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르는 소리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쉽사리 손을 대진 못했다. 그는 착잡한 얼굴로 눈가를 쓸었다.
고작 아홉 살이었다.
고작 아홉 살 어린애가 수만 명 보는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기고 모욕을 당했다. 고향에선 그녀의 어미라 주장하는 창녀들이 끊임없이 올라왔고, 어린 그녀를 통해 레오폴트를 끌어내리고자 했다. 그 일련의 시간들로 아홉 살 난 페기는 너덜너덜 난도질당했다.
살면서 후회한 일이 거의 없는 그도 그 시절만은 여전히 후회스러웠다. 그는 어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혼자서 어린아이 셋을 건사해야 했던 레오폴트에겐 더 강하게 나갈 여력이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면죄부가 되진 못했다. 여전히 그날의 일로 고통받는 페기가 있었다. 죄 잊은 듯 굴면서도 성궁 밖으론 한 발짝도 나가질 않았다. 뼈에 새겨진 공포란 걸 이제는 모두가 알았다.
더 가혹하게 처단할걸. 악몽으로 잠 못 이루는 아이를 안아 달래 주지만 말고 그 사악한 무리를 벌할걸.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차가워진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느닷없는 접촉에 놀라 바동거리던 페기도 그의 체취를 맡곤 무기력하게 몸을 기대 왔다. 그는 꿇어앉은 한쪽 허벅지 위에 페기를 앉히고 가만히 품어 주었다.
“…나가지 않아도 돼.”
원한다면 평생을 내전에서 안온히 살아도 된다. 안드레아가 제멋대로 방랑하며 살듯, 페기에게도 원하는 대로 살 자유가 있었다. 그로써 행복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품속에서 미동 없던 페기가 그 말에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예후르는 쓰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제 권리와 의무에서 도망치기에 페기는 너무 상냥했다.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오늘은 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면 되니까.
예후르는 페기의 머리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달래 주는 손길은 부드러우나 벽에 박힌 시선은 서슬 퍼렜다.
레오폴트는 몇 번째인지 모르는 춤곡을 들으며 멍하니 눈을 껌벅였다. 연회장에서의 모든 일은 예후르에게 맡기고 자리만 지키고 있는데도 기운이 쭉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는 혼곤한 목소리로 고드릭을 불렀다.
“눈이 어지럽구나. 별일은 없는 게지?”
“예. 라발의 황태자 전하는 조금 전에 돌아가셨고, 다른 분들은 대부분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예후르에게 내쳐진 뒤 레오폴트에게 접근했던 황태자는 그마저 거절당하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성급하게 감정이 드러나던 얼굴을 떠올리며 레오폴트는 끌끌 혀를 찼다. 천하의 요앙 오귀스트도 자식 농사에 애를 먹나. 어쩌나, 모두 그의 업보인 것을.
“한데 예후르가 보이질 않는 구나. 고드릭, 네 눈에는 어떻지?”
“예, 제 눈에도….”
“저 여기 있어요.”
예후르가 불쑥 성좌 뒤에서 나타났다. 껌벅껌벅 그를 올려다보던 레오폴트가 고개를 돌려 뒤쪽에 걸린 붉은 융단을 보았다.
“네 어찌 저기서 나오는 것이야?”
“잠깐 페기를 보고 왔어요.”
“오… 그 애는 어떻더냐? 많이 긴장한 것은 아니지?”
“네. 괜찮아요.”
레오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썽을 피우는 건 안드레아지만, 그의 걱정을 사는 건 언제나 페기였다.
“내 몸이 이러하니 네가 그 아이를 잘 돌봐 주려무나. 늘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혼자 앓는 아이가 아니더냐.”
“걱정하지 마요. 오늘 잘할 거예요.”
“그래…. 안드레아는 아직도 어디 있는지 모르고?”
멈칫 눈썹을 찡그린 예후르가 곧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디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겠죠.”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라. 원래도 이런 격식 있는 자리를 싫어하는 아이였지 않느냐. 그나마 오전의 추기경 임명식은 참석해서 다행이지.”
레오폴트는 예후르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몸을 세우곤 고개를 뒤로 편하게 기대었다.
“곧 페기와 차라가 나오겠구나.”
연회는 이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연주되는 춤곡에 맞춰 홀을 누비고, 나이 지긋한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말로 화살을 쏘았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의 불빛에 정신이 더욱 산란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도 취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중 카드 게임을 하던 어느 귀부인이 춤추고 돌아오는 딸을 발견했다. 적당히 취하여 기분이 몹시 좋았던 귀부인은 카드를 내던지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팔 벌려 절 환영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딸도 마주 웃으며 다가왔다.
끝없이 귀를 어지럽히는 음악 소리, 눈을 아찔하게 하는 샹들리에 불빛, 사방을 가득 메운 인파. 그런 것들에 가려져 사람들은 이상 징후를 알아채지 못했다. 오랜 경호에 지친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둠을 틈타 바닥을 기는 ‘그것’에겐 호재였다.
