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문 너머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준비되었습니다.”
“…금방 가지.”
예후르는 페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넌지시 대꾸했다. 하녀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한 눈빛이 그녀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따라와.”
페기는 식은땀이 묻어나는 손바닥을 남몰래 치맛자락에 문질렀다.
잊고 있었다.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차라 뿐만이 아니란 사실을.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3년 전 그날의 일을 반복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예후르를 뒤따라 간 방 안에선 도무지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황망하다 못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뒷걸음질했다.
“들어와.”
어두운 방 안에서 촛대를 들고 선 예후르가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페기는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온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핏기가 싹 가신 피부 위로 식은땀이 번졌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방 안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들어와, 아델라이데.”
부드럽게 손을 뻗으며 권하는 목소리가 상냥하다. 차라리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와도 저보다 무섭진 않으리라.
페기는 꾸역꾸역 올라오는 울음기를 누르고 또 눌렀다. 그녀는 족쇄에 잡힌 짐승이었다. 그의 말을 거역할 방도가 없었다.
제자리만 스치고 더듬던 발길이 더디게 앞으로 나아갔다. 고산보다 힘겹게 문턱을 넘고, 끝없는 황야보다 고단하게 걸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진창에서 부서지던 손을 떠올렸다. 부서진 손등 위로 지난날 닿았던 쇠망치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촛대를 피아노 위에 올려놓은 예후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무도회에서 보니 피아노를 좋아하는 것 같더군.”
입 안에서 이가 잘게 맞부딪혔다.
“하녀들을 시켜 수소문해 보니 다행히 성내에 피아노가 하나 남아 있다질 않아. 조율은 모두 끝마쳤으니 마음껏 연주하도록 해.”
그는 마치 대단한 선행이라도 베풀 듯 말했다. 페기는 덜덜 떨리는 이를 꽉 깨물었다. 말을 해야 했다. 목구멍에 들어앉은 바위를 치우고, 말을 해야만 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연주를 못….”
“사양하지 않아도 돼.”
“아니요. 못 합니다. 할 수 없어요. 저는, 배운 적이 없….”
두서없이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던 페기가 별안간 얼음처럼 굳었다. 촛불이 붉게 드리워진 그의 얼굴이 마치 밀랍 같았다. 온기 없는 표정이 도통 사람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몸의 떨림이 극심해졌다. 그에게 반쯤 안겨선 목을 물린 초식 동물처럼 옴짝달싹도 못 했다. 그러자 서릿발 같은 얼굴로 물끄러미 그녀를 들여다보던 예후르가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날 즐겁게 해 줘야지.”
서늘한 입술의 감촉에 어깨를 움츠렸던 페기가 돌처럼 굳었다.
들킨 것이다. 무도회에서 연주자를 끔찍하게 질투하던 모습을 들킨 것이다. 어쩌면 내 손이 틀어졌다는 걸 눈치 챘는지도 몰라.
예후르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피아노 앞에 앉히고, 직접 피아노 뚜껑을 열어 주었다. 검고 하얀 건반의 세계가 펼쳐졌다.
이제 그의 손길은 완전히 그녀를 떠나갔다. 그녀 앞에는 오직 피아노뿐이었다. 늘 비좁고 가깝게만 느껴졌던 건반이 숨 막히도록 망막했다.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얼 어떻게 해야….
불현듯 페기가 눈을 깜박였다.
그는 진정 내 연주를 듣고 싶은 것인가.
아니다. 그는 그저 내가 피아노 앞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엉망진창인 연주에 스스로 절망하고 꺾이는 모습이 그토록 보고 싶나. 그런 것을 즐기나.
본시오는 왜 내 손을 부수었나.
죽일 거면 그냥 죽이지, 왜 하필 손인가. 왜 죽이기도 전에 부수었나. 왜 내 손이 부서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게 했나.
그야, 내가 손을 목숨처럼 아낀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내 숨이 음악이고, 내 삶이 연주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악취미가 따로 없다.
남의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미치광이들이다. 그런 미치광이들에게 잘못 얽혀 한 번은 처참하게 죽고, 지금은 죽음을 매일 목전에 두고 산다. 내 삶은 왜 이러나. 왜 이렇게 휘둘리고 휘둘리기만 해서 이 지경이 되나.
페기는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씹었다.
지긋지긋했다. 이젠 보란 듯이 벗어나고 싶었다.
쿵!
벼락처럼 연주가 시작되었다. 왼손이 칼날처럼 건반 위를 뛰놀았다. 음을 베고 자르고 찢었다. 거칠고 사납게. 천사를 향해 경배하는 거장의 찬송곡이 폭풍처럼 날뛰었다.
멍청한 사람들. 어째서 그런 허울만 좋은 연주에 환호했을까.
단순히 악보를 나열하는 것은 훌륭한 연주가 아니다. 악보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검은 음표를 오색찬란하게 일구고, 반듯한 보표를 굴곡지게 만들어야 했다. 악보에 그려진 수많은 표지들을 살아 숨 쉬게 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페기는 날카롭게 건반을 응시했다. 3년을 썩혔던 왼손은 건재하다. 이제 오른손이 등장할 차례였다. 낮고 둔중한 왼손의 선율에 높고 예리한 오른손의 선율이 섞이며 하나의 곡조를 이루어야 했다. 그래서 오른손을 높이 쳐들며 건반을 짚었는데, 짚으려고 했는데.
우뚝 멈춘 선율. 이상한 곳으로 비껴 난 오른손.
