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328)

음악이 절정으로 치달으며 맞잡은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페기는 빙그르르 우아하게 돌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연분홍색 치맛자락이 만개한 장미처럼 풍성하게 펼쳐졌다.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며 페기는 똑바로 그의 눈을 직시했다.

“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페기는 고집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떨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춤곡이 끝났다.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팽팽한 시선의 양끝에는 불쾌감과 오기가 각각 매달려 있었다.

먼저 손을 물린 것은 예후르였다. 페기도 뒤따라 그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는데, 문득 그의 손길이 뺨에 와 닿았다.

“지금껏 내 기분을 잘 맞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입술에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이니 이번만은 봐주지.”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살짝 문지르고 지나갔다. 페기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천천히 등을 돌렸다. 손끝의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

가모브 총독이 와인 잔을 들고 왔다. 소파에 앉아 손만 뻗어 와인 잔을 받은 예후르가 잔을 빙글빙글 돌려 보더니 중얼거렸다.

“레페산 와인이군요.”

“예. 오르골리오 상단 덕분에 좋은 와인을 저렴하게 입수할 수 있었지요.”

가모브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르골리오 상단이 이렇게 평화롭고 빠르게 정착한 것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몇 달 전 전하께서 갑자기 성문 앞에 나타나셨을 때, 속된 말로 정신이 날아가는 줄만 알았으니까요.”

벌써 고릿적처럼 느껴지는 과거를 떠올리며 가모브는 쓰게 웃었다.

어느 날 보좌관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달려와 나가 보셔야겠다는 말을 외쳤을 때, 그는 드디어 페임하른 공작이 일을 저질렀구나 싶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지면에서 넘실거리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열댓 마리의 용들이 도시 위에서 날개를 퍼드덕거렸고, 그 중심에는 태양을 등진 이가 있었다.

순백의 용에 올라타, 등진 햇빛을 후광처럼 내뿜던 엘피도 공작.

“전 그날 하늘의 천사께서 오스터캄프를 벌하러 내려오신 줄만 알았습니다.”

총독은 식은땀을 닦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후르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결백하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 땅에 발 디딘 사람치고 어찌 허물없는 자가 있겠습니까. 다만 하늘의 높은 분들이 보시기에 마땅치 않으실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지요.”

양손 깍지를 끼며 잠시 침묵하던 가모브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그때, 전하께선 이 땅의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 하셨지요.”

“…….”

“저는 그 말씀을 믿었기에 전하와 용 기병대의 입성을 허가한 것입니다. 예, 물론 허가를 드릴 수밖에 없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전하의 위명을 아는 백성들이 모조리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전하를 찬양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전하를 쫓아내려는 시늉이라도 했었다간 사방에서 돌이 날아왔을 테니까요.”

게다가 오스터캄프에는 용에 대적할 만한 신식 화기(火器)도 없었다. 용과 맞서 싸우며 용에 대적할 방법을 체득한 건 반백 년 전 성전을 이끌었던 교국과 라발이었다.

“그러니 확답을 주십시오.”

“…….”

“진실로 이 땅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로 오신 것이 맞습니까?”

예후르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자비로운 미소에 총독은 얹힌 것처럼 속이 갑갑해졌다.

“어찌 페임하른 공작저에 머무르십니까? 왜 하필 그곳이냔 말입니다. 오, 페임하른 공작이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다고는 하지 마십시오. 그자는 죄인입니다. 아무리 사도시라 해도 대역죄를 사하실 수는 없습니다.”

“방금 총독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 땅에 발 디딘 사람치고 어찌 허물없는 자가 있겠느냐.”

“그러나 죄의 경중은 있습니다! 그자는 반란을 일으켰던 중죄인입니다! 그자에게 의탁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전하의 역심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불경한 자들의 속삭임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땅의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내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후르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래서 페임하른 공작을 찾았지요. 그녀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자이기에.”

총독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예후르는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이리니 페임하른은 천성적으로 공격적인 사람입니다. 한순간에 몰락하여 모든 것을 잃은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해와 살해를 반복해 왔지요. 총독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십수 년, 페임하른 공작저에서 칼 맞아 죽은 시신이 끊임없이 반출되었던 것을.”

그녀는 이름난 명장.

시뻘겋게 분노하여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칼을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녀의 광증에 휘말린 수많은 하녀와 하인과 기사들의 피가 성 곳곳을 붉게 물들였다.

“사도로서 나는 그 참상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페임하른 공작의 죄업을 멈추고 무의미한 그녀의 희생양을 더는 늘리지 않아야 했지요.”

“그럼 수없이 보내었던 저의 서신에는 어찌 답하지 않으셨습니까?”

