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8/328)

“현존하는 원탁 추기경들 중 가장 오랫동안 원탁을 지키셨던 분께서 수년 전부터 꾸준하게 은퇴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나를 비롯한 동료 추기경들이 지금껏 만류해 왔으나, 불과 어제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그대의 말씀을 들으니 앞서 언급했던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명언이 떠오르더군요.”

“…….”

“클레멘스 추기경. 나는 이만 그대를 보내 드리려 합니다. 교회에는 촉망받는 젊은이들이 많으니 의지가 꺾인 그대의 빈자리라면 능히 채울 수 있을 겁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께서도 부디 클레멘스 추기경의 지난 과오를 모두 잊고 평화로운 여생을 바라 주십시오. 천계율에서 이르길, 증오를 사랑의 양분으로 삼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 말하는 보나벤투라의 두 눈에는 채 숨겨지지 않는 증오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클레멘스가 경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 보나벤투라. 원탁의 동료를 위하는 그대의 마음, 참으로 눈물겹습니다만 아쉽게도 은퇴를 청하던 나의 발언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철회해야 할 것 같군요.”

잠잠하던 보나벤투라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클레멘스는 경건하게 가슴팍을 짚으며 두 눈을 감았다.

“어젯밤 꿈에서 천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장중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되, 얼뜨기들로 가득한 원탁을 지켜 무너진 교회의 기강을 다시 세우라 하셨지요. 그대의 말씀대로 나는 오랜 격무에 지쳐 있었으나, 성직자 된 몸으로 어찌 천사의 계시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되는 소릴…!”

욱한 보나벤투라가 가까스로 성질을 죽이고 물었다.

“클레멘스. 나이가 들면 꿈에서도 헛것을 보고 듣는다고 합니다. 천사께서 어찌 다섯의 사도들을 놔두고 하필 그대에게 계시를 내리셨겠습니까?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니 이만 마음을 잡으세요.”

“설령 헛것을 들었다 한들, 그대가 말했던 의지가 다시 내 속에서 화르르 타오르고 있는 것을요?”

“그러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부터 집어치우란 말입니다!”

꾸벅거리며 졸던 의장이 흠칫 깨어나 보나벤투라를 쏘아보았다. 보나벤투라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그대의 의지가 다시 세워졌다 해도, 지난 세월 그대의 불성실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클레멘스, 그대는 은퇴 의사를 밝히기 시작한 이후 지병을 핑계로 원탁회의에 불참하는 등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탄핵 사유가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보나벤투라의 검은 눈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실실거리며 기꺼이 그 시선을 마주하던 클레멘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그런데 보나벤투라, 오르코는 잘 지냅니까?”

보나벤투라가 얼어붙었다.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아무런 말도 못 하자, 잠자코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했다.

초조하게 다리를 떨던 솔란지아가 최대한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보나벤투라!”

“아니, 어찌 그리 질겁하십니까? 그대가 아들처럼 아끼는 아이가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본 지가 오래되어 안부를 묻는 것인데 그게 그리 잘못된 일입니까?”

클레멘스가 샐샐거리며 얄미운 소리를 일삼았다. 무시무시하게 그를 흘긴 솔란지아가 보나벤투라를 대신해 쏘아붙였다.

“클레멘스! 때와 장소에 맞는 말이란 게 있는 겁니다! 제발 좀 예의를 지키세요!”

“보시다시피 때와 장소에 맞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느른하게 턱을 괸 클레멘스의 시선이 솔란지아에게 넌지시 닿았다. 솔란지아는 멈칫거리며 말문을 닫았다. 스산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다시 묻겠습니다, 보나벤투라.”

“…….”

“오르코는 잘 지냅니까?”

사위는 고요했다. 식은땀으로 흥건해진 보나벤투라의 넓적한 얼굴에 모든 이목이 쏠려 있었다.

백지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연신 목울대만 꿈틀거리던 보나벤투라가 가까스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예기치 않게 급소가 찔려 숨통이 꽉 옥죄어 왔다. 그는 깜깜해진 눈앞을 견디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보나벤투라가 휘청거리며 단상을 내려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클레멘스가 픽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술렁거리는 좌중을 돌아본 의장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오늘의 공의회를 이만 마치겠습니다.”

인파가 줄줄이 빠져나간 에페소스 별궁은 금세 텅 비었다.

보좌관의 부축을 받아 겨우 문턱을 넘는 보나벤투라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본 솔란지아가 냉소적으로 코웃음 쳤다.

“그냥 세게 나가지 그러셨습니까. 보나벤투라 하나를 희생시켜서 클레멘스를 제거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일 텐데요.”

“보나벤투라 추기경은 오래전부터 청백 운동을 지지해 주셨던 은인 같은 분입니다. 고작 이런 일로 희생시킬 순 없지요.”

퀴테리아가 태연하게 내뱉는 말에 솔란지아는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잘도.

“퀴테리아,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만 클레멘스는 우습게 볼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껏 그대가 원탁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이 참으로 한심했단 건 나도 인정하는 바입니다만, 그것이 클레멘스의 전부라면 어찌 지난 십수 년간 교황 성하와 대적할 수 있었겠습니까?”

“클레멘스 추기경의 역량이라면 나도 잘 압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퀴테리아의 차분한 미소에도 솔란지아는 좀체 근심을 놓지 못했다.

