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328)

막시모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신심으로 모시는 주군이라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를 대신해 요 며칠 두려움에 떠는 페기를 돌보았던 막시모는 숫제 예후르가 정 없다 못해 원망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세상의 누굴 데려온들 그분이라 말할 겁니다. 전하의 눈이 틀릴 리도 없거니와, 틀리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부질없는 의심은 그만 내려놓으십시오. 저 가여우신 분을 도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내버려 두실 겁니까?”

“차라를 데려와.”

“전하.”

“데려와.”

좀처럼 꺾이지 않는 그의 뒷등을 지긋이 노려보던 막시모가 분에 찬 발길을 돌렸다. 교국 귀환 행렬을 재촉하여 제법 이르게 도착한 차라는 매일매일 문도성의 성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입성이 불허되자 고래고래 욕사발을 지르고 떠난 안드레아와는 대조적이었다.

차라는 하고픈 말이 가득한 표정이었으나 꾹꾹 참고 막시모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왔다. 예후르는 여전히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선 지금 잠들어 계시니 차라 도련님은 조금 뒤에 들여보내시는 것이 어떨지….”

“지금 들여보내.”

막시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후르를 보면 속엣말을 죄 퍼부을 기세였던 차라 역시 끽소리도 못 냈다. 지조 없이 시무룩하게 잦아들었던 차라의 기세가 다시 살아난 것은 잠든 페기의 뺨에 선연하게 남은 눈물 자국을 목격한 뒤였다.

“본 대로 말해.”

“내가 굳이 말을 해야 알아?”

차라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역정을 어쩌지 못하고 뾰족한 말을 내뱉었다. 아차 싶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누구보다도 믿었다. 어쩌면 저 자신보다도 믿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탐보프에서 벌인 전쟁도, 페기에 대한 처분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의 연속이었다.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네가 아무리 답을 외면한대도 진실은 안 변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고집만 피울 거야?”

“말해.”

“예후르!”

“네 입으로, 직접 말해.”

차라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페기야.”

“…….”

“네가 알고 내가 아는, 우리 페기라고.”

그림을 향해 선 그의 뒷모습은 미동조차 없었다. 차라는 그 등이 태산처럼 막막하면서도 길 잃은 어린애처럼 안타깝기도 했다. 아무리 못나도 가족인데, 이리 파탄 난 채로 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냥… 한 번쯤은 그냥 받아들이면 안 돼?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이 되살아날 수도 있는 거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페기인데, 그냥 아무런 걱정 없이 기뻐할 수도 있는 거잖아. 가장 혼란스러운 건 페기일 텐데 우리까지 이러면 그 애는 얼마나 힘들겠어.”

차라가 살며시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이번 한 번만, 딱 이번 한 번만 눈감고 넘어가자. 응? 너도 페기를 소중히 여겼잖아. 다시 돌아오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랐을 거잖아. 그렇게 억울하고 처참하게 죽었는데, 이렇게라도 돌아왔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동안 못다 해 준 것들 해 주며 앞으로 행복하게 살면, 그러면 되는 거잖아.”

페기가 죽은 뒤로 레오폴트는 밤이면 검은 옷만 고집했다.

만인의 시선이 모이는 낮이면 교황으로서 흰 의복을 입어야 하지만 만물이 잠드는 밤에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죽은 딸을 추모하고 싶다 하였다. 달이 뜨는 시간만큼은 교황이 아닌, 딸을 먼저 보낸 야속한 아비로 있고 싶다 하였다.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알면서도 차갑게 외면해 왔다. 한순간이나마 페기에게 화형을 허락했던 그를 용서하면, 죽은 페기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괴로워하는 이를 보고만 있었다. 괴로워하는 이를 보며 똑같이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페기가 돌아왔다.

예후르는 뜻밖의 암초였다.

억겁 같던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고 비로소 봄이 만개했는데도 자꾸만 의심을 고집하는 그가 갑갑했다. 그냥 받아들이고 행복하면 안 되는 걸까. 설령 페기의 부활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해도, 그저 묻어 두고 살아가면 안 되나. 조각난 가족의 비극을 이쯤에서 그치는 것이 그리도 잘못된 일일까.

차라는 이만 행복해지고 싶은 갈망만큼이나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페기인데 저렇듯 완고해지는 그가 이제는 숫제 딴 사람처럼 보였다.

“예후르….”

“안 돼.”

차라가 천천히 그의 옷자락을 놓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사위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힘겹게 이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그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그저 납득하고. 나는 그런 게 안 돼.”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수그린 고개 너머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차마 짐작할 수 없었다. 차라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뒷걸음질했다. 이제야 깨닫노니, 못 박힌 듯 그림 앞에 선 그는 차마 그림을 만지지도 못하고 있었다.

“할 수 있어. 아니, 너도 하고 있잖아.”

