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328)

차라가 긴 하품에 시달리는 동안, 페기는 근방에 떨어져 있던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끄트머리가 누렇게 변색된 그림이었다. 미술 애호가인 예후르 곁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숱하게 보았던 그녀의 눈엔 한참이나 모자란 실력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런 데선 볼 수 없는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아마도 일가족일 것이다. 갈색 머리에 키 큰 남자는 아비일 테고, 잿빛 머리의 아담한 여자는 어미일 테다. 그들 앞에 나란히 선 삼 남매는 키가 들쑥날쑥했다. 첫째로 보이는 소년은 의젓했고, 가운데 선 어린 소녀는 사랑스러웠으며, 혼자서 삐죽삐죽 겉도는 아이는 낯이 익었다.

“왜 남의 걸 함부로 봐!”

불쑥 눈앞으로 치민 손이 거칠게 그림을 뺏어 갔다. 차라가 씩씩거리며 그녀를 노려봤다. 세상 가장 소중한 보물인 것처럼 품에 안은 그림을 응시하다, 페기는 고개를 들어 차라와 눈을 맞추었다.

“가족이 보고 싶니?”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사납던 기세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차라는 마치 말하는 법을 잊어 먹은 사람처럼 황망해 보였다. 페기는 속에서 치솟는 쓴웃음을 입술 끝에 매달았다.

사도는 누구나 될 수 있다. 황제의 자식이든, 노예의 아이든. 그것은 즉, 사도가 되기 전에는 남들처럼 평범한 가족이 있단 소리다. 이를테면 나와 닮은 아버지, 배 아파 나를 낳아 준 어머니, 같은 피를 이은 형제자매들. 그러나 사도가 된 순간, 모두 끊어져야 마땅할 인연들.

어느 밤 천사가 몰래 성흔을 찍고 간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아무개가 아닌 성스러운 불의 사도가 된다. 사도가 되기 이전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에, 이전의 삶을 잊으라 강요당한다.

누군가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그녀는, 예후르는, 레오폴트는, 안드레아는. 가족을 모르고 자랐거나, 너무 어린 나이에 사도가 되면 그런 강요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아주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날 덜컥 사도가 되면, 강제로 끊어진 옛 인연들을 못 잊어 괴로워할 수도 있었다. 페기는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차라를 보며 깨달았다.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태어나 부모도 친구도 없던 그녀에겐 신선하다 못해 생경한 감각이었다.

“누, 누가 보고 싶대…?”

잠긴 목에서 애써 끌어낸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려 왔다. 페기는 그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미 비대하게 커진 차라의 불안감이 사위를 꽉 조여 왔다.

“다들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써! 엄마 아빠도 다 형이랑 막내만 예뻐했단 말야! 형은 똑똑하고 막내는 귀여우니까! 난 공부도 못하고 귀엽지도 않으니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어차피 지금쯤 나 같은 건 까맣게 잊었을 거야. 나도 안다고. 나 같은 거 있어 봤자 골칫덩어리밖에 안 되는 거. 교회에서 날 데려갈 때도, 다들 말만 안 했지 속으론 앓던 이 빠진 것처럼 시원해했을….”

큼직한 암녹색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더듬더듬 만져 본 뺨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도통 멈추지 않는 눈물에 차라는 당혹해 어찌할 줄을 몰랐다. 좀체 맘대로 따라 주지 않는 몸에 도리어 분이 치솟았다.

“씨….”

성난 마음에 눈가를 마구 문지르던 차라가 결국 창피함을 못 견디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아이가 안쓰러워 페기는 조심스레 등을 토닥여 주었다. 파묻힌 얼굴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빽 터져 나왔다.

“혹시라도, 킁, 아, 안아 줄 생각은 하지도 마!”

안아서 달래 주려 했던 페기가 황급히 팔을 거두어들였다. 작은 골방엔 한동안 훌쩍이는 소리만 흘렀다. 겨우 진정한 차라가 붉어진 눈을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여기.”

우는 애 옆에서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페기가 머뭇머뭇 손수건을 내밀었다. 차라는 너무 부끄러워 제대로 눈도 못 맞추고 손수건만 받아 들었다. 하필 남 앞에서 울 건 뭐람. 그나마 괜찮은 녀석이라 다행이지.

“내 생각에, 난 벌을 받은 거야. 맨날 공부도 안 하고, 킁, 엄마 아빠 속만 썩이니까 천사님이 내려와 ‘옜다, 고생이나 해 봐라.’ 하고 발자국 찍고 간 거지.”

“글쎄… 이슬라 님은 그런 분이 아니실 텐데….”

“뭐야. 너 이슬라 천사님이랑 얘기해 봤어? 아니잖아.”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신학은 잘 안다. 물론 페기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쨌든 이건 벌이니까 열심히 견디면 돼. 5년만 지나면 나도 성인이 되니까 그땐 이 지겨운 궁전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가족들도 다시 볼 수 있을 거고. 그때까지 우리 엄마가 날 기억하고 있어야 할 텐데….”

차라가 울적한 얼굴을 무릎 위에 괴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페기가 문득 치마를 탁탁 털며 일어났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돼. 열흘이면 충분하니까.”

“…뭐?”

“내가 널 도와주면 되잖아.”

차라가 맹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겸연쩍은 듯 구두코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던 페기가 허리를 굽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대신 약속해 줄래? 다신 이렇게 멋대로 사라지지 않겠다고.”

