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가득 들어간 세르난도의 눈자위가 움찔했다. 그는 마치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아연한 눈길이 만면 구석구석을 살펴 왔다. 페기는 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부러 외면했다. 얼마나 변했는지, 얼마나 돌아왔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창살 사이로 손을 뻗었다. 세르난도의 뺨에 살짝 닿았던 손끝이 미끄러지듯 내려가 그의 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살갗이 맞닿은 손바닥으로 우렁차게 약동하는 맥박이 느껴졌다.
이토록 얇은 표피 아래 웅크린 생명이 지고의 가치인 줄 알던 때가 있었다.
수백 년 전 원탁에서 쓰인 천계율이 만고불변하는 진리인 줄 알았고,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도덕률이야말로 결코 무너지면 아니 될 질서인 줄 알았다. 사도로서, 이 땅에 뿌리내린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질서는 그런 것이 아니야.”
그는 힘의 논리를 말했다. 약자의 억울함이 아닌 약자의 미력함을 말했고, 세상의 참혹함이 아닌 원래 그러했던 세상의 본모습을 말했다. 순종적인 나약함을 미덕으로 알았던 그녀는 끝내 질서란 이름의 가혹한 칼날 아래 목이 날아갔고, 그제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뼈에 새겼다.
이를테면.
너는 약하고, 나는 강해.
나는 너를 용납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손끝에서 불티가 튀었다.
“듣고 싶지 않아.”
그의 목을 꽉 움켜쥔 다섯 손가락 사이로 강렬한 열기가 치밀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붕어처럼 뻐끔거리는 입술 사이로 끊어질 듯한 신음 소리가 새고, 맨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 속에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눈알이 부릅뜨였다.
페기는 그제야 가뿐하게 손을 물렸다. 졸렸던 목구멍이 단숨에 풀어지며 귀를 찢는 비명 소리가 솟구쳤다.
“끄아아아아악!”
쿵!
세르난도가 엎어지듯 녹슨 창살을 움켜쥐었다. 빳빳하게 쳐든 고개 위로 불길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입에선 허연 거품이 뿜어져 나오고, 고통을 견디다 못해 뒤로 넘어가는 눈알에는 핏발이 가닥가닥 섰다. 악바리처럼 창살 사이로 뻗쳐 오는 손끝이 파들거리며 허공을 헤집었다.
페기는 혐오하는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후르, 그의 비밀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어차피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 따위 없었다. 만약 그가 되살아난 그녀를 받아들여 준다면 그녀 역시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용인할 수밖에 없으며, 끝내 그가 거부한다면 그녀는 죽음을 피해 멀리 달아나야만 했다.
애당초 그는 지고의 자리에서 영원할 사람.
그런 사람을 추악하게 끌어내리려는 작태를 내가 눈앞에서 보고만 있을까. 그가 나처럼 죽어 사라지는 꼴을 어떻게 견뎌.
상상만으로도 이가 갈린다.
너를 용서할 수 없어.
내게서 감히 그를 앗아 가려는 너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분노를 양분 삼아 피어오른 불꽃은 삽시간에 세르난도를 집어삼켰다. 창살에 기대어 악을 쓰던 그의 다리가 꺾이고, 사지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 그의 온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마저 페기는 들끓는 노여움으로 몰아쳤다.
불이여, 계속 타올라.
그의 비밀을 움켜쥐고 영원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아.
“도련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기사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고 얼어붙었다. 한때 세르난도였던 형체가 화염 속에서 이지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창살에 기대어 서서히 고꾸라지는 세르난도를 교두보 삼아 불길이 오만 군데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 너머로 우뚝 선 페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어둡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뺨 위로 불길이 흉악하게 너울지고,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눈부신 불티가 퍼져 나갔다. 산 사람 같지 않은 기이한 침묵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앞을 가로막던 창살이 녹아 사라졌다. 앞길을 밝히듯 불길이 물러나니, 페기는 다 죽은 송장을 짓밟으며 천천히 감옥에서 걸어 나왔다.
또각또각 가까워지는 발걸음에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나자빠지고 힘없이 무기를 떨구었다. 형체 없는 공포가 그들의 목을 죄어들었다. 초점 잃은 두 눈에서 눈물이 번져 나왔다.
불길을 뒤로한 그녀가 시커먼 역광을 드리운 채 손을 내뻗는 순간이었다.
끼아아아악!
멀리서 날카로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석실을 감싼 무거운 정적 사이로 다시금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아득하게 울려왔다.
“…그가 왔어.”
아스라한 속삭임 뒤로 쿵쾅거리는 군홧발 소리, 사람 목청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 깨지고 부닥치는 온갖 소리들이 지하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바짝 굳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발아래가 무섭게 진동하며 천장에서 작은 돌가루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할 틈도 없이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머릿골이 울리는 아찔한 충격과 함께 페기는 정신을 잃었다.
순백의 용이 시뻘건 화염을 토해 냈다.
지상으로 내리꽂힌 불길이 용의 움직임을 따라 어지러운 선을 그렸다. 허물어진 성터 인근에 설치되었던 용병들의 막사는 시커멓게 불타 뼈대만 남았고, 반파된 성벽은 검게 그을렸다. 도망치기 급급한 용병들 뒤로 불길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난데없는 용의 급습에 위스누아의 군세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용의 불길이 번지는 곳마다 비명 소리가 낭자했다. 피 한 방울조차 모조리 증발된 송장들이 성터의 주변으로 널리고, 역겨운 탄내가 진동했다.
