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의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모두가 알았다. 불시에 저를 향하는 네 쌍의 눈을 보며 페기는 조금 당황했다. 그녀의 당혹감을 눈치챈 클레멘스가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오, 가여우신 전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만일의 일입니다, 만일의 일.”
만일의 일이라지만, 가능성 높은 일이기도 했다. 뱀이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리 없으니까.
페기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어젯밤 보았던 마귀를 떠올렸다. 흉측한 생김새였다. 뼛속을 파고들던 냉기는 소름 끼치도록 끔찍했다. 문득 차오르는 긴장감에 그녀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예후르가 했던 것처럼, 단호하게 마귀의 목을 베어 낼 수 있을까?
“카타리나 공작은 이곳에 남을 겁니다.”
그때 예후르의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페기가 아닌 원탁의 다른 추기경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솔란지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한 분밖에 남질 않습니다. 그분께서 과연 저희의 뜻을 순순히 따라 주실지….”
“그녀에게 맡길 일도 없으니 괜한 걱정은 거두세요. 내가 갑니다.”
원탁에는 잠시 침묵만 흘렀다. 경악은 시간 차로 퍼졌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가신다니요! 교황 성하께서 편찮으신 마당에 전하까지 자리를 비우시면 이 성궁은 어찌 되겠습니까!”
솔란지아의 외침에 예후르가 담담히 대꾸했다.
“성궁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카타리나 공작과 그대들이 성하를 잘 보필할 테니까요. 아, 교구로 돌아가실 아나클레토 추기경을 제외하면요.”
“…그리 섭섭한 말씀이라니요. 교회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는데 어찌 저 혼자 달아날 수 있겠습니까?”
아나클레토가 뻘뻘 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예후르는 눈썹만 한번 까딱이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전하의 공백을 어찌 메울 수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전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교회와 교국의 미래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질 거예요!”
“솔란지아 추기경의 말씀이 옳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성화를 지키는 일이에요. 전하의 공백은 성궁에 있어 가장 큰 타격이 될 겁니다.”
글리체리아까지 참전하자, 클레멘스도 더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저희도 이렇게 바로 아는 걸 전하께서 모르실 리 없겠지요. 그럼에도 마귀를 잡겠다고 자청하는 이유가 있으실 줄로 압니다.”
그제야 좌중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예후르가 빙긋 웃었다.
“성화의 반절을 훔쳐 달아난 뱀은 오랫동안 교회의 주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존재감에 비해 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질 않아요. 학자들이 모든 경전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아낸 건 단 두 줄이었습니다.”
뱀은 간악한 도둑이요, 사특한 모리배라. 너희는 그가 속삭이는 유혹을 경계하라.
“내 생각에 여기서 말하는 너희에는 사도도 포함됩니다. 그렇기에 지난 수천 년, 사도가 융성했던 시절에도 뱀을 처단하지 못했던 거죠.”
“하지만 천 년 전엔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아나클레토의 질문에 예후르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여덟 사도가 모두 모여 뱀을 봉인했다고 하죠.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뱀을 봉인한 건 단 한 명의 사도고, 나머지 일곱은 뱀이 부리는 마귀들을 퇴치했을 뿐입니다.”
“…….”
“뱀을 봉인한 사도의 이름은 야누비타. 당시의 교황이자, 나와 같은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이었습니다.”
솔란지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미할리나의 현신만이 뱀을 봉인할 수 있단 말씀인가요?”
“네.”
예후르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깊은 상념이 풍성한 속눈썹에 가려진 금안 위를 흐르는 듯했다.
“창조 신화에 따르면, 가장 먼저 빛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입니다. 뒤를 이은 일곱의 천사들은 미할리나의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예요. 중요한 건 그들이 그림자, 즉 어둠 속에서 태어났단 겁니다.”
교회에서 빛이란 완전함을, 어둠이란 불완전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빛 속에서 태어난 미할리나를 제한 나머지 일곱 천사들은 완전한 존재일까, 아니면 불완전한 존재일까.
이는 오랫동안 교회의 중대한 논쟁거리였다. 교리를 논하는 공의회엔 꼭 이 화두가 올랐는데, 좀체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에 서로를 이단이라 매도하는 일이 잦았다. 양측의 근거는 모두 그럴듯했다.
일곱 천사들의 완전함을 주장하는 이들은 천사들이 미할리나의 분신이란 사실에 주목했다. 비록 그림자 속에서 태어났으나 그들의 원천은 다름 아닌 완전한 천사 미할리나였다. 그림자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도리어 탄생의 역경을 뜻하는 것이었다.
반면 일곱 천사들의 불완전함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림자에 주목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림자는 일곱 천사들이 뛰어넘은 역경이 아니라 일곱 천사들의 본질 그 자체였다. 미할리나를 똑 닮은 모습도 그들의 불완전한 본질, 즉 어둠을 가릴 순 없었다.
“만일 일곱 천사들이 불완전해 뱀의 유혹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라면, 지난 수천 년 뱀에게 패했던 역사도 나름대로 납득이 됩니다. 사도란 천사의 권능을 다루는 강대한 존재. 뱀의 유혹에 넘어가 변절했다면 큰 골칫거리가 되었겠죠.”
