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라는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붉은 장미, 보랏빛 라일락, 하얀 수선화, 노란 붓꽃…. 갓 피어난 꽃들이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냈다. 차라는 입술을 깨물며 꾸물꾸물 꽃다발 뒤로 얼굴을 숨겼다.
“아이고, 엄마라니. 제발 부탁입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셔요.”
반년 가까이 눈물로 그리던 가족들이었다. 그들도 똑같은 마음으로 절 그렸으리라 생각했던 게 그리 잘못이었을까. 응석받이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우러러 모시던 천사의 현신으로 화했다고, 하지만 변한 건 하나도 없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안 됐던 걸까.
제 발밑에 엎드려 손발이 닳도록 비는 엄마를 보며 차라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이해하려는 노력도 했다. 늘 귀족들의 무자비한 칼날 아래를 기어야 했던 처지니, 귀족들 위에 군림하게 된 제가 어렵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상처도 컸다.
“사람들은 우릴 이해 못 해.”
어쩌면 정말 그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레오폴트와 예후르 그리고 페기. 피로 이어지지 않은 그들이 눈꼴시게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 것도, 결국은 저희들밖에 없어서 그런 걸지도.
“차라. 우니?”
“…….”
“저기, 내가 안아서 달래 줘도 될까?”
조심조심 망설이며 묻는 페기의 목소리에 차라는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세상에나, 레오폴트와 예후르가 그리 저 애를 싸고도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차라는 퉁퉁 부은 눈을 소매로 거칠게 닦았다. 침묵을 거절로 알아들었는지 페기는 꽃다발 뒤에 숨겨진 그의 얼굴만 기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꽃다발에서 제비꽃을 뽑아 차라의 귀에 꽂아 주었다.
“예쁘다.”
페기가 눈을 접으며 희게 웃었다.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차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어쩔 줄 몰라 다시 꽃다발로 얼굴을 가리는 그의 모습에 페기가 맑게 웃었다. 꽃향기가 부유하는 어느 봄날의 아침이었다.
둘은 종일 후원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명색만 꽃 나들이였던 여정이 진실로 그렇게 된 것이다.
“내가 그림 그려 줄까?”
만 하루를 굶어 걸신들린 듯이 음식을 집어넣던 차라가 갑자기 화가 행세를 하고 나섰다. 풍경화를 그린다는 줄만 알았던 페기는 돌연 꽃밭에 앉아 보라는 말에 놀랐다.
“날 그린다고?”
떨떠름한 물음에도 차라는 물감을 늘어놓느라 여념 없었다. 페기는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물고 꽃밭에 앉았다. 젠체하는 차라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위는 곧 붓 스치는 사각사각 소리만이 가득해졌다. 차라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붓을 놀렸다. 그림을 감상한 적은 많아도 그림 속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은 없던 페기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표정이 뻣뻣하다는 둥, 자세가 굳어 있다는 둥 별의별 핀잔을 다 들었다.
“아직이야?”
“잠깐, 재촉하지 좀 마. 곧 있으면… 됐다! 완성!”
붓을 내던진 차라가 종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페기는 내심 기대감을 갖고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별다른 말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차라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마음에 안 들어?”
페기는 대꾸 없이 그림을 가져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따사로운 볕 아래 여러 각도로 비추어 보았다. 초조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라는 문득 스스로 왜 초조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괜히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어렵게 생긴 걸 어떡하라고…. 마음에 안 들면 다음에 다시 그려 주면 되잖아.”
“아니야. 마음에 들어.”
“정말?”
“응.”
페기는 좀체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차라는 이유 모를 뿌듯함에 가득 차 발라당 풀밭에 드러누웠다. 오랜만에 열중했더니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페기가 처음 보는 제 초상화가 신기해 이리저리 살펴보는 동안, 차라는 달콤한 낮잠에 빠졌다. 페기는 뒤늦게야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배를 긁으며 자는 차라의 말려 올라간 상의를 내려 주고,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사람들 눈엔 내가 이렇게 보이나.
그림 속 꽃밭에 앉은 여자는 작고 여위고 하얬다. 그리 작은 키가 아닌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페기는 흐릿한 표정의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분명 수천수만 번 거울로 보았던 눈 코 입이 맞는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페기는 철퍼덕 풀밭에 누워 그림을 든 양팔을 쭉 뻗어 올렸다. 말마따나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이 기특했다. 세상에 또 누가 저에게 이런 걸 선물할까.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그림에 까만 점이 지기 시작했다. 페기는 의아해하며 그림을 내렸다. 어느덧 붉은 석양이 몰려드는 하늘. 저 멀리서 한 마리 새가 날아오고 있었다.
…아니, 새가 아니다.
새라기엔 너무 컸다. 페기는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처럼 하늘을 날면서, 새보다 거대한 것. 세상에 그런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아가씨!”
