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Jei Han
봄이 소리 없이 온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겨울 동안 1센티도 자라지 않았던 커피나무가 커다란 잎을 터트리며 키를 키워 나갔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새들도 갈아엎어 놓은 밭에 모여 종일을 지저귄다. 체리 나무가 꽃을 피우고 바람의 냄새도 달라지는데 뭐가 소리 없이 온다는 말인가. 이 정도면 꽤 요란하다 해야 한다.
재이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굴렸다. 아까부터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는 중이었다. 겨우 한 장이 넘어갔다 싶으면 1분도 채 안 되어 다시 앞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요하네스가 책상을 두드렸다.
“집중 안 되면 그냥 집에 가지 그래.”
서류에서 눈을 뗀 재이가 그를 보며 민망한 듯 웃었다. 사실 아까부터 자꾸 딴생각이 들어 일에 집중이 안 되는 중이었다. 요하네스는 그럴 만도 하다며 편을 들어 주었다.
재이는 내일 결혼한다.
“결혼식이라고 해 봤자 시청에서 서명하는 게 다인데. 이상하지? 꽤 떨리네.”
그가 굴리던 펜의 뭉툭한 끝으로 광대뼈를 톡톡 치며 말했다.
“절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의미가 중요한 거니까. 참, 사진 찍는 거 잊지 마. 은근 인간의 기억력이 원시적이거든. 금방 다 잊어버리니까 기록해 두어야 해.”
“걱정 마, 전문가로 한 명 모셔 왔어.”
요하네스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어련하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재이의 책상 옆에 놓인 커피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역시 봄기운이 좋은가 봐. 잎 크기가 달라지네. 이거 열매는 언제 맺는다고 했지?”
올해 초 재이가 다시 로펌으로 돌아왔을 때 뜬금없이 화분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심리 상담을 해 주던 교수가 권해 줬다며 꽤 정성 들여 키우는 중이었다. 재이 한과 식물이라니. 안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놀려 준 게 벌써 두 달 전 일이다.
“몇 년은 더 있어야 해. 설마 이걸로 커피 갈아 마실 생각하고 있는 거야, 지금?”
“안 되나?”
요하네스의 능청스러운 물음에 재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나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이제 겨우 목질화가 진행되어 줄기가 두꺼워지는 중인데 열매는 아직 멀고 먼 이야기였다.
사실 재이도 금방 열매를 수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뭐든 식물을 키워 보며 마음을 다스리라던 뮐러 교수의 조언에 평소 좋아하던 커피를 떠올리며 사 온 거였는데. 겨우내 크기가 그대로여서 죽었나 생각했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봄을 맞아 조금 변화를 보이는 중이다. 자식같이 키워 내고 있는 놈을 요하네스가 노리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꺼림칙해졌다.
“재이, 정말 하객 안 부를 거야?”
같은 질문을 오늘만 두 번째 하는 중이다. 요하네스는 재이의 결혼식에 무척 참석하고 싶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직 슈퍼모델을 차 버리고 한국으로 잠적한 것도 놀라웠는데, 반년 만에 돌아와 16년 된 단짝 친구와 결혼을 한단다. 그것도 남자. 편견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미안, 아무도 부르지 말자고 파트너랑 약속했거든.”
“아니, 그래도 가족들은 올 거 아니야.”
“응, 그렇긴 하지. 근데 네가 가족만큼 친한 지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그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야?”
허를 찌르는 재이의 대답에 요하네스는 콧등을 긁었다.
“젠장. 내가 너랑 주니어 때부터 쭉 제일 친한 동료라는 건 네 파트너도 알지?”
“그래, 알아. 네 이름도 알고 너 첫 승진했을 때 흥분해서 키스했던 웨이트리스랑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도 알지.”
어릴 때부터 제일 친한 친구였다더니 진짜 그런가 보다. 요하네스는 정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먼저 신상을 털려 버린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그럼 나중에 따로 식사라도 하자. 소개는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그래, 그건 걱정 마. 근데 나 진짜 퇴근해도 되나?”
