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오면 이걸 풀어 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틸브레히트가 비열하게 웃으며 마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진흙탕에서 한 바퀴 구른 마샤가 몸을 웅크리며 목이 뽑힐 듯 기침했다. 페기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샤는 상관없잖아요. 아직 어린애한테 그러고 싶어요?”
“오, 물론이지. 어린애들일수록 힘이 남아돌아 비명을 잘 지르거든.”
그 말에 다른 기사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페기는 경멸하는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기사란 자들이 명예도 신의도 없군요. 노르투그의 기사들은 원래 다 그렇습니까?”
“바로 봤군. 우린 기사가 아니라 전사야. 나의 가족과 친지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지.”
틸브레히트가 술잔을 입술에 붙이며 검지로 페기를 가리켰다.
“그런데 넌 내 누이도, 내 딸도, 하다못해 내 마누라도 아니잖아?”
“혹은 내 남편도 아니지.”
근처의 다른 기사가 덧붙인 말에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낮게 퍼졌다.
역겹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린 페기가 거칠게 목걸이를 벗어 내밀었다. 얇은 쇠줄 아래로 작은 열쇠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어차피 이걸 원한 거잖아요. 괜한 말로 시간 끌지 말고 가져가요.”
“그리고 넌 요 어린애를 데리고 돌아가려고? 오, 그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허연 술거품이 묻은 틸브레히트의 수염 사이로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까 엘피도 공작을 쏘아 맞힌 놈을 내가 발견해 죽였거든. 그놈이 갖고 있던 화살촉에 다 독이 묻어 있더라고. 내가 아주 잘 아는 독이지.”
“…….”
“그래서 말인데, 엘피도 공작 숨이 붙어 있긴 한가?”
“당연히 살아 계십니다. 곧 쾌차하실 거고요.”
페기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들이 빗발쳤다.
“그 맹독은 집채만 한 곰도 죽이는 독이야. 바로 해독제를 먹어도 반신불수 되는 놈들이 허다한데, 살아 계셔? 곧 쾌차하신다고?”
“사도이십니다. 어찌 범인과 비교하십니까?”
“사도는 목이 두 개라도 되나? 그런 사도께서 어찌 비천한 용병대 따위에 목이 잘려 죽을 수가 있지?”
비명횡사한 선대 교황 제네로사를 언급하며 틸브레히트가 낄낄거렸다.
“엘피도 공작은 십중팔구 죽었을 거고, 행여 목숨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간당간당한 상태겠지. 정말 운이 좋아 살아난다 한들 그게 제정신이겠나?”
“그래서 날 해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틸브레히트는 장난감처럼 단검을 던지고 받으며 씩 웃었다.
“용 기병대가 돌아오긴 할 거란 말이지. 창검도 안 통하는 그 사나운 짐승을 우리가 어찌 대적하겠나? 너라도 인질로 잡고 있으면 그놈들이 얌전히 물러가지 않겠어?”
“나는 인질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섭섭한 소릴 하는군. 네가 엘피도 공작과 은밀한 관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수십 개의 눈알이 그녀를 아래위로 훑기 시작했다.
“사실 좀 의문이긴 하단 말이지.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는데 그 잘난 사도가 그렇게 싸고돌 정도인가?”
“밤일을 잘하나 보지!”
좌중이 폭소했다. 페기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으로 틸브레히트를 응시했다.
“좋습니다. 날 인질로 잡든 말든 마음대로 해요. 대신 마샤는 풀어 줘요.”
“아…. 거 되게 말이 안 통하네. 지금 네가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인 것 같나? 어?”
느릿하게 일어난 틸브레히트가 서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겁주기 위해 일부러 무게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평생 사람을 죽여 온 전사 특유의 살기에 절로 솜털이 일어섰다.
그럼에도 페기는 지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시간을 더 끌어야 했다.
“그 정도 요구는 들어주는 게 당신들한테도 좋을 텐데요. 그래야 나중에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깨어나셨을 때 구제받을 길이라도 열리겠죠.”
“저게 진짜 또박또박…!”
틸브레히트가 흉흉한 기세로 다가왔다. 휙 올라가는 두꺼운 손바닥에 페기가 질끈 눈을 감는데,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틸브레히트가 기민하게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술에 취해 늘어져 있던 기사들이 벌떡 일어섰다. 수풀을 헤집고 나타난 병사들이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틸브레히트 경? 왜 다들 모여 계십니까?”
“너희야말로 갑자기 웬 방해야? 넌 야간 보초도 아니잖아!”
“아, 저흰 아델라이데 아가씨가 위험하시다는 소릴 듣고…. 저기 계시네!”
병사들이 해맑은 얼굴로 페기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어휴, 밤중엔 함부로 나가지 마십시오. 들짐승들이 돌아다녀서 위험합니다.”
이만 돌아가자는 듯 병사들이 병영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인상을 찌푸리고 그들을 지켜보던 틸브레히트가 불쑥 물었다.
“너희 뭐 하냐?”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가야지요.”
“이 여자한텐 내가 아직 볼일이 안 끝났는데.”
병사들이 의문스러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구석에 묶여 있는 마샤를 발견하곤 눈에 띄게 낯빛이 굳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이 아가씨는 엘피도 공작 전하의….”
“엘피도 공작은 죽었다.”
“살아 계십니다.”
