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랫동안 불러 보길 소망했던 이름을 조심스레 입 안에서 혀로만 굴려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두 음절에 지나지 않는 이름에 가슴이 내려앉고, 헤어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심장에서부터 아릿하게 퍼져 나가는 통증을 가만히 마주해 본들,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아마도 내가 죽어야 사라지겠지.
그는 담담하게 생각하며 물끄러미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오직 새하얀 여자는 곧 깨질 듯한 유리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평범한 화가의 실력으로도 그녀가 품고 있는 불안감이 쉬이 와닿았다. 막시모도 쉼 없이 찾아와 아가씨께서 몹시 불안해하신다 거듭 말하였으니 거짓으로 꾸며 낸 모습은 아니리라.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마주하여 말을 섞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그는 아직도 여자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으므로.
수일씩이나 약초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오래된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었다. 행여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단 일념만으로 먼지 쌓인 기억을 샅샅이 뒤졌으나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망자가 되살아날 수 없다는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유효했다.
그가 알고 있는 질서가 그러했고, 그가 아는 세상의 그 누구도 죽음에서 돌아온 전례가 없었다. 오래전 그는 떠나간 형제들을 인정하지 못하여 갖은 수를 다 써 보았으며, 3년 전엔 해선 아니 될 짓까지 저질렀다. 그럼에도 실패였다. 진리는 굳건했고, 질서는 변함없는 외길이었다.
그러니 성안에 가두어 둔 여자는 부활한 망자가 아닌, 망자의 탈을 뒤집어쓴 다른 무언가로 여기는 것이 타당했다.
이미 생명이 꺼진 시체를 파고들어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라면 가능했다. 그는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지난 행적을 보건대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천사 예리엘이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지난밤,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려 마음먹고 여자를 찾았던 그는 확신은커녕 혼란만 가중된 채 돌아왔다. 아무리 보아도 그녀는 예리엘이 아니었다. 그렇다 하여 다른 존재도 아닌 것 같았다. 그저 검정으로 가득한 불확실함 속엔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페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리움이 빚어낸 망상인가.
헛된 환각 따위에 휘둘릴 정도로 망가져 버린 건가.
페기이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는 냉정한 자각은 이미 바스러진 지 오래였다. 한 번쯤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싶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근간을 뒤흔드는 어리석은 짓이라 하여도, 이제야 겨우 되찾은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망가질 대로 망가진 존재.
견고하던 이성의 탑은 무너지고 폐허만이 남았으니, 한 줌 남은 근간을 제 손으로 뿌리 뽑은들 그것이 대수일까.
무너진 탑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일에는 이미 진력이 났다. 언제나 강고한 탑이었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수없이 반복되는 붕괴와 재건이 신물 나도록 지긋지긋했다. 이제는 작은 돌멩이 하나면 되었다. 얼기설기 짜 맞춘 것이라 하여도, 그것이 페기가 되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면 그 하나에 의지하여 살 수 있었다.
그러니 단 하나.
신빙성이 있든 없든, 부활의 근거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만 찾아내면 된다. 그러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먹구름처럼 가득 낀 혼란이 사라지고, 맑게 갠 하늘 아래 비로소 믿음이 완전해질 것만 같았다.
그는 눈가를 감싸 쥐고 필사적으로 고뇌했다. 부활의 전례를 찾기 위해 아주 오래된 기억까지 뒤지고 다녔던 지난 며칠처럼, 도저히 아니 된다면 약의 힘이라도 빌릴 작정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급했다. 그는, 이제 정말로 지쳐 있었다.
그는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지식의 바다에 기어이 맨몸뚱이로 빠져들었다. 온갖 데서 정보를 긁어모아 이어 붙이고 짜 맞추었다. 폐기된 가설들이 수면 아래 차곡차곡 쌓여 갔다. 닥치는 대로 정보를 짚어 나가며 새로운 가설을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만들고 버리고, 또 만들고 버리길 한참.
새로운 정보를 짚으려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부정하며 뒤돌아서려는 순간에 설마, 하는 의심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럴 수는 없는데. 만에 하나 이것이 죽은 자가 되살아난 이유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너는, 너만은 그럴 리가 없는데.
위험한 자각이 해일처럼 덮쳐 왔다. 싹을 틔운 의혹이 순식간에 자라나 하늘을 무성하게 뒤덮었다. 혼란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고, 부정하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필사적으로 맞부딪혔다. 충돌의 전조처럼 먹구름에 불길한 섬광이 번뜩였다. 어둑하게 흐려진 발치에선 그의 그림자가 위태롭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문이 스르르 열렸다.
가느다란 그림자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드리워졌다. 살그머니 내딛는 발이 작다. 하얀 원피스 끝자락이 하늘거리고, 의지할 데 없이 꼭 부여잡은 양손이 여위었다. 우아하게 뻗은 목선 위로 은빛 머리칼이 흩날리고, 겁먹어 흔들리는 보랏빛 눈이 슬그머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차마 부르지 못한 이름이 채 피지 못한 꽃망울처럼 덧없이 사그라졌다. 동시에 그의 뇌리로 강렬한 충격이 내리쳤다. 산을 쪼개고 바다를 가르는 벼락이 수없이 떨어졌다. 깨달음의 순간에 그를 이루던 대지는 시커멓게 그을고, 그의 바다는 소금기 없이 증발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쪼개진 틈을 파고들어 연한 속까지 태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석상처럼 굳어 있기만 했다. 가느다란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머뭇거리면서도 조금씩 다가왔다. 어중간한 거리를 좁혀 들며 한 발, 한 발. 제 가슴팍에 코끝이 닿을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멈추어 섰다.
