.

“20분쯤 후에 출발하면 될 거 같아.”

“응. 이코노미라서 많이 피곤할 거야. 수속할 때 업그레이드 가능한지 알아봐.”

“그럴게.”

“더 필요한 짐 있으면 말해. 옷 같은 거. 미리 빼놓으면 내가 들어갈 때 가지고 가면 되니까.”

“괜찮아. 별로 차려입을 일도 없을 텐데 뭐.”

그는 힘없이 웃으며 우유를 마셨다. 농담을 하는 그의 모습이 쓸쓸하게 비쳤다. 차라리 울었으면 좋겠다.

한재이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나와는 다르게 늘 솔직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성격이었지만 눈물을 흘린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제대로 표현하자면 눈물을 쏟을 만한 일을 겪은 적이 없을 것이다. 축복받은 삶을 살았던 만큼 처음 겪는 시련이 더 혹독할 것이라 생각했다.

“……괜찮아?”

조금 망설이다 그에게 물었다. 그는 다시 한번 우유 잔에 입술을 대고 따뜻한 우유를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대답했다.

“모르겠어. 실감이 잘 나지 않는 거 같기도 하고. 일단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어. 한번 둑이 터지면 멈추지 못할 것 같아서 겁나기도 하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갑자기 찾아온 불행은 뿌리를 내리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이제 평생을 슬퍼해야 할 텐데 하루 이틀 늦게 시작해도 상관없겠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래전 책에서 그런 구절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은 살면서 두 번의 큰 경험을 하게 되는데, 한 번은 자식을 가졌을 때이고 다른 한 번은 부모의 죽음을 맞이할 때라고 했다.

이 두 가지 경험들은 몰랐던 세상에 눈을 뜨게 해 주고 외면하고 싶었던 인생의 다른 부분을 돌아보게 해 준다고 했다. 사람이 가장 크게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며 그 경험을 소중히 여기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둘 다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한재이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챙겼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독일 집 열쇠와 자동차 키, 여권과 현금을 살피고 이곳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캐리어를 가지고 거실로 나온 그가 방문을 닫았다.

이미 몇 번 겪어 봐서 알고 있었지만, 그는 늘 흔적을 남긴다. 머무르다 간 시간이 길었던 만큼 이제 이 작은 방은 그의 물건으로 가득 찼다. 나는 이 문을 다시 열어 보기 힘들 것이다.

헤어진 것도 아닌데 그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비참함을 느꼈다. 부친을 잃은 그의 슬픔 앞에서 겨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인간으로서 좀 역겨웠다.

“가자.”

그가 먼저 집을 나섰고 내가 문을 닫았다.

집을 나서며 했던 그 마지막 말을 끝으로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탑승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에 들어설 때까지도.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나는 틈날 때마다 그를 살폈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였다. 머릿속에서는 수백 가지 말들이 떠돌아다녔지만, 선뜻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속앓이를 했다. 적당히 친한 관계였다면 벌써 충분히 위로하고 마음이 편해졌을 것이다.

사실 나라고 이 상황이 감당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한재이의 불행은 내게도 똑같은 크기만큼의 절망을 안겨다 주지만 이 불행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주 멀쩡하게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가 떠나고 나면 혼자 밥을 먹어야 했고 내일은 비행도 나가야 한다. 누가 물어보면 ‘친한 친구가 부친상을 당해서’ 정도의 이유로 끝나야 하기에 깊은 청승을 떨 만한 사유가 못 되었다. 이럴 때는 삶에도 ‘잠시 멈춤’ 버튼이 있었으면 좋겠다.

“들어가. 데려다줘서 고마워.”

출국장 로비에서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탓에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조용히 그를 끌어안았다. 헤어지는 사람들이 태반인 이곳에서만 허락된 포옹이었다.

우두커니 안긴 한재이는 영혼 없는 나무 인형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자책하지 마.”

고르고 고른 말 중 겨우 하나를 끄집어내 그에게 들려주었다. 지금 당장은 위로가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말이라는 건 내뱉어야 의미가 있다. 타인에게 들은 말은 머릿속을 힘없이 떠돌아다니다 적절한 때가 되면 한 번씩 힘을 발휘한다. 그게 언제가 되었건 간에 그가 내 말을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안을 삼길 바랐다.

우습지만 실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한재이 인생을 박살 냈다는 기존의 죄책감 위에 이제 하나가 더해졌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순간을 평생 후회하며 슬퍼할 그에 대한 미안함이다. 자책하지 말라. 내게도 누군가 그 말을 해 줬으면 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친구 사이 포옹치고는 너무나도 긴, 연인이라 하기에는 무미건조한 몸짓이다. 나는 등을 토닥여 주며 먼저 몸을 떼어 냈다.