재이가 슬쩍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사무실 분위기를 살폈다. 다들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여기서 떠들고 있는 두 남자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요하네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파가 또 너 찾아올지 모르니까 얼른 가 버려.”
요즘 같은 케이스를 맡은 시니어 변호사의 어시스턴트가 어제오늘 자주 재이를 찾았다. 그녀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가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이는 노트북을 정리하고 재킷을 걸친 뒤 가방을 챙겼다.
“먼저 간다, 그럼.”
“그래. 아무튼 축하해. 파트너한테도 내가 축하한다고 했다고 전해 주고. 알았지? 어?”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요하네스가 아쉬움을 던졌다. 재이는 귀찮다는 듯 팔을 휘두르며 사라져 버렸다.
점심때가 좀 지난 시간이었다. 봄볕이 은은하게 내려와 로펌 건물 주차장을 비추고 있었다. 거리에 테이블을 펼쳐 놓은 레스토랑에선 손님들이 남기고 간 식사의 흔적들이 보였다. 차양이 쳐진 곳 뒤편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서버는 전쟁 같았던 점심 장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포르쉐 앞 창문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재이는 차 문을 열고 가방을 조수석에 던져 넣었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던 와중에 건너편에 있던 레스토랑 서버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씩 웃으며 담배를 들어 인사를 나누었다. 자주 가는 곳이라 서로 안면이 있는 상태였다.
재이는 담배를 피우며 주차장 한구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지난여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을 버리고 할머니 생일 파티에 가야 한다던 서진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겨우 점심 한 끼 같이 하고 가야 한다고 해서 어찌나 속상하던지.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서진이 여기서 짧게 키스해 주었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안겨준 선물을 한 아름 안고서 떠나 버렸다. 그날 재이는 ‘납치 충동’이라는 새로운 사자성어를 만들었다. 반짝반짝 빛나던 연애 초기, 몇 번이나 그를 볼 때마다 그 ‘납치 충동’이 일어나서 힘들었다.
그래서 앞뒤 가리지 않고 한국으로 떠났었다. 그의 옆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으니까.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시간인데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건, 너무 많은 일이 그 후에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재이는 담배를 끄고 차에 올랐다. 자동으로 켜지는 라디오 소리와 목적지를 묻는 기계음에 카를스펠트라고 대답했다. 집으로 가기 전 잠깐 들를 곳이 있었다.
시가지를 벗어난 차가 교외 도로를 달렸다. 이윽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서 속도를 줄였다. 커다란 호수를 지나니 공사가 한창인 공터가 나왔다. 재이는 거기에 차를 세웠다.
인부들이 이제 막 땅을 파고 토대를 만드는 작업 중이었다. 파낸 흙들이 작은 언덕을 이룰 정도로 쌓였다. 지대가 높아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 옆으로 산책로도 나 있었다. 재이는 여기에 서진과 함께 살 집을 짓는 중이었다.
공사장 한가운데서 전화를 하던 여성이 포르쉐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재이가 고용한 코디네이터였다. 시간이 없는 그를 대신해 공사를 관리하고 감독해 주고 있었다.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딱 하나, 가장 좋은 재료로 최대한 빨리 지을 것. 예산으로 제시해 준 금액을 보고 그녀는 납득했다.
“커스틴.”
“어서 와요, 재이. 안 그래도 전화할 참이었는데 직접 보고 상의하면 더 좋을 거 같네요.”
커스틴은 핏 좋은 브랜드 슈트를 입은 그를 보며 다시 한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돈 많고 잘생긴 동양인 게이 변호사. 힙하다 못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가 왜 이렇게 돈이 많은지 모르겠으나 솔직히 그런 건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이런 클라이언트는 나중에 포트폴리오로 쓰기도 좋다. 동기 부여가 확실해진 그녀는 요즘 자신의 일생일대 걸작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때 말했던 수영장이요. 여기에 이렇게 빼는 걸 시에서 허가를 안 해 줘요. 사이즈를 줄여서 앞마당 쪽으로, 이런 식으로 내는 게 어때요.”
