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라 고양이를 붙잡으려 했던 차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양이가 뛰어내린 발코니의 커튼이 분홍색이었다.
그는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곤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냈다. 그리고 나뭇가지 위에 낮게 포복한 채로 하나씩 발코니를 향해 던졌다. 몇 개는 빗나가고 몇 개는 명중했다. 하녀가 나오면 튄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튀지?
벌컥, 발코니 창문이 열렸다.
숨는다고 숨겨지지도 않건만 차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긴 치맛자락을 늘어트린 누군가가 자박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러곤 흰 손으로 고양이를 안아 들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넌 누구지?”
매섭게 날이 선 연옥색 눈동자. 익숙한 빛깔에 잠시 넋을 놓았던 차라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너 혹시 하녀니?”
“감히 내게 묻는 것이냐?”
“아니구나.”
말하는 꼴을 보니 하녀는 아니네. 차라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요슈아에게도 저 여자애가 누군지 듣지 못했다.
차라는 문득 의심스러운 눈으로 여자애를 훑어보았다. 나이대는 저와 비슷해 보이는데, 뺨이 움푹 파였을 정도로 깡말랐고 머리는 사내애처럼 짧게 깎여 있었다. 그런데 차림을 보면 또 귀한 아가씨처럼 보인다.
“왜 대답하지 않아? 넌 누구지?”
“황태자가 보냈어.”
갑자기 여자애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그녀는 고양이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차라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차라! 아뎃사의 차라!”
내가 누군지 밝히랬다. 그럼 된다고.
요술처럼 여자애의 발길이 돌아왔다. 찬바람 쌩쌩 불던 얼굴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며.
“그 이름 설마….”
“…….”
“심연의 천사 이슬라 님의 현신이세요?”
위엄을 꾸며 내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여린 소녀의 목소리만이 남았다. 차라는 조금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애가 급히 고양이를 안아 들며 비켜섰다.
“어서 이리로 들어오세요!”
“으, 으응? 거기로 어떻게 들어가?”
“요슈아는 뛰어서 들어오던걸요?”
“여길… 나뭇가지 위를 뛰어서…?”
차라는 멍하니 눈앞의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제 다리처럼 가늘었다. 저기서 뛰었다간 미끄러지거나 나뭇가지가 부서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네!”
여자애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라면 할 수 있다는 무한한 신뢰감이 뿜어져 나왔다.
차라는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페기에게 줄 목걸이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품속에 넣어 둔 페임하른 공작의 친서가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냥 눈 딱 감고 뛰자. 설마 죽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나뭇가지 위에 두 발을 얹은 차라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박차고 올랐다. 무섭게 흔들거리는 나뭇가지를 디디며 발코니 안으로 뛰어내렸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투성이 발코니를 신나게 구른 차라가 발코니 바닥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 살았다….”
짜증 나도록 파란 하늘 아래 고양이를 안아 든 여자애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차라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 어어….”
차라는 삐걱거리는 몸을 애써 일으켰다.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아마 온몸에 멍이 들었을 것이다.
“저, 사도님. 손 한 번만 잡아 봐도 될까요?”
여자애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차라는 얼결에 손을 내주었다. 양손을 파들파들 떨며 그의 손을 붙잡은 여자애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차라는 당혹스러운 나머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그의 손을 붙들고 있던 여자애가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였다.
“절 보러 와 주신 건가요?”
“어, 어? 난 그냥 요슈아가 가 보라고 해서 온 건데….”
한없이 처연하던 여자애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차라는 은근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게 보내는 선물이랬어. 무슨 뜻인지 아니?”
“…곧 제 생일이에요.”
여자애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는 여전히 발코니에 주저앉은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넌 누구야?”
발코니의 창문을 열던 여자애가 흘끗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 이름은 알리오나 발데마르. 탐보프의 황녀예요.”
“…….”
“언제까지 황녀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녀는 버석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차라도 주춤거리며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알리오나.”
“…….”
“어…. 알리오나 황녀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사도시잖아요.”
의자를 끌어다 앉은 알리오나가 조용히 웃었다. 슬그머니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차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녀면 지금 폐하의 따님인 거지?”
빌헬미나 3세의 자식들에 대해선 일전에 들은 바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일찍이 죽고 막내만 살아남았는데, 그마저 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했다.
알리오나는 왼손을 꽉 움켜쥐었다.
“네. 제가 폐하의 유일한 자식이에요.”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병 때문에 그래?”
“아뇨. 전염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양한다고 낫는 것도 아니에요. 전부 폐하의 뜻이죠.”
“폐하께서 왜?”
유일하게 살아남은 친자식이다. 심지어 몸도 좋지 않은데 이런 외진 별궁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게 할 리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알리오나가 슬프게 웃었다. 차라는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괜히 캐물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벌떡 일어난 알리오나가 그의 발치에 공손히 무릎 꿇었다. 당황한 차라가 일어서려 하자, 알리오나가 그의 손을 붙들며 자리에 도로 앉혔다.
“왜 이래!”
