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328)

변경백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제 아버지께서 폐하의 미움을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선대 도미에 변경백 역시 강직하기로 이름 높은 탐보프 제일의 무장이었다. 그는 십수 년 전 이리니 페임하른이 일으킨 황위 쟁탈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빌헬미나의 가혹한 동부 통치에 대해 여러 번 간언을 올렸다가 불명예스럽게 은퇴했다.

“역시 잘못 알고 있네요. 폐하께선 돌아가신 그대의 부친은 진즉 잊으셨어요. 그분께서 경계하시는 건 그대의 가능성이죠.”

“…….”

“요슈아. 황제가 되고 싶어?”

뜬금없는 질문에 요슈아가 인상을 팍 썼다. 저거 보라는 듯 알리오나가 힘없이 웃었다.

“쟤는 황태자 자리도 이미 벗어 던지고 나왔어요. 동부에서 반란까지 일어났으니, 설령 폐하께 다시 잡혀 들어간다 할지라도 태생적인 한계로 공격을 당하겠죠. 제위에 오르긴 험난할 거예요.”

“…….”

“그리고 나는, 서른을 넘기지 못해요.”

알리오나는 불덩이 같은 숨을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다행히도 목소리는 담담했다.

“폐하께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요슈아마저 사라지면 발데마르 황가는 이번 대로 끝나겠죠. 저 라발이 그랬듯 왕조가 바뀔 거예요.”

천년 제국 라발은 지금까지 일곱 개의 왕조를 거쳐 왔다. 개중 가장 명예로운 왕조는 라발의 건국 왕 도미티우스 1세를 시조로 삼은 알바누스 왕조였다.

“폐하께선 늘 발데마르 황가를 알바누스 왕조에 버금가게 만들고 싶어 하셨지만, 그것은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라발의 수많은 선례처럼, 여러 귀족들 중 가장 현명한 이를 뽑아 뒤를 잇게 할 것이냐.”

“…….”

“아니요. 폐하께선 아주 욕심이 많은 분이세요. 발데마르보다, 빌헬미나 3세보다, 혹은 아리페르트 6세보다 명예로운 이름을 세우실 바에야 북방이 다시 조각나는 꼴을 택하실 테죠.”

요슈아가 아연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설마.

“맞아. 이대로 잡혀 돌아가면 나는 남은 귀족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개차반과 결혼하게 되겠지. 그 개차반에게 황위의 정통성을 심어 주기 위해.”

그녀의 입가에 냉소적인 조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건 내 문제고, 변경백, 그대는 다시 잘 한번 생각해 봐요. 그대의 충정이 과연 폐하께 어떤 의미일지.”

“…….”

“음유 시인의 노랫소리에나 나올 법한 충정에 자위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혹여 더욱 큰 뜻이 있다면 말이에요. 폐하께선 절대 그대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으실 거랍니다.”

알리오나의 눈이 곱게 접혔다. 변경백은 고집스럽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저는 그런 기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쓰레기들이 쓰레기 같은 통치를 펴는 꼴을 보고도 그런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고요? 믿기진 않지만, 그렇다고 쳐요. 하지만 폐하께서도 그대의 무욕을 믿으실까요? 믿으시는 분이, 그대를 몇 년째 변경만 돌게 하셨을까요?”

“…….”

“당신, 곧 죽을 거예요. 당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변경백의 낯이 일순 싸늘하게 굳었다.

“아버지께선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직접 봤어요? 아닐 텐데.”

알리오나가 얕게 기침했다. 차라가 기겁하며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알리오나는 졸음기가 어른거리는 눈을 가만가만 깜박였다.

“어쨌든… 생각해 보라고요. 우릴 폐하께 데려가는 게 과연 능사일지… 그렇게 충성을 바쳐 봤자 돌아오는 것이 독약뿐이라면 억울하잖아요. 내가 당해 봐서 알아.”

알리오나는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빈 약지의 자리를 쥐었다. 그제야 안심한 것처럼 까무룩 잠들자 방 안에는 쥐 죽은 듯한 적막만이 흘렀다.

차라는 불안한 눈으로 차갑게 굳은 변경백의 모습을 곁눈질했다. 이제 모든 것은 그의 선택에 달렸다. 하지만 이대로 그의 선택만을 기다려도 되는 걸까. 조금 더 그에게 확신을 줄 수는 없을까.

차라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엘피도 공작이 누군진 알죠? 뱀을 죽인 영웅. 가장 축복받은 사도.”

변경백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차라는 굴하지 않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믿어요. 그의 결정이 옳은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그가 벌인 전쟁에도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아니, 이유가 있어야만 해요. 많은 사람의 목숨을 희생할 만큼의 중요한 이유가.”

“…….”

“하지만 만에 하나, 그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차라는 무릎에 놓인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요슈아가 말한 것처럼 확인해야 해요. 도대체 동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예후르는 무슨 속셈인지. 당신도 좋은 사람이라면 무의미한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진 않을 거잖아요.”

“전쟁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아직 막을 기회는 남아 있어요. 내가 할게요. 내가, 예후르에게 말을 해 볼게요. 난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예후르는 내 말을 아주 무시하진 않는다고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막내 도련님은 영특하니 늘 옳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는 자기 자신보다도 예후르를 더 신뢰했다. 당연했다. 그는 가장 평범한 사도인 반면, 예후르는 가장 특별한 사도니까.

