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 모두 부디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무릎을 굽혀 인사한 세도파가 종종거리며 멀어졌다. 차라가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자, 요슈아가 실실거리며 붙었다.
“저런 여자가 취향이야?”
“…뭐라는 거야.”
“왜? 예쁘잖아. 난 좋던데.”
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슈아는 예쁜 여자면 다 좋아했다.
“저 아가씨는 자기가 곧 엘피도 공작이랑 결혼할 거라고 믿던데. 공작이 그렇게 약속했대.”
“퍽이나.”
“나쁜 남자네, 네 형님은.”
요슈아가 야유하듯 우우, 소리를 냈다. 차라는 지나치게 찰싹 달라붙은 요슈아를 밀어냈다. 마침 하인들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오고 있었다.
“어, 그거 조심해서 들어!”
“저게 뭐야?”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간 요슈아가 불쑥 상자에 손을 댔다. 차라가 기겁하며 그의 팔을 붙들었다.
“만지면 안 돼!”
“왜?”
“그게….”
빠르게 눈을 굴리던 차라가 고개를 숙여 보라며 손짓했다. 요슈아가 순순히 고개를 숙여 주자,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떠날 때 필요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보면 안 돼.”
“뭔데, 대체?”
“아, 그런 게 있다니까!”
차라가 찰싹! 요슈아의 어깨를 때렸다. 그리고 사방에 들으란 듯이 외쳤다.
“저 안엔 유적지 비석의 본을 뜰 재료들이 있어. 유리처럼 연약해서 조금이라도 충격받으면 깨질지도 몰라. 만약 금이라도 가면 황제 폐하께 직접 청구할 테니까 그렇게들 알아!”
그 말에 상자를 옮기던 하인들이 식겁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차라는 상자가 짐마차에 아주 조심스럽게 옮겨지는 것을 끝까지 보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유적지로 향하는 동안, 차라는 틈만 나면 창문 너머로 짐마차를 힐끔거렸다. 반대쪽 창문으로 젊은 기사와 시시덕거리던 요슈아가 한마디 할 정도였다.
“아주 눈을 못 떼네. 무슨 꿀단지를 숨겨 놨길래 그래?”
“내, 내가 언제.”
차라는 시치미를 떼며 얼른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하던 요슈아가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기사와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차라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차는 반나절을 달려 유적지에 도착했다. 비좁은 마차 안에서 도무지 가만있질 못하던 요슈아는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폴짝 뛰어내렸다.
놀란 기사들이 그를 둘러싸는 것을 확인한 차라가 얼른 반대편 문으로 내려 짐마차로 달려갔다. 그리고 몰래 안으로 들어가 속삭였다.
“알리오나, 알리오나.”
다급한 속삭임에 상자가 조금 열렸다.
“…사도님?”
“응, 나야. 몸은 어때? 마부한테 얌전히 몰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괜찮았어?”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실낱같은 목소리가 곧 바스러질 듯 연약했다. 멈칫한 차라가 상자 안으로 손을 살짝 집어넣었다. 따스한 온기가 머뭇거리며 그의 손끝을 감싸 쥐었다.
“…조금 더 참아야 해. 견딜 수 있겠어?”
“네.”
그때, 멀리서 요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도님? 사도님, 어디 있어?”
“잠깐만!”
차라는 황급히 품에서 수통을 꺼내 상자 속으로 넣어 주었다. 그리고 좀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마차 밖으로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요슈아와 기사들이 그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거기서 뭐 했어?”
“그냥….”
차라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요슈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아무것도 안 가져가도 돼?”
차라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와 어깨동무를 한 요슈아가 비가 많이 내리면 좋겠다는 둥, 그럼 오늘은 여기서 야영할 수 있지 않겠냐는 둥 헛소리를 지껄였다.
유적지는 인적 없는 황량한 들판에 있었다. 얼어붙은 초목 위로 쓸쓸히 널린 주춧돌만이 오래전 번영했던 옛 궁성의 흔적이다. 버려진 성터의 적막함은 마치 이 땅이 흘려보낸 시간의 무게와도 같았다.
지그룬 유적.
이는 기록된 역사로 남지 못한 신성 시대의 몇 안 되는 자취였다. 천 년 전 교황 야누비타 1세가 뱀을 봉인하기 훨씬 이전, 눈부신 권능을 등에 인 여덟 사도와 그들의 숙적인 뱀이 치열하게 이 땅의 패권을 걸고 다투었던 시절.
이름 모를 위대한 자들의 시대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그 시절의 흔적은 대륙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지그룬 유적은 비석이 남아 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
“생각보다 별거 없네? 난 네가 어떻게 여길 안 가 볼 수 있냐며 하도 난리를 치길래 뭐 신기한 거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온몸으로 지루함을 풀풀 풍기던 요슈아가 별안간 주춧돌 근처에 쪼그려 앉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고대의 보물이라도 찾는 듯했다.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흘겨보며 차라는 성터 안으로 쭉 들어갔다.
세월에 깎여 반들반들해진 주춧돌, 말라붙은 들풀, 야생 동물들의 발자국 사이로 오래된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라는 그 앞에 멈춰서 울퉁불퉁한 비석의 표면을 살며시 매만졌다. 쫄랑쫄랑 그를 뒤따라온 요슈아가 물었다.
“웬 바위?”
“…신성 시대의 비석이야.”
“어, 그러네! 뭔가 새겨져 있어!”
요슈아가 신기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비석을 연신 쓸어 보았다.
“여기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아?”
차라는 세월의 풍파를 맞아 닳을 대로 닳은 비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래전 명맥이 끊긴 사어(死語)지만, 여러 대에 걸친 성직자들의 헌신으로 해석본이 완성되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너의 피가 강을 메우고, 너의 날개가 들을 뒤덮었다. 사악한 뱀의 무리가 …을 탐냈으나 빛이 내려와 그들을 몰아냈다.
사라진 너를 찾을 길이 없다. 오래도록 타올랐던 너의 불이 꺼짐에 산천이 울고 초목이 읍하였… 너는 어디에 있느냐. 빛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가지 마라. 불이 없는 곳으로…
…오늘 마르퀴오스가 내게 와 말하길, 너의 목을 벤 자를 찾았다 하였다. 그는 뱀이로되, 뱀이 아닌 자로… 빛은 그를 척결하라 명하였으나 나는… 석연치 않다. 나는 그자를 안다. 너도 그자를 안다. 너라면 무어라 말했을…
네가 없는 곳에서 나는 쓸쓸하다. 너는 어디를 헤매고 있느냐. 내 곡소리를 들어 부디 …로 돌아와 다오. 나의 벗이여. 소중한 나의 벗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