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8/328)

안드레아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그를 뜯어보았다. 예후르가 묵묵히 입을 다물자, 안드레아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 이거 웃기는 새끼네? 네 눈깔은 내가 사술로 모습을 바꿀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봤잖아. 넌 다 보일 거 아냐. 걔가 누군지, 원래 모습이 어떤지. 이제 와 내숭도 아니고 왜 모르는 척을 해?”

따지듯 몰아붙이던 안드레아가 불현듯 들이닥친 깨달음에 눈을 껌벅였다. 설마.

“네 눈도 못 믿겠어? 그래서 이래?”

“…….”

“씨발, 벙어리라도 됐냐? 뭐라고 말을 좀 해 봐!”

모습을 바꾸어 예후르에게 접근하겠다는 페기를 말렸던 건, 사술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막지 않았던 것은 예후르가 일단 사술을 꿰뚫어 보거든, 그 아이를 아껴 주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저 머저리는 사술을 벗기지도, 자신의 눈을 믿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지난 반년간 페기가 받았을 냉대를 생각하니 안드레아는 속이 거꾸로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야, 됐으니까 빨리 걔나 데려와. 네가 사술을 못 벗기겠다면 내가 벗겨줄 테니까. 씨발, 걔 민낯이 어떤지 네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라고!”

“…이럴까 봐 오기 싫었던 건데.”

예후르는 문득 몹시 피로해진 얼굴로 뻑뻑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모든 일이 끝나면 내 손으로 그 여자의 사술을 벗길 거다.”

“…….”

“곧이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어둡게 내리깔린 그의 눈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아득했다. 안드레아는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신물을 삼켰다. 갑자기 숨이 모자란 것처럼 어지러웠다.

“뭐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

“대답해.”

“…….”

“너 이 새끼, 여기서 대체 무슨 짓을 더 벌이려는 거야!”

쏜살같이 튀어 나간 안드레아를 따라 수갑에 매인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너 원래 이런 놈 아니었잖아! 영감님이 널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어! 이제 너도 그만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라고!”

“돌아와?”

“…….”

“뭐가 돌아왔는데?”

낮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안드레아가 흠칫했다. 횃불이 일렁이는 그의 얼굴에 고요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착각하지 마, 안드레아.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어. 설사 돌아올 수 없는 것이 돌아왔다 하더라도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거야. 사술에 손을 댄 너는 잘 알 텐데.”

더없이 비인간적인 빛을 띤 금안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러니 너도 적당히 해.”

“뭐, 뭘….”

“곧 사술의 기한이 끝날 테지. 그 여자한테 다시 사술을 걸어 주려고 온 거잖아. 그만하라고. 너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아, 네가 원래 바라던 게 그건가? 중얼거린 예후르가 시답지 않게 웃었다. 그러곤 뿌리 내린 나무처럼 굳어 버린 안드레아에게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이런, 긴장했나 본데….”

그의 손이 짐짓 부드럽게 안드레아의 뺨을 감쌌다. 부릅뜬 안드레아의 눈이 움찔 떨렸다.

“사술을 부리는 널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염치도 없지. 내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누굴 책잡겠어.”

예후르는 안쓰러운 듯 혹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눈매를 살짝 찌그러트렸다.

“나의 형제. 나는 여전히 너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없지만, 너를 옭아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했던 갈망을 이제는 알 것 같아. 너를 함부로 매도했던 나를 용서해 달라 감히 청할 수는 없겠지만 사과할 필요성은 느껴.”

“…….”

“그동안 미안했다.”

안드레아는 돌아서는 예후르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정한 발소리가 멀어지며 적막이 내려앉을 즈음,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모양새로 중얼거렸다.

“…저게 드디어 돌아 버린 건가?”

늘 성궁의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 왔지만, 정말로 미친 건 자신이 아니라 예후르라 여겨 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사 자로 잰 듯 반듯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믿어 왔는데.

하지만 정작 신경이 쓰이는 말은 따로 있었다.

안드레아는 쏟아지는 적발을 쓸어 넘기며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설사 돌아올 수 없는 것이 돌아왔다 하더라도,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고….

사술에 손을 대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는 본래 주어졌던 영광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건 누구보다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네놈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나는 고작 사술이었지만 너는….”

안드레아는 착잡한 심정으로 어둠에 가려진 길을 응시했다.

그녀는 빛을 마다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길 자처한 사람. 그럼에도 저 어둠 속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문득 두려워졌다. 절망의 순간에 그가 내렸을 결정을, 과연 마주할 용기가 자신에게 있을지.

안드레아가 고민조차 망설이는 동안에 예후르는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 눈부신 햇살 속으로 진입했다. 그가 손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 새 한 마리가 그의 손등 위로 나붓이 내려앉았다.

새의 다리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묶여 있었다.

「명령 이행 중.」

곧 손안에서 불길이 치솟아 쪽지를 집어삼켰다. 예후르는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지.”

그들은 말을 타고 지나온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머잖아 도착한 병영은 새로이 길을 떠나려는 준비로 분주했다. 예후르는 막사를 정리하는 병사들 사이로 말 머리를 몰아 나갔다.

“페임하른 공작.”

