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Landing (9/10)

9. Landing

눈을 뜬 건 다음날 오후가 넘어서였다. 옆을 보니 조용히 잠들어 있는 한재이의 나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베개 밑에 손을 집어넣은 채 반쯤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간신히 허리 아래에 걸쳐진 얇은 시트가 엉덩이를 가려 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 섹시했다.

장작 9시간 넘게 뒹굴었다. 중간에 씻고 쉬는 시간을 뺀다 해도 신기록이었다. 그동안 못했던 섹스를 한 번에 몰아 하는 사람들처럼 그도 나도 누구 하나 먼저 백기를 들지 않았다. 그러니 매우 피곤할 것이다. 베개에 파묻힌 그의 얼굴에 피로감이 보일 정도였다.

보통 한재이는 섹스 할 때 나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나를 흥분시키고 느끼게 해 주고 싶어서 끊임없이 정성을 들인다. 그래서 대부분은 사정 직전에 멈추는 편이었지만 어제는 자신도 여러 번 가 버린 탓에 평소보다 체력 소비가 많았을 것이다.

많은 커플이 여러 종류의 섹스를 즐기지만, 그와 나의 취향은 한결같았다. 완벽한 상호 작용에 의한 교감. 그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는 괴로움과 쾌락을 함께 느끼는 내 표정에 반응하고, 나는 그렇게 반응한 한재이의 신음으로 오르가슴의 스위치를 당긴다. 주고받는 흥분의 양을 저울로 잴 수 있다면 우리가 느끼는 양은 늘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감상이 끝났다. 이제 한재이를 깨워야 하기에 천천히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짧게 입 맞추고 이름을 불렀다. 촉감과 목소리에 반응한 그가 살짝 몸을 움직였다.

“음.”

그에게서 잠결에 가라앉은 숨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그러다 등 근육이 조금 움직이더니 곧바로 상체가 돌아갔다. 그는 정면을 향해 누워 천천히 한쪽 눈을 떴다. 그리고 제 가슴에 턱을 괴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거 아직 꿈이야?”

한재이의 잠꼬대 같은 소리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럼 증명해 봐.”

“뭘.”

“네가 진짜라는 거.”

나는 살아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고자 그의 눈앞에 손바닥을 펼쳐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으며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우서진임을 증명해 보라 했다.

좀 유치하지만 그의 잘생긴 코끝에 키스했다. 그리고 다시 밑으로 내려와 입술에도 키스했다. 이제 두 눈을 뜬 그가 예고 없이 혀를 넣으며 내 입술을 먹어 치웠다. 키스하면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어나.”

겨우 입술을 떼어 내고 그를 설득했다. 이대로 두면 다시 밤이 될 때까지 침대에서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아쉽지만 나는 오늘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 내일 새벽 곧바로 공항으로 가야 했기에 오늘 밤까지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그와 더 시간을 보내다가는 조종할 체력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될 것 같았다.

우리는 이른 저녁을 차렸다. 발코니 테이블에 식탁보를 두르고 2인용 소파를 밖으로 빼냈다. 그 위에 담요 2개를 깔고 쿠션을 여러 개 받쳐 푹신한 자리를 만들어 두었다.

한재이가 만들어 둔 치킨 스튜가 주물 냄비 안에서 다시 끓어올랐다. 냄새가 어마어마하게 좋아 식욕을 강하게 당겼다. 나는 빵과 오렌지 주스를 준비했고 그는 스튜를 냄비째 옮겨 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눈이 내린 뮌헨의 아파트 발코니에 낭만적인 저녁 식사가 마련되었다.

“맛있어.”

나는 한재이의 요리 실력을 칭찬했다. 밑간이 밴 닭고기가 상당히 부드러웠다. 자작하게 잠긴 스튜 그릇 안에는 야채와 감자가 촘촘히 들어차 있었다.

스푼으로 건더기를 몇 개 더 건져 먹고 나자 그가 따뜻하게 데운 빵을 건넸다. 결대로 찢어지는 흰 빵을 스튜에 찍어 먹었다. 허기가 져서 그런지 천국에 온 것 같았다.

“안 추워?”

한재이가 담요를 밀어 주며 내 엉덩이 밑으로 손을 넣었다. 자리의 온도를 재어 보려 한 것 같아서 이미 충분히 따듯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멋대로 빵을 찢어 스튜 그릇에 넣어 주기도 하고 그걸 받아먹는 나를 한참 구경하기도 했다. 그는 먹는 것에 별 흥미가 없는지 자꾸만 나를 만지작거렸다.

물론 예전부터 한재이가 나를 돌보는 행위에 무척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친구였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매우 익숙하다. 다만 오늘따라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좀 말리고 싶었다. 아까부터 삼킨 빵이 목구멍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릇을 내려놓고 주스를 마셨다. 그리고 별로 줄지 않은 한재이의 그릇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왜 안 먹어. 다 식잖아.”

그러자 내가 그릇을 내려놓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가 두 팔 벌려 나를 껴안았다. 너무 꽉 안긴 탓에 숨이 조금 막힐 지경이었다.

“배 누르지 마.”

내 말에 한재이가 큭큭거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더 복부를 만졌다. 고작 치킨 스튜에 사라질 복근은 아니었지만, 왠지 검사받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배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가 등 뒤에서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한국 안 가면 안 되나.”

너무 솔직한 그의 감상에 나도 모르게 걸고 있던 미소가 살짝 슬퍼졌다. 그 역시 헤어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어제 우리는 죽음도 불사할 사랑을 절절하게 읊었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와 나는 이제 현명해져야 한다.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눈이 쌓인 이웃집들이 보였다. 모두 같은 크기의 하얀 지붕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마치 레고 장난감을 진열해 둔 것 같았다.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내 옆에는 따뜻한 스튜, 그리고 포근한 담요가 있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저녁 식사는 그렇게 한 번씩 멈춤을 반복하며 느릿느릿 여유롭게 끝나고 있었다.

우리는 음식을 물리고 몸을 겹쳐 소파에 기대었다. 나는 한재이의 가슴에 등을 댄 채 노을 지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런 나를 담요로 꽁꽁 싸맨 뒤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일단, 먼저 전제해 두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재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듣고만 있었다.

“나 계약 파기하고 독일로 돌아올 수 있어. 해지 통보 기간이 4주 정도 되니까. 최단기간으로 잡으면 한 달 정도 걸려. 네가 원하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할게.”

어떤 결론을 내더라도 이 부분은 알려 주고 싶었다. 지난번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심어 주었으니 이제라도 사실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나도 그를 위해 언제든 모든 걸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잃을 것들이 아깝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역시 함께 있자는 결론이 난다면 이번에는 내가 노력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재이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그러지 마. 지금 바로 관두게 되면 비행 시간 채우기도 힘들어지고 결국엔 LCC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이번엔 내가 죄책감을 가질 거 같아. 네가 한국에서 나한테 느꼈던 미안함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나도 알아.”

나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에 가만히 손을 겹쳤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낭만을 버려야 한다.

“그래도 보고 싶을 텐데, 어떻게 참아.”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일방적인 장거리 연애를 할 때도 매일 그가 보고 싶어서 힘들었는데, 다시 이어진 지금 어떻게 떨어져 살 수 있을까. 과연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싶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어깨에 완전히 기대었다. 살짝 밖을 바라보며 생각 중인 한재이의 얼굴이 보였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가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나를 깨달은 듯 시선을 내렸다.

“LH에 자리 날 때까지 기다렸다 오는 건 어때. 대우도 똑같이 받을 수 있을 거고.”

그는 내게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회사로 다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음, 티오가 언제 날지 몰라. 기장급은 자주 비는 자리도 아니라서 반년 이상 기다려야 할 수도 있어.”

반년도 빠르다. 1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래. 그래도 기다리지 뭐. 대신 근처에 비행 있을 때마다 우리 집으로 오는 거로 해. 계속 나랑 같이 밥 먹고 같이 자는 거로. 가까운 거리면 내가 움직여도 되고, 짧게라도 볼 수 있으면 무조건 만나. 그러다 보면 시간은 가겠지.”