최근 클레멘스와 엘피도 공작 사이에서 수상쩍은 동정이 감지되었다. 오랜 시간 원수지간이었던 둘의 관계를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일축하긴 했지만, 만일 정말로 둘이 손을 잡은 것이라면 대비를 해야만 했다.

“클레멘스가 저리 버티고 나오니 페아노라의 대주교 자리에 그대의 사람을 앉히기는 영 어렵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도미시오 추기경으로 표적을 바꾸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존재감이 옅긴 하나 엄연히 클레멘스 추기경의 사람입니다. 더욱이 누미디아는 라발의 수도로서 상징적인 의미가 크니 선뜻 내어 주려 하지 않겠지요.”

“그럼 이대로 포기할 겁니까?”

솔란지아가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퀴테리아는 여러 권의 경전을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란지아보다 머리 하나는 높은 곳에서 짙푸른 눈이 흘끗 내려왔다.

“이번 공의회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는 경비대 교체, 단 하나입니다. 그것만 통과된다면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차기 교황으로 선포되신 것이나 다름없겠지요. 나와 알비야 공작 전하, 보나벤투라 추기경 그리고 람베르토 추기경과 콘체사 추기경을 비롯한 그대 세력의 세 표를 합산하면 원탁의 과반을 점하게 되니 앞으로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글리체리아 추기경도 계십니다.”

기세등등한 솔란지아의 태도에 퀴테리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자신하십니까?”

“물론.”

퀴테리아는 머릿속을 맴돌던 반박의 말들을 모두 접었다. 이미 원탁의 과반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글리체리아의 한 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에페소스 별궁 앞에서 헤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퀴테리아의 등 뒤로 야손을 비롯한 청백회의 주요 간부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인적 드문 회랑을 걸으며 침묵을 고수하던 퀴테리아가 문득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

“경비대 교체 안건을 뒷받침할 근거를 더욱 보충하십시오. 더 이상 누구도 허점을 지적할 수 없도록.”

“예.”

“그리고 야손.”

퀴테리아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대는 엘피도 공작과 클레멘스 추기경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십시오.”

“혹 짐작하는 바라도 있으신 겁니까?”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만….”

겹겹이 쌓인 성벽 너머를 가늠하듯 검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예감이 드는군요.”

***

“예후르!”

피아제 백작저로 들기 무섭게 그의 품으로 페기가 달려 들었다. 잠시 놀란 기색이던 예후르가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품어 주었다.

페기는 그렇게 한참을 안겨 있고서야 겨우 한 발짝 떨어졌다. 짐짓 앙다문 입술이 붉었다. 예후르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잘 지냈니?”

페기는 말없이 그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드러난 살갗에 생채기 하나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바짝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조금 풀렸다. 그녀는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그의 손끝을 쥐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사고를 좀 치느라.”

괜스레 다른 곳을 보고 있는 페기에게로 예후르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칭찬 안 해 줄 거야?”

“응?”

“꽤 요란하게 등장하고 온 건데.”

코앞으로 다가온 숨 막히게 잘생긴 얼굴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페기가 흠칫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멈칫멈칫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물끄러미 페기를 바라보던 예후르가 어색하게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그녀의 손을 흘끗 확인했다. 그의 입가에 애매한 미소가 떠올랐다.

“페기. 나는 어린애가 아닌데.”

페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수수방관하고 있던 클레멘스가 장식장에 놓여 있던 사람 모양의 조각상 두 개를 들어 보란 듯이 아주 진하게 얼굴을 맞붙였다. 페기의 뺨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정말!”

아프지 않게 예후르의 등짝을 때린 페기가 ‘내가 무슨 소릴 했는데?’, ‘응? 페기, 내가 무슨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며 얄밉게 입을 놀리는 그를 억지로 들여보냈다. 그러고는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클레멘스를 홱 돌아보았다.

“추기경이란 사람이 못하는 짓이 없어요!”

“원래 사람에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법이랍니다.”

그러면서 클레멘스는 아예 조각상을 겹쳐 부끄러운 짓을 하는 시늉을 했다. 뒤로 넘어갈 것처럼 기함한 페기가 황급히 조각상을 뺏어 들었다.

“서, 성직자가 되어서 어떻게 이런 흉측한 짓을…! 순결의 의무도 잊은 거예요?!”

“오, 저의 수호천사이신 판결의 천사 발레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저는 이 나이 먹도록 순결한 몸입니다. 전하께서 어떠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도 당연히 순결한 몸이죠!”

페기가 욱하여 내지른 소리에 클레멘스가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곤 예후르가 들어간 안쪽을 곁눈질하며 깊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아… 그것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

“이거, 앞으로 엘피도 공작 전하께 잘해 드려야겠습니다. 참고 계시는 것이 많을 텐데 저라도 속 썩이지 말아야지요.”

페기가 또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클레멘스가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전하의 벌건 얼굴을 뵈니 갑자기 토마토가 먹고 싶어지는군요. 안 그래도 아까 공의회에서 맞을 뻔했던 토마토가 어찌나 먹음직스러워 보이던지. 체통을 지키라는 엘피도 공작 전하의 엄명만 아니었다면 터진 조각이라도 주워 먹었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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