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샤가 울면서 치맛자락을 찢어 그녀의 목덜미를 누르기 시작했다. 황급히 달려온 막시모가 마샤를 밀어내고 대신 상처를 살폈다.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당부하고 갔는데 반나절을 못 버텨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칼 앞에 뛰어든 겁니까!”
“아가씨, 어떡해요. 피가 많이 나요….”
마샤가 엉엉 울었다. 페기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짧은 순간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어지러워 손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옇게 질린 입술만 작게 달싹였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젠장, 죽을 때가 되니 헛소리가 막 나와요?!”
“안 죽어요….”
이것은 죽음의 감각이 아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페기가 옅게 웃었다.
“안 죽을 줄 알았어.”
아연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막시모가 그녀의 목덜미를 세게 동여매며 씨근덕거렸다.
“아주 미친년이야, 미친년….”
페기는 그의 코를 비틀어 주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시야가 흐려지며 몸이 깊숙한 아래로 끌어당겨졌다.
춥진 않았다.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었다.
***
페기가 깨어났을 때는 어두운 밤중이었다. 그래서 잠깐 눈만 붙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루가 지나 있었다.
“다행히 급소는 벗어났대요. 깔끔하게 꿰맸으니 잘만 관리하면 흉터도 남지 않을 거예요.”
어제보다 얼굴의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마샤가 야무지게 그녀의 수발을 들었다. 페기는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몽롱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너는.”
“네?”
“치료는 받은 거야? 어제 보니 다리를 절뚝이던데, 군의가 뭐라니?”
“아휴, 별거 아니에요. 멍만 들었지 뼈는 멀쩡하대요.”
마샤가 부러 씩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페기가 손을 뻗어 마샤의 뺨을 어루만졌다.
“미안하다. 나 때문이야.”
“왜, 왜 아가씨 때문이에요! 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 감사할 줄도 모르는 그 나쁜 놈들 탓이죠!”
페기는 쓰게 웃기만 했다. 예후르가 쓰러지고 막시모와 용 기병대가 떠나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그녀가 약해서 일어난 사달이다.
“어, 일어나셨습니까?”
막시모가 막사의 문을 젖히며 들어왔다.
“아프진 않아요? 꽤 깊게 베였던데.”
“참을 만해요.”
“다행이네. 깨끗하게 베여서 덧나지만 않으면 금방 나을 겁니다.”
막시모는 수염이 까칠하게 올라온 턱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어제 일은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막시모 씨가 나한테 미친년이라고 했던 것까진 기억나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어디 머리도 부딪힌 거 아니에요?”
“어머나? 이 아저씨가, 정말. 저도 똑똑히 들었거든요?”
마샤가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그를 째려보았다. 막시모는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아가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아가씨를 찾으십니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어요?”
“네, 방금요. 아가씨한테 일어난 일도 다 들으셨습니다.”
페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시모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좋은 말은 못 들을 텐데…. 하여간에 빨리 일어나요. 걸을 순 있습니까?”
페기는 마샤의 부축을 받아 막사 밖으로 나왔다. 종일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누워 있던 것치고 걸을 만은 했다. 마샤는 하루 종일 원기를 보하는 약초를 입 안으로 흘려 넣었던 보람이 있다며 좋아했다.
야밤의 병영에는 이상할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길을 밝히는 횃불은 배로 많아졌으며, 딱딱한 표정으로 오가는 보초들의 수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페기가 의아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묵묵히 정면만을 보며 걷던 막시모가 작게 속삭였다.
“오늘 아침에 페임하른 공작이 돌아와 자초지종을 듣고 몹시 분노했습니다. 틸브레히트 경은 그 자리에서 참했고, 그에 동조했던 기사들은 남쪽 동굴에 구금되었습니다.”
“병사들은요?”
“상관에게 불복하여 무기를 들이댄 죄가 있는지라 채찍질을 당하고 현재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평소라면 참살당했을 중죄이니 페임하른 공작도 사정을 많이 보아준 거죠.”
막시모가 조소를 머금었다.
“수뇌부의 절반이 나가떨어졌으니 대폭 인사이동이 있을 겁니다. 이번엔 좀 능력 있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맡아야 할 텐데요.”
그들은 곧 예후르의 막사 앞에 당도했다. 막사의 문을 열어 주려던 막시모가 짧게 갈등하더니 슬며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전하께선 지금 약에 취하신 상탭니다. 하도 아가씨를 불러오라 엄명하기에 모셔 오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좀 겁이 나네요.”
“…….”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페기는 가만히 눈만 깜박였다. 심란하게 한숨을 내쉰 막시모가 막사의 문을 열어 주었다. 페기는 마샤의 손을 놓고 한 발, 한 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인지한 것은 씁쓰레한 약초의 향이었다.
촛불조차 켜지지 않은 막사 안은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이 어두워 대신 다른 감각들이 깨어났다. 오랜 시간 정체된 공기의 냄새, 막사 밖을 오가는 보초들의 군홧발 소리, 바짝 곤두서는 살갗의 솜털들.