“페임하른 공작의 신뢰를 사야 했으니까요. 그녀가 총독을 어찌 여길지는 빤하지 않습니까?”

“하여 공작의 신뢰는 사셨습니까?”

가시 돋친 물음에 예후르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총독은 눈썹 부근을 문지르며 주저하듯 내키지 않는 말을 꺼냈다.

“몇 주 전 페임하른 공작의 기사단이 단체 행동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선두에는 전하와 페임하른 공작으로 추정되는 자가 있었다지요.”

“…….”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시려는 것입니까? 이리니 페임하른은 그대로 성에 갇혀 죽은 듯이 살다가 죽어야 하는 잡니다. 그자가 기력을 회복하여 역심을 품을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 아닙니까?”

“공연한 염려입니다. 내가 그렇게 두지도 않을 것이고요.”

예후르가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분명 나는 사도로서 이 땅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엘피도 공작으로서의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

“총독도 알 테죠. 나의 새로운 누이가 작금 성궁에서 어떠한 폭정을 펼치고 있는지.”

가모브 총독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현재 교국의 최고 실세는 알비야 공작. 그녀는 엘피도 공작이 자리를 비우고 교황이 물러난 성궁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의 폭정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 아이를 단죄해야 한다면 내 손으로 하는 것이 같은 사도로서 마지막으로 베풀 수 있는 자비겠지요.”

“옳은 말씀이십니다. 알비야 공작과 퀴테리아 추기경의 횡포로 우리 탐보프의 추기경들께서도 심려가 크시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도 고민이 깊으시지요.”

가모브 총독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데 알비야 공작을 몰아내시려면 성궁으로 돌아가셔야지, 이곳은 왜….”

“알비야 공작의 뒷배는 위스누아입니다. 위스누아의 부유함은 바로 이 오스터캄프를 비롯한 동부에서 활약하는 상단들에게서 비롯되지요.”

“아, 그래서 오르골리오 상단의 확장을 위해 그토록 투자하셨던 것이군요!”

라발과 탐보프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하는 오르골리오 상단은 마찬가지로 중개 무역을 통해 떼돈을 버는 위스누아의 상단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오르골리오 상단의 입지가 늘어날수록 위스누아 상단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페임하른 공작에 대해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이미 신심으로 감화되었습니다. 지난날 저질렀던 자신의 과오와 실책을 반성하며 참회의 시간을 갖고 있지요.”

“맙소사….”

“설마 내가 그녀의 분노를 자극하여 헛된 야심을 불러일으켰겠습니까. 나는 동부에 희망의 씨앗을 가져온 것이지, 피바람을 몰고 온 것이 아닙니다.”

가모브 총독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제가 감히 성스러운 불의 사도께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신실한 신도로서 품어선 안 되는 의심을….”

“괜찮습니다. 충분히 의심스러울 상황이었으니.”

고개 들라는 듯 예후르가 자비롭게 손짓했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는 그대가 내 저의를 잘 설명하십시오. 그분이 번뇌로 잠 못 이루는 것은 나 또한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말씀 받들겠습니다.”

“또한 세도파 양에게도요.”

뜬금없는 이름에 총독이 눈만 끔벅였다. 예후르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한낱 공작 부인보단 교황의 반려가 더욱 값지지 않겠습니까?”

“설마….”

“그녀는 오랫동안 내게 헌신해 왔지요. 보답받아 마땅합니다. 내 어린 누이를 몰아내고 나면 그녀와 혼인할 것을 약속한다 전하십시오.”

총독의 얼굴이 온통 감격으로 물들었다.

“예, 물론이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예후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간의 오해는 어느 정도 풀린 듯하군요. 이만 연회장으로 돌아갑시다. 연회의 주인공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아니 될 일이지요.”

그 말에 가모브 총독이 헐레벌떡 일어나 앞장섰다. 손수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혹 저희 탐보프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의 연락을 기쁘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총독이 들떠서 하는 말에 예후르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연회장으로 들어가려는데, 가모브 총독이 그의 팔을 잡으며 어느 한 군데를 가리켰다.

“오, 피오트르 가벨이 나왔군요. 마침 전하께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요새 떠오르는 음악계의 신성입니다. 반년 전에는 황궁 무도회에 초청되어 황제 폐하께 직접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지요. 몸이 좋지 않아 요양차 고향에 내려와 있던 것을 제가 특별히 초청했습니다. 탐보프의 연주를 이렇듯 전하께 들려 드릴 수 있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총독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는 막 연주를 시작하려는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감흥 없는 눈으로 그곳을 응시하던 예후르가 문득, 싸하게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연주를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연분홍빛 치맛자락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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