한재이는 어른스럽게 말을 내뱉었지만, 마음은 그게 아닌 듯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내 손을 가져다 자신의 뺨에 비볐다. 찬 공기에 식은 그의 살갗을 느끼며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러 주었다. 보이지 않는 제 눈물을 닦아 주는 내 손끝에 그가 여러 번 입 맞추었다.

우리는 안다. 기다림은 길고 시간은 더딜 것이다. 짧은 만남의 밤 끝에 찾아올 아침을 원망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은, 한 번도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도망가려던 나를 그가 잡았고, 미래를 두려워하던 그를 내가 잡았다. 고난의 시간 동안 새겨진 그 확신은, 결국엔 서로가 전부였음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만나면 싸울 시간도 없겠네.”

나는 지난날의 과오를 웃으며 놀려 댔다.

“싸우는 게 다 뭐야, 잠잘 시간도 별로 없을 거야.”

그가 얼굴을 내려 부드럽게 키스했다. 내 손은 여전히 그의 뺨에 머물러 있었기에 그대로 머리칼을 헤집으며 더 깊이 그의 혀를 받았다. 말랑말랑한 점막을 훑고 매끈한 입술을 집어삼켰다. 찬 바람을 맞으며 주고받는 키스가 곧바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대로 두면 다시 불이 붙을 것 같았다.

“나 이제 가야 돼.”

겨우 입술을 떼고 그에게 말했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한재이의 섭섭한 표정은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내 마음과 같았다. 그런데도 그 모습이 꽤 귀여워서 그의 코와 뺨에 또 여러 번 입 맞춰 버렸다. 한재이는 찡그림과 미소 섞은 얼굴로 키스 공세를 받아 내고 있었다.

“끝났어?”

한참 지속되던 나의 공격이 멈추자 이번엔 그가 다시 등을 굽혀 덤볐다. 얼굴과 목 할 것 없이 온몸에 버드 키스를 쪼아 대는 통에 간지러움이 올라왔다. 팔이 그에게 꽁꽁 묶인 탓에 반항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 섞인 비명에 옆집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알았어, 알았어. 항복, 그만해.”

“항복의 의미로 키스해 줘.”

대답할 새도 없이 다시 그에게 입술이 먹혔다. 소파 밑으로 담요가 떨어졌다. 이러다가는 영영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도 같았다. 뮌헨 공항에 폭설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겨우 한재이를 떼어 놓고 테이블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같이 치우자.”

“괜찮아.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준비해.”

그가 내 등을 떠밀며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순간 미안함과 동시에 짧은 환희를 느꼈다. 인간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어지르는 것만 좋아한다. 청소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무언가를 치워 주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봐야 한다. 대개는 부모와 연인이 그러하다.

옷을 갈아입고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잔뜩 가져왔는데 건네줄 시간도 없었다.

한재이가 아직 발코니에서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동안 나는 그의 서재로 몰래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서류들을 옆으로 밀어 두고 선물을 잔뜩 올려 두었다. 짧게 메모도 썼다. 산타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손바닥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네, 엄마. 말씀하세요.”

순간 발코니 쪽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한재이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터라 그대로 벽에 기대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아요. 응, 주말에 갈게요. 괜찮아요. 울지 마요, 엄마.”

그는 테이블을 치우다 말고 허리에 손을 짚은 채 가만히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거나,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짧게 대답하면서도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떠나 버린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가 메꾸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니요, 서진이 와 있어요. 네…… 그렇게 될 거 같아요. 고마워요. 주말에 봐요.”

그 대화는 몇 달 전 그의 아버지와 나누었던 통화 내용처럼 조각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았다. 그 대화 속에 등장하는 내 위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의 인생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한재이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뒷모습으로는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어머니가 흩트려 놓은 감정을 내게 들키기 전에 정리 중인 듯했다. 밖은 노을빛이 근사하게 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발코니 문 너머에 있는 그가 잠시 현실을 떠나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방금까지도 나와 웃고 입을 맞추며 행복해했었다. 그리고 혼자가 된 지금은 슬며시 찾아온 불행과 다시 마주했다. 사랑의 환희와 상실의 고통이 한데 섞인 그의 시간이 눈 내린 뮌헨의 늦은 오후와 닮아 있었다. 나는 명화를 감상하듯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오늘 말해 보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온다. 아주 평범하고 별것 아닌 날이지만 돌아보면 인생이 둘로 갈라지는 분기점이 되는 순간이. 15년 전 한재이와 처음 만났던 날 아침에도 나는 평범하게 자전거를 타고 놀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특별히 날을 가리고 싶지는 않았다.

발코니 문이 열리고 그가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그릇들을 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말없이 따라 들어온 나는 벽에 기대어 그릇을 정리 중인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한재이가 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내가 별말이 없자 남은 음식들을 한데 모았다. 접시는 식기 세척기 안에 가지런히 꽂아 두었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고 쓰레기봉투를 묶었다. 손이 더러워졌는지 개수대에 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내가 물었다.

“어머니랑 통화한 거야?”

“응. 요즘 자주 전화하시거든. 주말에 가 보려고.”

나의 질문에 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해 주었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야?”

“그런 건 아닌데, 혼자 있기 외로우신 거겠지. 40년을 함께 산 사람이 없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잖아.”

그가 물기 묻은 손을 털고 나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그 말에 동의했다. 어제 우리가 상상만으로 경험했던 상실의 고통을 그녀는 실제로 겪고 있을 테니까.

“근데 왜?”

한재이가 마른 수건에 손을 닦으며 내게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가.”

“아까부터 무슨 할 말 있는 것처럼 그러고 서 있잖아. 늦었다면서. 준비는 다 했어?”

그가 식기 세척기 안에 세정제를 넣고 버튼을 눌렀다. 위잉 하고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주 평범하고 별것 아닌 일상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재이야.”

“응?”

그는 대충 대답하며 남은 치킨 스튜를 덜어 둔 볼을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우리 결혼할래?”

순간적으로 그가 멈췄다. 냉장고 안에 반쯤 몸을 밀어 넣은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가 있는 공간에만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냉장고가 경고음을 내며 문을 닫아 달라 아우성쳤다.

한재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매우 진지하고 또 놀란 표정이었다. 농담이라도 내가 그런 이야기를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다시 한 번 천천히 되물었다.

“……진심이야?”

“응, 너무 갑작스러웠나.”

나는 어깨를 만지며 살짝 웃었다.

“당장 하자는 건 아니니까 바로 대답할 필요 없어. 그냥, 나는 그러고 싶다는 걸 말해 두고 싶었을 뿐이야.”

그의 가족이 되고 싶다는 건 나의 욕심일 수도 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두가 결혼하는 것도 아니었고, 결혼했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사실 한재이는 이미 한 번의 결혼 시도를 했던 사람이었고 그 근처까지 가서 파국을 맞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의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이유를 궁금해했다.

하긴, 우리는 이미 지난한 과정을 거쳐 사랑을 확인했으니 굳이 사회적인 제도로 다시 증명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에게는 알리지도 못할 동성 결혼. 그런데도 굳이 왜 하고 싶어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모든 비극을 겪으며 내가 내린 결론을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요즘 결혼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할 기회가 있었거든. 물론 나는, 예전부터 그랬지만 이런 제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야. 지금도 연애의 끝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게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는 걸까.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한재이는 조용히 경청 중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가족이 되고 싶어서, 인 거 같아.”

나는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학자와 같은 말투로 내뱉고 있었지만, 실상 마음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오독 없이 전달하기 위해 말을 너무 고르는 바람에 감정을 충분히 싣지 못했다. 고저 없는 나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가족이 뭔지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했어. 나는 태어날 때 운이 좀 없어서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가 단순했거든. 피를 나눈 사람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 그런데 우리 부모님을 보면서, 그리고 너에 대한 감정을 겪어 내면서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최근에 깨달았어.”

“…….”

“각자 생각하는 게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제 내게 가족이란 건, 다른 사람에게는 차마 보여 줄 수 없는 고통을 드러내고 위로받을 수 있는 관계. 그런데 갚을 필요는 없는 사이.”