높은 바위 위에 올라 먼 서쪽을 노려보던 이리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예후르는 풀어낼 길 없는 노여움로 얼룩진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곧 새로운 전장으로 떠날 겁니다. 준비는 되었습니까?”

“…준비는 진작 되었습니다.”

이리니가 빠득, 이를 갈았다. 머리 위에서 내리치는 창백한 빛을 등져 도리어 어둡게 그늘진 그녀의 모습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예후르는 그쯤에서 고개를 돌려 엷은 안개로 가려진 서쪽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듣자 하니 적군이 체스코비체 요새를 떠나고 있다더군요. 용 기병대를 상대하기엔 요새보단 넓은 평원이 낫다고 여긴 것이겠지요. 아무래도 유디트 바도비체는 제 아비보단 한결 뛰어난 무장인 모양입니다. ”

체스코비체 요새는 깊은 협곡에 자리 잡은 단단한 성채지만, 요새라면 으레 그러하듯 성벽이 무너질 시 전군이 한꺼번에 압사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고려조차 하지 않을 사항이나, 성벽을 쉬이 무너트릴 수 있는 용이 상대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용을 쏘아 맞힐 수 있는 화기도 마땅치 않다면 최대한 난전 상황을 만드는 것이 저들로선 유일한 방법입니다. 적과 아군이 한데 섞여 있다면 용들도 섣불리 개입하진 못할 테니까요. 적의 머릿수가 아군의 세 배인데 괜찮겠습니까?”

“…내 아들을 죽인 놈들입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놈들의 목은 모두 베고 갈 것입니다.”

틀어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렸다. 죽일 듯이 서쪽을 쏘아보던 이리니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보았다.

“요슈아를 데려온다던 공작의 수하들에게선 달리 연락이 없습니까? 작은 단서라도 좋습니다. 내 아들이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만 알 수 있다면….”

“유감스럽지만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황태자의 죽음에 대해선 적에게 물어야겠군요.”

이리니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괴롭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요슈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로 그녀는 며칠째 밤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다독이듯 예후르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일렀다.

“체스코비체 요새의 삼만이 바도비체 후작가가 거느린 마지막 정예군입니다. 병력을 더 끌어모을 여력은 있겠으나 훈련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겠지요. 무엇보다 바도비체 후작이 이미 죽었고, 만일 그의 후계자인 유디트 바도비체마저 우리의 손에 들어온다면 당분간은 동부를 위협할 세력이 없을 것입니다.”

“…….”

“고지가 눈앞입니다. 애도는 복수의 뒤로 잠시만 미뤄 둡시다.”

이리니는 솟구치는 분기를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씹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후르는 비로소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바도비체 후작가는 빌헬미나 3세가 내세운 탐보프의 방패.

방패가 무너진다면 탐보프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것이다. 동부 역시 시급한 민생 문제가 많아 당면한 전투가 끝나면 내치로 눈을 돌려야 하겠지만, 도리어 잘된 일이었다. 어느 하나가 승기를 잡지 못하고 치열하게 대치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바라던 그림이기에.

그리고 대치가 오래간다면 자연스레 빌헬미나에게 반하는 세력들이 고개를 들리라.

동부와 마찬가지로 통일이라는 명목하에 강제로 복속되었던 지방의 소국들, 혹은 십여 년 전 황위 쟁탈전에서 이리니 페임하른에게 패하여 빌헬미나에 의해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던 전통의 명문가들.

누구든 상관없었다.

고작 수십 년 만에 북방의 대국으로 발돋움한 탐보프가 아직 처리하지 못한 분열의 위협. 최초로 북방을 통일한 아리페르트 6세의 전설적인 신화와 빌헬미나 3세의 훌륭한 통치력으로도 완벽하게 봉합하지 못했던 내부의 갈등.

오직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던 문제가 엉성한 실밥을 터트리며 대두하기만 한다면.

“어린 사도님. 북방은 이제 분열의 역사를 뒤로하고 찬란한 영광의 시대를 맞이했답니다. 북방의 새 시대를 연 발데마르 황가는 영원토록 빛날 거에요.”

빌헬미나.

당신은 가장 끔찍한 악몽을 맞이하겠지.

***

뎅겅, 목이 잘리며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고꾸라지는 몸뚱이를 지나 데구루루 굴러온 목이 그녀의 발치에서 멈추었다. 허옇게 절명한 눈에 원망이 한가득 담겨 있는 듯했다. 울렁거리는 속을 짓누르며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세르난도가 은근하게 눈을 맞추어 왔다.

“귀한 가문의 아가씨께는 지나치게 잔인한 광경이었나요?”

페기는 차마 대답할 힘도 없어 입꼬리만 조금 올리고 말았다. 의도적으로 외면하려 했던, 죽은 병사의 등판에 그려진 검은 곰의 문양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 혹시 면식 있는 자들이었습니까? 이들도 똑같은 보급 부대이니 오가며 마주쳤을지도 모르겠군요.”

“…행여 그렇더라도 절 납치하여 감시하던 무뢰배들에 불과한 것을요.”

“그렇긴 합니다만.”

세르난도의 짙푸른 눈이 묘하게 휘어졌다. 페기는 부러 부산스러운 손길로 코를 쥐었다. 그저 피비린내가 역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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