차라는 정리되지도 않은 말을 두서없이 내뱉고 보았다. 지금은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네가 어떤 사람인데. 조금의 사심도 없었다면 진작 페기를 내쳤겠지. 다시 죽이려 들었겠지. 몇 날 며칠 그 애를 피하면서 그림만 부여잡고 있진 않았겠지.”

“…….”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너도 필사적으로 믿고 싶은 거잖아.”

차라는 이제야 그가 제대로 보였다. 그는 그저 방황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에 눈에 멀어 제 근간이 흔들리는데도 어찌할 줄 몰라 갈팡질팡하는, 한없이 서투른 사람이었다.

“페기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많이 힘들고 지쳐서 너를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조용히 읊조린 차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머뭇 발을 물렸다. 막시모를 따라 방을 나가면서 차라는 남몰래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닫히는 문틈으로 예후르는 하염없이 그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차라에겐 하루 한 번 페기를 만날 시간이 주어졌다. 수일에 걸쳐 침실에만 갇혀 지냈던 페기 역시 성내에 한해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차라는 기뻐했지만 페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불안해했고, 언제 그가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며 초조해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예후르가 왜 너를 해쳐?”

“이미 나한테 활까지 겨누었던 사람이야.”

페기는 보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해질 정도로 처절하게 아랫입술을 쥐어뜯었다. 악몽 같은 기억을 황급히 털어 낸 차라가 심란해진 기분으로 입술에 일어난 거스러미를 잡아 뜯는 페기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거야 네가 너인 줄 몰랐을 때니까….”

“지금이라고 뭐가 달라? 그가 날 믿는 것 같니?”

반문하는 목소리에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차라는 침음을 삼키며 입을 꼭 다물었다.

요새 페기는 잠도 잘 못 자고, 음식도 잘 먹지 못한다고 했다. 의사의 말론 그저 정신적인 문제라고만 했는데, 그러잖아도 허약해진 몸으로 무리를 하니 앞으로가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차라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갈수록 창백해지는 안색이나 가늘어지는 손목이 그는 못내 안쓰러웠다.

“예후르한테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거야. 안드레아도 처음엔 너한테 검을 겨누고 막말까지 했잖아. 예후르는 심지어 곁에 계속 두고 있던 널 자기 손으로 다치게까지 했으니 눈앞이 더 캄캄하겠지.”

예후르가 다친 페기를 안고 나타난 날, 차라는 울고 불며 그에게 온갖 난리를 다 쳤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페기가 싹 나았으니 망정이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예후르의 그 결 좋은 머리를 다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 잔재했다. 당사자인 페기를 위해 남겨 두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간의 앙금을 무사히 풀려면 두 사람 모두 지금보다 차분해져야 했다. 예후르야 알아서 하겠거니 싶었지만, 페기는 그리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극에 몰려 빈속에 토악질하는 꼴까지 보자 더더욱 그랬다.

“대체 왜 이래. 이러다 너 정말 죽어.”

“난 그때 이미 죽었어, 차라.”

엎드려 멀건 위액만 게워 내던 페기가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차라는 그것이 3년 전을 말하는 건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예후르가 쏜 화살을 맞았을 때, 난 그때 죽었어. 죽어야 했어.”

“뭐?”

“난 죽음이 어떤 감각인지 알아.”

페기는 사시나무처럼 어깨를 떨었다.

“죽음은 차가워. 너무 차가워서 온몸의 통각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 3년 전에도 그랬고, 화살을 맞았을 때도 그랬어. 분명 죽어야 했는데 죽지 않았잖아. 차라, 내가 살아 있는 게 맞긴 하니?”

페기가 울먹이며 매달려 왔다. 차라는 눈물이 흥건한 그녀의 뺨을 보며 망연자실한 기분을 애써 삼켜 냈다.

“살아 있어. 예후르가 널 살려 냈대.”

“예후르가? 어떻게?”

차라는 잠깐 눈앞이 아득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이유 같은 건 몰랐다.

“왜냐니, 그게 뭐가 중요해. 난 네가 어쩌다 되살아난 건지, 예후르가 어떻게 널 살려 낸 건지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지금 네가 이렇게 살아 있는 거, 그게 중요한 거잖아.”

“난 모르겠어.”

페기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예후르가 언제든 마음을 바꿔선 날 죽이러 올 것만 같아. 그런 게 아니고서야 날 이렇게 피할 리가 없잖아. 깨어났을 때부터 예후르를 찾았는데 한 번도 날 보러 오질 않아. 내가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이어지는 말마다 흐느낌이 배어났다. 그런 페기가 안쓰러워 차라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는 둥, 예후르가 곧 보러 올 거라는 둥 열심히 지껄였다. 하지만 페기는 귀담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페기는 넋 놓고 골몰했다. 힘없이 늘어진 고개에서 가느다란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달아나야 해.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어.”

그날부터 페기는 도주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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