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르가 가모브 총독과 떠나자, 페기는 계획대로 오스터캄프의 주교와 접촉했다.
“안녕하세요, 주교님.”
손톱을 물어뜯으며 예후르가 떠난 자리만 초조하게 응시하던 주교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누, 누구…. 아, 엘피도 공작 전하와 함께 오신 분이군요.”
“아델라이데 세르페제입니다. 편하게 불러 주세요.”
“예, 세르페제 양…. 전하께선 언제 돌아오시는지 아나요?”
“전하께선 총독 각하와 속 깊이 하실 이야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혹 전하께 따로 전해야 할 말씀이 있다면 제게 알려 주시지요.”
주교는 안절부절못하며 눈만 바삐 굴렸다.
“아, 아니요. 그저 전하께 감사를 표하고자… 전하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면 아가씨도 알 거 아니에요? 전하께서 요 근래 도시의 빈민들을 돌보라며 저희 교구에 많은 헌금을 베풀고 계시다는걸.”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선 굶어 죽어 가는 이들을 돌보고자 이곳으로 오셨으니까요.”
교회를 통한 헌금뿐만이 아니었다. 오르골리오 상단에서도 자체적인 빈민 구제 활동에 아주 열심이었다. 상단이 내건 용의 깃발에서 누구나 몇 달 전 갑작스레 들이닥친 엘피도 공작을 떠올릴 수 있었다.
“덕분에 저희 교구도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 전까진 사실… 수도원에 맡겨진 고아들을 굶기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동부는 탐보프에서 제일가는 곡창 지대요, 오스터캄프는 그런 동부에서 가장 으뜸가는 교구인데 어찌 빈곤에 시달렸단 말씀을 하시나요?”
“가모브 총독이 부임한 이후로 총독부의 헌금이 많이 줄었어요. 앞으로 빈민들의 구제 활동은 총독부가 일임할 거라나 뭐라나…. 사람들은 이번 총독이 유하다고들 떠들지만, 내가 보기엔 글쎄요. 빈민 구제 활동까지 독점하려는 사람을 어찌 유하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신랄하게 비꼬던 주교가 흘끗 페기를 곁눈질했다.
“사소한 불만이에요. 아가씨가 엘피도 공작 전하의 가신이라기에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교구의 어려운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군요. 성도에서 매해 각 교구로 지원금을 내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스터캄프 정도의 대교구라면 지원금으로 받는 금액만 해도 상당할 텐데, 그 자금은 다 어찌 되었는지요?”
“받은 게 있어야 쓰든 말든 하겠죠. 그마저 쥐꼬리만 한 금액, 매해 줄기만 하니 원.”
“쥐꼬리만 하다니요?”
“엘피도 공작 전하의 밑에서 아가씨도 보고 들은 것이 있을 거 아니에요. 원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위스누아의 퀴테리아 추기경이 여길 신경이나 쓰겠어요? 당연히 탐보프의 추기경인 아나클레토와 솔란지아 추기경이 우리 교구의 지원금을 확보해 주어야 하는데, 자기들 교구와 본토의 교구들 챙기기에만 급급하잖아요.”
신명 나게 쏘아붙이던 주교가 멈칫하며 손끝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러곤 불안한 기색으로 눈을 굴렸다.
“전하께는 적당히 돌려서 말해 줘요.”
“알겠습니다. 지금은 달리 불편한 점이 없으신가요?”
“지금은 훨씬 낫죠. 전하께서 재정적으로 지원도 해 주시고, 무엇보다 전하께서 이렇게 오스터캄프에 머무시는 것만으로도 우리 성직자들에겐 얼마나 힘이 되는데요.”
강퍅하게 날이 섰던 주교의 눈빛이 녹녹하게 풀렸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쩌다 오스터캄프의 주교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평생 이 빈곤한 땅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여겼어요. 당연히 성도에 계실 사도들과는 연이 닿지 못할 줄 알았죠. 나는 정말, 전하께서 용을 타고 이 도시에 나타나신 그날을 영영 잊을 수 없을 거예요.”
페기는 아련한 감회에 젖은 주교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그녀는 이제 예후르에게 절대적으로 목매는 사람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주교님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내게요…?”
어리둥절하던 주교가 조금씩 불안한 얼굴을 했다.
“혹 전하께서 내게 물으라 하신 건가요?”
“제가 감히 대답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군요.”
페기가 가만히 웃자, 주교는 불편한 기색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페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근자에 빈민굴에서 본인을 은자 파르나라 지칭하는 사람이….”
“오, 그녀는 아니에요!”
갑자기 주교의 언성이 높아졌다. 주변의 사람들이 힐끔거리기 시작하자, 페기는 주교의 팔을 잡고 연회장 구석으로 들어갔다.
주교가 붉어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미, 미안합니다. 파르나 수도사가 언급될 줄은 몰라서,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괜찮습니다. 그보다 파르나 ‘수도사’라면 아직 교회에서 파문이 내려진 건 아닌 모양이죠?”