차라가 허둥지둥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심지어는 약속을 하고 나가려던 페기의 치맛자락까지 붙잡았다.

“하, 한 번만 더 해!”

외치는 목소리가 하도 간절하여 페기는 새끼손가락 건 약속을 한 번 더 해 주었다. 두 번이나 손가락을 걸면서도 차라는 머리를 후려 맞은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페기가 조금 쑥스럽게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이따 점심 때 보자.”

달칵, 문 닫히는 소리에 차라는 정신을 차렸다. 열흘. 앞으로 열흘이면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다. 번개 맞은 듯한 깨달음에 만면 위로 행복한 미소가 퍼졌다.

***

회랑으로 내려오는 따사로운 볕 아래 사내의 금빛 제복이 유달리 희게 번졌다. 눈부심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예후르는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버릇처럼 미소를 지어 올렸다.

“몬틸로 백작.”

“전하를 뵙습니다.”

백작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며 예를 취했다. 숙였다 올라오는 그의 얼굴은 꼭 예후르의 것처럼 그을린 갈빛이었다.

“성하를 뵙고 오십니까?”

“예. 성하께서 곧 만날 사람이 있으니 어서 가라 내쫓으셨는데, 역시나 전하셨군요.”

“먼 길 돌아가야 하는 백작을 배려하심이겠지요. 날이 맑아 가시는 길이 고되진 않겠습니다.”

“실은 이런 날일수록 용은 흥분해 더 날뛰기 일쑵니다. 용을 타기 적당한 날씨는 오히려 조금 흐린 날이죠.”

혀끝으로 돌을 굴리듯 독특한 억양이 햇빛 아래 퉁퉁 튕겼다. 백작이 미소를 짙게 새기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전하,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습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기에.”

뜻 모를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말없이 발길을 옮겼다. 햇빛이 채 닿지 못하는 외진 복도는 인적이 드물었다.

“성하께서 찾으시니 빨리 끝내세요.”

벽에 기대어 선 예후르가 팔짱을 낀 채 빛 드는 회랑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반듯한 턱선 아래로 움푹 팬 곳에 유달리 짙은 그림자가 졌다.

“불필요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전하의… 음, 누이동생에 관한 것이니.”

“…페기?”

퍼뜩 예후르의 시선이 돌아왔다. 백작은 잘 다듬어진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분 말입니다. 송구합니다. 제가 이곳 예절에 익숙지 않아 그분을 어찌 칭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아직 추기경으로 임명받으신 건 아니니 전하라 부르면 안 될 것이고….”

“개의치 않으니 계속 말해요.”

“그분께서 오전에 절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부탁을 하나 하시더군요. 성하께는 비밀로 해 달라 하시며.”

백작은 부러 애매한 중간에서 말을 끊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예후르가 유독 아끼는 이가 바로 카니나의 페기였다. 어쩌면 갑주처럼 두른 평정심을 뚫고 그의 속마음이 불거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예후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내리깔린 눈은 변함없이 잠잠하고, 다물린 입술은 열릴 줄 몰랐다. 찬찬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몬틸로 백작은 주저 없이 판단했다.

더 건드리면 안 되겠군.

“…하여 성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으나, 과연 그분의 명을 받들어도 되는지 감히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전하께서 듣고 판가름해 주십시오.”

“…내가 들어도 되는 얘깁니까?”

“전하께서 평소 그분께 보이시는 자비를 생각한다면, 예, 그렇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도 전하께 비밀로 하란 말씀은 없으셨으니, 달리 문제 될 소지도 없지 않겠습니까?”

몬틸로 백작이 쾌활한 웃음을 머금었다. 잠시 턱을 내리고 고민하던 예후르가 툭 말을 던지듯 내뱉었다.

“말씀하세요.”

“그분께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라발의 열일곱 번째 주도(主都) 아뎃사에 사는 어느 일가족인데… 더 듣지 않아도 사정을 짐작하시겠지요.”

백작이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한쪽 눈을 찡그렸다. 카니나의 페기는 나이 여섯에 성가로 입적된 후, 앙겔리카 성궁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아뎃사와 연결될 만한 고리는 단 한 하나뿐이다.

“저도 되도록 그분의 청을 들어드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미성년의 사도가 옛 가족들과 대면하는 것은 엄금되어 있습니다. 먼 사막에서 와 교회 율법에 익숙지 않은 저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고 있는 금칙 중 하나이니, 그분께서도 몰라 부탁하신 건 아닌 줄 압니다. 만일 그랬다면 몇 번 보지도 못한 제가 아니라 익숙한 근위대로 가셨겠지요.”

현재 성궁의 근위대를 맡고 있는 장미 기사단은 엄정하기론 손에 꼽히는 수도사들이다. 예외를 용납하지 않는 이들이니, 만일 그들에게 청했다면 곧장 교황의 귀로 들어갔으리라.

“어린 동기를 아끼는 마음이 어찌 불순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참 난감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자니 발각될 시 후폭풍이 감당 안 되고, 거부하자니 신명을 거스르는 것 같아 거북합니다. 아침부터 고민이 많던 중에 마침 전하를 뵌 것이지요. 청컨대 부디 혜안을 빌려주십시오.”

“그 애의 뜻대로 하세요.”

백작은 서글서글 웃던 낯 그대로 굳었다. 응달에 묻힌 검은 눈이 묘하게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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