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328)

“그뿐입니까?”

골똘한 생각에 잠긴 듯 예후르는 대답이 없었다. 조금 당혹한 기색으로 백작이 짧은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게… 사막에서 건너온 저희 이스파갈족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희가 실수하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계시니, 티끌만 한 죄도 순식간에 산처럼 불어나겠지요. 일족을 책임지는 자로서 저는 그런 위험한 모험을 감수할 계제가 못 됩니다. 부디 재고해 주신다면….”

“장소는 카타리나의 벨렘 성이 좋겠군요. 라발과 인접한 지역이니.”

“…….”

“백작이 직접 호위하도록 하세요. 휘하의 용 기병들은 안 됩니다. 세간의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평범하게 꾸미는 게 낫겠죠. 벨렘 성엔 미리 연통을 넣어 두겠습니다.”

“전하.”

“내가 책임집니다.”

반박하려던 백작이 목멘 듯 덜컥 입을 다물었다. 팔짱 끼고 선 예후르는 새벽녘 서늘한 푸른빛처럼 무표정했다. 빛 없는 응달에서나 드러나는 그의 민낯이었다.

백작은 왼쪽 가슴을 짚으며 서서히 허리를 숙였다.

“존명, 받들겠습니다.”

예후르는 말없이 그를 지나쳐 갔다. 순백의 옷자락이 희롱하듯 그의 눈앞을 스쳤다. 단정한 발소리가 완전히 가실 때까지, 백작은 허리 숙인 그대로 미동하지 않았다.

예후르는 알현실로 향했다.

“…아니, 아니. 거기 말고. 그 옆을 긁어 주거라. 아니, 그 옆. 옆! 그 옆이라니까! 나 참, 고드릭. 제피린이 무에 얼마나 커다랗다고 간지러운 데 하나 제대로 못 긁느냐?”

들자마자 귀청을 때리는 목소리에도 예후르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자유롭게 알현실을 쏘다니는 고양이들을 넘어 붉은 휘장을 걷자, 큼지막한 고양이를 안고 땀 뻘뻘 흘리는 고드릭 수도사가 있었다.

“오늘도 고생이 많네요, 고드릭.”

“전하, 오셨습니까!”

고드릭이 벌떡 일어났다. 왜 이제야 왔냐는 듯 힐난이 섞인 투였다. 예후르는 고드릭의 품에서 뚱뚱한 고양이를 받아 갔다.

“예후르, 마침 잘 왔다. 네가 제피린의 옆구리를 좀 긁어 주려무나. 고드릭의 손길을 영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요. 고드릭이 잘 긁어 줬나 봐요.”

“오… 그래?”

붉은 소파에 푹 파묻힌 레오폴트가 눈을 껌벅껌벅했다. 고양이를 안은 채 예후르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동물들 다루는 고드릭 솜씨도 많이 좋아졌는데, 이제 믿고 맡겨도 되지 않겠어요?”

“아무리 솜씨가 좋아졌다 한들, 우리처럼 저 아이들 울음소리를 알아들을 수나 있겠느냐. 불쌍한 것들. 내 저 아이들에게 미안해 죽겠다. 옛날처럼 손이라도 성하면 만져 줄 수나 있지.”

레오폴트가 안타까운 눈으로 방 안의 고양이들을 둘러보았다. 벙어리장갑처럼 뭉툭하게 감싼 그의 손을 잠시 응시하던 예후르가 시선을 들었다.

“몬틸로 백작이 와 있던데. 당신이 불렀어요?”

“…어? 칼라한 말이냐? 당연히 내가 불렀지. 내가 아니면 여기서 칼라한을 부를 사람이 누가 있다고.”

“당분간 여기 머물라고 해요. 어차피 페기의 생일이면 다시 올라와야 하는데. 세투발에서 여기까지 가까운 거리도 아니잖아요.”

“네가 웬일로… 드디어 칼라한과 잘 지내 볼 생각이 든 게야?”

“그자와 잘 못 지냈나요, 내가?”

“아무렴. 잘 지낸 건 아니지. 그렇지 않느냐, 고드릭?”