페기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왼손이 악보를 되짚어 지나간 구간을 연주한다. 곧, 이제, 다시 오른손이.
또.
다시 연주했다. 이번에도 오른손에서 불협화음이 났다.
악보를 수없이 거슬러 올라갔다. 다시 연주에 심취했다.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흠 없던 춤처럼, 어쩌면 나의 오른손도.
또 실패였다.
페기는 거칠게 어깨를 들썩였다. 날숨에 절로 열기가 섞였다. 고작 두 마디를 못 갔다. 미련한 오른손이 홀로 무뎌졌다. 나머지는 다 멀쩡한데 혼자서만 망가져 버렸다. 이래선 연주가 안 된다. 이럴 수가 있나. 말도 안 된다.
왼손을 내리고 오른손만 다시 움직여 보았지만 형편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끔찍한 불협화음이었다. 음정도, 박자도, 음량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개가 설쳐도 이보단 나으리라.
분했다. 너무 분해서, 건반 위로 떨어지는 눈물방울조차 증오스러웠다.
나는 여기에 내 생을 걸었다. 사랑을 이루진 못해도 음악을 벗 삼아 살아가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삶이 되리라 여겼다. 바란 것은 그토록 소박했다. 이 손으로 달리 무언가를 이루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조차 너희들에겐 미덥지 않았나.
내가 조금이라도 행복한 꼴을 볼 수가 없어서?
미, 레, 미 플랫, 파, 레, 도, 파 샤프, 미 플랫, 미, 미, 레, 도.
미친 듯이 화가 났다. 터져 나오는 분노를 잠재울 길이 없어 계속해 건반을 두들겼다. 갈겼다. 같은 음도 제대로 누르지 못하는 오른손이 끔찍했다. 차라리 잘라 내고 싶었다. 이딴 게 내 손이라는 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모두에겐 각자의 소명이 있단다. 너의 소명은 다른 이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지.”
아니, 내 소명은 그날에 들었던 천사의 음성을 재현하는 것.
나는 음악으로 해낼 것이었다. 그날에 내려왔던 천사의 장엄한 목소리를 만인에게 들려줄 것이었다. 내가 온몸으로 느꼈던 경이로움을 온 세상에 퍼트릴 것이었다.
보다 못한 예후르가 그녀의 오른손을 채 갔다.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고 옴짝달싹도 못 하게 했다. 페기는 손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소용없었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났다. 제 손도 맘대로 못하는 처지가 수틀리다 못해 끔찍스러웠다.
“놔!”
성한 왼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때렸다.
“이거 놓으라고! 놔!”
주먹으로 그를 때리고 밀치고 마구 두들겼다. 체중을 실어 잡힌 손을 당겨 보기도 하고, 몸부림치듯 그의 다리를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밀려나지도, 손을 놓아주지도 않았다.
“다 죽여 버릴 거야!”
힘 다 빠진 손이 죽어라 그의 옷깃을 잡아 쥐었다. 시뻘게진 눈으로 악을 썼다.
“다 죽여 버릴 거라고! 나 이렇게 만든 놈들, 다 똑같이 만들어 버릴 거야!”
또다시 흰 주먹이 퍽퍽, 그의 어깨로 내리꽂혔다. 사지를 뒤흔들며 발악했다. 끝내는 성질을 못 이기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곧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억울해서.
너무 억울해서.
“왜 나야, 왜….”
페기는 엉엉 울며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찧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왜 하필 그날에 죽어야 했던 것이 나인지, 왜 하필 망가져야 했던 것이 내 손인지, 왜 하필 나를 괴롭히는 것이 너인지, 왜 하필, 왜, 왜, 왜.
눈앞에서 꿈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아무 일도 안 했는데 벌겋게 부푸는 오른손을 볼 때마다 매일 밤 가슴이 사정없이 찢겼다. 그럼에도 끔찍하게 몸을 파고드는 고통과 분노를 엮어 복수의 양분으로 삼고자 했다. 이제 와 바라는 것은 그 한 가지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받고 싶진 않았다.
내 손이 구제할 길 없는 불구가 되었단 사실을.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내 음악은 오래전에 끝이 났고, 내 소명은 되살아나지 못했음을.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론, 도저히.
그녀는 이제 숨이 모자란 사람처럼 헐떡였다. 울 힘도 없어 간헐적으로 흐느끼기만 했다. 왼손은 간신히 그의 어깨에 걸치고, 오른손은 여전히 잡힌 채로. 힘없이 그의 가슴팍에 고개만 기댄 채 어깨만 간간이 들썩였다.
그때였다.
미동 없던 그의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포옹이라기엔 민망했고, 위로라기엔 무성의했다.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두었을 뿐이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페기가 그제야 실낱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히 재미난 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어깨를 거칠게 들썩이며 웃었다. 그러곤 불쑥 고개를 꺾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거 알아요?”
“…….”
“난 당신도 죽이고 싶어.”
난 이 꼴인데 넌 왜 이렇게 멀쩡해?
그렇게 멀쩡한 얼굴로 천사의 상을 베고 성궁을 어지럽혔니? 그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남의 고통을 즐기니? 정말로 나 때문에 미친 것이 맞니? 나를 기억이나 하니?
못 다 한 말이 꾸역꾸역 목구멍 너머로 넘어갔다. 대신 허망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흐느끼는 듯한 웃음소리만 흘러나왔다. 그녀는 온몸으로 떨 듯이 웃으며 잡힌 오른손을 당겼다. 그의 손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제발 즐거우셨길 바라요. 위대한 분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