“늘 기도했어요. 하늘의 천사께서 절 보듬어 주시기를.”
“…….”
“사도께서도 제 기도를 들어 오신 것이지요? 그렇죠?”
알리오나가 물기 어린 눈으로 매달려 왔다. 차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사도는 지상에서 활약하는 천사의 대리.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우러러 따른다는 것을 안다. 하늘의 천사를 섬기듯 저를 섬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매일을 내전에서 은거하던 그는 그저 고위 성직자들의 예의 차린 공경만 받아 왔을 뿐이다.
어떤 이들에겐 자신이 생의 가장 간절한 소원임을 알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
“제게 영원한 축복을 내려주세요.”
알리오나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차라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금씩 떨리는 손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렸다.
먼 옛날, 여덟 천사께서 지상을 굽어보며 이르시길.
“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비탄에 찬 흐느낌과 고통에 겨운 신음을 들었다. 네 목 놓아 우는 소리와 통탄하는 흐느낌을 들었다. 강물이 말라붙어 핏물이 대신 흐르고, 불길에 타들어 간 땅으로 유황 냄새가 오르니 네 어찌 그런 곳에서 하늘을 우러러 살 수 있겠느냐.
그러니 가련한 아이야.
내 너의 눈물을 닦아 슬픔을 지우고, 너의 울음을 지워 비극을 그치겠다. 너는 나의 날개를 섬겼으니 나는 이 날개로 너를 보듬어 주리라. 나의 아이를 보내어 너를 거두게 하리라.
이것이 너에게 내리는 축복이요, 나의 자비니라.
입술이 다물렸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손이 거두어졌다. 알리오나가 흘린 눈물이 그의 발치에서 웅덩이를 이루었다. 그녀는 그의 바짓단을 붙들며 연거푸 고개를 조아렸다. 흐느낌이 그치지 않았다.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차라가 끝내 피하듯 눈을 감았다. 세상의 숭배가 그에겐 아직 버거웠다.
“또 와 주실 수 있나요?”
차마 나무를 타고 내려갈 순 없어서 이불을 덕지덕지 엮어 내려가려던 순간이었다. 알리오나는 퉁퉁 부르튼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 얼굴에 대고 차마 거절을 말할 순 없었다.
“응. 다시 올게.”
그 말에 알리오나의 얼굴이 밝게 피었다. 차라는 쓴웃음을 삼키며 엮은 이불을 잡고 발코니 아래로 내려갔다. 알리오나가 발코니 위에서 힘껏 손을 흔들었다. 곧게 펴진 네 손가락 사이로, 휑하니 빈 약지의 자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새어 들었다.
차라는 조용히 별궁을 빠져나오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대부분이 알리오나와 빌헬미나 3세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토록 우아하고 상냥하던 황제가 하나 남은 딸을 저리 버려둔다는 것이 잘 납득이 되질 않았다.
“내 부탁은 잘 완수한 모양이네.”
불쑥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던 차라는 갑자기 제 눈앞으로 폴짝 뛰어내리는 인영을 보곤 기겁하여 자빠졌다.
“으악!”
“놀랐어? 미안.”
요슈아가 하나도 미안하지 않단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난 차라가 눈매를 뾰족하게 세우며 더러워진 옷을 털어 냈다.
“그래서? 걔는 뭐래?”
“…축복을 내려 달래서 기도문을 읊어 주고 왔어.”
“흐음. 그럴 줄 알았지.”
요슈아가 심드렁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차라가 얼른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왜 날 여기로 보낸 거야?”
“걔도 곧 생일이거든. 불신한 나보단 신실한 걔가 사도를 더 반기겠지 싶어서.”
그렇다기엔 너나 알리오나나 그다지 사이 좋아 보이진 않던데. 차라는 하고픈 말을 꿀꺽 삼켰으나, 그 속을 다 짐작한다는 듯 요슈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난 걔가 짜증 나고 싫은데 불쌍하기도 해. 너도 그 꼴을 봤으니 알잖아.”
“…알리오나를 왜 그렇게 싫어해?”
“걘 나만 보면 입이 쓰레기장으로 변하거든.”
바위 위로 뛰어오른 요슈아가 편하게 다리를 꼬며 걸터앉았다. 팔다리가 길고 날쌔니 몸놀림이 꼭 날짐승처럼 가벼웠다.
“걔는 내가 자기의 모든 걸 빼앗아 갔다고 생각해. 황제의 애정도, 황태자의 자리도, 눈부신 미래도.”
하나는 황제의 친자. 그러나 다가오는 것은 예정된 이른 죽음뿐.
다른 하나는 황제의 5촌 조카. 예정된 영광과 무한한 가능성이 안배된 미래.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 걔는 일찌감치 탈락했어. 난 그저 빈자리를 차지한 것뿐인데 말이야.”
요슈아가 왼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걔 약지 하나 없는 거 봤지? 걘 황제가 될 수 없어. 우리 엄마가 그런 것처럼.”
신체에 결격이 있는 자는 제좌에 오를 수 없다. 북방의 오래된 관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