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28)

오월 하순에 이른 성도는 어느덧 초여름 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행여 중요한 날을 앞두고 잠 못 이룰까 레오폴트가 부채를 든 시녀들을 보내 주었으나, 페기는 정중히 거절하고 홀로 침대에 누웠다.

듣기론 근 10년 중, 가장 성대한 연회가 될 것이라 했다. 페기는 그녀가 보았던 가장 화려한 축제를 떠올렸다.

마모된 기억 속에서도 오색찬란 흩날리는 색종이들. 우레 같은 환호성이 귓전에서 되살아난다. 어느새 그녀는 어두운 침실이 아닌, 축제가 한창인 오스피나의 거리 한가운데에 있었다.

강렬한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길거리를 빼곡하게 메운 사람들이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키가 작았던 어린 페기는 까치발을 하고 마차 너머를 내다보았다.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있었다. 페기는 전염된 행복을 품고 그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환호성 사이로 섞이는 소리들. 웅성웅성, 수군수군, 뱀처럼 기어다니던 소리가 마차를 타고 오른다. 마침내 페기는 들었다. …그거잖아. 창녀의 딸.

환호성이 멎었다. 정적을 채우는 것은 소문, 소문, 소문. 사람들은 더 이상 행복해하지 않았다. 경멸하고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 그녀의 이마를 맞혔다.

“이 더러운 것! 썩 꺼지지 못해!”

그녀는 서서히 뒷걸음질했다. 멀어 보이던 사람들이 점점 몸집을 부풀려 나갔다. 이제는 고개를 가파르게 꺾고도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열 발짝이 그들의 한 발짝이었다.

그때, 강한 힘이 그녀의 긴 머리채를 휘감았다. 머리 가죽이 뜯겨 나갈 듯한 고통과 함께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페기는 비명을 질렀다. 사방에서 돌팔매질이 이어지는 가운데, 머리채를 휘어잡은 노파가 그녀의 눈앞에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가. 내가 네 어미다.”

어미랑 같이 집으로 돌아가야지. 깔깔깔 치솟는 웃음소리와 함께 쓰레기장으로 질질 끌려간다. 페기는 울면서 손을 내뻗었다. 싫어, 가기 싫어. 그곳으로 돌아가기 싫어.

누가 나 좀 잡아 줘.

갑작스러운 암전. 머리채를 당기던 손길도, 날아오던 돌멩이도, 끔찍한 야유도 사라진 암암한 어둠 속. 느껴지는 것은 코를 찌르는 악취 그리고 타오를 듯 뜨거운 열기.

문득, 머리 위에서 빛줄기가 새어 들기 시작한다. 눈부심에 얼굴 위로 손을 올리자, 손끝으로 누군가의 온기가 닿았다. 간지럼을 태우듯 손가락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간 손길이 빠듯하게 손안에 찼다. 페기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역광에 가려진 누군가, 그녀의 손을 당기며 읊조렸다.

“걱정하지 마.”

“…….”

“내가 찾았어.”

그의 손이 다가와 포근히 눈가를 덮는다. 페기는 식은땀에 젖은 몸으로 흐느끼듯 속삭였다.

“이제 괜찮아?”

“응. 괜찮아.”

“아직 무서워.”

“약속할게. 네가 무서워하는 건 다 사라질 거라고.”

“사라져?”

“응, 사라져.”

그러니까. 다정한 목소리가 깃털처럼 내려앉는다.

“이만 자자.”

페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눈물을 훔쳐 간다. 그리고 귓전으로 흘러드는 감미로운 자장가 소리. 익숙한 선율을 따라 그녀는 잠 못 이루던 열 살 꼬마애가 되고, 악몽에 선잠 들던 열다섯 소녀가 되며, 또한 찬란하게 피어나는 스물의 처녀가 되었다.

***

동심원이 그려진 백색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치솟은 깃대 아래, 수백의 근위대가 도열해 있었다. 햇빛이 번쩍번쩍 튀는 흰 갑옷, 날카롭게 벼린 창살, 얼음으로 굳힌 듯 근엄한 얼굴들. 그 뒤로, 검은 수도복을 입은 성직자들이 성 나르세스 광장의 빈자리를 가득 메웠다.

원형 광장을 빙 둘러싼 여덟 대성당 중, 성좌(聖座)가 위치한 곳은 성 발레론 대성당이었다. 교황 레오폴트가 내리받은 권능의 주인을 섬기는 곳. 검게 칠한 벽면을 황금으로 장식하여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낼 뿐만 아니라, 마치 천사가 강림한 듯 신성한 느낌마저 주었다.

성당의 전면에는 높은 성좌에 앉은 레오폴트가 있었다. 늘 그렇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천으로 동여맨 채, 제식용 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 양옆에는 세 명의 사도들이 앉아 있었다. 평온한 낯을 유지하는 예후르와 달리, 안드레아는 비딱하게 앉아 하품을 쩍쩍 날렸다. 이런 대규모 행사가 익숙지 않은 차라는 석상처럼 굳어 미동도 안 했다.

그 아래 단에는 원탁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열 명의 원탁 추기경들이 있었다. 가장 서열이 높은 클레멘스가 중앙에, 가장 서열이 낮은 보나벤투라와 산딜라가 가장자리를 점했다. 낯짝 두껍고 붙임성 좋은 클레멘스는 양옆에 앉은 솔란지아와 아나클레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으나, 두 사람 모두 옅은 불쾌함만 표할 뿐 대꾸는 없었다.