그는 손을 들어 내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전화할게’, 그 말을 끝으로 출국장 안으로 사라졌다.

* * *

그로부터 사흘 뒤 한재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례를 치를 교회와 묘지가 정해졌다고 했다. 생각보다 빨리 처리가 된 것 같아 사정을 물었더니 부모님의 가까운 지인들이 도와주셨다고 했다. 베버 교수 부부가 큰 힘을 보태었다.

이런 절대적인 상황에서 질투 같은 감정이 설 자리는 없었다. 두 집안이 가깝게 지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도움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아마도 이번에는 내가 불청객이 될 모양이었다.

-지역 신문 부고란에 벌써 이름을 올렸더라. 변호사라 그런지 일 처리는 참 빨라.

스피커폰으로 흘러나오는 크리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늘 비행을 위한 캐빈 백을 꾸리고 있었다.

-너도 같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비행 취소가 힘들었어? 왜 혼자 보냈어.

“내가 가 봐야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

-뭐가 없어. 이럴 때 옆에 있어 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맥시, 너는 내 동생이지만 정말 어떨 때 보면 무서울 만큼 이성적이야.

그 말을 들으니 저에게서 자꾸 체면을 차린다고 화를 내던 한재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크리스에게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나도 감정이 있고 때로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않을 때도 많다. 사고도 칠 줄 알고 책임 회피도 한다. 나는 기계가 아닌데 왜들 이렇게 오해하는 건지 모르겠다.

“따라가겠다고 했는데, 재이가 거절했어.”

나는 큰 용기를 내어 형에게 이실직고했다. 그러나 반응은 예상과 좀 달랐다.

-그럼 뭐 고맙다고 당장 자기 따라 같이 들어가자고 할 거라 생각했어? 너 비행 스케줄 있는 걸 뻔히 아는데? 당연히 재이는 미안해서 거절하겠지. 그래도 모른 척하고 그냥 같이 왔어야지, 바보야.

바보라는 소리까지 듣고 나니 점점 더 억울해져 부가 설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게 아니고, 사고 연락받기 직전에 우리 싸웠어. 좀 심하게.”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그럼 뭐 평생 싸우지도 않고 세기의 사랑이라도 할 줄 알았어?

크리스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너희는 더 싸워야 해. 못 볼 꼴도 좀 보고 밑바닥도 들여다보고 해야 한다고. 서로에 대한 환상을 좀 깰 필요가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 둘 다 너무 완벽한 애인이 되려고만 하잖아. 둘이서 영화 찍냐고. 현실을 살아야지, 맥시.

일리가 있었다. 크리스의 말에 완벽하게 설득당했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정말 너무 완벽한 연인 놀이에 심취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재이와 함께 지내는 과정 속에서 조그마한 틈이라도 보이면 서둘러 메꾸려고 노력했었다. 부족한 부분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가 내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한재이 역시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이 관계에서 인내의 한계를 시험당한 사람은 자신이라고 괴로워할 정도였으니까. 그가 우리 사이에서 느꼈던 부담감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런 말을 좀 더 일찍 해 주지 그랬어, 크리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나 해. 같이 살기까지 하는데 앞으로 더 험한 꼴 많이 봐야 할 거 아니야. 아무튼 지금 타이밍이 안 좋지만 말이야. 이럴 때일수록 네가 옆에 있어 줘야지, 안 그래?

“그래, 나도 알아. 그렇지만 우리 진짜 심하게 싸웠어. 게다가 나 때문에 재이는 아버지와 멀어진 상태였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 모르고 심한 말도 했다고 했어. 지금은 그에게 최악의 상황이야. 괜히 내가 옆에 있으면 더 스트레스 받을 수도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게 뭐가 스트레스야.

“이제 내가 싫어졌을 수도 있잖아.”

크리스는 내 말에 작게 코웃음을 쳤다.

-퍽이나 네가 싫어졌겠다. 설마 재이가 헤어지자고 해?

“그런 건 아니야.”

-그럼 혼자 청승 떨지 말고 며칠 일찍 건너와. 모른 척 뻔뻔하게 옆에 있어 주란 말이야. 알았어?

“…….”