사고가 얼어붙은 듯했다. 어마어마한 힘에 짓눌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간신히 내리뜬 눈에는 가는 실처럼 흐트러진 은빛 머리칼과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만이 들어왔다. 하얀 속눈썹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랏빛 홍채가 보일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숨이 울렁거렸다.
세상을 조각내는 벼락은 계속되고, 지축을 뒤흔드는 우렛소리도 그치지 않았다. 한데 뒤엉킨 그림자가 기괴하게 몸을 틀며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저 땅속 지하에서부터 가증스러운 마귀의 웃음소리가 깔깔깔 하늘 높이 치솟는 듯했다.
그런데 문득, 그녀가 하얀 손을 뻗어 왔다. 자각할 무렵에 이미 가느다란 팔이 제 목을 휘감고 있었다. 당황하여 잠시 고개를 틀었던 그는 정면을 돌아보기 무섭게 굳어 버렸다. 순식간에 다가온 그녀가 가만히 입술을 맞추어 왔다.
그는 멍하니 눈앞을 응시했다. 꾹 감긴 눈에 하얀 속눈썹만 파들거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떨림이 그녀의 숨결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 찰나에 모든 소음이 멈추었다.
벼락이 멎고 우레가 그쳤다. 쓰라리게 벗겨진 대지의 속살 위로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거침없이 속을 파고들던 불길이 사그라지고, 고통에 허덕이던 숨은 비로소 평온하게 잦아들었다.
어째서.
이해할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당혹감에 어찌할 줄 몰라 그랬다. 그런데 손아귀에 잡힌 어깨가 너무나도 가늘어서. 그 가는 어깨로 긴장된 떨림을 품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애달프게 느껴져서….
억센 팔이 단숨에 그녀의 허리를 감아올렸다. 맞붙은 가녀린 몸이 바짝 굳는 것도 개의치 않고, 고개를 틀어 입술을 더욱 깊숙하게 맞추었다. 목을 감았던 팔이 화들짝 떨어져 절 밀어낼수록, 꽉 끌어안아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바빴다.
미약하게 반항하는 듯하던 그녀의 손길이 점차 힘을 잃었다. 입을 맞추려 힘껏 발돋움했던 발끝이 후들거리는지 자꾸만 내려서려는 그녀의 몸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가느다란 허리를 죄고 뒷머리를 잡아 눌렀다. 길어지는 입맞춤에 숨이 모자란지, 백지처럼 창백하던 뺨에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찾아든 평온은 존재조차 몰랐던 열락에 불을 붙였다. 그는 그녀의 뒷머리를 누르던 손으로 부드러운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엄지로 연신 그녀의 귓불을 문질렀다. 여전히 목이 탔다. 갈급했다. 어떻게든 더 깊숙이 파고들어 이 괴로운 갈증을 씻어 내리고 싶었다.
그즈음이었다.
차오르는 숨을 어쩌지 못하고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쥐며 매달리던 손길이 애먼 데를 짚기 시작했다. 팔, 어깨, 옷깃…. 그저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만을 탐하던 그는 그녀의 손끝이 예민한 목덜미에 닿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느낀 것은 불시에 살갗을 파고들던 아릿한 통증이 전부였다.
멈칫한 순간에 저릿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번져 나갔다. 술에 진탕 취한 것처럼 불현듯 눈앞이 어지럽게 돌고, 발밑으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머릿속에서 번쩍번쩍 섬광이 치며 속에서 매스꺼운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치받쳐 올라오는 욕지기를 간신히 견디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품에서 떨어져 나간 그녀가 파르라니 질린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주저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그녀의 손끝에서 피 묻은 바늘이 툭 떨어져 내렸다.
아.
그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로 맺지 못한 이름은 속절없이 이울었다. 고개가 맥없이 꺾였다.
페기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그를 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 모습에 갑자기 덜컥 겁이 치밀어 올랐다.
“예, 예후….”
손을 뻗으며 그에게 다가가려던 몸짓이 우뚝 멈추었다.
“전하께선 고작 저런 독 따위로 돌아가실 분이 아닙니다. 가만 놔두어도 시간이 좀 걸릴 뿐 완벽하게 회복하실 거예요.”
그녀 대신에 독화살을 맞고 쓰러졌던 전장에서 막시모는 그런 말을 남겼다. 실제로 평범한 사람이면 진작 숨이 다했을 독에도 그는 끄떡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었다. 상처에서 빛을 흘리던 사람이다.
아멘크라체스의 독약 원액도 아니고, 이것저것 조합한 것을 아주 소량만 맞았을 뿐이었다. 당연히 괜찮을 것이다. 더 지체하다간 달아날 여유만 잃어버리는 격이리라.
뿌리 내린 나무처럼 오도카니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페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발길을 돌렸다.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방문을 열고 흔들리는 눈으로 힐끗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내 미련을 털 듯 눈을 꾹 감으며 문턱을 넘었다.
복도의 서늘한 공기를 맞으며 페기는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