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내가 한 명 더 있으랴?”
안드레아가 붉은 입술을 죽 찢어서 웃었다. 하기야 저 사나운 인상하며 예후르에 버금가는 큰 키, 도무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 안 되는 생김새가 안드레아 말고 더 있을 리 없었다.
얼떨떨하던 페기의 낯에 점차 웃음기가 번졌다.
“안드레아!”
안드레아는 돌격하듯 품에 안기는 페기를 안정적으로 받아 냈다. 여전히 곱슬곱슬한 은발을 쓰다듬으며 눈짓으로 알틴에게 눈치를 주었다. 멍하니 그들을 지켜보던 알틴이 황급히 방문을 열었다. 안드레아는 페기를 가볍게 안아 올리곤 성큼성큼 복도로 나갔다.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연락도 없고…. 우리 3년 만에 보는 거, 알기나 해?”
“거참 시간 빠르네. 그 꼬맹이가 이런 숙녀가 다 되고. 근데 너 키만 컸지 어째 무게는 그대로인 것 같다? 누가 너 굶겨?”
“아니…. 나 이제 내려 줘.”
안드레아는 순순히 페기를 내려 주었다. 치마를 탁탁 털고 조심스레 시선을 올린 페기가 문득 배시시 웃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 지은 안드레아가 아프지 않게 페기의 이마를 톡 때렸다.
“뭘 그렇게 웃어. 이 언니가 그렇게 좋아?”
“응….”
“요 예쁜 것. 내가 여기 있는 것들 하나도 안 그리웠는데, 너 예쁘게 말하는 건 가끔 생각나더라.”
“그럼 편지라도 좀 하지.”
“편지는 잘못하면 추적당해.”
“추적? 누가?”
페기가 의아하게 물었다. 안드레아는 표 나게 눈알을 굴렸다.
“영감님은 건강하시지?”
“…알았어. 곤란한 건 안 물어볼게. 레오는 괜찮아. 건강한 건 아니지만.”
“그 영감은 나 어릴 때도 골골댔어. 두고 봐라. 죽는다 죽는다 소리 하면서 백 살까지 살걸?”
“그럼 좋겠다….”
“걘 어때?”
“예후르? 잘 지내지.”
“아니, 그 미친놈 말고. 내가 그 새끼 안부를 왜 물어봐.”
어깨동무를 한 안드레아가 갑자기 음흉한 얼굴로 바짝 붙어 왔다.
“듣자 하니 막둥이가 새로 들어왔다며. 어떤 애야? 애새끼가 막 네 말 안 듣고 그러는 건 아니지?”
“착한 애야.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럼 다행이고. 네가 너무 순하니까 이 언니가 걱정이 크신 거 아냐.”
짧은 곱슬머리를 거칠게 헤집어 놓은 안드레아가 크게 웃으며 떨어져 나갔다. 페기는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힐끗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안드레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무슨 일이냐니?”
“그냥, 갑자기 이렇게 돌아온 것도 그렇고.”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안드레아가 피식 웃었다.
“네 스무 번째 생일이라니까 온 거지.”
“별로 안 믿기는데….”
“아, 이 언니는 가슴이 너무 아파. 언니 맘을 이렇게나 몰라주고. 애들 키워 봐야 하나도 소용없다더니.”
“알았어, 알았어.”
가슴을 부여잡고 아픈 척하는 안드레아의 모습에 페기가 웃으며 말렸다. 쏟아지는 붉은 머리칼 사이로 페기의 웃는 낯을 확인한 안드레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좋아. 난 잠깐 영감님 좀 보고 갈게. 너 먼저 식당에 가 있어.”
“레오도 아직 식사 안 했을 텐데. 같이 와.”
“영감탱이랑 같이 식사하면 얹혀.”
“안드레아.”
“아, 알았어. 잔소리하지 마. 나 피곤해.”
안드레아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모퉁이를 꺾어 달려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젓던 페기가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식당에는 웬일로 차라가 먼저 와 있었다.
“차라. 일찍 왔네?”
다가오는 발소리에 흠칫했던 차라가 뒤잇는 페기의 목소리에 적잖이 안심했다. 페기는 의아한 기색으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 있니? 안색이 안 좋다.”
“…릴 들어서.”
“응?”
“이상한 소릴 들었다고. 그, 망나니가 돌아왔다는 게 진짜야?”
페기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슬프게도 이 고귀한 성궁에서 망나니라 불리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이야? 하녀들이 얘기하는 거 들어 보니까, 무시무시한 사람 같던데….”
“무슨 말을 들었는데?”
“술 마시고 근위대 기사들을 팼다거나, 술 마시고 나체로 종탑에 기어 올라갔다거나.”
페기는 이번에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슬프게도 전부 사실이었다.
“있잖아, 차라.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안드레아도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냥 술을 좀 많이 좋아할 뿐….”
“어떤 미친놈이 술 좀 마셨다고 벌거벗은 채 종탑에 올라가!”
“맨정신엔 안 그래….”
“당연히 맨정신엔 안 그래야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던 차라가 식전 빵을 전투적으로 씹기 시작했다.
“나 진짜 어른 되면 여기부터 나갈 거야. 이 궁전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게 분명해.”
페기는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가 안드레아를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저히 짐작이 안 됐다.
