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열댓 마리 용들이 성벽에서 날뛰고 있었다. 꼬리질 한 번에 서너 명의 적군이 날아가고, 날카로운 발톱에 조악한 병사들의 갑옷이 꿰뚫렸다. 바도비체 후작을 대신해 기지를 지휘하던 이름 모를 기사는 조금 전 무너지는 성벽에 깔려 죽었다.
건조하게 기지를 훑어보던 예후르가 후문 쪽으로 달아나는 병사들을 가리켰다.
“코리. 가서 죽여라.”
백룡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예후르는 다시 무심하게 성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오던 반란군들이 휙휙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적군의 시체를 맞아 추락하고 있었다.
그는 그조차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로 보았다.
“인간에게 믿음을 보이게. 저들은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보다 나은 존재일지도 몰라.”
아니, 형제여. 이번에는 네가 틀렸다.
우리는 일찍이 이랬어야 했어.
그에게 인간은 늘 수수께끼였다. 온갖 색이 뒤섞여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검정이며, 이해할 수 없는 회색 지대였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저들은 눈먼 아둔함으로 수없이 거사를 그르쳐 왔으며, 끝을 모르는 탐욕에 목매어 배반을 일삼았다.
그로 인해 희생당한 무고한 자들이 대체 얼마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죽은 형제들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어느 하나 그리 죽어선 아니 될 자들이었다. 저 나약한 버러지들과는 비할 수 없이 찬란한 존재였는데.
혹 내가 조금만 더 일찍 결심했더라면, 너희는 죽지 않아도 되었을까.
너는.
사랑하는 나의 누이. 너도 그리 덧없이 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불현듯 속에서 응어리진 숨이 솟구쳤다. 그는 참지 못하고 허리를 꺾으며 구역질했다. 꺽꺽대며 고통스럽게 토해 내던 숨에 미약한 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터트릴 듯 난간을 쥐었다.
잇새로 터지는 것은 웃음이었다.
그는 허리를 접은 채 미친 듯이 폭소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빗발치는 비명 소리에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돌아 버린 기쁨이 강을 거스르는 물고기처럼 역류하여 터져 나왔다.
늦었다.
떠나간 이들을 붙잡기엔 너무 늦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복수였다. 무의미하며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는데 이토록 즐겁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치고 죄 없는 자는 없을진대, 짓밟아 죽이는 것이 무에 대수란 말인가. 고작해야 땅을 기는 버러지가 아닌가.
이 즐거운 짓을 왜 여태 모르고 살았을까.
그는 흐느끼는 듯한 웃음을 씹어 삼키며 허리를 폈다. 죽은 자 위로 죽어 가는 이들이 산처럼 쌓이고 있었다. 피비린내 낭자한 바람이 상쾌하다. 눈을 감자, 인간을 닮은 검정이 시야를 가리며 대신 익숙지 못한 귀가 트였다.
누군가 신음하는 소리.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
누군가 살인하는 소리.
버러지들이 만드는 소리들이 뒤섞여 제법 근사한 음악을 자아내고 있지 않나. 그는 감격하여 눈을 떴다. 먹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희미한 빛줄기가 경건하게 그를 감싸 안았다. 환희로 젖어 드는 금안이 우러르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들리느냐.
이것이 너희들에게 바치는 나의 송가다.
***
“…공을 따지자면 역시 엘피도 공작과 용 기병대가 가장 크겠지.”
“시작부터 불합리한 비교일세. 우리가 먼저 진군했으면 우리의 공이 가장 컸겠지.”
“무사히 승리했기에 망정이지, 난데없이 진군한다고 하여 우리가 얼마나 놀랐나. 분명 페임하른 공작 각하께선 달무리가 가장 짙은 밤이 지난 새벽을 진군의 날로 잡으셨지 않았나?”
“바도비체 후작의 목 때문에 그런 게지. 적장이 죽은 틈에 우왕좌왕하는 적군을 단번에 쓸어 버리는 건 뭐, 납득할 만한 결정이니까.”
“문제는 전략일세, 전략. 여기 오스트라트 공성전에서 용 기병대가 선봉이 되리라는 말을 미리 전해 들은 사람이나 있느냔 말이야. 어떻게 하면 이 성을 무너트릴지, 이미 세세한 전략이 다 세워져 있지 않았나?”
“왜 모르겠나. 수뇌부 회의에서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완성한 전략인데.”
“그걸 엘피도 공작이 깡그리 무시하고 제멋대로 설친 걸세. 난 오늘의 승리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아. 만약 승부가 나지 않았다면 엘피도 공작의 기를 팍 꺾어 놓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대승을 거두었으니 앞으로는 더 기고만장해지겠지.”
“페임하른 공작 각하께 단체로 아뢰는 것은 어떠한가? 솔직히 수뇌부 중에서 엘피도 공작을 고깝게 여기는 사람이 우리뿐이겠느냔 말이야. 내 전부터 할 말이 많았어. 엄연히 외부인인 엘피도 공작이 보급부터 군자금까지 틀어쥐고 있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래, 지적하려면 거기부터 해야지.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장사치가 보급을 맡고, 새파랗게 어린 계집이 군자금을 쥐고 있다니. 우리가 명색이 곰을 잡던 노르투그 왕국의 후예인데 고작 그깟 놈들에게 빌빌거린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군자금을 맡은 그 계집이 어찌나 뻣뻣하게 구는지 알고들 있나? 내 일전에 병사들이 하도 추위를 타기에 방한용품을 요구한 적이 있네. 그런데 그 계집이 한사코 거부하는 거야. 도대체 제까짓 게 전쟁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쉿.”