크리스가 내 형이라는 것을 이럴 때 늘 실감한다. 혼나는 것도 아닌데 그가 한소리를 하면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었다. 나는 크리스가 하는 말이 모두 진짜라고 믿었다. 허풍이 심했던 그는 제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어 주는 나 때문에 늘 즐거워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내게 잔소리하는 것을 즐긴다.

-막시밀리안, 알았냐고.

“휴가를, 음. 그렇게 갑자기 낼 수 있는 게 아니야.”

-아프다고 해. 대기 인원 있을 거 아니야.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그냥 대충 좀 살아. 가끔 보면 나까지 네 성격 숨 막힌다, 진짜. 나쁜 짓도 좀 하고 실수도 하고 살라고, 알았어? 나한테 전화도 좀 자주 하고. 알았냐고.

“그래, 알았어.”

-됐어, 그럼. 끊는다.

크리스는 멋대로 내 대답을 긍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조용해진 휴대폰과 짐을 챙기던 캐빈 백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독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일단은 이 비행까지 마쳐야 한다. 형에게 그토록 설교를 들었건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내가 참 한심했다.

“바보 맞네.”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유니폼을 개어 짐을 꾸렸다.

* * *

3일 후 나는 뮌헨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장례식은 내일이었지만 하루 일찍 들어가는 것이다. 이번 주에 잡혀 있었던 비행 하나를 취소하고 며칠 휴가를 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질색이었지만 친척이 상을 당했다고 말을 꾸몄다.

직계 가족의 일이 아니라면 이미 짜여진 비행 스케줄을 연속으로 취소하고 장기 휴가를 내는 것이 힘들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다.

떠나기 전 한재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고요했다. 큰 감정의 동요를 내비치지 않은 채 장례식 당일의 일정을 전달하고 나의 스케줄을 물었다. 그래서 나도 그저 사무적으로 그를 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무척 반가웠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루 일찍 오는 거네. 빈넨덴 집으로 가는 거보다 내 아파트에서 지내는 게 편하지 않겠어?’

내 일정에 대한 그의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잠깐 보자는 이야기를 꺼낼까 했지만 망설여졌다. 만날 수 없겠지. 어머니 옆에 있어야 할 테니까. 스스로 묻고 대답하고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입 밖으로 굳이 꺼내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한 뒤 렌터카를 빌려 한재이의 아파트로 이동했다. 그가 뮌헨 시내 대형 로펌으로 이직했을 때 마련한 집이었다. 19세기에 지어진 낡은 아파트였지만 그가 구매해 내부 수리를 새로 한 덕에 근사하게 바뀌었다. 당시 나는 매우 바빴기에 이사를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다. 다 끝날 때쯤 나타나 고작 와인이나 한잔하며 머물다 갔었던 기억이 난다.

우편물이 조금 쌓여 있었다. 나는 주인처럼 우편함을 열고 그것들을 품에 안은 채 2층으로 올라왔다. 이사하던 날 한재이에게서 건네받았던 스페어 키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얼마 전 독일로 출장 왔을 때 그가 여기서 지냈을 테니 먼지가 쌓이거나 하지는 않아 보였다.

짐 가방을 현관문 옆에 두고 침실 문을 열어 보았다.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 시트가 그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집안에는 서늘한 가을 공기가 들어차 있었다. 라디에이터를 돌리고 창문을 열어 거실을 환기했다. 소파에 늘어진 쿠션 두 개를 손에 쥐고 툭툭 부딪히며 털어 주었다.

그러다 진열장에 늘어진 한재이의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은 이미 익숙한, 그래서 볼 때마다 놀려 대기 바빴던 그의 유년 시절이다. 그 사진들 곳곳에서 나는 카메오처럼 등장하고 있었다. 가족들과 찍은 사진에도 부록처럼 그의 옆에 붙어서 얼굴을 내밀었다. 친구 사이라는 울타리가 나를 꽤 뻔뻔한 인간으로 만들었었나 보다.

둘이 술에 취해 눈이 충혈된 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도 거기 있었다. 우리 뒤에는 크리스가 배경처럼 함께 찍혀 있었는데 사진 밑에 한재이가 휘갈겨 쓴 메모가 보였다.

‘22번째 맥시 생일, 주인공 쓰러진 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언제였는지 기억난다. 그를 다운시켜 보겠다고 마구 들이부었다가 오히려 내가 한재이에게 업혀 버렸던 날이었다. 부축 조금 받은 거라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그에게 업혔던 걸로 그냥 기억을 덮어쓰기로 했다. 좋았겠네, 우서진.