그녀는 옆으로 다가온 재이에게 설계도를 보여 주며 설명했다. 그러다 은은하게 맡아지는 향수 냄새에 또 힐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이런 남자가 게이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자신은 아예 기회조차 박탈당한 것이 오히려 세상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음…… 맥시가 싫어할 텐데. 호수가 보이는 방향으로 내는 걸 원했거든요. 이유가 뭐예요. 또 담당자 변덕인가.”
“모르죠. 아무튼 안 된다고 퇴짜 맞았어요.”
“내가 만나 볼게요. 연락처를 보내 줘요.”
재이가 눈썹을 살짝 올려 보이며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공사가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돌아다니며 확인하기 시작했다.
커스틴이 보는 재이 한은 깐깐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집요했다. 첫 삽을 뜨기 전부터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는데 그녀는 그의 실행력에 몇 번인가 감탄했었다.
그는 원래 가지고 있던 땅에 더해 옆에 있던 공터까지 사들이고 싶어 했다. 집을 매우 크게 짓고 싶어 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시청과 지루한 싸움을 해야만 했다. 커스틴은 안 될 거 같다고 포기하라 했지만, 그는 지치지 않고 담당자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더니 그 깐깐하던 공무원들이 어느새 차례로 함락되는 게 아닌가.
막판에는 작은 골목 하나가 또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시에서는 이 길을 매입해야만 집을 짓게 해 주겠다고 다시 말을 바꿨다.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그 쓸데도 없는 골목을 3만 유로나 주고 사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 이름을 따서 길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무슨 이런 비효율적인 성격이 다 있나 싶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로맨틱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 모든 것을 그의 파트너를 위해 맞춰 주고 있었다.
‘맥시는 추위를 많이 타요. 단열재를 많이 써야 할 거예요.’
‘천장을 더 높게 올려요. 맥시가 트인 공간을 좋아하니까.’
얼마나 지극정성인지 나중에는 그 맥시라는 사람의 얼굴이 심히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내일 결혼한다는데 하객은 부르지 않는 건지 은근 떠보는 중이었다. 역시나 단호하게 거절당했지만 말이다.
“미안해요, 커스틴. 다음에 자리를 따로 마련해서 봐요. 내일은 정말 서명만 하고 끝낼 거거든요.”
“그것도 역시 맥시가 원해서 그런 거죠?”
그녀의 말에 재이가 부드럽게 웃으며 긍정했다. 커스틴은 다시 한번 그가 게이라는 점에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도 반드시 이런 남자와 결혼하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둘은 남은 공사를 마저 돌아보았다.
오후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재이는 아파트 골목에 차를 주차한 뒤 방금 베이커리에서 사 온 빵 꾸러미를 들고 내렸다. 집 공사 현장을 잠깐 둘러보고 온다는 것이 시간이 꽤 흘러 버렸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아파트 문을 열었다.
재킷과 가방을 소파 위에 던졌다. 빵 꾸러미는 식탁 위에 둔 채 바로 침실 문을 열었다. 반쯤 젖혀진 커튼 뒤에서 오후 햇살이 어른거렸다. 쌔근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재이는 그 옆으로 올라가 가만히 숨을 죽였다.
서진이 한국에서 열흘의 휴가를 받고 오늘 새벽 비행기로 날아왔다. 그는 출근하는 자신을 보낸 뒤 침대 위에 쓰러진 채 아직 잠들어 있었다. 사실 시차를 맞추려면 이제 깨워야 하는데 자고 있는 얼굴을 보니 안쓰러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재이는 흘러내린 그의 머리칼이 신경 쓰여 손가락으로 살짝 정리해 주었다. 그러다 또 참지 못하고 이마에 살짝 입 맞추어 버렸다. 그러자 서진이 몸을 움직였다.
재이는 일을 저질러 놓고 후회하는 어린아이처럼 초조해졌다. 제발 깨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부탁했지만 예민한 서진이 조용히 눈을 떴다.
