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328)

시큰둥하게 중얼거린 레오폴트가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았는지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뽑았다. 차라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물었다.

“여, 여기서 대체 뭐 해요?”

“교황이 교황 서재에 있는 게 무슨 문제라도 되느냐?”

가면 속에서 연옥색 눈동자가 힐끗 굴러 왔다. 차라가 움찔하며 슬슬 시선을 피했다.

“음, 그게….”

“됐다. 변명은 복도의 아이에게서 다 들었으니.”

요슈아도 들켰구나. 차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현행범으로 잡혔으니 달아날 구멍도 없었다.

“잘못했어요.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랬어요.”

“여기에 들어오고 싶었으면 나한테 말을 하지. 그 열쇠는 도대체 어디서 찾은 것이야?”

“고드릭이 고양이 똥 치울 때 슬쩍….”

흘끔흘끔 레오폴트의 눈치를 보던 차라가 얼른 그의 손에 열쇠를 쥐여 주었다. 레오폴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자, 차라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저기, 그런데 있잖아요. 이 책은 왜 금서로 지정된 거예요? 딱히 별 내용 없던데.”

“평소엔 데면데면하더니 이럴 때만 살가운 척이구나.”

“아이, 쩨쩨하게 굴지 말고요.”

“흥. 야박한 녀석.”

레오폴트가 코웃음 치며 돌아섰다. 화들짝 놀란 차라가 도도도 그의 곁으로 달려가 애교를 피웠다.

“레오. 내가 그동안 연락 안 해서 그래요?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네?”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석 달씩이나! 네가 미에투넨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아, 그래서 내가 미안하단 의미로 선물도 줬잖아요! 이거! 이 허리띠! 여기 있네!”

귀신같이 레오폴트의 허리띠를 알아본 차라가 호들갑을 떨었다. 끙, 앓는 소리를 낸 레오폴트가 흘끗 차라가 들고 있는 책을 눈짓했다.

“네가 방금 읽었던 시구 다음 페이지가 없지?”

“네?”

멍하니 되물었던 차라가 황급히 책을 펼쳤다. 정말로 다음 페이지가 찢겨 나가 있었다.

“뭐야! 왜 없어!”

“왜 없긴. 금서로 지정될 만한 내용이니 진작에 삭제된 것이지.”

“대체 왜! 무슨 내용이었길래요!”

“차라야. 머리를 두어서 어디에 쓰려고 이러느냐. 빛이 있으면 또 무엇이 있었겠어.”

레오폴트가 쯧쯧 혀를 찼다. 어리둥절하여 머리를 굴리던 차라가 금세 굳었다.

빛과 대치되는 것.

어둠.

“이, 이거. 다음 페이지는 어디서 못 찾아요?”

차라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레오폴트는 하릴없이 고개만 저었다.

“이단 심문관들은 철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들이란다. 여기 교황의 비밀 서재까지 뒤져내어 엎은 놈들이 다른 곳이라고 어설프게 넘어갔겠느냐.”

“아….”

맥이 빠진 차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빛과 어둠은 공의회에서도 심심찮게 거론되는 단골 주제였다. 어둠을 몰아낸 빛 속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와 그의 그림자 속에서 연달아 모습을 드러낸 나머지 일곱 천사들.

어쩌면 천사의 근원이 되는 그 지점에 사도에 대한 비밀이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30년 전 오스피나 참극으로 성궁의 자료 대부분이 유실된 상태였기에, 현시대의 사도들은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갑자기 막다른 벽에 부딪힌 차라가 우울한 낯빛으로 낡은 책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페기가 부활할 수 있었던 이유도 분명 거기에 실마리가 있을 텐데.

차라의 시무룩한 얼굴을 넌지시 훔쳐본 레오폴트가 지나가듯 말했다.

“…헤르고미 문서 기록원으로 가 보거라.”

뒤늦게 그의 말을 알아들은 차라가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레오폴트는 모르는 척 책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헤르고미 문서 기록원? 거기 뭐가 있는데요?”

“글쎄다. 네가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레오폴트가 가면 속에서 조금 서글프게 웃었다.

“옛날에 나도 거기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

이른 아침, 문도성으로 손님이 찾아들었다.

“오, 전하!”

부러 가문의 문양이 드러나지 않는 허름한 마차를 타고 온 이시도르 피아제였다. 여름철 눈부신 불볕만큼이나 화사한 금발을 자랑하는 백작이 기꺼이 페기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부상을 입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노심초사하며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신 겁니까?”

“네. 덕분에요.”

페기는 미소로 그를 반겼다. 예후르와 안드레아, 차라를 제외하면 그녀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니 방문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시도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의 얼굴을 뵈니 이제야 안심이 좀 됩니다. 앞으로는 그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마십시오. 마샤, 그 아이도 얼마나 전하를 염려하였는데요.”

페기의 명령에 따라 세르난도 만포르차로부터 도망쳤던 마샤는 이후 반란군 진영에 합류하여 교국 귀환 행렬에 끼었다가, 지금은 이시도르 피아제의 비호 아래 숨을 죽이고 있었다.

페기가 심려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마샤는 건강하죠?”

“물론입니다. 전하를 다시 뵙게 될 날만을 고대하고 있지요. 오늘도 따라오겠다는 것을 제가 겨우 말리고 왔습니다.”

이시도르가 너스레를 떨었다.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페기가 몸을 틀어 예후르를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엘피도 공작이에요.”

이시도르의 눈이 크게 뜨였다. 페기 앞에서는 다소 방정맞을 정도로 수선을 떨던 이시도르가 더없이 정중해진 태도로 허리를 굽혔다.

