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렘 성은 지어진 지 고작 6년밖에 안 된 성이다. 본래 이 자리에 있던 성은 30년 전 라발의 침공으로 무너졌는데, 이후 레오폴트가 라발을 경계하겠다며 옛 성터에 신축한 것이었다.
교국 최남단에 위치하여 라발의 재침에 대비하는 곳이라지만, 30년 가까이 이어진 평화의 시대에 제 역할을 잃은 곳이기도 했다.
페기는 침략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이 성이 참 신기했다. 환락의 도시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태어나 반평생을 앙겔리카 성궁에서 살았던 그녀는 30년 전 잿더미로 변했을 이곳의 풍경을 선뜻 상상할 수 없었다.
“듣기론 무진장 끔찍했다고 합니다.”
본시오가 느릿느릿 빵을 씹으며 말했다.
“고대 적부터 자리를 지켜 왔던 성들이 죄다 무너지고, 민가는 곡식 한 톨 남김없이 약탈당했다죠. 가장 심하게 망가진 곳이 성도 오스피나입니다. 점령당했던 일 년 남짓 동안 돈 될 만한 건 깡그리 뜯어 갔다고 해도 좋을 정돕니다. 게다가 선대 교황 성하께서도… 음, 이건 적절치 못한 말이군요. 송구합니다.”
페기의 잔에 물을 따라 주던 알틴이 눈치껏 물었다.
“아니, 근데 라발 군은 어쩜 그리 심보가 고약하대요? 그쪽 기사들은 명예와 신의도 모르나?”
“교국을 침략한 건 라발의 정규군이 아니었으니까요. 라발의 섭정이 고용한 용병대였습니다.”
“네에? 왜요?”
“군을 움직이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드니까요. 당시 라발의 섭정은 교국을 점령할 생각까진 없었을 겁니다. 단순히 본때를… 송구합니다. 단순히 경고를 주기 위함이었겠죠. 그래서 적은 돈 주고 부릴 수 있는 용병대를 보낸 건데, 그게 치명적인 악수였던 겁니다. 물론 교국의 입장에서.”
한마디로, 돈이 궁했던 용병대가 사령관의 말을 무시하고 날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사령관은 라발에서 잔뼈 굵은 장군이었는데, 용병대도 그의 말은 좀 들었죠. 그런데 어느 날 사령관이 취침 중에 죽어 버린 겁니다. 병 없이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 뒤를 이은 사령관은 짐승처럼 날뛰는 용병들을 통솔할 여력이 안 되었고, 그마저 성도 공성전에서 죽어 용병대의 고삐를 죌 사람이 사라진 거죠.”
교국이 함락되자 탐보프의 구원병들도 섣불리 국경을 넘지 못했고, 나머지 국가들의 지원책도 흐지부지.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일 년 동안 오스피나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당시 유일한 사도셨던 지금의 성하께선 교황의 자리에도 오르시지 못한 채 감금되셨고, 교국은 용병대의 손아귀에 들어갔죠. 지금도 오스피나의 거리에는 그 시절의 흔적이 드문드문 남아 있습니다. 성하께서 집착적으로 그날의 흔적을 지우고 계시지만, 그게 어디 쉽나요. 오직 시간만이 해결해 줄 일이죠.”
샐러드만 깨작거리던 페기가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고 눈가를 쓸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자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용병대요? 뒤늦게 상황을 들은 라발의 섭정이 부랴부랴 사람을 보내 확인하는 동안 물갈이가 꽤 되었죠. 성궁의 귀한 예술품 몇 점만 훔쳐다 팔아도 죽을 때까지 먹고살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어찌어찌 성하께서 교황의 자리에 오르셔서 강화 협정을 체결하셨는데, 조항 중 하나가 장미 기사단을 근위대에서 해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신 성궁의 근위대로 들어간 조직이 바로….”
“설마! 설마 라발의 용병대였던 거예요?!”
“…알틴 양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가져가는군요. 예, 맞습니다. 오스피나를 약탈했던 이들이 도리어 그곳을 수호하는 집단이 된 거죠.”
알틴이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그 시절을 전혀 몰랐다. 20년 전 전권을 되찾은 레오폴트가 제일 먼저 내린 칙령이 바로 용병대를 내쫓고 장미 기사단을 성궁의 근위대로 복귀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아가씨,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예요? 하도 쉬쉬하기에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성하께서 라발을 왜 그리 질색하시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용병대라니, 허! 내 눈에 보이기만 하면 그 얼굴을 확 뜯어 버릴 텐데!”
“지금 보고 있잖아요.”
본시오가 나이프로 고기를 푹 찔렀다. 갈라진 고기 틈으로 붉은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페기와 알틴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멀거니 그를 쳐다만 봤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었다.
그때, 식당 문이 거칠게 열리며 차라가 뛰어들어 왔다. 페기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 언제 일어났….”
“어디 있어?”
페기는 가만히 입을 닫아걸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차라가 격분해 고함쳤다.
“어디 있냐고, 내 가족들!”
“도련님!”
헐레벌떡 달려온 하인들이 그의 얇은 잠옷 위로 두꺼운 망토를 걸쳐 주었다. 그만 침실로 돌아가시라 비는 하인들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며 차라가 한 발짝 다가왔다.
“말해. 어디 있어.”
흉흉한 기세였다. 침묵하는 제 주인을 힐끔 훔쳐본 알틴이 짐짓 상냥한 미소를 꾸며 냈다.
