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328)

어제부터였다.

조금씩 무리 지어 오스터캄프로 흘러들던 방벽 수비대가 벌써 수백을 상회하고 있었다.

“바스토뉴는 우리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오.”

“그 간악한 약탈자들을 어찌 믿습니까! 만에 하나 탐보프와 맞서고 있는 동안 바스토뉴가 아군의 뒤를 친다면, 회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럴 일 없소.”

“어찌, 어찌 그리 장담을… 도대체 그들에게 무엇을 내어 주신 겁니까?”

“…….”

“각하께서 지금 그들에게 주실 만한 것이… 내년 수확량의 일부를 담보로 약속하기라도 하신 겁니까? 아니, 고작 그런 것으로 그 탐욕스러운 자들이 만족할 리가….”

노장이 손을 벌벌 떨며 중얼거렸다. 찌푸린 미간을 꾹꾹 누르던 이리니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경은 신경 쓸 것 없소. 어차피 지키지 않을 약속이니까.”

“허언으로 약속하셨단 말입니까?! 각하, 어찌 그런 짓을…! 각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면 저들이 어찌 나올지 빤하지 않습니까!”

“그럼 내가 어찌했어야 했단 말이오! 고작 스물 남짓한 기사들로 총독부를 덮칠까? 내가 모든 염원을 접고 목이라도 맸어야 경이 만족했겠느냔 말이오!”

쩌렁쩌렁한 고함에 노장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이리니가 씨근덕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지키지 않을 약속이기에 큰 것을 걸었소. 야만족들이 분노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오. 방벽을 뚫고 쏟아져 들어와 봤자 저들은 평지에서 힘을 쓰지 못하며, 용병대 또한 동부 전체 병력에 비하면 소수에 지나지 않지. 모든 과업이 다 끝났을 때 진압하면 될 일이오.”

“…….”

“그러니 경은 허튼 생각 말고 눈앞에 닥친 일이나 제대로 보시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한 달이오. 한 달 안에 동부를 휘어잡고 서쪽으로 진군해야 한단 말이오.”

노장은 이를 깨물었다.

그녀의 곤궁한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나, 너무 위험한 선택이었다. 동부의 모든 병력을 끌어모은다 한들 탐보프를 완전히 무너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현실적인 목표는 곧 침입해 올 탐보프를 무찌르고 동부의 독립을 일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바스토뉴가 약속의 이행을 빌미로 침략해 온다면?

이리니의 말이 맞다. 야만족들은 험한 산세에 기대어 기습 작전을 펴는 데 능하므로, 방벽 너머 너른 평지에선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바스토뉴가 자랑하는 용병대 역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절대적인 숫자에서 밀렸다.

그러나 그 틈을 타 탐보프가 역공해 들어온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오랫동안 굶주림에 지쳤던 동부는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운용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지난해 수확했던 곡식은 이미 절반 이상 탐보프로 반출되었으며, 대부분의 곳간은 텅텅 비어 있었다. 당장 두어 달 뒤부턴 군량미 보급에 애를 먹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방법이 이뿐이었는가. 조금 느려질지언정 보다 안정적인 방안이 있지 않았을까.

노장은 속엣말을 꺼내길 끝없이 망설였다. 그조차 한순간에 떠올릴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그녀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최악의 경우를 외면하는 것은 단순히 여유가 없기 때문인지. 십여 년을 기다려 놓고 어째서 이제 와 여유가 없어진 것인지….

눈을 파르르 떨던 노장은 문득 이리니의 시선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떠오른 것을 알아챘다. 그는 고개를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문가에 훤칠한 청년이 서 있었다.

문양이 어지러이 수놓아진 어두운 빛깔의 비단옷은 기사의 차림이 아니다. 그러나 허리춤엔 검이 매달려 있고, 벌어진 어깨와 한눈에도 탄탄한 근육은 기사와 유사했다. 점잖게 그의 정체를 물으려던 노장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할 말을 모두 잊었다.

고대의 신성성이 깃든 금안.

노장은 벼락처럼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엘피도 공작 전하.”

노장이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 안에는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도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양 물끄러미 왕좌를 응시했고, 이리니는 딱딱하게 굳은 채 애꿎은 왕좌의 손잡이만 움켜쥐고 있었다. 노장은 직감적으로 물러날 때라는 것을 알았다.

말없이 그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 엘피도 공작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공작을 스치는 순간, 노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각에 몸서리쳤다. 뼛속까지 시린 냉기 같기도 하고, 숨 막히는 위압감 같기도 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노장은 망설이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왕좌에서 내려온 이리니가 엘피도 공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칼날처럼 쏟아졌던 그녀의 시선이 이상하게 엘피도 공작 앞에서만 뱅글뱅글 돌았다.

…설마.

노장은 진저리 치듯 이단적인 생각을 털어 냈다. 기사란 무릇 왕을 모시듯 사도를 섬겨야 하는 법. 그의 본능적인 의심은 오랜 세월 가다듬어진 충심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리니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한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예후르가 물었다.

“간밤에 도망쳤다는 상인들은 잡아 오셨습니까.”

“…목만 잘라서 가져왔습니다.”