서서히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그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든 것처럼 미동 없더니, 이마를 받쳤던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천천히 얼굴을 든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에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망설이며 다가가지도, 피하지도 못하는 사이 그는 벌써 그녀의 발치로 달했다. 순식간에 좁혀 든 거리에 그녀가 흠칫 얼어붙었다. 그의 손이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로 와 닿을 듯하던 손길이 내려오더니 스르르 목의 리본을 풀었다.
옷깃이 살짝 벌어졌다.
페기가 뒤늦게 옷깃을 여미며 뒷걸음질하려 했지만, 옭아매는 그의 아귀힘이 너무 강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나머지 손으로 쥐어뜯을 듯 그녀의 옷깃을 잡아 벌렸다. 밀어내는 손길도, 반항하고 뒤트는 몸짓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몸싸움 끝에 우두둑, 단추가 터지며 옷깃이 홱 벌어졌다. 페기는 급히 숨을 삼켰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앞에 둔 초식 동물처럼 손끝이 떨렸다. 잘게 부딪히는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들어 올리던 그녀는 문득 싸하게 굳어 버린 그의 시선을 발견했다.
아.
그제야 목덜미의 상처를 떠올린 페기가 손을 들어 붕대 위를 더듬었다. 축축하지 않은 것을 보면 상처는 터지지 않았다. 페기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떼려고 했다.
그러나 예후르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 먼저였다.
막사를 박차고 나가려는 기세가 어찌나 흉흉하던지, 페기는 정신없이 그의 팔부터 붙들었다.
“어쩌시려고요!”
“놔.”
“틸브레히트 경은 이미 죽었어요! 동조한 다른 기사들도 옥에 갇혔고요! 이미 끝난 일이에요!”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겨우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로 살벌한 그의 시선이 돌아왔다.
“너는 고작 그것으로 만족해?”
쉰 목소리가 나지막이 깔렸다.
“난 모조리 뒤엎고 싶은데.”
페기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어둠에 휩싸인 그의 얼굴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갈등하듯 지그시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왜요?”
“…….”
“저는 전하께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목울대가 울렁거리고, 붙잡은 팔이 뜨거워졌다. 페기가 그의 팔에서 손을 떼어 내려는 순간, 맥없이 흔들리는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왜냐니….”
혼란에 빠진 듯, 혹은 충격을 받은 듯. 그녀에게로 돌아선 그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다.
“너야말로 왜 그런 말을 해?”
마음이 거북해진 페기가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까처럼 억세게 잡아당기지는 않아도 좀체 놓아주질 않았다. 그런 약한 반항조차 충격이라는 듯 그가 애원하듯 말을 이었다.
“내가 무얼 잘못했니? 나한테 화났어? 응?”
“전하, 이것부터 좀 놓고….”
“왜 날 그렇게 불러.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 없잖아.”
침울하게 고개를 떨군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려 자신의 뺨을 감쌌다. 손바닥에 와 닿는 그의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페기는 떨리는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전하, 일단 침대로 가세요.”
“싫어.”
“아프시잖아요. 빨리 나으셔야죠.”
“예전처럼 불러 줘.”
흡사 토라진 아이처럼 중얼거린 그가 그녀의 손바닥에 경건히 입술을 붙였다. 약에 취하여 반쯤 흐리멍덩해진 금안이 집요하게 그녀를 쫓고 있었다. 페기는 진심으로 촉각을 도려내고 싶었다.
“…놔주세요.”
“왜 이렇게 떨어.”
“나중에 후회하실 거예요. 이건 다 기억하실 거잖아요.”
그의 눈가가 설핏 찌푸려졌다.
“…이해가 안 돼.”
뺨으로 그의 손끝이 닿았다.
“네가 하는 말,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어.”
“…….”
“왜 예전처럼 불러 주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워. 이런 적이 없는데 모든 것이 흐릿해.”
횡설수설하던 그가 그녀의 뺨을 감싸 쥐며 불쑥 고개를 숙였다. 부지불식간에 그의 눈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코끝이 맞닿고, 서로의 날숨이 섞여 들었다.
얼어붙은 페기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턱을 살짝 틀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웠다.
“알잖아.”
“…….”
“나는 그냥 네가….”
우뚝, 말이 멈추었다.
숨이 멎을 듯하던 페기는 순식간에 주위를 감싼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몽롱하던 기운이 싹 가셨다. 페기는 차마 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떨리는 턱에 힘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니야.”
그가 서서히 고개를 떨구었다.
“네가 아니야.”
그녀에게로 무너져 내렸다. 어깨에 기댄 그의 이마가 못 견디게 뜨거웠다. 그가 토해 내는 숨이 꼭 불길 같았다. 상처 입은 그는 온몸으로 불을 흘리고 있었다.
페기는 그를 안아 주지도, 받아 주지도 못한 채 그저 오도카니 서 있기만 했다. 그에게서 열이 옮은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
그가 되살아난 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면, 나를 영영 모른 채 각자의 길을 걸으면 된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너의 행복을 바라고, 너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세상의 기둥이 되면 된다고. 그러면 될 거라고.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않아.
왜 네가 무너져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