하지만 지금 이곳엔 예후르가 없었다. 가일은 예후르의 판단으로 말미암아 차라에게 복종했으므로, 선택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그러니 나를. 나를 지지하는 예후르를.

“믿어 줘요.”

변경백은 긴장감이 엿보이는 눈앞의 어린 사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저 서투른 말에 조금씩 마음이 기울었다. 어린 사도의 말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같은 생각을 한 듯 조금 얼떨떨해 보이던 요슈아도 변경백을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변경백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했다.

선택은 이미 내려졌다.

“사도를 따르겠습니다.”

***

페기는 황량한 지평선에 우뚝 선 성채를 바라보았다.

“저기가 바로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입니다. 저 앞에 엔케강의 지류가 흐르는데, 그 강만 넘으면 바로 탐보프죠. 얼마나 우리가 우스우면 저렇게 바로 경계에다가 성채를 지어 놨겠습니까?”

예후르가 반강제로 붙여 준 호위 기사는 몹시 수다스러운 자였다. 페기는 종종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동부 토박이에게서 나오는 말들은 이 지역을 잘 모르는 그녀에겐 꽤나 유용한 정보였다.

“전진 기지면 본격적인 방어선은 저 뒤에 있다는 거네요.”

“예. 여기서 말을 타고 이틀 정도 달려야 나오는 체스코비체 요새부터가 탐보프가 그토록 자랑하던 대(對) 노르투그 방어선이죠. 그래 봤자 10년 전에 페임하른 공작 각하께 죄 무너졌던 곳이긴 합니다만.”

호위 기사가 킥킥거렸다. 페기는 그를 조금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방어선을 다 뚫었다 한들 페임하른 공작은 그 전쟁에서 패했다.

“바도비체 후작은 어떻게든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에서 승부를 보려고 할 겁니다. 수성하는 입장에선 병력 부담이 훨씬 덜하니, 일만 정도의 적이면 전진 기지에서도 버틸 수 있으리라 여기겠죠. 또 방어선을 견고하게 정비하려면 시간을 더 벌어야 하니까요.”

한마디로 일단은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에서 버텨 보고, 힘들겠다 싶으면 후방으로 물러나리란 예상이었다.

“바도비체 후작은 지금쯤 도착했을까요?”

“척후병의 보고로는 오늘 새벽부터 기지가 몹시 분주해졌다고 합니다. 후작이 도착했든지, 곧 도착하든지 둘 중 하나겠지요.”

“그럼 곧 본격적인 전쟁이겠군요.”

페기가 나지막이 읊조리는 소리에 호위 기사가 껄껄 웃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함께하시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아가씨는 제가 잘 지켜 드릴 테니 마음 푹 놓으십시오.”

“나는 전장에 나가지도 않는데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혹여 아가씨께서 털끝 하나라도 다치시면 전 그날로 전하께 죽은 목숨일 겁니다.”

호위 기사가 요란을 떨며 말했다. 어째선지 그는 예후르와 자신을 묘한 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페기는 그의 얼토당토않은 추측에 코웃음 쳤지만, 그 헛소문으로 쓸데없는 훼방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착각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전쟁의 전 자도 모르는 규중처녀가 군자금을 틀어쥐고 깐깐하게 군다며 불평하는 이들 때문에 그녀는 꽤나 골치를 앓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죠.”

그녀는 먼 성채로부터 느리게 시선을 떼며 등을 돌렸다.

이제 막 녹아내리기 시작한 동토 위로 머잖아 군홧발에 짓밟힐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

“각하!”

기사가 반듯하게 경례를 했다. 바람 맞아 초췌해진 얼굴을 문지르던 바도비체 후작이 그를 맞이했다.

“아, 필립. 왔군.”

“이번에 수도로 올라가시면 적어도 가을은 되어야 돌아오신다고 하더니, 결국은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이참에 수도에서 느긋하게 휴식도 취하고, 세도파의 혼처도 다시 알아보려고 했는데 저 동부의 잡것들이 도와주질 않아.”

“그래도 덕분에 세도파 아가씨께서 마음을 돌리실 것이 아닙니까. 솔직히 엘피도 공작이 저렇게 대놓고 나오지 않았으면, 세도파 아가씨는 아직도 공작을 놓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래…. 그 미련한 아이도 이제 마음을 접겠지. 딱 하나 좋은 점이 있긴 했군.”

바도비체 후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가라앉은 그의 기분을 눈치챈 기사가 부러 살갑게 말을 더 붙였다.

“체스코비체 요새를 거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후방의 방어선은 잘 구축되고 있습니까?”

“병력은 어느 정도 채워졌다. 서쪽 요새에 결함이 발견됐는데 조만간 수리가 끝난다고 하더군.”

“물론 유디트 아가씨께서 잘하시리라 믿습니다만, 요새가 쓰일 일은 없을 겁니다. 반란군은 이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에서 궤멸될 테니까요.”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방심은 금물이야. 듣자 하니 알프도르트 방벽 수비대와 바스토뉴의 용병들이 합류했다고.”

기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예. 페임하른 공작이 꽤나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바스토뉴와 손을 잡다니…. 도대체 무엇으로 그 야만족들을 꾀었는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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