지독한 학살이었으나 용 기병대 단원들 중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만 하루가 넘는 강행군 속에 하나둘 뒤처졌던 용들이 전부 모였을 때, 백룡은 이미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용들은 거칠게 포효하는 백룡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었고, 단원들은 한눈에도 제정신이 아닌 엘피도 공작의 모습에 기가 질렸다. 그들은 백룡에게 다가가길 포기하고 마을 주민들의 대피를 도왔다. 눈물로 흥건한 벙어리 주민들이 사방 자욱한 안개 속으로 달아났다.
전방과 오가며 연락책 역할을 하던 클로디아가 돌아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녀는 다가가지 말라는 동료들의 부르짖음도 무시하고 백룡에게로 날아들었다. 가까워질수록 클로디아의 용, 베판타니아가 눈에 띄게 사색이 되어 칭얼거렸다.
“전하!”
백룡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불길의 열기에 가로막힌 클로디아가 안간힘을 다해 목청을 돋우었다.
“전하! 차라 도련님께서 지금 전쟁터로 가고 계십니다! 아무리 만류해도 듣질 않으세요!”
그러나 그녀의 고함 소리는 용병들의 비명과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에 죄 묻히고 말았다. 클로디아는 연신 도리질하는 베판타니아를 채찍질하여 뜨거운 열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전하, 차라 도련님께서… 젠장!”
백룡이 내뿜은 불길이 베판타니아의 발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기겁한 베판타니아가 훅 위로 솟구치자, 클로디아의 몸이 앞뒤로 위험천만하게 흔들렸다. 겨우 중심을 찾은 클로디아가 갑갑한 심정에 욕지거리를 마구 지껄였다.
“전하! 제 말 좀, 제발 좀 들어 주세요! 전하!”
그때, 니체타가 이끄는 육중한 용이 기습적으로 백룡의 옆구리를 강하게 치받았다. 컥, 백룡이 숨통 막히는 소리를 냈다. 불길이 잠시 멈춘 틈으로 신속하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클로디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예후르의 팔을 낚아챘다.
“전하!”
순간 클로디아는 심장이 철렁했다. 흩날리는 불티 사이로 그녀를 돌아보는 금안이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라도 단칼에 베어 넘길 눈.
3년 전에도 그는 저런 눈을 했었다. 저런 눈을 하고 사라지더니 1년여간 행방이 묘연해졌었다. 또다시 주군을 잃고 싶지 않았던 클로디아는 사시나무처럼 바들대면서도 그를 놓지 못했다. 이번에 무너진다면 그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란 막연한 예감이 들끓었다.
“저, 전하…. 차라 도련님께서 전쟁터로 가고 계세요.”
클로디아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말을 토해 냈다.
“막시모 씨 혼자서 페임하른 공작과 차라 도련님을 모두 통제하긴 무리에요. 더구나 도련님은 얼굴이 알려지지 않으셨으니… 자칫 잘못하다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아시잖아요. 전쟁통에 휩쓸려 잘못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자 고삐 풀려 있던 금안에 조금씩 이지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온 세상을 태워 죽일 듯하던 용의 기세가 잦아들자, 니체타가 지친 얼굴로 말을 받았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셨는진 모르겠지만 아래를 한 번 보십시오. 다 죽었습니다. 할 만큼 하셨으니 이만 돌아가셔야죠. 이러다 지난 번처럼 늦으면 그 후회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럽니까.”
“…….”
“하나 남은 아우, 이번엔 지켜 주셔야죠.”
니체타는 검댕이 묻은 이마를 문지르며 서글프게 울음을 삼켰다.
용들은 숨을 죽이고, 불길은 고요히 휘날렸다. 눌어붙은 적막 속에 예후르를 감싸고 있던 맹렬한 서슬은 맥없이 사그라졌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쇠잔해진 눈에 별 하나 뜨지 않은 암암한 밤하늘이 드리워졌다.
예후르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휘몰아치는 돌풍을 따라 불티가 무수히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흉악한 불길에 휩싸여 허물어지는 성터에는 오직 죽음의 침묵만이 감돌았다.
또다시 선택의 기로였다.
그는 괴롭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안다. 답은 이미 내려졌다는 걸. 그는 결코 3년 전의 실책을 반복할 수 없었다. 이 이상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면 확실한 것을 쥐어야 했다. 망자에 대한 미련 따위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형제를.
아는데.
아는데도.
목울대가 뜨거워지고, 파묻힌 눈가로 열기가 쏠렸다. 생소한 감각이 불길이 되어 그의 온몸을 격렬하게 집어삼켰다. 마치 용암을 목구멍으로 들이부은 듯한 열통이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견딜 수밖에 없어서.
그는 수천 갈래로 찢어진 자신의 조각을 하나하나 주워 모으고, 붕괴된 이성의 탑을 맨몸으로 쌓아 올렸다.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좀처럼 성터를 떠나지 못하는 시선을 억지로 뜯어냈다. 그러곤 아슬아슬하게 남은 의식의 끈에 매달려 힘없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먼동이 트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