나는 숨을 한번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행복한 순간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는 연애를 하지만, 불행마저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는 결혼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

살짝 처졌던 시선을 다시 올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도 네 불행을 함께하고 싶어. 그래서야. 그게 이유야.”

그래, 그게 다였다. 큰 결핍을 겪었던 그의 옆에 있어 주지 못해 서러웠고, 지금도 가끔 헤매는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시시하리만큼 단순한 이유를 모두 고백하고 나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나는 정말 이런 쪽으로는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이다. 민망한 마음에 슬쩍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프러포즈가 너무 멋없어서 미안.”

나의 농담에 한재이가 옅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하릴없는 오븐의 시계가 7시 정각으로 바뀌었다. 식기세척기 안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정지되어 있던 주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청혼조차 이렇게 우아하게 하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 그는 일렁이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가슴이 벅찬 듯 숨소리도 커졌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마른침을 한번 삼킨 그가 두 번째 감상을 들려주었다.

“살면서 들어 본 그 어떤 말보다도 감동적이었어.”

그의 얼굴에 이미 긍정이 녹아 있었다.

행복함에 만취되어 그렁대는 눈동자 역시 그러했다. 자꾸만 입술을 짓이기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도 그랬다. 그런 일련의 반응들로 미루어 보아 그가 내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듯했다. 우리는 천천히 다가가 서로를 안았다.

한재이의 품은 편안했다. 그와 나는 조용한 연못에 쪽배를 탄 사람들처럼 몸을 바짝 붙였다. 떨어지면 큰일 나는 사람들처럼 꽉 끌어안았다. 신혼집부터 구해야겠다는 그의 말에 실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행복이 멋대로 새어 나온다.

“근데 너 아직 대답 안 했어.”

농담을 섞은 내 말에 한재이가 파스락거리며 웃었다. 덕분에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그가 내 얼굴을 살며시 틀어쥐었다. 그리고 제 어깨에 기대게 한 뒤 잘 들으라는 듯 귓가에 속삭였다.

“결혼하자, 서진아. 나도 네 불행을 함께하고 싶어.”

뱉어 낸 말이 생명력을 얻어 날개를 펼쳤다. 벅차오르는 마음에 그를 더 꽉 안았다.

니콜라우스의 날이 하루 지난,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주말을 2주 앞둔 오후였다. 식기 세척기의 요란한 기계 소리가 들리고 창밖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이른 저녁을 함께했고 소파 위에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특별할 것 없는 날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나는 한재이에게 청혼했고 그는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나를 호텔로 데려다준다는 명목하에 그는 눈 내린 뮌헨을 같이 걸었다. 지름길을 두고 점점 더 돌아가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영국 정원을 지나 마리엔 플라츠로 들어섰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백색 첨탑 밑으로 전구들이 반딧불처럼 흩어져 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잠깐 들렀다 가자.”

오랜만이라 나는 기분이 들떴다. 한재이는 여부가 있겠냐는 표정으로 나를 따라 들어왔다. 사람들을 뚫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트럭을 개조해 만든 간이 판매대가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따뜻한 글루바인(끓여 먹는 독일 와인)이 김을 내며 향을 풍겼다. 눈사람 모양을 한 커다란 빵이 가판대 위를 장식했다. 인형극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지나쳤다. 못생긴 산타 장신구들이 잔뜩 쌓인 판매대를 구경하던 중에 한재이가 팔을 잡고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맘에 드는 거로 하나씩 어때.”

골동품을 판매하는 가판대였다. 아무렇게나 쏟아 낸 것 같은 오래된 액세서리들이 나무통 안에 담겨 있었다. 어떤 금속을 쓴 건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녹이 슬어 있었다.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보이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그중에는 100년쯤 되어 보이는 반지들도 있었다.

“잘 골라 보게. 운이 좋으면 프로이센 왕국 시절 물건도 찾을 수 있어.”

판촉 행위를 하는 할아버지가 까슬한 수염을 만지며 우리에게 말했다. 물론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100년도 전에 만들어진 물건을 골동품 가게에서 사게 되어 사랑에 빠지는 그런 연출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월계수 가지가 조각된 반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재이에게 건네주며 단단히 못 박았다.

“설마 이걸로 대충 때우자 뭐 그런 뜻이면 사양할 거야. 다이아몬드 박힌 거로 사 줄 생각이거든.”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혼반지는 그래도 되는데 지금은 그냥 뭐든 사서 기념해 두고 싶어서.”

한재이가 고른 것은 아무 무늬도 없는 평범한 금반지였다. 물론 두 개 다 사이즈가 맞지는 않았다. 그래도 링을 교환하는 케케묵은 행위를 하고 나니 조금 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정말 약혼했구나.

다행히 할아버지는 적당한 가격만을 받았다. 덤으로 작은 루돌프 조각 인형도 하나도 끼워 주었다. 다 같이 코트 주머니에 넣고 그와 함께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 속에서 자꾸만 반지를 굴려 보게 된다.

한재이가 바글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글루바인을 한 잔 받아 왔다. 따뜻한 머그잔에서 오렌지와 시나몬 향이 올라온다. 뜨거운 김이 알코올과 함께 증발하며 코와 목 안을 가득 채웠다. 덕분에 잔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서야 겨우 한 모금 머금을 수 있었다. 피가 따뜻하게 도는 기분이다.

잔을 내려놓고 역시 그가 방금 사 온 과자 봉투를 받았다. 나는 이런 과자류를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함께 여행을 가면 한재이가 늘 어디선가 단 걸 구해 왔다. 케이크나 아이스크림, 설탕 발린 빵, 그도 여의치 않으면 호텔에서 몰래 가져온 초콜릿이라도 건네곤 했다.

나는 설탕 과자 하나를 꺼내 반으로 부러뜨렸다. 바사삭 부서지는 과자 가루를 털어 내고 맛을 본 뒤 남은 반을 한재이 입에 넣어 주었다.

“엄청 달아.”

그에게 미리 경고해 두었다. 입속에서 우두둑 과자 씹는 소리를 내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조금 찡그려졌다.

사실 가끔 그에게 미안할 때도 있다. 나 때문에 늘 단 음식을 맛봐야 하는 운명 같은 역할이랄까. 15년 고생했는데 앞으로는 더 힘들겠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또 미소가 지어졌다.

“왜 웃어.”

그가 겨우 입 안의 과자를 정리하고 글루바인을 마시며 물었다.

“그런 거 있잖아. 별거 아닌데 그냥 계속 웃음이 나는 거. 내가 지금 좀 그런 상태거든.”

그러자 한재이 역시 웃음이 전염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참기 힘들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호텔 같이 올라가도 돼?”

“안 돼.”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며 말렸다. 그리고 머그잔을 반납하러 발걸음을 돌렸다.

크리스마스 마켓을 나와 호텔까지 다시 걸었다. 따뜻한 술을 마셔서인지 추위는 한결 가신 느낌이다. 적당히 더워진 입 안에서 입김이 새어 나왔다.

혼자였다면 금방 도착했을 거리가 제자리걸음을 하듯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면 모든 연인들은 거북이가 된다. 엉금엉금 기어가던 우리는 눈치 없이 눈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호텔 입구를 보며 아쉬워했다.

이제 그를 보내야 한다. 잘 가라는 말에 한재이가 나를 껴안았다. 보기 드문 광경임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기에 안 그런 척하면서도 행인들이 한 번씩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재이야, 너무 오래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데.”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가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달래 보려 했는데 그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결혼할 사이니까.”

그러네. 나도 모르게 그 말에 설득당해 버렸다. 그렇게 긴 여운을 느끼며 그와의 이별을 당당히 아쉬워했다.

* * *

크리스마스 연휴 성수기를 맞은 공항은 놀라울 만큼 북적였다. 나는 관계자실에서 나와 입국 로비를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방금 편의점에서 산 따뜻한 캔 커피를 손에 쥐었다. 실내 공기에 너무 익숙해지는 것이 싫어서 요즘은 비행이 끝나면 10분씩 바깥 공기를 쐬기 위해 시간을 보낸다.

