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328)

페기의 표정이 점점 황망함으로 젖어 들었다.

“절 믿지 못하시지 않나요? 어째서 제게.”

“나는 믿음으로 사람을 가르지 않는다.”

예후르가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만약 내 보좌로 역할을 다한다면 반지의 행방에 대해 알려 주지.”

“…….”

“어때. 수락하겠나?”

페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반지의 행방을 알 수만 있다면 그녀는 불구덩이에라도 기꺼이 뛰어들 것이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어째서 저를 곁에 두시려는 거죠?”

“네 말대로 나는 무료하고, 정체도 알 수 없는 널 곁에 두고 지켜볼 만큼 지루하니까.”

“…….”

“사술로 모습을 속이고 날 그토록 잘 아는 것처럼 구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좋아. 수작에 놀아나 주마. 그 보답으로 너는 더 간교하고 철저하게 네 본심을 숨기면 된다.”

예후르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래야 훗날 네 가면을 벗기는 재미가 더 크지 않겠느냐.”

페기는 떨리는 주먹을 꽉 틀어쥐며 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털끝 하나 내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페기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예후르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좀체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르릉거리며 애교를 피우는 용의 턱을 간질이며 그는 오늘 아침 막시모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가짜 아가씨는 언제까지 두고 보실 작정입니까?”

“여기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마가 공작 전하께서 보내신 세작이 아닙니까? 계획이 어그러질까 두렵습니다.”

“고작 잔챙이 하나로 무너질 계획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 그 가면을 벗기나, 내년에 벗기나 내겐 큰 차이가 없구나.”

막시모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정체를 밝혀내신 다음엔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당연히….”

예후르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죽여야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바람 빠진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저 가짜는 그를 능멸하고 죽은 자를 모욕하고 있었다. 죽음으로도 다 갚지 못할 죄였다.

하지만 그는 무료하고 또 무료했다. 저 뻔한 수작에 스스로 걸려 넘어질 만큼 지루하고, 안드레아와 피아제 백작이 맺은 의문의 결탁을 웃어넘길 정도로 따분했다. 그는 당분간 저 가짜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흐뭇하게 구경하기만 하면 되었다.

다행히 그는 이제 상상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흥미가 돋는구나, 코리.”

그의 부드러운 손길에 용 코른헤르트가 가르릉 울었다. 예후르는 미소를 살짝 머금으며 눈을 감았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따사로운 볕이 쏟아져 내려왔다.

***

“…여기도 안 보여….”

“…대체 어딜 가신….”

투덜거리는 말소리를 끝으로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얇은 벽에 귀를 갖다 댄 채 숨죽이고 있던 차라가 참았던 숨을 푹 내쉬며 기지개를 켰다.

성궁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한 서재에서도 가장 외진 구석에 박혀 있는 이 비밀의 방은 하인들도 잘 모르는 곳이었다. 툭하면 수업이다 뭐다 하며 그를 찾는 하인들을 피하기엔 제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페기가 알려 준 곳이었지.

예전이었으면 갑자기 울적해졌을 생각을 잘도 하며 차라는 초콜릿을 한 움큼 입에 집어넣었다. 남의 눈을 피해 숨기 안성맞춤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방을 자주 찾지 않았었다. 죽은 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기는 살아났고, 이제는 페기를 떠올려도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차라는 나지막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읽던 책 위로 납작 엎드렸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즐거운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때, 누군가 급히 서재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움찔한 차라가 다시 슬금슬금 벽에 붙었다.

“…그게 아니라, 아야! 왜 때리세요!”

“목소리! 죽이라고! 내가 말했어요! 안 했어요!”

소리 죽인 질책과 함께 찰싹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차라는 입술을 네모꼴로 벌리며 어깨를 떨었다. 소리만 들어도 무진장 아플 것 같다.

“아, 그만, 그만! 모드벤나 수도사님 목소리가 더 크거든요!”

모드벤나? 잘 아는 이름에 차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벽에 찰싹 귀를 붙였다.

“내 마음이 얼마나 놀라고 갑갑하면 이러겠습니까! 갑자기 찾아와선 축하 사절단의 명단을 보여 달라니요!”

“아, 보여 주기 싫으면 보여 주지 마세요! 어차피 전하께서 시키신 건 사절단 중에서 믿을 만한 사람 하나 뽑아서 이 편지 전달하란 거였으니까!”

“도대체 전하께선 무슨 짓을 저지르시려는 건데요! 그걸 알아야 제가 돕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평생 탐보프라면 내키지 않아 하시던 분이 갑자기 탐보프의 황태자에게 편지는 무슨 편지요!”

“아, 이건 전하의 편지가 아니라 페임하른 공작 전… 각하의 편지이지 말입니다.”

“페임하른 공작…? 맙소사….”

모드벤나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차라는 그쯤에서 달칵,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축하 사절단이라는 거 혹시….”

“꺄악!”

“억!”