‘그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홀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귀부인의 풍만한 그림자에 달하여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뛸 듯이 다가오던 딸이 우뚝 멈추었다. 이상하게 안색이 창백했다. 여전히 양팔을 벌리고 선 귀부인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딸이 뒷걸음질했다. 늘어져 카드 게임을 하던 사람들이 돌연 기겁하며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은 귀부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크르릉….
등 뒤엔 짙디짙은 어둠이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에서 연기처럼 솟아오른, 괴물.
질겁한 귀부인의 눈알에 흉측하게 아가리를 벌리는 괴물의 모습이 비쳤다. 그것은 귀부인이 생에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그녀는 비명도 없이 갔다. 괴물은 마치 연체동물처럼 그녀의 머리부터 꿀떡꿀떡 삼키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그 모습을 목격한 딸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인근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꺄아악!”
아그리피나 홀은 순식간 혼돈에 사로잡혔다. 정신없이 달아나는 사람들 틈새로 기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벌써 허리춤까지 먹힌 귀부인은 풍성한 드레스 자락만 남아 축 늘어져 있었다. 사람을 삼키는 괴물의 형상에 기사들의 얼굴에도 공포가 스쳤다.
반대편에서도 질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괴물, 괴물이야!”
지팡이를 놓친 노신사가 제 그림자에서 솟아난 괴물에게 발목이 잡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탁자의 그림자에서, 피아노의 그림자에서, 샹들리에의 그림자에서 검은 연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연기는 곧 괴물의 형상으로 솟아났다.
아그리피나 홀의 비좁은 입구로 인파가 몰렸다. 아름다운 음악과 웃음소리로 가득하던 홀이 삽시간에 비명과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뒤늦게 상황을 듣고 달려온 미란테가 창문을 깨고 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지팡이에서 세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무엇하느냐! 당장 저 괴물들과 맞서지 않고!”
쩌렁쩌렁한 노기사의 호통에 기사들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창검을 들고 괴물들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롭게 벼린 수십의 칼날이 괴물들의 몸통을 꿰뚫었다. 통하나. 반색했던 기사들의 낯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어어?!”
괴물을 찌른 칼날이 꾸물꾸물 먹히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질겁하여 무기를 놓았다. 상식을 넘어선 광경에 공포심이 울컥 치솟았다. 새파랗게 어린 기사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툭, 누군가 그를 치고 지나갔다.
휘날리는 푸른 망토는 근위대의 것이 아니다. 스쳐 지나가는 그의 얼굴을 확인한 기사들이 경악해 말리려 들었지만, 그의 손길이 더 빨랐다.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든 예후르가 즉각 괴물의 목을 쳤다.
잘린 목이 데구루루 바닥을 굴렀다. 두 동강 난 몸이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어, 어떻게….”
멍하니 중얼거리던 기사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예후르가 든 검이 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전설 속 성검처럼.
말없이 검을 털어 낸 예후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섰다. 무표정한 얼굴에 서늘한 날이 섰다.
“미란테 경.”
나지막한 읊조림에 미란테가 황급히 달려왔다.
“명하십시오.”
“사람들 내보내고 기름을 준비해요. 그리고….”
“성하!”
멀리서 고드릭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황망히 단에서 내려오던 레오폴트가 그만 졸도하고 만 것이다.
예후르가 으득, 이를 갈며 가까운 괴물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당장 성화를 가져와요.”
“성화라면, 설마 대성당에 지펴진….”
그는 대답 대신 괴물의 목을 베었다. 미란테는 지체 없이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차라.”
맥없이 땅을 보며 걷던 차라가 절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페기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 너도 한 바퀴 돌고 오게?”
“…곧 우리 나갈 시간이야. 데리러 왔어.”
그 말에 차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는 긴장감을 내비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으응. 가자.”
씩씩하게 앞장서는 차라의 팔다리가 삐걱삐걱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페기는 쓰게 웃었다.
“전하. 괜찮으세요?”
알틴이 소곤소곤 물었다. 페기는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너한테도 괜히 걱정만 시켰네.”
“어휴, 제가 뭐 한 게 있다고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빨리 와주셔서 다행이었죠.”
페기는 말없이 손톱을 매만졌다. 좀체 근심을 거두지 못하는 예후르를 아그리피나 홀로 돌려보낸 것은 그녀였다. 그가 없으면 연회가 마비될 테니까.
실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그의 등을 떠밀 때 그러했듯, 페기는 이번에도 하고픈 말을 꿀꺽 삼켰다. 그녀도 이제 어른이었다. 어리광이 통할 나이는 지났다.
“그런데 갑자기 조용하네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알틴의 중얼거림에 페기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복도가 이상하게 고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그리피나 홀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로 꽝꽝 울릴 정도였는데.
그때, 홀 방향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붙잡을 겨를도 없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페기와 알틴이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오래지 않아 또다시 저편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기요!”
경황없이 달려오는 하녀를 알틴이 황급히 붙들었다. 하녀가 불에 닿은 듯 놀라 몸부림치자, 알틴이 윽박지르듯 물었다.
“얘, 너 아그리피나 홀에서 온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래!”
하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제정신이 돌아오는 듯 두 눈이 처량하게 흔들렸다.
“괴, 괴물….”
“…….”
“괴물이 나타나서….”
알틴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괴물이라니? 누가 홀을 공격하기라도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