한재이와 재결합한 지 2주하고도 3일이 지났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만큼 더 자주 연락했다.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그의 요청에 여러 번에 걸쳐 음성 메시지도 보내 주었다. 그가 해 달라고 하는 것은 무엇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요즘 그 한계를 시험해 보는 중인 듯했다.

어제는 유니폼을 입은 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고 했다. 그것도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말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냉정하게 잘라 버렸을 부탁이었지만, 나는 고분고분 해달라는 것들을 들어주었다.

그러면 그 대가로 그의 웃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웃음은 이 지난한 시간을 버티게 해 주는 양분이었다. 그리움에 지쳐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붙들어 주는 지지대이기도 했다.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불렀다.

“제이미.”

갈색 머리의 파란 눈의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듣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나를 보고 크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막시밀리안, 비행 있었어요? 오랜만에 보네요.”

“그러네요. 일이 있어서 나오는 게 조금 늦었어요. 집으로 가나요?”

“아, 뭐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나 집이 없어요. 아직 호텔에서 지내거든요.”

제이미는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니 꼭 반년 전 내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그는 최근에 우리 회사로 이직한 캐나다 출신 기장이다. 우연히 한번 편조로 묶였던 덕에 이름을 외웠다. 비슷한 또래에 타 국적 출신이라 그런지 그도 나를 보면 늘 반가워했다. 성격도 좋아서 오다가다 보게 되면 멀리서라도 꼭 인사를 하러 왔다. 오늘은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했다.

“호텔이 어딘데요.”

“아, 이름이 뭐였더라.”

그가 휴대폰을 꺼내 어려운 한국어 발음을 또박또박 불러 주었다. 늘 생각하지만, 서양인치고는 키가 많이 작다. 170쯤 되려나. 그래서 그런지 늘 어딘가 챙겨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태워다 줄게요. 짐 가지고 와요.”

내 말에 표정이 밝아진 제이미가 버스 정류장에 세워 두었던 캐빈 백을 들고 따라왔다. 나는 빈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 그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종종걸음으로 옆을 따라오던 그가 물었다.

“비행은 어디로 다녀왔어요?”

“난 시드니요. 제이미는?”

“하와이요.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지상 낙원인 거 같아요.”

“돌아오기 싫었겠네. 나도 그랬어요. 시드니는 지금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잖아요. 아, 짐은 뒤에 실어요.”

내 가방과 함께 그의 짐을 트렁크에 싣고 곧바로 차에 올랐다. 사실 그가 묵고 있는 호텔은 집과 반대 방향이라 돌아올 때는 빙 둘러 와야 할 것이다.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혼자 사는 싱글에게 남는 것은 시간밖에 없다는 사실을 요즘 절실히 체감하는 중이었다.

차는 곧바로 외곽 도로로 진입했다.

“한국 생활은 어때요? 전에는 음식이 맛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렇죠. 가장 감동한 건 그, 밤에도 배달이 가능해서 놀랐어요. 덕분에 요즘 비행 끝나면 그, 양념 치킨? 그거 시켜 먹어요.”

그도 역시 한국 치킨의 매력에 빠졌나 보다. 하긴, 그건 정말 아무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한번 맛보면 다른 나라에서 파는 닭 요리는 모두 시시해질 정도니까.

“나도 치킨 좋아해요. 게다가 배달 정말 빠르지 않아요?”

“빠른 것도 그렇고, 호텔인데 괜찮냐고 하니까 로비 앞에서 전화 준다고 기다리라는 거예요. 놀랐어요. 서비스라기보다는 그냥 해 줄 수 있으니까 해 준다는 느낌인데. 그러고 보면 여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뭘 해 주는 걸 좋아하나 봐요.”

“그건 나도 처음 왔을 때 많이 느꼈어요. 첫 비행을 같이 나간 부기장이 있었는데 오프 때 같이 집까지 알아봐 줬거든요.”

“크…… 오프는 소중한데.”

“그러니까요. 아무리 동료라도 사실 사생활까지는 별로 관심 없잖아요.”

“전혀 관심 없죠. 하하.”

제이미가 내 말에 동조하며 웃었다. 평일 오후였기에 차가 밀리지는 않았다. 덕분에 기적처럼 연달아 신호를 두 번 받기도 했다. 거리 곳곳에 장식된 트리가 눈에 띄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였다.

“그러고 보면 막시밀리안은 한국에 왜 왔어요? 고향에서 살아 보고 싶어서? 근데 나 이거 전에도 물어봤었나.”

그가 뺨을 긁적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약간, 사랑의 도피 같은 거였는데.”

“네에?”

너무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가 놀라면서도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몸을 앞으로 바짝 기울이며 고개는 나를 향한 채 더 말해 보라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를 놀리는 것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약간의 과장을 섞었다.

“첫사랑이 나 배신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홧김에 여기로 도망 왔는데. 결국엔 내가 다시 빼앗았어요.”

“오…… 설마 불륜?”

방금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 사생활에는 관심도 없다고 하더니. 역시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은 남의 치정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니요. 결혼 직전에 파투 내서 데려왔어요. 그 친구가 좀, 내 말을 잘 듣거든요.”

“와우, 막시밀리안 보기보다 와일드한 면이 있네요.”

순진하게 그 말을 믿고 있는 제이미를 보니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과연 어떤 식으로 사내 소문이 퍼질까 결과가 궁금해졌다.

“그러게요. 몰랐는데 나도 그런 면이 있더라고요. 여기죠? 로비로 갈까요, 아님 지하로 내려갈까요.”

“아, 로비에 세워 주면 돼요.”

어느새 호텔에 도착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은 채 트렁크 문을 열어 주었다. 짐을 챙긴 제이미가 창문을 두드리며 인사했다. 짧게 손을 들어 주고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늦은 점심을 마땅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 들어가는 길에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요즘은 조금씩 집에서 요리도 하고 한식도 만들어 먹는 중이다. 이 모든 것은 시간이 잘 가지 않아서 생기게 된 취미인데 나를 이렇게 만든 주인공은 아직 연락이 없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그가 있는 곳은 아침 8시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은 튀빙겐에 가야 한다고 했으니 지금쯤은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깨워야겠다.

최근 통화 목록 가장 위에 있는 그의 이름을 선택하고 전화를 걸었다. 두어 번의 신호가 가자 곧바로 전화를 받는다. 방금 잠에서 깬 듯한 내 치정 이야기의 주인공이 오늘의 첫인사를 건넸다.

-Hallo, mein liebster.

한재이의 달콤한 부름에 나 역시 인사를 건넸다. 그래, 안녕 내 사랑. 좋은 아침이야. 상상 속에서 나의 몸은 이미 그가 방금 잠에서 깬 침대 위로 이동했다. 아직 눈을 다 뜨지 못한 그의 얼굴을 만지며 따뜻한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움이 사무치는데도 우리는 꽤 의연하다.

-어디야?

“마트 가는 중이야. 늦은 점심을 만들어 보려고. 어쩌면 저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음, 체력 좋은데. 시드니 비행 끝나고 돌아가는 길 아니야?

그는 나의 스케줄을 완벽하게 꿰고 있다. 어떨 때는 나보다 더 정확할 때가 있을 만큼. 무언가를 외우는 데 머리가 비상한 한재이는 이제 개인 수첩 같은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응, 좀 피곤하긴 해. 그래도 요리를 하면 시간이 꽤 빨리 흐르니까.”

-그거 신부 수업 받는 거라고 생각해도 될까?

“하하, 그렇게 생각하든지. 참, 서류 준비는 다 했어?”

그와 나는 말 그대로 결혼을 준비 중이었다. 하겠다는 결심을 했으니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예식도, 파티도 필요 없었다. 우리는 결혼 서류에 서명만 하고 끝내길 원했다.

사실 한재이는 거기서 한술 더 떠 바로 덴마크로 날아가자고 했다. 어차피 우리끼리 끝낼 거라면 유럽의 라스베이거스에서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게 빠르지 않겠냐고. 역시 그다운 발상이었지만 내게는 이 결혼에 딱 하나 욕심이 있었다.

