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328)

그때, 모드벤나가 잠옷 차림으로 달려왔다. 늘 참빗으로 빗어 넘겨 단정하던 머리가 오늘만은 정신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전하, 성하께선!”

페기는 물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서 답을 읽은 모드벤나가 얕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입가를 감싸 쥐었다.

“당장 엘피도 공작 전하께 소식을….”

“지금 어디 있는 줄 알고요. 늘 그쪽에서 보내는 편지만 받는 입장인데.”

페기가 조금 허탈하게 웃었다. 예후르가 이끄는 용 기병대는 신출귀몰했다. 엊그제 보내온 편지는 남쪽에서 쓴 것이었는데, 오늘 받은 편지는 서쪽에서 보낸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모드벤나가 페기에게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곤 강직한 얼굴로 속삭였다.

“의연하셔야 합니다. 힘드시겠지만 지금 교국을 지킬 사람은 전하뿐이세요.”

페기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모드벤나가 옷소매로 페기의 눈가를 적신 눈물을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너무 염려하진 마세요. 제가 곁을 지키겠습니다. 아직 어리시지만 영민하신 차라 도련님도 전하께 늘 힘이 되어 주실 거고요.”

페기는 말없이 눈물 젖은 뺨을 쓸었다. 그녀에겐 아직 지킬 것이 남아 있었다. 아직 어린 차라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레오폴트. 그들을 놔두고 청승을 떨 생각은 없었다.

“여기 오기 전에 클레멘스 추기경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성하께서 쓰러지신 것이 정말이냐 묻더군요. 내일이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될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맞서 싸우셔야죠.”

모드벤나가 페기의 양손을 틀어쥐며 강하게 일렀다. 결심한 듯 페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원탁회의를 열겠어요. 추기경들에게 소식을 전해 주세요.”

명을 받은 모드벤나가 정중히 인사하곤 복도를 빠져나갔다. 생각에 잠긴 듯 오도카니 서 있던 페기가 문득 창가를 돌아보았다. 검은 어둠이 내린 유리창 위로 그녀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오직 형형한 눈빛만이, 어둠을 꿰뚫을 듯 선명했다.

***

페기는 문 앞에서 초조하게 손을 떨었다. 모드벤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전하.”

“…괜찮아요.”

페기가 창백한 안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모드벤나는 영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문지기에게 눈짓을 주었다. 옷자락 사이로 숨긴 손을 꽉 쥐며 페기는 회의장 안으로 들었다.

서열에 따라 그녀의 자리는 가장 상석인 교황의 자리에서 시계 방향으로 세 번째 자리. 의자를 꺼내 앉자 원탁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따갑게 쏠렸다. 느릿하게 좌중을 둘러본 페기가 잠긴 목을 열었다.

“…불참한 분들이 계시군요.”

“지난번 마귀를 보고 교구로 도망가신 두 분입니다. 한 분은 퇴임 의사를 밝히셨고, 다른 한 분은 아직 소식이 없으십니다. 얼마나 더 버티실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옆자리에 앉은 클레멘스가 조소를 숨기지 않으며 공손히 서신을 내밀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은 페기가 고개를 들었다.

“팔라디아 추기경이 퇴임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혹 후임자로 추천할 만한 분이 계신가요?”

“…전하. 그 전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클레멘스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성하께서 쓰러지시고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자리를 비우신 상황입니다. 둘 중 한 분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원탁을 맡아 교국을 이끌 사람을 정하셔야지요.”

페기는 넌지시 좌중을 돌아보았다. 솔란지아와 아나클레토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클레멘스를 노려보고, 글리체리아는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동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보나벤투라나 오늘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만달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클레멘스 추기경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연륜이겠지요. 지금 교국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 아닙니까? 이럴 때일수록 경험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교국을 이끌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솔란지아가 코웃음 쳤다.

“연륜만 있다고 콧대 높은 성직자들이 따르겠습니까?”

“오, 물론 솔란지아 추기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연륜 있고 지혜로운 자들 중 권위 높은 사람을 뽑아야겠지요. 이를테면 원탁의 서열을 따른다던가.”

솔란지아와 아나클레토의 눈빛이 대번에 매서워졌다. 사도들을 제하면 가장 높은 서열을 점한 이가 바로 클레멘스였기 때문이다.

페기가 신중히 말문을 열었다.

“나 역시 클레멘스 추기경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교국의 모든 성직자들이 반론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권위가 가장 필요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원탁의 서열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리라 봅니다.

“예. 원탁의 서열에 따라.”

클레멘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속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페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탁의 서열에 따라 내가 교국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란 클레멘스가 경악스러운 눈으로 페기를 돌아보았다. 솔란지아가 원탁을 주먹으로 때리며 소리쳤다.