구석진 성벽 아래서 노가리를 까던 중장년의 고위 기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던 페기가 그제야 발걸음을 뗐다. 뚫어질 듯한 그녀의 시선에도 천연덕스레 딴청을 피우던 기사들이 슬며시 제각각 흩어졌다.
페기가 그들을 모두 스쳐 보내자, 호위 기사가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공을 세워야 가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으니 마음이 애타시는 겁니다. 뭐, 원래도 좀 꼰대 같으신 분들이기도 합니다만.”
유쾌하게 덧붙인 농담에도 페기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호위 기사는 슬쩍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해가 저무는 때였다.
반쯤 무너진 성채는 동쪽으로 길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용들이 날뛰는 바람에 놀라 달아났던 새 떼가 돌아와 노을 진 창공을 휘젓고 있었다. 개중에는 시체 파먹는 까마귀도 있어, 죽은 아군을 묻어 주던 병사들이 신경질적으로 삽을 휘둘러 까마귀를 쫓아내곤 했다.
산처럼 쌓인 적군의 시체들 위로는 기름이 훌훌 뿌려지고 불씨가 지펴졌다. 순식간에 화르르 타오른 불길이 송장들을 집어삼켰으나, 용이 내뿜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했다.
전투가 끝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시체 썩은 내보단 피비린내가, 신명 나는 승전보보단 전장의 씁쓸한 뒷모습이 더 와닿았다. 호위 기사는 다행히 아군의 사상자가 적어 사나흘로 수습이 끝나리라 말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망루 위에 계십니다.”
호위 기사가 깎아지를 듯한 성벽 어딘가를 가리켰다. 물끄러미 그곳을 올려다보던 페기가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좁고 가파른 계단이 고불고불 이어졌다. 기지는 겉으로 보았을 때보다 손상이 심했는데, 특히 포대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페기는 녹아내린 대포 속에서 시신을 건져 내는 병사들을 여럿 스쳐보았다.
계단을 모두 오르자, 난간 앞에 서 있는 예후르가 눈에 들어왔다. 불그스름한 저녁놀 아래 석상처럼 버티어 선 그의 뒷모습이 유독 침잠되어 보였다. 페기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인기척을 느낀 그가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눈썹 뼈 아래로 움푹 들어간 그의 눈가가 어둑했다. 그늘 속에서 얼핏 드러나는 그의 눈빛이 이유 모르게 서글퍼 보여 페기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옷이 너무 얇아 보이는구나.”
“…네?”
멀뚱히 반문하던 페기는 문득 등 뒤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에 어깨를 움츠렸다.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 송골송골 맺혔던 땀이 대번에 가시며 추위가 속까지 파고들었다. 땅에서는 봄기운이 몰려오는데, 높은 망루는 여전히 한겨울이었다.
예후르가 털 망토를 벗으며 다가왔다. 페기의 등 뒤로 손을 둘러 망토를 꼼꼼히 둘러 주자, 그녀는 순식간에 두꺼운 털 망토에 파묻힌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페기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속삭였다. 예후르가 다시 난간 쪽으로 돌아가자, 페기는 망토가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양손으로 쥐며 눈치껏 그의 뒤를 쫓았다.
“…돌아오지 않으시기에 올라와 봤습니다.”
예후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베일 듯한 그의 옆태를 훔쳐보던 페기가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반파된 성 위로 밤 그림자가 내려앉고 있었다.
“뒷수습은 사나흘 안으로 완료될 것이라 합니다. 원래는 이곳을 기지로 삼아 전력을 가다듬을 예정이었는데, 성이 너무 망가져서 어렵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본디 공성보다 수성이 배로 쉽다. 튼튼한 성만 있다면 적은 수의 군사로도 능히 대군을 상대할 수 있었다. 탐보프와의 경계에서 이만한 성이 또 없기에, 반란군은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를 함락시켜 동부의 전초 기지로 삼을 생각이었다.
“수뇌부의 불만이 큽니다. 용 기병대가 성을 못 쓰게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공을 독차지했다고요. 일반 병사들은 전하의 편일지 모르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수뇌부는 이미 전하를 적대하고 있습니다.”
“…….”
“이렇게 되리라는 걸 모르진 않으셨겠지요.”
반란군은 이미 분열되고 있었다. 페임하른과 엘피도. 고루한 수뇌부와 실력은 충분하되 지위가 낮은 방벽 수비대. 노르투그 왕국의 부활을 꿈꾸는 옛 귀족들과 그저 동부의 사정이 나아지기만을 바라는 병사들. 동상이몽을 꾸는 군대가 오래갈 리 없었다.
“괜한 걱정이 많구나. 탐보프에서 용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이상, 난공불락의 요새도 내 앞을 가로막진 못할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이렇게 싸우실 건가요?”
예후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힐난을 알아챘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올라왔다.
“왜. 네 눈에는 너무 잔인한가.”
페기는 부정하지 않았다. 멀리서 보기에도 이번 오스트라트 공성전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주인의 명령조차 듣지 않던 흥분한 용들이, 솔직한 마음으론 적보다 꺼림칙했다.
그러나 가장 이상했던 것은 용들의 흥분을 방조하던 예후르의 태도였다. 그는 마치 용들이 학살을 저지르길 바라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가 알던 예후르는 누구보다도 정도를 걷던 사람인데, 공성전에서 보았던 그는 도리어 패도를 걷는 모습이었다.
“굳이 전하께서 선봉에 서실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오늘처럼 용들이 또 제어가 안 된다면 전하께서 위험하실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