“불의 종, 불의 사자, 시작을 여시는 광명의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께 인사를 올립니다.”

“반갑습니다. 피아제 백작.”

예후르가 선선히 인사를 받았다.

“선대 백작이셨던 그대의 어머니는 일전에 몇 번 뵈었지요. 깊은 친교를 나누진 못했지만 무척이나 호방하셨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어머니에 비해선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보아 주십시오.”

“겸손이 과하군요. 그나저나….”

예후르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대가 페기를 처음 알아본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아, 들으셨군요. 어느 날 꿈에 비둘기가 나타나 저를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로 인도했습니다.”

“비둘기?”

“예. 십중팔구 소명의 천사 예리엘이심이 분명합니다.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죄인을 벌하여 올바른 사도를 구하라.”

이시도르가 경건하게 가슴을 짚으며 천사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예후르는 엷은 미소를 띤 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 예리엘께서.”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알비야 공작이 거짓된 사도란 뜻이겠지요. 여기 이렇듯 죽음에서 돌아오신 올바른 사도께서 계시니까요.”

이시도르가 페기를 돌아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페기는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곤 성 안쪽을 눈짓했다.

“이만 들어가죠. 차라도 곧 도착할 거예요.”

아침 해가 뜨자마자 출발할 거라며 편지로 아주 호언장담을 했던 차라는, 그러나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 갈 즈음에야 겨우 당도했다. 첫째는 성궁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길을 떠나려는 그를 레오폴트가 눈물 바람으로 말린 탓이며, 둘째는 멀미가 다시 도졌기 때문이다.

“주, 죽을 것 같아….”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문을 열고 굴러떨어진 차라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미 한바탕 게워 낸 듯 요슈아가 뚜껑 덮은 양동이를 들고 내렸다. 하도 시달렸는지 그의 안색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땅바닥에 엎어진 차라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페기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잿빛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많이 안 좋니? 의사를 부를까?”

“됐으니까 예후르한테 길 좀 닦아 놓으라고 그래. 자기는 맨날 용 타고 다니니까 덜컹거리는 마차가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지….”

차라가 훌쩍이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페기가 그를 부축해 주었다.

“내가 단단히 일러둘게. 들어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페기는 휘청거리는 차라를 데리고 성내 접견실로 들어갔다.

남쪽 벽마다 커다랗게 창을 뚫어 놓은 접견실은 해안으로 들이치는 파도처럼 초저녁 남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예후르는 멀미로 핼쑥해진 차라에게 장난을 걸었다가 손가락을 물렸는데, 그답지 않은 엄살에 페기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차라에게 찰싹 달라붙어 어떻게든 그 사이에 끼어들려던 요슈아도 있었다.

은근슬쩍 페기에게 접근하려던 그는 차라의 매정한 손길에 내쫓겼는데, 인사라도 시켜 주지 그러냐는 페기의 말에 차라는 속으로 몹시 뜨악했다. 차마 요슈아의 음흉한 속내를 폭로하진 못하여 그저 손사래만 치고 말았지만, 그러자니 요슈아가 아주 대놓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밖으로 쫓겨난 요슈아가 징징거리고, 보다 못한 페기가 친구에게 살갑게 좀 대하라 핀잔하고. 예후르는 분명 차라가 요슈아를 경계하는 이유를 뻔히 알 텐데도 그저 즐겁게 관망할 뿐이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는 꼴이 꼭 병아리 싸움 구경하는 노인네였다.

혼자서 생고생하던 차라는 속으로 분루를 삼켰다. 나쁜 놈. 내가 자길 도와주는 줄도 모르고. 나중에 페기가 예후르한테 화가 나도 절대,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막시모가 이시도르를 데려오며 차라의 고생은 일단락이 났다. 이시도르는 특유의 꽃 같은 친화력으로 차라의 양손을 부여잡고 둥실둥실 한바탕 인사를 나누었다. 거기에 멍하니 휩쓸리다 보니, 어느새 본격적인 회합의 시작이었다.

막시모가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을 쳤다. 모두가 중앙의 탁자에 둘러앉은 가운데, 가장 상석에 앉은 예후르가 양초에 불을 붙였다. 타오르는 불빛 속에 모두의 얼굴이 엄숙하게 가라앉았다.

“여기 모인 분들에 더해 안드레아까지. 페기가 되살아났다는 것을 아는 전부입니다.”

말을 마친 예후르가 페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페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차라와 이시도르를 돌아보았다.

“난 다시 성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내 존재가 알려지면 불어닥칠 후폭풍과 알비야 공작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요.”

“지금까지 전하의 결심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이시도르 피아제는 기꺼이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곁에 서겠습니다.”

이시도르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차라도 조금 민망한 듯이 목을 긁적이며 웅얼거렸다.

“나도 당연히 널 돕긴 할 건데, 난 아직 어려서 원탁에 자리도 없고….”

“내 곁에 있어 주는 것으로 충분해.”

페기는 팔을 뻗어 차라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차라가 쑥스러운 기색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럼 전하의 부활을 공표할 시기를 정해야겠군요. 이에 관해… 실은 두 분 전하께 말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이시도르가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현재 성도의 물밑에서 엘피도 공작 전하에 대한 흉문이 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탐보프의 전쟁터에서 어느 시골 처녀에게 한눈에 반해 목을 매고 계신다는 내용인데….”

“시골 처녀란 말만 빼면 거의 맞는 말 아닌가?”

차라의 순진한 반문에 이시도르가 멋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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