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328)

뒷걸음질하다가 크게 흔들린 안드레아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거친 숨을 토했다. 목을 긁듯 몇 번 기침하더니 서서히 허리를 폈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적발 사이로 시퍼런 안광이 드러났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감옥 속의 페기를 노려보곤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날카로운 발소리가 웅웅 둔탁해지더니, 곧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어느덧 적막만이 남았다.

페기는 건조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철창을 쥔 손은 갈피를 못 잡고 힘만 꽉 들어가 있었다.

지금껏 감옥에서 부표처럼 생각의 파도에 휩쓸려 다녔다.

희망이 샘솟는 날이면, 레오폴트가 나타나 제 손을 잡고 눈부신 양지로 데려가는 꿈을 꾸었다. 모든 일이 잘 풀려서 한낱 해프닝이 될지도 모른단 상상을 당연히 했다.

그것이 힘들고 어렵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싹트는 희망을 죽이고 또 죽여 가장 낮은 희망만을 남겨 두었다.

꼭 죽음만이 처벌이 되는 것은 아니니, 어쩌면 유배로 끝날지도 모른다고. 인적 드문 숲속의 성에 갇혀 고요하게 여생을 보낼지도 모른다고. 그러다 어느 날, 손끝에서 불씨가 피어오르는 날엔 저의 무고함이 증명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하지만 ‘산다’는 미래에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모습은 없었다. 애당초 그런 건 사는 게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 살아남을 순 없었다.

그러니 떠나가는 안드레아를 붙잡지 않을 것이다.

페기는 오도카니 제자리를 지키고 섰다. 행여나 자물쇠 풀린 철창문이 열리기라도 할까, 문을 꼭 잡아 쥔 채로.

그리 억겁 같은 시간이 흘렀다. 멀리서 더디게 돌계단을 내려오는 간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질질 끌리는 누군가의 발소리도 함께였다. 왈테르 경과는 무게가 달랐다.

머잖아 간수가 나타났다. 빼빼 마른 간수는 늘 그렇듯 그녀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조악한 음식 접시를 철창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다 땅에 떨어진 자물쇠를 발견하곤 망설이며 자물쇠를 집어 들었다.

간수가 흘끗 눈을 들어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등 뒤로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물쇠를 품은 채 옆으로 물러났다.

간수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붉은 횃불 아래 익숙한 모습이 떠올랐다.

페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레오?”

***

추적추적 비 내리는 거리는 꼭 늦가을처럼 써늘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쓴 니체타가 남몰래 하품했다. 밤새 비행하다가 겨우 도착한 도시였다. 안 그래도 막판에는 거의 졸면서 비행했는데, 하필 가위를 내서 공작을 따라 도시로 들어오게 되었다.

거기서 주먹을 냈으면, 지금쯤 성 밖에서 용들을 돌보며 꿀 같은 잠을 청하고 있었을 텐데.

니체타는 멍청했던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자꾸만 감기는 눈을 애써 부릅떴다. 최대한 조용히 지나가기 위해 공작과 니체타 단둘이서만 입성한 터였다. 아무렴, 이런 작은 도시에 뱀이 있겠느냐만 어쨌든 확인은 해 봐야 하지 않겠나.

니체타가 은근히 공작에게 말을 붙였다.

“전하, 한 바퀴 돌고 나면 슬슬 시장도 열리지 않겠습니까? 도시에 들어온 것도 오랜만인데 향신료 좀 사 가면 안 됩니까? 오늘 클로디아가 요리 당번인데, 걔가 만든 음식은 향신료로 가리지 않으면 도저히 못 먹지 말입니다.”

그런다고 먹을 만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이 속도면 위스누아까지 반나절로 충분할 테니, 코앞에 닥친 아침 식사만 어떻게 해결하면 되었다. 참고로 니체타는 뱀이 위스누아에 숨어 있다고 굳게 믿었다.

클로디아가 요리한 향신료 덩어리를 먹고, 반나절 열심히 날아 위스누아에 도착해 정상적인 식사를 하고, 뱀을 때려잡는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 니체타는 자신의 계획을 자찬하며 한 걸음 크게 내디뎠다. 그러다 공작의 등에 코를 박고 말았다.

“아, 죄, 죄송….”

코를 움켜쥔 니체타가 눈을 끔벅끔벅하며 슬그머니 예후르를 올려다봤다. 우두커니 선 그의 시선은 어느 낡은 성당에 닿아 있었다.

확실히 성당이라면 보급품을 충당하기도 쉬울 테지. 혼자서 납득하는데, 예후르가 불쑥 성당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니체타가 얼른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우는 소리를 따라 성당의 문이 열렸다.

이른 새벽녘의 성당은 아주 고요했다. 촛불이 오른 전면의 제단만이 밝고, 나머지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예후르가 몇 발짝 안으로 들자, 단단한 군홧발 소리가 크게 공명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소박하게 장식된 내부를 둘러보았다. 저 높이, 어느 성당이나 열어 두는 꼭대기 창문에서 한 줄기 빛이 하늘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이른 손님이시군요.”

