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328)

이불을 홱 뒤집으며 일어난 알틴이 곱지 않은 눈으로 동침자를 노려보았다. 사막 민족 특유의 갈색 얼굴을 한 청년이 헐벗은 상체를 드러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내가 어제 말했잖아. 오늘은 침대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할 거라고.”

“하녀가 그래도 돼? 또 아까처럼 다른 하녀들이 몰려와서 문 두드리는 거 아니고?”

“알 게 뭐야. 그리고 걔네한테 아파서 못 나간다고 했잖아.”

“흠…. 내가 어제 그렇게 아프게 했나?”

“지랄.”

다시 뻗어 오는 음흉한 손길을 쳐 내며 알틴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사내가 실실거리며 바짝 붙어 왔다.

“사실 나 아까 다른 하녀들이 문 두드릴 때 오줌 지릴 뻔했어. 북쪽 여자들은 다들 나긋나긋할 줄 알았더니 죄 내숭이었나 봐.”

“날 보고도 그런 착각을 했구나, 너?”

“너만 괄괄한 줄 알았지.”

“하긴. 나도 남쪽 남자들은 다 실한 줄 알았으니.”

“뭐?”

사내가 정색하며 이불을 들추어 자신의 하체를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이 어찌나 심각하던지, 알틴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베개를 던졌다. 얄미울 정도로 쉽게 베개를 잡은 사내가 그 베개마저 깔고 누웠다.

“그런데 너 의외다.”

“뭐가.”

“맨날 일해야 된다고 나 뻥뻥 차길래 무지 성실한 하녀라고 착각했잖아.”

“나 성실하거든?”

“성실한 하녀는 이렇게 맘대로 안 쉬어.”

“네가 뭘 모르는구나? 가끔은 이렇게 성실한 덕을 보는 거야.”

“그건 성실한 게 아니라 간사한 거 아닌가?”

사내의 의문을 대충 넘기며 알틴은 침대 위로 엎어졌다. 밤새 운동을 해서 그런가, 아직도 눈이 껌벅껌벅 감겨 왔다.

“네가 모시는 아가씨는 좋은 주인인가 보네. 그에 비하면 우리 백작님은 아주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따로 없는데.”

“…아가씨가 아니라 전하야.”

“이젠 충신인 척이야?”

“왜 이래? 이 정도면 충신이지.”

“그런 것치고 잘만 꼬드기면 주인 갈아 치울 것 같더만.”

알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녀도 먹고살기 위해 하는 짓이야. 당연히 지금보다 좋은 조건이면 갈아 치우지.”

“조건이 어떤데.”

“일단 남자 주인이라면 부인이 없거나,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해야 해.”

“조건이 뭐 그래.”

“입 다물고 잘 들어. 하녀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부유한 주인의 정부로 들어가는 것뿐이야. 그런데 부인의 성질머리가 더러우면 어떻겠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평생 귀하게 자라 안하무인인 귀족 년한테 머리끄덩이 잡히고 싶겠어?”

“하긴.”

“그리고 주인이 웬만큼 젊고 반반한 게 좋겠지. 늙어 비틀어진 건 아무리 나라도 구역질 날 테니까.”

“그런 주인이 널 마음에 두긴 하고?”

“…어제 나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 못 차렸나 봐?”

알틴이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사내의 분신을 콱 쥐었다. 사내가 헙,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튼 이건 주인이 남자일 때의 이야기야. 여자일 때는 다르지.”

“야, 소, 손 좀.”

“주인이 여자일 때면….”

알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릴 때부터 하녀 일을 해 온 그녀는 나이에 비해 많은 주인을 거쳐 왔다. 그중에는 오래전 남편을 잃은 노부인도, 아들 셋을 두어 기세등등하던 귀부인도,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도 있었다.

“…지금이 제일 낫네.”

“뭐, 뭐?”

“전하가 제일 낫다고. 그런데 너 얼굴이 왜 그렇게 흙빛이야?”

“네가 잡고 있잖아!”

“아.”

알틴이 손을 놓았다. 식은땀 뻘뻘 흘리던 사내가 온몸의 근육이 무색할 만큼 맥없이 엎어졌다.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을 보며 알틴은 혀를 찼다.

“어쨌든 부인과 사별했지만 여전히 젊고 부유한 귀족 나리가 어느 날 나한테 반해서 졸졸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주인을 바꿀 일은 없어. 전하야말로 좋은 주인이니까.”

“그래?”

“하녀한테도 험한 말 안 하시지, 손버릇이 나쁘신 것도 아니고 특별히 예민하거나 까다로우신 것도 아니니까. 옆에서 시중들다 보면 떨어지는 것도 짭짤해서 부수입으론 아주 그만이야.”

“네 말만 들으면 거의 완벽한 주인인데?”

“그렇지.”

알틴은 심드렁하게 턱을 괴었다. 실로 완벽한 주인이다. 하녀로선.

“나도 꽤 반반하지 않아?”

갑자기 사내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알틴은 눈을 찌푸리며 그를 째려보았다. 또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지, 사내는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당당하게 과시하고 있었다.

“네가 그랬잖아. 부인 없고 젊고 반반한 귀족이 널 졸졸 따라다니면 주인을 갈아치우겠다고.”

