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328)

“…빌헬미나 3세의 살아남은 자식이 병으로 신체의 일부를 잃었다는 건 옛날에 들어서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갇혀 지내는 건 말이 안 돼. 오래 살지 못하면 여생이나마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오, 아무것도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이네.”

두 발로 바위를 딛고 일어선 요슈아가 양팔을 수평으로 뻗으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했다.

“일단 알리오나는 겨우 그런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애가 아니고, 황제도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 황제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지?”

차라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요슈아가 흘끗 시선을 던지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궁금하면 황제의 남편이 어떻게 되었나 한번 찾아봐.”

“어떻게 됐는데?”

“내가 알려 주면 재미없지. 정 찾기 어려우면 알리오나한테 물어보든가.”

난 뺨 몇 대 맞고 들었는데, 넌 사도니까 공손히 알려 줄지도 모르겠다. 중얼거린 요슈아가 깡충 바위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차라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목걸이였다.

“그래서? 넌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뭐?”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아무렴 고귀하신 사도께서 설마 이런 싸구려 목걸이 하나 때문에 내 무례한 부탁을 들어줬을까 봐?”

요슈아가 목걸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행여라도 또 빼앗길까, 차라는 얼른 목걸이를 가져갔다.

“자. 넌 이거나 읽어.”

차라는 품에서 얼른 편지를 꺼내 던져 주었다. 비단으로 싸맨 편지를 뒤집어 보던 요슈아가 의아하게 물었다.

“이게 뭔데?”

“페임하른 공작의 친서야.”

“우리 엄마?”

요슈아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네가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알아?”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가셨다. 어쩐지 칼날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차라는 저도 모르게 말을 조금 더듬거렸다.

“내, 내가 페임하른 공작을 어떻게 알아. 그냥 너한테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거지.”

“누구 부탁인데?”

“…예후르. 엘피도 공작.”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요슈아가 비단을 풀어 헤치고 편지를 꺼냈다. 그는 조용히, 오랫동안 편지를 읽었다. 아닌 척 호기심 어린 눈으로 힐끔거리던 차라가 은근하게 물었다.

“무슨 내용이야?”

“네가 가져왔잖아.”

“그런데?”

“안 읽어 봤어?”

“남의 편지를 내가 왜 읽어.”

차라가 이상하다는 듯 대꾸했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요슈아가 피식, 짧게 웃으며 편지를 접었다.

“집으로 돌아오래.”

“뭐?”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던 차라가 황급히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집이면, 오스터캄프? 넌 황태자잖아. 가도 되는 거야?”

“안 되지.”

“…어떻게 할 거야?”

차라가 조마조마하게 물었다. 요슈아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음, 사실 내가 엄마랑 대판 싸우고 나온 거거든. 미리 말하는데 그건 분명히 엄마 잘못이었어. 그래서 어디든 거기보단 낫겠지 싶었는데….”

“아니야?”

차라의 조급한 물음에도 요슈아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겨울에도 푸른 잎을 간직한 침엽수들이 빽빽하게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밝은 햇살, 새 소리조차 저문 고요한 정적.

오래지 않아 그의 시선이 차라에게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순진해 빠진 얼굴을 응시하던 요슈아가 발도했다.

칼날이 차라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멀리서 단검이 날아왔다. 쇠붙이끼리 맞부딪히며 공명하는 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요슈아는 순식간에 제 손을 떠나 날아간 검을 보며 헛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근위대를 문책해야 하는 건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던 차라는 불현듯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질겁했다.

“용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게 뒤덮인 사내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얼굴마저 복면으로 감싸 순종적인 눈매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누구세요?”

차라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물러나자, 복면을 쓴 사내가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요슈아가 대신 느긋하게 말했다.

“엘피도 공작의 수하겠지.”

“예후르는 지금 동부에 있는데?”

“이보세요, 순진하신 도련님. 엘피도 공작이 널 보호하겠다고 네 뒤에 사람을 붙인 거잖아. 설마 그 철두철미한 사람이 너한테 고작 이 편지 한 장만 들려 보냈을까?”

요슈아가 편지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차라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너 예후르를 알아?”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지나가듯 중얼거린 요슈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를 응시했다.

“어떻게 숨어들었는진 묻지 않으마. 내 생일이랍시고 온갖 곳에서들 몰려오고 있으니까. 황궁 방어선에 구멍 숭숭 뚫린 건 내가 제일 잘 알거든.”

“…….”

“그러니 넌 다른 걸 대답해 줘야겠어. 엘피도 공작은 우리 엄마를 데리고 도대체 무얼 하려는 작정이지?”

복면을 쓴 사내는 말없이 고개만 조아렸다. 요슈아는 혀로 한쪽 볼을 부풀리며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좋아. 그럼 번호로 말해 볼래? 일 번, 동부에서 반란을 꾀한다. 이 번, 동부에서 군사를 일으킨다. 삼 번, 동부에서 전쟁을 벌인다.”