성당을 넘어 광장으로까지 전해지는 오르간 연주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둥처럼 웅장한 소음 속에 만달 추기경은 꾸벅꾸벅 잘도 졸았다. 소싯적 오르간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글리체리아가 음악의 길이를 가늠하며 몰래 그를 깨웠다.

만달이 졸린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들 즈음 오르간 연주는 끝이 났다. 메아리치듯 울리는 잔음마저 사라지자 대성당은 고요한 적막에 휩싸였다. 그 적막을 밟아 누군가 한 발, 한 발 대성당의 계단을 밟아 올랐다. 그녀의 등 뒤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성당 안으로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얀 면사로 얼굴을 가린 페기였다. 예법에 따라 보랏빛 추기경 예복을 차려입고, 여러 가닥의 금색 술을 늘어트린 둥근 모자를 착용했다. 그녀는 붉은 융단 깔린 중앙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둘씩 나란히 선 수도사들이 경건하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면 제단에 달하자, 수도사들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제단을 오르는 건 페기 혼자였다. 그녀에게 길을 열어 주듯 한 발짝 뒤로 물러난 클레멘스 추기경이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단 꼭대기에는 교단을 상징하는 동심원 아래 군림하는 교황 레오폴트가 있었다. 페기는 천천히 성좌 아래 무릎을 꿇었다. 순종을 맹세하듯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면, 이제는 레오폴트의 차례였다.

고드릭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레오폴트가 그녀에게 굵은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금테에 루비와 사파이어로 부분 장식하여 가운데 커다란 자수정을 박아 넣은 그것은 추기경의 상징이다.

둥글게 싸매어진 레오폴트의 손이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 위로 얹혔다.

“카니나의 페기. 불의 종, 불의 사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이여.”

목을 긁어 올리듯 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부로 그대를 카타리나의 공작 겸 대주교, 또한 원탁 추기경으로 축성하노라.”

오르간 연주가 재개되었다. 성가대의 합창이 어우러지며 성스러운 찬송가가 성당을 가득 메웠다.

페기는 고개를 살짝 들어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았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예후르. 못내 지루한 얼굴로도 입꼬리를 비죽 올려 주는 안드레아. 신이 나 손뼉을 치는 차라.

“축하한다, 페기.”

그리고 엄숙한 은 가면 속에서 누구보다 상냥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페기의 입가에 발그스름한 미소가 번졌다.

임명식이 끝난 뒤, 추기경들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페기가 새로이 원탁에 들어옴으로써 빠지게 된 산딜라 추기경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기 위함이었다.

특히 산딜라를 잘 따랐던 솔란지아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이렇게 헤어지기는 너무 아쉽습니다. 무도회가 끝나면 저와 함께 뮈헤로 가시죠. 제 교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러나 산딜라는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를 어쩌나. 실은 아이들이 제가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답니다. 뮈헤까지 다녀오거든 아주 심통이 날 거예요.”

“아…. 고아들을 거두어 기르고 계신다 하셨죠.”

“네. ‘추기경님, 추기경님’ 하면서 따르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앞으론 원탁회의 때문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일도 없으니, 오히려 제겐 좋은 일이지요.”

산딜라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호호 웃었다.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솔란지아도 더는 권하지 못했다. 도리어 끼어든 것은 클레멘스였다.

“산딜라 추기경의 고운 마음씨에 눈앞이 다 밝아지는군요. 이런 분을 이리 조촐하게 보내야 한다니, 참으로 애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애석하긴요. 사도께서 성인이 되셨는데, 이보다 좋은 날이 어디 있겠어요.”

“아무리 사도가 중하다 하나, 10년 가까이 원탁을 지키셨던 산딜라 추기경보다 현명하실 리가요. 평생 규중에서 피아노만 연주하시던 분께서 도대체 무얼 얼마나 아실는지….”

클레멘스는 짐짓 눈썹을 내려트리며 심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솔란지아가 즉각 눈에 쌍심지를 켰다.

“클레멘스! 지금 감히 사도를 능멸하는 겁니까?”

“그대는 늘 제 말을 곡해하시는군요. 동료를 믿지 못하는 그대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집니다. 아나클레토 추기경! 아십니까? 솔란지아 추기경이 얼마 전에 그대를 두고….”

“이, 이봐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구석에 앉아 지친 머리를 누이고 있던 아나클레토가 끼어들기 싫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틀어 앉았다. 씩씩거리며 클레멘스의 입을 막은 솔란지아가 씹어 뱉듯 말했다.

“한 번만 더 이상한 소릴 지껄이면 내 그대를 결코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똑똑히 기억해요! 내 반드시! 성하께 임시 회의를 청해 그대의 오만방자한 행태를 원탁에 올릴 겁니다!”

“오… 솔란지아. 그대는 참 변함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그게?”

“늘 부질없는 일에 매진한단 뜻입니다.”

“뭐, 뭐요?!”

슬쩍 몸을 틀어 솔란지아의 손에서 벗어난 클레멘스가 얄밉게 생글거렸다.

“그렇게나 당하셨으면서, 해 봤자 쓸데없다는 걸 왜 아직도 모르실까. 그러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야말로 본받아 마땅하지요. 그대의 끈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클레멘스는 마치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했다. 솔란지아의 까무잡잡한 뺨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 저, 저런 무도한 자를 봤나! 감히 죄 없는 사도를 추방하란 주장을 해 놓고 무사하길 바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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