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328)

“내가, 내 입으로 솔란지아를 돕겠다 했어. 이 얼마나 우스운 거짓말이니. 머잖아 솔란지아는 내 배신을 알아차릴 게다. 앞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할지….”

“원래 정치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솔란지아 추기경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아니야. 솔란지아는 이해를 못 해.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어떻게….”

파들파들 떨리던 글리체리아의 손끝이 별안간 갈고리처럼 이시도르의 팔뚝을 파고들었다. 퍼뜩 튕겨져 올라오는 그녀의 눈이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분께선 진정 살아 돌아오신 것이 맞지?”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분을 뵐 수 없는 게야. 어서 그분을 만나 용서를 빌고 싶다. 난, 그래야만 해.”

병적으로 떨리는 그녀의 몸을 익숙하게 달래며 이시도르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곧 만나 뵈실 수 있을 겁니다.”

“곧…?”

“예, 곧이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글리체리아가 조카의 품에 맥없이 고개를 기대었다. 이시도르는 그녀의 퍼진 등을 쓸어 주며 조각달이 걸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죽었던 사도가 돌아올 것이다. 독을 품고 무덤에서 기어 올라온 사도는 이 평온한 세상에 파란을 몰고 올 것이며, 거센 파도로 쓸려 나간 세상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터.

새로운 세상에서 그의 가문은 우뚝 서리라.

이시도르의 입가에 실낱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는 보지 못할,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밤이었다.

같은 밤하늘 아래, 누군가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드는 한 줌 달빛조차 잠든 이를 노리는 귀신의 손처럼 기괴하게 이지러지는 침실. 끙끙거리며 입 안에서만 맴돌던 신음 소리가 문득, 찢어질 듯한 외마디 비명으로 솟구쳤다.

“성하!”

문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들과 고드릭 수도사가 화들짝 침실로 뛰어들었다. 반투명한 천개가 내려진 침대 안에서 레오폴트가 온몸을 뒤틀며 울부짖고 있었다.

“성하, 성하!”

황급히 천개를 걷고 침대로 올라간 고드릭이 자해하려는 레오폴트를 말리며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의원을 부르시오!”

“고드릭, 고드릭… 페기가….”

고드릭의 품에 안겨 흐느끼던 레오폴트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고드릭이 울상을 지었다.

“성하….”

“페기, 그 아이가 꿈에 나타났다… 왜 지켜 주지 않았냐고, 왜 죽도록 내버려 두었냐고… 그 애가 날 원망하고 있다, 고드릭. 그 애가….”

“성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고드릭이 일그러진 얼굴로 훌쩍였다. 어두운 천장을 멀거니 올려다보던 레오폴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내 잘못이지… 딸을 지키지 못한 아비가 무슨 낯으로 이리 살아 있단 말이냐….”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4년이 되어 갑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이러신단 말입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4년… 벌써 4년이 되었구나. 그간 그 춥고 더러운 땅에서 얼마나 고달팠을지….”

멍하니 중얼거리던 레오폴트가 갑자기 윗몸을 벌떡 일으켰다.

“고드릭, 나갈 채비를 하거라.”

“예?”

“내 가면, 내 가면은 어디 있는 게야! 누구든 들어와 내 명을 받들라!”

“성하!”

레오폴트는 만류하는 고드릭의 손길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페기에게로 갈 것이다. 당장 묘지로 갈 것이다.”

“묘, 묘지라면 설마….”

고드릭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더듬거리며 가면을 찾아 쓴 레오폴트가 휘적거리며 침실을 가로질렀다. 손발을 벌벌 떨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고드릭이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발치로 튀어 나가 엎드렸다.

“아,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다음에, 다음에 가시지요!”

“비켜라, 고드릭.”

“성하, 아니 되십니다. 가면 아니 되십니다.”

“당장 비키라는데도!”

“성하, 제발….”

고드릭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노여움에 가득 차 그를 밟고 지나가려던 레오폴트가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불길함에 발을 멈추었다.

“혹… 묘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고드릭은 입을 다물고 서럽게 눈물만 떨구었다. 레오폴트가 시뻘게진 눈으로 닦달했다.

“묘지에 무슨 일이 생겼냐니까! 왜 대답을 못 하느냐!”

“성하… 일단 진정하시고….”

“놔라, 이놈!”

고드릭은 자신을 걷어차려는 레오폴트의 다리에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러고는 문밖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는 하녀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알비야 공작 전하를 모셔 오거라, 어서!”

***

땅을 후끈하게 달구던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인 9월이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먼 북쪽에서 선선한 가을이 불어오니, 농민들은 곧 다가올 추수를 준비하느라 여념 없었다. 탐스럽게 익어 가는 밀밭이 바람결에 금빛으로 출렁였다.

페기를 태운 클레멘스의 마차는 화창한 하늘 아래 한가로운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성도에 가까워지는 것을 대변하듯 길은 하루가 다르게 평탄해졌고, 창밖으로 보이는 행인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 갔다. 확실히 공의회가 코앞으로 다가오긴 했는지, 귀족 가문의 문양을 단 으리으리한 마차도 제법 눈에 띄었다.

“아마도 이번 공의회에서 알비야 공작이 차기 교황으로 발돋움할 것 같으니, 늦게라도 줄을 대러 오는 자들이겠지요.”

안면 있던 귀족과 창 너머로 인사를 나누었던 클레멘스가 그리 말했다.