“크리스가 승낙했어. 안 그래도 자기한테 부탁 안 하면 크게 화낼 생각이었대.”

나는 우리 결혼의 증인으로 언제나 내 편이었던 형을 선택했다.

-어련하겠어. 어제도 나한테 전화해서 한바탕 잔소리를 했거든.

“뭐라고.”

-신혼집은 어떻게 할 거냐고.

나는 소리 내 웃었다. 크리스는 참 별걸 다 간섭 중이었다.

사실 따로 집을 마련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언제 다시 독일로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몇 년간은 한재이의 뮌헨 아파트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공항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고 둘이서 지내기엔 크기도 적당했으니까. 파일럿은 집에서 지내는 시간만큼이나 호텔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긴 직업이다. 그래서 주거 공간에는 늘 흥미가 없었다.

“아직 그런 거까지 생각 안 해도 된다고 하지 그랬어.”

-그래, 그랬어. 근데 크리스가 솔깃한 제안을 하더라고.

한재이와 대화하며 어느새 마트 주차장에 도착해 버렸다. 그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이어폰을 꽂고 차에서 내렸다. 그도 침대에서 일어났는지 주변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피커폰으로 돌린 모양이었다.

-아는 부동산 업자가 이번에 분양받은 땅이 있는데 원래 사려고 했던 부부가 취소를 한 모양이야. 마켓에 내놓으면 금방 팔리겠지만 우리가 산다고 하면 프리미엄 없이 팔아 주겠대. 우리 그거 사서 이층집 짓자. 지하실도 내고 정원도 만들고.

“집을 짓자고?”

-응, 어차피 너 들어오려면 시간도 걸리고 여차여차 1년은 금방 갈 거 아니야. 그때까진 다 짓겠지.

그는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는 중인 듯했다. 물이 차르르 끓는 소리와 원두가 갈리는 소음이 들렸다. 상체를 탈의한 속옷 바람의 한재이가 삐죽 솟은 머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알았어. 관련 정보 이메일로 보내 줘. 위치가 괜찮은지는 봐야 할 거 아니야.”

-동네는 좋아. 바로 옆에 산책로도 있고. 마당을 넓게 빼고 수영장을 만들어도 될 거 같아. 너 수영하는 거 좋아하니까.

그는 이미 머릿속에서 집 설계에 착수한 듯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계획에 맞장구를 쳐 주며 마트에 마련된 카트를 끌었다. 크리스와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는 몰라도 왠지 나는 가서 서명만 하면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 이럴 때 보면 둘이 장단이 잘 맞는 거 같기도 하다.

손질이 끝난 야채 묶음 팩과 반조리 상태의 반찬들을 카트에 담았다. 하나를 사면 하나는 덤으로 준다는 기획 상품들 사이에서 평소 자주 먹던 만두도 꺼냈다. 장을 보는 것은 좀 지루한 일인데 오늘은 꽤 즐거웠다.

-아무튼 너 다음 독일 비행 있을 때 같이 가서 둘러보면 될 거 같아. 사실 네가 안 한다고 해도 땅은 내가 살 거거든.

“그럼 어차피 나도 반쯤 소유한 거랑 같잖아. 이제 네 재산의 반은 내 거야, 몰라?”

나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그를 놀렸다. 일전에 한참 화제가 되었던 한 예술가의 전시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혼하는 배우자에게 재산의 절반을 내주어야 하는 혹독한 독일 법을 비꼬는 내용이었다. 그는 멀쩡한 TV와 가구들을 보기 흉하게 반으로 잘라 전시해 두었다. ‘내 모든 절반을 그대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다 줄게, 서진아. 다 가져가. 명의도 바꿔 줄까?

그러나 한재이에게는 별로 통하지 않는 농담인 듯했다.

“또 앞서간다. 우리 아직 결혼 안 했어.”

나는 웃으며 사과를 골랐다.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내 말을 엿들었는지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들고 있는 사과 세트에 눈길을 주었다.

“새신랑이 아직 과일 고를 줄을 모르네. 그거는 맛없어.”

그러더니 자신이 고른 것을 내 카트에 넣어 주었다. 한눈에 봐도 그녀가 골라 준 쪽이 더 탐스러워 보인다.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다시 카트를 밀었다.

“아침 챙겨 먹어. 대충 커피로 때우지 말고. 이제 씻을 거야?”

-응, 집에 가서 다시 전화 줘. 그동안 씻고 나올게.

“나는 오래 안 걸려. 밥 먹고 바로 잘 거니까 너 혼자 되면 연락해 줘. 어머니한테 안부 전해 주고.”

-알았어. 그래도 심심하면 그냥 전화해.

“그래, 빨리 준비나 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장보기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고집을 부리는 한재이를 욕실로 밀어 넣고 통화를 끝냈다. 계산대로 향하는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동일 인물인가 싶어 얼른 받았더니 낯선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우서진 씨 전화죠? 아이고, 참 통화 한번 하기 힘드네.

“네, 그런데 누구시죠?”

-아, 여기 배달업체인데요. 지금 댁에 계신가요? 물건이 많아서 문을 좀 열어 주셔야겠는데 이거.

순간 내가 택배 받을 것이 있었나 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짚이는 것이 없었다.

“한 20분 정도면 도착합니다.”

-예에, 그러면 맞춰서 갑니다. 가서 문 좀 열어 주세요.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에 잠깐 멈칫했지만 뱉은 말이 있으니 서둘러야 했다. 계산을 끝내고 빠르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장을 봐 온 물건을 모두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초인종이 울렸다.

커다란 트럭 한 대와 기사분이 보였다. 문을 열어 주니 그가 계단을 올라와 인사했다. 그리고 현관문 아래 틈에 나무 조각을 끼워 넣고 문을 고정했다. 음, 가구를 주문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말이다.

예상대로 크고 작은 상자들이 계속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한두 개로 끝나나 했더니 거실이 꽉 찰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상자 위에 다른 상자들이 하나둘씩 쌓여 간다. 순식간에 집 안은 선물 상자로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나도 놀랐지만 기사분도 혀를 내둘렀다.

“내가 이 일 하면서 가정집에 이렇게나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배달하긴 또 처음입니다. 허허. 명절 때나 좀 그랬지. 어디 팬클럽에서 단체로 보냈나. 연예인이에요?”

“아닙니다. 근데 이게 다 뭐죠?”

“모르죠, 나도. 여기 업체가 뭐 심부름 같은 거 대신 해 주는 업체인데 우리는 거기서 배달만 해 주는 거라서요. 예쁘게 포장된 걸 보니 선물 아니겠어요? 여기 사인이요.”

“아, 네.”

그는 얼른 다음 배달을 가야 하는 듯 빠르게 내 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수령인 이름에 서명하고 보니 주문자 칸에 인쇄된 한재이의 이름이 보였다. 범인이 손쉽게 잡혔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예에, 수고하세요.”

그를 보내고 난 뒤 나는 현관문 입구에 팔짱을 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수십 개의 선물 상자들이 거실을 장악했다. 휴대폰을 꺼내 이 참상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한재이에게 보냈다. 왜 집에 가서 다시 전화 달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띄웠다.

[해명해 봐]

곧바로 전화가 울렸다.

-좀 많았나?

이렇게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통화를 한다.

“이게 다 뭐야.”

-크리스마스 선물. 너도 멋대로 선물 쌓아 놓고 사라졌잖아. 나한테 뭐라고 할 거 없어.

지난번 뮌헨 비행 때 그의 서재에 두고 간 선물을 말하는 듯했다. 고작해야 대여섯 개쯤 될까 한 그걸 이렇게 열 배로 돌려주다니. 상상도 못 했다.

“너는 왜 이렇게 사람이 적당히라는 걸 몰라. 다 뜯어 보는 데만도 종일 걸리겠어.”

-잘됐네. 어차피 시간 잘 안 간다며. 그거 풀어보면서 놀아.

나는 한 손으로 전화를 받으면서 이미 상자 하나를 열고 있었다. 포장지를 뜯어 보니 곧바로 익숙한 브랜드 로고가 튀어나왔다.

