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서신… 아버지의 것이라 말씀드렸지만, 실은 황제 폐하의 뜻이기도 해요. 전하께서도 잘 아실 거예요.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걸.”
세도파가 사근사근하게 속삭였다.
“클레멘스 추기경을 비롯한 라발의 잔당들이 걸핏하면 전하께 어깃장을 놓는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저희 숙부를 포함해 탐보프의 성직자들은 그렇지 않죠. 탐보프는 전하께 더욱 많은 것을 드릴 수 있어요. 금, 곡식, 군대…. 교회를 위해서라면 황제 폐하께선 기꺼이 제 품을 여실 거랍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예후르는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만 봤다. 세도파가 긴장감 어린 목소리를 간신히 꺼냈다.
“저도 이제 스물하나예요.”
“…….”
“아버지께서도, 황제 폐하께서도… 그리고 저도 이젠 혼인하기 적당한 때라고 생각해요. 전하의 눈에는 제가 모자란 것투성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전하의 곁에 서기 위해 죽도록 노력해 왔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세도파가 떨리는 눈을 들어 그를 직시했다.
“저는 전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부디, 제가 전하께 드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헤아려 주세요.”
예후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세도파는 차마 더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문득, 매달리듯 책상 모퉁이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갈색 손이 덮어 왔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 토닥토닥 두드려 왔다. 세도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예후르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페임하른 공의 문제는 성하와 다시 얘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결혼 문제는….”
고민하듯 살짝 미간을 찡그리던 예후르가 선뜻 입을 열었다.
“무도회가 끝나면 다시 생각해 보죠. 교국의 중대사를 두 건이나 동시에 진행할 순 없으니.”
창백하던 세도파의 뺨에 차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예후르의 손을 꼭 쥐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격에 목이 막혀 목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세도파는 그렇게 행복을 만끽하며 떠났다. 그녀를 보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예후르가 종을 울려 모드벤나 수도사를 불렀다.
“세도파 아가씨가 결혼 얘기를 꺼냈다고요?”
독수리 부리처럼 높고 날카로운 모드벤나의 콧대에 살짝 주름이 졌다.
“페기 아가씨의 추기경 임명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꺼낼 만한 화제는 아니군요. 탐보프에서도 꽤나 급한 모양입니다.”
“그쪽도 레오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죠. 뭐, 지금까지 버틴 게 기적이긴 하지만.”
레오폴트의 병환은 오래된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서른을 넘기기 전에 목숨이 다했을 것이나, 그에게 깃든 천사의 권능이 그의 숨을 붙들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제법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하의 연치 벌써 스물넷이에요. 이제 슬슬 결혼을 고려하실 땝니다. 성하께서도 그걸 바라고 계시는 눈치고요.”
“…….”
“세도파 아가씨가 마음에 차지 않으신가요?”
모드벤나의 물음에 예후르가 코웃음 쳤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어요. 세도파의 말대로, 이 결혼으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그렇다면 세도파 아가씨가 줄 수 있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으시군요.”
예후르는 노을이 몰려드는 창밖 하늘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굉장히 불쾌했거든요.”
모드벤나는 말없이 시선을 내려트렸다. 몇 년을 알고 지냈으면서 세도파는 아직도 저이를 모른다. 인간적인 호감과는 별개로 그녀는 세도파가 못내 안타까웠다.
“내일까지 페임하른 소공작에 대한 정보를 올려 줘요. 어떤 사람인진 알아야 하니까.”
“네.”
“난 먼저 식사하고 올게요. 늦지 않으려나 모르겠네.”
“아, 그게, 전하.”
자리에서 일어나던 예후르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모드벤나가 묘하게 경직된 낯으로 말을 골랐다.
“페기 아가씨와 차라 도련님이 춤을 연습하다 일찍 허기가 지셨는지, 먼저 식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성하께서도 오늘은 입맛이 없다고 하시고요.”
그녀의 말을 곱씹듯 예후르는 뒤늦게야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도로 자리에 앉은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식사를 따로 올리라고 할까요?”
“아뇨. 난 괜찮으니 가서 일 봐요.”
모드벤나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예후르가 문득 고개를 틀었다. 등 뒤로 난 커다란 창에서 붉은 석양이 스며들고 있었다.
“…피곤하다.”
그가 고단한 눈을 내리감았다. 깎아지를 듯 날렵한 옆얼굴이 붉은빛에 먹혔다.
***
“와, 차라 도련님! 방금은 실수 한 번 없으셨어요.”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알틴이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차라가 쑥스러운 얼굴로 콧등을 매만졌다.
“그렇게 연습했는데 실수가 없어야지, 그럼.”
“처음으로 실수 없이 추신 거잖아요. 한 번도 춤을 배워 본 적 없는 분이 이 정도면 그래도 선방하신 거예요.”
“그, 그런가? 내가 생각만큼 몸치는 아닐지도….”