몬틸로 백작과 기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멍하니 그들을 돌아보았던 페기는 갑자기 등 뒤에서 몰아닥치는 돌풍에 머리를 웅크렸다. 가까스로 실눈을 뜨자, 휘날리는 제 머리칼 사이로 거대한 용의 비늘이 비쳤다.
시커먼 역광을 드리운 용이 크르릉 운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울음소리를 깔고 앉은 누군가 용의 고삐를 강하게 죄었다. 페기는 그제야 높이 솟은 용의 등에 누군가 타고 있음을 깨달았다. 용 기병인가. 그렇다면 몬틸로 백작이 저리 놀랄 이유가 없지 않나.
용이 완전히 날개를 접자, 몰아치던 바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용 기병이 날랜 몸놀림으로 뛰어내렸다. 서녘으로 지는 해를 등져,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는 듯했다. 그는 용의 고삐를 쥐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나 몇 발짝 뒤로 물러난 페기는, 순간 볕 아래 드러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예후르?”
붉은 석양 아래, 그을린 갈색 피부가 매끄럽게 빛났다. 섬세한 이목구비를 따라 드리워진 음영 사이론 호박색 눈이 선명하게 존재감을 발했다. 저 얼굴, 저 눈빛. 그녀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성궁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어야 할 이가 어찌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
멍하니 선 그녀의 등 뒤에서 몬틸로 백작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역시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황한 듯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예후르가 그에게 용의 고삐를 넘겼다.
“맑은 날에도 잘 날던데요.”
예후르가 검은 가죽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백작이 황망히 쳐다만 보자, 그는 등 뒤의 용을 가볍게 눈짓했다. 백작이 허, 짧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장갑마저 백작에게 맡긴 뒤, 예후르는 페기에게로 다가갔다. 페기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저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후르가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팍에 폭 박혀 페기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머뭇머뭇 그의 옷자락을 쥐려는 찰나에 예후르가 한 발짝 떨어져 나갔다.
“잘 지냈니?”
예후르가 고개를 모로 기울여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빤한 시선에 페기는 차츰 정신을 차렸다.
“왜… 왜 여기 있는 거야? 분명 성궁에 있어야….”
“잠시 라발에 다녀오는 길이야. 아직 여기 있으려나, 하고 와 봤는데 다행이네.”
“라발에?”
갑자기 바람이 인다 싶더니, 하늘에서 용 열댓 마리가 내려앉았다. 창백한 얼굴로 비틀비틀 용에서 기어 내려오는 그들을 멍하니 응시하던 페기가 문득 입을 열었다.
“…레오한텐 말하지 마.”
“응?”
“라발에 다녀온 거.”
페기가 고요한 시선을 보내 왔다. 예후르는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뜸을 들였다.
“레오도 알아.”
“안다고?”
“응. 그보다 섭섭하네. 난 네가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예후르가 빙글빙글 웃었다. 페기는 어쩐지 조금 억울해졌다. 누구는 수선스러운 속을 다스리느라 죽을 맛인데. 괜스레 심통이 나 그의 뺨을 잡고 쭉 늘였다.
“아야.”
“내가 놀리지 말랬지.”
짐짓 그를 흘겨본 페기가 뒤를 돌아보았다.
“차라랑도 인사해. 아마 깨어났을 거… 차라?”
차라는 꼭 해괴한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페기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일단 그에게 손짓했다. 차라가 죽상으로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안녕.”
“응. 안녕.”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차라는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고, 예후르는 꼭 기사들을 대하듯 사무적인 태도다. 페기가 예후르의 팔뚝을 잡고 끌어당겼다.
“차라도 안아 줘.”
“뭐?!”
차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왜 그렇게 놀라냐는 듯 그를 흘긴 페기가 다시 엄한 눈으로 예후르를 보았다.
“얼른. 나 안아 줬던 것처럼 똑같이.”
“야, 미쳤어? 너 왜 그래!”
“빨리.”
“나야 상관은 없는데, 차라가 저렇게나 질색하니.”
“내가 질색할 때도 잘만 안아 줬으면서.”
“음… 그것도 그러네.”
예후르가 선뜻 양팔을 벌렸다. 차라는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굳었다. 예후르가 꼭 끌어안아 품어 주는 동안, 차라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차라. 너도 잘 지냈니?”
페기에게 하듯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자, 차라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 그런 건 쟤한테나 하란 말이야!”
“하하. 차라한텐 안 통하네.”
“으….”
그래도 얌전히 품에 안겨 있던 차라가 기특해, 페기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차라가 붉어진 귓가를 숨기듯 괜스레 고개를 숙이며 돌멩이를 찼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후르가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나도 해 줘.”
“뭘?”
“차라한테 해 준 거. 나한테도 똑같이 해 줘야지.”
페기가 어처구니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럴 때 보면 아직도 애 같다니까.”
결 좋은 흑발을 쓰다듬어 주자, 영롱한 금안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 눈과 마주친 페기가 멈칫 손을 물렸다. 예후르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그녀의 머리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