“……일찍 왔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를 들은 재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렇게 살아서 움직이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숨을 쉬어 주는 것조차 고마웠다. 그래서 또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어 키스해 버렸다.
잠에서 깬 서진의 입술은 너무 부드러웠다. 촉촉한 혀를 감고 먹어 치울 듯 입 안을 헤집고 다녔다. 수동적으로 반응하던 서진의 움직임이 조금씩 적극적으로 변해 갔다. 점막을 빨고 입술을 삼키는 와중에 재이는 버릇처럼 그의 위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손을 내려 서진의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잠을 자고 일어난 남자의 페니스는 으레 반쯤 발기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방금 밖에서 돌아온 자신의 페니스는 왜 같은 현상을 보이는가. 스스로 짐승 같다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재이는 지금 당장 서진과 섹스 하고 싶었다.
“음…… 재이야.”
멋대로 그의 속옷 안에 손을 넣어 만졌다. 조금 더 단단해져 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도 흥분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 앞뒤 가릴 거 없이 옷을 벗겨 버렸다.
서진은 섹스를 빼지 않는다. 정말 피곤한 상황이 아니면 그만하라는 말도 잘하지 않는 편이다. 연인이 자신만큼이나 성욕이 강하고 또 체력이 받쳐 준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재이는 정성 들인 전희를 주고 충분히 그의 몸을 열었다.
조금 뻑뻑할 때 삽입하는 걸 좋아하는 서진이 허리를 들어 주었다. 이제 그만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라도 봐도 된다. 콘돔과 젤을 뒤집어쓴 페니스가 곧장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재이는 신음을 내는 서진의 목소리에 흥분해 기다리지 못하고 허리를 움직였다.
“아…….”
“괜찮아?”
그에게 입을 맞춰 주며 상태를 확인했다. 표정을 보니 이미 궤도에 오른 것 같았다. 재이는 조금 더 깊이 페니스를 넣어 보았다. 그렇게 오후의 섹스가 시작되었다.
“윽…….”
“하아.”
둘은 함께 느낀다. 아래에서 이어진 쾌감이 다시 키스를 부른다. 누가 넣고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 강하게 상대를 가지고 싶어 몸을 움직일 뿐이다. 손끝으로는 살갗을 만지고 혀로는 입술을 맛보았다. 숨결을 느끼고 신음으로 표현했다. 내가 너를 가져서 이렇게나 기쁘다고.
사정이 다가올 때는 서로에게 알린다.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차릴 때도 있다. 긴 밤을 보낼 때는 대개 재이가 참지만, 지금처럼 낮에 즐기는 이벤트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재이야, 나…….”
“응, 알아.”
재이가 티슈를 뽑아 왼손에 쥐었다. 오른손에 잡힌 서진의 페니스는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빠르게 문지르며 뒤로는 더 깊이 제 것을 박아 넣었다. 짧은 신음과 함께 서진이 사정했다.
절제된 표정에서도 쾌락은 숨길 수 없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서진의 얼굴이 오르가슴에 물들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의 모습은 재이에게 늘 극강의 흥분을 선사한다. 인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함께 절정에 올랐다.
목구멍을 조이며 신음을 긁어내는 재이를 향해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직 제 안에 사정 중인 그의 입술을 물었다. 사랑해. 그 말을 들은 재이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그렇게 다시 키스가 시작되고 긴 후희가 이어졌다.
“결혼 전에 성관계하면 부정 탄다는 얘기가 있던데.”
서진이 우스갯소리를 하며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재이의 팔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나체가 된 둘은 등과 가슴을 대고 몸을 겹치고 있었다.
“네가 그런 미신을 믿는지는 몰랐네.”
“안 믿으니까 그냥 하는 얘기야.”
“아무튼 미안. 내가 또 자제 못 하고 덮쳐 버렸어.”
