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328)

순식간에 몸에서 떨어진 총독의 머리가 데구루루 바닥을 굴렀다. 맥없이 쓰러지는 몸뚱이 위로 검이 유려한 호선을 그리며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니는 굴러간 총독의 머리로 다가가 무성의하게 툭툭 찼다. 꾸역꾸역 삼키려던 구겨진 서류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리니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서류를 집어 들었다.

“각하! 총독부를 완전히 점거했습니다!”

헐레벌떡 달려 들어온 기사가 반듯하게 경례하며 외쳤다. 서류를 들여다보던 이리니가 말없이 기사에게 서류를 넘겼다. 의아하게 서류를 받아 읽던 기사의 낯빛이 금세 환해졌다.

“간자들의 명단이로군요. 썩을 놈들. 싹 다 잡아 오겠습니다!”

기사가 다시 경례하고 나갔다.

남은 것은 목 잘린 시체 하나와 가슴이 뚫린 시체 하나, 살인자 하나.

이리니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총독부 앞뜰로 끌려 나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는 변절자들. 그 뒤로 불길과 연기가 치솟는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피곤하군.”

오스터캄프 탈환전은 예상보다 싱겁게 끝났다.

막시모와 함께 마지막으로 도착한 용병대가 성문에서 소요를 일으키자, 미리 도착하여 페임하른 공작저에 숨어 있던 용병들이 짜 맞춘 듯 날뛰기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성문으로 달려가던 치안대 일부는 양방향에서 몰아치는 공격에 속절없이 패배했고, 용병대는 기세를 몰아 총독부를 점거했다.

성문과 총독부를 손에 넣자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폐쇄된 도시 안에서 남은 치안대는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한군데로 밀집하지 못한 치안대는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전투 끝에 전의를 상실했다. 대강 정리가 끝났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었다.

새벽같이 도시를 떠났던 용 기병대는 인근의 봉화대를 모두 돌고 반나절 만에 돌아왔다. 봉화를 담당하는 봉수군을 모두 죽였으니, 근 시일 내에 본토로 소식이 전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토랄, 세미라크, 안단프는 이미 행정관을 효수하고 치안대를 진압했습니다. 각하를 따르겠다 선언했다더군요.”

인근 도시들에선 십여 년 전 항복하여 감금되었던 동부의 유력 귀족들이 시민들을 이끌었다. 최근 이리니 페임하른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연락을 재개한 옛 가신들이었다.

“남은 시간은 최소 한 달입니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를 위해 미에투넨으로 떠난 바도비체 후작이 아무리 일찍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정도 시간은 걸릴 테지요. 실질적인 통수권자인 후작이 부재하는 이상,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의 병력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섣불리 나섰다가 거기까지 무너진다면 그 파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까요.”

그동안 이리니 페임하른은 동부 전체를 손에 넣으면 되었다. 다행히 동부에 주둔하는 치안대의 핵심 병력은 모두 오스터캄프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스터캄프를 손에 넣었으니 다른 도시들은 알아서 그녀의 밑으로 숙이고 들어올 것이었다.

“알프도르트 방벽은 어찌 되었지?”

“간밤에 무너졌다는 용 기병대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미리 언질을 넣어 둔 대로 방벽 수비대는 며칠 내로 우리와 합류할 것입니다.”

“도미에 변경백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변경백을 따르던 일부 수비대도 마찬가지고요.”

이리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안으로 오스터캄프를 정비하고 출진하겠소. 탐보프인과 변절자들은 모두 잡아 죽이되, 백성들에겐 결코 조금의 해도 끼쳐선 아니 됨을 용병대에게 단단히 주지시키시오.”

“명 받들겠습니다!”

기사들의 주도 아래 탐보프의 관리와 상인, 탐보프에 빌붙어 살아가던 동부의 변절자들이 색출되었다. 죄인들이 끌려 나오는 총독부 앞 광장은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 위로 옛 노르투그 왕국의 검은 곰 깃발이 위용스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 도미에 변경백은 참담한 심정으로 왕국기를 바라보았다.

“…분명 저들의 짓입니다. 알프도르트 방벽이 무너진 것도 다….”

부관이 붉어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수백 년간 굳건했던 알프도르트 방벽은 수비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지난밤 수비대의 일원이 방벽의 문을 열어 주었다는 정황이 너무나 뚜렷하여 그들의 자존심은 짓밟히다 못해 뭉개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알리셔야 합니다. 누구 탓에 방벽이 저 지경이 되었는지, 누가 동부의 배반자이고 누가 동부의 수호자인지!”

“…만약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이 방벽을 뚫고 동부를 약탈했다면 저들이 동부의 배반자겠지. 하지만 그들은 방벽 이상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약탈이 없으니 방벽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책임만이 남는다.”

얼마 남지 않은 수비대를 겨우 수습하여 방벽을 빠져나온 변경백은 종일 말을 달리느라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수비대를 돌아보았다.

“지금 보고 있듯 동부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너희는 지난밤 정신없는 와중에 나를 따르게 되었으나 선택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를 따라 본국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고향에 남을 것인지.”

수비대원들이 갈등하는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그러다 누군가 죄송합니다, 하고 달아난 것을 기점으로 많은 수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남은 수는 고작 열댓 명이었다.

부관이 침을 퉤 뱉었다.

“멍청한 놈들.”