생각에 잠긴 듯 고요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매만지던 예후르가 산뜻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좌우간 확실한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가능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거죠.”
“하지만….”
솔란지아가 못내 불안한 기색으로 만류했다. 다른 추기경들 역시 예후르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를 정말로 보내도 되는지 갈팡질팡하는 모습이었다.
예후르가 조용히 웃었다.
“오래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한 전쟁입니다. 뱀이 수만의 마귀 군세를 거느렸던 과거의 힘을 회복하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해요. 내가 가는 것이 맞습니다.”
한숨을 푹 내쉰 글리체리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찬성합니다.”
클레멘스가 뒤이어 손을 들었다. 아나클레토와 솔란지아도 근심 가득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남은 건 꾸벅거리며 조는 만달과 무표정한 얼굴로 원탁의 한 지점만 응시하는 페기였다.
글리체리아가 남은 손으로 만달의 팔꿈치를 툭 쳤다. 선잠에서 깨어난 만달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무슨 안건이 원탁에 올랐는지도 모른 채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페기를 향했다. 원탁은 다수결로 진행되기에 결정은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원탁의 참여자는 마땅히 자신의 의견을 표명해야 했다. 그것이 찬성이든 반대든, 혹은 기권이든.
“페기.”
예후르가 작게 그녀를 불렀다. 페기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예후르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괜찮아.’
그것이 진정 그의 뜻이라면 어찌 막을 수 있으랴.
페기는 참담한 심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만장일치였다.
***
예상대로 뱀을 밝혀내는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아니, 감히 날 의심하는 건가?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고위 성직자들은 불쾌함을 표하면서도 순순히 협조했지만, 타국의 귀족들이 문제였다. 다들 자국에선 한 가닥 하는 이들인지라 뻗대는 정도가 남달랐다. 결국 예후르가 직권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이들은 뱀과 관련 있는 자로 간주하겠다.’
고위 귀족들은 그마저 죄 말뿐인 협박이라며 코웃음 쳤다. 그러나 교국의 강건한 태도에 불안감을 느끼는 이들도 적잖았다.
천 년 만에 부활한 뱀이었다. 신화 속에나 등장하던 존재가 재림하였으니 앞으로 또 무슨 재앙이 떨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수사를 받아 결백함이 증명된다면, 훗날 곤란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라발의 황태자 티에리 장 오귀스트가 앞장서서 수사를 받았다. 그답지 않은 순순한 태도였다. 그는 제법 착실히 조사를 받은 뒤, 수사관을 통해 예후르에게 만남을 청했다.
사실 예후르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마귀가 난데없이 성궁에 등장한 시점부터 라발의 정보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눈 깜빡할 새 없이 바쁜 하루를 쪼개 그를 만날 시간도 없었다.
다만 황태자가 덧붙인 말에 조금 흥미가 돋았다. 마귀에 대한 좋은 정보를 주겠다, 라. 그리 큰 기대는 없지만 정보 하나하나가 소중한 상황이었다. 황태자가 앞장서서 수사를 받아 준 덕분에 뱀 수색도 원활해졌으니 마땅히 그에 대한 보답도 해야 했다.
그리해 예후르는 막간을 이용해 황태자와 만나기로 했다.
“처음 뵙는군요.”
예후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티에리는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기실 열흘 전엔 만나야 했던 둘이다. 지나치게 멀리 돌아온 만남이었지만, 그간의 앙금을 내비칠 만큼 아둔한 사람은 여기 없었다.
“여유가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귀에 대한 좋은 정보가 있으시다고요.”
“…예. 있습니다.”
티에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공작은 대화가 통해서 좋군요.”
티에리가 비뚠 미소를 머금고 다리를 꼬았다.
“부황의 파문을 철회시켜 주시죠.”
예후르는 놀라지 않았다. 라발과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위해선 반드시 그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라발의 황제 요앙 오귀스트가 파문당한 건 20년 전의 일이다. 라발의 꼭두각시로 지내며 절치부심했던 레오폴트가 전권을 회복하자마자 그때는 이미 죽고 없던 라발 섭정의 목을 요구한 것이다. 이유인즉, 용병대에게 교국을 침공하라 명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이에 라발은 난색을 표했다. 당시 섭정이 교국 침공을 명하긴 했으나, 그토록 끔찍한 약탈을 자행한 건 미쳐 날뛴 용병대의 소행이었다. 오스피나 참극의 덤터기를 혼자 뒤집어쓰기엔 그들 나름대로 억울한 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요앙 오귀스트는 최대한 교국의 요구를 수용하려 애썼다.
“목만 잘라 내어 주는 건 아니 되오. 죽은 자에게도 명예가 있으니, 섭정의 시신을 오스피나로 옮겨 안치시키는 건 어떻겠소?”
돌아가신 어머니라곤 하나 모자간의 정은 거덜 난 상태였다. 심지어는 섭정의 죽음에 요앙 오귀스트가 관여했단 말까지 돌았으니, 그로선 어머니의 실책을 어머니의 송장으로 되갚고 싶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