환기가 어느 정도 된 것 같아 창문을 닫고 짐을 풀었다. 정돈된 그의 침대 위에 담요와 베게 하나를 더해 잠자리를 만들었다. 새 둥지를 꾸미듯 담요를 깔고 쿠션 두 개로 베개 밑을 받쳤다.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린 뒤 티셔츠에 속옷 차림으로 새 둥지에 들어가 누웠다. 남은 담요 자락으로 몸을 덮고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혼자 캠프 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텅 빈 한재이 아파트에 누워 나는 지난 일주일간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했다. 저주에 걸린 사람들처럼 서로를 헐뜯고 불신하던 말들, 아직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다. 그렇지만 그를 포기하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크리스의 말대로 싸움은 헤어짐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서로를 용서할 시간을 빼앗겼다. 불행은 늘 겹쳐서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수백 번도 넘게 들었지만, 가장 최악의 타이밍에 이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한재이가 아버지와 화해하고 죄책감을 덜어 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내 차례가 올 것이다. 까마득한 기다림에 내가 지치지 않도록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사랑한다 고백하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오늘 밤은 부디 악몽을 꾸지 말았으면 좋겠다.

* * *

한동준 교수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학에 남아 연구원으로 지내다 튀빙겐 대학에서 한국학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독일 유학 경험이 있었던 그는 대학 강사 출신 아내와 당시 중학생이었던 외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정착했다.

그는 교회를 다녔고 말수는 늘 적었으며 비교적 점잖은 어휘를 구사했다. 그의 서재는 늘 책 냄새로 가득했는데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내게 그곳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

그는 내가 집에 놀러 오는 것을 반겼다.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마지막에 꼭 그 낙원 같은 서재로 불러 몇 권의 책들을 빌려주곤 했었다. 물론 그중에는 아직 어린 내가 읽기에 버거운 내용도 다수 있었지만, 나는 숙제를 하는 아이처럼 일주일 안에 그것들을 꾸역꾸역 정독한 뒤 돌려주곤 했었다.

한재이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인상을 찌푸렸었다. 가만 보면 자기 아버지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며 놀리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책을 좋아한다는 점도 그러했지만, 그도 자신의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래,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나는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서른 명 정도의 추모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고인을 추억하고 있었다. 가족 친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학 관계자들로 보였다. 그가 가르쳤던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 그리고 친하게 지내던 개인적인 지인들.

그중에는 나의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크리스와 양부모님이 미리 준비해 온 카드를 상자 안에 넣고 있었다.

“오셨어요.”

“그래, 집에 안 들르고 바로 왔었나 보구나.”

“네. 꽃 예쁘네요.”

나는 양어머니가 조문용으로 들고 온 화환을 보며 말했다. 내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녀는 멀리서도 잘 보이게끔 꽃을 높이 들어 보였다. 그것을 쫓던 나의 시선이 자연스레 예배당 앞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눈에 띄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물론 그녀가 올 거라는 예상을 못 한 것은 아니었다.

길게 내린 금발 머리의 기젤라는 모여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족처럼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망자와 가깝게 지내던 부모의 자녀로서 참석한 것일까, 아니면 부친상을 당한 전 약혼자에 대한 예의를 다하기 위해 온 것일까.

다시 나의 시선은 조금 더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르간 옆에서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한재이를 발견했다. 그는 검은색 정장 차림에 앞머리를 길게 내려 이마를 덮고 있었다. 묵묵히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만 끄덕이는 그 모습을 잠시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저 잠깐 다녀올게요.”

나는 가족들을 떠나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오는 것을 곧바로 발견한 한재이가 목사와의 이야기를 중단한 채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왔어?”

“응.”

우리는 짧게 인사하고 서로를 살폈다. 애처로움이 가득한 나의 눈빛을 보고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그가 웃어 주었다. 일주일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안심된다기보다는, 그래서 더 불안했다.

“이리 와서 인사해. 엄마, 서진이 왔어요.”

그는 조금 옆에 떨어져 의자에 앉아 있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나를 데려갔다. 멀쩡해 보이는 한재이에 비해 그녀는 몰라볼 정도로 얼굴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것이 참 가슴 아팠기에 나를 향한 싸늘한 눈빛 같은 것은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래, 왔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머니.”

“멀리서 와 주고 고맙구나.”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다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길게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보기 싫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비통함을 쏟아 내기에도 바쁘다. 원망할 대상을 찾아 마음껏 비난해도 괜찮다. 나를 쫓아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품격을 보여 주었다.

한재이는 그런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다 체념한 듯 다시 내게로 방향을 틀었다.

“내일 서울로 다시 돌아간다고?”

“응.”

