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328)

모든 사람에겐 각인되는 기억이 있다.

어떤 이에겐 아이를 낳는 순간이고, 다른 어떤 이에겐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난 순간이리라.

하지만 그녀에겐 자신이 죽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의 분노, 슬픔, 배신감,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둡고 진득한 감정들이 되살아난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페기는 미련 없이 거울을 덮었다.

어쩌면 그녀는 망가진 채로 되살아났는지도 몰랐다.

***

이시도르 피아제는 눈치가 빠른 작자였다. 페기가 교국과 관련된 일들을 꺼림칙하게 여긴다는 걸 깨닫곤, 다시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속으론 꽤나 조바심치고 있을 텐데도 겉으론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다.

덕분에 페기는 고요한 요양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백작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빠르게 기력을 회복해 나갔고, 지겨운 침상을 떠나 정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소일거리로 가장 열중하는 것은 마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포주의 어깨 너머로 대강 글을 익혔다는 마샤는 일상적인 단어에는 능통했으나, 상류층이 사용하는 고상한 어휘에는 문외한이었다.

페기는 고전을 펴 놓고 하나하나 가르치는 한편, 마샤에게 깃펜을 쥐여 주고 필체 연습을 시켰다. 마샤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아는 영특한 아이였지만, 필기체만큼은 도통 익숙해지질 못했다.

“그게 아니지.”

또다시 똑같은 획에서 지적을 당하자, 마샤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페기는 교본을 만들어 줄 생각으로 깃펜을 들었다. 그러나 손가락에 힘을 주는 순간, 생살을 찢는 듯한 고통이 파고들었다.

“아.”

“괘, 괜찮으세요?!”

페기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끄러미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색이 된 마샤가 찜질을 해야 한다며 뜨거운 물을 가지러 나갔다.

그때, 이시도르가 찾아왔다. 그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마샤의 글씨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거 하루 이틀로는 안 되겠는데요? 저 애에게 글을 가르치고 싶으시다면 제가 따로 교사를 부르겠습니다.”

“됐어요. 글씨 연습은 나도 다시 해야 하니까.”

페기는 무심한 낯으로 깃펜을 내려놓았다. 수반을 들고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오던 마샤는 이시도르를 발견하곤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신하게 걸었다.

“내가 하마.”

수반을 넘겨받은 이시도르가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셨다. 페기는 정성스레 수건의 물기를 짜는 백작의 손길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나한테 뭘 바라요?”

이유 없는 헌신은 없다. 그녀는 죽기 전엔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 젊은 백작이 자신에게서 뭘 원하기에 이토록 자비를 베푸는지 알 수 없었다.

“바라다니요. 그저 돌아오신 사도를 모실 뿐입니다.”

“어린애도 안 믿을 거짓말을.”

“…어떻게 해야 제 진심을 믿으실지.”

이시도르가 조금 난감하게 웃었다.

“전 진심으로 전하께서 살아 돌아오신 것을 반기고 있습니다. 하늘의 여덟 천사와 불의 사도를 믿는 한 명의 신자로서, 전하께서 마땅히 계셔야 할 곳으로 되돌리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은 한 점 거짓도 없는 것처럼 들렸다. 하기야 그녀에게 해코지할 심산이었다면 진작 다시 죽여서 땅에 묻었을 터.

하지만 그녀가 제자리로 돌아가려면, 지금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알비야 공작을 먼저 내쳐야 한다.

페기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밀었다.

“뜻이 분명해서 좋네요.”

“별말씀을.”

이시도르는 뜨거운 수건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감쌌다. 알싸한 고통이 피어올랐다. 페기는 제 것이 아닌 듯 비틀린 손가락을 무료하게 응시했다.

“엘피도 공작이라고 만만치는 않을 텐데요.”

“만만한 것으로만 따지자면 고민의 여지 없이 알비야 공작을 지지했겠죠.”

알비야 공작이 내쳐지면, 차기 교황은 자연스레 예후르의 몫이 된다. 지금 이시도르에겐 알비야 공작을 가장 효과적으로 몰락시킬 수 있는 최고의 패가 들어온 셈이었다.

“하지만 어찌 교국의 지도자를 단순히 그런 것으로만 정하겠습니까.”

“그대는 라발의 귀족이잖아요.”

“마침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성좌를 이어받으시는 것이 저희 라발에게도 조금 더 이득이군요.”

이시도르가 너스레를 떨 듯 말했다.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 페기가 가만히 눈살을 찡그리자, 이시도르는 유창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알비야 공작의 가장 든든한 지지 세력은 퀴테리아 추기경입니다. 위스누아? 물론 거기도 전력을 다해 알비야 공작을 지원하겠지만, 그래 봤자 누미디아보다도 작은 일개 도시 국가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건 퀴테리아 추기경과 열성적으로 그녀를 따르는 성직자들이죠.”

퀴테리아 추기경은 오래전부터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자는 청백 운동을 펼쳐 왔다. 명문가 태생임에도 몸소 청빈을 실천하는 그녀의 모습에 혈기 충만한 젊은 성직자들은 단번에 매료되었다. 타락한 교회에 질려 수도원을 등졌던 이들도 하나둘 그녀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들려오는 소문으론 퀴테리아 추기경은 고기도 성직자의 참관 아래 도축된 것만 먹는다고 합니다. 말리프레도 경전에 그리 적혀 있다고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구닥다리… 죄송합니다. 말이 잘못 나왔군요.”