“아뇨. 우리 아가씨께서 도련님을 잘 이끌어 주신 덕분이죠!”
알틴이 간사한 얼굴로 페기 옆에 딱 달라붙어 재롱을 피웠다. 차라가 흰 눈으로 그녀를 흘겼다. 페기가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도 많이 발전했어. 동작이 몸에 익으면 지금 같은 뻣뻣한 느낌도 많이 사라질 거야.”
“뻣뻣한 건 상관없어. 얼토당토않은 실수만 안 하면 되는 거지…. 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발 꼬여 넘어지는 상상만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
차라가 진저리 치며 팔뚝을 벅벅 긁었다.
“사람들 많이 오려나? 많이 오겠지? 설마 둥글게 모여서 우리 둘이 춤추는 거 구경하는 건 아니지?”
“글쎄….”
“도련님. 아가씨도 이번에 데뷔하시는 건데 그걸 어찌 아시겠어요?”
톡 쏘는 알틴의 말에 차라의 안색이 조금 희게 질렸다. 그의 암녹색 눈이 아래위로 페기를 훑었다.
“너 사람들 앞에서 춤춰 본 적 없어?”
“응.”
“너도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막 긴장해…?”
“글쎄….”
“아까부터 뭐 묻기만 하면 글쎄래! 으, 레오는 왜 초짜한테 초짜를 붙여 준 거야! 우린 망했어!”
“어머머? 우리 아가씨가 왜 초짜예요? 춤을 이렇게나 잘 추시는데!”
“쟤 생긴 걸 봐! 간이 요만할걸?”
“아가씨 간이 요만하면! 도련님 간은 콩알만 한 거예요?!”
“그래! 요만한 간이랑 콩알만 한 간이 만나서 아주 잘 되겠다!”
근 며칠 지겹도록 보았던 대치에 페기가 지친 듯이 끼어들었다.
“해 본 적 없는 일은 해 봐야 알지. 긴장해도 음악 소리에 저절로 몸이 움직일 만큼 연습하면 괜찮을 거야.”
“흐음….”
차라가 힐끗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간이 요만한 사람이 할 만한 대사는 아닌데. 네 간은 요만큼 더 큰가 보다. 다행이야.”
“아무렴. 도련님보단 우리 아가씨가 더 대범하시죠.”
“야. 너 나 놀리는 게 재밌냐? 어?”
“어머나. 상전 대접은 부담스럽다며 편하게 대하라고 하신 분이 누구였더라?”
“이게 진짜!”
“재미있어 보이네. 나도 끼워 주면 안 돼?”
별안간 부드러운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어느샌가 연습실로 들어온 예후르가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예고 없는 그의 등장에 차라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페기가 놀란 기색으로 다가갔다.
“예후르?”
“안녕, 페기.”
예후르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페기는 목을 가파르게 세워 그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한창 바쁠 시간 아니야?”
“음….”
그의 턱 밑에다 고개를 세운 페기가 멀뚱멀뚱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예후르가 그 모습을 보곤 싱긋 웃었다.
“어제 못 봤잖아.”
그 말에 페기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의 머리에 조심스레 입을 맞춘 예후르가 고개를 들어 차라를 보았다. 어쩐지 못마땅한 기색이던 차라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랐다.
이리 오라는 듯 예후르가 손짓했다. 차라가 도리도리 고개를 젓자, 더는 권하지 않고 연습실 한쪽에 마련된 소파를 턱짓했다. 차라가 죽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습 열심히 하나 봐. 저녁도 먼저 먹을 정도면.”
“내, 내가 그러자고 했어. 어제 너무 배가 고파서….”
차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뒤따라오던 그를 예후르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차라는 멈칫멈칫 시선을 피했다. 피식 웃은 예후르가 손을 뻗어 안 그래도 사방으로 뻗친 차라의 잿빛 머리칼을 흩트렸다.
“잘했어. 성장기엔 많이 먹어야지.”
“어? 어, 응….”
차라는 무진 생소한 기색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졌다. 그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예후르와 페기가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뒤늦게 그 모습을 발견한 차라가 헉 소리를 내며 황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양옆에서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차라는 꿋꿋이 엉덩이를 비집고 앉았다. 차라의 정수리 위에서 예후르와 페기가 의아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페기가 일어나려 하자, 예후르가 웃음으로 말리며 맞은편 소파로 가 앉았다.
쟁반에 찻잔을 받쳐 들고 오던 알틴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어머나. 차라 도련님께서 우리 아가씨를 굉장히 좋아하시나 봐요.”
“아냐!”
즉각적으로 반박한 차라가 또다시 느껴지는 시선들에 움찔했다. ‘아니야?’ 하고 중얼거리는 페기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예후르가 더 문제였다.
“…좋아하는 건 맞는데, 굉장히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귀여우셔라.”
놀리듯 감탄하는 알틴을 차라가 팩하니 째려보았다. 못 본 척 알틴이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