재이는 서진의 어깨에 코를 누르며 자신의 인내심 부족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도 조금 억울한 부분은 있었다. 서진과의 장거리 연애가 지속된 지난 몇 달 동안 둘이 만난 날은 고작 한 달에 한두 번. 그것도 하루 이틀 밤 보는 게 다였으니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낸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1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서진의 말을 허투루 듣는 게 아니었는데. 결혼하고도 상황은 바뀌지 않을 테니 이대로 가다간 주말 부부 아닌 월간 부부가 될 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결혼 선물을 아직 못 해 줬잖아.”
서진이 슬쩍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 신경 쓰여?”
재이는 그의 어깨뼈 중 툭 튀어나온 부분을 입술로 가만히 눌러 보는 중이었다. 아까부터 서진의 몸을 멋대로 여기저기 만지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응. 근데 그냥 이걸로 때울까 싶어.”
서진이 손을 뻗어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을 가져왔다. 그 바람에 재이는 서진을 품에서 놓쳐 버렸다. 서진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휴대폰에서 이메일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 재이의 얼굴에 휴대폰을 들이대며 내용을 보여 주었다.
“뭔데.”
재이는 무슨 내용인가 싶어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그러면서도 놓쳤던 서진을 다시 끌어안고 단단히 팔을 묶었다. 중간쯤 읽던 와중에 멈칫거렸다. 5월 1일부터 계약을 원한다는 그 내용은 서진이 다녔던 독일 항공 회사에서 온 오퍼였다. 그의 이직이 확정된 모양이었다. 재이는 너무 좋아 숨 막히도록 서진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5월 1일부터 출근이면 독일 들어오는 건 더 빨라야 하지 않아?”
또 멋대로 희망 회로를 돌려 보는 중이다.
“응, 지금 회사랑 계약 해지하는 날짜 고려해도, 윽. 숨 막혀. 4월 중순에는 들어올 수 있을 거 같아.”
희망 사항이 실제로 일어나게 생겼다. 드디어 이 길었던 장거리 연애의 끝이 보였다. 재이는 쥐어 짜낸 목소리를 내며 서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아…… 너무 좋아. 너무 좋다, 서진아.”
마음 같아서는 한 번 더 하자고 덤비고 싶었다. 그를 꼭꼭 씹어 먹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원했다. 아까부터 끊임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데도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아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 재이에게 서진이 고개를 돌려 키스해 주었다. 너만 애 닳는 것이 아니라는 듯. 힘줄이 터지도록 저를 안고 있는 재이의 벗은 몸 위로 이번에는 서진이 올라왔다. 둑이 터져 버린 두 사람은 다시 뜨겁게 몸을 섞었다.
* * *
뮌헨 시청과 약속한 시각은 오전 11시였다. 담당 공무원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제 방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재이는 서진과 이미 도착한 후였고 크리스는 화장실에 간 참이었다. 둘은 복도에서 알랭과 멜라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이는 자신의 증인으로 알랭 쥐옹을 선택했다. 미우나 고우나 십년지기 친구였다. 서진과의 사이가 멀어졌을 때도 그는 맥시 얼굴 상했다며 전화했었다. 좋았을 때와 나빴을 때를 가리지 않고 둘을 지켜봐 준 인물이었다. 증인이 되기에는 더없이 완벽했다. 자주 지각을 한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전화해 봐.”
“아까 했는데 다 왔다고 하더라고.”
“흐음…….”
서진이 팔짱을 끼며 시청 복도 창틀에 상체를 기대었다. 시간 약속에 엄격한 편이라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재이는 걱정 말라는 듯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때 알랭이 느긋한 걸음으로 멜라니와 함께 계단을 올라왔다.
“안녕, 친구들.”
알랭이 태연하게 선글라스를 벗으며 팔 벌려 인사했다. 그러자 서진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우리끼리 들어가려고 했어.”
“날씨가 좋아서 걸어왔어. 이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 같은 거야. 알잖아.”
“여기선 안 그래. 태양이 두 개 떠도 시간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야.”
재이가 제 연인 편을 들며 또 한 번 타박을 주었다.
