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328)

천장에 뚫린 채광창에서 맑은 햇살이 떨어진다.

한여름 아지랑이처럼 빛이 반짝반짝 부풀어 오르는 가운데, 하얗고 까만 피아노 건반 위로 길쭉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노닐었다. 마치 개울물이 흘러가듯 명랑한 소리의 향연. 딱딱한 가면 사이로 얼핏 비치는 연옥색 눈은 감상에 푹 젖어 선율을 따르고 있었다.

혼자서는 피아노 의자에 앉지도 못했던 어린 페기는 난생처음 듣는 ‘연주’에 홀린 듯이 사로잡혔다. 늘 장갑에 감싸여 있던 고귀한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건반은 어떻게 눌리는지, 눌린 건반은 또 어떠한 소리를 내는지.

악기가 노래하는 소리는 사람과 다르고 자연과도 달랐다. 그것은 오히려 얼마 전 고향의 뙤약볕 속에서 들었던 장중한 천사의 계시와 닮아 있었다. 다만 그보다 땅에 가깝고 보다 친숙하며, 한편으론 덜 신성한 소리.

레오폴트는 그것이 ‘음악’이라고 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소리지.”

음악을 안 뒤로 그녀는 수많은 대가들의 연주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더 뛰어난 연주가라면, 더 훌륭한 음악가라면 그날에 들었던 천사의 음성을 다시 재현해 낼 줄 알았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연주가들의 음악도 결국엔 인간의 소리에 불과했다. 아름답지만 그뿐이었다. 페기는 그 이상을 원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천사의 경지에 이른 소리를 원했다.

하여 스스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그날의 음성을 재현할 수 없다면, 내가 하면 그만이리라.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으로 다시 태어났으나 정작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그녀는 자신에게 새로운 운명을 내려 준 천사에게 다시금 닿고자 했다.

그것이 그녀가 스스로 정한 자신의 소명이었다.

음악으로써 그날의 전율을 다시 느끼는 것.

경외와 공포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무지한 존재였던 뒷골목 시궁쥐는 천사의 장엄한 음성을 듣고 두려워 옹송그렸다. 하지만 더 이상 무지하지 않은 카니나의 페기는 어떨까. 이번에도 똑같이 두려워 떨까. 아니면 숭고한 경외심으로 당신의 전언에 귀 기울일까.

이제는 죄 무의미한 의문이다.

페기는 어두운 감옥의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내일 아침이면 양손이 묶인 채 이송되어 만인이 보는 앞에서 불에 타 죽을 것이었다. 창녀의 자식이라 매도되었던 어린 날처럼 돌팔매질 당하고 욕설 뒤섞인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자신의 소명을 되새긴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이다. 하늘의 천사께선 성화를 거두어 가셨고, 천사에게 버림받은 그녀에겐 그 어떤 계시도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미완의 소명을 끌어안은 채 활활 불타 사라지리라.

그녀는 서서히 눈을 내리감았다. 바닥에 축 처진 양손이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건반을 연주하듯.

뚜벅이는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규칙적으로 돌계단을 밟아 내리는 소리에 맞추어 페기는 손가락을 두드렸다. 귀에 익지 않은 소리다. 곧 죽을 죄인을 찾아오는 자, 과연 누구인가.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발소리가 우뚝 멎었다. 페기는 그제야 스르르 눈을 떴다. 고개를 옆으로 틀자, 철창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신의 인영이 보였다. 그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후드를 천천히 벗어 내렸다.

본시오였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자물쇠를 풀기 시작했다. 곧이어 끼익 소리와 함께 철창문이 열렸다. 나오라는 듯 그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페기는 돌바닥에 누운 채 미동도 없었다.

“…전하.”

수염이 듬성듬성한 본시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참 이상한 일이다. 저 얼굴을 보고 인상이 참 좋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페기는 불쑥 입을 열었다.

“그 문을 열어 준 게 당신뿐이었을 것 같아요?”

저주를 퍼붓고 나가던 안드레아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과연 그게 잘한 선택이었을까. 죽음을 앞에 두었지만 이상하게도 큰 후회는 없었다.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분께는 의미가 있겠지요.”

본시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주먹 쥔 그의 손 아래로 얇은 사슬이 늘어졌다. 그 사슬 끝에 익숙한 모양의 반지가 매달려 있었다.

페기가 멍하니 일어나 앉았다.

“그건….”

“알아보시겠습니까.”

비틀비틀 바닥을 짚고 일어선 그녀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본시오는 선뜻 반지를 넘겨 주었다. 페기는 반지를 손바닥에 올려 두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수호의 반지였다. 제네로사가 레오폴트에게 주고, 레오폴트가 그녀에게 주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예후르에게 주었던.

“예후르가 왔어요?”

“네.”

“날 구하러?”

“기다리고 계십니다.”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던 페기가 철창문을 넘었다. 본시오는 공손하게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늘 간수가 튀어나오던 짙은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어지러운 원형 계단에는 촛불이 듬성듬성 길을 밝히고 있었다. 페기는 물기가 남은 본시오의 발자국을 따라 멍하니 계단을 올랐다. 아직도 꿈속인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지만, 손에 쥔 반지의 촉감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예후르가 왔다.