“반란? 전쟁?”

차라의 표정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요슈아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피식 웃었다.

“허울만 남은 우리 엄마를 데리고 꾀할 만한 일은 그 짓밖에 없지.”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야.”

“동부에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어.”

요슈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매해 풍년인데도 굶어 죽는 사람이 줄어들질 않아. 동부는 들고일어날 명분이 충분해. 어차피 뒈질 거, 반항이라도 한번 해 보고 죽는 게 낫지 않겠어?”

“…….”

“하지만 엘피도 공작은 아니잖아. 갑자기 웬 연고도 없는 동부?”

요슈아는 복면을 쓴 사내 앞에 쭈그려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교활하신 사도께서 우리 엄마를 쥐고 흔든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네.”

“…….”

고개를 숙인 사내는 미동조차 없었다. 요슈아가 김빠진 얼굴로 차라를 돌아보았다.

“네가 보기엔 어때?”

“어?”

“넌 엘피도 공작을 잘 알 거 아냐.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일을 꾸몄을 것 같아?”

차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눈을 떨구었다.

“예후르는 사도야. 전쟁을 방조할 사람이 아니라고.”

“정상적인 사도가 천사의 석상을 베고 추기경단에게 칼을 들이미나? 안 그래도 그 사람, 미쳤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나도 알아!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차라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확실히 예후르는 페기의 죽음 이후로 무언가 달라졌다. 1년 전 성촉절에 벌어진 소동으로 그가 미쳤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으나, 그럼에도 차라는 여전히 그를 신뢰했다. 레오폴트가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후계자 자리를 공석으로 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리라.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걸.

“그는 특별해.”

단순히 조각 같은 외모와 무결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레오폴트와 페기에게서 느껴지던 것. 비올라에게서 아주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던 그것. 그러나 예후르에게선 깊이를 알 수 없던 ‘그것.’

“나도, 성하도 예후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솔직히 같은 사도라고 하기도 거북스러워. 그는 나와도 다르고 성하와도 다르니까. 애당초….”

불현듯 차라의 눈빛이 탁하게 흐려졌다.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살짝 벌어진 입술도, 불거진 목울대도 미동이 없다. 모두가 이상함을 느낄 찰나에 기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거스르지 마.”

요슈아가 움찔했다. 선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차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

“뭐, 뭐야? 설마 나 졸았어?”

차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요슈아는 살짝 입술을 뗐다. 놀란 듯한 눈빛이 차라에게 오래 머물더니, 이윽고 푸른 눈에 흥미가 돋아났다.

“좋아. 돌아가지, 뭐.”

무슨 소리냐는 듯 차라가 눈살을 찌푸리자, 요슈아는 바위에 걸터앉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돌아가겠다고, 동부로.”

차라는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응.”

“넌 황태자잖아. 그런데 네가 동부로 가 버리면….”

“황태자도 관둘 건데?”

차라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요슈아는 마치 내일 일과를 알려 주듯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난 말이야, 고향에 딱히 애착도 없었고 성에 갇혀 살기도 끔찍했고 우리 엄마도 지긋지긋했어. 그런데 막상 여기서도 별다를 게 없네? 알리오나를 좀 봐. 우리 엄마도 괴물 같긴 했지만 적어도 난 걔보단 나았어.”

그는 턱을 괸 채 눈을 위로 굴렸다.

“그런데 마침 엄마가 화해의 손길도 내밀었고… 물론 그다지 미덥진 않지만 한 번쯤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대단하다, 너.”

차라는 그 이상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살면서 저렇게 즉흥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요슈아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또 궁금하잖아. 사도가 말하는 ‘특별한 사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지. 무엇 때문에 우리 엄마를 이용하는 건진 몰라도 대단한 목적이 있지 않겠어?”

“…그냥 사견일 뿐이야. 난 예후르랑 별로 친하지도 않고….”

급격히 자신감이 떨어진 차라가 우물쭈물했다. 입술을 삐죽거린 요슈아가 남몰래 슬슬 물러나려던 복면 쓴 사내를 칼날처럼 돌아보았다.

“그러니 내가 무사히 황궁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너희가 잘 협조하렴.”

“…….”

“몇 명 더 있지, 이 근처에?”

요슈아가 빙글빙글 손가락을 돌렸다. 잠시 갈등하던 사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요슈아는 픽 웃으며 산뜻하게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탈출 계획부터 세우자고.”

***

“결혼식은 언제 하시는 건가요?”

회랑에 모인 여인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중심에는 꿀처럼 달콤한 금발을 늘어트린 세도파가 있었다. 오랜만에 밝아진 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바도비체 후작은 호위 기사의 속삭임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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