“그래, 잘났다 둘 다. 너희 정말 잘 살겠어. 인사해, 여긴 멜. 재이랑은 처음 보지.”
“반가워요.”
“와 줘서 감사합니다. 재이 한입니다.”
알랭에게 증인을 서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가 좋은 생각이 났다며 멜라니와 함께 오겠다고 했다. 꽃도 샴페인도 없는 이 조촐한 결혼식을 사진으로 모조리 기록해 두자고 했다. 서진과는 파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던 그녀 역시 흔쾌히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근데 양쪽 부모님은?”
알랭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들까지 잃기 싫었던 재이의 어머니가 드디어 마음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여긴 우리끼리만 들어갈 거야. 부모님들은 끝나고 식사 자리에 오시기로 했어.”
서진이 알랭에게 대답해 주는 사이 갑자기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멜라니가 웃으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피사체들이 끝내주니까 작업하는 나도 즐겁네요. 중간중간 그냥 찍을 거니까 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거예요.”
마침 크리스가 복도 끝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제 참석자들이 모두 모였다. 재이는 대기 중이던 사무실 문을 살짝 열어 안을 확인했다. 커피를 마시던 시청 직원이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아주 사무적인 공간이었다. 그리고 구식이었다. 서류 뭉치들이 쌓여 있고 먼지 묻은 팩스 기계까지 보였다. 담당 공무원은 일상적인 톤으로 그들을 손님용 의자로 안내했다. 재이와 서진이 중간에 앉고 자그마한 간이 의자 두 개에 각각의 증인들이 앉았다.
담당자가 서류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시민 결합이 아닌 진짜 결혼 서류였다. 그는 안경을 꺼내 쓰고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느 쪽이 슈미츠인지를 물었다. 서진이 살짝 손을 들어 자신임을 알렸다.
“좋아요. 그럼 이쪽 먼저 묻고 이렇게 순서대로 서명할 거예요. 그전에 내가 여기 이 부분을 읽을 거니까 두 사람은 그냥 들어주면 돼요. 다 끝나면 여기하고 여기 서명하고. 알았죠? 증인들은 여기 서명하면 되고. 보이죠?”
그는 서류를 들어 크리스와 알랭에게 보여 주었다. 독일어를 못 하는 알랭도 대충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참석자들의 표정을 모두 확인한 그가 만족한 웃음을 띠고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재이와 서진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 * *
오후 햇살이 평원을 가로질러 오베르파펜호펜 비행장으로 가는 도로를 비췄다. 그 옆으로 유난스러운 봄기운이 내려앉아 푸른 싹을 틔우고 있었다. 포르쉐 한 대가 봄바람을 맞으며 느긋하게 그 길을 달렸다. 그 안에는 오늘 막 결혼한 커플이 소풍 가듯 신혼여행을 떠나는 중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재이의 약지 손가락에는 새로운 반지가 자리 잡았다.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서진의 왼쪽 손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그 손을 재이가 맞잡았다. 서진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자 두 사람의 얼굴에는 동시에 웃음이 번졌다. 재이는 단단히 맞물린 서진의 손을 가져가 몇 번이고 입 맞췄다.
결혼식은 조촐하게 끝났지만, 신혼여행은 꽤 진지하게 준비해 둔 참이었다. 비행장에는 서진을 위해 결혼 선물로 사 두었던 세스나 172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이탈리아 지중해의 사르데냐 섬에 있는 집을 빌렸다.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 위에 돌과 흙으로 만든 푸른색의 별장. 일주일 동안의 허니문은 바다와 태양이 함께할 것이다.
“거기 관리하시는 분 말이, 낚시도 할 수 있다고 했어. 요트 타고 나가면 정어리가 많이 잡힌대.”
서진의 말에 재이가 의아해했다.
“너 낚시할 줄 알아?”
“잘하진 못하지만 아버지 따라 몇 번 가 본 적 있어. 물론 바다낚시는 해 본 적 없지만.”
그 말에 가소롭다는 듯 재이가 웃었다.