“대체 돈을 얼마나 쓴 거야.”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같이 있어 주지 못하니까 미안한 마음 표현하려다 그렇게 됐어. 미안해, 서진아. 크리스마스인데 혼자 둬서.

그 말에 겨우 참고 있던 둑 하나가 터져 버렸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의연하게 잘 버티고 있었는데 이럴 때는 나도 한 번씩 무너진다.

“고마워. 덕분에 오늘내일 내내 네 생각만 하게 생겼어.”

전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좋아하고 있다.

-다시 통화하자. 그때까지 한숨 자고 일어나.

“응. 운전 조심하고. 일어나면 메시지 보내 놓을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반쯤 뜯었던 상자를 마저 열어 보았다. 안에는 속옷이 들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한재이에게서 이메일이 도착했다. 제목은 선물 리스트. 1번부터 47번 선물까지의 설명이 적혀 있었다. 방금 뜯어 본 것은 33번, 제목은 ‘첫 섹스, 네가 입었던 속옷 색깔’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랬었나. 짙은 파란색 드로어즈를 보자 그와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수도원 공터가 생각났다. 별걸 다 기억한다고 혼자 웃었지만 나 역시 한재이의 검은색 속옷이 떠올랐다.

하나 더 뜯어 보았다. 그 안에는 돔페리뇽 샴페인 한 병이 들어 있었다. 번호는 17번, ‘변호사 시험 합격 기념으로 네가 선물한 최고의 사치’. 그제야 깨달았다. 이 모든 추억의 클론들은 우리가 함께했던 15년 세월과 같은 순번을 공유한다는 것을.

나는 1번이 궁금했다. 테트리스 하듯 상자를 쌓고 치워 소파 옆에 놓여 있던 1번을 찾았다. 궁금한 마음에 얼른 열어 봤더니 그 안에는 콘솔 게임기와 게임팩이 들어 있었다. 처음 만난 날 바스티의 생일 파티에서 내가 했던 게임이었다. 리스트에는 1번 ‘무적 연승을 기록하던 너’라고 쓰여 있었다.

이쯤 되니 과연 마지막 47번이 무엇일지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초콜릿 상자를 열어 보는 소년처럼 순서를 참지 못했다. 41번, 45번 상자를 건너뛰고 47번을 찾았다. 다른 그 어떤 것들보다도 크기가 작고 가벼웠다.

그 안에는 물건이 들어 있지 않았다. 다만 인쇄된 사진 두 장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첫 번째 사진에는 4인승 단발 엔진 경비행기가 찍혀 있었고, 두 번째 사진에는 내 이름으로 된 항공기 등록 서류가 보였다. 리스트에 쓰인 내용은 47번 ‘결혼 선물’.

한재이는 내게 비행기를 선물했다.

사람들이 선물을 받을 때 감동하는 데는 여러 포인트가 있다. 대개는 재화로서의 가치, 고르는 데 공들인 시간 또는 선물에 함축된 의미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한재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그 모든 포인트를 다 채우고도 남았다.

들인 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압도적인 물량 공세까지.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벅차게 감동시킨 것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이 선물들의 의미였다.

47개의 리스트를 준비하며 그가 되짚었을 우리의 지난 시간들은 단순히 개수를 늘리기 위한 핑곗거리들이 아니었다. 마냥 행복했던 시절의 36번 영화관 티켓. 한국에서 방황하던 그가 마셔 대던 39번 위스키와 내가 그의 아버지에게 바쳤던 42번 하얀 수국까지.

사랑에 빠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시간만큼이나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도 우리의 일부였다.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 지금에서야 열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한재이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뜻일 것 같았다. 그 고통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증거. 그럼에도 나와 함께하겠다는 결심. 그런 그의 의지를 나는 사랑했다.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도 나는 잠이 들지 못했다.

-이제 다 뜯어 본 모양이네.

살짝 졸린 듯한 한재이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가 있는 곳은 밤이 깊었다. 이제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응. 진짜 감동이던데.”

나의 표현력이 부족해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

기대하는 듯한 그의 물음에 나는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로 했다.

“당연히, 47번이지.”

그러자 만족한 듯 한재이가 나지막이 웃었다. 아직 실물로 양도받지는 못했다고 했다.

-절차가 까다롭더라. 어차피 비행장 창고에 두어야 하니까 우리 휴가 때나 쓸 수 있겠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나는 아직 결혼 선물 생각도 못 하고 있었어.”

-필요 없어. 그걸 사면서 좋아할 네 모습 상상하고 나도 같이 행복했거든. 그럼 된 거지 뭐. 우리 그걸로 신혼여행이나 갈까.

그의 로맨틱한 발상에 나도 미소가 지어졌다.

“어디로 가고 싶은데.”

-단거리 밖에 못 갈 테니까, 음…… 지중해?

착륙도 못 하는 바다를 이야기하는 걸 보니 그가 다시 졸린 듯했다. 더 자겠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숨소리가 자꾸만 고요해졌다.

-아…… 어머니한테 시달리다 와서 피곤한가 봐.

그러더니 다시 한참 말이 없어졌다.

“잘 자.”

가만히 기다렸다가 인사를 건넸다.

-응…… 메리 크리스마스, 서진아.

잠에 빠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잠결에도 그의 숨소리가 살짝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알아들었나 보다. 그가 현실만큼이나 행복한 꿈을 꾸길 바랐다.

* * *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시간은 열기구처럼 천천히 떠올라 풍향에 따라 흐르고 있었다. 어찌나 느리게 가는지 고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안달 나거나 조급해질 때마다 참지 않고 서로를 불렀다. 그리고 열정을 다해 표현했다. 불안과 질투, 의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장문의 러브 레터들이 쌓여 갔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한재이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잠들어 있던 지난 몇 시간 동안 그가 혼자 보낸 시간들을 읽어 나간다. 그러면 내가 그의 친구와 만나고, 커피를 마시며 산책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런 노력에도 소용없는 순간들이 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보고 싶다는 말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이다. 그러면 백기를 들고 만날 날을 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당첨된 도시는 올해 나의 마지막 비행 스케줄인 싱가포르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싱가포르로 가는 CR721 일정을 맡은 슈미츠라고 합니다.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좀 내리는데 쇼업 맞춰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기장님 운항 브리핑 부탁드립니다.”

“네, ICN 디파쳐 09. 15 예정입니다. 도착지인 SIN까지 소요 시간 총 6시간 40분이며…….”

12월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오늘 전체 브리핑을 시작했다. 부기장은 언젠가 홍콩 비행을 함께한 적이 있었던 5개월 된 신참이었다. 이륙 전 체크리스트 확인에도 땀을 뻘뻘 흘렸던 그였지만 이젠 제법 능숙하게 브리핑을 한다.

사무장을 비롯한 몇 명의 크루들도 낯이 익었다. 늘어 가는 동료들에 비해 함께할 시간은 모래시계처럼 줄어들고 있었다.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은 정이 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의 첫 출근도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이었다. 새벽안개가 다 걷히지 않았던 그 첫 번째 여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내내 피하기만 하던 한재이의 전화를 처음으로 받았던 곳도 거기였다. 감당도 하지 못할 자기 연민에 빠져 가는 곳마다 한재이 생각만 했었다.

청춘을 다 바쳤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허우적거렸던 날들. 짝사랑이라는 상황도 그러했지만,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 사상은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자기 일이 되고 보니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소속감이 없어 힘들었던 나였기에 또 하나의 주류를 포기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었다.

부기장의 브리핑이 끝났다.

“감사합니다. 객실 팀 사무장님 탑승객 보고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객실 팀 송이선입니다. 오늘 총 탑승객 177명, 캐빈 크루 11명. 총인원 188명입니다. 오버 부킹 되신 이코노미석 3분 업그레이드되시는 바람에 비즈니스까지 모두 풀이고요. 오늘 국회의원 한 분 계십니다. 부사무장님이 52번까지 앞쪽 맡아 주실 거고…….”

그때의 나는 쉽게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사랑과 호감을 나누었을 때 전자로 분류되는 사람이 내게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그 열정적인 감정을 15년 친구에게서 느껴 버린 순간은 절망적이었다.