“나는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옆에 있어 드려야 할 것 같거든.”

그는 뒤에 앉은 어머니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말해. 한국에 있는 물건, 보내 줄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그런 얄팍한 수로 한재이를 떠보며 아직 그가 내 옆에 머물고 싶어 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한심하다.

한재이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그의 눈빛을 읽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재이야.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누군가 한국어로 그를 불렀다. 서울에서 온 친척분이신 것 같았다.

“미안. 나중에 따로 얘기해.”

한재이는 서둘러 친척들을 향해 다가갔다. 오늘 그는 바쁘다. 독일에서 상주의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멀리서 오신 분들이 많아 챙겨야 할 것들도 많았고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 이야기는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는 게 맞았다.

한재이가 섞여 들어간 한 무리의 양복 입은 한국분들을 유심히 살폈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아 보이는 중년 남성이 그의 큰아버지인 듯 보였다. 언젠가 그를 가리켜 무례한 사람이라며 기분 상해 돌아오던 한재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죽은 그의 아버지와도 상속 문제로 사이가 틀어졌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모든 것을 용서하게 만든다.

그보다 더 나이 드신 분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할아버님은 비행기를 타지 못하신 듯했다.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못하셨을 그분의 비통함을 애도했다.

문득 한재이 아버지는 자신이 독일에서 묻히게 된 것에 만족하실지 궁금해졌다. 나도 그도 국적이 바뀌었지만, 그에게는 조국이라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있었으니 마지막에는 그곳에서 묻히고 싶지 않았을까. 나는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조종사이자 작가였던 생텍쥐페리는 1944년 지중해 상공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사치가 주어진다면 나도 그렇게 사라지고 싶었다.

* * *

장례 예배는 짧고 간소하게 끝이 났다. 발인만이 남았다. 교회 옆에 마련된 묘지로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가장 앞자리에서 일어나던 한재이의 어머니가 현기증을 느끼는지 비틀거리며 의자에 손을 짚었다.

옆에 있던 그녀의 아들이 어깨를 부축하고 기젤라가 손을 잡아 주었다. 베버 교수 부부 역시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의 위로를 받으며 한재이의 어머니는 결국 작게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모두 말없이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장례식은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한 행사지만 실상은 남겨진 가족들을 위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큰 위로를 건네줄 자격을 부여받는다.

언젠가 그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한재이 혹은 나에게 큰일이 생기면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로서 많은 일들을 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상상 속에서의 나는 지금보다 더 당당하고 높은 위치에서 그의 가족을 보살폈다. 가려야 할 자리 따위는 없었고 마주치기 불편한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좌천당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재이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기대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기젤라의 손을 꼭 붙잡고 예배당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가족처럼 어울렸다.

한재이의 어머니는 내가 아닌 기젤라의 위로를 원했고 오늘은 그런 자잘한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들을 내버려 둔 한재이를 딱히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나만 슬프고 말면 되는 일이라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기로 했다.

“우리도 나가자.”

크리스가 모른 척 어깨를 툭 치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빈 묘지 하나를 둘러싸고 추모객들이 하관을 지켜보았다. 망자의 가족들이 한 명씩 나와 삽으로 흙을 떠 관 위를 덮었다. 담담하게 발인을 치르는 한재이에 비해 그의 어머니는 자꾸만 자리에 주저앉았다. 목사의 짧은 축도가 이어진 뒤 추모객들이 차례로 나아가 꽃을 던지며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나는 그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 죽은 한재이 아버지의 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몰려왔다. 망자는 제 장례식의 손님을 가려 받을 수 없어 보고 싶지 않은 얼굴까지 마주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그게 나였을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한재이 아버지에게 끝까지 인정받지 못했지만, 죽음이란 그전에 일어났던 감정을 부식시키기에 남은 원망이나 미움은 없었다. 그래서 나 역시 한재이에 대한 내 감정을 그에게 사죄하지 않았다. 묵념을 하며 언젠가 그가 내게 빌려주었던 데미안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충분히 알아들으셨으리라. 부디 영면하시길. 그렇게 나는 한재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발인이 끝나자 가족과 친지들은 케이크와 차를 마시기 위해 미리 마련해 둔 카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지인들은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로써 장례식은 모두 끝이 난 셈이다. 이곳에서는 일부러 울어 주지도, 웃어 주지도 않는다. 독일의 장례식은 무뚝뚝하고 고요하다.

“같이 가. 네 자리도 예약해 뒀어.”