“서진아. 네가 한가롭게 낚시나 하고 그럴 시간이 있을 거 같아?”
그러자 그가 도어 트림에 팔꿈치를 올리며 딴청을 피웠다. 왼손은 여전히 재이에게 잡힌 채였다. 제 운명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어 버린 서진을 보며 재이는 다시 한번 결심을 굳혔다. 도착하는 즉시 그를 잡아먹을 것이다. 일주일 동안의 허니문은 바다와 태양, 그리고 섹스가 함께할 거니까.
그때 서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 멜이 벌써 사진을 보내 줬어.”
그가 발신자를 확인하고 반갑게 말했다. ‘완벽한 커플의 완벽한 투 샷’이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이 도착했다. 첨부 파일을 열자 후반 작업을 아직 거치지 않은 모노톤의 사진 한 장이 보였다. 결혼 서류에 서명하는 서진과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재이가 함께 찍힌 장면이었다. 평화롭고 조용했던 그들의 첫 번째 결혼사진. 서명에 너무 진지하게 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서진이 재밌다는 듯 쿡쿡거렸다.
재이는 혼자 휴대폰을 보며 웃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잡은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기에 조르듯 앞뒤로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서진이 사진을 보여 주었다. 운전대를 잡은 터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재이는 이미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뭐가 되었든 서진이 좋아하니까. 늘 같은 이유로 16년을 살았다.
“좀 자 둬. 있다가 조종하려면 피곤할 텐데.”
“괜찮아. 너무 들떠서 잠도 안 와.”
서진의 말에 재이가 또 한 번 그를 쳐다보았다. 거의 1분에 한 번씩 쳐다보는 꼴이다.
“들떴다고? 좋아서?”
“그래. 너무 좋아서 들떴어.”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읊어 주는 서진의 말에 재이는 또 한 번 잡은 손을 가져다 키스했다. 가슴이 요란하게 팽창하는 것 같았다. 그의 늘어난 애정 표현은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노래 같았다.
비행장에 도착했다. 커다란 프라이빗 제트기부터 작은 경비행기까지, 오베르파펜호펜의 넓게 뻗은 평야에 여러 대의 비행기가 대기 중이었다. 재이는 그중 하얀색 세스나 프롭기 옆에 차를 세웠다. 보디의 겉면에는 ‘Maxi 907’이라는 이름이 도색되어 있었다. 비행기 이름을 읽은 서진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이를 쳐다보았다.
“관제탑이랑 교신할 때마다 내 이름을 말하라는 거야?”
“응. 미안한데 일부러 그런 거야. 맥시가 맥시를 모는 걸 상상했더니 도저히 그 이름이 포기가 안 되더라고.”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던 재이는 짓궂은 얼굴을 하고 그를 놀렸다. 서진은 팔짱을 낀 채 태연하게 짐 정리를 하는 그를 쳐다보다 제풀에 지쳐 비행기 쪽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다시 재이가 고개를 들었다. 저렇게 화난 듯 꿍해 있는 서진을 볼 때마다 품 안에 넣어 가둬 버리고 싶었다. 185센티나 되는 건장한 남자를 두고 귀여움에 몸부림치다니. 가끔은 자신이 살짝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진은 익숙하게 비행기 외관을 살펴보았다. 바퀴의 공기압 상태와 파킹 레버를 손으로 눌러보며 체크했다. 그리고 날개 쪽과 각종 이음새, 연료통의 연료를 확인했다. 별 이상은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불어오는 바람도 읽었다. 그러다 재이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너 이대로 올라가면 추울 거 같은데. 뭐라도 하나 걸쳐.”
“난 괜찮아. 추위는 네가 더 많이 타잖아. 너 지금 재킷이 너무 얇다. 받아.”
재이는 짐 가방에서 서진의 항공 점퍼를 꺼내 던졌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서진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옷을 받았다. 그는 결혼식을 위해 입었던 슈트 재킷을 벗고 받아든 점퍼를 셔츠 위에 걸쳤다.