그때,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기세등등하게 들어온 사람은 안드레아였다. 뒤이어 허둥지둥 문턱을 넘은 기사가 창으로 바닥을 때리며 목청을 높였다.
“교황 성하 납시….”
“시끄러우니까 닥쳐.”
단 한마디로 기사의 입을 잠근 안드레아가 성큼성큼 식탁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고민의 여지 없이 차라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문이 열릴 때부터 굳어 있었던 차라는 이제 불쌍할 정도로 희게 질렸다.
아예 옆으로 돌아앉아 한참 동안 차라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안드레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막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차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긍정의 대답에 안드레아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너 이름이 뭐였지? 자라였나?”
“차라….”
“아, 맞다, 차라. 불쌍한 놈. 어쩌다 이런 데 끌려와선.”
안드레아가 쯧쯧 혀를 찼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차라가 그 말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당신도 여기가 싫어서 나간 거예요?”
“당신이 아니라 안드레아. 그리고 맞아. 쟤처럼 스무 살 생일 코앞에 두고 도망쳤지.”
안드레아가 맞은편의 페기를 턱짓했다. 차라의 암녹색 눈에 선망이 어렸다.
“어떻게요? 통로마다 근위대가 지키고 있던데!”
“다 방법이 있지. 왜, 궁금해?”
차라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드레아는 말없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차라가 기다렸다는 듯 의자를 끌고 바짝 붙어 오자, 안드레아가 기습적으로 입에다 뽀뽀를 했다. 쪽 소리가 아주 진하게 났다.
“하하하하!”
안드레아가 배를 잡고 구를 듯이 웃었다. 넋 나간 듯 앉아 있던 차라가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입술을 훔쳤다. 손끝에 새빨간 색이 묻어났다.
“어….”
황망히 고개를 돌리던 차라의 눈길이 페기에게 닿았다. 페기는 얼어붙어 있었다. 차라가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다. 절로 우는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이씨….”
“하하하하! 막둥이 너, 크하하하!”
“처, 처음이었는데….”
차라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늘도 때릴 듯 안드레아의 웃음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보다 못한 페기가 말리려는데, 불쑥 그녀의 옆자리에 누군가 들어앉았다.
“적당히 해, 안드레아. 애한테 그게 무슨 짓이야?”
드물게 불쾌한 기색으로 나타난 예후르였다. 그를 발견한 안드레아가 보란 듯이 얼굴을 구겼다.
“도련님은 신경 끄셔. 내가 막둥이한테 뽀뽀도 못 하나?”
“넌 그냥 놀리려는 거잖아.”
“남이사.”
“너 자꾸….”
“예후르.”
페기가 그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그녀가 눈짓한 쪽에서 레오폴트가 고드릭의 부축을 받아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싸늘한 눈으로 안드레아를 노려본 예후르가 휙 고개를 돌렸다.
“안드레아, 이 녀석. 걸음이 왜 이렇게 빨라? 내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구나.”
겨우겨우 상석에 앉은 레오폴트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비딱하게 턱을 괴고 있던 안드레아가 이죽거리듯 웃었다.
“내가 빠른 게 아니라 영감님이 느린 거라니까. 운동 좀 하셔. 그래야 오래오래 살지.”
“이미 영감님 소리 듣는데 더 오래 살아 봐야 뭘 한다고…. 그런데 차라, 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야? 왜 울고 있어.”
“그, 그게….”
차라가 잉잉 울며 매달렸다. 깜짝 놀란 레오폴트가 허둥지둥 눈물을 닦아 주려다가, 흠칫 손을 물렸다.
“고드릭! 어서, 어서 차라의 얼굴을 닦아 주어라. 안쓰러운 것. 어디 아픈 것이야?”
“아, 아니, 저 여자가 막!”
“뽀뽀 한 번 했다고 저래요.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원.”
심드렁한 안드레아의 말에 레오폴트가 이마를 짚었다.
“안드레아. 내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하지 말라 누누이 일렀거늘….”
“아, 잔소리 그만! 내가 여기까지 잔소리 들으러 온 줄 아나.”
“잔소리 들을 행동을 안 하면 되지.”
예후르가 무심하게 포크를 놀리며 중얼거렸다. 안드레아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예후르는 여전히 안드레아와는 동떨어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고, 죄송해라. 귀한 도련님 귀에 누추한 말을 흘려서 화가 나셨나?”
“누추한 거 알면 그만하지.”
“그만 못 하겠는데? 내가 고아 새끼라 배운 게 없어서. 아, 맞다. 너도 고아였지?”
대놓고 빈정거리는 투에 예후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페기는 흘끗 레오폴트를 훔쳐보았다. 딱딱한 은 가면 사이로 슬픔에 젖은 연옥색 눈동자가 얼핏 보였다. 페기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넌 그 입 좀 어떻게….”
“한마디만 더 하면.”
“…….”
“너네랑 한 달 동안 말 안 할 거야.”
조용히 읊조리는 페기의 목소리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예후르가 천천히 입을 닫았다. 못마땅한 기색으로 고개를 홱 돌린 안드레아는 성을 못 참고 콧방귀를 뀌었다.
레오폴트가 한숨을 삼키며 손짓했다. 들어오라는 고드릭의 엄격한 목소리 뒤로 음식 접시를 든 시종들이 줄지어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