그러자 의식적으로 밀어 놓았던 그의 생각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뱀은 물리쳤을까. 어디 다친 곳은 없을까. 나 때문에 많이 놀라진 않았을까. 북받치는 감정 속에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누르고 잘라도 결국엔 싹을 틔운 마음이 넘칠 듯 차오르고 있었다.

계단을 모두 오르자, 신선한 바깥의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습하고 무거운 공기였다. 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자욱한 안개에 가려진 사방은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본시오가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고 빗속으로 들어갔다. 페기는 그를 따라 진흙밭에 맨발을 디뎠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아프게 때리는 장대비는 순식간에 옷자락을 적시고 살갗을 파고들었다. 페기는 가물가물한 시야를 애써 붙잡으며 본시오의 뒤로 따라붙었다. 짙은 안개 속을 헤치고 가는 느낌이었다. 어지러웠다.

그런데 문득, 안개 속에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장정 여러 명이 튀어나왔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본시오의 걸음도 어느덧 멎어 있었다.

그저 빗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를 둥글게 에워싼 장정들은 미동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본시오의 뒷모습에 꽂혀 있었다. 요란한 침묵 속의 대치였다.

그러자 본시오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후드의 그늘 속에 가려진 얼굴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다만 페기는 반지를 꽉 쥐었고, 덕분에 오금이 차여 넘어지는데도 반지를 놓치지 않았다.

철퍼덕 진창 위로 엎어진 그녀의 사지를 고정하듯, 장정들이 그녀의 어깨와 오금을 밟았다. 그리고 누군가 반지를 쥔 그녀의 오른손을 발로 질질 끌어 올려 손목을 짓밟았다. 악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다른 장정이 그녀의 고개를 진창에 처박았다. 숨통이 막혔다.

그녀는 흙탕물을 삼키며 가까스로 눈만 굴렸다. 손목이 고정된 오른쪽 손등 위로 불현듯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설마.

퍼뜩 솟구치는 불안감에 그녀가 붙들린 사지를 마구 바동거렸다. 안 돼, 하지 마, 내지르려던 고함은 진창에 먹혔다. 저항은 봉쇄됐다. 핏발 선 눈이 망치를 힘껏 들어 올리는 장정에게 가 닿았다.

쿵!

안 돼.

쿵!

그만.

쿵!

하지 마.

쿵!

제발….

망치질은 계속되었다. 이미 손은 빠개져 곤죽이 됐는데도, 진흙탕에 처박을 것처럼 때리고 또 때렸다. 말로 다 못 할 고통에 거품을 물고 눈이 까뒤집히면서도 페기는 차마 정신을 놓지 못했다. 그녀의 소명이, 음악이 부서지고 있었다.

쿵!

마지막 망치질이었다. 그녀의 어깨와 오금을 짓밟던 발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박제된 나비처럼 처량하게 움찔거렸다. 피가 터지고 뼈가 조각난 제 손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문득, 그녀의 눈앞으로 군홧발이 나타났다. 느긋하게 감상하는 듯한 시선이 이어지더니, 마치 쓰레기를 뒤집듯 엉망이 된 그녀의 손을 군홧발로 툭 쳤다. 그러자 진흙 속에 박힌 반지가 드러났다.

“이것은 수호의 반지란다. 널 지켜 줄 거야.”

군홧발이 반지를 무참히 짓밟았다.

털고 일어나는 발아래 부서진 보석 가루가 덧없이 흩날렸다.

진창에 처박힌 그녀의 뺨 위로 미지근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흐느끼듯 입술을 달싹였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

“내가 뭘 잘못했다고….”

누구든 답을 주길 바랐다. 대성당의 성화가 꺼진 이유를, 내가 불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손이 저 지경이 되도록 맞아야 하는 이유를 누구든 알려 주길 바랐다.

하지만 진창 위로 흐르는 것은 나지막한 웃음소리뿐이었다. 본시오는 느긋하게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죽음에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가 검을 높이 쳐들었다.

군홧발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목소리, 높게 치솟는 웃음소리, 멀어지는 발소리. 어느덧 귓가를 가득 메우는 것은 쉴 틈 없는 빗소리였다.

그녀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부서진 반지를 보았다. 진창 위로 서서히 퍼져 가는 핏물을 느꼈다. 몹시 추웠다. 곤죽이 된 손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렇게 하나둘 멎어 가기 시작했다.

추위가 가시고, 반지의 잔해가 가시고, 빛이 가시고. 어둠뿐인 세상에 오직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 아득하게.

그리고 어느 순간 빗소리도 멎었다.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고드릭은 숨이 터져라 달렸다. 앞을 막아서는 근위대도 밀쳐 내며 힘껏 교황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성하!”

침대를 짚으며 일어나려던 레오폴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드릭은 황망한 얼굴로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오폴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마침 잘 왔구나. 안 그래도 너를 부르려고 했다.”

그는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며 기운차게 말했다.

“내일이 페기의 화형 집행일이지. 가서 전부 중단하도록 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내가 죽으면 죽었지, 어찌 그 가여운 아이를 죽인단 말이냐. 분명 페기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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