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328)

페기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에도 알려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집사는 천연덕스럽게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벽난로를 쑤셔 장작을 태우던 마샤가 눈치껏 불쏘시개를 내려놓았다.

“제, 제가 알아 올게요!”

마샤는 후다닥 복도로 달려 나갔다. 다행히 멀지 않은 모퉁이에서 젊은 하녀가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저… 안녕하세요.”

인기척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던 하녀가 마샤의 어눌한 발음을 듣고 경계했다.

“너 누구야? 여기 사람이 아닌데.”

“방금 도착했어요. 엘피도 공작 전하의 상단과 함께요.”

“아… 벌써 도착했어? 손님들 오시기 전에 다 지워 놓으라고 했는데.”

하녀가 푸념하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검붉은 자국이 군데군데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걸요. 내일 아침에 하세요.”

“그럴까…. 너 입 다물어 주는 거지?”

“그럼요.”

마샤가 배시시 웃었다. 순박한 어린애의 얼굴에 하녀는 경계심이 조금 풀렸는지 기지개를 쭉 켰다.

“아이고, 삭신이야. 종일 걸레질만 했더니 안 아픈 구석이 없네. 그런데 얘, 넌 누굴 모시니? 행색을 보아하니 상단의 잡일을 전담하는 하녀는 아닌 것 같고.”

“전 아가씨를 모셔요.”

“아가씨? 상단에 아가씨도 있어?”

“음…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모신 지 오래된 건 아니거든요.”

“하긴… 넌 닳은 구석도 없어 보인다. 이 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

“네. 그래서 맨날 실수만 해요. 사실 지금도 복도로 나왔다가 길을 잃었거든요. 여긴 꼭 미로처럼 복잡해서 아가씨 계신 방이 어딘지도 잘 모르겠어요.”

마샤의 푸념에 하녀가 깔깔 웃었다.

“이 성에 처음 온 사람들은 다들 그러더라. 나도 그랬어. 며칠만 지나면 좀 익숙해질 거야. 그래도 정히 모르겠다면 그냥 아무 방 문고리나 잡고 열어 봐.”

“그래도 돼요?”

“집사님께 들키면 혼나겠지만 별수 있나. 안 쓰는 방들은 어차피 다 잠겨 있거든. 특히 여기랑 이 위층은.”

“위층은 왜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위층에 머무셔.”

지레 놀라 입을 헙 다물었던 하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금세 표정을 풀었다. 큰 비밀도 아닐뿐더러, 어차피 이 어린애는 엘피도 공작의 상단에서 왔다고 했으니까.

“특히 저 위층은 귀한 손님들만 모시는 곳인데, 어떤 귀한 손님이 여길 찾으시겠어. 내가 여기 온 이래 저 위층의 방문이 하나라도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라니까?”

“그럼 보통은 다 잠가 놓는 건가요?”

“응. 이상하지?”

하녀가 숨죽여 웃으며 속삭였다.

“성주님이 미치셨거든. 방을 잠가 놓지 않으면 귀신이 나온다고 생각하셔.”

마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걸레와 대야를 챙겼다.

“어쨌든 그런 곳이니까 웬만하면 얌전히 있다가 떠나는 게 좋을 거야.”

하녀는 손을 흔들며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마샤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페기의 방으로 돌아갔다.

“엘피도 공작 전하는 위층에 계신대요. 유일하게 잠겨 있지 않은 방이 공작 전하께서 머무시는 방이라고 했어요.”

페기는 의자에 앉아 좁은 창 너머로 으스스한 성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샤가 머뭇거리며 말을 보탰다.

“그런데 여기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여기 성주님은 문을 잠가 놓지 않으면 귀신이 나온다고 생각하신대요. 혹시 자다가 귀신이라도 나오면 어떡하죠?”

“…세상에 귀신 같은 건 없어.”

“정말요?”

페기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샤가 졸졸 따라 나오자, 그녀는 문고리를 잡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혼자서 다녀올게.”

“…….”

“얌전히 있으렴.”

살짝 미소 띤 얼굴이 문틈으로 사라졌다. 마샤는 뒤늦게 ‘네’ 하고 대답했다.

복도는 어둡고 고요했다. 어둠을 밝혀야 할 촛대는 텅 비어 있고, 하녀들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야수가 모든 것을 갉아먹은 것처럼.

이런 밤이면 그녀는 늘 악몽을 꿨다.

레오폴트의 손 잡고 시가지에 나갔다가, 창녀의 자식이란 소릴 듣고 돌팔매질 당하는 꿈이었다. 레오폴트의 허리춤에도 못 오던 어린 시절, 그날의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10년이 지나도록 악몽은 그치질 않았다.

하지만 공포에 질려 깨어나거든, 늘 머리맡을 지키는 예후르가 있었다.

그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헛소리를 내뱉던 저를 달래며 도로 평온한 잠 속에 들게 했다. 이튿날에는 그마저 꿈이었나 싶어지지만, 악몽이 찾아오는 밤이면 반복되던 상황이 모두 꿈일 리는 없었다.

꿈결에서도 느껴지던 그의 다정한 손길, 목소리.

그런 것들이 있어 악몽이 두렵지 않던 때가 있었다.