“이미 도처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공의회를 기념하는 시가행진을 알비야 공작이 주관한다는 것부터가 성하께서 결국에 그녀를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들이지요.”

“성하께서 예후르에게도 행진에 참여하라 명하셨다면서요.”

“그거야 뭐…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거부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쩌겠냐는 듯 클레멘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페기는 시름없이 마차의 벽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 달째 보지 못한 야속한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좀체 가시질 않았다.

마차는 느지막한 오후에 이르러 어느 소담한 시골 저택으로 들었다. 클레멘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려던 페기는 문득 눈앞으로 내밀어지는 고운 손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피아제 백작.”

“잘 다녀오셨습니까, 전하.”

이시도르가 화사한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페기가 넌지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자 온 거예요?”

“예. 오랜만에 성도로 납신다는 클레멘스 추기경 예하를 마중하러 간다며 둘러대고 왔지요.”

페기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녀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챌 만큼의 눈치는 있어도 그 이유는 헛짚은 이시도르가 애먼 구석을 찌르기 시작했다.

“바로 성도로 모시기는 힘들어 근교에 구한 저택인데…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정원을 조금 더 화려하게 꾸밀 걸 그랬나….”

“크흠.”

뒷짐을 지고 색색의 수국을 구경하던 클레멘스가 헛기침으로 눈치를 주었다. 이시도르가 의아한 기색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예하?”

“거, 젊은 백작. 엘피도 공작 전하께는 따로 명 받은 바가 없는가?”

“아, 제가 전하의 소식을 전해 드린다는 것을 깜빡 잊었군요! 안 그래도 전하께서 오늘 아침에 서신을 한 장 보내셨습니다.”

이시도르가 얼른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미처 내밀기도 전에 페기가 서신을 채 갔다.

“전하께서 공의회가 시작될 때까진 돌아오지 못하실 거라고….”

그제야 그녀의 심경을 눈치챈 이시도르가 그답지 않게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짧은 편지를 순식간에 읽어 내린 페기가 말없이 예후르의 필체를 손끝으로 쓸었다.

클레멘스가 다가와 이시도르의 팔뚝을 툭툭 쳤다.

“이유는 무어라 하시던가?”

“딱히 언급하진 않으셨습니다만, 아마도 알비야 공작의 견제를 피하기 위함이시겠지요. 그것 때문에 시가행진에도 불참하시는 거잖습니까… 아니, 그런데 예하. 눈이 왜 한쪽밖에 없으십니까?”

“요새 페아노라에서 유행일세.”

“예?”

금수가 화려하게 놓인 검은 안대를 뽐내듯 턱을 치켜든 클레멘스가 홀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를 따라가려던 이시도르가 멈칫하며 페기를 돌아보았다.

“저기… 전하.”

시무룩하게 편지에 눈을 박고 있던 페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시도르가 애매하게 웃고 있었다.

“저희 이모님… 글리체리아 수도사의 복귀는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솔란지아 추기경이 강력하게 나서 준 덕분에 성궁의 여론도 저희 쪽으로 모이고 있고요. 워낙에 당파와는 거리가 머셨던 분인지라 퀴테리아 추기경도 결국은 수용하게 될 것입니다.”

“다행이네요.”

“실은… 이모님께서 전하를 몹시 뵙고 싶어 하십니다.”

페기는 말이 없었다. 조급해진 이시도르가 말을 덧붙였다.

“전하께서 되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못 미더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하를 직접 뵙고 하루빨리 용서를 빌고자 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일전에 전하의 화형에 동의한 바가 있으시니까요.”

“갑자기 원탁으로 복귀하겠다는 글리체리아 수도사의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분명 수도사의 뒤에 사람을 여럿 붙여 두었을 테니, 재회는 다음으로 미루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전하.”

“글리체리아 수도사는 솔란지아 추기경과 꽤나 친밀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시도르의 입술이 다물렸다.

“덕분에 글리체리아 수도사의 복귀가 수월해졌으나, 솔란지아 추기경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은 무시할 수 없겠지요. 나를 직접 보고 내가 살아 돌아왔단 사실을 확신하면, 대의에 동참하자며 내 부활을 솔란지아 추기경에게 알릴지도 몰라요.”

“저희 이모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절대’ 아닌 사람은 세상에 없어요, 백작.”

페기가 잔잔하게 웃었다. 망설이며 선뜻 말을 잇지 못하던 이시도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하의 뜻, 잘 알겠습니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해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말 하나, 행동 하나 조심해야 할 때라는 것을 망각한 제 불찰입니다.”

이시도르가 반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편안히 쉬십시오.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이시도르는 남아 있던 하인들을 이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에 홀로 남겨진 페기는 판판한 바위를 깔고 앉아 다시 서신을 들여다보았다. 예후르의 성미를 대변하듯 정갈한 필체였다. 오른손을 다치기 전에도 영 글씨가 엉망이었던 페기는 그린 듯한 그의 필체를 늘 부러워했다. 그가 준 편지를 늘어놓고 남몰래 글씨를 따라 써 본 적도 있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페기가 갑자기 입가를 굳혔다. 그럼 뭐 하나. 정작 보고픈 사람이 없는데.

“…괜히 마중 나오지 말란 거였지, 늦으란 소리는 아니었어.”

괜스레 뾰로통한 얼굴로 중얼거린 페기가 심술궂게 편지를 엉망으로 접어 버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다시 펴서 몇 번이고 보았던 편지를 읽고 또 읽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