“옳습니다! 성스러운 불의 사도께서 이리 멀쩡히 계신데 다른 누가 교국을 이끈단 말입니까!”

“솔란지아 추기경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사도께서 교국을 이끄신다? 대관절 어느 성직자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아나클레토마저 재빨리 말을 보탰다. 황망한 표정으로 그들을 차례로 돌아본 클레멘스가 홱 고개 돌려 페기를 보았다. 그는 간신히 미소 띤 얼굴로 이를 악문 채 반박했다.

“하오나 전하, 지금 교국은 아주 위태로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하의 혜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위태로운 시기일수록 경험 많은 자의 지혜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슬쩍 고개 숙인 클레멘스가 그녀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라발이 교회의 수호자로 돌아왔습니다. 성하께서 편찮으신 틈을 타 교국을 좌지우지하려는 탐보프의 세력을 견제하셔야지요. 아시잖습니까. 탐보프가 지난 20년 얼마나 방자해졌는지.”

“그러니 추기경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흠칫 물러난 클레멘스가 냉철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페기는 조곤조곤 속삭임을 이었다.

“교황 성하와 엘피도 공작이 부재한 상황에 가장 시급한 것은 권위를 세우는 거예요. 사도의 권위라면 누구도 대놓고 불복하진 않겠죠. 부족한 연륜과 지혜는 주변에서 채워 주시면 돼요.”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세요, 클레멘스.”

클레멘스는 눈만 굴려 좌중을 훑어보았다. 어차피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반대할 솔란지아와 아나클레토는 볼만한 가치도 없었다. 중요한 건 중립에 선 글리체리아와 만달, 보나벤투라였다.

“명분은 내게 있어요. 내가 사도니까.”

“…….”

“현명하신 분이니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속삭임을 마친 페기가 자세를 바로 했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미동 없던 클레멘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페기는 사색하듯 깊은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아직 여물지 못한 구석이 있으나, 마치 예후르의 어린 시절을 보듯 우미한 자태였다.

클레멘스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이제 보니 그가 단단히 착각했다. 심약한 꾀꼬리인 줄 알았던 소녀가 실은 덜 자란 호랑이였다.

“전하의 곁을 잘 보필하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혹감을 능숙하게 감춘 클레멘스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솔란지아가 눈썹을 움찔하며 재빨리 말을 받았다.

“저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원탁 전체가 전하의 뒤를 받칠 것이니 부디 중용해 주십시오.”

“그리 말씀들 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그럼에도 혹 반대하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 말씀해 주세요.”

원탁은 조용했다. 좌중을 훑어본 페기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교황 성하께서 복귀하시기 전까진 내가 원탁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팔라디아 추기경의 후임에 대하여….”

“아, 전하.”

“말씀하세요, 아나클레토 추기경.”

번쩍 손을 든 아나클레토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은근하게 말을 끌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입궁하면서 아주 기묘한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성궁엔 온갖 소문이 돕니다. 하나하나 언급하다간 날밤 새워도 모자라요.”

글리체리아가 엄하게 질책했다. 그럼에도 아나클레토는 느물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런 헛소문과는 결이 다르니 제가 직접 언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선 제가 무얼 말씀하고자 하는지 짐작하시지요?”

페기는 조용히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소싯적 중앙 부처에서 중용되었던 아나클레토는 성궁에 연줄이 많았다. 지금은 모른 척 의뭉을 떨고 있긴 해도 클레멘스 역시 물밑에서 떠도는 그녀의 추문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저리 대놓고 떠벌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초장에 기를 죽이기 위함인가, 아니면 뒤에서 공작을 편 것이 바로 저자인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저의를 모르겠군요. 말씀을 분명히 하세요.”

“외람되오나 전하의 친부모라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사내는 라발의 지방 귀족이고, 계집은 본디 카니나의 노예였다지요?”

글리체리아가 왈칵 낯을 찌푸렸다. 지금껏 조용하던 보나벤투라 역시 미간에 깊은 골을 새겼다. 같은 탐보프 진영인 솔란지아마저 당혹한 기색으로 그를 말렸다.

“그, 그런 자들은 일찍이 많지 않았습니까? 죄다 전하의 위엄을 깎아내리려는 자들에 불과했지요. 어찌 그런 추잡한 자들을 원탁에 올리십니까?”

“내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이번엔 영 심상치 않아 보이니 드리는 말씀이지요. 듣기론 계집의 얼굴이 전하와 아주 닮았다고 하더군요. 클레멘스 추기경, 그대는 아는 바가 없습니까?”

느닷없이 저를 향하는 화살에 클레멘스가 짐짓 놀란 척 화려하게 어깨를 떨었다.

“오,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은 귀담아듣지도 않습니다.”

“사내가 라발의 귀족이라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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