“잘 지내셨다고 하긴 뭐하지만… 평소 전하의 대인 관계를 참작해 보면 평범한 축에 들지 않겠습니까?”

“봐라. 저 고지식한 녀석에게까지 한 소리 듣는데 무언가 깨닫는 것이 없어?”

“서, 성하. 제가 언제 전하께 한 소리를 했다고 하십니까….”

고양이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빠진 털을 주워 담던 고드릭이 소심하게 항의했다. 예후르는 소리 없이 웃으며, 나른하게 늘어진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30년 전 라발의 침공으로 대다수의 병력을 잃은 교국은 두 개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간신히 자위(自衛)의 토대를 재건했다.

하나는 성궁을 수호하는 근위대고, 다른 하나는 외곽을 지키는 경비대였다. 몬틸로 백작 칼라한은 경비대장임과 동시에 경비대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이스파갈족의 우두머리기도 했다.

그러나 예후르는 오랫동안 그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사람에게 연연하지 않는 그의 성향 탓도 있으나, 그보단 다른 이유가 컸다.

“이 정도가 딱 적당해요. 특히 몬틸로 백작과는. 사막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나와 백작을 연관 짓는 자들이 많은데, 여기서 더 잘 지냈다가 무슨 소리가 나돌 줄 알고요.”

“그런 녀석이 뜬금없이 칼라한 얘기는 왜 꺼내선.”

“페기가 답답해하는 것 같아서요. 옆에 차라도 붙여서 바깥나들이를 보낼까 하는데. 몬틸로 백작이 호위로 따라붙으면 어떨까요?”

“페기가 답답해한다고?”

레오폴트가 늘어져 있던 목을 퍼뜩 들어 올렸다. 허리를 곧추세우는 그를 고드릭이 황급히 부축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무슨 일은요. 꽃 피는 봄인데 궁전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갑갑하잖아요. 이번 생일만 지나면 정식으로 작위도 받을 테니, 마음이 심란하기도 하겠고.”

“그래… 그렇겠지. 내가 무심했구나. 아파도 아프단 소리 한 번 제대로 안 하는 아이니 내가 먼저 자세히 들여다봤어야 했는데.”

“…레오. 당신은 당신 몸이나 신경 써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예후르의 어조에 레오폴트가 설레설레 손을 흔들었다.

“내 병은 너무 오래되어 이젠 삶의 동반자나 다름없다. 달리 신경 쓸 거리도 아니야. 아무튼 내 칼라한에게는 일러두겠다. 조만간에 페기와 차라를 데리고 봄꽃이라도 좀 보고 오라고. …한데 고드릭, 네 표정이 왜 그 모양인 것이야?”

“예? 제가 언제 코를 씰룩거렸다고 그러십니까…?”

“나는 네 코가 씰룩거렸다고 한 적이 없는데?”

“고드릭은 몬틸로 백작을 싫어하잖아요.”

찻잔을 턱밑에 두고 차향을 즐기던 예후르가 짓궂게 말했다. 레오폴트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고드릭, 고드릭아. 네 아직도 그리 고리타분한 틀에 갇혀 사는 것이야? 칼라한이 비록 사막에서 건너온 이민족일지언정, 지금은 우리 교국을 지켜 주는 고마운 힘이 아니냐? 저들이 없다고 생각해 봐. 저 빌어먹을 라발의 승냥이 떼가 우릴 가만두겠어?”

“…라발이 천벌 받을 놈들임은 백 번 천 번 옳은 말씀이나, 저는 몬틸로 백작도, 이스파갈족도 썩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그네들이 충성 서약을 맺지 않겠노라 억지 부렸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속에서 분이 화르륵!”

“결국 서약을 했지. 그럼 된 것이다.”

“아직 개종 문제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끝끝내 개종을 거부해서 지금도 툭하면 클레멘스 추기경이 그 문제를 걸고넘어지는데, 어찌 그들을 좋게 볼 수 있답니까?”