갑자기 등 뒤에서 사람이 튀어나오자 모드벤나가 까무러칠 듯 기겁했다. 똑같이 비명을 질렀던 니체타가 눈을 끔벅거리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어라? 도련님?”

“나 알아요?”

“당연히 알죠! 와, 근데 많이 자라셨지 말입니다. 옛날엔 제 가슴팍에나 겨우 오셨었는데.”

니체타가 실실 웃었다. 차라는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나저나 그 축하 사절단이라는 거, 탐보프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 간다는 그거 맞죠?”

“예? 예…. 서, 설마 다 들으셨습니까?”

모드벤나의 낯이 허옇게 질렸다. 차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뭐. 둘 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더라고요. 그나저나 모드벤나 수도사는 아직도 예후르를 따르는 거였어요? 계속 언급하던 그 전하가 예후르를 말하는 거 맞죠?”

“저는 사사로운 개인이 아닌 교회를 따릅니다!”

모드벤나가 발끈했다. 그러나 니체타와 차라의 시선이 빤히 이어지자, 공연히 눈길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도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저마저 성궁에 없으면 교국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며….”

“흐음, 그래요?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차라는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러곤 흘끗 니체타를 보았다.

“예후르는 잘 지내요?”

“전하야 언제나 잘 지내시죠.”

“음… 최근에 그쪽으로 어떤 여자가 가지 않았어요? 왜, 적갈색 머리에 우울해 보이는 여자.”

기억을 더듬듯 니체타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저도 급하게 나온 거라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 상단에 웬 젊은 아가씨가 끼어 있단 말은 들었습니다. 도련님께서 아는 분입니까?”

“뭐, 그냥 대충….”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

니체타가 짓궂게 물었다. 어리둥절하던 차라의 표정이 서서히 썩어 들어갔다.

“징그럽게, 어떻게 걜 나랑 엮어요!”

징그러울 정도인가. 니체타는 조금 머쓱해졌다. 씩씩거리며 성질을 부리던 차라가 니체타의 손에 들린 편지를 발견하곤 손가락질했다.

“그러니까 예후르가 사절단한테 그 편지를 맡기라고 시켰단 거죠?”

“네? 아, 그렇지 말입니다. 저야 사절단이 누군지도 모르고, 누굴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니 전하께서도 모드벤나 수도사님을 의지하라 하셨는데 저렇게 꽉 막히셔선….”

“니체타!”

차라는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페기는 예후르에게 갔다. 잘은 모르겠지만 예후르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고, 그게 잘 풀려서 페기에게 나쁠 일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후르의 꿍꿍이가 성공한다면 저 꼴 보기 싫은 원탁 추기경들에게 한 방 크게 먹일 수 있었다.

“내가 전해 줄게요.”

차라는 니체타의 손에서 편지를 쏙 채어 갔다. 니체타가 어리둥절하게 있는 사이, 사색이 된 모드벤나가 외쳤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련님께서 전하신다니요!”

“축하 사절단인지 뭔지, 나도 하겠다고요. 황태자의 생일 연회면 미에투넨에서 열리겠죠? 가는 데만 한 달이 걸리려나?”

“안 됩니다! 절대 아니 됩니다! 이미 사절단도 정해지고 준비도 다 끝났는데, 이렇게 갑자기 참여하시겠다니요! 게다가 거기가 어디라고 가십니까!”

“아이, 모드벤나 수도사는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요? 미에투넨이잖아요. 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대도시.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 나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련히들 알아서 잘 지켜 주겠죠.”

차라는 묘하게 들뜬 얼굴로 이왕 가는 김에 지그룬 유적을 보고 와야겠다며 종알거렸다. 아연함에 말을 잇지 못하던 모드벤나가 가까스로 생각을 정리하여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렇게 쉽게 결정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가 탐보프의 수도까지 가서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의미를 띠게 됩니다.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걔가 허락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난 레오한테 갈 건데요? 오랜만에 재롱 좀 떨어 주면 문제없다고요.”

“납치를 당하셨던 게 고작 한 달 전입니다! 외출 금지당한 거 잊으셨나요?!”

“아, 그러니까 간다는 거 아녜요! 이 답답한 곳에 언제까지 처박혀 있으라고!”

차라가 왈칵 신경질을 부렸다. 이렇게 훌륭한 여행의 명분을 또 언제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자 모드벤나도 갑갑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도련님,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그 편지로 무슨 일을 꾸미시려는 건지는 아셔야…!”

그때, 니체타가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모드벤나의 말문이 막히자, 차라가 의심스럽단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예후르가 꾸미고 있는 일이 뭔데요?”

“아휴, 그분께선 늘 저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꾸미시죠. 아시잖아요.”

니체타의 능청에 차라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는 예후르를 좋아한다기엔 미묘하지만 확실히 신뢰는 했다. 그는 범인의 경지를 아득하게 넘어선 사람이었으니까.

“어쨌든 난 이만 레오한테 가 볼게요. 내가 오랜만에 애교 좀 떤다고 좋아서 뒤로 넘어가는 건 아닌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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