제단을 청소하던 사제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인자한 인상의 늙은이였다. 붙임성 있게 인사하려던 니체타는 사제를 무시하고 성당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예후르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아, 그게 실은, 저분이 말이죠….”

니체타가 더듬더듬 설명하는 사이, 예후르는 우측으로 돌아 소성당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조각도, 회화도, 성도 성당에 비하면 하나같이 조악한 솜씨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없는 것이 여기 있었다.

불쑥 예후르가 어느 소성당 안으로 들어가 중앙에 걸린 성인의 액자를 끌어 내렸다. 늙은 사제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자, 니체타가 대신 황급히 나섰다.

“저, 전하! 그렇게 막 함부로 들어가시면…!”

니체타의 얼굴이 황망함으로 젖어 들었다. 액자가 걸려 있던 곳에 낡은 문이 있었다.

사제가 말리려는 듯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아, 그건 폐쇄된 지하 수로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위험하니 들어가지 않으시는 편이….”

끼이이익.

예후르의 손끝이 닿기 무섭게 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니체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문 너머에 똬리를 튼 어둠이 금방이라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달려들 것만 같았다.

물끄러미 어둠 속을 응시하던 예후르가 사슬에 꿰어 목에 걸어 둔 반지를 천천히 매만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경건하게 반지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녀오마.”

설핏 웃어 보인 그가 문 너머로 훌쩍 사라졌다. 니체타가 경악하여 소성당 안으로 뛰어들었으나, 돌덩이라도 된 것처럼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전하!”

***

페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레오.”

다시 한번 불러 봐도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온몸을 둘러싼 흰 천, 딱딱해 보이는 제식용 은 가면. 저런 모습을 한 사람이 레오폴트 말고 또 있을까.

“레오.”

최면을 걸듯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읊조린 페기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쇠창살 사이로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조금 머뭇거리던 레오폴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잘 지냈어요?”

이럴 땐 가면이 참 불편했다. 얼굴을 죄 가려 버리니 표정을 읽을 수도, 피로함을 감지할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페기는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렸고, 레오폴트는 한참 뒤에야 답을 주었다.

“네 이렇게 갇혀 있는데, 내가 잘 지낼 수 있었겠느냐.”

목멘 듯 잠긴 목소리였다. 레오폴트는 마치 죄인처럼 몸을 옹송그린 채 페기의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페기는 못내 안쓰러운 듯이 그를 보았다.

“그래도 잘 지내려고 노력해야죠. 또 아프면 어떡해요.”

“…….”

“레오.”

“…….”

“무슨 일 있어요?”

페기는 가늘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보았다. 잘게 흔들리는 가면을 보았다. 제 손을 쓰다듬는 손길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젖은 숨을 삼키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페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약속을 기억하느냐?”

“네, 날 당신 품으로 감싸 행복을 찾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쓰레기통 안에서 예후르의 손을 잡았을 때가 구원의 순간이라면, 레오폴트의 눈물 어린 약속을 들었을 때는 기적의 순간이었다. 단 한 번도 제게 허락되리라 생각한 적 없던 행복이란 단어가 비로소 단비처럼 쏟아진 순간이었다.

레오폴트는 또다시 한참을 침묵했다. 어렵사리 말을 고르고 또 고르는 듯 적막 속에 수많은 번뇌의 흔적이 남았다.

끝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페기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머리를 후려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키지 못한다니?”

“…….”

“레오, 당신은 약속을 잘 지켜 왔어요. 지금까지 날 지켜 주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줬잖아요. 그냥 우리 둘 다 지금처럼만, 그렇게만 살면 되는데….”

문득, 가면 속 숨겨져 있던 연옥색 눈과 마주쳤다. 눈물이 흥건한 눈을 보자 깨달음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아.

“나 죽어요?”

이대로 끝이구나.

가까스로 버티어 서 있던 몸이 후들거리며 침몰했다. 스르르 주저앉는 그녀를 따라 레오폴트도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불타 죽는 거예요?”

“페기.”

“기둥에 묶여서, 불에 타 죽어요?”

왜?

“내가 그렇게 죄인이에요?”

페기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주먹이 절로 갑갑한 가슴을 내리쳤다.

“내 죄가 뭔지 알면 제발 말해 줘요. 내가 고칠게요. 손발을 자르고, 혓바닥을 뽑아서라도 어떻게든 고칠게요.”

“페기, 제발.”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줘요.”

더듬거리며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어떻게든 다시 성화를 피워 올릴게요. 나 할 수 있어요. 나도 사도잖아요. 여기 이렇게 성흔도 아직 남아 있는데.”

페기는 억지로 그의 손을 잡아 올려 제 이마를 만지게 했다. 두꺼운 천으로 뭉툭하게 싸맨 그의 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함에도.

레오폴트가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너의 죄가 아니다. 전부 내 죄야. 내가 부족한 탓이야. 미안하다. 미안하구나, 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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