도피와 외면. 그렇게 내가 최초의 소용돌이를 만들었고 그 단 한 번의 일탈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사실상 엔딩이 정해져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 그런데 그가 내게로 왔고, 우리는 우주를 지우고 만드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가 행복해졌을까. 거기에 나는 답할 수 없었다.

“……이상입니다. 기장님.”

사무장의 브리핑이 끝났다.

“네, 감사합니다. 음, 특별히 당부드릴 것은 없고 연말이라 창이 공항이 좀 북적일 텐데요. 상황에 따라서 10분 정도는 상공에서 대기해야 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좌석 벨트 점등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닌데 점등이 들어와 있을 때는 반드시 승객분들 착석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다른 질문 없으시면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마지막 비행을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탠바이 하러 가시죠.”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여 있던 크루들이 캐빈 백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무리를 지어 터미널로 이동하는 동안 구두 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부기장은 옆에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다 건너편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선배님!”

게이트로 이동 중이던 또 다른 무리에 조민우 부기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후배의 부름에 우리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집 근처에서도 전혀 마주치지 않았던 것은 아마 그가 더는 나와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멀어짐이 반가웠고 또 고마웠다.

“어디 가?”

“싱가포르요. 선배님은 장거리 가시나 보네요.”

그와 함께 이동 중이던 다른 3명의 조종사를 힐끔 쳐다보며 부기장이 말했다.

“응, 뉴욕. 눈 온다는데 거기 가서 또 묶이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우 기장님, 오랜만이네요.”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게도 인사했다.

“네, 오랜만입니다. 눈 오는 JFK라, 끔찍한데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신참 부기장이 다른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러 간 사이 우리는 잠시 게이트까지 함께 걸었다. 콕핏이 아닌 곳에서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알면 한재이가 또 뭐라 하려나.

사실 조민우 부기장과 함께 출연했던 그 방송 클립을 한재이가 보았다고 했다. 더군다나 우리가 싸운 뒤에 말이다. 떨어져 지내며 그리워진 감정이 그 짧은 영상을 수십 번도 더 돌려 보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함께 출연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다. 내 얼굴을 보느라 옆에 있는 사람들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정도의 언급만 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게 정답이긴 했다. 서로에게만 집중하기에도 삶이 바쁘다.

모든 진리는 깨닫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르고 살 때는 난제처럼 어렵다.

“JFK 관제 애들 싸가지 없는 건 그렇다 치고. 눈 많이 온다니 순번이 우르르 밀릴 거 같네요. 뉴욕은 진짜 좀 그만 가고 싶어요.”

“그러게요. 저도 별로 좋아하는 곳은 아닙니다.”

“제가 올해는 계속 일이 안 풀리더니 마지막까지 이러네요. 제발 내년에는 좀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그가 특유의 넉살 좋은 말투로 중의적인 말을 던졌다. 나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올해 풀리지 않았던 그 일에는 나와의 사건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 사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 같은 건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낙원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내년엔 좀 더 남쪽으로 많이 비행하실 수 있게 되면 좋겠네요.”

그러자 조민우 부기장이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기장님은 꼭, 내년엔 안 볼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그의 시선은 어느새 내 손에 끼워진 반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눈치 빠른 것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 수준이다.

한재이와 나는 뮌헨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산 그 오래된 반지의 크기를 새로 맞추었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꽤 마음에 들어서였다. 결혼 전까지는 약혼반지처럼 끼고 다니자고 했다. 그걸 조민우 부기장이 처음으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부기장님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하하하. 칭찬인데 듣기가 좀 민망하네요. 아무튼 축하드려요. 독일로 돌아가시는 거죠?”

“네. 그쪽에 티오가 나면 옮길 생각입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면을 보며 말했다.

“뭔가, 기장님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스르륵 사라지시는 거 같네요. 분명 여기 현실 속에 존재했었는데 또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떠나시고 나면 저한테는 그렇게 기억될 거 같아요.”

그의 짧은 소회를 들으며 나는 뜻 모를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조민우 부기장의 서사 속에서 나는 그저 지나가는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조건 속에 이제 나는 없을 테니까. 만나고 스치고 헤어짐을 반복하며 각자의 인연을 찾는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이 터미널의 분위기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아주 먼 거리를 떠나고 도착하는 곳. 어떤 이에게는 시작점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종착지가 된다.

내 의지로 이 여행을 멈출 수 있는 마지노선이 되는 곳이기도 하고 떠나는 사람을 붙잡기 위한 마지막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수많은 영화와 소설 속에서 공항은 단골처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해 왔다.

“갈게요. 안전 비행하시고 다음에 또 봐요.”

그가 헤어짐을 고했다.

“네, 부기장님도 세이프 플라이트 되시기 바랍니다.”

담담하게 인사를 나눈 우리는 각자의 게이트로 향했다. 이것 또한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상 근무 크루들에게 인사를 한 뒤 곧바로 콕핏에 올랐다. 익숙하게 기체를 점검하고 체크리스트를 메꾸어 나갔다. 탑승이 마감되고 도어가 닫혔다. 순번을 부여받고 활주로 끝에서 대기했다.

-Coreana 721 heavy, wind 320 at 15 knots. Runway 33 cleared for take-off. (코리아나 에어웨이 721편. 바람 320도 15노트. 33번 활주로 이륙 허가합니다.)

관제탑의 지시가 떨어지자 A350의 터보 엔진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Cleared for take-off runway 33, Coreana 721 heavy. (코리아나 에어웨이 721편, 33번 활주로에서 이륙합니다.)

올해의 마지막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 * *

오늘의 기내식은 싱가포르식 치킨라이스와 한식 불고기였다. 부기장은 입을 꼭 다물고 나를 쳐다보며 제 순번을 기다렸다. 어떤 게 좋으냐고 물어봐도 무조건 내가 먼저 고르면 남는 것을 먹겠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잔소리라도 들은 건지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럼 치킨라이스로 하죠.”

내 선택에 부기장이 존경심 그득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래도 다들 처음부터 내게 친근하게 굴어 준 데에는 한식 양보의 이유가 컸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 것은 중요하다. 기왕이면 좋아하는 것을 먹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욕구를 만족하면 스트레스가 없어지고 엔도르핀이 돈다. 현대인들에게 자꾸 화가 쌓이는 것은 이런 사소한 것들을 계속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뭐, 그렇기도 한데.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경우 서열에 따라 차지하는 건 자연의 섭리잖아요. 약육강식. 기름밥 오래 먹은 자가 한식을 차지한다. 그게 이 콕핏 안의 섭리라고 선배님들이 그러시더군요.”

그의 설명에 웃음이 났다.

“많이 혼나셨나 보군요. 처음에 볼 때는 더 자유롭고 개성 있으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뭐, 비행 나갈 때마다 매번 호통을 듣긴 했었죠. 다들 점잖게 말씀 주시다가도 급박한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버럭 하시는 거 같아요. 기장님들마다 스타일이 다르시니까 아직 적응이 안 돼요.”

그의 말이 맞다. 경력이 쌓인 기장일수록 자신만의 비행 프로토콜이 생긴다. 부기장들이 그런 연식 오래된 기장의 눈치를 보는 것은 한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 공통점이다.

“사실 슈미츠 기장님 같은 분은 별로 없어요. 굉장히 침착하시고 매뉴얼대로만 하시니까. 또 쓰시는 한국어가 뭐라 그러지, 엄청 절제되어 있어서 소리 지르고 그런 건 상상이 안 돼요. 근데 콕핏 안에서 화내 보신 적이 있긴 하세요?”

화를 낸 적이라. 속으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밖으로 표현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나의 한국어는 돌아갈 때까지도 고쳐지지 않을 모양이다.

“아니요. 아직 없네요. 음, 그런 의미에서 창이 공항 랜딩해 보시겠습니까? 저도 소리 잘 지를 자신은 있는데.”

나는 웃으며 부기장을 놀렸다.

“오, 좀 무섭긴 한데. 흐흐. 그래도 해 볼게요.”

