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328)

예후르의 말에 막시모가 비웃음을 흘렸다.

“예, 맞습니다. 여태 탐보프와 라발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하던 치들이 그들뿐이었으니 제멋대로 부리는 횡포에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니까요.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돈으로 그들 모두의 환심을 사기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야.”

조합 회의까진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예후르가 말했다.

“조합의 투표권은 있되 경영이 어려운 소규모 상단들을 찾아봐. 은밀히 접촉해서 차명으로 상단의 소유권을 구입하도록 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지금도 과반에 가까운 찬성표는 확보한 상태입니다.”

“과반을 넘겨야 하니까. 뭐든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겠지.”

예후르는 피곤한 얼굴로 요앙 오귀스트의 밀서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막시모가 조금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번 조합 회의에서 꼭 가입이 승인되어야 하는 거군요.”

“…….”

“시작하시는 겁니까?”

“슬슬 지루해지던 참이었으니까.”

예후르가 우아하게 망토 자락을 뒤로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달래도 등껍질 속에 숨은 거북이가 나오질 않으니, 이젠 바다로 내던질 차례겠지.”

식당으로 내려가던 예후르는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고함 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곧 이마가 찢어진 하녀가 상처에 수건을 덧댄 채 황급히 그를 스쳐 지나갔다.

식당 앞에선 다른 하녀들이 모여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상처 하나씩 매단 그들은 계단에서 내려오는 예후르를 보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후르는 고자질하듯 몰려오는 하녀들을 부드럽게 물리곤 홀로 식당에 들었다.

식당 꼴은 빈말로도 정상이 아니었다. 반파된 유리창에선 찬 바람이 들어오고, 외풍을 막기 위해 걸어 둔 태피스트리는 조각조각 찢어져 넝마가 되었다. 폭풍이라도 불어닥친 듯 죄 쓸려 내려간 식기들은 산산조각 부서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예후르는 말없이 식탁으로 다가갔다. 식탁에는 마치 전설 속 성검처럼 날카로운 검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참 대단하십니다.”

식탁 다리에 기대어 앉아 망토로 제 온몸을 감싸 안은 이리니 페임하른이 움찔 떨었다. 저벅저벅 그 앞으로 걸어온 예후르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참 초라하기도 하시고.”

군인처럼 짧게 깎인 검은 머리가 살짝 들렸다. 상처 입은 검은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사도께서도 날 조롱하러 오셨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공작에겐 조롱거리마저 없습니다. 저 호화로운 궁정에서 살고 있을 빌헬미나 3세조차 공작의 이런 모습을 봤다면 감히 동정을 베풀겠지요.”

“감히 내 앞에서 그년의 이름을…!”

이리니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웅크렸던 자세를 폈다. 단순히 굽었던 등을 펴고 팔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야성적인 위압감이 번졌다.

그러나 예후르는 무심히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페임하른 공작. 그대는 패배잡니다. 수족처럼 따르던 부하들은 모두 목이 잘렸고, 충성스러운 남편은 그대를 대신하여 칼을 맞고 죽었지요. 전쟁이 끝난 지 어언 십수 년인데 오직 그대만이 그 시절에 머물고 있군요.”

“난 패배자가 아니야! 난 모든 전투에서 이겼어! 마지막에 빌헬미나가 사특한 수를 쓰지만 않았더라도…!”

“그리 말한들 누가 그대의 말에 귀 기울이겠습니까? 지금 그대가 고작 이 모양인데.”

예후르가 고개 돌린 그대로 힐끗 눈만 내려 그녀를 보았다. 이리니는 대답도 못 하고 주먹 쥔 손만 부들부들 떨었다. 검은 눈 한가득 증오심이 타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망이 큽니다.”

그는 의자를 끌고 와 다리를 꼬고 앉았다.

“황위 계승 전쟁 당시 교황 성하께서 빌헬미나 3세의 편을 들자, 하늘의 저주나 받으라며 온갖 모독적인 발언을 퍼부었다지요. 그럼에도 3년 전, 아들을 앗아 가려는 빌헬미나를 막아 달라며 성하께 탄원서를 올렸고요.”

“…….”

“난 그것을 보며 그대가 변한 줄 알았습니다. 말 못 할 시련을 겪으며 구부러질 줄 아는 나무가 되었다고 여겼지요. 하지만 그대를 마주할수록 기대는 꺾이고 실망만 늘어납니다. 저 알프도르트 방벽에서 야만족들을 몰아내던 맹장이 아무 죄 없는 하녀들에게 패악이나 부리는 꼴이라니요.”

이리니가 이를 악물며 습관적으로 팔뚝을 긁어내렸다. 그녀의 몸에는 저런 자해의 흔적이 무수했다. 예후르는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오스터캄프의 백성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대에게서 돌아섰습니다. 그대는 동부인들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겠다며 궐기했지만 결국은 패배했으니까. 그대의 패배로 고통받은 사람은 그대뿐만이 아닙니다.”

그녀의 패배로 북방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 오랜 기근에 시달렸다. 황제의 총독들이 동부를 핍박하고, 황제를 등에 업은 본토의 상인들은 동부를 유린했다.

“그동안, 그대는 어디 있었습니까?”