“그래서 우리가 모시는 여덟 천사를 그들이 믿는 신으로 넣어 주었지. 그만하면 그들로서도 많이 양보한 것이야. 너라면 하루아침에 부모를 바꾸고 성을 갈 수 있겠느냐?”

“물론이지요. 수도사에겐 부모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이고. 잘났다, 이 애미 애비도 없는 놈.”

레오폴트가 구시렁거리며 고드릭에게서 홱 돌아앉았다. 그러곤 무릎 위에 발라당 누운 고양이와 자기들만의 세상에 푹 빠진 예후르를 넌지시 보았다.

“이리니가 탄원서를 제출했다.”

“탐보프의 페임하른 공이요? 교회라면 치를 떨던 이가 어쩐 일로?”

“빌헬미나가 제 아들을 강탈하려 한다더구나. 슬슬 후계 걱정이 되는 게지.”

북방의 제국, 탐보프의 황제 빌헬미나 3세는 슬하에 세 자식을 두었다. 첫째와 둘째는 어린 나이에 죽고, 막내만 살아남았는데 그마저 유전병으로 신체가 온전치 못했다. 신체 불구자는 탐보프의 황제가 될 수 없으니, 사촌의 아들을 앗아 가려는 것이었다.

“빌헬미나 3세도 참 대단하네요. 어쨌거나 황위를 두고 다투었던 정적의 아들인데. 본인이 페임하른 공의 코를 자른 건 기억이나 할까요.”

“목숨 붙여 준 것만으로도 자비를 베푼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까지 뺏어 가려는 건 조금 너무한 처사다만… 그만큼 빌헬미나도 압박을 받고 있단 거겠지. 아이를 더 낳기엔 늦은 나이가 아니더냐.”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고양이의 턱을 긁어 주던 예후르가 미미하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받친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레오폴트가 느리게 말을 꺼냈다.

“방관이 최선이겠지.”

“불쌍한 페임하른. 수족들이 잘리고 코도 잘렸는데 이젠 아들까지 잃게 생겼군요.”

“비꼬지 마라.”

“익숙해져야죠, 레오. 남들은 다 이렇게 얘기할 텐데.”

“…….”

“교황 성하께서 또 누이동생의 편을 들어 주시는구나. 이리니 페임하른은 어찌 성하의 사촌으로 태어났을꼬. 태어나려거든 가까운 형제자매로 태어났어야지.”

눈을 내리깔고 읊조리듯 얘기하는 예후르의 얼굴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 아래 고양이가 갸르릉 울었다. 레오폴트가 노여움을 삼킨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탐보프는 우리의 우방이다. 내 고향이라서가 아니야, 애당초 갓난쟁이 시절 이곳으로 왔는데 고향이 무에 소용이겠느냐? 그러나 빌헬미나가 황위에 오른 지 어언 10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제 와 괜히 들쑤시면 라발만 좋은 꼴이라는 걸 네 어찌 몰라?”

“알아요. 당신이 라발을 증오해 탐보프를 우방으로 삼았다는 건.”

“…….”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겠어요.”

예후르가 무릎 위에서 재롱 피우던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고드릭에게 넘겼다. 레오폴트가 심기 불편한 기색으로 물었다.

“무엇이냐?”

“요앙 오귀스트의 친서예요.”

“뭐?!”

붉은 실링을 뜯던 고드릭이 기겁하여 손을 멈추었다. 요앙 오귀스트라면 라발의 황제. 레오폴트가 분을 못 참고 소파를 마구 때렸다.

“고드릭! 당장, 당장 불태워 없애거라! 감히 그 버러지 같은 놈의 편지를 내 앞으로 들이밀어?”

“레오.”

“그놈이, 그놈의 어미가, 라발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데! 넌 다 알지 않느냐! 내가 그날에 무얼 겪었는지 넌 알아!”

“읽어야 해요.”

예후르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라발에서 마귀가 나타났어요.”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레오폴트가 말을 뚝 멈췄다. 고드릭이 바구니를 떨구자, 그동안 열심히 주워 담았던 고양이 털이 부옇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정적이었다.

예후르는 가만히 발치를 응시했다.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뱀이 깨어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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