“그런 경우엔 하녀를 관두는 거지. 정부로 들어갈 테니까.”

“꿈을 좀 크게 가져 봐. 정부보단 부인이 낫잖아.”

“너 돌았니? 어떤 귀족이 날 부인으로 들여?”

심지어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교회는 천한 하녀를 귀족의 정실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었다.

“일단 가능성은 차치하고. 내가 생긴 건 꽤 괜찮지 않나?”

알틴은 그의 전라를 훑어보았다. 머리가 빈 게 좀 흠이긴 해도, 확실히 보는 맛은 있었다.

“괜찮으면 뭐해, 넌 귀족도 아닌데.”

“귀족이 되면?”

“뭐?”

“공을 세우면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잖아. 내가 기사가 되어 너한테 청혼하면 받아 줄 거지?”

사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알틴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기사 작위나 받고 말해.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러니까 만약의 일이잖아. 어? 받아 줄 거지?”

“너 진짜 웃긴다. 만에 하나 네가 기사 작위를 받으면, 그때도 나 같은 하녀랑 결혼하고 싶겠어?”

“무슨 상관이야. 난 사막에서 왔는데.”

사내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알틴의 표정이 조금 멍해졌다.

“…말했잖아. 귀족은 하녀랑 결혼할 수 없다고.”

“네가 모시는 아가… 전하한테 부탁하면 되지. 되게 높은 분 아니야? 몇 년을 성실히 모신 하녀인데 그 정도 부탁도 안 들어줄까.”

알틴은 부정의 대답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제 주인이라면 흔쾌히 들어줄 것이다. 심지어는 있지도 않은 제 친정 행세를 하듯 이것저것 혼수로 마련한 뒤, 눈물 바람으로 절 보내 줄 것이었다.

실로 한겨울에도 훈풍이 돌게 하는 상상이었다. 알틴은 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럼 뭐하나, 죄 헛바람에 불과한걸. 여전히 그녀는 아침부터 밤까지 남의 시중이나 드는 하녀였다. 손바닥만 한 독방도 감지덕지 여겨야 하는 밑바닥 처지였다.

알틴이 홱 돌아누웠다. 사내가 당혹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왜 그래?”

“몰라.”

“대답은 해 줘야지.”

“대답은 무슨. 기사나 되고 말해.”

표독스럽게 쏘아붙인 알틴이 낡은 이불을 목 끝까지 잡아당겼다. 맨살에 와 닿는 공기가 차가워 오래전 말라붙은 눈물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

몸이 안 좋다던 알틴은 이튿날 말끔한 얼굴로 나타났다. 페기가 걱정하는 말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달거리가 겹쳐서 그래요. 멀쩡히 털고 일어났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곰살맞게 웃던 알틴이 슬그머니 다가와 페기의 어깨를 주물렀다. 오늘따라 유독 살가웠다. 걱정 한마디를 더 얹으려던 페기는 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성하께서 어제 기침이 심하셨단 말은 들었어요. 오늘은 좀 괜찮아지셨나요?”

“의사는 괜찮다고 하는데, 여전히 기운은 없으셔.”

“의사도 뚜렷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는 거면, 그냥 마귀 때문에 충격받으신 거 아닐까요? 그동안 무리도 많이 하셨을 테고요.”

그날을 떠올리거든 페기도 한숨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그녀조차 이러하니, 잿더미에서 교국을 일으킨 레오폴트에겐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의사는 영 믿음이 안 가. 오랫동안 성하의 주치의였던 사람이라 당분간은 두고 보겠지만, 자꾸만 내게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 혹시 주치의에게 무슨 일이 있다니?”

“아뇨. 그런 말은 못 들어봤어요.”

“그래…. 만일을 대비해 다른 명의를 찾아봐야겠구나.”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페기가 찻잔에 입술을 붙이다가 멈칫했다.

“차향이 독특하네. 무슨 차니?”

“아, 가지앵 잎으로 우린 차에요. 저희 고향에서는 그렇게들 많이 마시거든요. 마음에 드세요?”

“응. 괜찮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 밖의 시종과 짧게 이야기를 나눈 알틴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전하. 모드벤나 수도사께서 알현을 청하세요.”

“…드시라 해라.”

페기는 허리를 곧게 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또각또각 고상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모드벤나가 오른 손을 가슴에 올리며 예를 취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예, 모드벤나. 부탁한 건 완성됐나요?”

모드벤나는 알틴을 통해 보고서를 건넸다. 보고서를 펼치려던 페기가 멈칫하며 알틴을 돌아보았다.

“알틴. 벌써 오후인데 가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오렴. 종일 일했으니 잠깐 쉬어야지.”

“아…. 네, 알겠습니다.”

보고서를 힐끔거리던 알틴이 예쁘게 웃어 보이곤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페기는 그제야 종이를 한 장 넘겼다. 모드벤나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전하의 친부라 주장하는 자는 라발의 조르멘디 남작입니다. 만초 후작가에 뿌리를 둔 분가인데, 교류가 끊긴 지 워낙 오래되어 지금은 그저 농장에 파묻힌 지방 귀족에 불과합니다. 결혼을 두 번 하였는데 첫 부인과는 사별했고,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페기는 보고서를 읽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유독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 생활고로 고가의 가구들을 경매에 부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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