이시도르가 괜스레 헛기침했다.

“여하간 사장된 지 오래된 경전의 교리까지 그렇게 꾸역꾸역 실천하는 걸 보면 어떤 사람인지 대강 감이 잡히시겠지요. 원리주의잡니다.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그로선 보기 드물게 단호한 투였다.

“타락에 경종을 울리는 자. 예, 교회에는 물론 그런 성직자도 있어야겠지요.”

“…….”

“하지만 그런 성직자가 교국의 우두머리가 되는 건 상당히 난처한 일입니다. 나랏일에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원칙이라 할 것이 없으니까요.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재정적 상황, 귀족들의 반응, 모든 현실적인 사항들을 고려한 뒤에 결정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퀴테리아 추기경이 과연 그러겠습니까?”

이시도르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아니요. 그녀는 이미 모든 일에 답을 정해 놓은 사람입니다. 그 결정에 위배되는 것들은 모두 뛰어넘어야 하는 장애물이고, 단죄해야 마땅한 악이겠지요. 사도이신 전하께서 어찌 들으실진 모르겠지만, 교회의 가르침대로만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낱 사람의 삶도 그럴진대,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자아낸 나랏일은 어떻겠습니까?”

페기는 식어 가는 수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엘피도 공작이 그러더군요. 추기경은 정치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라발의 선택이 옳았군요.”

이시도르가 빙긋 웃었다. 페기는 묘하게 씁쓸한 표정으로 수건 속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대의 뜻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난 당장 성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요.”

작금의 성궁은 알비야 공작의 천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맨몸으로 뛰어 들어갈 순 없었다.

“동의합니다. 일단은 은밀하게 시작해야겠지요.”

“아니요.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

“내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

이시도르의 얼굴이 멈칫 굳었다. 페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내 죽음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요?”

“잘은… 모릅니다. 그저 화형이 집행되기 전날,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셨다고밖엔….”

“날 죽인 사람은 똑똑히 기억해요.”

“개죽음에 이유가 있겠습니까.”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작자.

“그게 누굽니까?”

이시도르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페기는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한 칼잡이에 불과해요. 배후에서 그 칼을 휘두른 자가 누구인지, 그걸 밝혀내야죠.”

“확실히… 전하를 노리는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도 있겠죠. 짐작하는 자는 있으십니까?”

“…의심 가는 사람은 있어요.”

페기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내리뜨인 보랏빛 눈이 얼어붙듯 차가웠다. 묘하게 경직된 분위기에 이시도르는 눈치껏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일단은 황제 폐하와 클레멘스 추기경께 연락을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측에서 돕는다면 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풀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아니요. 내가 살아났다는 게 더 알려지면 안 돼요.”

“…전하. 저는 폐하의 신하이고….”

“만일 일이 잘 풀린다면 그대의 공을 잊지 않겠습니다.”

페기가 평온한 미소를 머금었다.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이시도르가 문득 웃음을 터트리더니, 못내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따를 수밖에요. 하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진행하기엔 제약이 많을 텐데요.”

“그러니 믿을 만한 사람과 접촉해야죠.”

페기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마지막까지 날 버리지 않았던 사람.”

차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촌극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도련님께서 외부로 나가신다는데….”

“외부로 나가시는 건 알비야 공작 전하도 마찬가집니다.”

“아이, 이 사람아! 알비야 공작 전하는 성문 밖 성도로 나가시는 것이지 않나!”

“성도도 엄연히 궁전 밖입니다. 성궁보다야 당연히 방어 체계가 취약할 수밖에요.”

“아니,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왈테르가 어물거리는 소리에 본시오가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단장님. 보는 눈이 많아 최대한 완곡히 돌려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나 알아듣질 못하시니 도리가 없겠습니다.”

“뭐, 뭐라고?”

“알비야 공작 전하는 현재 교황 성하의 대리로 계십니다. 그런 분께서 어느 날 갑자기 괴한에게 칼이라도 맞으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 성궁은 전부 마비될 것이며, 편찮으신 교황 성하께서 다시 전면으로 나오셔야겠지요. 신하로선 참으로 망극한 상황입니다.”

“아, 아, 아니, 또 무슨 그렇게 험악한 가정을….”

“이건 단장님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만에 하나 그런 험악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후환은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근위대의 우두머리이신 단장님 아닙니까?”

대답할 틈을 놓친 왈테르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만 벙긋거렸다. 차라가 한숨을 푹 내쉬며 적당히 끼어들었다.

“됐어요. 난 혼자 가도 되니까.”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거기가 어디라고 혼자 가신다는…!”

“그럼 어떡해요. 저 말라깽이가 나한텐 좋은 기사들을 붙여 주지 못하겠다는데.”

“듣는 말라깽이 서운합니다, 도련님.”

본시오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차라는 코웃음 치며 그를 외면했다.

“듣고 있기도 지겨우니까 그냥 적당히 아무나 붙여 줘요. 조용히 갔다가 조용히 돌아올 건데, 호위가 많아지면 괜히 의심하는 눈만 늘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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