한재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조금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마워. 근데 내가 낄 자리는 아닌 것 같아. 어머니 많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 잘 보살펴 드려.”

그는 내가 에둘러 거절한 이유를 단번에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향해 돌아섰다.

멀어지는 한재이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슬픔이란 것도 여유가 있을 때 부리는 사치였구나. 그도 아버지를 잃었는데 언제쯤 제대로 슬퍼할 수 있을까. 하루 이틀 늦게 시작해 보겠다던 그의 다짐은 점점 더 그 기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맥시, 오랜만이야.”

그때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기젤라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러자 그녀가 나를 흘겨보며 가볍게 웃었다. 잘 지내지 못했다는 걸 뻔히 알 텐데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뜻이었을까.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변명했다. 그냥 인사잖아, 늘 하는.

“뭐, 나름 잘 지냈지. 잠잠해질 만하니까 또 이런 일이 생기네. 많이 놀랐어. 혹시 내가 여기 와 있어서 기분 나쁘거나 그런 건 아니지? 나 한 교수님하고도 많이 친했어. 그래서 온 거야.”

“알아. 상관없어.”

“여기서 며칠 지내다 갈 거야? 휴가 냈어?”

“아니. 비행 하나만 취소하고 온 거라 바로 들어가 봐야 해.”

“냉정하다, 맥시. 옆에 있어 줘야 하지 않아?”

그녀는 검은색 트렌치코트 자락을 여미며 내게 물었다. 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모두가 같은 질문을 하는데 매번 대답하기가 참 곤란하다. 더욱이 기젤라에게 한재이와 있었던 사적인 일들을 떠벌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장기 휴가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또 휴가 내기가 힘들었어. 비행 나올 때 다시 들를 거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유럽으로 오는 비행 스케줄이 많이 남아 있으니 언제고 또 찾아올 생각이었다. 나라고 혼자 청승 떨며 마냥 한국에서 기다릴 계획은 아니었으니까. 가능한 가까운 곳에서 머무는 것이 지금 내가 한재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만 필요하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그런 위치 말이다.

“재이가 혹시, 별말 안 했어?”

기젤라는 어딘가 미안한 얼굴을 하고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꺼내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고백으로 인해 한재이와 나는 서로의 치부를 보았었다.

나도 기젤라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줄곧 궁금했지만 기회도 없었고, 설사 있다 해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평생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얘기를 꺼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좀 걸을까?”

내 제안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묘지 옆으로 난 숲길을 걸었다. 포장되지 않은 길가에 떨어진 잎들이 이불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며 낙엽을 밟았다. 바스슥 부서지는 소리만큼이나 그녀와 내가 걷는 모양새는 참으로 쓸쓸해 보였다.

“그때, 왜 고백 안 했어?”

기젤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마 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말했던 ‘페어플레이’의 대상은 사실 내가 아니라 자신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겠지. 하지만 나라고 그녀와 한재이를 괴롭히기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내 대답은 늘 같았다.

“많이 좋아했잖아. 그러다 정말 나랑 그냥 결혼해 버리면 어쩌려고 그랬어. 상관없었어? 아니면 그가 널 택할 거란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나는 말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자작나무가 늘어진 숲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한재이가 내게 했었던 같은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의 시간을 낭비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이제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확신은 없었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오해하지는 마. 그냥 그때 나는 여유가 없었어. 네게 질투했었고 재이에게 배신감을 느꼈으니까. 그런 와중에 내가 먼저 고백해서 나를 좋아해 달라 하고 싶지는 않았어. 스스로 깨닫지도 못할 정도의 감정이라면 너와 결혼하는 편이 그의 인생에 더 맞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고.”

“멋지네.”

“이기적인 거지.”

10월의 가을바람이 길게 내려와 바닥까지 찬 공기를 밀어 넣었다.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허리를 곧게 편 뒤 깊은숨을 한번 토해 냈다. 한 줌의 따듯한 호흡이 금세 공중으로 흩어졌다.

“나도 이기적이었지. 네가 고백해 줬다면 뭔가 너희 둘에게 내가 뒤통수 맞은 상황이 되니까 파혼하더라도 마음은 편하겠다 싶었거든. 그런데 철저하게 재이와 나 둘의 문제로 끝나고 말았어. 그래서 처음엔 네가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

“들었어. 그 점은 나도 유감이야.”

“괜찮아.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최근에야 느꼈는데 차라리 그렇게 헤어져서 더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재이는 정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거든,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

기젤라는 그때를 회상하듯 정면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우리의 걸음도 조금씩 느려졌다.

“뭐라고 했는데.”