주교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페기는 넌지시 그녀를 벽으로 몰아붙이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지금 제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전하마저 속이려 드시다간 주교님도 책임을 면치 못하실 거예요.”
“저, 전하를 속이다니요.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난 잘못한 게 없어요. 전하께서도 파르나 수도사를 직접 만나 보시면 생각을 달리 하실 겁니다.”
“전하께선 파르나 수도사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계십니다. 다만 파르나 수도사께서 공공연히 사도들을 욕되게 하셨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계시지요.”
주교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광대가 불거진 마른 뺨이 창백하게 질렸다.
“파, 파르나 수도사도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 아닐….”
“주교님. 전하께선 본인을 비난하는 자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너무 염려하지 말고 제게 솔직히 털어놓으세요.”
페기가 부러 다정하게 말하자, 주교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곤 더듬더듬 눈가를 짚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파르나는 나와 수도원 동기입니다. 워낙 대쪽 같은 성격이라 크게 출세하진 못했지만, 지금껏 내가 봤던 성직자들 중 가장 성직자다운 사람이에요. 이건 내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
“다만 십여 년 전, 중앙 교회와 마찰을 빚은 적이 있어요.”
페임하른 공작의 반란이 진압된 직후였다. 당시 동부는 총독의 강압적인 정책과 높은 세금에 허덕이고 있었다. 길가에는 본토로 이송되는 곡식들의 수레가 끝없이 늘어졌으나, 길옆에는 굶어 죽은 빈민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여 갔다.
보다 못한 파르나가 중앙 교회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단순한 요구였어요. 동부에서 이토록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으니 부디 중앙 교회에서 이 땅을 돌보아 달라는 것이었죠. 수백 통의 청원서를 써 부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파르나는 결국 성도로 떠나고 말았지요.”
주교가 처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파르나가 성도에서 정확히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무성한 소문만이 수도사들의 입을 타고 전해졌을 뿐이다.
“듣기론 교황 성하를 먼발치에서 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파르나의 목소리는 성하께 닿지 못했지요. 파르나 수도사는 성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깁니다. 정치적으로 빌헬미나 3세를 지지했으니, 또한 정치적인 이유로 동부의 참담함을 외면하고 계신다고요.”
“그때부터 사도를 적대하기 시작한 건가요?”
“적대라니요, 말이 너무 지나치네요. 파르나 수도사는 그저 크게 상처 입었을 뿐이에요. 그녀의 신앙심은 여전합니다. 빈민굴에서 지내며 교리를 설파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잖아요? 누가 자청해서 그런 일을 하겠어요?”
주교가 머뭇거리며 페기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니 아가씨가 전하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부디 파르나 수도사를 선처해 달라고요. 만약 교회에서 파문된다면 파르나는 당장 오늘 밤이라도 빈민굴의 건달들에게 죽임당할지도 몰라요. 성직자라는 방패가 지금의 파르나에겐 반드시 필요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페기의 대답에 주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겨우 한시름 놓은 주교가 기력이 다 빠진 모습으로 잠시 쉬고 오겠노라 말했다.
혼자 남은 페기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그늘진 벽에 기대어 섰다.
연회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춤추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푹신한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카드 게임을 하거나 수다를 떠는 이들이 늘어났다. 오스터캄프에서 거주하는 본토 이주민이라 해 봤자 소수일 테니, 저들끼린 가족처럼 어울리는 사이리라.
당연히 저곳에는 그녀가 낄 만한 자리가 없었다. 페기는 무료한 표정으로 총독과 예후르가 나간 복도를 응시했다. 벌써 시간이 꽤나 흘렀는데도 그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피곤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춤곡과 사람들의 웃음소리에서 이만 해방되고 싶었다.
그때,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페기는 의아한 기색으로 벽에서 등을 뗐다. 소파에 잠겨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페기는 뻐근한 발목을 한 번 매만지곤 조용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모여든 곳은 연주자들의 무대였다. 새로운 연주라도 시작되려는지 하인들이 무대를 재정비하고 있었다. 페기는 부러 멀찍이 떨어진 뒤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유명인이라도 온 듯했다.
“오, 피오트르!”
어느 귀부인이 무대 위 누군가에게 열렬히 꽃을 내밀었다. 인파 사이로 불쑥 튀어 오른 사내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며 꽃을 가져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페기는 무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신경은 오로지 불편한 구두에 잠겨 있었다.
페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조심스레 발목을 돌려 보았다. 아무래도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앉을 자리를 찾아 나서려던 그녀는, 문득 무대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내가 연극배우처럼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높이 뻗은 사람들의 팔이 갈대처럼 흔들거렸다. 페기의 시야가 그 사이를 빠르게 헤집고 들어갔다. 팔과 팔 사이 좁은 틈을 벌리고 들어가 마침내 ‘그것’에 닿았다.
검고 매끄럽고 거대한 ‘그것’.
사내가 ‘그것’에 앉았다.
타이를 매만지고 손목을 한 번 쓰다듬은 길쭉한 손가락이 ‘그것’의 뚜껑을 열었다. 하얀 건반 위로 나비처럼 손끝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