“너희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

“소름 돋는 말씀 거두십시오. 옛 왕국기를 건 모양을 보아하니 페임하른 공작이 일을 친 것 같은데, 전 그자가 싫습니다. 총독이든 공작이든 다 뒈져 버리라죠.”

남은 수비대원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변경백이 흐리게 웃었다.

“본토인인 내 무엇을 믿고 남으려 하는지 모르겠다.”

“말이 본토인이지, 대장님도 거기선 차별받는 쪽이시잖습니까. 거, 북쪽에 하나 있던 왕국이 대장님 조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차별받는 놈들이 똑같이 차별받는 분 따르는 게 어디 이상한 일입니까?”

입술을 달싹거리던 변경백이 이내 하려던 말을 삼키고 수통의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미련 없이 수통을 내던지며 말했다.

“짐을 가볍게 해라. 앞으로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까지 쉬지 않고 달릴 것이다.”

“예!”

열댓 마리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해 지는 동토에 모래 먼지만이 뿌옇게 일어났다.

***

이튿날 아침.

간밤에 성벽을 기어 넘어 도망친 포로들을 잡기 위해 병사들을 데리고 나갔던 이리니 페임하른이 돌아왔다. 검은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른 그녀는 동부의 맹장이란 칭호답게 서늘한 위엄이 흘렀다.

오스터캄프의 시민들은 길 양옆에서 숨죽이고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인들의 눈에는 오래전 패배를 몰랐던 이리니 페임하른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고, 젊은이들의 눈에는 난생처음 보는 장군의 모습이 비쳤다.

오르골리오 상단에서 일하는 빈민굴 출신 급사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페임하른 공작 만세!”

의아해하는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급사들이 경쟁적으로 목청을 높여 나갔다. 페임하른 공작, 동부의 구원자, 노르투그 왕국의 정당한 후손.

그러자 밤새 끊이지 않던 폭발음과 비명 소리에 잠 못 이루었던 사람들마저 하나둘 동화되기 시작했다. 십여 년을 아무 데도 기대지 못하고 살아온 그들에겐 믿고 의지할 지도자가 절박했다.

“설마 파르나 순교자께서 말씀하신 이 땅의 구원자가 바로 페임하른 공작이란 말인가?”

“지금 상황을 보게! 공작이 총독을 죽이고 오스터캄프를 차지했지 않나! 공작이 아니면 누가 우리의 구원자냔 말이야!”

파르나의 이름이 언급되자, 자연히 불타 죽어 가던 그녀에게로 쏟아지던 기적적인 빛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보태기 시작했다.

“페임하른 만세!”

“구원자 페임하른! 동부를 구해 주오!”

“만세! 페임하른 만세!”

온 시가지가 환호로 들끓었다. 돌처럼 굳어서 거리를 행진하던 이리니 페임하른은 자신을 향한 찬사에 조금 얼떨떨해졌다. 그러나 곧 미소가 떠올랐다. 열광적인 환호성이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작저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이 그녀를 반겼다.

“각하.”

백발이 성성한 노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리니가 말에서 내려왔다. 노장은 차마 그녀를 마주할 수 없다는 듯 조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리니는 싸늘하게 그를 지나쳤다.

“따라오시오.”

하인과 기사들을 죄 물리고 그녀가 들어간 곳은 오랫동안 폐쇄되었던 왕의 홀이었다. 집사가 청소를 마친 듯 먼지 한 톨 없었으나, 그간 방치되었던 세월이 길어 빛바랜 흔적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왕좌는 아직 건재하다.

이리니는 뚜벅뚜벅 왕좌에 올랐다. 노장이 찬 바닥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오는 길에 보아하니 총독부가 반파되었더군. 어찌 된 영문인지 경은 아시오?”

“간밤에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구식 대포로 총독부 건물을 쏘아 맞혔습니다. 말려야 하는 병사들마저 신이 나 어울렸지요.”

“경 역시 보고만 있었단 소리군.”

“제 숙원이기도 했으니까요. 우리 동부의 맥을 끊어 놓은 흉물이니, 모래처럼 잘게 부수어져야 마땅합니다.”

이리니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그런 사람이 어찌 빌헬미나에게 목숨을 구걸하여 살아남았느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왕좌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수많은 말들을 참았다. 인내해야 했다. 성급함으로 말미암은 패배는 단 한 번으로 족했다.

“…마침 잘 왔소. 경험 많은 지휘자가 부족한 참이었으니, 그대가 그 자리를 맡아 주면 되겠군.”

“제겐 과분한 자리입니다.”

“거절하지 마시오. 어차피 그대도 전부 예상하고 온 것이 아니오?”

노장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머뭇거림 끝에 고개가 들리며, 예리한 눈빛이 드러났다.

“이 늙은 몸 바쳐 동부의 부흥을 이룰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각하께선 그저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도대체 바스토뉴의 야만족들과 어떤 거래를 하신 겁니까?”

이리니의 입술이 고집스레 다물렸다.

“바스토뉴의 용병대를 고용하신 것은, 예, 여력만 있다면 저 역시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값만 치르면 무엇이든 하는 작자들이니 제 몸 아끼지 않고 전장을 누비겠지요. 하지만 알프도르트 방벽이 무너진 것과는 별갭니다. 방벽을 지켜야 하는 방벽 수비대가 어찌 이곳으로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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