차가운 빗물을 맞으며 죽어 가는 꿈을 꾸는 지금도 그녀는 종종 사라지고 만 그의 손길을 떠올리곤 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절을 되짚듯, 그녀는 벽을 짚으며 가파른 계단을 차근차근 걸어 올랐다. 고요하게 깔린 어둠은 위층도 마찬가지였다. 인적 없는 복도에는 귀신이 나온다는 방들이 차례로 줄지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기는 더듬거리며 첫 번째 방의 문고리를 쥐었다. 얼어붙은 문고리는 꼭 마귀의 숨결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방이 나왔다. 문은 잠겨 있었다.

세 번째 방이 나왔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윽고 복도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페기는 어느덧 차갑게 식은 손을 문고리에 올렸다.

달칵, 문이 열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추운 탓인지, 감격스러운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소리 없이 열리는 문 너머로 드넓은 방 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높이 난 창문에서 내려오는 달빛이 텅 빈 방을 음산하게 밝혔다. 페기는 주인 없는 빈방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단조롭게 꾸며진 방이었다. 벽에는 외풍을 막기 위한 짐승 가죽이 걸려 있고, 두껍게 짜인 천개에는 절제미를 숭상하는 옛 노르투그 왕실의 양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벽난로 위에 엇갈려서 걸린 두 개의 검만이 유일하게 장식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동시에 의아할 정도로 사용감이 없는 방이었다. 사람의 온기, 체취, 하다못해 어질러진 흔적조차 없었다. 먼지 한 톨 없이 정갈한 방 안에는 그저 지독한 싸늘함만이 맴돌았다.

페기는 방을 가로질러 달빛이 내려오는 책상 앞에 섰다. 가만히 창문 쪽으로 팔을 뻗자, 달빛이 게걸스럽게 그녀의 손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빈방에서 그녀는 안도감과 아쉬움을 함께 느꼈다. 저를 배신한 그를 보지 못해 안도했고, 저를 배신하지 않은 그를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그녀에게 예후르는 자신을 배신한 사람이며, 동시에 배신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하지만 마음속 깊이, 그가 배신자가 아니길 바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지난 삶 그녀에게 안식을 선사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악몽이 찾아오는 밤마다 저의 머리맡을 지키며 달래 주던 손길이 죄 거짓이었다곤 믿고 싶지 않았다.

페기는 미련이 남은 손길로 가만히 책상을 쓸어 보았다. 지금은 돌아갈 때라는 걸 알았다. 오늘 하룻밤만 지나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알기 위해 이 먼 길 달려왔고, 끈질기게 견뎠던 그 무료한 시간들에 비하면 하룻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멀리서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문가를 돌아보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치 고요한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문이 활짝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모습을 페기는 분간할 수 없었다. 달빛이 채 닿지 못하는 문가에서 그는 그저 시커먼 덩어리로만 보였다. 다만 시선이 높고 체구가 컸다.

느리게 문을 닫은 그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단단한 밑창이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페기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치맛자락 부여잡은 손에 땀이 배었다. 그에게선 짙은 술내가 났다.

그는 작은 탁자 앞에서 기다란 술병을 집어 들었다. 곧 쪼르르 술 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잠에 취한 듯 느른한 목소리였다. 침묵하던 페기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뵙지요.”

“나는.”

그가 술잔을 든 채 조금 휘청거리며, 그러나 걸음만은 똑바르게 다가와 풀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단단한 군화에 감싸인 긴 다리가 달빛 너머로 드러났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페기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상체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델라이데 피아제입니다. 페임하른 공작 각하께 아국 황제 폐하의 밀서를 전달하란 명을 받아 왔습니다. 사촌 오라비인 피아제 백작이 이르길,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많은 편의를 보아주셨다고 하더군요.”

“…….”

“먼 길 무사하게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전하의 덕입니다. 먼저 찾아뵈어 인사를….”

“가까이.”

어둠 속에서 매끄러운 손이 불거졌다. 멈칫한 페기가 천천히 그의 발치로 다가갔다.

“…먼저 찾아뵈어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만약 휴식에 방해가 되었다면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편히 쉬십시오.”

짧게 묵례한 페기가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의 손이 뻗어 와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페기의 고개가 뒤로 확 꺾이며,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우뚝 선 그가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너….”

살짝 찡그린 듯하던 금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안드레아가 보냈구나.”

페기는 눈을 부릅떴다. 느닷없이 코앞으로 닥친 그의 얼굴에 모든 생각이 멈추었다.

그는 그대로였다.

검은 머리에 짙은 피부, 깊게 자리한 호박색 눈과 반듯한 이목구비 모두 기억 속 그대로였다. 풍성한 속눈썹 사이로 상냥하게 접히는 눈과 감미롭게 깔리는 목소리에서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지난날의 향수로 빨려 들어갔다.

어쩌면 너는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겠구나.

페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조금이나마 그에게 닿고자 했으나, 예고도 없이 얼굴 위로 독주가 쏟아졌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예후르는 즐겁게 웃었다.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것이 웬일일까. 감히 내 눈을 속이려 들었을 린 없을 테고.”

페기는 눈도 못 뜨고 숨넘어갈 듯 기침만 했다. 마지막 술 한 방울까지 털어 낸 예후르가 빈 술잔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독한 술기운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느긋하게 뇌까렸다.

“사람이 아닌 것을 뒤집어쓴 꼴이 참으로 추잡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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