재이가 양손에 보스턴 백을 들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비행기 적재 칸에 짐을 실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좀 아쉬워.”
“뭐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서진이 물었다.
“내가 청혼하고 싶었는데 선수를 빼앗겨서. 진짜 근사한 데 데려가서 펑펑 울려 주고 싶었거든.”
실린 짐을 확인하고 재이는 다시 자동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전에도 한번 말한 적이 있었다.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프러포즈는 꼭 자신이 하고 싶었다고.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이 있냐며 서진이 웃었다. 그사이 재이는 자동차 앞 좌석에서 자잘한 소지품들을 챙겼다.
“아무튼 이번에는 내가 한발 늦었지만, 다음번에는 무조건 내가 먼저 말할 거야. 받아, 이거 쓸 거지?”
“아, 응. 근데 무슨 소리야. 다음번이 어딨어.”
서진은 재이가 건네주는 선글라스를 받아 들며 물었다.
“다음번이 왜 없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같이 있자고 했잖아. 네가 새로 태어날 때마다 내가 찾아가려고.”
마지막 가방을 싣고 자동차 키를 챙겼다. 짐 정리가 끝났으니 이제 차고에 차를 넣고 와야 한다.
“그러니까 그때마다 다시 사랑하는 거로 해. 그때는 내가 먼저 프러포즈 할게.”
재이는 트렁크에서 마지막 짐을 꺼냈다.
“…….”
서진에게 슬쩍 눈길을 줬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순간 비행기 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재이는 자동차 트렁크를 닫았다.
“나 차 집어넣고 올게. 기다려.”
재이는 가볍게 웃으며 앞좌석으로 걸어갔다. 운전석에 오르기 위해 차 문을 열었다. 그때, 서진이 재이를 향해 뛰어왔다. 막 차에 오르려던 그의 어깨가 강하게 끌어당겨졌다.
“왜…….”
그리고 막을 새도 없이 시작되는 키스에 재이의 손에 들려 있던 자동차 키가 땅에 떨어졌다. 부드럽게 들어오는 혀는 반가웠고 내쉬는 숨결은 달콤했다. 재이는 감고 있는 서진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농담 같은 프러포즈가 그의 가슴에 불씨를 당긴 듯했다.
품 안으로 깊게 파고드는 서진을 안으며 재이는 그의 입술을 삼켰다. 제대로 키스를 받아주기 시작하자 서진의 허리가 뒤로 꺾이기 시작했다. 재이는 그런 그를 단단히 받쳐 들고 숨이 모조리 빨려 들어갈 듯한 강렬한 키스를 해 주었다.
“하…….”
“그래서, 대답은 예스인가.”
재이가 정식으로 물어보았다. 아직 오지 않은 삶까지 나와 함께하겠냐고. 동등하게 바라보는 눈동자에 서로가 담겨 있었다. 그 속에서 둘은 빠져나갈 틈 없이 자신으로 가득 메워진 세상을 보았다. 서진이 재이의 얼굴을 감싸 쥐며 각인시키듯 말했다.
“이미 대답했어. 이보다 더한 긍정이 있으면 가르쳐 줄래?”
그리고 다시 고개를 틀어 그에게 입 맞추었다.
확신을 뛰어넘는 감각이 온몸에 새겨졌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느끼며 재이는 눈을 감았다.
처음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의 두근거림,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우서진, 나의 막시밀리안. 나의 모든 것이자 내가 전부인 사람. 가지고 싶은 만큼의 심장을 모두 도려내 가 버렸지만, 결국엔 같은 크기로 다시 돌려준 사람. 그러니 이제 그가 없이는 숨을 쉴 수 없었고, 볼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다.
태어날 때마다 다시 만나서 또 사랑하자는 그 말을, 열정적인 키스로 승낙하는 이 근사한 남자를 사랑한다. 친구여서 기뻤고 연인이어서 행복하다. 그 어떤 관계의 형태가 되었어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기억하는 모든 날들 속에서 함께했었기에. 그래, 우리는 사랑을 얻었고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