“어머나, 도련님. 그러지 마시고 식사부터 하셔요. 속이 안 좋다며 종일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잖아요.”
“넌 끼어들지 마.”
“하지만 그리 핼쑥한 안색으로 가시면 가족분들이 걱정하실 거예요. 어서 여기 앉으셔요. 제가 따뜻한 요리 금방 대령할게요.”
“그만해, 알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차라 대신, 페기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러고도 얼마간 발치를 응시하던 그녀가 문득 시선을 곧게 들었다.
“데려다줄게. 가자.”
페기가 앞장섰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알틴이 그녀의 어깨 위로 보드라운 망토를 걸쳐 주었다. 몸을 돌리다 순간 휘청한 차라가 하인의 부축을 받아 발걸음을 옮겼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그의 낯이 희끄무레하게 번졌다.
그들은 본관을 나와 별채로 향했다. 수풀 우거진 곳에 횃불 두엇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별채 정문 앞에 앉아 시시덕거리던 경비대원들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손님들은 안에 계셔요?”
알틴의 물음에 기사가 예, 하고 대답했다. 페기는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 보라는 듯 조용한 눈빛에 차라가 턱을 살짝 떨었다.
“…이 안에 있어?”
“응.”
차라는 선뜻 문턱을 넘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한참을 망설였다. 페기는 그저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등 떠미는 말도, 돌아가자 설득하는 말도 없었다.
끝내 차라가 발을 뗐다. 혀 잘린 몇몇 하인들만 그의 뒤를 따랐다. 페기는 찬 바람 맞고 선 채로 소년의 작은 뒷모습을 응시했다. 휘청휘청 흔들리는 발걸음이 닫히는 문틈으로 사라졌다.
혼자서 감내할 일이다. 그렇지만.
한숨을 삼키며 돌아서던 페기가 멈칫했다. 별채의 보초를 서던 경비대원과 알틴이 묘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횃불 아래 보이는 경비대원의 낯이 묘하게 눈에 익었다.
“아, 아가씨. 밤바람이 차요. 그만 들어가셔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알틴이 아무 일도 아닌 척 해말갛게 웃었다.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페기는 조금 웃었다.
“먼저 들어갈 테니 너는 나중에 들어오렴.”
“네?”
페기는 대꾸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뒤따라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점점 짙어지는 밤의 수풀. 소리 죽인 알틴의 속삭임도, 사내의 웃음소리도 차츰차츰 어둠에 먹혔다.
마침내 완전한 적막 속에서 페기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아.”
조용하다.
그녀의 고향은 저 멀리 남쪽 바닷가에 기생한 도시였다. 도시의 이름은 카니나. 도박과 유흥이 범람하는 환락의 도시로, 타국의 부유한 귀족들마저 동절기가 되면 그곳으로 내려와 화려한 겨울을 즐기다 가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태어난 곳은 눈부신 양지에 필연적으로 깃드는 음지였다. 깎아지르는 벼랑에 철썩철썩 부딪히는 파도의 절경, 희게 칠한 건물의 외벽, 아름답게 치장한 가수와 무용수, 술잔에 서리는 비밀스러운 속삭임, 도박판을 오가는 은밀한 손길.
사람들이 상상하는 카니나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카니나의 뒷골목은 그저 아프게 내리쬐는 뙤약볕과 양지에서 밀려온 쓰레기 그리고 쓰레기를 뒤지고 다니는 시궁쥐들로 가득했다.
그 시궁쥐가 바로 그녀였다.
물웅덩이에 제 모습을 비춰 보기 전까지 그녀는 스스로 조금 커다란 쥐인 줄만 알았다. 갓 서너 살 먹은 그녀는 몹시 작고 왜소해서 들쥐처럼 쓰레기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닐 수 있었다.
시커먼 손발, 더럽게 헝클어진 머리칼. 제 눈에 비치는 모습이 그러하니, 언제쯤 저 들쥐처럼 온몸에 털이 날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내린 비는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던 시커먼 때를 모조리 씻어 내렸다. 드물게 내리는 비에 사람들은 기뻐 환호했으나, 그녀는 도리어 쓰레기장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부모 없는 뒷골목 어린애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차라리 나도 시궁쥐로 낳아 주지 그랬나. 원망은 금세 방향을 잃고 따가운 볕 속으로 증발하곤 했다.
드문드문 남은 여섯 살까지의 기억은 아직도 그녀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따사로운 봄날의 볕에서, 향긋한 꽃다발의 향기에서 그녀는 카니나의 뙤약볕을 느끼고, 쓰레기 더미의 구린내를 맡았다. 멋대로 떠올라 멋대로 사라지는 기억은 그녀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악취에 벌레들이 꼬일 때면, 그녀는 진실로 혀 깨물고 죽고 싶어졌다.
어두운 화단에 쪼그려 앉은 채 페기는 가만히 뺨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차라를 낳아 준 부모는 평범하다 들었다. 상단의 회계를 맡은 아비와 자식 셋을 기르는 어미. 평범해 본 적 없던 페기는 한순간 뒤바뀐 삶에 쉬이 순응했으나, 차라는 그렇지 못했다. 평범하기에 특별한 삶이었다. 그러나 평범하지 못해 특별한 삶도 있다는 걸 그도 이제는 알아야 했다.
새카만 적막 속에 귀는 더욱 예민하게 트였다. 저 멀리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멀어져 간다. 페기는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오래지 않아 알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도련님, 어디 계세요! 나 참, 도대체 어딜 가신 거… 어맛!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