“재이가 얘기 안 해 줬어? 너희 은근히 그런 거 가리는구나.”

“대충은 들었어. 결혼할 거면 나랑은 더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며.”

그녀는 그때 생각이 나는지 소리 내 웃었다.

“그래, 그게 좀 충격이었는지 그때부턴 심각하게 받아들이더라고.”

사실 나는 이 부분이 내내 궁금했었다. 그녀에게 함께 걷자고 제안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재이가 기젤라와 파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날, 우리 사이에 대해 자각하게 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질투와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얻은 결론이었으니 그의 경우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15년 세월의 상실감을 견딜 수 없어 선택하게 된 결과는 아니었을까. 한재이가 내게 품었던 의심의 씨앗이 내 안에도 자라나 싹을 틔웠다.

“뭐랄까. 재이는 너를 자기 인생에 디폴트 값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 보고 안 보고를 자기가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가족도 연 끊고 지내면 남남이 되는 시대에 너무 웃기지 않아? 정신 좀 차리라고 했어. 내가 볼 때 그거 사랑인 거 같다고.”

“…….”

“그런데도 끝까지 너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거야. 그때까진 좀 기뻤어. 본인이 아니라는데 내가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시간 주면 알아서 정리하지 않을까 해서 며칠 좀 내버려 뒀었거든. 그런데 딱 일주일 만에 나타나서 파혼하자는 거야. 너무 열 받아서 말도 안 나오는데 무릎까지 꿇고 미안하다더라. 하, 진짜…… 얼마나 화가 나던지. 하하.”

기젤라는 웃고 있었지만 미간을 찌푸렸다. 좋은 기억이 아님이 분명한 그 날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며 그녀는 다시 상처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느새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나서 바로 너한테 달려간 걸 알고 깨끗하게 포기했어. 넌 어땠어? 그가 와서 좋았어?”

기젤라는 흩날리는 금발을 쓸어 올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승자의 소감을 묻는 듯한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간단히 답할 수 없었다.

“글쎄, 그냥 좋았다고 하기에는 좀 복합적인 감정이라 설명하기는 어려워. 아무튼 미안해. 내가 방해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너는 우리 때문에 상처를 받았어. 다만 재이 역시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만 알아줘. 지금까지도 너한테 많이 미안해하거든.”

결국 나는 인정했다. 그들의 파혼에 나 역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내가 사과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하다못해 한재이에게 죄책감을 안겨 주는 수많은 일 중 하나라도 덜어 주고 싶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장면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다. 네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며 일으켜 세워 주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배신자라 칭하며 그를 가장 괴롭혔던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알아. 그가 정말 나쁜 놈이었다면 내가 먼저 차 버리고 말았겠지. 재이는 좋은 남자야. 내 인생에 다시없을 로맨틱한 사람이었지. 걱정 마, 난 용서했어. 이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기젤라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듯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더니 양팔을 벌리고 웃었다. 그러고는 앞서 몇 발짝 나가다 뒤를 돌아보며 나와 정면을 마주 보고 섰다.

“재이는 너한테 뭐야?”

그녀는 조금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너무 사적인 내용이라 내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비스듬히 시선을 던지며 내 표정을 훑었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런 걸 물어?”

“그냥. 그때 같은 질문을 재이한테도 해 봤거든. 대체 맥시가 너한테 뭐냐고.”

그러면서 눈썹을 치켜올린 채 당시 한재이의 대답이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말이 없자 재미없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앞을 향해 걸었다. 나는 그 뒤를 말없이 따라 걸으며 한참을 고민했다. 두려우면서도 알고 싶었다.

“뭐라고 했는데.”

망설임 끝에 되물어본 나의 질문에 기젤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단어를 내뱉었다.

“친구.”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리고 전부.”

그녀는 뒤를 돌아 뒷걸음질 치며 나를 보고 웃었다. 지긋지긋한 놈들. 그래서 내가 꺼져 주었는데 행복하니? 그 물음에 완벽한 긍정을 할 수 없어 그냥 계속 걸었다. 숲길은 끝도 이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의 그 말을 끝으로 내 안에 잠깐 동안 싹을 틔운 불신의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전부’라니. 그런 건 친구가 아니잖아. 당시 한재이가 느꼈을 사고의 과정이 내게 암시처럼 전해져 왔다. 스스로 모순된 말을 내뱉으며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의 세계는 무너졌을까, 새로 생겨났을까.