웅얼거리는 듯한 대답에 예후르의 눈길이 빤히 이어졌다. 이리니는 점점 초조해졌다. 치욕적으로 베인 코 위에 황금 코를 덧씌운 모습을 처음으로 내보였을 때처럼 긴장감이 사지를 옥죄었다.

결국 이리니가 토해 내듯 말했다.

“바스토뉴가 우려스럽습니다.”

“…….”

“탐보프의 침략을 막아 내면 약속했던 대가를 원할 테고, 대가를 받지 못하면 곧바로 방벽을 넘어 침략해 올 겁니다. 평지에서 그들을 무찌르는 것이야 달리 문제 될 것이 없으나, 탐보프가 그 틈을 놓칠 리 없습니다. 만일 양측에서 공격당한다면….”

이리니가 입술을 꽉 사리물었다. 시가지를 행진하던 불굴의 장수는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벌어진 어깨를 잔뜩 움츠린 겁쟁이에 불과했다.

“날 믿지 못하는 겁니까?”

“그,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 있는 최악을 피하고자….”

“이리니. 날 보세요.”

조용한 부름에 이리니가 머뭇거리며 눈을 들었다. 조각 같은 사도의 얼굴이 딱하다는 듯 안쓰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대도 알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이 도시에서 그대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패배자. 실패자. 동부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주범.

“하지만 내가 약속했었죠. 그대를 동부의 구원자로 화려하게 귀환시킬 것이라고.”

“…….”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이리니의 귓가에서 온 시가지를 들끓게 하던 환호성이 되살아났다. 지난 십수 년간 잊고 살았던 고양감이 혈관을 타고 흘러 폭죽처럼 터졌다. 마약에 취한 듯한 기분으로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대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더 이상 날 믿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기절할 듯 놀란 이리니가 다급히 그의 망토를 잡고 매달렸다. 벌벌 떨리는 손을 예후르가 흘끗 내려다보았다.

“제가,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해선 아니 될 말을 했습니다. 떠나지 마십시오. 동부에는 전하가 필요합니다. 제발, 그 빛을 다시 이 땅에 내려 주십시오.”

더러운 빈민굴을 구르던 한낱 수도사를 순교자로 만든 빛.

처절한 패배자를 구원자로 끌어올린 빛.

위험을 안고 나아가야 하는 동부에는 그의 기적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들의 염원을 등에 인 그녀에게는 기댈 곳이 반드시 필요했다.

물끄러미 이리니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왕좌로 이끌었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을 따라 이리니가 뻣뻣하게 왕좌에 앉았다.

왕좌의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예후르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나는 지금부터 주교와 함께 파르나 순교자의 유골을 찾으러 갈 겁니다. 그대는 동부의 수호자답게 왕좌를 지키십시오.”

이리니가 실 끊긴 인형처럼 고개만 까딱였다. 예후르는 흡족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홀을 가로질러 나갔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홀로 남은 이리니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는 모습이 초라했다.

***

예후르를 만나자마자 주교는 울음을 터트렸다.

“제가… 제가 부족한 탓에 파르나가….”

불타 죽어 가던 벗에게로 내려오던 한 줌의 빛이 그녀에겐 무척이나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주교는 지키지 못한 벗을 생각하며 찢어질 듯한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사악한 총독이 죽었으니 파르나 순교자의 영혼도 위로받았을 것이다. 너무 자책하지 마라.”

예후르의 손을 잡고 겨우 말에 오른 주교가 씨근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총독은 너무 쉽게 죽었습니다. 산 채로 불타 죽어 가는 고통을 그놈도 겪었어야 했는데….”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주교의 눈이 벌겠다. 예후르는 조용히 말을 몰았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백성들이 자지러질 듯이 놀라며 길을 비켰다.

“머지않아 중앙 교회에서 공문이 내려올 것이다.”

눈물을 닦던 주교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의 원탁은 위스누아의 비올라와 퀴테리아, 빌헬미나의 개인 아나클레토와 솔란지아로 양분되어 있다. 동부에서 일어난 반란에 내가 개입되었단 소식이 전해지면 두 세력이 최초로 합세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너에게도 압박이 들어오겠지.”

“염려하지 마십시오. 공문이 오는 즉시 갈가리 찢어 버릴 겁니다.”

“…….”

“파문할 테면 어디 해 보라지요. 이 땅이 힘들 땐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보다 끔찍한 일도 수없이 겪었는데 이제 와 파문이 두렵겠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동부의 모든 성직자들이 같은 생각일 겁니다.”

주교가 단호하게 말했다. 조금 놀란 듯 그녀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말없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으르게 늘어선 민가 사이로 반파된 총독부 건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장엄하던 석조 건물이 하룻밤 새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지붕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휑하니 뚫렸고, 한쪽 벽면은 아예 허물어졌다.

유일하게 멀쩡한 깃대에선 옛 노르투그 왕국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쪽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가던 예후르의 앞으로 별안간 어떤 사내가 뛰어들었다.

“전하, 전하!”

히이잉! 기겁한 말이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 멀리서 병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사내의 사지를 붙들었다.

“전하, 살려 주십시오! 저도 동부인입니다! 전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긴! 네놈이 황제의 무도회에 초대되어 피아노를 연주했다고 얼마나 뻐기고 다녔는지 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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