고통에 겨운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동부의 수호자 페임하른 공작을 부르짖었다. 그녀가 다시 일어서길 바랐다.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을 물리쳤듯,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자신들을 보호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땅의 사람들은 이미 저항할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새로 부임한 총독이 보다 온건적인 정책을 펼치자 껌벅 그 수에 넘어갔어요. 동부에서 나는 재화가 궁핍한 본토의 빈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여전한데, 자신들이 받는 불평등한 처사에 반기를 드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성인이 되면 홑몸으로 숲에 들어가 곰을 죽이고 돌아와야 했던 옛 노르투르 전사들의 정신은 사장된 지 오래였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열패감에 찌들었고, 전쟁의 기억이 흐릿한 젊은이들은 반백 년 전의 왕국을 구닥다리로만 여겼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용맹한 전사의 왕국에 열패감을 드리운 자.

“누가 동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북방을 호령하던 옛 노르투그 신화에 종막을 가져온 자.

“바로 그대가 아닙니까.”

팔뚝을 긁어내리던 손톱이 빠득 부러졌다. 그럼에도 이리니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양 피 터지는 손톱을 돌보지 않았다. 핏발 선 눈이 제 발치만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예후르가 지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내가 알던 동부의 맹장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요.”

이리니는 그저 미친 듯이 입술만 달싹였다. 홀로 무언가 중얼중얼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가만히 그 꼴을 지켜보던 예후르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갈 준비 하십시오.”

이리니의 고개가 뒤늦게 퍼뜩 들렸다. 그녀는 멀어지는 예후르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물었다.

“…나가다니, 어딜.”

“인근 숲에 맹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총독이 보낸 기사들도 죄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무고한 백성이 다치기 전에 누군가는 그 맹수를 죽여야지요.”

이리니는 흐리멍덩한 눈을 껌벅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문가에 달한 예후르가 반쯤 몸을 틀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페임하른 공작.”

“…….”

“더 이상 날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차가운 눈길이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리니는 터트릴 듯 주먹을 쥐었다.

***

“사냥?”

페기가 의아하게 물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마샤가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당장 출발하신대요. 아가씨 짐도 제가 얼른 챙길게요.”

“나도?”

“그럼요. 아가씨도 모셔 오라던데요.”

페기는 누가 그리 명했는지 묻지 않았다. 지금 이 성에서 그녀를 신경 쓸 만한 위인은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지친 듯이 눈을 내리깔자, 마샤가 슬금슬금 다가와 그녀의 붕대를 갈아 주었다.

“몸이 안 좋으셔서 사냥에 참가하긴 힘드실 것 같다고 말씀드릴까요?”

“…됐어. 페임하른 공작이 어떤 사람인진 봐 둬야 하니까.”

“정말이지, 속상해 죽겠어요. 이게 다 성에서 양초 하나 내주지 않은 탓이잖아요.”

마샤는 그녀의 모든 상처가 계단에서 구른 탓이라고만 알았다. 제일 깊은 이마의 상처를 제하면 그게 맞긴 했다.

“아까 하녀들에게 조금 주워 들었는데, 성주께서 많이 가난하시대요. 하녀들 봉급도 몇 달 치 밀려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셨다고 하네요.”

마샤는 바삐 짐을 챙기며 종알종알 보고 들은 것들을 읊어 나갔다. 고립된 페기에겐 그 모두가 중요한 정보였다.

“성주께선 십수 년간 이 성에서 나가신 적이 거의 없대요. 금족령이 내려진 것도 맞는데, 본인 스스로 거기에 반할 의지가 없으셨나 봐요. 그러다 딱 한 번, 성 밖으로 나가신 적이 있는데 바로 아드님이 본토로 끌려가셨을 때래요.”

페임하른 공작의 아들이라면 3년 전 빌헬미나 3세의 양자가 된 탐보프의 황태자였다.

“검까지 들고 나가셔선 황제의 기사들과 거의 싸움이 붙을 뻔했대요. 그런데 아드님께서 공작 각하의 검을 막으셨다네요. 아마도 어머니가 황제의 분노를 살까 두려우셨던 거겠죠?”

마샤가 종알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페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 십수 년, 페임하른 공작이 유일하게 성 밖으로 나갔을 때는 아들을 빼앗길 때뿐이었다. 그런데 금족령을 무시하면서까지 이토록 갑자기 사냥에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불길한 느낌은 바깥의 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가시질 않았다.

페기는 미리 준비된 말에 올라타 불안한 모습으로 고삐를 쥐었다. 그녀는 본디 승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오른손이 불편하며, 왼쪽 손목은 어제 계단에서 구른 여파로 약간 접질린 상태였다.

“안 되겠어요, 아가씨. 마차를 준비해 달라 이를게요.”

마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속속들이 모이는 일행을 훑어본 페기는 회의적이었다. 금방 돌아올 생각인지, 죄다 단출하게 짐을 꾸린 기사들뿐이었다.

“마차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렴. 내가 사냥에 참가할 것도 아닌데, 큰일이라도 있겠니.”

페기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마샤를 안심시켰다.

갑자기 현관이 어수선해졌다. 떼를 지어 몰려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자가 있었다.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여자였다. 검은 머리는 다른 기사들처럼 짧게 깎았으며, 사나운 눈매 아래로 음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오른쪽 입꼬리부터 시작해 왼쪽 눈 밑까지 그어진 흉측한 흉터도 인상적이었으나, 무엇보다도 금으로 끼워 맞춘 코가 가장 눈에 띄었다.

페기는 그 코를 보자마자 그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저 사람이 바로 동부의 맹장, 이리니 페임하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