로마에서 내게 말없이 키스하던 날을 다시 떠올렸다. 그의 결심과 용기에 가슴이 일렁였다. 아마 그날 내가 그를 밀어냈다 한들 한재이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신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그가 늘 주장하던 나에 대한 그 ‘확신’이 이제야 진실하게 전해져 온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내가 가진 죄책감이 만들어 낸 저주에 상처받아 ‘전부’를 잃은 표정으로 무너져 내리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센 통증이 일었다. 스스로의 노력 없이 얻은 사랑의 대가를 뒤늦게 치르는 것 같았다.

“맥시, 너무 말이 없네.”

“미안. 잠시 생각 중이었어.”

“그의 대답이 감동적이긴 하지?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듣는 사랑 고백은 짜릿할 거야.”

기젤라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 발 한 발 장난스레 내디뎠다. 런웨이를 걷듯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 나가기도 하고 거기서 다시 나를 기다렸다 보폭을 맞춰 같이 걸었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온 사람치고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쩌면 그녀가 이 상황을 통쾌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재이 부모님에게는 내가 아들 인생 망친 주범이 되어 버린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어머니 옆에 다가가 위로하고 그 자리를 즐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지 선한 사람은 아니라서 인간의 의도를 늘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나는 기젤라에게 입체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나로 인해 힘들었을 그녀의 지난 몇 개월에 대한 미안함과 한때 한재이를 차지했던 사람이었다는 질투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자각을 두들겨 주었던 그 역할에 대한 고마움과 오늘은 나를 떠보는 듯한 행동에 관한 의심까지 생겨났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재이에게 미련 있어?”

그녀는 소리 내 웃었다.

“전혀 없어. 나는 그냥 약간, 뭐라 그러지? 너희가 궁금해.”

기젤라는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와 함께 발을 맞추어 걸었다. 낙엽은 점점 더 쌓여 발목까지 덮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베어져 방치된 나무들이 길옆을 따라 길게 누워 있었다. 그 위로 잔뜩 올라온 흰 버섯들이 보였다.

“너희 둘은 좀 재밌어. 흔하지 않은 관계라서 그런가? 내가 한 발 빼고 보니 지켜보는 게 흥미롭더라고. 둘 다 굉장히 아닌 척하는데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발끈해. 재이는 그걸 좀 쉽게 표현했던 편이라서 나한테 들켰지만, 맥시 너는 한 수 위야. 감정 표현을 잘 안 하니까. 그래도 뜯어보면 근본은 같아. 너희가 서로에 관해 말할 때는 그 밑에 아가페가 깔려 있어. 무조건의 사랑이지.”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 나도 재이도 평범하게 화내고 싸워.”

“그럼 다행이네. 난 좀 너희가 어떤 의미로는 너무 완벽해서 불안해 보였거든. 완전무결한 존재는 작은 금이 가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잃잖아. ‘왕자님과 왕자님은 평생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하고 동화처럼 끝날 수 있을지 궁금해졌어. 나쁜 뜻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 호기심이라고 생각해 둬.”

기젤라는 ‘호기심’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나는 그 속에 감춰진 복잡한 심경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그녀 역시 우리에 대해 입체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선택받지 못했다는 비통함과 더불어 이 관계를 자신이 이어 줬다는 묘한 만족감. 그래서 그 끝을 궁금해하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해피 엔딩을 바라는지 잔혹 동화를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까지의 전개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현재 우리는 아주 행복하지도 매우 불행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 이야기 속에서 한재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그를 구하러 가는 이는 내가 되어야 하겠지. 관객은 필요 없다.

“관심 가져 주는 거 고맙긴 한데. 알다시피 우리가 서커스 공연을 하는 게 아니라서 구경꾼은 사양이야. 미련 있는 게 아니라면 서로 안 보고 사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그녀를 마주 보고 서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걸어온 길을 바라보며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알렸다.

“음, 맥시 너 정말 맺고 끊는 게 확실하구나.”

“뭐든 시간 낭비하는 건 질색이니까.”

말귀를 알아들은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 반가웠어. 이제 서로 궁금한 것도 없고 들을 이야기도 없으니까 더는 볼 일 없겠네?”

“오늘 같은 비극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렇겠지.”

“그래, 그건 재이에게 너무 가혹하다. 그런 의미로 생각해 본다면 다시 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게 맞겠네. 잘 가. 난 좀 더 걸을게. 행운을 빌어.”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해가 내려와 나뭇가지 틈으로 빛이 쏟아졌다. 그녀는 그 빛을 따라 이어진 길로 몸을 돌렸고 나는 죽은 자들의 무덤이 있는 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내게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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