그에게는 오기가 있었다. 그래서 좋은 조종사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미소를 띤 채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윈드 실드 너머로 새하얀 구름바다가 펼쳐졌다. 대류에 뭉침이 없어 마치 물처럼 퍼져 있는 모양을 부르는 나만의 애칭이다. 이럴 때는 항공기가 아니라 대서양을 가르는 범선을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저 멀리 대류권이 시작되는 곳에서 태양이 세상의 경계를 그어 주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 진짜 너무 멋진데요. 이거 때문에 다들 이 극한 직업을 끊지를 못하고.”

나도 웃으며 부기장의 말에 동의했다. 볼 때마다 가슴 떨리는 풍경이다. 가끔은 밑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오랜만에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부기장 시절에는 자주 찍었었는데. 그러고 보면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늘 같은 사람에게만 보내 줬던 거 같다.

“어, 기장님도 이런 거 보면 감동하시고 사진 찍으시는군요. 지금 약간 인간적인 친밀함이 들었습니다.”

그의 말투가 웃겨서 한층 더 고차원적인 농담을 건넸다.

“저 화장실도 가는데 모르셨죠.”

“어! 안 가시는 줄 알았어요. 하하하.”

넉살 좋게 내 말을 받아준 그가 콕핏 밖에서 기내식을 가져온 사무장을 발견하고 문을 열었다. 스트레스 없는 식사를 하는 동안 비행기는 구름바다를 항해했다.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무사히 착륙한 비행기는 유도로를 횡단하며 게이트를 찾아가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열대 바람이 풍향계의 방향을 흔들었다. 탁 트인 시야를 반으로 가로지른 지평선, 그 위로 또 다른 비행기 한 대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D7 게이트를 배정받았다. 레버를 걸고 엔진을 껐다. 곧바로 7시간 동안 회전하고 있던 팬이 멈추었다. 좌석 벨트 점등을 해제하자 객실 쪽에서 승객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올해의 마지막 비행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귀국할 때는 해가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다.

세큐어 체크를 끝내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기다리던 메시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 읽어볼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마지막 메시지만을 확인했다.

[C7에서 기다리고 있어.]

보낸 시간은 이미 1시간 전이었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콕핏에서 나왔다. 크루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터미널 C로 향했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이미 입국장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전화를 걸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그러다 C7 표지판을 발견했다. 도착 승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게이트에서 한 남자가 커다란 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슈트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갔다. 캐빈 백이 끌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한재이가 이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도 분명 비행기를 타고 온 상태일 텐데 지나치게 말쑥한 모습이 이질감을 주었다. 일을 쉬고 있어서 그런지 변호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비즈니스 때문에 잠시 싱가포르를 방문한 사업가쯤으로 보였다.

한재이는 미소 띤 얼굴을 살짝 틀어 보이며 내가 제 앞에 완전히 멈춰 설 때까지 기다렸다.

“오래 기다렸어?”

나는 그의 앞에 섰다.

“음, 한 15년 됐는데.”

한재이의 어이없는 농담에 나도 웃으며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같은 자세가 되어 그에게 말했다.

“하루만 더 있으면 16년째가 되네.”

“응. 벌써 그렇게 됐어.”

그가 손을 들어 살짝 삐져나온 내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손대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재이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반가움이 그렇다고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여기서 한 시간 정도 계속 비행기가 내리고 뜨는 걸 보고 있었어. 가끔 너랑 공항에 같이 가면 네가 늘 넋을 놓고 쳐다보잖아. 뭐가 그렇게 특별한가 싶어서 나도 느껴 보려고.”

그가 몸을 다시 틀어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공항 전경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를 따라 빽빽하게 항공기가 들어찬 게이트 너머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서 뭔가 느껴졌어?”

저 멀리 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토잉카 한 대가 보였다. 그 옆으로 짐을 실은 트레일러가 지나가고 스텝카가 멀리 도착한 승객들을 데리러 가기 위해 유도로를 건너고 있었다. 내게는 언제나 익숙한 풍경이다.

“사실 저걸 보면서 네가 왜 그렇게까지 비행기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어.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해 준 적이 없었잖아. 그래서 두 가지 정도로 유추해 봤는데 아직 뭐가 더 정답인지 결론은 내리지 못했어.”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한재이가 몇 번이나 내게 비행기를 좋아하는 이유에 관해 물었었다. 하지만 제대로 대답해 준 적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는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 내용이 자못 궁금해졌다.

“첫 번째는 경이로움이 아닐까 생각했어. 날아간다는 것은 질량의 가벼움을 동반하는 이미지인데 비행기는 아니잖아. 저 무거운 몸집을 가지고 하늘을 난다는 데서 오는 경이로움. 거기에 매력을 느끼는 거 아닐까 생각해 봤어.”

좋은 추론이었다. 50점 정도는 줄 수 있겠다. 그런 면이 항공기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에는 이견을 달 수 없다.

“두 번째는 비행기라는 공간이 가진 특수함이 좋아서가 아닐까 생각했어. 저 안에 타는 순간 국적도 인종도 상관없이 모두 운명 공동체가 되잖아. 캡틴 말이 곧 법이지. 대통령도 비행기 안에서는 네 말을 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권력 욕심이 있다는 말이야?”

“응, 조금은.”

나는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욕이 있다는 건 틀렸지만, 앞서 말한 이유가 타당했기에 정정해 주지 않았다. 맞다. 나는 비행기라는 공간이 가진 특수성을 좋아한다. 3만 피트의 상공 위에서는 그 어떤 나라의 법도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국적을 초월한 유랑민이 되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무정부 상태가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도 정답은 아니다.

한재이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내 표정을 살폈다. 그러더니 눈치를 채고 자신을 비웃었다.

“둘 다 아니구나. 내가 너무 고차원적으로 생각했나 본데. 설마 단순히 위에서 보는 풍경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거야?”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나는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대한 B777 한 대가 마침 게이트를 떠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지상 요원들이 빠져나가는 보잉기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또 하나의 출발, 혹은 헤어짐을 지켜보았다.

“내가 비행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커다란 진실 보따리를 풀어 놓는 사람처럼 나는 한 음절을 끊었다.

“너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

그러자 유리창에 비친 한재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궁금한 눈빛으로 정답을 기다렸다.

“둘 다, 이유가 없어.”

나도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서 있는 진짜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한재이의 얼굴에는 의문, 하지만 곧이어 미소가 번졌다. 그도 곧바로 그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어떤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걸.

나는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이 비행기가 좋았고 지구가 자전하는 것처럼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이 현상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가 손을 잡았다. 오래되고 낡은 반지가 우리 손에 끼워져 있었다. 서로에게 걸어 놓은 이 작은 고리는 ‘확신’의 또 다른 형태였다. 수많은 헤어짐과 만남이 오가는 이곳에서 우리는 오늘 만났고, 또 며칠 뒤면 다시 떨어져 지내야 한다.

하지만 그리움은 더 이상 불안함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게 된 나를 위해 언제든 달려올 한재이를 알고 있으니까. 함께 있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만큼 즐거운 연애를,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갈까.”

“응.”

우리는 나란히 입국장을 향해 걸었다. 저녁 메뉴를 물어보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한재이는 또 참지 못하고 슬쩍 팔을 둘렀다. 어깨동무를 가장한 그의 스킨십이 어설퍼서 나는 또 한 번 소리 내 웃었다.

이제 저 문을 나서면 우리의 모습은 이곳에서 사라질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나가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와 나는 저녁을 먹고 호텔로 들어가 사랑을 나눌 것이다. 그리웠던 만큼 낭만적이고 애태웠던 만큼 열정적으로. 잠이 든 나를 바라보는 한재이의 여전한 버릇과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그를 부르는 나의 목소리. 그렇게 다시 시작될 키스는 새파란 새벽을 지나 아침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끝나도 끝나지 않을 마지막 장면, 그리고 한재이와 나에게는 영원히 계속될 인생의 일부분이다. 숨길 수 없었던 폭발의 시간을 뒤로하고, 길었던 나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다.

Auf Wiedersehen an Alle. 나는 사랑을 얻었고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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