페기와 틸브레히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살벌하게 타오르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페기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사도는 그리 쉽게 죽지 않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서른을 넘지 못할 병을 앓고 계시지만 쉰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정정하게 살아 계십니다. 설마 전하께서 돌아가시길 바라는 것은 아니겠죠?”
“테바 독버섯은 맹독이야! 설령 숨이 붙어 있다 해도 그게 얼마나 가겠나!”
“그래서 전하께서 쓰러지신 틈에 용 기병대를 쫓아내고 군권을 틀어쥐겠단 속셈입니까? 체스코비체 요새에만 3만 적군이 있습니다. 용 기병대 없이 당신들이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 잠시만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용 기병대가 왜 떠나요?”
병사들이 당혹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페기가 진저리 치듯 고개를 틀었다.
“틸브레히트 경에게 물어요. 나를 인질로 삼아 용 기병대를 내쫓을 궁리나 하고 있으니.”
“경, 정말입니까?”
쨍그랑! 어느 고위 기사가 술병을 내던졌다.
“야, 이 새끼들아! 당장 안 꺼져?”
“대답해 주십시오! 저희도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자격? 너희한테 무슨 자격이 있는데? 어?!”
기사들과 병사들이 시뻘게진 얼굴로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너흰 눈이 장식이냐? 용은 양날의 검이야! 주인도 제대로 못 다루는 짐승이 언제 우릴 죽일지 모른다고!”
“그래도 용 없이 어떻게 적의 요새를 무너트립니까? 보셨잖아요, 공성전에서 용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요새로 안 가면 그만이야! 동부를 얻었으니 목적은 달성했잖나!”
“그럼 적의 대군이 몰려오겠죠! 젠장, 탐보프와의 경계에는 수성을 펼칠 멀쩡한 성 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그럼 몇 배나 되는 대군과 평원에서 대치합니까?”
“군사를 더 징병하면 되지!”
“다 굶어 죽어 가는데 어디서요!”
페기는 슬며시 뒤로 빠졌다.
듣던 대로 반란군의 정예인 방벽 수비대와 고위 기사들 간의 갈등이 깊었다.
당장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방벽에서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에 맞서 싸웠던 수비대와 달리, 십수 년 넘게 감금 생활을 했던 기사들은 지나친 폭음과 게으른 생활로 망가진 상태였다.
몸과 머리는 이미 둔해질 대로 둔해졌는데, 허물어지고 없는 과거의 영광으로 윗선을 차지하고 앉아 거들먹거리니 방벽 수비대로선 참으로 눈엣가시였으리라.
“우린 당신들을 따르는 게 아니야! 뱀을 죽인 엘피도 공작 전하를 따르는 거지!”
어느 병사가 격분하여 외쳤다.
“뭐? 이 새끼가…!”
“우리만 그런 줄 알아?! 페임하른 공작 각하가 동부의 구원자란 말이 돌지 않았으면 이만한 규모의 군대가 모였을 것 같아? 엘피도 공작 전하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나 있었겠냐고!”
분노한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병사들도 지지 않고 무기를 꺼냈다.
“너희는 다 참수다! 감히 군법을 어긴 것으로도 모자라 상관에게 검을 들이대?!”
“우리가 따르는 상관은 엘피도 공작 전하뿐입니다!”
거친 패싸움이 벌어졌다. 그 틈에 페기는 황급히 마샤에게로 달려갔다. 가까이서 본 마샤의 꼴은 더 엉망이었다. 어찌나 맞았는지 뺨에도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페기는 마샤의 사지를 옥죄는 밧줄과 재갈을 모두 풀어 주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리던 마샤가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왜 오셨어요.”
“내가 안 오면 누가 오겠니.”
페기는 서글픈 표정으로 마샤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마샤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하자, 페기는 얼른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속삭였다.
“빨리 여기부터 벗어나자.”
그때, 멀리서 용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함치며 검을 휘두르던 모두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쥐 죽은 듯한 적막 사이로 용의 울음소리가 다시금 아득하게 전해졌다. 서로 뒤섞이는 울음소리가 하나, 둘, 셋….
“용 기병대다.”
중얼거린 틸브레히트가 휙 고개 돌려 페기를 보았다. 그의 얼굴이 추상같이 일그러졌다.
“당장 저년 잡아!”
수십의 기사들이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앞을 병사들이 가로막으며 진흙탕 싸움이 이어졌다. 페기는 마샤의 손을 잡고 병영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저는 두고 가세요! 아가씨!”
마샤가 절뚝이며 외쳤으나, 페기는 고집스럽게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불빛조차 희미한 어둠 속을 헤쳐 나가는데, 얼마 가지 못하고 마샤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뒤를 돌아본 순간, 야차처럼 달려드는 틸브레히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망가라 외치는 마샤의 입 모양. 거칠게 검을 치켜드는 틸브레히트. 그 모든 광경이 느리게 눈앞을 스쳤다.
저대로는 십중팔구 마샤가 죽는다.
하지만.
페기는 이를 악물며 마샤에게로 뛰어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엄습했다. 마샤를 끌어안고 몸을 옆으로 굴리는 찰나에 화끈한 감각이 목덜미를 스쳤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에게로 내려앉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솟구치는 돌풍과 함께 용의 등에서 뛰어내린 막시모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틸브레히트의 목을 그었다. 분수처럼 터지는 핏물을 손으로 막으며 뒷걸음질하던 틸브레히트가 천천히 고꾸라졌다. 페기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가씨!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